성경신학자료

[스크랩] 김성주목사의 언약과 하나님나라-도입

baromi 2006. 4. 24. 09:24

Ⅰ. 도입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서(啓示書)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그 마음에 품으신 계획과 작정을 세상역사 가운데 펼쳐 보이신 책이란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에 40여명의 저자들을 특별히 부르셔서 무려 1500∼1600여 년에 걸쳐 하나님의 계시를 인간의 언어로 쓰게 하였습니다. 이 때 이 사역을 주도적으로 담당하신 분이 하나님의 영이시며, 주님의 영이기도 한 제삼위 하나님이신 성령님이십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3:16∼17)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벧후 1:21)

   이는 성령께서 학생들에게 받아쓰기를 시키듯 저자들에게 기계적으로 간섭하여 기록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저자들의 전 인격을 유기적(有機的)으로 사용하셔서 자원하는 심정으로 쓰게 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즉 자신들이 지금 하나님에 의해 성경을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을 미쳐 인식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성령의 내적 간섭과 감동을 입어 자신의 생각과 경험과 지식을 발동시켜 자연스럽게 주어진 상황과 환경 속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자신의 언어로 기록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의 배후에서 성령께서 적극적으로 개입해 전체의 과정을 주도적으로 간섭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성령님을 진리의 영(요 14:16∼17)이라고 소개하십니다. 이는 성령님이 성경의 원저자가 되신다는 의미인 동시에 진리와 함께 일하셔서 성경을 친히 사람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시는 분임을 시사합니다.   

   이런 이유로 사람들은 하나님의 계시서인 성경이 없으면 하나님을 바르게 알 수도, 믿을 수도, 섬길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전인적(全人的)으로 타락하고 부패해서 더 이상 스스로 하나님을 더듬어 알 수도, 찾을 수도, 나아가 자력으로 섬기거나 무슨 선한 일을 행할 수도 없는 영적 사망자와 영적 파산자로 정의(定義)하고 있기 때문(창 3:8∼10; 마 8:21∼22; 롬 3:10∼12; 엡 2:1)입니다. 처음 창조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의 인격과 본성은 죄로 인해 타락하고 오염된 나머지 하나님과의 교제와 예배의 통로인 영적 기능이 마비돼 정상적인 활동이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을 향한 종교심의 발동이 방향감각을 잃게 된 바,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어 섬기게 된 것”(롬 1:21∼23)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하나님의 계시서로서 성경을 주신 이유 중 하나는 이렇게 타락한 인간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나서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섬기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말씀중심의 신앙 또는 신학적으로 계시의존사색신앙(啓示依存思索信仰)으로 나타나야 하는 이유가 이에 있습니다(딤후 3:16∼17; 행 17:11). 왜냐하면, 기독교신앙은 처음부터 성경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계시를 철저히 의존(依存)하는 것으로서 성립됩니다. 이렇게 성경계시를 생명과 신앙으로 고백하고 이를 삶의 도리로 붙잡고 살아가는 것을 통해 비로소 올바른 성경적 신앙에 접촉됩니다. 성경을 주신 일차적 목적이 이에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계시에 무지하거나 결핍되면 그것에 비례해 자신의 종교심을 발동시켜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으로 나타나게 되는 바, 곧 자의적(自意的) 숭배신앙에 빠져듭니다. 자의적 숭배신앙은 신앙의 근거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곧 자신의 내적 종교심의 발로로부터 나와지는 것을 말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본래적 계시에서 이탈 될 수 있는 위험성이 상존합니다. 인본주의를 지향하는 신앙의 중심에는 항상 인간의 행복과 안녕이라는 현세적 복과 성공의 개념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이 일의 성취를 위한 수종자로 전락하게 마련입니다. 인본주의적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이 이렇습니다. 이런 자의적 숭배신앙의 모습은 인간의 본성이 죄로 인해 타락하므로 항상 신앙의 내용과 방향성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창 3:5; 왕상 12:25∼33; 사 1:10∼14; 마 16:23∼24)으로 나타납니다. 제자도의 첫걸음이 자기 부인으로부터 출발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죄의 지배를 받는 옛사람의 자아는 항상 그 생각이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므로 하나님의 사역을 훼방한다는 것(마 16:21∼24; 민 13:31∼33)이 성경의 지적입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언제든지 당사자들을 사단의 미혹에 빠지게 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됩니다. 에덴에서의 처음 아담과 하와의 범죄의 배경이 그랬습니다. 주님의 지상적 사역의 절정인 예루살렘의 고난을 막무가내로 만류했었던 베드로의 경우가 그랬습니다. 이렇게 인본주의적 신앙의 배후에는 항상 사단의 역사와 시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성경은 늘 경계해서 지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겉으로는 여전히 기독교적 분위기 속에 머물러 있으므로 자신이 인본주의적 유사 기독교 신앙관에 붙들려 있음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나아가 자기 기만적(欺瞞的) 신앙에 깊이 빠져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신앙에 정상적으로 참여하는 것으로 착각하게 됩니다. 더욱 한 시대에 절대 다수가 이런 신앙관을 공유하여 제도권을 이룰 때, 막강한 세력을 발휘하여 그들의 신앙이 당대의 객관적 진리와 가치를 대변하게 됩니다. 성경에 비추어 볼 때는 여전히 왜곡된 진리와 가치로 판정됨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교회역사 속에서 신약시대에 유대교와 중세 구교(舊敎)의 실체가 이랬습니다. 거기에도 하나님께 대한 열심은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용과 성격과 방향성에 있어서 지식 곧 하나님의 말씀의 체계인 계시를 의존해서 좇는 것이 아닌, 자신의 종교적 의를 힘써 추구해 나가는 것임으로 불복종과 불법으로 정죄 당했던 것입니다(마 7:21∼23; 롬 10:2∼3). 이런 이유로 교회의 세속화와 신앙의 타락은 언제나 말씀에 대한 부족한 이해와 왜곡된 해석에 기인된 것이 교회역사의 증언입니다.

   오늘날이라고 예외일 수 없습니다. 인간의 범죄이래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과의 치열한 접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하심으로 결정적인 구속사의 승패가 가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재림(再臨) 때까지는 아직도 사단의 잔존세력이 여전히 활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개혁과 신앙의 갱신은 곧 말씀의 성경적 회복을 통해서만이 가능할 뿐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힘써 공부하면서 주님의 음성을 바르게 듣기를 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바른 해명(解明)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분별하여 교회와 신앙을 동시적으로 바르게 세워나갈 수 있음을 확신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 6:3).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 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요삼 4).

출처 : 한우리성경강해
글쓴이 : 한우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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