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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전성기(AD 1200-1300)의 기독교 사상 (2)

baromi 2005. 3. 10. 14:20

먼저 글이 길어서 대충 요약을 어느 정도 하고 글을 읽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어거스틴 전통 토마스아퀴나스 전통

플라톤

주의주의(믿음을 중심으로)

신율적

프란시스코

안셀롬

아리스토텔레스

주지주의(이성을 중심으로)

타율적

도미니크회

알버크 아퀴나스

 

 

 

 

b) 토마스 아퀴너스1225-1274)

 

     -주지주의를 기본전제로 주지주의를 더욱 확고히 발전시키고자 했던 자.

     -경건한 성품, 뛰어난 머리를 타고 났으며, 대 스승을 만남?

 

토마스 아퀴너스는 도미니크파의 가장 뛰어난 스승일 뿐만 아니라 기독교 사상사 전반을 걸쳐 가장 뛰어난 신학자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위대한 업적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그가 고대 철학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기독교화"했다는 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약 20년에 걸쳐 상상하기 힘들 만큼 방대한 저술을 하였는데, 그의 저술들은 양에서 뿐만 아니라 질에서까지 기적적인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천부적인 지적능력과 영적 경건성은 그에게 "천사적 박사"라는 칭호를 안겨 주었다.

 

그는 파리대학에서 "대 스승"(the Great)이라 불리운 알버트 밑에서 공부하였다. 이당시 파리대학에서는, 어거스틴주의와 플라톤주의가 절정을 이루고 있던 옥스포드와는 달리,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점차적으로 수용하고 있었다. 보나벤투라가 나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그의 형이상학이 갖고 있는 오류 때문에 기독교 신앙에 위험하다는 경종을 울리고 있었지만, "대 스승"알버트는 보나벤투라와 같은 신학자들과는 달리 철학과 자연과학에 관심을 기울렸으며, 그의 주된 관심은 그가 가장 위대한 철학자로 여긴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든 저서를 라틴어로 번역하고 알리는데 있었다. 13세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 유행했던 것은 그의 영향이라고 보아야 한다. 박학하고 편견없는 정신의 소유자인 스승의 해박한 지식을 이어 받아서, 천부적인 사변능력과 체계화 재능으로 정리한 것이 곧 토마스 아퀴너스의 눈부신 학문적 성과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신학대전집을 읽으면 현재 신학의 발전을 실감)

 

토마스 아퀴너스의 저작은 이루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방대한데, 주로 아리스토텔레스와 보에티우스의 저작들에 대한 주해들과 <존재와 본질에 관하여, on Bing and Essence>, <자연원리에 관하여, on the Principles of Nature> 같은 철학적 저술 등이 있으며, 신학적으로 <이단 총론, Summa contra gentiles>과 <신학대전, Summa theologia>이 가장 중요하다.

 

 

 

토마스 아퀴너스의 주요사상

 

토마스 아퀴너스의 사상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것은 그가 중세철학에 끼친 막대한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또 그가 신학을 이성에 의해 논증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겼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철학자라기보다 신학자였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다.

토마스는 "....동일한 사실들이 철학이라는 학문에 의해서는 자연적인 이성의 빛 아래서 취급되고, 신학에서는 계시의 빛 아래서 취급되는 일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라고 하며, 그의 스승인 알버트를 따라 철학과 신학을 엄밀히 구분하였다. 그렇지만 그의 철학은 어디까지나 신학과의 관계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토마스 아퀴너스의 연구가인 질송이 말했듯, 토마스는 어떻게 철학의 본성을 손상하지 않고 신학에 도입하느냐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어떻게 신학의 본성을 손상하지 않고 철학을 신학에 도입하느냐를 고심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도입하여 기독교적 진리를 드러내려고 힘썼던 것이다.

 

가) 철학적 사상

토마스 아퀴너스의 형이상학은 구체적으로 실재론적이며 다분히 아리스토텔레스적이다. 그의 형이상학은 '존재를 존재물로서 연구'(Sein and Seien)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적 명제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그는 실재가 연역될 수 있는 제1원리를 전제하지 않고, 오히려 실재하는 세계에서 출발하여 그것의 존재가 무엇인가, 어떻게 존재하는가 등등을 탐구하여 궁극적으로는 <자존하는 존재자체, ipsum esse subsistens>에 집중했다. 우리는 여기에서 그의 철학사상을 모두 살펴볼 수 없으므로 토마스가 사용한 일련의 철학적 개념들을 살펴 봄으로써 신학과 그의 형이상학을 개괄적으로나마 고찰해보기로 한다.

 

존재 자체를 존재로서 연구---->

플라톤적

존재 자체를 존재물로서 연구---->

아리스토텔레스적

 

 

실체(substance)와 속성(accident): 실체는 다른 어떤 것에 의존하지 않는 존재이다. 반면에 속성은 실체에 의존하여 존재한다. 예컨데 봄에 창가를 내다보면 푸른 잎의 너도밤나무를 볼 수 있다고 하자. 이때 너도밤나무는 하나의 실체이고 '푸르다'는 속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푸르다'는 속성은 필수적인 것이 아니고 우연적인 것이어서, 가을이 되면 다시 갈색으로 변한다.

 

질료(matter)와 형상(form): 모든 물질적 실체는 질료와 형상의 물형론적(hylomorphic) 합성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형상이란 질료를 규정하여 구체적이며 개별적인 실체가 되게 하는 어떤 것이다. 질료란 형상에 의해 규정되어 실체를 이루는 그 어떤 것인데, 형상에 의해 규정되기 이전의 질료를 제1질료(Prim matter)라고 한다. 제1질료란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했듯 "어떤 무엇도 아니며 어떤 분량도 성질도 지니지 않으며, 존재를 규정하는 그 어떤 것도 아니다" 그렇기에 제1질료는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없으며, 시간적으로 형상에 앞서는 것이 아니라 형상과 함께 창조되는 것이다.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형상합성설(質料形相合成設)을 받아드려 제1질료를 '순수 가능태'로, 제1형상을 '순수 현실태'로 규정했다.

 

가능태(potency)와 현실태(act): 존재할 수 있는 것으로서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은 가능태로 존재하고, 이미 존재하는 것은 모두 현실태로 존재한다. 그러나 이 구별은 물질적인 존재 뿐만이 아니라 모든 유한한 존재에 다 같이 적용된다.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라 이러한 구벼로써 모든 변화와 운동을 설명했다. 예컨데 한 어린아이는 어린아이라는 현실태와 어른이라는 가능태를 갖고 있는 것이며, 이 책을 저쪽으로 옮길 수 있는 것은 책이 이 장소에는 현실태로 있으며 저 장소에는 가능태로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본질(essence)과 실존(existence): 실존(esse)이란 모든 실체가 그것으로 인하여 하나의 존재자가 되는 그것이다. 본질(quo est)이란 어떤 것을 그것이게 하는 모든 것이다. 따라서 물질적 존재자의 본질은 질료와 형상이지만, 비물질적인 것의 본질은 형상뿐이다. 그러나 물질적인 것이든 비물질적인 것이든 현실적 존재자이게끔 하는 것은 실존이다. 실존과 본질의 관계는 흡사 현실태와 가능태의 관계와 같다. 따라서 모든 실체는 질료와 형상이 합성된 결과이지만 또한 실존과 본질이 합성된 형태인 것이다. 토마스는 실존을 존재의 원인인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밖에서 오는 것"(adveniens extra)라고 부른다. 실존은 현실태이며, 실존에 의해서 현실화되는 가능태와는 다르다. 절대적 완전이란 가능태가 아닌 순수 현실태이어야 하므로, 오직 하나님 한분만이 순수 현실태 곧 존재자체인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본질은 존재이며, 오직 하나님에게만이 본질과 실존이 동일하다는 것이다.

 

 

 

나) 신학적 사상

 

하나님의 존재 증명

 

토마스 아퀴너스는 그의 대작 신학대전에서 5가지의 논증을 신의 존재증명을 위한 방법으로 제시했다. 그는 신이라는 개념 자체에서 신의 존재를 연역해내는 안셀름의 방법을 반대하고, "감각에 없는 것은 지성에도 없다"(Nihil in intellectura quod non prius fuerit in sensu)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원칙을 따라 육체적 감각으로 알 수 있는 사실들로부터 출발하여 신의 존재를 파악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아퀴너스의 5가지 논증은 모두

(a) 세계의 일반적 특성(general feature)을 밝힌 다음, 이것으로부터

(b) 신이라는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가 없다면, 이러한 일반적 특성을 가진 세계가 존재할 수 없다는 식으로 전개하는데, 그 근저에는 모두 "무로부터는 아무것도 스스로 나올 수 없다"(ex nihilo nihil fit)는 사상이 깔려 있다.

 

첫번째 논증은 운동(move)으로부터 第一(제일)운동자(primum movens)인 신을 증명한다.

           이 세상에는 움직이는(또는 변화하는) 사물 곧 가능태에서 현실태로 이행하는 것들이 있다. 그러나 어느 것도 가능태에서 현실태로 독자적으로는 갈 수 없고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만이 가능하다. 예컨데 나무가 타려면 불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이유에서 모든 운동(변화)의 근원이 되는 첫번째 존재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첫번째 존재는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도 움직이지(변화하지) 않아야 하기에, 이는 최초의 부동의 동자(prime unmoved mover)이며, 이가 곧 신이라는 것이다.

 

두번째 논증은 능동인(能動因, causa efficiens)으로부터 第一능동인(Prima causa efficiens)인 신을 증명한다. 즉 '원인으로부터 결과가 초래된다'(ex ratioe causae effcientis)는 인과율에 근거한다. 이 세상 모든 만물은 그 원인이 있으며, 그 어느 것도 그 스스로 자신에게 원인이 되지는 못한다. 때문에 원인의 차례가 존재하는데, 이러한 차례에는 꼭 최초의 원인이 있어야 한다. 이 최초의 원인이 없으면 아무 것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첫번째 원인이 곧 신이라는 것이다.

"신은 존재한다. 존재는 존재한다."

 

세번째 논증은 가능과 필연(ex possibili et necessario)으로부터 모든 우연적인 존재들의 근거로서 필연적(논리적인 언어-1+2=3, 1+1=2) 존재인 신을 증명한다. 흔히 우주론적 논증(宇宙論的 論證, the cosmological argument)이라 불리우는 이 논증을 정리해보면 대강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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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없는 것(non esse)은 어떤 잇는 것(esse)이 아니면 생성될 수 없다.

  2. 만일 세상의 모든 것이 생성 소멸하는 우연적 존재뿐이라면 세상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때가 있었을 것이며, 지금까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3. 세상에는 만유(萬有)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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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라서 세계에는 필연적 존재가 있고 이를 신이라 한다.

 

네번째 논증은 사물의 성질이나 가치의 단계(ex gradibus)로부터 최고의 단계로서의 신을 증명한다. 이 세상에는 각종 단계의 사물이나 성질들이 있는데, 그것은 가장 높은 차원에 근접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장 높은 차원의 완전성을 소유하고 있는 어떤 존재가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곧 신이라는 것이다.

 

다섯번째 논증은 사물의 목적성으로부터 설계자 또는 통치자(ex gubernatione rerum)로서 신을 논증하고 있다. 이 세상 만물은 알맞는 목적을 지향하고 움직이고 있는데 이러한 움직임은 스스로 시작한 것도 아니고 우연한 것도 아니다. 이 목적으로 이끌어 주는 존재가 곧 신이라는 것이다.

    흔히 목적론적 논증(目的論的 論證, the teleological arqument)이라고 불리우는 이 논증은 훗날 "페일리(William Faley, 1743-1805)의 논증"이라는 이름으로 더욱 유명해졌다. 페일리가 그의 저서 <자연신학, Natural Theology, 1802>에서 다시 제기했는데, 그 명쾌성 때문에 오늘날 보수 신학자들까지 즐겨 인용하고 있다. 때문에 이 논증을 조금 자세히 살펴 본다면, 이 논증의 핵심을 우리는 페일리의 '時計(시계)에 관한 유추(analogy)'에서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우리가 사막에서 시계를 발견했다면, 우리는 그것이 자연에 의해 생겼다고 생각할 수 없고 어느 지적 심성(an intelligent mind)에 의해 어떤 목적을 갖고 생겼다고 생각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주도 그 복잡성과 정밀성을 보건데 그의 설계자가 어떤 목적을 갖고 설계했다고 보아야 옳다는 것이며, 이 설계자를 신이라고 한다.

--- 페일리는 이 논증을 학립시키기 위해 그 당시 동원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과학지식을 동원한다. 예를 들면 새의 날개, 고기의 지느러므... 등등이 얼마나 계획적으로 만들어 졌느냐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의 현대적 표현을 '오존층의 두께가 어쩌면 생물의 보호에 그리도 접학한지, 이는 오직 신의 설계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브라운의 주장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페일리의 논증을 정리해보면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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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시계는 우연의 산물이 아니고, 설계자에 의해 만들어 졌다.

  2. 세계는 시계와 유사(analogy)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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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세계에는 설계자가 있다. 그가 신이다.

---이 논증에 대한 비판은 이 논증이 페일리에 의해 유명해지기 23년 전에 이미 데이비드 흄의 <자연종교에 관한 대화 1779)에서 다루어졌다. 흄은 에피큐레스(50-130)의 가설-"수많은 원소들이 제 멋대로 움직이며 가능한 모든 결합을 이루다가 어느 때 우연히 안정된 결합을 이루어 고정되어 질서 있는 세계(an orderly cosmos)가 되었다"-을 들어 어느 것이 질서를 갖고 있다해서 반드시 그것이 설계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페일리가 제시한 동식물에 관한 설계설에 대한 반론은 그 후 다윈의 진화론에 의해 보다 구체적으로 이루어졌다. 왜냐하면 진화론의 適者生存(적자생존)에 의한 자연도태는 페일리가 제시한 동식물에 관한 모든 예들-새의 날개, 물고기의 지느러미 등등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설사 세계의 설계자가 있다하더라도 그가 꼭 하나님(기독교의 신)이라는 보장이 없다라는 비난도 있다. 때문에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논증이 하나님의 존재증명으로 적합하다고 믿지 않는다. 논리학적으로도 위의 다른 논증들이 연역법(Deduction)에 의해 이루어진데 반해, 이 논증은 유추법(Analohy Inference)에 의해 이루어졌다. 유추법은 전제들이 참인 경우에도 결론이 꼭 참이라는 보장이 없다. 이 증명의 명석성과 설득성을 높히 평가한 칸트도 바로 이점에서 이 증명의 논증적 성격을 인정하지 않았다.----

 

토마스 아퀴너스의 5가지 논증은 그의 독창적 산물은 아니다. 그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마이모니데스 그리고 그의 스승 알버트 등으로 부터 영향을 받아 그것을 정리했다. 그러나 토마스는 이것으로하여 신의 존재에 대한 종교적 사고들을 철학적으로 정리했다고 생각했다.

이것을 요약하자면, 토마스 아퀴너스의 5가지 논증은 모두 첫째, 감각기관의 경험과 둘째, 인과율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것이 곧 아리스토텔레스적 방법인 것이다.

 

토마스 자신은 5가지 논증 가운데 첫번째 논증을 <보다 명확한 길>이라고 부르며 선호하였지만, 오늘날 학자들은 세번째 논증 곧 우주론적 논증을 보다 타당시 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논증은 모든 존재물들은 자신의 존재를 필연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그 어떤 것으로부터 유출되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다른 모든 증명들의 전제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논증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비판이 있다. 예를 들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때'를 어떻게 전제할 수 있느냐?라는 비난이 있다. 그러나 철학적으로 더욱 강력한 비난으로 J.J.C. Smart의 "필연적 존재"라는 개념에 대한 공격이다. 즉 '필연적'이라는 말은 '논리적'인 어휘로서 '존재론적'인 용어가 아니기에 '존재물(thing)'에 사용하는 것은 언어의 오용(misuse of language)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만일 토마스 아퀴너스의 신에 대한 개념을 이해한다면, 이 비난이 부당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토마스 아퀴너스가 의미하는 신은 그 어떤 존재물이 아니고 '존재자체(Sein an sich, Being itself)'이기 때문이다. '존재자체'의 '존재적 필연성'은 동어반복적으로 타당하며, 이것을 아퀴너스는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명제는 주어와 술어가 같기에 자명하다... 사실 하나님은 하나의 존재물이 아니며 존재자체이기에, 존재물에는 사용 불가능한 논리적 언어인 '필연적'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퀴나스가 시도했던 우주론적 논증은 동어반복적 명제의 논리적 타당성(Validity)을 증명하려는 것이 아니고, 이 명제의 건전성(Soundness) 즉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사실들을 근거로 "신이 실제적으로 존재한다"는 명제를 증명하려 했던 것이다.

우리가 세번째 논증에 약간의 해석을 더한다면 그것은 아래와 같이 정리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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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은 모든 존재물들의 근거이다.

                                    모든 존재물은 근거없이 존재할 수 없다.

                                    존재물들의 실존은 자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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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신의 실존은 자명하다.

 

 

신의 본질

 

신의 존재가 일단 증명이 되었다면, 신의 본질에 대한 탐구로 들어가는 것이 당연하다 하겠다. 토마스 아퀴너스의 5가지 논증에도 이미 신의 존재 이외의 신의 본질에 관한 어떤 개념이 몇가지 들어 있다. 즉, 첫 번째 논증에서의 第一운동자로서의 신은 '불변성'과 '영원성'이라는 개념을 이미 내포하고 있으며, 두번째 논증에서 第一능동인으로서의 신은 '창조성'을 이미 갖고 있으며, 세번째 논증에서 필연적 존재라고 하는 것은 신의 '순수 현실태'라는 의미이다. 또 네번째 논증에서 최고의 진리와 선으로서의 신은 이미 '완전성'이라는 개념을 내포하고 있으며, 다섯번째 논증에서 우주의 조정자 또는 설계자로서의 신은 사물을 정향시키는 '최고의 지성'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말들을 정리해보면 '하나님은 불변하시고, 영원하시며, 창조주이시고, 순수 현실태이시며, 완전하시고, 최고의 지성이시다'라고 요약된다.

 

그러나 이것으로 해서 신의 본질을 모두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 이성과 신의 본질의 무한성에는 사실상 깊은 심연이 놓여있다. 토마스 아퀴너스는 이것을 잘 간파하여 "신의 본질은 그것에 대한 인간의 지성이 지니는 모든 형상을 초월해 있다"(이단총론)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신의 본질을 전혀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토마스는 거짓-디오니시우스가 행한 두 가지의 방법을 따르고 여기에 유비적(analogcal) 방법을 덧붙혀 신의 본질을 설명한다.

 

첫째, 부정적 방법(via negativa): 하나님의 본질이 아닌 것을 인식해 나가는 방법으로, 토마스는 그의 <이단 총론>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무엇인지를 아는 방법으로는 하나님의 본질을 이해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무엇이 아닌지를 말하는 방법으로 하나님에 대한 어떤 개념을 가진다"고 말하였다. 토마스는 여기에 더욱 추가하여 흔히 논리적인 정의법으로 인정된 "유(類)와 종차(種差)에 의한 정의법"도 하나님에게는 쓸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왜냐하면 이 방법은 우선 그 실체에 해당되는 유를 지정하고, 그 다음에 그 실체의 고유한 본질 곧 종차를 추가하여 정의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유를 초월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그 어떤 유에도 해당시킬 수 없으며, 종차에 의해서 다른 존재자들로부터 구분시킬 수도 없다. 그러나 어떤 술어들이 하나님에 대해 부정되는 경우 그것은 그 술어의 완전성이 하나님에게 결핍되어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은 풍요함에 있어서 무한하시기에 그 술어가 지니고 있는 불완전성을 초월해 계신다는 뜻이다. 즉 "하나님은 악하지 않다"라고 할 경우 악이란 선의 결핍이기에 하나님께서는 이런 종류의 결핍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며, "하나님은 유형적이 아니다"라고 할 경우 하나님은 신체와 같은 유형적인 것이 갖는 불완전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토마스는 <이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제거되는 것은 하나님의 결함 때문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것을 초월해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스스로 자기 자신이 변화에 근거가 될 수 없다.

"어떤 다른 운동자가 있어야 한다"
신은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지 않고 다른 것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신의 창조성

 

하나님의 본질을 제일 잘 알 수 있는 방법: 성경은 기본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성으로까지도 접근하고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이다"라는 문장 자체가 문제가 있다.

"하나님은 기독교의 신이다. --> 하나님은 신이다.--> 하나님은 신중의 하나다."

하나님은 악하지 않다.--> 결핍이 아닌 선에 있어서의 완전함을 뜻한다.

 

 두 번째 방법은 긍정적 방법(via affirmativa)으로서 하나님의 속성 중에는 '불변'과 '무한'과 같은 부정적인 것 외에도 '선'이나 '예지' 같은 긍정적 또는 직접적인 서술을 허락하는 것들이 있다 즉 "하나님은 선하다"라는 식의 표현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방법을 쓸 경우 -거짓-디오니시우스가 이미 간파했듯이- 다음과 같은 딜레마에 봉착한다. 즉 우리는 피조물(존재물)에게만 적용되는 술어를 창조주(존재자체)의 속성을 서술하는 데에 사용하거나(이 경우 하나님에 대한 언급자체가 부당하다), 또는 우리가 술어가 지니는 피조물과의 관계 곧 우리가 경험으로 파악하는 술어의 의미를 부정해야만 하거나인데(이 경우 그 술어는 내용이 없다. 왜냐하면 술어의 내용은 피조물들에 대한 우리의 경험이기 때문이다) 이 두 경우가 모두 불합리하다. 따라서 토마스는 우리가 "하나님은 선하다"고 말할 때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이 피조물들이 선한 것 같은 양식으로 선하다는 것이 아니고, 선이 <보다 고차원적인 양식에 의해서> 선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곧 하나님은 선하시기에 선을 사물들 가운데 확장시키고, -어거스틴의 말대로-"하나님은 선하시기에 우리가 존재한다"는 결과가 된다.

 

세 번째 방법은 유비적 방법이다. 우리는 긍정적 방법을 통해 피조물에 적용되는  술어들은 하나님의 속성을 설명하는데 일의적(一意的, univocal)으로 이해되어서는 않된다는 것을 알았다. (이 경우 하나님과 피조물은 동일하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의 술어가 다의적(多意的, equivocal)이 되어서도 안된다.(이 경우 하나님과 피조물에 적용된 용어들은 각각 다른 의미를 갖고 있으며,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에는 공통점이 전혀 없어서 피조물에 의한 지식은 하나님에 대해서는 아무런 지식도 주지 못한다) 따라서 토마스는 이 두가지 극단의 중앙을 택해서 하나님과 피조물은 서로 완전히 같지도 ㅇ낳으며 완전히 다르지도 않고 서로 유사하다고 했다. 따라서 하나님에게 사용되는 술어들은 유비적으로 사용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아퀴너스에 있어서 유비라는 용어는 존재론적이다. 그것은 신 안에 있는 것은 인간 안에도 있다는 것을 뜻한다. 즉 피조물은 신의 본질을 약간 씩 소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가 '지혜'라는 말을 사용할 때, 하나님 안에서는 완전하게 실현된 지혜를 그리고 인간 안에서는 단지 부분적으로 실현된 지혜를 의미하게 된다. 이 둘은 서로 완전히 동일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다른 것도 아닌 서로 유비적인 속성을 갖는다.

 

결국 토마스 아퀴너스는 하나님의 본질에 관한 종합적인 결론에 도달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본질은 "존재자체"(iqsum esse)라는 것이다. 아퀴너스에 의하면, 하나님에게 가장 적당한 명사는 오직 그가 불타는 덤불 속에서 스스로 모세에게 가르쳐 준 이름 곧 "존재하는 이"(JHWH, Qui est, I am who am)뿐이다. (출애굽기 3:14) 이것만이 하나님의 본질을 그 어던 의미로서도 구속하지 않으며, 모든 피조물과도 구분케 한다. 왜냐하면 모든 피조물은 본질(무엇)과 존재(있음)가 구분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에 있어서는 본질과 존재가 동일한다. 곧 "존재자체"이다. 따라서 그는 "존재" 곧 "그 자신"외에는 그 어떠한 속성에 의해서도 구속받지 않으며, 모든 피조물들에게 존재를 허락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은 무한히 의로우시다(infinite Justuce)"라고 말할 때도, 이 말이 진리이긴 하나 이것은 단지 유비적 표현일 뿐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충분한 표현일 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선은 그의 본질인 존재와 같은 것(본인은 이것을 "존재적 선"이라 한다)이며 인간에 있어서의 선은 인간의 본질에 합당한 것(본인은 이것을 "본질적 선"이라 한다)을 말하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피조물에 대한 우리의 감각과 경험에서 생긴 그 어떤 개념으로도 하나님을 한정지을 수 없고 단지 유비적으로 표현할 수 밖에 없는데, 이것이 존재 외에는 그 어떤 본질도 갖지 않는 하나님의 이름 곧 "나는 존재하는 이이다"에 합당한 것이다.

 

이세상의 무엇이든간에 "무엇"으로 "있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정리를 하자면....

 

"인간을 인간으로게끔 있게 하는 그 무엇!"

(우리를 우리게끔 하는 그것!)

인간을 인간으로게끔 하게 하는

그것이 파괴되면 인간은 인간이 아니다.

하나님은 무엇이다라고 할 수 없다.

어떤 테두리 안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은 무한하다는 속성에 위배된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을 할 수 없다.

하나님에게 있어 본질이나 존재가 같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나는 존재하는 자다"

주어와 술어가 동일

존재=본질

본질=존재

"존재물"과 구분되는 "존재"-> 나는 "존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