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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시대의 서방 기독교 사상과 동방의 기독교 사상(1)

baromi 2005. 3. 10. 14:17
LONG

3) 주요인물과 사상

 

    a) 칸타벨리의 안셀롬(1033-1109)

 

안셀롬은 피에르 몽트에서 태어나서 베네딕트 수도회에서 공부하고 노르만디의 벡에 있는 수도원에서 부원장을 지내며 저술을 하다가 나중에 켄터벨리의 대주교가 되었다. 그의 저서로는 <모노로기온> <프로스로기온> <왜 하나님은 인간이 되셨는가> <성령의 발출에 관하여> <선지식, 예정, 은총이 자유의지와 일치함에 관하여> 등등이 있다. 그의 방법론은 다분히 철학적이었다. 그에 있어서 철학과 신학은 구분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이성에 의해 신을 발견하려는 것이 아니었고, 그가 이미 믿고 사랑하는 신을 이해하려는 데에 이성을 도입하고 있다. 그는 그의 저서 <프로스로기온>에서

 

        "주여 나의 이해심은 당신의 높으신 경지에 도저히 비길 수 없으므로 이성을

         통하여 주를 이해하려 들지 않겟나이다. 그러나 내 마음 속으로 믿고 사랑하는

         당신의 진리를 조금씩이나마 알기를 원합니다. 나는 믿기 위해서 알려고 하지

         않나이다. 오히려 알기 위해서 믿나이다. 또한 나는 '믿지 않으면 결코

         이해할 수 없음'도 믿나이다"

 

라고 고백하고 있다. 안셀롬은 믿음이 이해의 전제조건임을 이미 파락하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완전히 어거스틴의 추종자라고 할 수 있어서 제2의 어거스틴이라고 불리곤 하였다.

그의 이론 중에는 신의 존재증명이 유명한데 안셀름은 그의 저서 <모노로기온>에서 우주적 논증을 그리고 <프로스로기온>에서 존재론적 논증을 시도했다고 높이 평가되고 있다.

 

      가. 우주론적 논증(the cosmological argument)

 

      우주론적 논증이란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에 나오는 5가지 신의 존재증명 중 특히 네번째 나오는 증명에 붙혀진 이름이다. 아퀴나스의 5가지 논증은 모두 /세계의 일반적 특성/을 밝힌 다음-> 이것으로 부터 /신이라는 궁극적 실재가 없다면, 이러한 일반적 특성을 가진 세계가 존재할 수 없다/ 라는 형식으로 전개된다.

 

      이 논증은 사물의 성질이나 가치의 단계(ex gradibus)로부터 최고의 단계로서의 신을 증명하고 있다. 훗날 토마스 아퀴나스도 그의 5가지 신의 존재증명 중 한 가지로 사용하는 안셀름의 이 논증법은 대단히 소박하지만 커다란 호소력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이 논증은(약간의 해석을 더한다면) 우선 신을 모든 존재물들의 근거로 규정한 다음,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존재물들의 실존으로부터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아래와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은 모든 존재물들의 근거이다.

              모든 존재물은 근거없이 존재할 수 없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그러므로 신의 실존은 자명하다.

 

 

       나. 존재론적 논증(the ontological argument)

       프로스기온에서 안셀름은 자신의 우주론적 논증에 불만을 표시한다. 왜냐하면 이 논증은 경험할 수 있는 조건적인 것을 근거로 무조건적인 신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보다 완전한 방법 곧 신을 발견하기 위해 세계를 필요로 하지 않는 직접적인 논증을 원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존재론적 논증이라고 부르는 방법이다.

        존재론적 논증은 안셀름에 의해 두 가지로 주장되었는데, 특히 그의 두번째 증명은 근세에 데까르뜨(1596-1650)에 의해 다시 주장되어 물의를 일으켰었다. 이 논증은 안셀롬의 저서 "Proslogion" 2장에 의해 처음 명확히 제창되는데,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기 쉽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안셀름은 신을 "더 이상 위대한 분을 상상할 수 없는 실재"(a deing than which nothing greater can be conceived)로 정의한 다음 아래와 같은 형태로 논증한다.

 

             a- 신은 정의상 절대적으로 완전한 존재이다.

             b-절대적으로 완전하다는 것은 그 어떠한 결핍도 있어서는 않됨을 뜻한다.

             c-만일 어떤 것이 인간의 마음속에만 존재한다면 이것에는 실제적 존재가 결핍

                 되어 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그러므로 신은 마음속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 존재한다.

 

          (안셀롬 자신은 Proslogion에서 완전한(Perfection)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으나,

           때에 따라 "더욱 위대한"(greater, 2-4장), 또는 "더욱 훌륭한(better)"라는 표현을

           쓰고 있기에, 학자들은 그의 주장하는 바가 신의 완전성이라고 해석한다.) 

 

안셀름의 이 논증은 오랫동안 조용하다 17세기 데까르트가 그의 저서 "성찰"(Meditations) 5장 "Of God that He Exists"에서 '가장 완전한 존재'는 존재의 완전성 즉 실존을 소유해야한다는 주장을 함으로 다시 활기를 찾았다. 그는 삼각형 내각의 합이 180도 라는 것이 삼각형이라는 개념에 포함되어 있듯이, 실존은 가장 완전한 존재라는 개념의 일부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칸트는 "순수이성 비판"에서 이 논증을 두 가지로 비판한다.

(1) 개념의 영역과 실존의 영역의 다르다. 즉 완전한 존재의 실존이 개념상 타당하다하여 실재적이어야 한다는 보장이 없다. 실존이란 사실(fact)의 문제이며, 경험(a posteriori)에 의해 판단될 문제이지 선험적(a priori) 문제가 아니다.

(2) Sein (be)동사는 문법적으로 술어이나, 주어에 새로운 성격을 추가하는 다른 술어들과 성격이 다르다. 예를 들어 "새는 난다"라는 문장에서 '날다'라는 동사는 새라는 주어에 새로운 성격을 부여하고 있으나, "인어는 금발이다"에서 '...이다'(sein, be)라는 동사는 존재 즉 '...가 있다' 라는 성격을 부여하지 못한다

(현대 논리학에서도 "암소가 있다"라는 문장은 'X'가 존재하는데 그것이 암소이다. "용은 없다"라는 문장은 "어떠한 X도 용은 아니다"(-Ex(f(x))로 표현하고 있다. 이는 술어 자체에는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음을 뜻한다.)

 

   이는 우리가 신을 완전한 존재로 정의(definition)하고 그것으로 부터 실존의 개념을 도출할 수는 있으나, 그것이 실제적으로 존재한다는 증명은 될 수 없음을 뜻한다. 그러나 우리는 안셀름과 기독교 신학이 주장하는 '필연적 실존'(necessary existence)은 단순히 개념적 필연성이 아니고 실재적-존재론적 필연성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기독교의 신-존재론적으로 필수적인 실재는 그 자신은 아무것에도 의존하지 않음으로써 모든 것이 그에게 의존하고 있는 존재이기에, 만일 이런 실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다른 모든 것도 역시 실재할 수 없는 것이다. 만물은 실재한다(이것은 우리가 경험적으로 알 수 있다). 따라서 신의 실재는 필연적이라고 이해되어야 한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다시 안셀름의 우주론적 논증으로 돌아왔지만 안셀름은 이런 방법들을 통해서 신의 존재를 의심하는 사람들을 설득하려 했다.

 

   안셀름은 <하나님은 왜 인간이 되었는가?>라는 논문에서 성육신의 필요성을 밝히려 했다. 흔히 "만족설"이라 불리우는 이 이론은 성육신은 마귀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성육신하였다는 이론을 반대한다. 안셀롬에 의하면 인간들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명예가 훼손되었는데 인간은 이 명예를 회복시켜 만족을 드릴 수가 없다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손상된 명예를 회복시켜 만족을 드릴 수 있는데, 한편으로는 또 오직 인간만이 인간의 죄에 대해 하나님께 만족을 드려야만 한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하나님-인간(a God-man)만이 하나님의 명예를 회복시켜 만족을 드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안셀름이 주장한 성육신의 이유이자 목적이다. 대부분의 신학자들이 이 이론을 따랐으나 신약 성서의 주요내용이라고는 할 수 없다.

 

 

    b) 피터 아벨라드(1079-1142)

    피터 아벨라드는 신학적으로는 새로운 측면을, 교회사적으로는 비극을, 개인적으로는 로맨틱한 사랑을 극적으로 경험한 사람이다. 그는 시대를 앞서간 사람으로 그가 속해 있던 시대에는 일종의 반항아였다. 신학적으로는 개신교 신학과 칸트 철학적 요소를 주장할 만큼 시대를 앞질러 신학의 주관적 측면을 열은 사람이며, 스콜라 신학의 주된 방법론인 변증법 즉

<예-아니오>신학, Sic et non Theology)를 개발한 사람이다. 교회사적으로 보면 교회가 여러 부족과 민개 민족을 기독교로 교화하고 교육시켜야 할 그 당시, 아벨라드의 선각자적 이론들은 정죄당할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은 교회사적으로는 하나의 비극이었다. 개인적으로는 귀족 가문의 딸 엘루아즈(Heloise)와의 낭만적 로망스를-그것의 위대성과 비극성을 모두 포함하여- 로망주의 훨씬 이전에 체험하였다.

 

그의 저서로는 <변증학>, <너 자신을 알라>, <윤리학>, 등등이 있으나 신학적으로 중요한 저서로는 <신학입문>, <기독교 신학>, 그리고 <예와 아니오> 등이다.

아벨라드의 신학(자율적 신학)적 업적은 <예-아니오 신학> 곧 변증법과 주관적 신학 그리고 윤리학을 들 수 있다.

 

가. 변증법: 그의 대표작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예와 아니로, Sic et non>에서 아벨라드는 예-아니오 라는 방법을 스콜라주의의 학적 방법을 개발하였다. 그 당시 교황청의 법률학자들은 교황과 고문들이 전통에 합당한 결정을 내리도록 하는 것이 임무였다. 여기에 아벨라드의 변증법이 요청되었다. 주로 교부, 교회회의등의 결정이나 성서 텍스트에 대한 해석이 참된가(예) 아닌가(아니오)를 판결하는 것이었다. 이것을 위해 첫째 역사적 상황과 심리적 배경 그리고 사용된 언어의 의미론적 문제들이 취급되었다. 현대적 의미로 본다면 일종의 해석학적 작업이었는데, 이것은 훗날, 교리의 상위성을 주장하여 교권의 강화에 이용되었지만 아벨라드는 전통의 조화로운 통일성을 증명하려고 시도하였기에 스콜라주의자들이 이 방법을 계승하였다.

 

나. 주관적 신학: 우리는 어거스틴이나 안셀름의 신학적 입장을 '신율적'이라고하고 아벨라드의 입장을 '자율적' 또는 '주관적'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신율적'이라함은 "인간이 어떠한 타율적인 것에 의하지 않고 자기의 이성에 의해 움직이되 이 이성이 계시나 전통 같은 것에 나타나 있는 신적 실체로 충만해 있을 때"를 말한다. 어거스틴이나 안셀름이 이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해서 '자율적' 또는 '주관적'이라 함은 계시나 전통처럼 이미 주어 진 신적 실체뿐만 아니라 이것을 파악하고 있는 자신에게도 관심을 돌리는 것이다.

   곧 인격적 삶을 고려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는 이미 하나의 근대인이었으며, 현대인들이 가진 신앙의 위기를 예시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원죄론'을 부인한다. 죄는 의지에 있기에 의지의 참여가 없는 잘못은 죄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의지로서 아담의 잘못에 동의한 것이 아니기에 아담의 죄는 우리 것이 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론'에 있서서도 그리스도가 아담의 원죄로 인간이 마귀에게 진 빛을 갚기 위해 오셨다는 전통적 이론도 부정하고, 인간이 하나님에게 진 빛을 갚기 위해서 오셨다는 안셀름의 견해도 부인했다. 하나님은 그의 사랑을 모범이 되도록 실천해보여서 인간들을 인격적으로 하나님께 이끌어 감으로써 인간들을 용서해 주시려고 그리스도가 왔다는 일종의 '모범설'을 주장했다.

 

다. 윤리학: 아젤라드의 주관주의는 그의 윤리학에 잘도 나타난다. 윤리의 자율성에 있어서 그는 이미 시대를 훨씬 뛰어 넘어 칸트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는 선과 악은 그 행위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 행위의 근거가 되는 의도 곧 의지에 있다고 생각하고, '선의지 밖에는 선이라 일컬러질 수 있는 것이 없다 또는 '의지 안에 공적이 있다'라고 700년을 앞서서 다분히 칸트적인 윤리관을 전개했다. 따라서 죄란 양심에 어긋나는 행위라고 규정하고 "우리의 양심에 어긋 남이 없으면 죄가 없다"라고 말했다.

 

당연히 결과이겠지만 아벨라드의 이러한 과격한 이론들은 열렬한 지지자와 극단적인 반대자들을 동시에 불러드렸고, 1141년 그의 반대자 클레르보의 버나드에 의해 고발당하고 교황 인노센트 2세에 의해 정죄당했다. 그러나 그의 이론은 그의 후계자들 곧 '아벨라드 학파'에 의해 전승되었고, 성 빅도 학파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었다.

 

 

  c) 성 빅토르(St. Victor)학파.

  성 빅토르 학파의 창시자는 쌍뽀의 월리엄으로서 그는 아벨라드와 같이 유명론자 노스켈론과 실재론자인 라온의 안셀름의 제자였으나 그 자신은 극단적 실재론자였는데, 그의 사상은 전통적이며 온전하였으나 신앙의 진리를 이해하고 분석하는데 논리적인 방법을 주로 사용하였다.

  이의 계승자 성 빅토의 휴는 <기독교 신앙의 신비에 관하여>라는 저서 서문에서 학문의 목적은 단순한 호기심에 있지 아니하고 인간을 차워 높은 삶으로 인도하는데 있다고 했는데, 이 방법으로서 성례전을 매우 중요시 하였다. 휴는 <기독교 신앙의 성례전에 관하여>라는 일종의 조직신학 책에서 성례전을 넓은 의미로 확장시켜 '하나님의 모든 사역'으로 보았다. 그러나 그는 세례, 견진, 성찬, 참히, 종유, 결혼, 임직 등 7가지 성례전을 중요시 여겼고, 이러한 성례전의 궁극적 목적은 영혼이 명강상태에 이르도록 이끌어 주는 데 있다. 여기에서 휴는 거짓-디오니시우스의 신플라톤주의적인 신비주의를 끌어들여서 상향적인 단계를 밟아 올라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축복을 누리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러한 경향은 휴의 계승자들에 의해 더욱 많은 신비주의적 요소를 이 학파에 불러드리는 결과를 낳아, 이들은 이 학파의 초기 전승을 그대로 받아드리지 않고 경건과 신앙의 중요성을 더 강조한 나머지 신앙을 이성으로 파헤치려는 모든 시도를 배격하는데 이른다.

ARTICLE

이행기(고대~중세로 넘어가는 시기)의 서방 기독교 사상

 

1) 역사적 고찰

AD 476년 로마 제국의 멸망한 이래 인류사에 뜻깊은 정치적 종교적 사건은 622년 마호메트가 창건한 이슬람의 탄생이다. 유목민족으로 이루어진 소규모 집단이 페르시아 제국을 멸망시키고 아프리카를 침공하여 지중해를 건너 시베이아 반도에서 비스코트왕국을 멸망시키고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크 왕국까지 위협을 가했다. 비잔티 제국도 안디옥과 예루살렘을 포함한 대부분의 아랍영토를 점령당했으며 이들이 정복하는 곳마다 기독교는 황폐해졌다. 많은 사람들은 이슬람을 하나님이 비잔틴 제국을 위해 예비하신 채찍으로 생각하였고, 이슬람은 자체적으로 찬란한 문명을 건설하여 갔으나 기독교는 암흑시대로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어둠 속에서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카룰링 왕조의 문예부흥은 섬광과 같이 빛났다. 카룰링 왕조의 문예부흥은 샤를만느에 의해서 시작되는데, 그는 AD774년 롬바르트 왕국을 병합하고 800년 교황 레오 3세에 의해서 로마인의 황제로서의 제관식을 치름으로써 비교적 안정된 정치적 상황을 맞아 문예부흥에 힘을 쏟을 수 있었다. 샤를만느는 스스로 학자는 아니었지만 외국 주로 영국에서 저명한 학자들을 초청하여 자국의 학적, 영적 성장에 큰 관심을 보였다. 이런 경향은 AD 877년 대머리왕 찰스가 죽기에까지 이어져서 궁중학교 상트 갈렌, 고르비에, 풀다 수도원의 부속학교 등과 도서관들이 세워졌다. 카룰링가의 문예부흥은 AD896년 이후 스칸디나비아족이 침략해 왔을 때 그들에게 종교와 문화를 전하는 계기가 되었지만, 그 이후에는 11세기와 12세기의 문예부흥까지는 '암흑시대'에 빠진다.

 

2) 사상적 고찰

  a) 보편 논쟁

   이 시대에 한정된 문제만은 아니었지만 이 때에 제기된 논쟁들 중 우선적으로 다루어야 할 것이 <보편논쟁>이다. 이것은 비록 철학적인 논쟁이기는 하지만 어거스틴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에 이르기까지 중세 전반에 걸쳐 대부분의 신학자들에 의해 제기된 심각한 논쟁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의 촛점이 되는 논점은 ㅇ니간 '사고의 대상'과 외부에 '존재하는 대상'을 어떻게 연관시킬 수 있느냐는 것이다. 외부에 존재하는 대상은 다양하고 무수한 반면 인간정신 안에 있는 대상은 단일하고 보편적이다. 예컨데 인간은 '나무' '사람' 같은 보편적 개념을 갖고 있지만 이것이 우리의 감관을 통해서 관찰 될 때는 현실적이고 개체적인 '이 참나무', '저 밤나무' 또는 '철수', '영이'와  같은 현실적이고 개별적이다. 여기에서 발생하는 의문들은 보편개념이란 실재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이름일 뿐인지 또 실재한다면 물질적인 것인지 아닌지? 개별적인 사물에 존재하는지 별개로 존재하는지? 등이다. 다시 말하자면 '사람'이라는 보편개념은 모든 인간들에게 다 적용되는데 이것이 실재적인지? 만일 실재적이 아니라면 -즉 단순한 이름 뿐이라면 모든 사람을 사람으로 만드는 그것은 무엇인가? 정신은 보편개념을 형성하기 위해 어떻게 활동하는지? 반대로 보편개념이 실재적이라면 어떻게 개별적인 사람과 관계를 맺는지? 즉 무엇이 개별적인 삶의 실재인가?

   이 논쟁에 개입한 신학자들은 실재론자들로 보에티우스(480-524). 안셀무스(1033-1109). 상포오의 기욤(1070-1121) 등이 있고 유명론자로는 로스켈리누스(1050-1125)가 대표적이다.  보편 논쟁의 매우 어려운 문제이나 신학적 의의 역시 대단히 크다 예컨데 '삼위일체론'이나 '원죄의 유전론'등이 이 보편논쟁과 연결되어 있다. 때문에 우리는 보편논쟁을 간략히나마 살펴보기로 한다.

 

  가) 실재론 (realism)

 보에티우스는 포르피리우스의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 입문>을 주석함에 있어서 포르피리우스에 의해 제기된 보편자 문제를 거론하고 있다. 포르피리우스가 제기한 문제는 유나 종과 개별자 사이의 관계가 무엇인가로 다음과 같은 3가지 의문에서 제기 되었다.

 (1) 유와 종은 실재로 자연에 존재하는가? (2) 그것들이 실재라면 물질적인가 비물질적인가? (3) 그것들은 사물과 별도로 존재하는가, 혹은 그것 내에 존재하는가? 보에티우스는 이 문제들을 개념구성의 두 가지 방법으로 설명하고 있다. 곧 합성과 추상이 그것인데, '합성'이란 개념들을 합성하여 다른 개념을 만드는 것을 말하며, '추상'이란 현실로부터 추론해 내 다른 개념을 형성하는 방법이다. 예컨데 '켄타우로스'(그리이스 신화에 나오는 괴물)라는 개념과 '선분'이라는 개념은 둘 다 실재로 존재하지 않는것에 대한 개념인데, '켄타우르스'라는 개념은 '합성'에 의해 얻은 새로운 개념이고, '선분'이라는 개념은 '추상'에 의해 획득한 개념이다. 이때 켄타우로스는 "거짓"이고 선분은 "참"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보에티우스가 의도하는 바는 유와 종과 같은 보편개념들은 정신에 의해 현실세계에서 추론되기 때문에 (마치 선분이라는 개념처럼) 그것들은 "참"되다는 것이다.

   보편자는 개별자로부터 추론된다는 보에티우스는 유(예:인간)와 종(예:동물) 또는 정의, 선, 미와 같은 것들은 개별자들의 "안에 존재하고", 그것들이 정신에 의해 사유될 때 보편자로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즉 보편자는 대상과 정신 안에 동시에 존재한다. 사물 ㅇ나에 내재하고 정신 안에서 사유된다. 이것이 위 질문 중 첫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 보에팅스의 대답은, 보편자가 사물 안에서는 물질적으로 정신 안에서는 비물질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세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사물에서는 그것의 안에 그리고 정신에게는 사물과 별도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정리하면 보에티우스는 보편이란 정신적인 개념 이상의 것으로 하나의 실재이나 물질적인 것은 아니고 영적인 것이기에 개개의 사물 안에 내재하지만 인간이나 신의 마음에서 이데아로서 경험된다는 다분히 플라톤적인 입장을 취한다.

 

보에티우스와는 달리 보편자가 실재하는 사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파장된 실재론자들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보편자는 이데아로서 개체와 분리되어 존재하며, 개체에 부분적으로 들어 있다는 플라톤의 분유론을 따라, 유나 종은 개체 안에 들어 있고 개체들은 이 보편자를 공유하고 있다고 한다. 이 이론의 신학적 강점은 '원죄유전'이나 '삼위일체론'을 설명하기에 좋다. 예컨데, 토우르나스의 오도(Odo of Tournas)는 그의 저서에서 만일 죄라는 보편자가 실재하지 않는다면 아담과 이브의 죄는 그들 자신에게서 끝나며 원죄설은 설득력을 상실하게 된다고 말했고, 안셀름은 삼위일체론을 설명하려면 실재론의 입장에 서야한다고 생각했다. 만일 삼위일체란 동일한 하나님의 실체가 여러 실체 안에 공존하고 있다는 실체론적 입장이 부인된다면 삼위일체설은 삼신론에 귀착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너무 길어서 생략.. - -;

 

 

 

 

중세초기(AD 1000-1200)의 기독교 사상

 

1. 중세초기의 서방 기독교 사상

 

1) 역사적 고찰

 

한 저명한 카톨릭 역사가는 10세기를 "납과 철의 암흑세기"라고 평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 그것이 뜻하는 바가 '문화적으로 쇠퇴했던 시기'를 지칭하고 있으며 그것의 근원이 정치적 혼란과 종교적 분쟁이라면, 이러한 지칭은 9세기말에도 11세기에도 합당하다고 할 수 있다.

 

대머리왕 찰스가 죽고나자 카롤링가는 급격히 쇠퇴하여 내부적으로는 살상을 일삼았고, 외부적으로는 외적들의 침입이 끊임이 없었다. 수도원들은 대부분 성외에 있었기 때문에 외적들의 침입에 의해 부설학교와 도서관드이 파괴되었고 귀중한 서적들이 그들의 손으로 넘어갔다. 이러한 가운데 예루살렘 회복을 위한 1차 십자군 원정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교회는 더욱 타락의 길로 접어들어서 몇번의 개혁운동에도 불구하고 교황은 정치적 꼭두각시 노르을 하기에 급구했고 교황의 암살과 정죄가 장행되는 등 극도로 문란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문화는 극도로 피폐해졌고, 신학도 완전히 사멸했던 것은 아니나 옛 것을 이해하기에도 부족하여 독창적인 것을 기대하기가 어려웠다. 이래서 중세는 어둠과 함게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12세기는 기독교 사상에서 새로운 전기를 맞은 때이다. 11세기 마지막해인 AD1099년 십자군 원정으로 예루살렘이 회복되고 이곳에 라틴왕국이 건립되었으며, 교회도 스스로 개혁을 하여 세속제후들의 그늘에서 벗어나 오히려 우위를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여기에는 상업의 발달과 도시의 성장이 도움이 되었으며, 신학활동도 수도원을 박차고 나와 도시에 있는 성당학교로 옮겨졌다. 이것이 13세기에 설립될 대학들의 기반이 되었다.

 

 

2) 사상적 고찰

 

    a) 스콜라 주의

 

*우리는 여기에서 스콜라주의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스콜라주의는 그 무엇보다도 중세사상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언급했듯이 이 용어는 중세의 교회학교(schola)에서 이루어지는 지적활동을 뜻한다. 따라서 이 체계는 독창적 사상이라기 보다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사상과 같은 전통적 사상들을 기독교 사상에 융합시켜 일관된 체계를 이룩하고자한 노력의 결과이다. 이 체계는 논리적이었으나, 그 궁극적인 목적은 신학을 철학적으로 설명하려는데 있었기에 당연히 복잡하였고 때로는 -특히 말기에는- 공허한 말장난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이들이 시도했던 것이 기독교적 신비를 인간 이성으로 이해하고 체계화 시켜 보려는 것이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이것은 대단히 값어치있는 일이었으며, 우리는 오늘날 조직신학의 근원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가. 스콜라주의의 주요문제

   스콜라주의가 탐구했던 주요문제는 '권위'(autoria)와 '이성'(ratio)과의 관계였다.고 정리할 수 있다. 이 때의 권위란 '전통'(traditio)에 더욱 가까운 말로서 '신앙전통', '교회의 전통' 등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기독교의 초기 사도교부들이 기독교 신앙을 정립하는데 이 전통을 기준으로 삼았다는 것을 이미 고찰했었다. 이 전통은 곧 기독교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요, 이성이란 희랍철학의 전통이라고 본다면 이것은 다름 아닌 기독교와 희랍철학의 관계를 말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들의 관계는 대등한 관계는 아니었다. 마치 하늘 밑에 땅이 있듯이, 전통은 목적이었고, 이성은 그 도구였다. 훗날 학자들이 증세를 가리키어 '철학이 신학의 시녀이었던 시대'라고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성이 전혀 무시되었다고 보는 것도 역시 스콜라적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때는 신앙 그 자체는 전제되어 있었지만 신앙의 내용은 해석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켄터베리의 안셀롬의 유명한 말 "알기 위해서 믿는다"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런 이런 입장은 중세의 대부분의 신학자들 특히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이어진다. 이들에게 있어서 이성은 결코 권위와 모순되지 않고, 희랍철학은 기독교와 대립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성은 권위를 해석하는데 적합하다. 물론 둔스 스코투스나 월리엄 오캄은 '이성은 권위에 합당치 않다 따라서 권위를 이해하는데 충분치 않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스콜라주의의 근본적인 입장은 이성이 권위를 합당하다는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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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을 권위와 전통이 기독교 되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 히브리 사상이다.

스콜라주의의 본래 모습은 기독교적 요소를 그리스도적 방법으로 이해하고 시도하려는 것이

스콜라주의 철학이다.

 

(1) 스콜라 신학은 히브리와 그리스적 요소가 결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이나 권위 전통아래 이성을 두고, 이성에 의거하여 철학적 방법을 많이 이용한다.

 

(2) 스콜라주의는 기독교를 목적으로(알기위해) 이성(그리스적 요소)을 동원(방법), 수단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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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할 중요한 문제가 있다.

자연적 권위와 명령적 권위 또는 살아있는 전통과 형식적 전통과의 문제이다. 권위란 원래 자연스러운 것이어서 우리가 타율적으로 복종하기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 스스로 자율적으로 따르게끔 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것이 자연적 권위이며, 살아있는 전통인 것이다.

그러나 중세가 끝날 무렵 새로운 권위의 개념이 나타난다. 오늘날 우리도 이것에 흔히 무의식적으로 젖어 있는데, 이것은 다른 여러가지 권위를 무시하고 어느 특정 권위에 타율적으로 복종하는 것을 요구하는 권위개념이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우리가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무조건 복종해야하는 명령적 권위이다. 우리는 암암리에 여기에 젖어 있는데, 종교 개혁자들이 했던 것도 카톨릭의 이러한 명령적 권위와 형식적 전통을 거부하는 일이었다.

 

    나. 스콜라주의의 여러 영향

         변증법과 전통

         스콜라주의가 이성적 논리를 전통에 적용시키면서 발생한 문제가 바로 이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변증법이란 '대화', '협의'을 의미하는데, 하나의 문제에 대해서 한편에서는 긍정(예)을 다른 한편에서는 부정(아니오)을 주장하는 형식으로 대화를 진행하던 방법을 말한다. 때문에 이 방법을 <예, 아니오>법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곧 교회의 권위나 전통에 이성의 산물인 신학적 교설을 조화시킬 필요성에서였는데,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교회의 권위나 전통에 '아니로'라고 말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준 것이다. 전통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이 변증법(그리스도적 방법)을 위험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교회는 너무 많은 '아니오'를 허락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어거스틴주의와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우리는 이미 어거스틴이 플라톤 또는 신플라톤주의의 막대한 영향을 받았던 것을 알고 있다. 이것은 중세에 와 스콜라주의 안에서 어거스틴주의와 새롭게 대두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의 갈등으로 나타난다. 어거스틴주의를 대표하는 것이 '프란시스코회'였고,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대표하는 것이 '도미니크'회였다. 대표적 인물로는 프란시스코회의 보나벤푸라를 들 수 있고, 도미니크회에서는 누구보다도 토마스 아퀴너스를 꼽을 수 있다. 따라서 이들의 논쟁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중세에 다시 만나 기독교적 문제로 나누는 대화라고 할 수 있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계속될 수 밖에 없는 논쟁일 것이다.

 

         토마스주의와 스코투스주의

         둔스 스코투스가 프란시스코회 사람인 것을 감안한다면 이 대립은 위의 어거스틴주의와 아리스토텔레스주의 간의 대립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따로 부각시켜 다루는 것은 이들의 논쟁은 현대에서도 문제가 되는 특수한 문제 곧 '지성과 의지'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이다.

          도미니크회의 토마스 아퀴너스에 따르면(아리스토텔레스를 따라) 당연히 지성이 의지에 비해 우위를 차지한다.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것은 지성이다. 그러나 스코투스가 따르는 어거스틴주의에 의하면 인간을 인간이게 하고 신을 신이게 하는 것은 의지이다. 신에게 있어 제1이 의지이며 지성은 제2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