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신학자료

중세시대의 서방 기독교 사상과 동방의 기독교 사상(2)

baromi 2005. 3. 10. 14:16

2. 중세초기의 동방기독교 사상

 

우리는 여기에서 이슬람의 침공에서 제4차 십자군 전쟁으로 콘스탄티노플이 탈취되고 그 결과로 동로마제국이 끝나는 때까지의 동방 곧 희랍정교 또는 비잔티 교회의 사상을 살펴보려고 한다. 이 시기의 동방교회는 불가리아와 러시아 교회가 탄생함으로 그 영토를 막대하게 확장했다고 할 수 있으나, 이들의 대부분 역대 에큐메니칼 대회의 결과들을 모두 받아드리고 서방교회와 로마 교황청과의 긴장 관계 속에서도 공동체적인 결속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칼케톤 회의의 결과를 부인하는 네스토리우스파와 단성론파들의 출현도 있었는데 사상적으로는 네스토리우스파는 안디옥파를 그리고 단성론파들은 칼케톤회의에서 "단성론자"라는 칭호를 얻은 자들의 이론을 답습하고 독창적인 것은 없었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비잔틴 신학을 알아보고 네스토리우스파에 대해 약간 알아보기로 한다.

 

 

1) 역사적 고찰

 

7세기 말과 8세기 초에 비잔틴 제국과 동방교회는 비극의 시대를 맞았다. 이슬람과 불가리아의 침공과 정치적 혼란으로 한 때 제국의 영토가 남부 이태리와 시실리 섬으로 위축된 적이 있었으나, 717년 레오 3세가 '이수리오나조'를 세우면서 제국은 다시 활기를 찾아 영토를 재정비하고, 법률을 재편하고 콘스탄티노플에 대학을 세우는 등 학문을 증진하는데도 힘을 기울렸다. 그러나 이러한 회복사업의 일환으로 시행된 종교정책이 동방 뿐만이 아니라 서방까지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 종교 정책은 곧 "성상파괴 운동"이었는데, 한편으로는 정치적 이유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신학적 이유에서 레오 3세는 그리스도의 화상 뿐만이 아니라 마리아, 성서적 인물, 성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교적 화상(ikon, religious image)들을 우상숭배라고 하여 배척했다. 725년 레오 3세는 모든 성상파괴를 명령하였고,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 저만이 이를 반대하자 그를 최우시켜 버리고 그의 사람인 아나스타시우스를 임명하였다. 이에 로마교황 그레고리 2세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그의 계승자인 그레고리 3세는 황제 레오3세를 출교시켜 버렸다. 그러나 그의 아들 콘스탄틴 5세는 754년에 회를 소집하여 성상파괴의 교리를 지시하는 <표준, Horos>을 결정케하고 교황 져먼과 다마스커스의 요한과 같은 화상옹호자들에게 저주문을 발표하고 박해를 개시하였다. 그러나 그가 죽자 아들 레오4세가 너무 어려 어머니 이레네가 섭정을 하며 교황 하드리안 1세와 화상회복을 선언하는 '니케아 종교회의'를 787년 소집하였다. 이것을 제7차 에큐메니칼 운동이라고 한다.

   그러나 머지않아 레오 5세는 다시 성상파괴 정책으로 환원하는 등 성상파괴자들과 옹호자들 간의 대립은 계속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교리적인 이유로서라기보다는 정치적인 이유에서 였다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었다. 842년 3월11일 화상숭배는 드디어 동방교회에서 공인되는데 이것을 정통주의의 승리로 파악한 동방교회는 지금까지도 이날을 "정통주의의 축제"(Feast of Orthodoxy)로서 지켜오고 있다.

   그러나 서방의 카롤링가에서는 화상의 사용은 허용하나 숭배는 금한 <카롤린 책자>를 출판하였고, 794년에 이르러 '프랑크프르트 종교회의'에서는 754년 성상파괴회의와 787년의 니케아 회의를 모두 정죄하고 '석상의 사용은 허용하지만 성상의 경배는 금하는 중도 책'이 결정되었다.

 

 

2) 사상적 고찰

 

   a) 화상숭배(Icon veneration)

       화상(icon)이란 'eikon'곧 상(image)를 뜻한다. 화상논쟁의 근원은 화상숭배에 있었는데, 화상숭배의 터전을 마련한 사람은 그리이스와 요하네스 다마스케누스로서, 그는 '구약성서의 우상숭배금지는 하늘의 존재자가 그들의 상으로 수육됨으로써 폐기되었다'고 주장하였다. 화상숭배의 위대한 옹호자는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 져먼(Germain)이었으며, 제7차 에큐메니칼회의라고 할 수 있는 '니케아 종교회의'에서는 화상숭배를 두둔하는 3개의 서신을 공식적으로 승인하였다. 그 내용은 하나님께 드리는 참된 예배는 '라트리아'(Latria)로서 단순한 존경이나 경의를 표하는 '프로시쿠네시스'와는 다르므로 화상에 대한 프로스쿠네시스(Proskunesis)로서 우상숭배가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라트리아'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다마스커스의 요한은 그의 <전통 신앙의 주해, Exposition of the Orthodox Faith>에서 하나님은 본성상 불가시적이지만 성육신을 통하여 가시적으로 보였으므로 하나님은 가시적인 방법으로 자신을 계시할 수 있음을 알리셨다고 주장했다. 더우기 화상숭배를 반대하는 자들은 물질 그 자체를 반대하는 마니교적 이원론에 빠질 수 있으며, 화상의 진정한 목적은 신자들에게 위대한 구원의 사건을 상기시켜 줌으로써 선을 행하도록 이끌어 주는데 있다고 했다. 스투데테의 테오도로는 화상에 대한 숭배는 (그 자체에 있지 않고) 그 화상이 뜻하는 원형에 대한 숭배이기에 우상숭배가 아니고 '라트리아' 곧 절대적 예배라고 주장했다.

 

    b) 네스토리우스 신학

        네스토리우스교회는 정통파에서 달갑게 여기지도 않았고 회교도 통치아래 놓여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셔에서 강성하였으며, 회교도를 훨씬 넘어 인도와 중국까지 침투했다. 이 교파의 중요한 신학자는 AD 780-823년까지 이들의 지도자였던 디모데(Timothy)이다. 그의 저술로는 <신앙규범집>과 <마디와의 논쟁> 등이 있다. 대화 형식으로된 <마디와의 논쟁>에서 마디는 AD 775-785년까지 통치했던 회교도 칼리프 마디인데, 이것을 감안할 때, 이 당시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인들이 회교도에 굴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개종시키려고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밖에도 회교도 이론에 반대하는 변증서가 여럿있는데, 그 중에 니스비스의 엘리야 바 세네야가 쓴 <신앙의 진리에 관한 증명론>이 가장 탁월하다.

        이 당시 회교도들이 기독교를 비판하는 주된 이유가 삼위일체설의 삼위가 가진 다신론적 기능성이었다. 따라서 네스토리우스파 신하가들의 변증서는 당연히 3위의 개체성보다 신적 본질의 통일성을 강조하였다.

        또한 수 많은 성경주석들이 남아 있는데, 그 중에서 9세기에 쓰여진 <메르브의 이소다드>, 11세기의 <스콜리아>, 12세기의 <모세5경의 문제>등이 뛰어났다. 이들은 당시 기독교에서 성행하던 오리겐의 우의적 해석을 피하면서 본문의 문자적, 역사적 의미를 중요시하였다. 이것은 안디옥파의 위대한 스승 몹스에스티아의 테오도로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들의 그리스도론도 역시 안디옥파의 "말씀-인간"(Logos-Man)을 따른다. 그들은 말씀을 입으신 인간을 성전과 같은데, 그 안에 신성이 의지적인 연합(a voluntaryunion)으로 거주한다. 곧 "말씀은 본성상 육신이 아니며 마치 성전 안에 있듯이 육신 안에 거처했을 뿐이다" 따라서 엘리야 바 세네야는 다음같이 말했다.

  

    "그리스도가 죽은 자를 부활시키시고 놀라운 기적을 이루셨다"고 말할 때

     우리는 신적 위격이신 말씀을 뜻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먹고 마시고

     피곤하시고 죽으셨다"고 말할 때는 마리아를 통해 입으신 육신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