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카이퍼 사상의 문제점
1) 기독교인의 과제설정의 우선순위에 대한 오해
카이퍼에 의하면, 오늘날 우리 크리스챤들에게 주어진 과제는, 타락 이전의 아담에게 하나님께서 주셨던 바로 그 과제라고 한다. 그것을 “문화대사명”(the Cultural Mandate)이라고 한다. 오직 그리스도인들만이 이 과제를 적절하게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중생하게 되어서,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상실해 버렸던 원래의 그 관계로 회복되어진 자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기 때문이다.
창세기1:28의 이 “문화대사명”은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실제 목적을 요약하고 있다고 카이퍼는 말한다. 다시 말하자면, 궁극적인 면에서 볼 때, 하나님의 목적은, “죄인들의 구원”(the salvation of sinners)에 있는 것이 아니고 “우주의 대구속”(the redemption of the cosmos)에 있다는 것이다. 구원이란 궁극적 그 목적을 향한 일종의 수단(means)이 된다. 곧,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아담에게 주어졌던 원래의 그 문화적 대사명을 실행하게 하는 것이다.
문제가 무엇인가? 한국의 이미 신칼빈주의화되어져 있는 “칼빈주의자들”, “개혁주의신앙인들”의 관점에서 보면, 별 심각한 문제가 있을 수가 없다. 그렇게 배워왔고, 그렇게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문화대사명”은 카이퍼와 그의 추종자들의 사상체계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것이다. 문제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되다보니, “선교적 대사명”(the Great Commission, 마28:19-20)과 비교해 볼 때, 이 문화대사명이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가진 것으로 주장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SFC의 강령의 용어로 치자면, “세계와 국가와 학원의 복음화”라는 구호에서, “세계와 국가와 학원”이 “복음화”라는 것보다 더 무게중심을 갖게 된다. 이렇게 되면, “복음화”의 개념이 바뀌지게 되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 된다.
말이 나온 김에, 이 두 개의 요소는상호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SFC의 신학이다. 두 요소를 모두 강조하고, 놓쳐서는 안될 요소이다. 문제는, 지금 현하의 SFC가 어떠한가함이다. 현재 국내에서 개진되고 있는 논의를 지켜보건대, 이 두 요소의 긴장을 적절하게 정리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다툼의 골이 깊어지는 감이 있다. 진지하게 SFC의 본질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필자의 소망은, SFC가 “복음화”의 본질, 곧 “복음의 본질”에 대한 관심이 희석되지 않으면서, “세계와 국가와 학원”의 문제에 대해서 광범위한 관심을가지는 것이다. 그렇게 되려면, “세계, 국가, 학원”만이 아니라, “교회”에 대한 관심이 그 활동을 통해서 개진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그러한 관심은 일차적이어야 한다.
곁길로 새었다. 카이퍼로 되돌아 가자. 카이퍼는 이 두 요소에 있어서, 균형을 추구하려고 애쓴다. 그리스도는 그래서 구속의 중보자가 되실 뿐만 아니라, 창조의 중보자이시다. 잃어진 바 된 죄인들만 아니라, 잃어진 바 된 세계와 우주를 위해서도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는 것이다. 하지만, 두 요소를 강조하면서도 어디에 중점이 있는 지를 관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강조점의 전이는 그 추종자들에 의해서 강화되어진다. 심지어는 이러한 문화대사명을 실행하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는데 있어서 절대 필수적인 요소가 된다. 이 대사명이 완수되지 않으면 그리스도께서 오시지 않을 것이라고까지 주장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점에 있어서 지나친 감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성경적으로 적절한 강조인가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이 우리의 문화적 대사명을 성취해가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그 진보에 수반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이치에 어긋난다. 우리 주님의 재림의 시기가 우리의 활동과 관련된 점을 지적하자면, 이 문화적 대사명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선교(전도)적 사명에 있다는 것이 신약성경이다. 마태복음24:14을 보라. “이 천국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주님께서는 문화적 대사명을 완수해야만 그제야 끝이 오리라고 하지 않으셨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창세기1:28절은 아무 의미가 없는가? 아니다. 큰 의미가 있다. 문제는 그 의미를 지나치게 강조하여서, 마태복음28:19-20을 대치시켜버릴 정도가 된다면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카이퍼의 신학적 강조점이 그런 방향으로 치우치고 있다는 것이 이 글의 기본논지들 중의 하나이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모든 인류에게 사명을 주셨다. 하지만 생각해 보자. 인류에게 주어졌다는 소위 ‘문화대사명’이 원래 아담에게 주어졌던 그 방식으로 우리들에게 주어졌는가? 주의해야 할 것은, 이 ‘문화대사명”이라는 개념 자체가 일종의 율법주의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는 것이다. 곧, 은혜와 은혜의 언약이라는 맥락에서 논의되는 것이 아니다. 이 사명이 주어졌던 것은 아담이 타락하기 이전이었고, 이젠 이 사명을 실행할 수 없는 위치로 전락해 버렸다. 그래서 무슨 일이 생겼는가? 바로 그리스도께서 그 사명을 성취시켰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이 없단 말인가? 아니다. 있다. 문제는, 우리의 사명, 우리의 문화적 대사명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은혜와 그 능력과 그 동기에 의해서 실행되어야 하고, 실행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강조점에 다시 주목하기 바란다. 문화대사명을 바로 강조하는 것과,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성취된 이 사명을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된 우리들이 그런 구원의 감격과 은혜에 대한 감사로서 실행하게 된다는 것에는 조그만 차이인 듯 하지만, 엄청난 차이가 있게 된다. 문화대사명에 대한 강조가 자칫 신율법주의적 강조가 되기 쉬운데, 이 위험성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어떤 행위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재림이 앞당겨진다느니 하는 식의 주장은 단호하게 거부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주님의 행하심보다 더 앞서 행하기 쉬운 경향이 있음을 우리가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문화적 대사명”이란 개념이나 용어 자체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조심해서, 경계해서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복음의 원형”에 대한 감각을 상실하지 않고 이것을 주장해야 한다. 사실, 영국의 경우를 치자면, 이 문화적 대사명에 대한 강조는 존스토트의 신학과 연관이 되고, 로이드 존스의 신학과는 별로 관계가 없다는 그 사실들을 유념하기 바란다. 어느 쪽의 신학을 취할 것인가? 두 분 모두에게서 배워야 한다. 무엇을 우선적으로 강조해야 하겠는가? 로이드 존스목사의 “중생과 회심”의 청교도신학이 우선 강조되고, 그런 강조에 기초해서, 존 스토트목사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과제를 균형있게 강조해야 할 것이다. 문제는, 이 두 요소를 균형있게 강조할 수 있는 신학이 현하 한국의 개혁주의 신학계에서 개진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중생과 회심의 신학이 회복되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우리가 과연 중생에 대해서, 회심에 대해서 알아야 할 만큼 알고 있는 것일까? 과연 한국교회는 이 “중생”의 신학을 지금까지 너무 지나치게 강조하여 이제는 이 문제를 고리타분하게 여길 정도까지 되었는가? 그래서 이젠 그리스도인의 “윤리와 책임”에 대해서 강조해야 할 단계에 이르게 된 것일까? 그리스도인됨에 대해서 확실하고 분명하지 않으면, “윤리와 그 책임”을 강조하는 것은“율법주의”가 되기 쉽다는 것은 교회사의 교훈이다.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활동(문화,예술, 정치, 경제 등)은 그리스도의 사역의 완성에 기초해야 한다. 이것에 강조하지 않고, 곧 “복음”과 “복음화”에 대한 충분한 강조없이 “문화대사명”에 지나치게 강조하게 되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행하는 모든 행위가 바로 그리스도의 구원케하시는 은혜에 근거한 것임을 잊어버리게 할 경향이 있다. 복음을 말하지만, 복음이 상실될 위기, 예수를 말하지만, 예수를 잃어버릴 위기가 바로 이런 경향 때문에 오게 되는 것이다.
(카이퍼의 창1:28에 대한 해석에 대해서 성경해석학적 측면에서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는 것도 언급해 둔다. 기회가 되면 이 점에 대해서만 써볼 기회가 있기를 바란다).
2) 문화에 대한 낙관적 견해 및 문화구속의 가능성에 대한 착각
위에서 지적한 카이퍼신학의 문제점은 그의 일반은총론과 긴밀한 관계에 놓여져 있다. 곧 그의 일반은총론은 세속문화활동에 그리스챤들이 활동하는 것을 강조하게 되고 결국 칭의나 중생의 개념에 있어서의 외현화(externalization)를 낳게 되는데, 이 항목에서는 일반은총론에 집중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카이퍼 이전에는 일반은총이라는 것을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동시에 햇빛을 비춰주시는 그런 분으로서의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일컬었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모든 세상에,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이 차별 없이 전파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원하기도 하였다. 카이퍼의 일반은총론이 여기에 머물러 있었다면 별다른 문제를 지적할 것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카이퍼에게 있어서의 일반은총이란 주로 우주와 문화의 구속을 향한 하나님의 은총을 의미하는 것이 되었다. 이런 일반은총의 개념은 그의 예정론과 결합되어, 하나님의 창조의 계획이 두 가지 길을 통해서 성취되어진다는 식으로 설명하는 신학체계가 형성되었다. 곧, 한편으로는, 택함받은 자들이, 특별은총을 통해서, 구속의 중보자가 되시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구원에 이르게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창조의 중보자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는 일반은총을 통하여서 우주가 그 모든 문화의 가능성을 담지한 채로 구속된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이 결국 문화와 세상에 대한 대단히 낙관적인 견해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것은, 어쩜 당연하다. 카이퍼는 천재였었고, 은혜를 많이 입은 자였기 때문에, 이 부분에 있어서 균형을 잃지 않았다. 그는 죄에 대하여, 그리고 그 죄의 이 우주와 인간에게 미친 엄청난 결과에 대한 성경적 시각을 잃지 않았음에 분명하다. 반정립의 사고방식이 철저해서, 일반은총과 특별은총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분명한 차이에 대한 인식이 그 추종자들에게도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 불행의 단초이다. 이런 일반은총론을 취한 많은 추종자들에게서는, 이 세상과 그리스도인 간에 있는 어떤 근본적인 차이점에 대하여 강조하는 것은, 너무 엄격하다는 식의 방향으로 발전(?)되어갔던 것이다. 소위 개혁주의자라고 하면서도 복음주의 신학을 선호하고, 목회에 복음주의 신학과 개혁주의 신학을 구분하지 않고, 또한 자신을 개혁주의자라고 불리워지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경향들도 다 이런 식으로 발전이라고 할 수 있겠다. 개혁주의를 표상하지만, 실상 개혁주의 신학으로 목회하는 자들이 별로 없게 되어 버린 것이 바로 현대 개혁주의의 자화상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필자의 요지는, 신칼빈주의가 바로 세속화의 길로 치닫게 되는데 있어서 이 일반은총론이 작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칭의라는 개념이 부인되는 것은 아니지만, 더 이상 그 칭의가 “체험적으로” 이해되지 않게 되었다. 칭의가 단지, 교리적으로 신학적으로 혹은 철학적으로 이해되는데 그치고 일종의 신조상의 고백으로 이해되고 마는 불행이 빚어지게 되는 것이다. 살아있는 생명의 교리가, 불타는 교리가, 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체험에 대한 지나친 경계가 아예 체험을 무시하는 신학체제로 변형되어버리게 된 것이다.
이런 신칼빈주의의 경향을 W. Aalders같은 학자는 “The Great Derailment”(엄청난 탈선)라고 평가하였다. 은혜의 교리가 외현화(externalization)되어 버렸다고 탄식했던 것이다. 카이퍼의 이 세상 가운데서의 그리스도의 왕국에 대한 열심이, 영적 가치를 세속화시켜버리는 과정을 가속화시키게 되었다는 것은 일종의 역설이다. 하지만, 이런 일은 교회사를 통해서 흔하게 있었던 일이 아니던가! 세상과의 계속되는 접촉의 과정을 통해서 그리고 세상의 영에 노출되면서, 점점 더 개혁주의 신앙은 외현화되어지고, 공허해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경향은 바로 카이퍼의 생애에서도 지적되었던 문제였음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카이퍼의 신학에 동조해서 시작된 교회(the Gereformeerde Kerken in Netherland)가 세속화의 길을 걷고 있는 것에도 또한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교회에 대해서 대항해서 31조파(K.Schilder의 1942년>의 분리운동으로 시작)라고 불리워지는 교회가 나중에 고신교단과 자매관계를 맺게 되고, 이 고신교단에서 SFC운동이 태동되었다는 것은 이 SFC운동의 방향성에 대한 일종의 좌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화란교회 내에서의 개혁주의 신학운동에 대한 역사에 대해서도 기회가 되는 대로 약술하기로 하겠다).
신개혁주의의 철학화 경향에 대해서는 4)에서 더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다.
3) 교회의 유기체성에 대한 지나친 강조와 제도적 측면에 대한 강조의 약화
신칼빈주의의 철학화와 체험무시경향을 다루기 전에, 먼저, 신칼빈주의가 그 당시의 철학적 개념을 수용하게 된 것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카이퍼가 활동하던 시대에 유행하던 철학적 개념이 바로 “유기체”라는 개념이다. 독일 관념론적 낭만주의 철학의 중심개념이 바로 이것이다. 이 “유기체”란 말은, 생물학적 용어로서 자기 법칙적 발전과 내재주의 사상을 담고 있다. 바로 이 개념을 카이퍼(와 바빙크)가 차용하게 된다. 그래서 나온 것이 바로 그의 제도적 교회와 유기체적 교회의 구분이다. 이런 용어의 차용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세상 철학의 개념과 용어를 빌려서 성경적 개념을 설명하려고 하는 것은 언제나 교회사에서 시도되어 왔었다. 문제는 성경과 복음이 왜곡될 정도가 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카이퍼의 교회론에서 있어서도 이런 왜곡의 가능성을 감지할 수 있다.
카이퍼에 의하면, 제도로서의 교회와 유기체로서의 교회로, 교회가 구분되어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한다. 제도로서의 교회는 세가지 직분(목사, 장로, 집사)이 주어져서 가르치고 성례를 베풀며 권징을 행하는 일을 한다. 신자들의 몸인 유기체로서의 교회는 사회적 활동에 연루되는데, 그래서 문화적 대사명을 실행하게 된다. 문제는 다음과 같은 그의 말에서 분명해 진다.
“The church as institute is not all of the church, nor the real or essential church, not the church itself, but an institute established through the church and for the church in order that the Word can be effective in its midst.”
제도로서의 교회가 유기체로서의 교회를 위해서 존재할 뿐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제도로서의 교회는 단지 유기체로서의 교회인 성도들을 무장시켜서 세상 속에서 그 세상을 그리스도를 위해서 구속시켜가도록 사회적 활동을 활발하게 개진해 감으로 문화적 사명을 성취시켜 가도록 하는 일을 위해서 존재하게 된다.
카이퍼 이전의 개혁주의 신앙인들 속에서는 사회 속에서의 그리스도인의 활동을 강조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기본적인 존재이유는 바로 죄인의 구원에 있었다. 이제 카이퍼의 신학에서는, 택함을 받은 자들이 이미 중생되어진 채로 이 세상에 들어온다. 태어날 때 이미 중생되어져서 태어난다는 것이다. 그렇게 유아가 중생되었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유아세례를 베풀게 된다(이런 중생관과 회심관은 아래의 5)에서 좀 더 자세히 다루겠다). 결국 교회의 주된 직무는, 이렇게 이미 중생한 사람들을 양육해서 세상에서의 삶을 위해서 그들을 준비시키는 것이다. 그가 “회개”의 중요성을 강조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런 그의 교회관에 근거하면, 불신자의 상태에서 신자로의 변화에 이르게 되는 회개나, 믿음, 새로운 출생, 칭의, 성화 같은 것에 대해서는 그렇게 많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게 된다.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서 죄인들의 심령 속에 역사하게 되는 것을 강조하기 보다는(카이퍼는 이런 것을 강조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이 사회와 문화를 구속하기 위해서 활동해야 하는 것이 우선적으로 중요한 일이 되어 버린 것이다.
유기체라는 독일관념적 낭만주의 철학의 개념이 카이퍼의 신학을 통해서 교회 내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이러한 유기체 개념은, 그 당시의 정통주의교회의 기계론적 초자연주의나 19세기의 물질주의나 진화론을 어느 정도는 극복할 수 있었지만, 인과론을 극복하지 못함으로, 성령의 역사를 일종의 유기체적 원리로서 이해하게 되는 길로 인도하게 된다. 결국 성령의 역사와 은사에 대한 세속화된 이해나 무관심에 기여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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