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신학자료

개혁주의, 몸살을 앓고 있다 (3)

baromi 2005. 3. 10. 09:15
LONG

6) 잘못된 회심관


카이퍼 신학의 중생관의 오류를 제대로 이해하면, 그의 회심관이 잘못되어 있다는 것은, 쉽게 간파된다. 무엇보다도 큰 잘못은, 구원에 이르는 회심을 중생과 분리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곧 그의 신학체계에 의하면, 앞에서 지적했던 것처럼, 중생했지만, 회심하지 않은 자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문제는, 구원의 서정이라는 구원의 과정에 있어서, 중생, 믿음, 회심, 회개 등의  순위에 대한 논의를 이해해야 좀 더 분명하게 이해될 수 있겠다. 사실, 이것도 논문감이다. 필자의 이 관계들에 대한 이해는, 필자의 회심의 과정을 기술해 놓은 다른 글을 언급함으로 간소화시키고 싶다. 관심이 있으면, http://www.yangmoory.org 의 “칼럼”란에 올려져 있는 <*목사의 회심이야기>란 글을 참고하기 바란다. 그리고, 이것에 관한 책을 번역해서 곧 국내에서 출간될 예정임을 귀띰해 놓는다. 간략히 약술하면, 말씀의 씨가 뿌려지는 초기중생(수정, conception)을 통해서, 자신의 죄인됨에 대한 각성과 인정, 참된 회개와 믿음, 그리고는 거듭남(중생)과 칭의, 그 이후의 성화의 과정을 통틀어서 회심이라고 보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회개는 회심의 과정 중에 있는 결정적인 변화의 단계를 말한다. 그러므로 회심이란, 순간적이고 결정적인 회개를 통한 기질과 성품의 변화를 동반하는 평생토록 계속되어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 회개와 회심을 구분하고 있음에 주목하라.


이런 회심관은, 종교개혁 이후로부터 17-19세기까지 강조되어 왔던 “기질과 성품으로 변화로서의 회심”과 일치하고, “새로운 기질”, “새성품”을 입게 되는 변화의 동반을 강조하는 회심관이며, 인간의 의지적인 결단을 강조하면서도 그것만으로는 되지 않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임을 강조하는 회심관이고, 예수를 나의 구주로 믿는 것만이 아니고, 바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것을 선언하는 회심관이며, “나의 정과 욕심을 그 육체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아 버렸음”을 선언하는 회심관이다.


이런 회심을 카이퍼가 강조하지 않았는가? 아니다. 분명하게 강조해 왔다. 특별히 그의 책, “The Work of the Holy Spirit”에서 누누히 강조하고 있다. 문제가 무엇인가? 다시 말하거니와 중생과 회심을 분리시켜 버림으로 인해서, 이 회심에 대한 강조가 왜곡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중생이란, 거듭남을 말하고, 그 거듭남을 통해서 새로운 기질과 성품을 부여받게 된다. 그런데, 이런 중생이 유아때부터 이미 일어나 버린 것으로 간주되어 버리기 때문에, 비록 회심을 강조한다고 하더라도, 그 강조의 위치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효과적이지 않게 들린다. 자칫하면, 회심(conversion)과 회개(repentance)가 혼동되어 버린다. 곧, 회심을 생각할 때, 인간의  의지적 결단을 강조하는 식으로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혼동이 바로 현대의 신칼빈주의자들 사이에서 빈번하다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신칼빈주의자들 사이에서는, 아예, 회심과 회개를 구분하지도 않는다. 구분할 수 있는 신학적 지평이 아예 없기 때문이다. 이런 혼동은, 찰스 피니의 부흥신학, 그리고 그 이후의 복음주의 운동의 득세와도 연결되어서 더욱 깊어져 가는 것을 본다. 현대교회의 복음주의운동의 흐름이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경향이 득세하게 된 것이 바로 신칼빈주의 때문이라고 필자가 지적하는 것이 아니다. 그 원인이 아니고, 그런 현상의 한 모습이라는 것이 필자의 논지이다. 그 원인에 대한 대강의 분석은, 필자의 또 다른 글, “영국 복음주의 운동의 과거와 현재, 영국한인교회의 좌표”라는 글을 참고하기 바란다.


필자는 한국교회의 위기는 바로 이 부분에서 지적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래서, “복음병원부도사태”(이것은 그 신학이 부도상태에 이른 한 증상이라고 보는 것은 너무 지나친 표현일까?)의 치유는 바로 한국교회 초창기에 있었던 회개운동의 올바른 신학화, 곧 역사적 칼빈주의의 회심과 중생이론을 한국적 상황과 관련해서 올바로 정립하고, 그것을, “민족의 체질을 변혁시키는 복음”으로서, 한국사회와 교회에 대안으로서 제시할 수 있는 데서부터 시도되어야 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제안해 본다.


이제 이 회개와 회심에 대한 왜곡된 실상에 관련해서 신앙생활의 핵심이 무엇으로 이해하는가 하는 문제로 넘어가자. 이 부분에 있어서의 신칼빈주의의 오해는 좀 더 심각할 지도 모른다.




7) 체험의 위치에 대한 오해


중생과 회심에 대한 왜곡된 견해는, 신앙생활에 있어서의 체험에 대한 왜곡된 태도를 갖게 한다. 이 점에 말하기 전에, 먼저, 필자의, 신앙생활에서의 체험에 대한 견해를 간략하게 피력하겠다. 간략하게는 미국의 대표적인 청교도 신학자 조나단 에드워드의 The Religious Affections에 나오는 견해를 취하고 있다.


체험은 교리보다도 우선되어서는 절대 안된다. 무엇보다도, 사람마다 체험의 질과 깊이에 있어서 다르기 때문에, 이것이 우선시되어지면, 일치된 신앙고백에 이를 수가 없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가 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성령께서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할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한 모습을 추구하기에 체험 우선, 체험중시주의 신학은 배격되어야 한다. 슐라이에르마허의 자유주의신학이든, 은사주의운동의 체험강조의 신앙생활을 동시에 경계해야 한다. 이런 입장을 한 마디로 얘기하자면, 체험 “주의”를 배격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체험주의를 배격하는 것 때문에, “체험”까지 무시하게 되면, 신앙생활에 왜곡이 오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한 편으로는 “교리와 신조”를 강조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도덕”을 강조하면서, “체험”을 무시하게 된다면, 그것은 지정의의 전인격으로 추구해야 할 신앙생활의 아주 중요한 한 국면이 무시되는 셈이 된다.


이런 면에서, 역사적 칼빈주의는, 특별히, 청교도의 신앙에서 표현된 형태는, “체험적 종교”(Experimental Religion)라고 일컫어 진다. 여기서 experimental이라는 말은, 청교도운동이 한창이던 17세기의 계몽주의 사조의 영향을 입은 단어이기도 하다. 그 당시 귀납법적 경험론이 강조되던 당시에 experiment라는 것은 곧 “감각”(sense)를 통한 경험적 확인의 절차를 의미하기도 했고, 이런 사조 가운데서 진행되던 신앙운동으로서의 청교도 신앙운동은 이런 시대사조를 잘 반영하는 가운데서도, 그것에 함몰되지만은 않고, 신앙생활의 옳은 체험적 국면을 표현할 때, 그것을 experimental한 것으로 묘사하였다. 그러니 이 단어는 한편으로는 “실험적”이라고도 번역되고, “체험적”이라고도 번역될 수 있는 말이다. 후자의 의미가 이 글에서의 뜻이다.


신앙생활의 지성적 측면으로서의 교리의 강조, 의지적 측면에서의 윤리적 삶(사회적 책임등)의 강조, 그리고, 정서적 측면에서의 교리의 체험과 그 체험에 기초한 동력적 삶의 전인적인 모습이야말로 마지막 결론부분에서 다시 한 번 강조하게 될 필자의 신앙생활관이다.


이것을 먼저 피력하는 것은, 체험의 어떤 면을 강조하려고 하는 필자의 견해를 오해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기 때문이다. 바로, 카이퍼 이후의 신칼빈주의 신학과 사상에 깊이 몰입해 있는 사람이라면 그럴 수가 있을 것이다. 신칼빈주의는 하나님의 말씀을 강조한다. 옳은 일이다. 그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교리에 대한 지식을 강조한다. 옳은 일이다. 그 교리에 근거한 삶을 강조한다. 옳은 일이다. 문제는, 그것이 신앙생활의 전부라고 한다면, 문제가 된다. 신앙생활에는 체험적인 국면이 있기 때문이다. 이 체험적인 국면을 무시하고 혐오하는 입장이 바로 신칼빈주의적 견해라면 놀랄 지 아니면 당연하다고 하실 지….


죄의 확신에 대한 어떤 신앙적 체험, 그런 체험으로서의 회심의 강조, 그리고 이런 참된 회심을 통한 구원에 이르는 은혜를 받았는지 받지 않았는지를 살펴보려고 하는 자기점검에 대한 욕구를 기피하려고 하고, 혹은 혐오하기까지 하는 것이 신칼빈주의적 경향성이다. 그래서, 그들은 청교도들의 신앙과 신학을 좋아한다거나 존경한다고 립서비스를 하지만, 진지하게 그들의 신앙과 신학을 자신의 것으로 취하려고 하지 않는다.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고, 또한 너무 고리타분하고, 너무 경직되어 있어서, 현대인들의 취향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청교도들의 신학과 신앙이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그래서 접해볼 기회를 가지지 못한다. 그리고, 그렇게 청교도 신앙과 신학과는 다른 별개의 신학을 “개혁주의신학”이라고 생각한다. 개혁주의신학에 대한 큰 오해이다. 신칼빈주의적 개혁주의이다.


객관적 교리적 진술에 대한 주관적 체험의 이해가 동반되는 것을 동시에 강조한 것이 바로 칼빈주의였다. “열정 칼빈주의”였다. 그 “열정” 칼빈주의에 “열정”이 빠지고, 이젠 칼빈 “주의”만이 남게 된 것이 신칼빈주의라 할 수 있겠다. 변형된 개혁주의이다. 프린스턴신학교의 학장이었던 아키발더 알렉산더의 Thoughts on Religious Experience를 탐독해 보라. 이것은 결코 슐라이에르마허의 체험신학이나, 윌리엄 제임스류의 체험이해와는 그 근본적인 동기와 질이 다르다.


신칼빈주의 신학과 신앙이 어떻게 체험을 무시하게 되었는가? 실상, 카이퍼 자신은 체험을 무시하지 않았다. 체험종교로서의 청교도들에 대한 외경감을 담지하고 있었다. 그의 Stone Lectures들을 일독하길 바란다. 문제는 그의 언약개념, 그리고 중생과 회심의 개념을 논리적으로 따라가다 보면 그가 원하지 않았던 막다른 골목, 곧 체험을 무시하게 되는 신앙의 패턴을 양산하게 되는 것이다. 곧, 태어날 때부터 중생한 아이가 비록 훗날 회심해야 한다는 식으로 강조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원리적인 강조가 될 뿐, 실제의 생활 속에서는, 이미 중생된 그 아이는, 자라면서 점차적으로, 비록 체험되어지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회심에 이르게 되든 지 아니면, 이미 회심을 한 것처럼 간주하게 될 가능성이 큰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신학체계에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확신을 하면서도 실제로는 아닌, 그럼으로 인하여 참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복음의 감격도 없는 바리새인적 “그리스도인”들을 양산하게 되는 것이다. 필자도 그런 사람들 중의 한 명이었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이런 칼빈주의는 역사적 정통적 칼빈주의가 분명히 아니라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오해가 없도록 하기 위해서 한 두 가지 관련된 문제를 다루지 않을 수 없다. 첫째는, 이런 체험에 대한 강조가 대각성운동들을 통해서 오게된 “부흥주의”의 소산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Ian Murray의 Revival and Revivalism이라는 책이 우리에게 분별력을 높여준다. 이 책이 꼭 번역되어 한국에 소개되길 바란다. 번역되지도 않은 이 책을 언급하는 것은, 필자가 그냥 감상적으로 흥분이 되어서 이런 얘기를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암시하기 위해서이다.


둘째는, 중생과 죄의 확신과의 관계에 대해서이다. 청교도들을 오해하는 어떤 이들은, 청교도들이 중생에 이르기 전에 죄의 확신에 이르게 되는 것을 너무 지나치게 강조함으로 인하여 일종의 “준비주의”(preparationism)을 낳게 되었다고 한다. 로이드 존스 목사의 후임으로 웨스트민스터 채플의 담임목사였다가 최근에 은퇴한 R.T. Kendall같은 이가 대표적이다. 이것에 대해서, Paul Helm같은 이는 Calvin and Calvinists라는 책에서, 청교도들이 죄의 확신을 강조한 것은, 결코, 중생에 이르게 되기 전에 설교자나 구도자가 그 중생에 마땅히 이를 수 있는 준비상태가 되도록 율법을 강조해야 한다는 “준비주의” 때문이 아니라, 구도자가 중생에 이르기 전에 죄의 확신에 이르게 되는 성령 하나님의 준비시켜주심(being prepared)인한 것이고, 그러한 성령님의 사역을 성취되기 위해서는 여러가지 설교와 전도, 상담 등의 방편을 통해서 설득해야 할 설교자의 책임에 대해서 강조한 것이라고 잘 구분하였다.


Kendall은 청교도의 신학이 베자를 통해서 칼빈의 신학을 왜곡시킨 것으로 본다. 청교도신학에 대한 혐오감을 드러내고 있다. 현대 기독교의 영성이 저하된 것의 그 원인을 잘못 찾고 있다. 그는 체험을 강조하면서도, 청교도의 체험을 무시하고, 은사주의적 체험을 추구하여서 결국, 웨스트민스터 채플의 그의 현재 후임자는 더욱 은사주의적인 스타일의 목사로 바꿔져 가고 있다. (사실, 이런 변질은 로이드 존스 목사가 은사주의운동에 대해서 관용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온 것이다. 그의 성령세례론은 청교도의 신학 중에서도, 존 오웬의 성령론을 따른 것이 아니고, 토마스 굳윈의 것을 따르기 때문에, 정통 칼빈주의와는 약간 거리를 두고 있다).


얘기 보따리를 풀자니 한도 끝도 없을 듯 싶다. 본론으로 돌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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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언약에 대한 철학적 개념화


위에서는 “유기체”라는 개념의 차용에 대해서 살폈거니와 이젠 “언약”의 개념 자체가 카이퍼 이전과는 달라진다는 것에 대해서 살펴보자. 한 마디로, 카이퍼에 이르러서, “언약”의 개념이 형이상학적으로 변화된다. 곧 그 이전에는 “언약”이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어떤 관계”를 설명하는 도구였었다. 그런데, 카이퍼와 그 후예들은 이것을 형이상학적으로 확장해서,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관계 뿐만 아니라,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세상, 예를 들면 국가) 사이의 모든 관계들에 대하여서도 적용시켜 사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언약”개념은 위에서 언급한 “유기체”의 개념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곧, 세계와 신과의 유기체적 관계를 설정하는 독일관념주의 철학적 전제를 받아들이게 되면, 이런 유기체적 관계를 성경의 “언약”의 개념 속에 잡아넣게 되는 것은 식은 죽 먹기가 되는 셈이다(신칼빈주의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유기체적 관념론은, 범신론적 경향을 갖고, 결국, 슐라이에르마허의 자유주의신학과도 연결되는 것에 유의해 두어야 한다). 그렇기에 우리가 세상의 철학의 흐름에 대해서 잘 파악하고 있어야 하지만, 언제나, 그 철학의 단점과 문제점을 염두에 두어야만 할 것이다. 성경을 통해서 계시되어진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외에는 우리의 삶과 신앙에 기준과 근거가 될 수 있도록 주어진 것이 없다. 절대 없다.


도대체 이런 유기체적 언약의 개념을 끌어들인 동기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한 개념과 사상이 지나치게 강조됨으로 한 켠으로 치우칠 것에 대한 염려 때문에 오게 된다. 정당한 염려이다. “하이퍼-칼빈이즘”(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 인간의 행함이 구원의 영역에서만 아니라, 그 구원에 이르게 되는 방편의 사용조차도 금지하는 경향을 가진 사고방식)의 위험을 숙지하게 되면, 이런 절대주권의 지나친 강조로부터 오게 되는 위험이 무엇인지 우리는 쉽게 알 수 있다. 그래서 그 위험을 방지하기 위한 대책이 시도된다. 그래서 언약의 개념을 끌어오게 된다. 문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언약의 개념이 상호대립되는 것으로 이해하게 되면, 이런 대립을 극복하기 위해서, 언약의 개념 자체에 어떤 변경이 불가피해진다는 것이다. 이런 변경된 개념으로서의 신칼빈주의의 유기체적 언약개념을 바로 이런 대립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이해해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과연,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언약의 개념이 그렇게 상호대립된 것일까?


이 부분의 설명이 무척 어렵게 여겨질 지 모르겠다. 애당초 약속처럼, 대략적으로 스케치를 한 뒤에 필요한 부분은 좀 더 자세한 설명을 시도하도록 하겠다. 우선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한 지나친 강조에 대한 우려, 노파심…..바로 이것을 우리가 제대로 이해해야 할 중요한 관건이라는 것이다. 그런 노파심 때문에, 기존의 “언약”의 개념에 변경을 가한 “유기체적 언약”의 개념은, 결국, “언약”이라는 개념으로 모든 관계를 파악하려고 하는 일종의 “Hyper-Covenantism”을 낳게 하고, 애당초 견제하려고 하였던 “Hyper-Calvinism”의 오류에 빠져들어가게 되니, 참으로 역사는 아이러니하다. 우리를 이 아이러니에서 건져주실 자가 누구인가? (감사하리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리하실 지니!) 그래서 헤르만 도예베르트 같은 “신칼빈주의”철학자는 벌코프의 신학이나 반틸의 변증학, 나아가서는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 등을 홀대하는 경향을 보여주기도 한다. (벌코프, 반틸의 신학에 문제가 전혀 없다는 것이 아니다. 이 부분도 참 할 말이 많은 영역이지만, 이렇게 언급만 해두기로 하자).


도대체 이런 언약의 개념에 어떤 문제점이 있다는 것인가? 우선, 이렇게 언약의 개념이 확장이 되면, 언약의 최우선적인 의미가 “죄인의 구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문화변혁”에 있게 된다. 신칼빈주의에서 창세기 1:28의 소위 “문화대사명”에 초점을 맞추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죄인의 구원”에 우선적인 관심을 두지 않은 채로 “세상의 문화변혁”에 우선적인 관심을 둠으로 해서, “죄인의 구원”, 곧 회심과 중생에 대한 관심이 희박해지고, 그 신학적 논리를 상실해 버리고, 그런 것에 대한 강조에 대해서 생리적인 거부감을 느끼고(이것이 바로 청교도들의 신학에 대한 혐오감의 실상이고, 소위 복음주의 신학의 현주소가 아닐까?), 결국 나아가서, 인본주의적인 삶의 태도를 노정하게 되고, 세속주의에 물들어가게 되는 것이 일종의 사회학적 관찰이다. 예술과 문화행위가 또 다른 우상적 행위로 변질되지 않게 되기를 소망해 본다. 현금, 포스터모더니즘으로 달려가고 있는 세상에서는 벌써 예술과 문화가 우상이 되고 있다는 것을 직시하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문화활동을 우상화되지 않으면서 크리스챤으로서 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은 결론에서 다루게 될 것이다. 사실, 이것이 주 관심사이고, 카이퍼신학의 비판동기이기도 하다. 비판의 과정에서 그것을 감지할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


필자의 주관심사항인 5), 6)항으로 넘어가기 전에, 신칼빈주의의 언약개념의 문제점에 대해서 한가지만 더 살펴보기로 하자. 신칼빈주의에서는 언약의 개념을 확장시켰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로서의 언약이라는 것에 있어서도 얼마간 변경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곧,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맺게 된 언약이라는 것이, 신칼빈주의에서는 주장하기를,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창조된 인간의 타락하기 이전 상태의 본질적인 요소라는 것이다. 무슨 뜻인가? 카이퍼 이전의 칼빈주의에서는 아담이 하나님께로 받은 행위언약 이전에도, 일종의 도덕률이 존재했었다는 것을 강조했었다. 이것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7장 1절에 잘 나타나 있다.


“The distance between God and the creature is so great, that although reasonable creatures do owe obedience unto him as their Creator, yet they could never have any fruition of him as their blessedness and reward, but by some voluntary condescension on God’s part, which he hath been pleased to express by way of covenant.”


하나님께서 양보해 주셔서(“some voluntary condescension”이란 글귀 참고), 언약, 곧 행위언약을 맺으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행위언약을 맺기 이전에도 아담은 창조주되신 하나님께 마땅히 복종해야 할(“owe obedience”라는 글귀 주목) 도덕적 의무가 있었다는 의미이다. 미세한 차이처럼 보인다. 이런 차이에 주목해야, 칼빈주의-신칼빈주의논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고, 현하 개혁주의가 앓고 있는 몸살을 치료할 수 있다. 곧, 신칼빈주의는, 이런 미세한 차이에 주목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아담과 하나님 간에 맺은, “행위언약으로서의 율법”(the law as covenant of works)과, 그 이전에도 있었던 인간의 마땅한 본분으로서의 “생의 법칙이 되는 율법”(the law as rule of life)을 혼동함으로 인해서, 결국 표현하기 두려운 일이지만, 반율법주의(antinomianism)의 씨를 뿌려놓게 되었던 셈이다. 필자가 보기로는 이런 비판은 지나친 감이 없잖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위험의 가능성이 있는 hyper-Calvinism과 연결되는 대목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언급해 두고 싶다. 문화활동과 사회에서의 윤리적 책임을 강조하면서, 실상은, 이런 반율법주의적 경향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 의아하게 여겨질 지 모르지만, 유념해 두어야 할 대목이다. 문화활동과 사회참여가 실상, 곧 복음의 원형에 근거하지 않고, 피상적이고 관념적인 복음의 이해와 관찰에 근거한 인본주의적 운동이 될 가능성을 눈여겨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5) 잘못된 중생개념과 유아세례관


카이퍼 신학의 가장 심각한 문제점은 바로 그의 중생개념이다. 이 중생개념에서 파생된 것이 그의 유아세례관이다. 필자는 장로교 목사로서 칼빈의 이해를 따라서 유아세례를 주장하는 사람이되, 결코 카이퍼의 유아세례관을 받아들이지 않음을 미리 밝혀 둔다.


지금까지의 신칼빈주의의 언약개념에 대한 설명을 통해서, 어느 정도 감지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이런 아담과의 맺어진 언약이 모든 인간과 더불어 맺어진 언약이었고, 이 언약은 그러므로 인간이 인간으로서 출생하게 되는 바로 유아 때부터 맺어지게 된다는 생각이다. 바로 이것이 카이퍼의 생각이다. 신자의 자녀는, 태어나면서부터 “중생”이 되어서 태어난다는 것이다. 이미 하나님과의 언약관계 속에서 태어난다는 것이다. 성인이 되어서도, 이 언약관계를 거부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 언약관계를 거부하기까지는, 이 신자의 자녀는 “구원에 이르는 은혜”(saving grace)를 담지하고 있는 사람으로 간주된다(presume). 그래서, 이런 카이퍼의 중생관을 “간주된 중생”(presumptive regeneration)론이라고 한다.


눈을 부릅뜨고 이 글을 읽어가기를 요청한다. 아마도 이 글을 읽게 되면, 필자가 목사된 지 6년 뒤에야  ‘참된 중생’을 하게 되었다는 말을 어느 정도 조금이나마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필자의 선친은 목사였었고, 또한 필자는 유아세례를 받았었다. 그럼에도 참된 중생을 알지 못하였었다. 카이퍼가 “중생”만을 이야기하지 않고, 그 이후의 “회심”에 대해서 강조하기는 하지만, 그런 주장은, 중생과 회심의 관계를 신학적으로 오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목회상황에서, 실은, “거의 그리스도인”(Almost Christian)임에도 “전혀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Non-Christian)을 양산해 낼 가능성이 바로 여기 카이퍼의 신학체계 속에 숨어 있음을 깨닫지 못한 채로, 카이퍼의 신학에 물들여져 왔기 때문이다. 이것은 “카이퍼”라는 이름을 알고 모르고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필자가, “카이퍼”라는 이름을 알았든 몰랐든 그것과 관계없이, 어쨋튼, 목사가 된 지 6년에 이르기까지 “거의 그리스도인”이었지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카이퍼”의 신학체제 속에 담지되어 있는 아주 위험한 요소이다. SFC가 카이퍼 신학의 이 문제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어쩜, 허공을 치는 운동이 되고 말 것임을 조심스럽게 지적하고 싶다. 그러니, 눈을 부릅뜨고 필자의 글을 읽길 요청하는 것이다. 대안적 세계관으로서의 개혁주의, 사회변혁의 철학적, 신학적 대안으로서의 개혁주의에 감격하고 흥분하며 주창한다고 할 지라도(필자도 그러했었다), 바로 이 중생에 대한 신학이 바로 정초되지 않으면, 그 어떤 운동도, 그 어떤 신학도 주의 나라의 일에 물거품일 뿐이다. 주여, 우리의 눈을 열어 이것을 바로 보게 하옵소서! (필자는, 이 문제의 심각성을 알고, 현재, 이 문제와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텍스트로서의 자아”(Self As Text)라는 글을 집필하고 있는데, 이번 여름이면 탈고하게 된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모더니즘에서 포스터모더니즘으로의 변화과정에서 형성된 회심개념의 변화과정에 대한 지식사회학적 연구”라는 글을 심도있게 집필하게 된다. 관심이 있으신 분의 기도를 부탁한다).


카이퍼의 “간주된 중생”론은, 얼핏 보면, 칼빈의 신학에서 유래한 것 같다. 그리고 카이퍼는 그렇게 주장한다. 그러니, 그의 견해를 비판하는 것은, 논문감이다. 하지만 이 글은 논문이 아니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간략히 기술하기로 한다. 그가 자신의 견해를 주장하기 위해서 인용하는 칼빈의 글, Gomarus, Maccovius, 특히 Voetius 등의 글은 대부분 재침례파를 반대하기 위해서, 유아의 중생가능성을 어느 정도 인정한 글에서 인용한 것이다. 이 논쟁의 맥락을 잘 이해해야 한다. 재침례파는 유아세례를 반대한다. 그 반대하는 것을 반대하다 보니, 어떤 강조점이 극단으로 가기가 쉬워진다. 곧 재침례파의 유아세례를 반대하기 위해서, 어떤 유아는 태어날 때부터 중생할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데, 그런 주장을, 모든 (신자의) 유아는 태어나면서부터 중생했다는 식으로 주장하게 되면, 일종의 왜곡이 일어나는 것이다.


전통적인 칼빈주의자의 입장에서는 신자의 유아라 하더라도 중생하지 않는 자로 여긴다. 언약을 근거로 해서 유아세례를 베푼다 하더라도, 이 점을 분명히 했다. 물론, 이런 입장에도 문제가 있고, 긴장이 느껴진다. 하지만, 신자의 자녀라 하더라도, 유아세례를 받은 자라 하더라도, 자신의 지정의로 구원의 필요성을 깨닫고 참된 믿음과 회개를 통한 중생의 표지를 보여주기까지는, 중생하지 않은 자로 여겼다는 것이다. 이것이 카이퍼와 동시대에 살았던 헤르만 바빙크의 견해이고, 프린스톤 신학교의 찰스 핫지나, 아키발더 알렉산더의 입장이다.


카이퍼의 견해에 따르면,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회심하게 되기 전에도 중생한 상태가 된다. 그래서, 그는 회심 이전의 사울을 “중생한 신성모독자”(a regenerated blasphemer)라고 불렀다고 알려진다. 여기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중생”의 개념이 얼마나 천박해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현대의 복음주의자들에게 있어서의 천박한 “중생”개념과 거의 유사해 진다. 은사주의자들의 “중생”개념과도 거의 비슷한 수준이다. 이런 “중생”개념을 전제하기 때문에, 중생 이후의 “회심”을 강조하는 이상야릇한 신학체계를 우리가 만나게 된다. “중생” 이후에 “제 2의 축복”으로서의 “성령체험”을 강조하는 현대은사주의자들, 오순절주의자들과 그 논리의 맥이 일치하는 것에 주목하라. 왜 개혁주의 운동의 한 본산이라고도 할 수 있는 고려신학대학원 출신의 상당수의 목사들이 현대의 은사주의운동에 그렇게 거부감이 없이 몰입되고 있는가? 왜 개혁주의자들이 개혁주의 운동과 신학을 부끄러워하는가? 조심스럽게 진단해 보는 것은, 개혁주의신학과 신앙이 신칼빈주의적인 관점에서 이해되고 있기 때문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그것을 의식하든지, 의식하지 못하든지….


더욱 구체적으로 카이퍼의 논리를 비판해 보자. 카이퍼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0장 3절을 자신의 주장의 근거로 삼는다. 신자의 자녀로서 유아 때 죽은 자들은 중생된 자로 간주된다는 것이 그 빌미이다. 이 고백을 근거로 모든 신자의 자녀들은 중생된 자로 여긴다는 것이다. 논리의 모순을 발견할 수 있는가? 첫째, 신자의 어떤 자녀들(일찍 죽은 자녀들)이 중생된 자로 간주될 수 있다는 사실에서 신자의 모든 자녀들이 중생된 자로 간주될 수 있다는 논리의 비약에 주목하라. 둘째, 어떤 자녀들의 중생의 가능성(possibility)에 근거해서 그 어떤 자녀들의 중생의 가망성(probability), 나아가서 중생의 간주성(presumption)으로 논리가 비약되고 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이 신자의 자녀들 중 유아 때 죽은 자를 중생된 자로 여기는 경우를 인정한다고 해서, 신자들의 모든 유아들을 중생된 자로 보지는 않았었다. 그들이 여전히 중생되어야 할 자들로 보았다. 그런데 왜 유아세례를 베풀었는가? 그것은 언약의 표로서 행하였다. 곧, 구약의 할례받은 것이 그 육체의 할례로 인하여 언약의 외적 표로 삼았던 것처럼(하지만, 마음의 할례가 진정한 언약이었다), 유아세례도 앞으로 있게 될 마음의 할례에 대한 일종의 외적 표로서 행하였던 것이다. 그렇게 마음의 할례에까지 이르도록 키워갈 것에 대한 부모의 서원이요, 소망이요, 결심이 담지된 행위가 바로 유아세례인 것이다. 곧, 자신의 자녀들이 참으로 중생하여서, 하나님과 더불어 자녀들 스스로 마음의 할례와 일치되는 내적 언약을 맺을 수 있도록, 그 내적 언약을 가르키는 일종의 사인이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전의 칼빈주의자들은, 자신의 자녀들이 마음의 할례에 이르기까지 교육시키고 양육하는 것이 바로 부모의 책임으로 여겼다. 청교도들에게 가정이 그렇게도 소중한 역할을 했던 것을 바로 이런 맥락과 관련해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어떻게 자신의 자녀가 참된 중생을 통한 구원에 이르지 않고 어떤 다른 일을 중요하다고 할 수 있었겠는가?


이런 강조로부터 이미 자녀들이 중생한 자로 여길 수 있는 것으로서의 유아세례로 변화된 것은, 변화라기 보다는, 일종의 변질이다. 칼빈주의를 위협하는 아주 위험한 변질인 셈이다. 바로 신칼빈주의에게 이런 위험의 요소가 남아있음을 강조한다. 필자의 젊은 시절이 바로 이런 신칼빈주의에 희생되었던 삶이었음을 발견하고는 얼마나 통곡했는 지 모른다. 이런 통곡으로 가슴을 치는 자들이 많이 나오기를 소망한다.


카이퍼의 이런 중생개념, 유아세례 개념에는 더욱 위험한 사고방식이 숨어 있다. 곧, 하나님의 감추어진 뜻(the secret counsel of God)을 신학과 삶의 기본 토대로 삼았다는 것이다. 유아나  태아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주권적으로 역사하시느냐 하는 것은, 인간의 지혜로는 접근할 수 없는 전능하신 절대주권의 하나님의 영역에 속한 것이다. 그런 영역에 속한 일에 인간의 부족한 지혜의 칼을 들이대면서 해부하고, 그것으로 신학적 토대를 쌓아가는 것은, 헤아릴 수 없는 일을 헤아릴려고 하는 인간의 교만이다. 이미 계시되어진 하나님의 뜻에 자족하지 않으려는 인간철학의 소산이기도 하다. 바로 계시되어진 하나님의 뜻에 의하면, 신자의 모든 자녀들 조차도, 참된 믿음과 참된 회개로 부르셔서 중생에 이르게 하신다는 것이 자녀양육의 기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부모의 의무와 책임을 면제시켜주는 듯한 신학이 바로 카이퍼의 신칼빈주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