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신학자료

개혁주의, 몸살을 앓고 있다 (4)

baromi 2005. 3. 10. 09:13

8) 신앙생활의 핵심에 대한 오해


위 7)의 논지와 비슷하면서도 더욱 본질적인 것은, 신앙생활의 생명이 외적인 제도적 기구나 활동에 있다고 보는 것이 신칼빈주의의 태도이다. 물론, 이것은, 신칼빈주의에 속한 사람들이 노골적으로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활동 스타일과 범위를 보면, 그렇게 분류가 된다는 것이다. 역사적 칼빈주의자들이 보았던 신앙생활의 핵심은, 바로,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와 친교였다. 그리스도와 생명적 연합에 기초해서 모든 신앙생활이 영유된다는 것이 정통적 칼빈주의자들의 견해였었다. 이것이 신칼빈주의자들에 의해서 약화되든지 무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신칼빈주의자들이 이런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기초한 하나님과의 교제의 삶이 가장 우선순위라는 것을 무시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앞에서 논의한 것들의 자연적이고 논리적인 결과가 그렇다. 곧, “문화”라는 것이, 이제 그들에 의해서,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활동, 그리고 예술과 문화활동의 모든 영역을 담지하게 되었고, 이제 그런 모든 영역에서의 문화행위가 개혁주의 신앙인의 몰두해야 할 행동양식으로 대두가 되었다. 이전에 그렇게도 강조되었던, 한 영혼의 구령화, 복음화에 대한 관심, 바로 그 일을 위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적 역사와 그 은혜에 대한 관심이 사라져가고 있는 것이다. 이미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닐까? 아니길 바란다. 과연 영혼이 구원 받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에 대한 진지한 관심의 회복부터 개진되어야 할 것이다. 피상적인 관심에 머물러서 스스로를 속이지 않아야 한다. 이제 개혁주의신앙인들은 정치적인 활동과 구호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다시 말하거니와, 이것을 강조하면서 영혼구령을 무시하노라고 구체적으로 개진하는 “신칼빈주의자”는 없다. 하지만, 물어보라. 복음전도와 선교, 그리고 기독교인의 사회관여에 대해서 양단간의 선택을 요구하라고 질문받았을 때, 나는 어느 곳에 먼저 관심을 가지면 우선권을 두고 나의 삶의 에너지를 경주해 가고 있는가? 스스로를 진단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오해하지 말기를 바란다. 이 두 영역, 곧, 선교나 전도와 사회관여의 두 영역이 분리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우선권에 대한 질문이다.


왜 신칼빈주의자들이 분명하게 드러내지는 않지만, 왜 그들의 마음 속에, 영혼의 구령사역보다는 외적인 봉사와 사회참여에 대한 관심을 우선적으로 가지게 되었을까? 역설적으로, 바로, 카이퍼의 반정립이론에서 그런 동기가 출발한다. 그리고, 이러한 카이퍼의 반정립이론은 헤르만 도예베르트의 철학에서 꽃이 핀다. 손봉호교수가 유학을 마치고 들어와서 제일 강조한 사람이 누구인지 회상해 보기 바란다. 그리고, 그의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 어떤 경향을 가지고 있는지도 필자의 글과 함께 비교해 보길 바란다.


물론, 성경에서는 그리스도와 세상간에 있는 적의감으로서의 안티테제(반정립)가 있음을 선언한다. 신자와 불신자 간에도 그렇다(고후6:15). 그리고 이런 안티테제는 신자의 모든 삶의 영역에 관여한다. 문제는, 과연, 성경에서 말하는 이런 안티테제가 카이퍼나 도예베르트가 말하는 식으로서의 안티테제인가 하는 것이다. 곧 형이상학적 개념으로서 주장되고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논리학, 기독교수학이 가능한가 하는 것이다. 이런 논리로, 기독교노동운동, 기독교정당운동 같은 것이 가능한 지도 물어보아야 한다. 곧 안티테제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여겨질 수 있는 곳에까지 안티테제를 주장함으로서 그 형이상학 성격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 소위 “기독교세계관운동”일 수 있음을 감지할 수 있어야 한다. 모든 영역에 안티테제를 강조함으로서,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는 영역에서까지도 안티테제를 주장하게 될 위험이 있는 것이다. 곧 종교의 이름으로, 신앙의 이름으로, 기독교의 이름으로, 아니,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하게 될 위험이 있음을 생각해 보았는가? 이런 안티테제의 개념은, 성경에서보다는, 오히려 헤겔의 정, 반,합의 이론을 흉내 내고 있는 것은 아닌 지 질문해 보기를 바란다.




9) 자연과 은혜간의 차이에 대한 애매모호함


앞에서 논의했던 “유기체”의 개념을 상기시켜 보기 바란다. 그리고 이 유기체의 개념을, 자연과 은혜, 창조와 구속, 이성과 계시의 관계 속에 대입시켜 보기 바란다. 자연과 은혜의 관계가 유기체적이고, 창조와 구속의 관계, 이성과 계시의 관계가 또한 유기체적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그 유기체적 관계의 배경에는 바로 “언약”의 개념이 놓여져 있다. 이 모든 주제 하나 하나가 심도있게 다뤄져야 할 주제이다. 하지만, 아마도, 이젠, 어느 정도 신칼빈주의의 정체와 면모에 대해서 대강의 스케치 윤곽이 드러났을 것이다. 여기선, 자연과 은혜간의 관계에 대한 유기체적 이해만 살펴보기로 한다. 이것이 문제를 야기시킨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큰 문제는, 이 유기체적 이해로 인해서, 자연과 은혜간의 사이에 분명한 선이 그어지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혼동이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정통적 칼빈주의에서는 이 선을 분명하게 그었다. 은혜의 언약과 행위언약간에 분명히 대조되는 바를 강조하였고, 그래서, 그런 대조의 의미로서, 행위언약을 자연의 언약이라고도 부르곤 하였다.


그런데, 신칼빈주의자들은 이런 대조를 스콜라티시즘이라고 비판을 한다. 이런 자연과 은혜를 대립되는 것으로 이해하게 되면, 이원화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헬레니즘에 연유한 중세의 토마스 아퀴나스 류의 스콜라주의에 빠져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특별히 신칼빈주의자들은, 청교도 이후의 신학자들을 “정통적 칼빈주의자들”이라고 규정하면서, 이 용어를 경멸적인 뉘앙스로 사용한다. 그들은 B.B. 워필드나, 핫지 부자, 그리고, 바빙크, 벌코프, 존 머레이, 그레샴 메이첸같은 신학자들을 비판한다. 그래서, 그들은 오히려 신정통주의자들과 더욱 친화감을 느낀다. 실제로 그렇게 신정통주의로 전향해간 신칼빈주의자들도 없잖아 있다.


과연, 정통적 칼빈주의가 스콜라티시즘인가? 이것에 답을 하려면 스콜라티시즘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글의 성격상 간단히 기술한다. 중세의 스콜라티시즘에 의하면 자연과 은혜를 분리시킨다. 은혜의 영역은 계시로 인해서 접근가능하지만, 자연의 영역을 그래서 우리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가능한 것으로 보아서 자연신학을 출범하는 전거가 된다. 이것은 필히 비판해야 할 일이다. 프란시스 쉐퍼의 토마스 아퀴나스에 대한 비판의 정당성에 대한 질문이 타당성이 없는 바는 아니지만, 그의 아퀴나스 비판에는 또한 타당성이 있다. 문제는 이런 중세 스콜라티시즘에 대한 비판의 논리를 개혁주의 정통주의, 곧 개혁주의 스콜라티시즘에 적용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여기에 미세한 구분이 필요하다. 중세의 스콜라티시즘이 자연신학을 강조하면서, 이 영역에서의 이성의 기능을 강조하고, 이성을 진리의 판단의 기준과 근거로 활용하게 되었다면, 과연, 개혁주의 스콜라티시즘이 이성을 계시 위에 두어서 모든 진리의 판단기준으로 인식하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이성과 지성의 기능을 제대로 인지하고, 그 위치를 올바르게 정립시키는 것과, 그 이성의 기능을 극대화시켜서 계시 위에 두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바로 이것을 올바로 구분해야 한다. 결코, 정통적 칼빈주의신학, 역사적 칼빈주의 신학은, 이성의 기능이 절대화되도록 방치해 둔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스콜라티시즘이라고 비판할 수 없다.


정통적 칼빈주의자들은 마음의 기능을 강조한다. 이때의 마음은 단순히 지적인 기능이 아니고 전인적인 것이다. 곧, 지, 정, 의의 모든 기능들이 전인격적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의지에 치우치지도 않고, 정서에 몰입되지도 않고, 그러면서 지성에 모든 것을 걸지 않되, 이 모든 것을 통제하고, 조절하며, 조화를 이루는 기능을 지성에 두었다. 그것은 지성을 강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정상적인 인간의 기능을 위해서였다. 하나님의 계시는 이성을 통해서 감정에까지 이르게 되고, 그 감정의 영향을 끼친 의지의 작용을 통해서 행동과 실천에 이르게 된다. 감정이 지나치게 작용하거나, 전혀 무감동한 것에 대한 문제점들을 어디에서 감지하는가? 바로 지성에서 이다. 의지의 작용에 그 논리적 근거를 제시하고 합리화시키며 때로는 부끄러움에 이르도록 깨닫게 되는 기능이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바로 지성을 통해서이다. 지성은 우리 인격의 세 요소 중에서 일종의 선지자적 역할을 한다. 그 선지자의 역할에 의해서 왕의 역할을 하는 것이 의지이다. 정서는, 일종의 제사장적 역할을 한다. (사실, 이런 설명은, G.I. 윌리엄슨의 소교리문답해설서에서 읽은 기억이 나는데…, 정확한 지 기억이 희미하다.) 선지자, 왕, 제사장의 삼중직의 역할이 온전히 회복된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삼중직분의 완수 때문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작은 그리스도로서 살아야 할 근거가 바로 이것에서 기초한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소금이 되고, 빛이 되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 때문이다. 그리스도로 인한 구원의 감격과 전율로 인해서, 우리는 빛이 되고, 소금이 된다. 빛이 빛이 되고, 소금이 소금이 되는 것이다. 우리의 빛된 사명은, 바로 우리의 빛됨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문화적 사명은, 우리의 선교적 사명에 기초한 것이다. 빛됨 없이 빛의 역할을 할 수 없겠기 때문이다. 소금도 아닌데 어떻게 짠 맛을 낼 수있단 말인가?


자연과 은혜와의 차이를 분명히 할 때에 은혜가 자연을 정복하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도 알지 못하는 중에, 은혜가 자연에 의해서 함몰되는 비극을 맛보게 될 것이다. 이것이 신칼빈주의자들에 대한 정통적 역사적 칼빈주의자의 경고이다.





6. 결론: 대안으로서의 문화의 회심과 회심의 문화


몸살 정도를 앓으면, 그냥 시간이 지나면 자연치유가 되는 경우가 흔하다. 개혁주의권 안에서의 칼빈주의-신칼빈주의 논쟁도 개혁주의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일종의 몸살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제목을 “개혁주의, 몸살을 앓고 있다”고 붙였다. 이 논쟁도 시간이 지나면 자연치유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칼빈주의이든 신칼빈주의이든 모두 “칼빈”의 신학과 사상을 중요시하고 또한 “개혁주의”라는 일종의 신학체제를 인정하고 있다. 이 공통점을 얼마나 잘 활용하고 인정하면서 토론하고 논의하느냐에 따라서,이 논의는 교회사에 아주 긍정적인 열매를 맺게 하는 촉진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대립의식과 분파의식을 가지고 이 문제를 Rm집어 내어서 쟁론하게 되면, 이 몸살은 일종의 홍역으로 커지게 될 것이고, 어쩌면 치유하기에 무척이나 힘든 질병으로 확대될 수도 있다. 이 칼빈주의와 신칼빈주의의 간극의 크기를 어느 정도로 보느냐에 따른 인식의 정도와 차이에 의해서 이런 일들이 있거나 혹은 방지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신칼빈주의가 상당히 위험한 수위에까지 미치도록 칼빈주의를 이탈해 가고 있다는 것을 이 글에서 지적하였다. 하지만, 신칼빈주의의 장점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역사적 칼빈주의자들이 무시해 왔던 것들을 당연하게 지적하고 그것을 강조해 왔다고 할 수 있겠다. 필자의 논지는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장점들을 잘 살리면서, 정통적 칼빈주의가 담지하고 있던 바로 그 핵심을 어떻게 하면 다시 회복시킬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은, 같은 형제로서의 공동전선을 형성하게 될 때에 가능해 질 일이다. 그 공동전선이란, 바로 서로의 관심을 진심으로 진지하게 공유하게 되는 것에서 가능해 진다. 죄인의 구원을 강조하든지, 문화의 변혁을 강조하든지, 공통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관심은 바로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구호가 아닌가? 이것이 진정한 공통관심사라고 한다면, 형제들로서의 허심탄회한 대화와 토론이 가능해질 것이라고 본다.


어떤 파벌의식과 집단세력을 형성하려는 것이 아니라, 공동으로 소망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는 마음으로, 복음의 참된 능력이 모든 영역에까지 미치도록 애쓰는 노력이, 서로에게 요청되어져야 할 것이다.


그래서 서너가지 제안을 하면서 이 글을 마치려고 한다.


첫째, 문화의 회심과 회심의 문화를 함께 관심두어야 한다. 함께 관심두지 않음으로 인해서, 영국의 개혁주의권내에서는 결국 분열로 치닫고 말았던 비극이 있었다. 로이드 존스 목사와 존 스토트목사의 분열이 바로 그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존경한다고 하면서도, 결국은 서로가 다른 신학적 파벌을 형성하고 말았다. 각자의 길을 간 셈이다. 로이드 존스 목사의 중생의 신학은 문화에 대한 소극적 관심으로, 존 스토트 목사의 신학은 회심에 대한 소극적 관심으로 서로를 비판할 수 있다.


현대 복음주의 신학계를 대표하는 두 사람의 이 견해 차이는, 한국의 개혁주의권내의 갈등에 좋은 교훈이 된다. 두 사람을 종합하라. 필자의 조언이다. 현재 필자는 이 두 사람이 활동했던 런던 땅에 거주하면서, 두 사람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다. 런던문화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 연구하고 가이드하면서, 그 문화의 깊이를 맛보면서, 회심과 중생을 가르치는 도구와 기회로 삼고는, 이 세속화되어버린 기독교후기의 문화를 어떻게 변혁시켜가야 하는 지에 대해서, 그 대안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다. 함께 고민했으면 하는 소원으로 함께 기도하기를 제안한다.


둘째, 지정의의 전인격으로 체험하는 진선미의 보편적 진리를 추구하는 이상을 포기하지 말자는 것이다. 이 이상은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공통된 목표였었다. 그런데 이 포스터모던의 이 현대사회에서는, 지성과 정서와 의지가 분열되어져 버렸고, 아예, 인격이라는 것이 상실되어버린 시대가 되었다. 그리하여 진리의 개념자체가 변질되고, 선과 아름다움이 서로 분절화(fragmentization)되어 버린지 오래이다. 참으로 만물이 목을 빼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을 고대하고 있다(롬8:19). 그 영광에 자유에 이르기를 탄식함으로 기다리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이 통일될 그 날을 소망하고 있는 것이다(엡1:10). 칼빈주의와 신칼빈주의의 화해와 통일 없이 어떻게 만물이 통일될 것을 기대할 수 있으랴!


셋째, 이 대통일의 역사는, 우리의 통일의지로 완수되는 것이 아니라, 삼위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은혜로만 말미암아 가능하다. 그렇기에, 이 삼위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소망하면서, 우리의 지성과 의지와 정서가 이 하나님 한 분에게 집중되어야 할 것을 제안한다. 이것은 물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고자 하는 기존의 개혁주의적 관심을 유지하고 또한 흥기시키는 것 뿐만 아니라,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의 사역의 그 독특하심과 함께하심을 함께 강조하면서, 그 하나되심과 그 다양하심을 동시에 인지하는 신학의 수립을 위해서 공동의 노력을 경도해야 할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야 말로, 삼위 하나님의 윤무(페리코러시스) 속에서, 우리도 또한 윤무의 춤을 함께 추게 되는 그 날을 소망하는 모습들일 것이다. 우리 안에서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삼위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이런 선한 꿈들을 허락하시길 기도한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2004년 5월 1일 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