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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멜깁슨의 The Passion of Christ(호레이스)

baromi 2005. 3. 10. 09:05

 

                               고난주간을 시작하면서

                     (멜깁슨의 The Passion of the Christ와 관계해서)

 

  종교개혁자들은 “사순절”이라는 로마캐톨릭의 교회절기를 폐지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강조하면서 너무 많은 미신적인 요소가 개입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의 수난을 강조한다는 명목하에서 수난을 상징하는 십자가상의 제작과 그 상앞에서의 기도가 영험이 있을 것이라고 하는 생각과, 그런 상들을 소지하면서 일종의 부적 같은 효과를 기대하게 되는 심리들을 말한다.

 

  이런 요소들이 종교개혁의 전야라고 할 수 있는 12-14세기에 극성을 부렸었다. 그런 미신적 신앙을 일파한 것이 바로 종교개혁이었다. “고난받는 그리스도”를 지나치게 강조함으로 인해서, 복음의 다른 요소들을 무시하게 된 것이 바로 12-14세기의 그리스도론이었던 것이다. 무시되었던 것이 무엇인가? 바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해서이다. 아마도 그런 부활의 이미지는 참으로 형상화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형상화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부활”을 무시하고 눈에 보이는 형상에만 집착했던 것이 바로 그 시대의 특징이었던 것이다. 부활없는 십자가의 신학-이것은 변질된 신학이다. 고난 자체를 위한 고난을 강조하기가 쉽다.

 

  멜깁슨의 영화, The Passion of the Christ 때문에 말들이 많다. 한번 씩 기회가 된다면 보기를 권한다. 지금껏 상상해 왔던 예수님의 고난당하심에 대해서 좀 더 피부에 닿도록 느낄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피부에 와닿게 된다는 것에 문제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 과연 피부에만 와닿게 하고, 그 피부를 뚫고 들어가서 “영혼”에까지 그 메시지가 닿게 되는가 하는 것이다. 이상하게도 극사실주의로 묘사했다는 이 영화를 보고는, 오히려 영혼의 메시지를 들을 수 있었다는 소감들이 별로 없다. 이 영화의 한계일 것이다. Bloody Jesus Christ를 거의 전적으로 육체의 고통에서만 초점을 맞춰서 묘사했기 때문에, 이런 한계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예수의 참된 고통은 육체의 고통이 아니라(물론 그것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아버지와의 단절로 말미암았던 고통이다. 떨어질 수 없고, 분리될 수 없는 분과의 단절-우리가 과연 그것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The Passion of the Christ는 바로 12-14세기, 로마캐톨릭교회가 극성을 부리던 시대, 십자가를 빙자하여 미신이 횡횡하던 바로 그 시대의 신학을 담지하고 있다. 경계해야 될 대목이다. 십자가라는 미신이 횡횡했다는 것은, 그 미신으로 이익을 챙겼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 미신을 조장하고, 혹은 현혹되면서, 그 미신은 더욱 어둠으로 빠져들어가게 될 수 있었다. 결국, 동전 한 잎 헌금상자 바닥에 뎅그렁 떨어지는 소리에 그 헌금이 위해서 드져지는 나의 친척 중의 어느 한 명의 영혼이 연옥에서 천국으로 올라가게 될 것이라는 면죄부의 미신이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돈의 논리가 그 미신 속에 파고들어갔던 것이다.

 

  왜 이 영화가 하필이면 “사순절”이 시작되는 주간에 상영되기 시작했을까(미국의 경우)? 왜 이 영국에서, 그리고 한국에서는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바로 이 즈음에 개봉이 되는 것일까? 장삿속과 맞물려지고 있다는 것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돈의 논리가 이 영화를 만들었고, 이 영화를 개봉하고, 또한 상영한다. 이 영화를 볼 수 없다. 보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다. 보면서 비판적으로 보라는 말이다. “예수”를 이야기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다 “복음”이 아니다. “복음”이라고 얘기해서 다 “복음”이 아니다. 세상은 요지경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눈물을 흘릴 수 있다. 하지만 물어보아야 한다. 무엇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는 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바로 유대인도 아니고, 로마인도 아니고, 바로 바로 “내”가 “예수”를 죽였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깨닫고 회개하며 흘리는 눈물인가? 물어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눈물은 가짜다. 진짜눈물은, 그 영화를 보지 않아도, 우리 주님께서 보여주시는 너무나도 생생한 “조명”에 의해서 주어지는, 내가 예수를 죽이는 장면의 그 목도함을 깨닫게 되는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다. 몇 푼짜리 울음으로 자신을 속이지 말라. 이 영화, 이 수난주간으로 인해서, 참된 복음을 음미해 보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한다. 눈에 보이는 것에만 현혹되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잊어버리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holyjoy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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