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배찬양자료

[스크랩] Re:Re:소위 제3의 물결이라고 말하는 빈야드 운동에 대해2

baromi 2005. 9. 10. 12:21
spirit song으로 잘 알려진 이 노래는 빈야드 운동의 대표적 지도자 존 윔버(John Wimber)의 곡입니다.
처음에 저는 이 노래를 대했을 때(1980년대), 그 멜로디의 흐름이나 분위기가 너무 좋다고 판단되었습니다. 그래서 친구들과 함께 이 노래를 애창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통해 복음을 받아들인 후에 저는 이 노래에 이상한 문제점이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구절입니다.

"
예수 오 예수 지금 오셔서 예수 오 예수 채워주소서"라는 후렴구였습니다. 이 가사가 주님의 재림을 사모하는 것인지, 아니면 지금 이시간에 주님께서 지금 임재해 달라는 것인지 알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힘든 세상에서 인도해달라"는 1절의 가사를 통해 그것이 주님의 재림을 열망하는 노래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지금 이시간에 주 예수님께서 임하시기를 바라는 호소였습니다. 어떻게 믿는 자들에게 이런 일이 가능하단 말입니까?

저는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믿는 자들 안에 이미 성령님을 통해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께서 계신데 어떻게 이런 노래를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 노래와 찬송가 151장을 비교할 때 둘 중에 하나는 분명 잘못 노래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찬송가 151장 1절만을 소개합니다. 이 노래는 부활절에 우리가 자주 부르는 노래였습니다.

다시 사신 구세주 나 항상 섬기네 온 세상 조롱해도 주 정녕 사셨네
그 은혜로운 손길 부드러운 음성
내 평생 주님 함께 늘 계시네
예수 예수 늘 살아계셔서 주 동행하여 주시며 늘 말씀하시네
예수 예수 내 구세주 예수 내 맘에 살아계시네 늘 살아계시네

주님은 분명히 성경을 통해
"세상 끝 날까지 내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마28:20) 약속하셨습니다. 그분은 믿는 자들에게 떠나 계시다가 믿는 자들이 "예수 오 예수 지금 오셔서"라고 노래할 때 오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로없이 버려두지 않기로 하셨습니다(요16:17). 그래서 그 위로의 증표로 위로자 성령님을 보내셨습니다. 때문에 위로자 성령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은 그 안에 그리스도께서 거하시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물론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 오르셨지만 또한 우리 안에서도 성령으로서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으로 함께 모인 곳에 나도 그들 한가운데 있느니라"(마18:20)고 하셨습니다. 구약시대와 다르게 신약시대는 성령께서 내주하시면 결코 떠나가지 않습니다. 근심하시는 일은 있어도 구속의 날까지 함께 가십니다(엡4:30). 그렇다면 성령을 받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언제나 함께 하시는 것은 당연한 사실입니다. 성도는 오히려 "예수 예수 내 구세주 예수 내맘에 살아 계시네 늘 살아계시네"(찬151장)라고 찬송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이 노래는 마치
주술적인 분위기 속에서 예수님을 부르는 노래와 같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런류의 주술적이고 신비적인 분위기를 위해 많은 음악들이 만들어졌으며 그 음악들이 우리나라를 포함해서 지금 전세계를 휩쓸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 나의 자비로운 주여"라는 이 노래를 만든 존 윔버는 빈야드 운동의 대표입니다. 그는 본래 일반 대중 음악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신비적인 현상들을 추구하던 그는 교회 안에 무언가 있다고 생각했고 자기의 음악이 또한 적절하게 사용될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과연 그와 그의 친구들의 음악을 통한 예배들은 대단한 힛트를 하게 되었습니다.

한 때 빈야드 운동에 참여했던 굿윈 목사(Pastor John Goodwin)는 윔버가 과격한 에큐메니즘 추종자임을 밝히며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성경 이외의 것에 손을 대면서 윔버는 교회가 수세기 동안 비성경적인 것이기에 거부해 온 관행들, 예를 들어 죽은 사람의 뼈나 그들이 만졌던 물품을 사용하는 것 등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는 교회 양육 세미나에서 이렇게 말했다. '1200년이 넘도록 카톨릭 교회 내에서는 죽은 성인들의 유품을 만진 결과 많은 사람들이 병 고침을 받았다. 사실 우리 프로테스탄트들은 그런 관행에 대해 주저하지만, 우리 병 고치는 사람들은 전혀 주저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런 관행은 전혀 신학적으로 틀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윔버는 로마 카톨릭 교리를 받아들이고 있으며 프로테스탄트 교회와 로마 카톨릭 교회가 하나가 될 것을 강력히 권장합니다. 빈야드 목사 집회에서 그는 심지어 프로테스탄트들을 대신해서 카톨릭 교회에게 사과를 했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거듭난 복음 전도자로서 오순절 은사운동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로마의 교황은 이 세상의 어느 누구보다도 복음을 확실하게 전하고 있다."

윔버와 빈야드 운동에 대해 살피려면
윔버: 빈야드 운동의 원조를 참조하십시오.

빈야드 음악의 본부는 미국 캘리포니아의 애너하임이라는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존 윔버(John Wimber)가 세운 빈야드 교회는 지금 전세계의 교회의 주목을 받으며 예배개혁,치유 운동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현재 세계곳곳에 빈야드 교회 연합회에 속한 교회가 수백개가 넘습니다.

한국에서도 많은 목사님들이 그들의 성공적인 실태(?)를 조사하고자 다녀왔습니다. 과연 수많은 사람들이 모이며 열광적입니다. 하지만 정직하게 주님의 말씀에 비추어보는 사람들은 그들이 다른 복음을 쫓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웃음의 예배>를 위해 사용하고 있는 음악들이 있습니다. 이 음악들은 사람들을 흥분시키며 급기야는 그것을 반복해서 부른 사람들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든지, 웃음소리를 내게 하든지, 실신케 합니다. 그들의 치유집회에서는 이런 음악들을 2시간 이상씩 연주하며 따라 부르게 합니다. 단순하고 비트있는 이런 음악들은 사람들의 정서와 쉽게 혼합되고 많은 사람들은 그 음악에 취해 빈야드 운동가들이 만들어내려 했던 것들을 보여주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한국교회가 그들의 음악을 아무런 생각도 없이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경배와 찬양시간을 통해 불려지는 많은 곡들이 그들의 심리적인 전술의 용도로 만들어진 음악이라는 점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아마도 이런 제 발언은 그들에 의하면 "성령을 모독하는 일"이라고 정죄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빈야드 스타일의 예배와 찬양곡의 열풍이 불기 시작한 것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가장 중요한 이유를 꼽는다면 빈야드 안에 뛰어난 워쉽송(Worship Song) 작곡자가 많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미 'Spirit Song(오나의 자비로운 주여), 'Isn't he(예수의 이름은)'등의 곡으로 잘 알려진 빈야드의 대표인
존 윔버(John  Wimber) 목사를 비롯해서 'Hosanna(호산나)', 'Open Your Eyes(눈을 들어)' '주찬양 전심으로'의 작곡가인 칼 터틀(Carl Tuttle)목사, 'Refiner's Fire(나의 마음을)'의 Brian Doerksen, 'Jesus I Love You(예수 사랑해요)', 'More Power(주의 사랑, 주의 능력)'의 Jude Del Hiero 역시 빈야드의 대표적인 예배인도자 겸 작곡자 입니다.

모여서 찬양하고, 성령의 감동으로 서로의 죄를 고백하기도 하고, 서로 용서하고 용납하고 하는 그러한 형태를 좋아 했던 이들에게는 '주님께서 주시는'(Kurt Laiser)의  곡과 같은 교제송도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음악가로 명예의 전당에 오르기도 한
Kurt Kaiser는 '작은 불꽃 하나가 큰 불을 일으키어'와 '알았네 나는 알았네'라는 노래를 만든 사람으로도 유명합니다.

찬양을 통해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한 사람으로서 우리는 그 노래가 누가 만든 것인지도 유심히 살펴보지 않으면 안됩니다. 물론 알지 못했을 때야 어쩔 수 없지만 그것을 알게 된다면 우리는 바른 찬양을 위해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만든 곡을 선택해 부르는 지혜를 가져야만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의식과 전통에 대해서는 철벽같은 수비를 하면서도 오랫동안 무속이나 샤머니즘, 각 종교에서 사용되어온 음악에 대해서는 너무도 관대한 입장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음악은 사람들을 묶는 틀입니다.
우리도 모르게 신비주의적인 것, 은사적인 것,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표적과 묘한 것을 추구하는 것들이 교묘하게 자리 잡을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음악의 선별에 신중해야만 할 것입니다.
출처 : 한우리성경강해
글쓴이 : 한우리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