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배찬양자료

[스크랩] 공예배의 회복

baromi 2005. 8. 19. 10:54

 

                                 이광호 목사

 

1. 서론


   우리 시대에 들어와 예배에 대한 본질적인 개념이 많이 흐려졌다.

 

 하나님의 언약 가운데 드려지는 예배가 아니어도 개인적 열정과 정성이 깃든 예배라면 그것이 좋은 예배라 하기도 한다. 예배에 참여하는 자가 감격을 느끼면 그것으로 만족스러워 하는 것이다. 나아가 각종 악기를 동원한 '행사형' 예배방식이 유행하여 사람들을 끌기도 한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내어 많이 모이기만 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예배를 인도하는 많은 목사들은 경배를 받으실 하나님의 뜻보다는 회중의 흥미를 유발하려는 노력을 쏟아 붓는다. 그 결과 설교자들이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선포가 아니라 대중적 감화에 역점을 두게 되어 강단이 허물어지게 되는 것이다. 또한 우리 시대에 생겨나기 시작한 대형 교회들에서는 성례의 진정한 의미가 사라졌다. 세례와 성찬의 참된 의미와 나눔이 이루어질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지교회에 속한 성도들이 서로 알지 못하여 성도들 상호간 믿음의 관계 속에 있지 않다면 참다운 공예배가 드려질 수 없다. 

  보편교회에 속한 모든 하나님의 참된 교회들은 상호 유기적 관계 속에 놓여 있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개교회 혹은 개체교회라는 의미를 강하게 수용하고 있다. 그러나 원래는 단일한 우주적 교회에 속한 지(支)교회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옳다. 개체 교회라 했을 때 각 교회는 개체적 판단을 할 수 있는 것 처럼 오해하게 될 여지가 남는다. 그러나 지교회라 했을 때 그 의미는 한 둥치에 붙어 있는 '가지' 교회로서의 보편교회 가운데 존재하는 교회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성경에는 포도나무 비유, 무화과 나무 비유, 감람나무 비유 등 많은 비유들이 나오는데 모든 가지들이 한 나무둥치에 붙어있듯이 보편교회의 의미도 이와 동일한 개념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예배함에 있어서도 개별성도나 지교회는 원리상 자의적 판단을 할 수 없다. 보편교회에 속한 지교회로서 보편적 질서 가운데 이루어지는 공예배를 중심으로 하나님을 경배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한 주일 가운데 안식후 첫날을 주일(主日)로 정해 공예배를 드리기 원하신다. 주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구약의 율법적 언약을 이루어 구속을 완성하신 날이다. 그 날은 하나님의 구속사적 완성과 택하신 백성들의 모임인 교회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특별히 그 날을 주일로 정해 공예배를 드리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공예배는 보편적 질서와 직분적 기능 속에서 드려져야 한다. 그냥 성도들이 모여서 열심히 기도하고 찬송하며, 그 가운데 설교가 있으면 그것이 공예배인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다. 예배 가운데는 마땅히 있어야할 내용들이 있으며 공교회적 질서에 따라 예배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공예배는 개별적 성향에 따라 드려지는 예배가 아니며, 모든 사적인 예배나 비공적인 예배는 매주일 행해지는 '공예배'의 의미 아래서 그 예배의 의미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2. 예배의 의미와 범위 

  (1) 공예배의 의미

      공예배란 무엇인가? 모든 성도들은 매 주일마다 자발적 신앙으로 인한 결과로써 선한 의무감을 가지고 각 지교회로 모여 하나님을 경배한다. 우리가 이해해야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신부로서 전체적인 교회가 구원받은 영혼으로서의 개인 보다 중요하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각 개인들이 모여 공예배를 드리는 것이라기 보다 개별 성도들이 공예배 속으로 들어가 하나님을 경배함에 참여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공예배는 보편교회 가운데 이루어지는 언약적 예배이다. 이를 한국교회에서는 일반적으로 '대예배'라 칭한다. 주일 날 지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들이 함께 모여 공예배의 요건에 따라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공예배이다. 주일 오후나 밤에 모이는 예배는 사실상 성도들을 위한 성경공부나 교육을 위한 시간으로 보면 옳을 것이다. 그 시간에는 성경을 공부할 수 있을 것이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나 대소요리문답,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등을 공부함으로써 성도들을 교육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시간은 결국 온전한 공예배를 위해 준비하는 시간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공예배란 교회가 공적으로 결의한 예배모임이라는 말과는 그 의미가 다르다. 한국교회에 있어서 공적인 결의를 통해 모이는 모임은 주일 대예배 이외에 주일 오후 혹은 저녁 모임이 있다. 그리고 수요일 밤 모임이 있다. 그리고 교회에 따라서는 금요일 저녁에 모여 기도회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모임은 '공예배'라는 의미와는 다른 개념이다. 공예배란 온 성도가 함께 모여 공적인 예배의 내용과 절차 및 형식을 갖춘 예배인 것이다. 

  신약시대의 주일은 언약적 개념을 가지며, 보편교회는 그 주일에 이루어지는 공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경배한다. 근래에는 주 5일 근무제로 인해 주일예배를 다른 요일로 변경하려는 일부 교회들의 움직임이 있으나 그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사실 역사 가운데서도 종교개혁자들은 일요일의 우상화를 우려해 주일(主日)을 다른 요일로 바꾸어야 할 만큼 심각한 지적을 한 이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이 그런 주장을 하게된 배경에는 복음을 떠난 비기독교적 영향에 대한 반동적 사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2) 지교회의 예배참여 범위 

      공예배에는 지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들이 의무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입교인들은 물론이며 유아세례교인들 역시 마땅히 참여해야 한다. 한국교회의 경우 유아세례를 받은 어린이들이 입교를 하기전 까지는 공예배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 당연한 듯 일반화 되어 있지만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유아세례 교인을 공예배시 회중에 참여시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아직 분별력이 있지 않아 자기고백에 의한 입교를 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그들은 언약의 자녀들이다. 공예배는 언약 가운데 드려지는 예배이므로 유아세례 교인들이 그 언약의 예배에 참여하여 축복을 누리며 말씀에 참여하는 것은 그들의 권리이자 의무이다.   

  맨처음, 장로회(당회)에서 행하는 부모의 문답을 거쳐 공예배 시간에 교회 앞에서 유아세례를 받는 것은 그 이후로 계속 공예배에 참여해야함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며 교회 앞에서의 고백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그 부모나 성인인 모든 성도들은 유아세례 교인의 신성한 권리를 박탈할 수 없으며 그들의 의무를 자의로 해제할 수 없다.

 

   (3) 지교회의 공예배와 보편교회의 관계 

       공예배는 지교회가 개별적으로 결정한 프로그램이 아니다. 즉 각 지교회가 임의적으로 그 공예배를 없앤다든지 의미자체를 변경할 수 없다. 주일 오후 찬양모임이나 수요일 기도회 등이 각 교회의 개별적 프로그램일 수 있는 것과 비교되는 개념이다.   

  공예배는 전체보편교회를 기억하는 언약적 관계 속에 드려지는 예배이다. 이 공예배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세계 가운데 흩어져 있는 모든 교회들이 상호관계 속에서 서로를 기억하게 된다. 나아가 성경에 기록된 믿음의 선배들과 동일한 신앙을 추구하며 고백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편교회에 속한 모든 교회들은 지금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우리의' 하나님으로 부르며 경배하는 것이다.   

  지상에는 서로 알지 못하는 형제 자매들이 전 세계의 상이한 문화여건 아래서 동일한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 우리는 그들을 개별적으로 알지 못하지만 우리와 그들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하나의 끈으로 엮어져 있음을 잘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공예배는 주님으로 인해 세워진 보편교회에 대한 인식 가운데 드려져야 하는 것이다. 


3. 공예배와 직분적 참여

  (1) 직분과 공예배

     직분은 공예배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교회의 직분을 일상적으로 '일하는 직분'으로 고착시키고 있는 경향이 있다. 즉 직분이 예배를 위한 직분임을 소홀히 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의 직분은 기본적으로 예배를 수종드는 기능을 한다.

  교회의 모든 은사와 직분들은 예배를 통해 표현된다. 이 의미는 음악이나 예술 등 일반 재능의 쓰임새를 말하지 않는다. 성경에는 여러 은사들이 언급되고 있는데 공예배를 통해 통합적으로 그 의미가 발생되어야 하는 것이다. 신약성경에 기록된 말씀의 은사, 사랑의 은사, 방언의 은사, 예언의 은사, 통역의 은사 등이 모두 공예배의 의미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물론 우리시대에 방언이나 예언, 통역의 은사가 더 이상 예배를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으나 그 의미는 여전히 그 가운데 살아있는 것이다.       

  장로교회와 개혁교회는 회중교회나 오순절교회와는 달리 공예배의 직분적 질서와 순서를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공예배 시간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일시적 감정에 의해 자유롭게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직분과 은사에 따라 엄숙한 예배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2) 목사

      말씀을 맡은 교사로서 목사는 공예배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직분자이다. 그는 공예배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 텍스트인 성경의 범위를 벗어나서는 안된다. 다시 말해서 목사는 말씀이 선포되어져야 하는 엄중한 시간에 자기 목적이나 윤리적 교훈을 주기 위한 방편으로 활용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목사는 말씀을 맡은 자로서 성례를 집례(봉사)하게 된다. 그는 장로회의 결정에 따라 세례를 베풀고, 성찬의 의미를 교사로서 확인하는 가운데 공예배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목사가 성례를 집행할 때는 전체 교회가 온전히 함께 참여하도록 하는 감독을 겸한다. 목사가 말씀을 선포하고 성례를 집행하는 것은 개인의 권한이 아니라 교회가 맡긴 직분이다. 예배에 수종드는 직분의 출처는 곧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인 것이다. 그러므로 목사는 어떤 경우에도 교회(성도들) 위에 군림하는 자가 될 수 없다. 도리어 목사 직분을 통해 섬기는 자인 것이다.   
 
  (3) 장로

     장로는 말씀선포에 대한 선한 감독자로서의 직분자이다. 즉 장로는 말씀의 감독자이다. 말씀을 선포하는 목사가 본의 아니게 자의적으로 설교를 한다거나 말씀에 대한 해석을 잘못 할 경우 장로들은 나중 그것을 함께 되살펴 볼 수 있어야 하며 그런 과정을 통해 말씀의 이탈을 방지하게 되는 것이다.  
  공예배에서 목사의 설교는 목사의 단독행위가 아니다. 거기에는 장로가 말씀의 감독자로서 그 설교에 참여하고 있다. 그러므로 목사는 개별적 의향대로 설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설교는 목사에게 단독으로 주어진 특권이 아니라 장로회의 공동책임 영역인 것이다.
  또한 장로는 성례식의 수종자이다. 성례의 의미는 선포되는 말씀과 직결된다. 성례에는 아무나 참석하지 못한다. 신앙이 없는 자가 성례에 참여한다든지 징계중에 있는 자는 성찬에 참여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장로는 선한 감독의 직분을 지속해야 하는 것이다.  .
  이를 위해 장로는 권징사역에 참여하게 된다. 말씀을 맡은 자인 목사가 선포하는 말씀에 따라 사는지 모든 성도들을 감독해야할 의무가 장로에게 있는 것이다. 원래 '심방'은 장로들의 직분적 사역인데 심방을 통해 성도들이 선포된 말씀의 원리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지 항상 확인 해야 하는 것이다. 모든 성도들은 공예배를 통해 선포된 말씀과 거룩한 성례에 참여한 자로서 살아야 하며, 장로는 성도들이 지속적으로 그런 삶을 살도록 독려하는 직분자인 것이다. 만일 말씀과 성례의 정신대로 살지 않는 성도들이 있을 경우 장로회에 보고해야 하며 장로회는 기도 중 그 성도를 권면하기도 하고 그 권면을 듣지 않으면 공적인 권징을 해야 하는 것이다.
 
   (4) 집사

      집사가 공예배에 직분으로 참여할 때는 일반적으로 순번을 정해 참여한다. 이는 목사나 장로가 예배중 직분을 이행할 때와 마찬가지다. 한 지교회에 목사가 여러 명 있을 경우 돌아가며 말씀을 선포하고 장로가 여러 명 있을 때 돌아가며 공기도를 하는 것과 같다. 공예배 참여에 있어서, 집사의 직분 가운데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연보순서에 참여하는 것이다. 집사들은 성도들이 연보를 할 때 그 순서를 돕는데 그것은 집사의 직분적 봉사이다. 성도들이 삶의 고백으로 공예배를 통한 연보에 참여할 때 집사들은 그 절차에 참여하는 것이다. 

출처 : 건지는교회
글쓴이 : 얼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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