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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종교개혁이전 개혁자

baromi 2005. 8. 26. 08:06

종교개혁 이전의 개혁자들


1.서 론

사람들은 종교개혁 하면 루터나 칼빈 그리고 쯔빙글리를 연상하게 된다. 그러나 루터와 칼빈과 쯔빙글리 등이 행한 종교개혁 이전에 먼저 개혁을 주도한 선각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시기상조로 로마 카톨릭 교회의 위력에 눌리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단으로 몰리거나 순교당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희생이 있음으로 종교개혁의 기운은 싹터 성공할 수 있었다. 그들을 세 종류로 분류한다면 다음과 같다.
1. 신비적 개혁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Meister Eckhart, 1260-1327), 하인리히 수소 (Heinrich Seuse, 1295-1366), 요한 타울러 (Johannes Tauler, 1300-1361) 등은 하나님과 일치를 도모하는 신비적 신앙으로 교회갱신 운동을 전개하였다.
2. 실제적 개혁자- 발도(Petrus Waldus, ?-1218)와 사보나롤라 (Girolamo Savonarola, 1452-1498)는 도덕과 윤리적 실행의 혁신을 시도하였다.
3. 교리적 개혁자- 존 위클리프 (John Wyclif, 1329-1348)와 존 후쓰 (John Huss, 1370?-1415) 등으로 교리와 신학면에서 로마교회에 대항하여 불복하였다.
신비적 개혁자들에 대해서는 목원 신학 연구소 편의 [신학과 현장] 제 5집 237-264 쪽을 참고하기 바라며 본 논문에서는 실제적 개혁자들과 교리적 개혁자들을 중심으로 다루기로 한다.

2. 실제적 개혁자

2.1. 발도 (Petrus Waldus, ?- 1217)와 그 무리들 (Waldenser)

[리용의 빈자(貧者)]라고 불리우는 발도파는 프랑스 리용 지방의 부자 상인인 발도로부터 시작되었다. 발도파의 자료들에는 발도가 과감한 결단력을 가진 사람으로 1218년 이전에 죽었다는 사실 이외에는 그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가 없다. 발도는 성 알렉시오 (St. Alexio)라는 사람이 결혼하는 저녁에 신부 (新婦)와 부모를 작별하고 수도사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읽고, 또 마태복음 19장에 나오는 부자 청년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읽고 나서 뜻한 바 있어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남녀 동지와 함께 복음을 전할 목적으로 1170년 하나의 회 (會)를 조직하였다. 발도는 신앙심이 깊어 돈을 들여 성자와 교부들의 문서를 통속어 (通俗語)로 번역케 하였다. 또한 성경을 번역케 하여 배우고 가르쳤다.

 

발도파는 성경의 가르침대로 지팡이나 주머니를 가지지 않고 복음을 전하려 나섰고 시골에서, 도시에서, 거리에서 그리고 광장에서 설교하고 토론하였다. 발도파의 설교는 단순하여 그당시 대부분의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이해하기 아주 쉬웠다. 발도파는 사회에서 고난받는 자, 압박당하는 자, 병든 자에게 동정하였고 모든 사람을 형제로 여겼다. 발도는 처음에는 로마 카톨릭 교회에 남을려고 하였다. 그러나 기존 성직계급들과 충돌하게 되었다. 발도파 사람들의 독단적인 설교는 곧 리용의 대주교와 사제들의 의혹과 적대감을 불러 일으켰으며 리용의 대주교는 그들에게 설교를 중지할 것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발도는 이를 거부하였다. 지역에서 반대를 받게되자 발도와 그의 추종자들은 1170년 제 3차 라테란 회의에 참석중인 교황 알렉산더 3세 (Alexander III, 1159-1181)에게 그들도 설교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리용의 대주교의 반대로 무산되고 말았다. 교황은 발도파에게 사제들의 특별한 요청을 받기 전에는 설교를 해서는 안된다고 금지하였다. 발도파는 자신들에게 설교할 수 있는 권리를 제한한 것에 대해 하나님의 음성을 거역하는 인간의 음성이라 생각하고 (행 5:29) 공적으로 사제들의 요청이 없어도 계속적으로 거리에 나가 설교하였다. 이처럼 리용의 대주교와 교황의 명령에 불복종함으로 발도파는 리용 교구에서 추방당했고 1184년 교황 루키우스 3세 (Lucius III, 1181-1185)는 교서 [아드 아볼렌담] (Ad abolendam)에 의해 그들을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이 일로 발도파는 자신들의 뜻과는 달리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떨어져 나가게 되었고 세력이 급속히 확장되어 얼마 안되어 카톨릭 교회의 큰 문제로 등장하게 되었다.

발도파는 남 프랑스와 알프스를 넘어 남부 독일과 이태리 그리고 스페인까지 퍼져나갔다. 그 명칭도 알프스 산 북쪽에서는 리용의 빈자라고 불렀다. 발도파 운동은 교회의 세속화에 대한 저항운동이었다. 발도는 1217년 보헤미아에서 죽고 그 무리에 대한 로마교회의 금지는 1215년 제 4차 라테란 회의에서 이노센트 3세에 의해 반복되었으며 이 회의에서 발도파와 카타리파를 탄압하기 위해 도미니크 수도단에게 이단심문 (종교재판)을 주관토록 결정하였다. 또한 발도파는 로마교회가 1229년 툴루스 (Toulouse)회의에서 이단을 탄압하기 위해 평신도가 성경을 읽는 것을 금하는 법을 만들었으므로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발도파는 오직 한 마음으로 성경에서 가르친 대로 지키고 사도들의 삶을 모방할려고 하였다.

발도파의 주장을 보면 그들은 로마 교회에서 행하는 전통을 버리고 오직 성경으로 신앙과 실행의 유일한 표준으로 삼았다. 성경에서 정당한 근거를 찾을 수 없는 것은 무엇이든지 교회에서 정당화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성경의 모든 규정들은 문자 그대로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연옥의 교리와 죽은 자를 위한 미사와 기도를 거부하고 평신도라도 선한 사람이면 성례전을 집행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발도파는 교리나 사상보다도 윤리적 실행을 중요시하여 산상수훈을 엄격히 준행하도록 힘썼다. 특히 마태복음 5장의 팔복을 강조하고 그것을 신앙의 핵심으로 삼았다. 처음부터 그들은 엄격한 금욕주의를 고수하여 월, 수, 금요일에는 금식을 하였다. 그들은 기도에도 헌신하였다. 처음에는 시간을 정해놓고 드리는 기도를 무시했으나 나중에는 매일 일곱번씩 기도하였다. 그들은 성경에 따라 무력사용을 금하고 박해를 감수하였다. 조직적 무력이나 교회와 세속 당국의 공권력을 거부하였고 타락한 로마 교회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중세 봉건사회에서는 모든 일에 주종간 (主從間)에 맹세하는 것이 들어 있었는 데 그들은 어떠한 행태의 맹세도 금지하였다 (마 5: 34이하). 그들 중에는 신학자가 없었고 또 교리나 사상적 산물 (産物)도 볼만한 것이 없었다.

13세기 도미니크 수도사가 지적한 발도파들이 주장하는 이단 사상은 다음과 같다: "로마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다. 로마교회는 4세기의 교황 실베스터 (Sylvester) 이래로 타락하였다. 현 로마교회는 죄악 투성이요 그들 발도파만이 옳다. 교황이 모든 잘못의 원인이요 교황과 모든 주교들은 전쟁을 일으킨 살인자들이다. 십일조는 낼 필요가 없다. 그 이유는 초대 교회는 십일조를 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직자는 소유를 가져서는 안된다. 교황이나 추기경, 주교 등과 같은 고위 성직의 칭호들은 폐지되어야 한다. 어느 누구도 신앙을 강요당해서는 안된다. 또한 교회의 모든 성례는 폐기되어야 한다. 복음서에 나타나지 않은 교회의 모든 관습을 버려야 한다. 주기도문이 10개의 종소리가 울리는 것보다 낫고 미사보다도 더 가치가 있다. 맹세는 죽음에 해당하는 죄다".

국가는 무엇보다도 발도파 등 이단자들이 내세우는 세속 업무나 성생활과 군복무에 대한 금지에 대해 위협을 느꼈다. 그래서 독일황제 프리드리히 2세 (Friedrich II)는 1232년 3월 다음과 같이 포고하였다: "1. 로마교회에 의해 이단자로 저주받은 자들은 세속 재판관들에 의해 사형시킨다.

2. 죽음이 두려워 교회의 품으로 되돌아 오는 자는 종신형에 처한다.

3. 모든 혐의자들은 조사 중에 엄격하게 구금한다.

4. 이단자들에게 호의를 베푸는 자들은 이단자들과 같이 취급한다.

5. 이단자들은 비록 그들이 다른 곳에 가더라도 어디서나 처벌할 수 있다.

6. 상습적인 이단자들은 즉각 사형에 처한다.

7. 이단자들과 그의 지지자들은 호소하거나 공식의 재판에 상소할 권리가 없다. 모든 방법을 동원해 이단자들을 색출하여 독일에서 추방해야 한다.

8. 이단자들의 후손과 상속인들에게는 두 세대까지 모든 세속적인 특전과 공공의 지위를 빼앗는다. 단, 이단에 빠진 그들의 부모를 신고하는 바른 신앙을 가진 자녀는 제외한다."

 

이와 비슷한 법들이 유럽의 모든 나라에서 발해졌다. 카타르파와 발도파는 종교재판 (Inquisition, 이단심문)에 회부되었다. 원래 종교재판은 이단자, 유대인, 개신교도, 마녀 그리고 모든 신앙상 의심이 가는 자들을 재판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누구든지 고발할 수 있었고 재판은 비밀로 진행되었으며 고문에 의한 자백이 강요되었다. 누구든지 죄를 자백하면 세속 당국자에게 넘겨져 주로 화형에 처해졌다. 그만큼 중세의 종교재판은 악명을 날렸다. 후에 성자로 명명된 오르레앙의 요한 (Johannes von Orleans)도 개혁자 요한 후쓰 (Johannes Hus)처럼 화형에 처해졌고, 오늘날 성자와 교회박사로 불리우는 토마스 아퀴나스도 이단자로의 죽음을 거의 면하였고, 갈릴레오는 진리를 침묵하도록 강요당했으며 예수회의 이그나티우스 폰 로욜라 (Ignatius von Loyola)와 그의 동지들도 투옥되기도 하였다.

2.2. 사보나롤라 (Girolamo Savonarlola, 1452. 9. 21- 1498. 5. 23)

사보나롤라는 종교개혁 이전의 진정한 예언자였다. 그는 마틴 루터가 출생하기 약 30년 전인 1452년 9월 21일 이탈리아의 페라라 (Ferrara)에서 태어나 1498년 5월 23일 플로렌스에서 순교하였다. 그는 소년때부터 침착하고 고독한 사람이었다. 그의 부모가 그를 의사로 만들려고 했으나 사보나롤라는 그당시 사회의 타락과 불의를 보고 뜻한 바 있어 신학을 택하였다. 그는 23세 때 집을 나와 볼로냐 (Bologna)에 있는 도미니크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는 수도원에 들어가게 된 이유를 아버지께 다음과 같이 편지하였다: "나는 이탈리아의 사악함에 눈 먼 백성들을 더 이상 보고 참을 수 없었습니다. 나는 덕이 도처에서 경멸되고 악이 추앙되며 경외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도미니크 수도원에서 사보나롤라는 어거스틴과 토마스 아퀴나스에 대해 공부하였고 성경에도 정통하였다. 1481년 그는 플로렌스에 있는 성 마가 수도원으로 옮겨갔다. 10년 후 사보나롤라는 그곳 성 마가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다. 그는 수도원장으로 있으면서 플로렌스에서 대담하게 죄악을 통박하는 설교를 했으나, 세상 영화 (榮華)에 취한 시민들은 그의 설교에 귀 기울이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실패에도 불구하고 옛 예언자와 같이 열심을 다하여 절규함으로 차츰 반응이 일어나 그가 설교하는 곳에 인산인해 (人山人海)를 이루었다. 많은 사람이 사보나롤라가 플로렌스 대성당에 도착하기를 몇 시간 동안 기다렸고 강변설교에서는 만명에서 만 이천명이 모이기도 하였다. 그의 메시지는 도시에 가득찬 부패를 가차없이 공격하였고 성직자들이 영적인 생활보다 성직록과 금과 외적 의식에 치중하는 탐욕에 대해 책망하였다.

 

사보나롤라는 교회와 세상의 멸망에 대해 설교했는 데 그 뒷 배경은 구약의 예언자적인 자의식과 요아킴의 묵시에 따른 무시무시한 심판이 교회에 임박함을 느꼈고, 따라서 교회의 갱신을 촉구하였다. 그는 성직자들의 위선을 다음과 같이 공격하였다: "이 시대의 고위 성직자들과 설교자들은 세상의 것을 사랑하므로 이 세상에 속박당했다. 영혼을 보살피는 것이 그들의 관심이 아니다. 그들은 세금 걷는 데 만족한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방법대로 새로운 교회를 세웠다. 로마에 가서 보라! 이전의 고위 성직자들은 금이 거의 없는 주교관 (主敎冠)과 성배 (聖杯)를 사용하였는 데 우리의 고위 성직자들은 금으로 된 성배를 유지하기 위해 가난한 자의 영혼을 희생시킨다. 당신은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십니다. 당신은 무엇을 하십니까? 오 주여! 일어나십시오. 그리고 오셔서 악의 손에서, 전제 폭군의 손에서 그리고 고위 성직자들의 불법의 손에서 당신의 교회를 구하소서!"

사보나롤라의 설교의 특징 중 하나는 성경의 권위를 역설한 데 있다. "나는 나의 유일한 신앙지침인 성경과 함께 전 교회의 새로 거듭남을 촉구한다." 사보나롤라는 노아의 방주, 출애굽기, 학개, 에스겔, 아모스, 호세아, 요한 계시록 등을 주제로 하여 설교하였다. 사보나롤라의 설교에 힘과 기운을 준 또 다른 요소는 예언자적 자의식이었다. 그는 "보라, 땅 위에 급하고 속히 임할 주님의 칼"에 대한 환상을 보았다 (Ecce gladius Domini super terram cito et velociter!). 그는 메디치 家의 쇠퇴와 프랑스의 찰스 8세가 플로렌스를 침공할 것을 예언하였는 데 그것이 머지 않아 현실로 이루어졌다. 플로렌스의 지배자인 메디치 家의 로렌조가 병으로 죽게 되어 플로렌스는 사보나롤라가 주도하는 공화적 신정정치가 수립되었다. 1494년부터 사보나롤라의 명성은 높아갔고 정치적 영향력은 확대되었다. 프랑스 군대가 플로렌스의 국경에 다가오고 있을 때 사보나롤라는 외쳤다: "보라! 심판의 검이 너희에게 내리쳐 온다. 이 예언, 하늘의 응징은 성취된다. 이 군대는 주님이 이끄시는 것이다. 오, 플로렌스여! 이제 노래하고 춤추던 시절은 갔다. 지금은 우리 죄를 인하여 회개의 눈물을 흘릴 때이다."

 

사보나롤라의 경고는 너무나도 두려움을 일게 해서 그 자신도 그것을 전하는 데 있어 움츠러 들기도 하였다. 그가 전하려고 했던 설교를 그는 [공포의 설교]라고 불렀다. 플로렌스 사람들은 그의 예언자적 외침을 진지하게 경청하였다. 사보나롤라는 찰스 8세와 협상을 통해 프랑스군을 순순히 퇴각시켰다. 그가 아니었더라면 플로렌스의 모든 거리가 피로 물들었을 것이다. 이제 플로렌스에서는 사보나롤라의 이상적 통치체제, 즉 주님을 머리로 하는 신정정치가 시도되었다. 1494년 학개서를 주제로 한 설교와 1495년 시편 설교에서 그는 왜 자기가 정치에 관여해야 하는가를 반문하였다. 주님은 그에 대해 "네가 플로렌스를 진정으로 성스런 도시로 만들려고 한다면 너는 이 도시를 탄탄한 기초 위에 세워야 하며 '의로움'을 소중히 여기는 통치체제를 만들어야 한다"라고 답하셨다. 그렇게 이 선지자 (사보나롤라)에게 위임되었다. 사보나롤라는 그 도시의 정치형태로써의 건전한 통치와 민주주의의 기초는 '덕' 이라는 것을 선포하였다. 사보나롤라는 플로렌스 공화정 (共和政)의 제일의 통치자 자리를 하나님에게 맡겼다. 그는 단상에서 외쳤다: "하나님 홀로 여러분의 왕이 되실 것입니다. 오, 플로렌스여! 구약에서 이스라엘의 왕이 그분이었던 것처럼 여러분의 새 왕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플로렌스를 거룩한 참회의 도시로 만들기 위하여 사보나롤라는 [허영의 화형식]을 거행하였다. 그는 사순절 전 카니발 축제 때 (1496년, 1497년) 음란하고 부정한 서적, 가면, 그림, 화장품, 노리개 등을 쌓아 불태워버렸다

출처 : 한우리성경강해
글쓴이 : 한우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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