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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중세 전성기(AD 1200-1300)의 기독교 사상 (1)

baromi 2005. 9. 8. 22:07

중세 전성기의 기독교 사상

 

1. 서방 기독교 사상

 

13세기는 흔히 "중세의 황금시대"라 일컬어진다. 우리는 이 말을 '중세적인 요소'가 가장 꽃피었던 때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중세적 요소'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중세란 한마디로 "신적인 것이 교회를 통해 세계에 현존하였던 시대" 라고 정의할 수 있다. 모든 시대는 그 자체의 고유한 세계상을 갖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면 중세는 인간정신이 영원한 것, 불변하는 것을 탐구하던 고대(그리이스 시대)와도 구분되며, 세계와 삶이 인간이성에 의해 규정되고 인간이 세계의 중심으로 드러나던 근대와도 구별된다. 요컨데 중세는 '성스러운 것'(신적인 것)이 이 세계 위에서 구현되었던 시대였다.

 

이 기간동안 고딕식의 교회 건축은 하늘을 향해 치솟았으며, 교황의 통치권이 하늘에서 내려온 듯 제후와 황제들마저 그 아래에 두었고, 종교재판이 공식적으로 설치되었다. 고딕식 건축물은 중세의 좋은 상징물이다. 고딕 건축물은 모든 구성요소들이 하나의 거대한 우주적 구조안에서 그러나 자기의 자리를 견고하게 차지함으로써 이루어져 있다. 그럼으로써 이것들이 의미하는 바는 땅으로부터 하늘에 이르는 거대한 구조적 질서인 것이다. 고딕 건축양식과 스콜라주의는 병행을 이루고 있다. 중세의 정신적 산물인 스콜라주의는 사상이 고딕양식인 것이다.  

 

   1) 역사적 고찰

'중세의 황금기'를 이룬 13세기의 발전에는 그 바탕이 되는 몇 가지의 원동력이 있었다. 첫째, 십자군 원정, 둘째, 교황권의 강화, 셋째, 대학의 발전, 넷째, 걸식교단의 성장등이다.

 

      a) 십자군 원정

십자군 원정은 이것이 갖는 정치적 군사적 의의 때문이 아니라, 문화적 이유 때문이다. 십자군 원정은 거대한 서로 다른 두개의 문화 곧 '그리스도교 문화'와 '이슬람 문화'를 만나게 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 들어 온 또 다른 하나의 문화가 있었으니, 그것은 아라비아 학자들에 의해 중세에서 부활된 '고대 그리이스의 고전적 문화'였다. 그리스도교는 이들 문화와 관계를 갖게 되었다. 한 문화가 다른 문화와 만났을 때 생기는 변화 중 하나는 그 문화가 자체반성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시기에 기독교는 다른 문화들의 저항에 부딪쳐서 자체반성과 개혁을 하게 되었다. 이것이 교황권의 강화와도 연결되었다.

 

      b) 교황권의 강화

13세기 초, 거룩한 교구(로마 교황청)는 인노센트 3세(1198-1216)의 지도 아래 권력의 정점에 이르게 된다. 인노센트 3세는 교황청과 전 유럽의 교회 생활을 개혁함으로써 교황의 권한을 교황령 국가의 황제보다 강화시켰다. 그는 정치적 문제에도 능동적으로 관여하여, 시실리의 섭정왕이 되어 시실리를 자신의 봉토에 예속시켰다. 그의 재임기간 중에 제4차 십자군 원정에 있어서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였고 이곳에 라틴제국을 세웠는데, 교황은 라틴계 대주교를 임명함으로써 로마는 이론적으로는 동방교회와 연합하였다. 또 인노센트 3세는 카톨릭 교회에 여러가지의 의의를 지니는 결정을 한 "제4차 라테란회의"를 소집하였다. 그는 자신을 "베드로의 대리자"(Vicar of Peter)라는 칭호 외에도 "그리스도의 대리자(Vicar of Christ)라고 부르고, 교황이 주교들을 임명하고 퇴위시킬 권한뿐만 아니라 세속의 통치자들을 다스릴 수 있는 권한까지 갖는다고 주장했다. 교황은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부었던 그 권한을" 받았으며 제후들이 "죄를 지었을 때는 그 이유로" 제후들을 퇴위시키고 다른 사람에게 넘겨 줄 수 있는 권한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렇듯 교황권의 강화가 극에 달한 것은 13세기의 마지막 교황인 보니페이스 8세 때이다. 보니페이스 8세는 '우남상탐'(Unam sanctam)이라는 교서를 통하여 교황은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모든 교회와 세속적 권위가 교황의 지도 아래 있다는 것을 주장하였으나, 그레고리 7세로부터 시작하여 인노센트 3세에 절정을 이룬 교황권은 1303년 보니페이스 8세가 죽고 급격히 쇠퇴하여, 1309에는 아비뇽으로 옮겨가서 정치적 도구로 전락하게 된다.

    그러나 13세기에 강화된 교황권과 함께 살펴 보아야 할 것이 교황청 안에 생긴 종교 재판이다. 고대로부터 감독에게는 오류나 이단을 막을 책임이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감독이 강권력을 갖고 있지 않았기에 신학적 논쟁이나 파문을 통해 이런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중세에는 이단들에게 신체적 처벌을 가하기 시작했고 11세기에 와서는 프랑스와 독일 등지에서 화형이나 교수형이 시행되었다. 그러다 1231년 교황 그레고리 9세는 강화된 교황권을 이용하여 "이단의 죄악상을 파헤칠 종교 재판관"에게 판사로서의 과도한 권한을 부여하여 교황청의 종교 재판을 제정하였다. 종교재판은 맨 처음에는 매우 온건하고 심중하게 다루어져서 신학 사상에 악영향을 미치지 않았으나 점차적으로 신학사상의 자유와 독창성을 저해하는 요소로 등장하였다.

 

    c) 대학의 발전

 '대학'이란 본래는 '일반 학문을 하는 교수들과 학생들의 연합체'를 지칭하다가 점차적으로 대학이라는 제도를 뜻하는 명칭이 되었다. 가장 오래된 대학으로서는 파리대학, 살레느로 대학, 볼로냐대학, 옥스포드대학 등이 있는데 이들은 도시의 발전과 상업의 발달로 12세기부터 시작되었으며, 파리와 옥스포드대학은 우수한 신학교수들을 보유함으로써 13세기 서방신학의 요람이 되었다.

 보통 16-17세에 대학에 입학하였는데 신학 연구를 원하는 학생은 15-16년간의 교육을 받았다. 맨처음에는 청문자(hearer)로 지내다가 그 다음에 학사(bachelor)가 되는데, 학사는 피터 롬바르트의 <조직신학, Sententia>을 주석하고 논쟁(disputationes)으로 짜여진 수련을 받게 된다. 그 다음 석사학위를 받고 박사학위는 35세 이상 이어야 한다. 논쟁에 쓰여진 방법론은 아벨라드의 <예와 아니오, sic et non)로서, 스콜라 방법론적 구조를 훈련하고 있었다.

 

    D) 걸식교단의 성장

걸식교단이란 13세기 초에 생긴 새로운 형태의 수도회를 뜻한다. 전통적인 수도회가 신비적 관조를 위하여 한적한 곳에 자리하였던 것과는 달리 걸식교단은 성결한 생활뿐만 아니라 설교와 가르치는 일에 힘을 썼다. 이 새로운 수도회는 도시와 상업의 발달에 따른 사회적 경제적 요구에 부응하는 형태였기에 모든 나라에 두루 퍼져 세계적 조직을 이루었으며, 아주 심오한 신학체계를 세워 13세기 이후에는 신학발전의 주축이 되었다.

이들 중 중요한 것은 '도미닉회'와 '프란시스코회'인데, 이 두 회의 모두 각각 창시자의 명칭으로 이름을 지었다.

 

도미닉은 1215년 수도원적 생활과 학문연구에 전념할 수 있는 새로운 교단을 설립하고 그 허가를 교황 인노센트 3세에게 요청했으나 제4차 라텐란회의에서 거절당했다. 그러나 이 교단은 처음부터 학문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에 집중한 결과, 중요한 대학들 특히 파리대학과 옥스포드대학의 교수직들을 맡게 되었다. 그들 중에서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은 대 알버트와 토마스 아퀴너스가 이 교단을 빛냈다. 프란시스코는 그 자신 탁발승으로서, 수도회에 전통적인 명상적 생활과는 달리 '행동적인 사랑의 삶' 이라는 새로운 이념을 도입한 사람이다. 이것은 인간들뿐만이 아니라 동물, 식물에 이르기까지 미치는 '신적 사랑의 힘'을 가르킨다. 프란치스코는 인간존재의 근거와 자연존재의 근거가 같다는 의미에서  모든 자연과 형제적인 결합 감정을 갖고 있어 자연을 종교에 끌어들였다. 프란시스코는 자연의 모든 영역이 신적 사랑에 의해 결합되어 있다고 믿었기에 인간의 계층구조에서 평신도들도 성스러운 것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남성 수도사들의 모임인 첫째모임, 여성 수녀들의 모임인 둘째 모임 외에 평신도들의 모임인 셋째모임(tertiaries, third oder)을 만들었다. 프란시스코회의 탁발수도자들은 대부분 둘씩 짝을 지어 빈곤한 삶을 추구하고 설교하며 가르치고 떠돌아 다니었다. 프란시스코회의 평신도 운동은 로마교회의 계층구조적인 체제에 위험이 되었고 훗날 수많은 반 교회적 종교 운동의 원형이 되었으며, 프란시스코회의 자연주의적 경향은 카톨릭의 초자연주의에 대립되었다.

도미닉회는 모두 아리스도텔레스에게서 깊은 영향을 받아 주지주의를 내세웠으나, 프란시스코회는 어거스틴의 전통을 따라 의지에 중점을 두었다. 이 두 교단의 독특한 성향과 대립이 13세기의 특색이 되며 또한 커다란 발전에 배경이 되는 것이다.

 

 

2) 사상적 고찰

 

중세의 황금기에 사상적으로 가장 커다란 사건이라고 한다면 13세기 초에 아라비아의 철학자들에 의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전집이 발견되었다는데 있다. 왜냐하면 이 시대의 사상적 발전은 신플라톤주의에 기반하고 있는 어거스틴적 전통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 사이에 있는 긴장 관계가 프란시스코회와 도미닉회 사이의 대립관계로 나타나면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 이전까지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이 논리학을 비롯한 극히 일부만이 아려져 있었는데, 그 나마 충실치 못한 번역 때문에 커다란 영향력을 끼칠 수 없었다. 그러나 12세기 말 특히 13세기 동안 아리스토텔레스의 여러가지 저작들이 번역됨으로써 서방 기독교는 천문학, 의학, 광학 등등의 자연과학을 비롯하여 지금까지 알지 못하던 보고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것이 갖는 의미는 중세 전반을 지배했던 어거스틴주의와의 다음과 같은 대립관계를 찾아 볼 수 있다.

 

첫째, 이미 알려져 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은 신학의 방법론에 영향을 주었으나 그 내용에는 영향을 주지 못했는데, 발견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전 저작은 자연과학, 정치학, 윤리학 등이 하나의 체계를 이루고 있었다. 이것은 세속적 세계관과 그 가치체계를 포함하는 하나의 완전한 체계로서, 어거스틴적 교회 전통체계와 대립되는 체계였던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상과 질료, 현실태와 잠세태와 같은 기본 개념으로 ㅇ니간과 세계와 신에 관한 이론을 존재론적으로 구성하였는데, 이것은 신의 내적체험을 기초로해서 그러했던 어거스틴의 이론과는 매우 달랐던 것이다.

 

둘째, 아리스토텔레스의 인식론은 감각적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즉 관찰과 경험을 통하여 사물과 세계를 인식하고, 여기에서부터 추론하여 신적인 것을 인식하는 방법으로 훗날 토아스 아퀴너스가 사용한 방법을 제시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플라톤적으로 신에 대한 인식을 모든 인식의 근거로 삼았던 것이다. 이것은 신은 우리 인식의 마지막이냐 아니면 처음이냐의 문제로 이해된다.

 

 

     a) 어거스틴의 전통

중세 초반 몇 세기동안 어거스틴의 사상은 절대적 권위를 갖고 있었다. 그의 저서들은 신학적 질문들을 해결하는 권위의 원천이었기에, 예컨데 고트샬크의 경우처럼 어거스틴의 이름으로 다른 사라이 정죄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어거스틴의 사상이 하나의 전통이 될 수 있었던 것은 13세기까지의 라틴서방의 지적전통은 어거스틴 자신이 크게 활용했던 신플라톤주의가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3세기가 되면서 새로운 상황이 벌어졌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들이 발견되고, 번여고디면서 새로운 철학을 신학에 도입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어거스틴의 전통은 도전받기 시작했고, 이 전통을 고수하고자 하는 사람들, 예컨데 헤일즈의 알렉산더나 보나벤투라 등에 의해서 활발히 연구되고 주장되었다.

 

어거스틴의 전통의 특성은 플라톤의 이데아 사상과 어거스틴의 거짓-디오니시우스로 이어지는 신플라톤주의적 전통 곧 경건성과 신비주의적 요소로 정리할 수 있다.

어거스틴주의자들에게 플라톤의 이데아 사상은 이데아가 하나님의 심성 안에 존재한다는 식으로 받아드려졌다. 따라서 '이데아가 모든 지식의 근거'가 된다는 플라톤의 인식론은 '하나님이 모든 지식의 근거'가 된다는 어거스틴의 인식론이 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리 곧 '계시된 진리'와 인간의 지식 곧 '이성적 진리'는 구분할 수 없는 것이 되었으며, 신학과 철학도 구분되지 않는 것이다. 어거스틴주의자들은 참된 지식은 육체적 감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육체적 감각을 초월한 그 어떤 것에서 나온다. 어거스틴의 말을 빌면 모든 지식은 하나님의 조명(a divine illumination)이다.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을 이어받는 사람들과 대립되는 점이었다. 예컨데 신의 존재증명을 보더라도 안셀름 같은 어거스틴주의자들은 육체적 감각을 출발점으로 해서 신을 증명하는 방법을 버리고, 신개념 자체에 신의 존재가 이미 내포되어 있다고 주장했다(안셀름의 두번째 신의 존재 증명을 보라!) 이에 반해 토마스 아퀴너스같이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라는 사람들은 감각을 통해 알게된 사실들을 신의 존재증명의 출발점으로 삼는다(토마스 아퀴너스의 "신의 5가지 존재증명"을 보라!)

    어거스틴주의자들에게 받아 드려진 신플라톤주의적 경향은 곧 '주의주의'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어거스틴주의자들은 회심 이전의 어거스틴의 경험이 반영된 주의주의적 입장 곧 하나님의 말슴을 행하는 것 곧 선한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 신학은 형이상학적인 면보다는 실천적이고 도덕적인 경향을 지닌다. 도덕적 경건성! 이것은 어거스틴이 이어 받은 로마의 크레멘트의 스토아 철학적 요소이기도 하며 13세기 프란시스코파의 특성이기도 하다.

    어거스틴 주의자들은 형상과 질료라든가 잠세태와 현실태 등등의 아레스토텔레스적 개념을 사용하면서까지도, 어거스틴적 테두리 안에서 해석하였다. 우리는 이것을 신율적이라고 부를 수 있다. 신율적이라는 말은 모든 것에 선행하는 그 어떤 것 곧 '제일원리'(causa prima)가 있으며, 이것이 신적인 것임을 말한다. 이러한 사상형태를 흔히 <직접적 형태> 또는 <신율적 형태>라고 부른다. 어거스틴주의는 중세 초기에는 대부분의 신학자들에게 영향을 끼쳐 13세기까지는 프란시스코 뿐만 아니라 도미니크파에서까지 받아드려졌다.

 

    b) 도미니크 학파

새로 발견된 철학 곧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신학에 받아드려 어거스틴주의자들과 대립한 사람들은 대부분 도미니크회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히포의 위대한 감독' 어거스틴 자신을 배척했던 것은 아니고, 어거스틴의 신학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구조 안에서 해석하려 했다. 곧 이들은 인식행위에 있어서 <직접적 형태>, <신율적 형태>를 부인하고, 신의 창조사역의 결과인 세계의 인식을 모든 인식의 출발로 삼는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의 인식이 신에 대한 인식에서 출바랗지 않고, 세계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하여 신에 대한 인식으로 나아간다. 이들도 신 그 자체가 첫째이며 모든 것의 '제일원리'인 것은 의심하지 않지만 인식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사상을 우리는 사상의 <간접적 형태> 또는 <경험적 형태>라고 부를 수 있다. 또한 이것은 인간 이성에 의한 <자율적 형태>인 것이다. 여기에 대해 어거스틴주의의 프란시스코회의 수도사들은 아래와 같이 비판을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방식을 충실히 쫓아서 감각적 경험에서 출발하는 이러한 방법은 과학적 지식은 증가시킬지 모르지만, 지혜 곧 궁극적 원인에 대한 인식 또는 신에 대한 인식은 파괴하게 될 것이다' 라고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도미니크학파는 신에 대한 인식에 이른다는 생각을 고집했다.  인신록의 이러한 두 가지 경향 곧 관념적 경향과 경험적 경향은 룻날 대륙의 관념론과 영국의 경험론으로 연결되어 첨예한 대립을 하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도미니크파가 훗날 극단적인 경험론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인식을 감각적 경험에만 국한시킨 것은 아니었다. 예컨데 이 학파의 위대한 스승인 토마스 아퀴너스는 감각적으로 얻어진 지식은 설사 그것이 논리적으로 타당하다 할찌라도 신에 대한 참다운 확신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교회의 권위가 진리를 보증하게끔 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계시와 이성, 신학과 철학의 사이에 놓여진 깊은 간격을 연결시키려 했던 천재적인 변증가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모미니크파 후계자인 둔스 스코투스는 이 간격을 인간이 도저히 매꿀 수 없는 심연임을 주장하였다. 토마스 아퀴너스는 '이성은 계시를 파악할 수 있는 적합성을 지니고 있다' 고 생각한 반면 둔스 스코투스는 '이성은 계시에 대해 부적합하다'고 주장하였고, 한 세기 뒤, 유명론의 대부인 윌리엄 오캄은 '계시는 이성과 아무런 접촉이 없이 병립되어 있다'라고 보았다. 이러한 주장들이 중세 말엽에 가서는 이중적 진리론으로 대두되어서, 동일한 주제가 신학적으로 맞는데, 철학적으로는 틀리고, 철학적으로는 맞는데 신학적으로는 틀리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러한 경향이 르네상스를 거쳐 근대로 들어서면서 사람들은 한편으로는 교회의 타율적 또는 신율적 체계를 받아드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율적인 과학을 발전시켜 나갔다. 사람들은 자신의 주장이 신학적 전통에 모순이 되면 과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삼고, 이성적으로 모순이 될 경우 신학적 전통에서 피신처를 찾는 이중적 진리관을 갖게 되었다. 이것은 오늘날 기독교인 역시 당면하고 있는 심각한 문제점인 것이다. 그러나 도미니크파의 주된 주장은 토마스 아퀴나스를 따라 경험과 이성을 근거로 인간이 진리를 파악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결국 어거스틴주의를 따르는 프란시스코파와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추종하는 도미니크파와의 격렬한 싸움의 저변에는 신율적 인식론과 자율적 인식론(비록 그것이 교회의 권위에 의해 보충되었지만)과의 첨예한 사상적 대립이 깔려 있는 것이다.

 

 

3) 주요 인물과 사상

 

우리는 여기에서 중세 전성기의 위대한 사상가로서 첫째로 어거스틴주의자인 프란시스코파의 보나벤투라와 둘째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인 도미니크파의 토마스 아퀴나스를 대표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a) 보나벤투라(1221-1274)

보나벤투라는 프란시스파의 신학적 기초를 정립한 "논박할 수 없는 박사" 알렉산더의 제자로서, 그는 "피단자의 요한" 또는 "치품천사박사"로도 불리웠으며, 프란시스파의 "제2의 창시자"로 추앙을 받았다.

 

    보나벤투라의 사상은 프란시스파의 깊은 경건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질송이 지적한 대로 성 프란시스코의 생애와 성 보나벤투라의 사상 사이에는 일정한 대응이 있다. 프란시스코의 생애가 하나님과의 신비적 사귐에서 절정을 이루고 있듯이 보나벤투라의 사상은 신비주의의 절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신학의 목적은 하나님을 신비를 풀거나 발견하는데 있지 않고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을 관조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는데 있다고 믿었다.

    그는 "신은 현실적으로 혼 안에 현존하고 있어 직접 인식할 수 있다"고 했다. 따라서 우리의 인식은 '신인식'으로 부터 출발하여 '세계인식'에 이른다는 것이다. 이때 우리를 인도하는 것이 신적 영원한 말씀의 빛이다. 이것은 조명으로 우리는 지식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신학은 지식의 최절정을 다룬다. 이성이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기에 선하다고 할 수 있고, 철학도 일정한 유형의 지식을 획득하기에 필요한 수단으로 좋은 것이라 할 수 있으나, 신앙은 이성적 활동이 아니라 의지의 정서(affection)의 의지하기에 신학은 학문 그 이상의 것 곧 지혜(sapientia)라는 것이다.

    이것이 그가 그 당시 유행하던 새로운 철학 곧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배척한 이유이기도 하다. 보나벤투라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감각적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학문 곧 자연학에서 뛰어났다고 생각했지만, 그가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거부했기에 자연히 창조설과 신의 예지와 섭리도 거부할 수 밖에 없게 되어서, 그의 형이상항은 오류에 빠졌다고 주장했다.

    보나벤투라는 하나님의 속성을 이야기하는 두 가지의 방법 곧 (거짓-디오니시우스의) '부정신학적 방법'과 '긍정신학적 방법' 중에서, 하나님의 불변성, 무한성 등등을 말하는 부정적 방법보다는 하나님의 사무이일체성을 언급하는 긍정적 방법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렸다. 그는 <요약, Breviloquium>에서 삼위일체설을 신학의 출발점으로 삼았고, 그의 가장 유명한 저서인 <하나님께 나아가는 영혼의 순례서, Itinerary of thr Mind towards God>에서는 어거스틴과 거짓-디오니시우스의 신비주의적 전통을 이어받아서, 모든 피조물에게는 "삼위일체의 흔적이 있음을 주장한다. 삼위일체의 흔적은 모든 피조물에게 계층적으로, 즉 흔적(vestige), 형상(image), 모습(likeness)으로 나타나 있다는 것이다. 모든 만물은 존재, 진리, 선함을 갖고 있는데, 이 세가지가 곧 성부, 성자, 성령의 흔적이고, 믿음, 소망, 사랑이 곧 삼위일체의 형상이라고 보나벤투라는 주장했다.

 

요약해보면 그의 사상은 그의 스승 알렉산더보다 훨씬 더 철저하게 어거스틴주의에 입각하여 정립되었다. 이것은 그의 시대에 와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신학에 더욱 강하게 영향을 끼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이 새로운 철학을 철저히 배격하든지 아니면 이 철학 위에 신학을 정립하든지 하는 양자택일만이 남아 있었다. 첫 번째 길을 따랐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두번째 길을 따랐다.


출처 : 고려개혁신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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