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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문예적해석법에 대한 일곱가지 오해-김지찬

baromi 2005. 8. 8. 10:09
문예적 해석법에 대한 일곱가지 오해

김지찬교수

1. 서론적 이야기

1.1 공시적 접근의 수용

개혁 교회는 문법적-역사적-신학적 방법을 전통적인 성경 해석법으로 간주한 반면에 비평주의는 역사 비평을 성경 해석의 유일한 방법론으로 강조하였다. 개혁 신학과 비평주의 사이의 오랜 대치 국면은 1970 연대 이후 소위 "수사비평" (혹은 "구조 분석") 과 "정경 비평" 이라는 이름의 "공시적 접근" ( synchronic approaches) 이 등장하면서 단순한 대치를 넘어서서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그 한 양상은 200 년 동안의 비평주의의 공격에 비교적 수세에 몰리던 개혁 신학계가 공시적 접근의 등장으로 인해 비평주의에 대항해 낼 수 있는 학문적 도구를 얻게 되었다. 물론 수사 비평과 정경 비평 역시 고등 비평적 전제와 방법론의 위험한 요소가 있는 것이 사실이나, 이방적 전제와 역사비평적 요소를 조심하면서 "주해 테크닉과 기술" 로서 받아들이면 비평주의를 극복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더욱 풍성하게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따라서 서구의 개혁주의 구약학자들은 최근의 공시적 접근을 "문학적 접근" 이라는 명칭으로 거의 모두 수용하고 있다. 예를 들자면 필자의 스승인 칼빈 신학교의 존 스텍 (John H. Stek),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트렘퍼 롱맨 (Tremper Longman III), 리폼드 신학교의 리챠드 프래트 (Richard L. Pratt, Jr.), 커버넌트 신학교의 필립스 롱 (V. Philips Long), 트리니티 신학교의 존 세일헤머 (John H. Sailhamer)를 들 수 있다. 이런 학문적 경향은 총신의 대부분의 구약 교수들에게서도 찾아볼 수가 있다.

1.2 염려가 오해로 발전

그러나 일이란 것이 늘 그렇듯이, 새롭게 보이는 (?) 해석법에 대한 염려가 싹트게 되었다. 이런 염려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수해온 개혁주의 입장에서는 어쩌면 당연한 것일 뿐 아니라, 건전한 학문적 토론과 대화를 통해 학문의 발전으로 나아가는데 좋은 밑거름이 된다. 그러나 최근에 일부 극소수 써클에서 이런 염려는 학문적 토론의 장으로 나아가기 보다는, 대화를 단절하고 일방적인 이해만을 고집함으로서 오해로 발전되고, 편파적인 매도로 나아가는 경향도 없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총신 원보가 이런 오해를 불식시킬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은 시의적절한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

2. 문예적 해석법에 대한 일반적 질문

문예적 해석에 대한 염려와 질문들은 크게 다음과 같은 부류로 구분할 수 있다. (1) 수천년 전의 성경 본문을 현대적 해석학 도구로 해석 가능한가? (2) 종교적 문헌인 성경을 과연 문학에서 사용하는 원리로 해석하는 것이 온당한가? (3) 문예적 접근은 성경의 역사성을 무시하는 것은 아닌가? (4) 문예적 접근은 성경의 저자가 성령임을 망각하는 것은 아닌가? (5) 문예적 해석은 고도의 훈련을 받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해석은 아닌가? (6) 과연 문예적 해석으로 찾아낸 구조와 기법들이 저자가 의도한 것인가?(7) 문예적 해석법은 전통적인 문법적-역사적-신학적 해석법을 대치하는 것은 아닌가?

3. 오해는 오해일 뿐

이런 질문들은 문학 비평주의자들이나, 지혜롭지 못한 일부 소위 "복음주의자" 들이 사용하는 문학적 해석법을 접할 때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의문들이다. 이런 인사들의 어설픈 해석을 들어보면 현대 문예 이론에 편파적으로 의존하고, 성경이 오류없는 영감된 계시임을 고려에 넣지 않고 해석하고, 성경의 역사성을 무시하고, 성령의 조명을 염두에 두지 않으며, 지나친 전문적 해석으로 내달으며, 저자의 의도를 무시하고 독자의 반응을 너무 중시하며, 기존 해석법을 무시하는등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일부 인사들의, 그것도 개혁주의 외부의 인물들의 잘못된 문학 비평의 오류를 가지고, 문예적 접근을 성경의 성격에 맞게 사용하는 지혜롭고 믿음이 있는 개혁주의 구약학자들을 싸잡아 비판하며, 문예적 접근을 매도하는 것은 옳지 못한 것이다. 이는 돌팔이 의사가 있다고 해서 모든 의사를 매도하거나, 의사직을 없앨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4. 오해를 넘어서

4.1 고대와 현대의 문제.

그렇다면 문예적 해석법을 사용하는, 지혜롭고 믿음이 있는 개혁주의 구약학자의 관점에서 문예적 해석법에 대한 일곱가지 오해를 간략하나마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자. 첫 번째 오해는 '수천년 전의 성경 본문을 오늘의 현대적 해석학 도구로 해석 가능한가' 이다. 문예적 해석법이 최근에 등장했다고 해서 개혁주의 구약학자들이 사용하는 문예적 해석법이 현대적 도구라고 보는 것은 오해이다. 일부 문예 비평가들이 독자 반응 비평, 심층구조 분석, 해체론같은 현대적 문예 이론을 사용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개혁주의 학자들은 이런 이론을 사용하지 않는다. 물론 플롯 (구성), 성격 묘사, 구조 같은 용어들이나, 수사적 기교를 가리키는 단어들은 현대에 생긴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런 문예적 기법이나 현상이 고대 본문에 없는 것은 아니다. 물의 성분이 H2O 라는 사실이 근대에 들어와서 알려졌다고 해서, 이전에는 H2O 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마찬가지로 풍자라는 개념은 현대적 개념이지만, 성경 본문에 풍자가 나오는 것은 부인할 수가 없다. 물론 현대적 문학 도구를 가지고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오류가 있을 수 있기에 개혁주의 학자들은 고대 근동 아시아의 문헌들이나 성경 자체를 통해서 성경 기자 당시의 문예적 관습과 기법을 찾는데 노력하고 있다.

4.2 종교성과 문예성의 문제.

두 번째 오해는 '종교적이고 신학적 문헌인 성경을 과연 문학에서 사용하는 원리로 해석하는 것이 온당한가' 라는 것이다. 이런 오해는 성경의 문예성은 성경의 종교성과 구별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모른데서 온 무지의 소치이다. 예를 들어 구약 성경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내러티브의 경우 "플롯, 인물, 배경, 어조" 의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이 네 구성 요소들이 항상 종교적인 것을 다루기 때문에 이런 요소들에 대한 연구는 종교성과 무관한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배경의 요소를 살펴보자. 배경이란 무엇이 가능하고 무엇은 불가능한 일인지를 결정한다. 인간 세계에서 기대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인간 삶에 주어진 조건들은 인간에게 적대적인가 아니면 이로운 것인가 에 대한 질문들은 오직 신앙이나 신념만이 대답할 수 있는 문제들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물, 플롯, 어조에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성경의 문예성은 성경의 종교성과 신학성과 상충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드러내는 것이다.

4.3 역사성과 문예성의 문제:

세 번째 오해는 '역사적 사건을 담고 있는 성경을 문예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성경의 역사성을 무시하는 것은 아닌가' 라는 질문이다. 이런 오해는 구약 성경은 "실재 복사의 사진으로서 역사" 라는 더 근본적 오해에서 싹트는 것이다. 구약 성경 내러티브가 역사적인 사건들을 기술하고 있지만, 비디오테이프 역사는 아니다. 이미 세속 역사가들도 이런 의미의 역사는 불가능함을 인정한지 오래이다. 그런데 아직도 이런 비디오테이프적 역사관을 가지고 문예성에 대한 강조는 성경의 역사성을 훼손하는 것이라고 우기는 것은 아이러니칼하게도 근본주의자들이 비평주의의 "실증주의적 역사관" 을 가진 결과라고밖에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구약 성경 역사는 문예성을 통해 감동적으로 해석이 가미되었기에 사진 보다 더 완벽한 실재의 재현일 수도 있는 "그림으로서의 역사" 이다. 즉 문예성은 정확한 역사적 진술을 가로막는 방해물이 아니라 오히려 과거의 정확한 역사를 오늘을 위한 교훈으로 만드는데 없어서는 아니되는 가치 표현 채널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성경이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임을 받아들인다면, 성경 기자의 그림은 얼마든지 신뢰할 수 있는 것이다. 필자는 문학이란 용어가 가진 허구의 개념으로 인한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문학성" 이라는 표현을 거부하고, 고집스럽게 "문예성" 이라는 용어를 선호하고 있는 것은 성경의 역사성을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4.4 성령의 조명과 해석의 문제:

네 번째 오해는 '성경을 문예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성경의 저자가 성령임을 망각하고, 성경을 너무 인간의 책으로 보는 실수에 빠지는 것은 아닌가' 라는 것이다. 이런 질문은 "성령이 성경의 문자적 의미를 통해 역사한다" 는 개혁주의의 원리를 모르는데서 기인한 것이다. 성령이 교회의 교직자 집단을 통해 역사한다는 로마 카톨릭과, 직접 경험 가운데 역사한다는 신비주의자들에 대항해서 루터와 칼빈은 성령은 성경의 문자적 의미를 가지고 역사한다고 외친 것이다. 오늘 한국 교회 안에는 성령이 성경과 별로 상관없이 따로 역사한다고 보는 신비주의적 경향이 팽배하다. 성경의 문자적 의미와 문예적 의미를 분석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에 의존하는 것이다. 이런 기본적인 사실도 모른채 문자적 의미에만 매달리지 말고 성령에 의존해야 한다는 자들이 늘어나고 있으니, 도대체 한국 개혁교회는 어찌된 것인가?

4.5 성경의 명백성과 전문적 해석의 문제:

다섯 번째 오해는 '성경은 누구에게나 명백한 책인데, 문예적 해석은 성경 원어의 능력등, 고도의 훈련을 받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해석은 아닌가' 라는 것이다. 성경은 그 기본 구원의 도리에서는 누구에게나 명백한 책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전문적 해석을 할 필요가 없는 책은 아니다. 구약 성경은 최소한 3천년 이전의 남의 문화권에서 히브리 언어로 히브리 백성에게 주어진 계시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전문적인 지식과 도구 없이는 제대로 해석해낼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이미 한글로 번역된 성경도 히브리어를 아는 전문인의 손을 통해 주어진 것이다. 성경은 "아무렇게나 누구든지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식한 일이다. 독일어를 모르고 독일 문학을 한다고 할 수 있는가? 의학 전문 수업을 받지 않고 전문 의사로 행세할 수 있는가? 사법 고시와 사법 연수원의 고도의 전문 지식을 쌓지 않고 법조인으로 행세할 수 있는가? 일반 목회자들이 원어 지식이 없다고 해서, 좋은 방법론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일반 전문직종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말을 신학계와 교계에서는 당당히 하고 있다는 사실은 한국 신학계와 교계가 얼마나 황폐하였는가를 잘보여주고 있다. 어거스틴이 성경을 제대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성경 언어, 역사, 자연과학, 논리, 철학을 강조하였으며, 칼빈과 루터가 성경의 원어를 강조하면서 "원천으로 돌아가자" 고 외친 이후, 어거스틴과 칼빈을 따르는 개혁교회는 일반 교양학부 (pre-seminary) 와 신학 전공 과정 (seminary) 으로 나누어 목회자 양성을 해온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 목회자들은 전문지식인으로 연구에 게을리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4.6 저자의 의도와 문예적 기법의 문제

여섯 번째 오해는 '과연 문예적 해석으로 찾아낸 구조와 기법들이 저자가 의도한 것인가' 라는 점이다. 이런 오해는 성경 저자의 의도가 본문 안에 언어적 상징이나 문예적 기법에 의해 표현되었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은데서 기인한 것이다. 해석자들이 저자가 의도하지 않은 것을 찾아낸 것인지의 여부는 본문에 대한 심층적 연구를 통해 가려져야 하는 것이다. 저자의 의도는 본문 안에 "표현된 의도" (expressed intention) 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문예적 접근은 저자의 의도를 드러내는데 기여하고 있는 것이다. 심도있는 문법적, 문예적 해석 없이 어떻게 저자의 의도를 알아낼 수 있다고 하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일이다.

4.7 기존 해석법과의 문제

일곱 번째 오해는 '문예적 해석법은 전통적인 문법적-역사적-신학적 해석법을 대치하는 것은 아닌가' 라는 것이다. 속담에 "늙은 개는 새로운 사냥법을 배울 수 없다" 는 옛말이 있다. 따라서 기존 틀에 익숙한 기성학자들은 새로운 것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문예적 해석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문법적 해석의 보충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로운 사냥법" 이라는 두려움 때문이라면 문예적 해석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문예적 해석은 기존의 문법적 해석이 "절" 단위에만 국한되어 있는데 반해, 그보다 상위의 단위, 즉 단락, 에피소드, 스토리, 책 한권 전체, 구약 성경 전체 등의 거시 단위를 해석할 수 있는 도구를 제공하는데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런 견해를 드러내기 위해 개혁주의적 해석은 "문법적-문예적-역사적-정경적-신학적"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5. 진정한 신학적 토론의 장으로

오해는 오해를 낳고, 불신은 불신을 낳는 것이 인간사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다루는 신학계나 교계도 예외가 아니다. 그동안 소위 "복음주의" 라는 용어가 팽배해지면서, 외부적으로 이익을 위해서는 어떠한 학파나 종파와도 교류를 서슴치 않으면서, 내부적으로는 근본주의적 사고를 가지고 대화를 단절한채 일방적으로 자신과는 다른 생각을 가진 자들을 비난하는 경향이 커져온 것이 사실이다. 이것은 "개혁주의" 의 본 모습이 아니다. 어쩌면 지난 수십년 동안 개혁주의는 실종된채, 복음주의를 가장한 근본주의자들이 학문성도 없이, 보수라는 신학적 기치를 내세우면서 정치적 힘을 업고 교계와 학계를 지배해 온 결과가 아닌가 생각한다. 이제 우리는 학문을 경시하는 어설픈 "복음주의" 와 잔존한 "근본주의" 의 틀을 벗어버리고, "학문"을 중요시 여겨온 개혁주의의 모습으로 회귀해야 한다. 모든 인간의 방법론은 위험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새 예루살렘의 도서관에서 해석을 하는 천상의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아직도 거울을 보는 것처럼 희미하게 성경을 해석하는 자들이다. 그런 점에서 문예적 해석은 다른 모든 인간의 해석 (심지어는 전통적 해석도 포함해서) 과 마찬가지로 위험한 것이다. 그러나 아무런 도전도 하지 않은채 옛것에만 매달리면서, 돈을 잃을까 두려워하여 땅에 한 달란트를 파묻은 "악하고 게으른 종" 처럼 되어서는 아니된다. 돈을 잃을 우려가 있지만 주의 말씀에 순종하여 위험을 무릎쓰고라도 두 달란트나 다섯 달란트를 남겨"착하고 충성된 종" 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판단은 오직 주님의 몫임을 인정하며, 말씀의 종으로 그저 맡은 바 말씀을 겸손히 섬겨야 하는 것이다.

출처 : 한우리성경강해
글쓴이 : 한우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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