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신학자료

[스크랩] 성경의 권위-김지찬

baromi 2005. 8. 8. 10:08
결단을 촉구하는 성경 스스로의 권위

신앙 생활을 하다보면, 특별히 지성인들의 경우에는 "성경이란 도대체 어떤 성격의 글들인가" 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제기된다. 이 질문은 그저 학문적 호기심에서 나온 질문이 아니다. 만일 성경이 교회의 전통적인 주장대로 "신앙과 삶의 절대 무오의 유일한 규범" 이라고 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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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단을 촉구하는 성경 스스로의 권위": 성경의 권위와 계시성에 대하여

김지찬교수

대학가 vol. 95 (IVP; 200 년 6 월호), 6-7 에 실린 글

1 성경은 어떤 책인가?
신앙 생활을 하다보면, 특별히 지성인들의 경우에는 "성경이란 도대체 어떤 성격의 글들인가" 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제기된다. 이 질문은 그저 학문적 호기심에서 나온 질문이 아니다. 만일 성경이 교회의 전통적인 주장대로 "신앙과 삶의 절대 무오의 유일한 규범" 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에 전폭적인 순종을 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 수세기 동안 합리주의자들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 이라는 역사적이고 전통적인 견해를 신랄하게 공격해 온 데다가, 우주 탐험과 인간의 유전자 분석이 경이의 지경에 이른 초첨단 기술 문명 가운데서 과연 수 천년 전 청동기 시대와 로마 문명 시대의 책이 오늘 우리에게도 권위가 있는가 라는 의문이 마음 한 가운데 또아리를 틀고 앉아 있는 경우를 종종 느끼게 된다. 따라서 성경이 도대체 어떤 책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어떤 대답을 내리느냐 하는 것은 한 사람의 삶과 행동 체계 전체를 좌우할 만큼 매우 중요한 일이다.

2 여러 견해들
17 세기 이후 합리주의자들은 자율적 인간 정신 (autonomous human spirit) 을 가지고 모든 문제, 심지어는 성경의 기본 성격에 대한 해답까지도 내릴 수 있다고 전제하고, 성경은 유대인들의 종교적 발전의 부산물에 불과하다고 본다. 이들의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신 체험" 을 문자로 형상화시키려는 유대인들의 종교적 발전의 부산물로 본다. 따라서 성경에는 얼마든지 오류와 모순이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대부분의 평범한 대중들은 구약의 성격이 무엇인가에 대해 스스로 해답을 내리기를 거부하고, 교회나 교회 회의의 권위있는 선언이나, 카리스마적인 인물이나, 어떤 전문가의 견해나, 특정한 교회 전통이나, 자신이 속해 있는 소그룹의 정설을 그대로 수용하려는 태도이다. 이 같은 자세는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매우 필사적인 상황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위험한 태도이다. 더욱이 불신 지성인들은 권위에 호소하는 방법론에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3 성경의 자증 (自證)
종교 개혁자들은 성경이 어떤 성격의 책인지를 결정하고 선포할 수 있는 권위가 성경 위에 달리 존재한다는 점을 거부한다. 그 권위가 인간 제도이든, 전승이든, 카리스마든간에 성경을 판단할 수 있는 더 높은 권위가 존재 할 수 없다는 것이 개혁주의자들의 주장이다. 성경이 스스로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성경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가 성경의 자증에 귀를 기울여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가 있다.

첫째, 성경에는 세계와 인류역사의 기록에서부터, 창조주의 뜻과 목적에 관한 기사, 하나님이 인간과 언약을 맺는 모습,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하나님의 크신 권능과 이적에 대한 기사, 하나님의 약속과 예언, 지혜의 말들과 기도와 찬양의 시편들, 서신들, 미래에 있을 일에 대한 묵시 문학 등, 천년 이상 걸려서 쓰여진 다양한 기록들이 모아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개념과 사상에 있어서 놀랄만한 통일성과 단일성이 있음을 볼 수가 있다. 특별히 이 같은 일치성은 비의도적이고 무의식적인 상황 가운데서 생긴 것이기에 더 놀랄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둘째, 더욱 놀라운 것은 성경 스스로가 그 안에 쓰여진 글들이 이스라엘과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 이라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여기서 한가지 주목할 사항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논증하거나 변증하려고 하지 않은데 있다. 물론 성경에 기록된 역사가 세계 역사와 긴밀히 연관된 역사이기에, 특정한 점에서는 역사 연구의 대상이 되는 것임은 부인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성경의 중심 메세지는 과학적 연구나 철학적 비평의 대상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 1:1), 고 성경이 선언할 때, 철학자나 경험주의적 과학자들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이같은 성경의 선언과 진술 앞에서 철학자나 과학자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단지 믿거나 믿지 않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셋째 성경은 오랫동안 잊혀졌다가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굴되어 잊혀진 과거를 되살리는데 도움이 되는 고대 비석이나 문서가 아니다. 성경은 오늘도 우리 앞에 나타나, 우리의 믿음과 복종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다시 말해 성경은 교회를 불러내시고, 창조하시며, 먹이시고, 믿음의 공동체로 형성하셔서 오늘날까지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서 만드시는 창조의 말씀이시다.

4 신앙의 결단

이런 식으로 성경 자체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우리는 신앙의 결단을 해야 할 순간에 도달하게 된다. 이 같은 실존론적 결단의 순간에 우리는 성경이 단지 듣고 순종할 수 밖 에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구약 자체의 주장을 믿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던지, 아니면 불신앙 가운데서 우리가 판단하고, 비판하고, 마음대로 비평할 수 있는 순전한 인간의 말로서 받아들이던지 양자 택일을 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 같은 대답은 합리적 분석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도 아니며, 역사적 증거들의 강한 설득력에 의해 형성되어지는 것도 아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이 같은 결단을 내리도록 촉구를 강하게 받게 된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만나게 되면 그를 구세주로 받아들이던지, 미친 사람으로 치부하던지 믿음의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성적 논증이나 역사적 증거로는 이 같은 믿음의 결단을 내릴 수가 없다. 이 같은 결단은 전이성적 결단 (前理性的 決斷: pre-rational decision) 이라고 부를 수 있다. 물론 이것이 이 결단이 비이성적 (非理性的; irrational) 이라는 말은 아니다. 이성이나 합리성을 가능케 만드는 것이 바로 신앙의 결단임을 명심해야 한다. 예수를 만난 후에 그를 그리스도요 구세주로 받아들이던지, 마귀들린 사람으로 보던지 간에, 신앙의 결단을 한 사람만이 이성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 즉 신앙의 논리를 따르든, 불신앙의 논리를 따르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5 연구의 필요성
여기서 우리는, 어거스틴이 말한 바대로, "알기 위해 믿는 것" (credo ut intelligamo) 이라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 하나님이 계시하실 때 우리가 취해야 하는 태도는 "절대적 신앙의 수납" (implicit reception of faith) 이다. 물론 우리가 계시에 대해 반응을 보일 때 연구하고 사고할 필요성이나 역할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연구와 사고는 계시를 비판하는 위에서 행해져서는 아니 되며, 계시를 분명히 인식하는 위에서 행해져야 한다. 연구와 사고는 신앙의 뒤를 따라가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신앙으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수납한 후에, 우리의 중생된 이성을 가지고 순종하며 성경을 연구해야 한다.

우리가 이렇게 겸손히 우리 자신의 전제와 가정을 버리고, 본문의 말씀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일 때만이, 성경은 우리에게 구속의 은혜를 행사할 수 있는 것이다. 성경을 먼저 은혜의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으면, 아무리 뛰어난 신학 체계와 멋진 설교들을 작성했다손 치더라도, 자신에게는 아무런 구속의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아직도 성경 말씀을 가지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며 믿음과 복종을 요구하시고 계신다. 한 마디로 성경은 은혜의 수단인 것이다 (media gratiae). 성령이 역사하는 장소는 성경의 "문자적 의미" 이기 때문에 우리들은 성경의 문자들을 읽고 연구하고 순종하는 일에 게을리 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출처 : 한우리성경강해
글쓴이 : 한우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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