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신학자료

E. 신약시대의 안식일과 주일 이해

baromi 2005. 7. 21. 13:09
LONG

안식일에서 주일로

        하지만 신약성경에서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언제부터, 어떻게 안식일을 버리고 주간의 첫 날을 정기적인 예배일로 지키게 되었는지 말하지 않는다. 주간의 첫 날인 ‘주의 날’ 준수와 관련해서 아무런 규정도 제시하지 않는다. 심지어 주의 날을 지키라는 명령조차 신약성경에서 찾을 수 없다. 이것은 지난 이천년 동안 일요일을 정기적인 예배일로 지켜온 그리스도 교회의 오랜 전통을 생각할 때 매우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초기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일요일 예배와 관련해서 어떤 논쟁이나 논란이 있었다는 기록을 찾을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이방 지역의 그리스도인들이 주간의 첫날에 공적인 모임을 가진 사실이 사도행전에 기록되었으나(20:7) 예루살렘 교회가 이것을 문제삼았다는 기록이 전혀 없다. 이런 사실은 바울 사도나 이방인 교회들이 일요일 예배를 먼저 시작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일요일 예배는 이방인 선교가 시작되기 전에 예루살렘과 유대지역의 교회 안에 이미 정립되어 있었을 것이다.112)

        사도행전의 기록이 보여주는 대로, 예루살렘과 유대지역의 그리스도인들은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에도 안식일을 지키고 성전이나 회당 예배에 참석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로서 그들은 사도들에게 가르침을 받고 떡을 떼기 위해 집에서도 모였다.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에 그들은 자신들이 이스라엘 백성의 일부일 뿐 아니라 종말의 새로운 이스라엘에 속한 자들이라는 의식을 갖게 되었다. 그들 가운데는 종말의 성령께서 역사하고 계셨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교제하며 예배하기 위해서 자신들만의 기독교적 모임이 필요했다. 그들은 상당한 기간동안에 유대인들로서 유대적 관습에 따라서 안식일 예배에 참석하면서 동시에 종말의 새 이스라엘로서 주간의 첫 날에 따로 모여서 예배와 교제하는 일을 계속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초기 예루살렘 교회가 언제부터 매일 모이던 모임을 일주일에 한 번 모이는 것으로 변경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성도들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매일 모이는 것이 힘들게 되었으리라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그들은 일주일에 한번 안식일을 지키는 관례에 따라 자연스럽게 일주일에 한번 예배와 교제의 모임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선택한 예배와 교제의 날은 주간의 첫날, 곧 일요일이었음에 분명하다. 주간의 다른 날이 아니라 일요일을 택한 중요한 이유는 예수님의 부활 때문이었다. 아마도 A.D. 40년대 후반 이방인 선교를 본격적으로 시작할 무렵에는 일요일 예배가 유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확고하게 뿌리를 내렸을 것이다. 또 그런 관습은 이방인 선교와 함께 이방 지역으로 전파되었을 것이다.


초기 교회의 ‘주의 날’ 준수

        사도 시대와 2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이 일요일을 ‘주의 날’이라고 부르고 그 날을 정기적인 예배와 교제의 날로 지켰음에도 불구하고, 신약성경에는 주의 날을 지키라는 명령이나 규정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와 안식일 그리고 주일』이라는 책에서 양용의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주간의 첫날에 함께 모였음을 알려주는 구절들인 사도행전 20:7과 고린도전서 16:2는 일요일 예배를 규정하거나 명령하지 않고 단지 시사하고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113) 일요일을 예배일로 지키는 것은 성경적인 근거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신약성경에 일요일에 관한 명령이나 규정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도시대와 2세기의 교회들이 일요일을 ‘주의 날’이라고 부르고 공식적인 예배일로 지켰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앞서 지적한 대로, 일요일 예배와 관련해서 어떤 논쟁이나 논란의 증거를 찾을 수 없다. 또 토요일을 지키던 에비온파를 제외하고는 일요일이 아닌 다른 날에 예배하는 집단이 있었다는 기록도 없다. 이런 사실은 일요일 예배가 초기 교회 안에서 매우 이른 시기에 하나의 관례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아마도 당시 이방 교회들도 일요일에 예배하는 것을 당연한 일로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잘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주일 준수를 따로 규정하거나 명령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바울 사도가 갈라디아서 4:10과 골로새서 2:17에서 유대인들의 절기와 월삭과 안식일 등을 지키는 것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태도를 보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어디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이 주간의 첫 날, 곧 주의 날을 예배일로 지키는 것에 반대하지 않는다. 그는 드로아 교회의 성도들과 함께 주간의 첫 날에 모여서 강론을 하고 함께 떡을 떼는 일을 하였다(행 20:7).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는 주간의 첫 날에 예루살렘의 성도들을 위해 구제 기금을 저축하라고 권고하기도 하였다(고전 16:2). 이것은 그가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이 일요일에 공식적인 예배 모임을 갖는 것을 인정했을 뿐 아니라 사도 자신이 친히 그 날을 지키기도 했음을 보여준다.

        게다가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 1:10에서 다른 설명 없이 ‘주의 날’을 언급한 것은 적어도 소아시아 교회들 사이에서 일요일을 주의 날이라고 부르는 것과 그 날에 예배를 드리는 것이 하나의 관례로 정착되었음을 알려준다. 사도행전 뿐 아니라 고린도전서와 요한계시록에서 주간의 첫날에 예배하는 일을 언급한 것은 매우 중요하다. 비록 신약성경에 일요일 예배에 관한 규정이나 명령이 없다고 하더라도, 사도시대에 다양한 지역의 교회들 사이에서 일요일 예배가 정착되어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물론 사도들과 교회가 매주 일요일을 예배일로 지킨 것을 교회의 편익 때문에 생겨난 전통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편익보다 훨씬 중요한 이유 때문에 일요일을 공적 예배일로 지키게 되었다고 볼 수 있는 근거가 있다. 그것은 초기 교회가 매우 이른 시기에 그 날을 ‘주의 날’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이다. ‘주의 날’이란 주님께 속한 날을 의미한다. 물론 주간의 모든 날이 다 주님께 속한 것이므로 어느 특정한 날을 따로 구별해서 그 날만 주님께 속한 날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 교회가 주간의 첫 날, 곧 일요일을 ‘주님의 날’이라고 부른 것은 그 날이 바로 예수께서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일어나서 온 우주를 향해 주되심을 선포하신 날이기 때문이다.

        사복음서는 모두 분명하게 안식 후 첫날, 곧 주간의 첫날에 예수께서 부활하셨다고 진술한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일요일은 주님이신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로 각인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일요일이 아닌 다른 날을 예수님의 부활의 날로 인정할 수 없었고, 또 일요일이 아닌 다른 날을 ‘주의 날’이라고 부를 수도 없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주간의 첫날을 그의 부활을 기념하고 부활을 통해서 이루어진 구원을 즐거워하기에 가장 적절한 날로 삼았던 것이다.

        주간의 첫날인 일요일에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일요일 예배가 모든 지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규범적인 지위를 갖게 된 원인을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초기 기독교 문헌들이 함께 공유하고 있는 것은 일요일을 예수님의 부활과 관련시키고 있는 점이다. 예를 들어, A.D. 100-132년 경에 알렉산드리아에서 기록된 것으로 알려진 『바나바서』(Letter of Barnabas) 15장에서 저자는 일요일을 여덟 번째 날이라고 부르면서 “우리도 기쁨으로 여덟 번째 날을 지킨다. 그 날에 예수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셨고 사람들에게 나타나셨으며 하늘로 올리우심을 받았다”고 말한다(8-9절).

        결론적으로 말해서 일요일 예배는 사도시대에 시작된 것으로서, 사람들의 편의나 합의가 아니라, 주간의 첫 날에 일어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에 근거를 두고 있다.114) A.D. 40년 후반부터는 사도들과 함께 예루살렘과 유대 지역의 교회들이 일요일 예배를 시행했으며, 이방 선교가 시작된 이후에는 이방 지역 교회들이 이를 시행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요일 예배를 신약성경에서 직접 명령하지는 않더라도 정경적 권위의 표를 지닌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주님이 부활하신 주의 날에 함께 모여 공동으로 [예배]드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규정한 본 교단의 예배지침 제1장 제2조를 정경적 권위에 근거한 것으로 인정하는 것이 옳다.


주일과 안식일의 관계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때문에 주간의 첫날을 주의 날로 지켰다면 주의 날과 구약의 안식일의 관계는 무엇인가? 청교도 전통에 영향을 받은 한국 장로교회는 두 날 사이에 강한 연속성이 있다고 보고 주의 날(주일)을 ‘기독교의 안식일’(Christian Sabbath)로 간주해왔다. 그러나 오늘날 적지 않은 학자들이 일요일을 소위 ‘안식일’로 보는 것에 반대한다. 양용의는 일요일 휴식을 성경에서 명령하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어서 일요일을 그리스도인들이 쉬어야 하는 유일한 쉼의 날로 간주하지 않는다. 그는 “마태나 다른 신약성경의 저자들(특히 바울)에 의하면, 쉼의 날은 이처럼 일요일(즉, 소위 ‘그리스도인의 안식일’)이나 토요일(즉, 정식 안식일) 어느 한 날이어야 할 필요가 없다”라고 주장한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일요일에 정기적으로 쉬는 것은 성경적인 근거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만 실천적인 이유 때문에 추천할만하다고 말한다.115)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서 그는 율법주의의 위험에 빠지기 쉬운 ‘한국 교회는(그리고 그 어떤 다른 교회라도) 어떤 한 날을 그리스도인의 유일한 쉼의 날로 규정하려는 시도를 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경고하기까지 한다.116)

        양용의가 지적한 대로, 신약성경에 주일에 일을 하지 말고 쉬라는 규정이나 명령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이다. 사도행전 20:7에 따르면 ‘주간의 첫 날’은 쉬는 날이라기보다는 떡을 떼기 위해 모이는 날이라는 인상을 준다. 드로아의 그리스도인들은 모두가 일하는 아침이나 낮이 아니라 저녁에 모였던 것으로 보인다. 사도시대의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노예들이 많았으므로 그들에게 다른 사람들이 모두 일하는 일요일에 일을 하지 말고 쉬라고 권고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신약성경뿐 아니라 2세기의 기독교 문헌들에서도 일요일을 안식하는 날로 규정한 대목을 찾아 볼 수 없다.117) 일요일에 일을 하지 말고 쉴 것을 최초로 분명하게 언급한 사람은 3세기 초 북아프리카에서 활동한 변증가 터툴리안(Tertullian)이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에서 본격적으로 예배와 함께 육체적 노동을 쉬는 것이 주일의 표지가 되기 시작한 것은 A.D. 321년 3월 7일에 콘스탄틴 황제가 모든 재판관들과 도시에 사는 주민들과 각종 상업에 종사하는 자들은 일요일에 쉬어야 한다는 칙령을 공포하면서부터였다.118)

        이처럼 주일에 노동을 쉬는 전통이 3세기 초의 문헌에서 나타날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신약성경에서 주일을 쉬는 날로 규정하지 않기 때문에 주일을 기독교적 ‘안식일’로 간주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안식일과 주일의 비연속성을 강조하면서 주일은 일을 그치고 쉬는 날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다. 구약의 안식일과 신약의 주일 사이에는 비연속성뿐 아니라 연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구약의 안식일과 신약의 주의 날을 연결하는 중요한 고리는 안식의 개념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통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안식을 누렸으나 그들이 들어가야 할 안식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안식일에 모든 노동을 그치고 하나님께서 창조와 구속을 통해 그들에게 주신 육체적인 안식을 누리는 동시에 미래에 실현될 영적인 안식을 고대하였다. 그들의 육신적 안식이 예표한 것, 그리고 그들이 안식일에 고대한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주어지는 구원의 안식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의 안식일이 예표한 진정한 구원의 안식을 가져오신 분이다. 그는 안식일의 주인이실 뿐 아니라(마 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라는 선언을 통해 자신을 참된 안식을 주는 분으로 제시하셨다. 이 선언대로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죄와 죽음의 속박 아래 종노릇하던 사람들을 해방하여 구원의 안식을 누리게 하셨다. 주의 날(주일)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심으로써 안식일이 지향하던 영적 안식을 성취하신 날이다. 요컨대 안식일과 주일을 ‘안식’이라는 개념으로 연결할 수 있는 것은 구약의 안식일이 지향한 구원의 안식을 성취하신 예수님 때문이다.

        앞서 지적한 대로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에는 더 이상 구약의 안식일을 문자 그대로 지킬 필요가 없어졌다. 구약의 안식일은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 이루어지는 영적인 안식을 지향하는 모형과 그림자이기 때문이며, 또한 실체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구원의 안식을 성취하시고 구원의 안식을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간의 칠일 가운데 하루를 쉬는 하나님의 안식 제도는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이 제도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구원을 완성하시는 날까지 존속될 것이다. 왜냐하면 구원받은 성도들이라도 구원받는 즉시 하늘 나라로 들려 올라가서 완전한 구원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육신을 입고 수고하면서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사는 한 신약의 성도들도 육체의 휴식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면 주간의 칠 일 가운데 어느 날에 쉬어야 하는가? 여러 학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일요일이 아닌 다른 날을 쉬는 날로 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심으로써 믿는 이들을 위하여 구원의 안식을 이루신 주의 날이야말로, 모든 일을 그치고 안식하기에 가장 적합한 날이다. 주일에 노동을 그치고 안식을 누리는 것은 신학적으로 매우 타당하다. 주일은 그리스도께서 구약의 안식일이 지향하던 구원의 안식을 성취하신 날이요, 또한 성도들이 그것을 기념하기에 적절한 날이기 때문이다. 주일에 일을 그치고 휴식을 누리는 것은 신자들에게 의무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축복이며 특권이다.

        구약의 성도들은 안식일에 모든 노동을 그치고 하나님께서 창조와 구속을 통해 그들에게 주신 육체적인 안식을 누리는 동시에 미래에 실현될 영적인 안식을 고대하였다. 이와 같이 신약의 성도들도 주의 날에 모든 일을 그치고 육체적인 안식과 함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해 주신 영적인 구원의 안식을 누리면서 미래에 완성될 영원한 안식을 고대하는 것이다(히4:9-10). 구약의 안식일이 장차 참된 안식을 누리게 되리라는 언약의 표징이듯이, 신약의 주일도 미래에 완전한 구원의 안식을 누리게 되리라는 언약의 표징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신약의 성도들이 주일에 쉬는 것은 그 날이 예배를 위한 날일 뿐 아니라 안식일이 지향하던 안식이 실현된 날이며 영원한 안식을 고대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결론


        먼저 우리는 수천년 교회 역사상 안식일과 주일 문제에 대한 다양한 견해 차이가 존재해 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단지 이단적인 교회들의 이견 뿐 아니라 정통 교회, 심지어 개혁주의 전통 속에서도 이 문제에 대해 상반되는 여러 이론들이 오랫동안 그리고 자주 심한 논쟁의 원인이 되었다. 교회사를 보면, 안식일과 주일의 관계에 대한 해석이 시계추처럼 양쪽을 오가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선지 시대에 예레미야서나 에스겔, 이사야 같은 선지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식일 계명을 제대로 준행하지 않는다고 그들을 준열히 책망했다. 그러한 책망과 경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던 이스라엘 왕국이 멸망하자 중간 시대와 예수 시대의 유대 지도자들, 즉 바리세인과 서기관들은 안식일 계명을 율법주의적으로 이해 실천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그러한 위선적 율법주의에 일침을 가하시고 안식일의 의미를 바르게 가르치셨다. 예수의 영향을 가까이에서 전수받은 초대 교회와 교부들은 유대교적 안식일주의에 대한 반발로 제 사 계명을 그리스도 오심으로 성취된 의식법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중세에 들어서면서 점차 교회는 세세하고 엄격한 안식일 규정들을 증가시켜 감으로 중세 중반 이후에는 주일이 미신적으로 율법주의화되어 버렸다. 종교개혁가들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율법주의적이고 미신적인 주일 성수에 대한 반발로 다시 제 4 계명의 모형적 성격을 강조했는데 루터, 칼빈 등이 모두 제 4 계명은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성취되었다는 측면을 부각시켰다. 그 결과 개신교측 신자들, 특히 영국 국교회 신자들의 주일 성수 태도가 너무 해이해지자 칼빈 사후 반 세기가 지난 1600년 경 청교도 니콜라스 바운드는 아주 엄격한 안식일 신학을 정립했고 그것은 청교도들의 안식일관으로 고착되었다. 안식일주의라 불리우는 이러한 태도는 19세기까지 상당한 위력을 발했으나 20세기 중반 이후 그것은 점점 빛이 바래져 가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지식은 우리로 하여금 이 주제 앞에서 겸손한 태도를 가지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교회사에서 가장 위대했던 많은 신학자들이 이 주제에 대해 각각 상이한 견해를 강력히 제시했다는 사실은 현대의 연구자들이 이 주제에 접근할 때 자만심이나 지나친 자기 확신을 가지고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이 얼마나 부적절한 태도인가를 보여 준다는 것이다. 재삼 말하거니와 주일 및 안식일과 관련해 어떤 결론적 주장을 제시할 때 우리는 대단히 신중해야 하며 조심스러워야 한다. 비록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교회가 이 주제에 대한 최소한의 지침을 제공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할지라도 그 지침을 부분적 오류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완전하고 정확무오한 진리로 자처하는 것은 과도한 자신감의 표현일 것이다.

        칼빈의 견해와 청교도들의 견해가, 적어도 이론면에 있어 상당한 대조적 요소들을 가지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양자는 단지 강조점의 차이를 넘어 원리적인 인식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칼빈은 주일을 포함하여 어떤 “날”이든 그것의 특수성이나 특별한 “신성함”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청교도들은 주일의 “특별함”을 인정했다. 후자는 안식일을 창조의 신적 규례로 보았으나 전자는 그것을 단지 교회의 질서와 교인들의 실제적 필요를 위한 교회적 제도로 보았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상당히 보수적이고 복음적인 개혁교회들로 이루어져 있던 1960-70년대의 RES에서도 견해는 양분되었다. 복음주의의 대표적 학자들은 주일의 육체적 안식의 요소를 부정하고 단지 주일 예배의 본질성만을 인정한다. 폴 주잇은 주일의 특수성과 안식의 실체성을 인정한다. 안식일 및 주일과 관련하여 이러한 다양성과 이견들을 의식하면서도 우리는 조심스럽게 목회와 그리스도인의 실천을 위한 다음의 지침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1) 신약 시대의 성도들은 주일의 의미와 가치를 바르게 인식해야 한다. 주일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날이다. 죄와 죽음과 사탄의 세력을 깨뜨린 승리의 날이자 구원의 날이다. 따라서 이 날은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고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만물의 주(主)라는 사실을 선포하며 그가 우리를 위해 이루신 구원으로 인해 크게 기뻐하는 날이 되어야 한다. 주일에 성도들은 예수께서 그들을 죄에서 해방하고 구원의 복을 주신 것을 기억하고 기뻐해야 한다. 주엣은 기쁨으로 주일을 지키는 사람들만이 올바르게 주일을 지킬 수 있다고 옳게 지적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주일의 안식은 축제일에 속하는 날의 즐거운 안식이다. 그것은 제자들이 ‘주께서 살아 나셨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을 때 가졌던 본래의 기쁨으로 돌아가는 기쁨이다. 우리가 주일을 하나의 비참한 휴일로 바꾸는 법규와 규칙들을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이 점에 있다.”119) 교회 지도자들은 성도들에게 주일에 하지 말아야할 금지조항을 제시하고 그것들을 지키도록 강요하기 전에 주일이 지닌 의미와 가치를 바르게 알려줌으로써 그들이 기쁨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일을 지키도록 이끌어야 한다.

        (2) 신약 시대의 성도들이 주일에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삼위 일체 하나님을 공적으로 예배하는 것이다. 주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이므로 성도들이 함께 모여서 부활하신 주님과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신 성부 하나님과 부활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기에 가장 적합한 날이다. 하나님의 교회는 주일이 지닌 의미를 알았기 때문에 사도 시대 이래 이천 년 동안 주일을 공적인 예배일로 지켜왔다. 최근 한국사회에 주5일제 근무가 도입되기 시작하면서 토요일에 예배를 드리자는 제안이 여기저기에서 들려오고 있다. 물론 교회는 효과적인 전도와 선교를 위해서 세상 문화의 변화에 적응하여 제도적인 개선과 변혁을 꾀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일요일을 교회의 공적인 예배일로 지키는 것은 단순히 편의에 따라 제정된 교회의 전통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에 근거한 것이며 정경을 기록한 사도시대에 확정된 것이다.

        만일 지난 이천 년 동안 교회가 일관성 있게 주일을 공적인 예배일로 지키지 않았다면 과연 오늘날 교회가 존재할 수 있었겠는가? 우리는 “만일 당신이 기독교를 없애고 싶다면 주일을 폐지하지 않으면 안되오”라고 했던 볼테르의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주일에 함께 모여 예배하는 것이 주변 세상과 신자를 구분하는 소중한 표지이자 지상의 교회가 계속해서 생명을 이어가는 길임을 깨닫고 주일에 함께 모이는 일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3) 주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써 구약의 안식일 제도가 지향했던 구원의 안식을 성취하신 날이므로 신약의 성도들이 일을 그치고 쉬기에 가장 적합한 안식일이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거의 모든 나라가 주일을 휴일로 정한 것은 하나님이 기독교를 통해서 세상에 내린 일반은총이라고 할 수 있다. 성도들도 마땅히 주일에 모든 세속적인 일을 그치고 안식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주일에 쉬는 것은 예수께서 이미 성취하신 구원의 안식을 더 충만하게 누리기 위함이며, 동시에 종말에 완성될 안식을 미리 맛보기 위함이다. 주일에 일을 그치고 쉼으로써 신약 시대의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통해 받은 구원의 안식을 누리면서 종말에 하나님께서 주실 완전한 안식을 고대하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주일에 일을 그치고 쉬는 것은 우리 자신의 일을 통해 생명을 확보하려는 태도를 포기하는 것이다. 우리의 안녕과 행복이 우리 자신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주일에 일을 쉬고 상점의 문을 닫으며 남들보다 앞서 가기 위한 모든 일을 중단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고 고백하며 자신의 현재와 미래를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다.  

        (4) 주일을 지키는 것과 관련해서 주의해야 할 점은 주일을 바리새인들의 안식일 준수처럼 의문과 율법에 얽매이게 만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에 주일을 가볍게 생각하여 예배에 참석하지 않고 여행을 가거나, 오전 예배만 드린 후에 주일의 나머지 시간을 주간의 다른 날처럼 보내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런 시대에 교회의 지도자들은 성도들에게 주일의 의미를 바르게 가르쳐서 주일을 경건하게 준수하도록 지도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성도들이 주일을 지키는 것을 율법적으로 생각하지 않도록 조심해야할 필요도 있다.

        예수님 시대에 바리새인들은 엄격한 안식일 규정을 만들고, 그것들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배척하는 일을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질책하시면서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또 하나님은 제사가 아니라 자비를 원하신다고 가르치셨다. 그러므로 주일준수와 관련해서 우리는 판단과 배척의 자세가 아니라 자비와 포용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 전에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먼저 철저하게 살펴야 한다. 신약 시대의 성도들은 바리새인들의 율법주의적 자세를 배격하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얻은 구원으로 인해 큰 기쁨과 감사함으로 주일을 지켜야 한다.

        근자에 와서 많이 희석되기는 했으나 한국 교회는 전통적으로 청교도적 안식일관을 고수해 왔다. 이 입장의 위험성은 그것이 종종 율법주의적으로 흐를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중세 교회가 빠졌던 소위 “바리새적 결의론”(Pharisaic casuistry)의 우를 범하게 된다는 것이다. 주일을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는 강조는, 교회의 역사와 경험에서 보는 바처럼, 종종 온갖 지엽적이고 자질구레한 행동에 대한 금지와 명령의 목록들을 축적하고 그것을 위반할 경우 권징의 칼날을 쉽게 휘두르는 문제점을 낳는다. 예를 들어, 뉴잉글랜드의 일 세대 청교도들은 극단적으로 가혹한 안식일법을 제정 시행했다. 1650년 뉴헤이븐에서는 주일에 강도죄를 지은 자들을 처벌하는 법을 통과했는데 그것에 따르면 초범인 경우 한 쪽 귀를 짜르고, 재범의 경우에는 두 귀를 짤랐으며 세 번째에는 사형에 처했다.120) 청교도적 안식일주의에 남달리 강한 경건의 훈련이라는 효과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또 율법주의화되는 부작용이 있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그 속에는 심지어 중세의 로마 교회처럼 “날”에 대한 미신적 신앙까지 나아갈 수 있는 소지도 있었다.

       그러므로 안식일 문제에 관해 율법주의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는 19세기 영국의 가장 위대한 영적 지도자들 하나였던 찰스 시몬이 가졌던 다음과 같은 태도가 안전하고 권장할만한 것이라 여겨진다.


        나 자신의 개인적 습관에 있어 나는 어느 누구 못지 않게 엄격하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판단할 때, 나는 많은 종교적인 사람들, 즉

        평신도들 뿐 아니라 목사들도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본다. 나는 많은

        이들이 너무 많이 유대주의화 되어 바리세인들이 우리 주님을 정죄할

        때 많은 경우 그들과 합세했을 것이라 본다. 그러나 나는...그들이 자신의

        원리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잘못이라 생각지는 않는다 (그렇게 하는 것은

        옳다). 그러나 그들이 자기들 자신의 표준을 다른 모든 사람들을 위한

        표준으로 만드는 것은 잘못이라 본다.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는 자들과

        먹기를 거부했던 자들은, 단지 주를 위해 그렇게 했다면, 모두 옳았다.

        어떤 날들을 지켰던 자들과 지키지 않았던 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나는 내가 온전한 규칙이라 여기는 것을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겠다.

        그러한 문제들의 의식적 준수에 관한 한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 판단하게 하라.

        강한 자들은 약한 자들을 멸시하지 말고 약한 자들은 강한 자들을 판단하는

        자리에 앉는 것을 삼가라.121)

        

        (5) 이러한 지침을 주일 성수의 구체적 측면에 적용한다면 주일 안식의 의미와 구체적 방법에 대한 보다 균형잡힌 이해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칼빈은 안식을 영적으로만 이해하여 주일 안식에 있어 육체적 차원의 포함은 로마 교회에서와 같이 “게으름과 나태”의 부작용을 낳을 뿐이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부인했다. 그리하여 단지 예배와 묵상 등 종일토록 종교 활동에만 집중하는 것이 주일의 안식을 올바로 지키는 것이라 보았다. 한편 청교도들은 제 4 계명의 안식의 의미를 문자적으로 수락했으나 이들 역시 단지 주일에 일상적이고 직업적인 노동을 삼간다는 의미에서만 그것을 이해했다. 결국 청교도들 역시 주일 안식의 구체적 방법은 예배와 개인 경건의 행위, 그리고 선행과 부득이한 행위에 국한했다. 양자 모두 주일 안식의 의미 속에 신자들이 한 주간동안 육체적 정신적 노동과 격무에 시달린 몸과 마음의 긴장을 풀고(relax) 재충전(refresh)한다는 차원은 포함시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가져다 준 구원의 포괄성을 생각할 때, 또 우리의 신체, 정신, 영혼 전인이 구원의 대상임을 생각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주일 안식도 포괄적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즉 일차적으로 주일은 예배와 묵상을 통해 영적 안식을 누려야 하지만 그러한 영적 안식을 충실히, 그리고 충분히 누린 후, 혹은 누리면서 이차적으로, 그리고 일차적 의미를 손상함이 없도록 절제하면서, 우리의 육신과 정신을 위해 한 주간동안 쌓인 피로를 풀고 새로이 다음 한 주간의 소명을 감당하기 위한 재충전의 적절한 시간을 가지는 것은 주께서 우리에게 주일을 통해 허락하신 안식의 풍요로운 선물의 범위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오히려 성도들이 주일에 영과 육과 혼의 전인적 안식의 축복을 누릴 수 있을 때 안식일을 허락하신 성부 하나님의 은혜와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더욱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6) 마지막으로 선행의 실천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주일의 안식을 누릴 때 다른 사람들의 영육간의 복지에 대한 관심을 아울러 가져야 한다. 주일에 자비를 행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안식일에 치유와 구원의 행위들을 통해 안식의 진정한 의미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드러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선행들 중 주일에 행하기에 적합한 것들로는 병자와 약자들 심방, 우는 자들의 위로, 빈민 구제, 그리고 복음 전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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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신약시대의 안식일과 주일 이해


        아래에서는 주로 안식일과 주일을 언급하는 신약성경의 본문들과 함께 2세기의 기독교 문헌들을 참고하여 초기 그리스도 교회의 주일 이해를 탐구하고자 한다. 2세기의 기독교 문헌들을 참고하는 것은 그것들 안에 주일 준수에 대한 사도시대의 생각과 자세가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먼저 안식일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정리하여 안식일에 대한 신약성경의 관점을 제시할 것이다. 이어서 ‘주간의 첫 날’ 또는 ‘주의 날’이라는 표현이 분명하게 등장하는 사도행전 20:7, 고린도전서 16:2, 요한 계시록 1:10의 의미를 비교적 상세하게 설명할 것이다. 그리고 2세기의 기독교 문헌들을 참고하여 ‘주의 날’의 성격을 밝히고 주의 날과 안식일의 관계를 설명할 것이다.

 

신약성경에 나타난 안식일

        안식일 제도와 규정들을 여러 부분에서 상세하게 제시하는 구약성경과는 달리 신약성경에는 안식일에 관한 언급이 자주 등장하지 않는다. 사복음서에서 안식일은 예수께서 바리새인들과 논쟁을 벌이는 맥락에서 나타나며, 사도행전에서는 주로 바울 사도가 유대인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는 맥락에서 등장한다. 예수님은 갈릴리와 유대지역에서 유대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셨으므로 당시 유대인의 중요한 종교적 관례인 안식일을 지키셨다. 바울을 포함한 사도들도 이방 지역의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해 안식일 규례를 존중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과 사도들의 그런 행동이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따라야 할 규범은 아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심으로 구원의 새 시대가 도래한 것이 사실이나, 부활과 승천, 특별히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옛시대와 새시대가 공존하는 구원사의 과도기였다. 따라서 이 시기에 예수님은 율법에 근거한 유대교의 기존 질서와 체제를 존중하셨던 것이다. 또 오순절 성령 강림과 함께 교회의 시대가 시작되었으나 사도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새시대의 의미를 충분하게 이해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상당 기간동안 예루살렘 성전과 율법 중심의 유대교의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러나 안식일은 예수님과 그의 사역을 통해 성취되었다. 사도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성령을 통해 새시대의 도래와 그 의미를 깨닫게 됨으로써 문자적인 유대교의 안식일 준수에서 벗어나 주일을 준수하게 되었다. 이런 사실은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말씀과 바울 서신에 나타난 말씀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예수님과 안식일

        예수님은 안식일 문제로 제자들을 비난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막 2:27). 안식일은 사람들에게 부담과 고통을 주는 날이 아니라 그들이 즐거움을 누리도록 하나님께서 주신 특별한 선물이라는 것이다.96) 이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은 안식일을 대하는 바리새인들의 의식의 전환을 촉구하신다. 안식일을 절대화하여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관점을 버리고, 사람의 즐거움과 안식을 위해서 안식일을 제정하신 하나님의 관점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안식일에 예수님은 베데스다 연못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신 후 자신을 비난하는 유대인들에게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당당하게 응대하신다(요 5:17). 창조 사역 후 일곱째 날에 쉬셨던 하나님은 인간들이 하나님의 안식에 함께 참여하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죄로 인해 그들은 그 안식을 누릴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하나님은 아담의 타락 이후 자신의 본래 목적을 이루시려고 계속 일하신다. 하나님의 보냄을 받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도 진정한 안식을 이루기 위하여 일하신다. 안식일에 38년 된 병자가 누워 있는 것은 더 이상 세상에 안식이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예수님은 진정한 안식이 없는 세상에 오셔서 죽음과 고난을 이기시고 안식을 이루신다. 안식일에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것은 그가 종말에 진정한 안식을 가져오는 분임을 극적으로 드러낸 사건이다.97)

        예수께서 안식일을 피하여 다른 날 병자들을 고쳐주셨다면 사람들의 비난이나 충돌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안식일에 병 고치는 일을 고집하신 것은 안식일의 의미를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안식일의 의미는 회복과 메시야 시대라는 주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을 고친 일은 메시야적 안식일, 즉 구약적 안식의 완성이 세상에 도래하였다는 것을 보여 주는 행동이다. 그러므로 어느 날 보다 안식일은 예수께서 병자들을 고치는데 합당한 날이었다.98) 요컨대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자나 귀신들린 사람을 고치신 것은 안식일 계명을 어긴 것이 아니라 그 의미를 드러내고 성취하신 메시야적 구원 행동이었던 것이다.  

        안식일과 관련해서 복음서가 가르쳐 주는 가장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것이다(마 12:8; 막 2:28; 눅 6:5). 안식일의 주인으로서 예수님은 안식일에 대해 성부 하나님과 같은 절대적 권한을 가지고 계신다.99) 예수님은 안식일을 성취하심으로써 그를 믿고 따르는 자들이 제7일로서의 안식일을 더 이상 문자적으로 지키지 않게 만드셨다. 그는 안식일 폐지나 주의 날 제정을 직접 말씀하신 적이 없다. 그러나 폴 주엣(Paul K. Jewett)이 옳게 지적하는 대로, ‘기독교 사회를 특징 지워주고 기독교를 유대교로부터 구별하게 만든 안식일 성수에 대한 자유는 예수님이 자기를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주장하신 바로 그 자유에 근거를 둔 것’이다.100)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사역을 통해서 안식일의 주인인 예수님을 안식일의 적용과 초월을 결정하실 수 있는 ‘주님’으로 인식하였다. 그 결과 그들은 예수님의 권위에 의지해서 일곱 번째 날인 ‘안식일’을 첫 번째 날인 ‘주의 날’로 대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바울과 안식일

        사도 바울은 안식일에 관해 거의 거론하지 않는다. 유일하게 골로새서 2:16에서만 안식일을 언급할 뿐이다. 안식일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지만 갈라디아서 4:10과 로마서 14:5도 안식일에 관한 사도 바울의 관점을 알 수 있는 중요한 본문들이다.

        갈라디아서 4:10에서 사도는 갈라디아의 이방인 성도들이 ‘날들과 달들과 절기들과 해들’을 지키는 것을 크게 우려한다. 이 본문에서 바울은 안식일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가장 먼저 열거한 ‘날들’이라는 표현은 유대인들의 안식일과 속죄일 등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101) 갈라디아의 이방인 성도들은 유대주의자들의 주장에 굴복하여 안식일과 월삭,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 희년 등에 관한 규례를 지키기 시작하였다. 사도는 그런 행위를 약하고 천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종노릇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4:9). 안식일 준수를 이방인 신자들에게 부과하려는 시도는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바울 당시에 많은 유대인 크리스천들은 예수를 믿고 난 뒤에도 안식일을 포함한 유대인의 절기들을 계속해서 준수하였다. 사도는 구원과 관계없이 자신들의 관습의 일부로 안식일과 절기들을 지키는 것에 반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의롭다함을 얻는 조건으로 지키는 것은 단호하게 반대하였다.

        로마서 14:5에서 바울 사도는 로마교회에서 일어난 소위 ‘약한 자들’과 ‘강한 자들’ 사이의 갈등을 언급하면서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라고 권고한다. 이것은 ‘날’을 지키는 것이 중대한 문제를 불러일으켰음을 보여준다. 강한 자들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긴 반면에 약한 자들은 어떤 날을 다른 날들보다 더 거룩하게 여겼다.102) 로마 교회에서 문제가 된 날은 다양한 축일들과 안식일을 포함한 유대교의 거룩한 날들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안식일 준수가 가장 큰 문제로 부각되었음에 분명하다. 안식일 준수는 음식법과 함께 1세기 유대교의 중요한 특징이었으며 초기 교회들 안에서 자주 갈등의 요인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갈 4:10; 골 2:16).103)

        사도는 안식일을 다른 날보다 거룩하게 생각하여 계속 준수하는 약한 자들을 비판하거나 책망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강한 자들의 손을 들어주지도 않는다. 도리어 이 문제와 관련해서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라고 권면한다(14:5). 또 약한 자들은 강한 자들을 판단하지 말고 강한 자들은 약한 자들을 업신여기지 말라고 촉구한다(3, 10절).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것처럼 서로 받아야 한다(15:7). 이러한 권면은 바울 사도가 안식일(과 다른 거룩한 날들)의 준수를 개인의 양심 문제로 간주하고 있음을 시사한다.104)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15:1)는 진술은 사도 바울이 자신을 강한 자들과 동일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어느 한 날을 다른 날보다 더 거룩하게 여기는 약한 자들의 자세보다 모든 날들을 같게 여기는 강한 자들의 자세가 그리스도 안에서 도래한 구원의 새로운 시대에 더 적절하다는 것이다.

         안식일에 관한 바울 사도의 관점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본문은 골로새서 2:16이다. 여기서 그는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고 경고한다. 골로새 교회는 외부에서 들어온 거짓 교사들 때문에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본문은 그들이 먹고 마시는 것, 절기, 월삭, 안식일과 관련해서 골로새 교회 성도들을 폄론하려 했다는 것을 알려준다. ‘폄론하다는 말은 ‘판결을 내리다’라는 의미이다. 거짓 교사들은 안식일을 포함하여 먹고 마시는 것, 절기, 월삭에 관한 율법의 규정들을 지키는 것을 그리스도인의 필수적인 요소로 간주했음에 분명하다. 따라서 그들은 그런 규정들을 신앙이나 경건의 정도를 판단하는 척도로 사용하였다. 그런 규정들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경건한 신자가 아니라는 판결을 내렸던 것이다.

        골로새서 2:17에서 사도는 안식일을 포함한 음식과 거룩한 날들에 관한 율법 규정들을 ‘장차 올 것들의 그림자’라고 말한다. 유대적 율법 규정들이 그림자라면 그것의 실체(=몸)는 그리스도이다. 그림자는 실체가 올 때까지만 존재하는 잠정적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과 성품을 알려주는 율법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지향한다. 이제 실체이신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셨으며, ‘장차 올 것들’도 그와 함께 도래하였다. 따라서 그림자에 속한 것들은 더 이상 그리스도인들을 판단하는 척도가 될 수 없다.105) 유대적인 율법 조항들에 근거해서 기독교 신앙과 경건을 판단하거나 그것을 대체하려는 것은 모두 잘못된 것이다.

        이 본문은 음식과 거룩한 날들에 관한 모세 율법의 규정들이 신약 교회의 성도들에게 더 이상 구속력을 갖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것들은 ‘장차 올 것들의 그림자’이며 잠정적인 옛 시대에 속한 것이므로 새시대의 영구한 실체가 온 뒤에는 구속력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106) 안식일도 옛시대에 속한 것이라서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에는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속력을 갖지 못한다. 예수를 믿고 난 뒤에도 자신의 신앙과 양심으로 판단하여 안식일을 계속 준수할 수는 있다. 그리스도 안에만 구원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성도가 개인의 경건을 위해 안식일을 준수하는 것 자체는 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원사적으로 볼 때 안식일 준수는 잠정적인 옛시대에 속한 것이므로 새시대에는 적절하지 않다. 안식일 준수는 장차 올 것들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안식일에 누리는 안식은 그리스도가 주시는 영원한 안식의 그림자이다. 실체이신 그리스도가 오신 이후에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을 누리는 자들은 더 이상 그림자를 실체인양 붙들어서는 안 된다.


신약성경에 나타난 ‘주의 날’(Lord's Day)

        그러나 신약성경은 어디에서도 안식일을 버리고 ‘주의 날’을 기독교의 안식일이나 예배일로 지키라고 말하지 않는다. ‘주의 날’(kuriakh. h`me,ra)이라는 표현은 요한계시록 1:10에서만 나타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 교회는 매우 이른 시기부터 안식일이 아닌 ‘주의 날’을 회중의 공적 예배일로 간주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요한계시록 1:10뿐 아니라 사도행전 20:7(‘안식 후 첫날’)과 고린도전서 16:2(‘매 주일 첫날’)에 반영되어 있다.


사도행전 20:7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안식 후 첫 날’에 공적인 예배를 드리기 위해 함께 모인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최초의 본문은 사도행전 20:7이다. 누가는 바울과 드로아의 그리스도인들이 ‘안식 후 첫날에’ 떡을 떼기 위하여 모였다고 기록한다. 개역성경에서 ‘안식 후 첫 날에’라고 번역한 헬라어 표현(evn th/| mia/| tw/n sabba,twn)은 ‘주간의 첫 날에’(the first day of the week)를 의미한다. 이 표현에서 복수 명사 ‘사바톤’(sabba,twn)은 ‘안식일들’이 아니라 ‘칠일로 이루어진 기간’(a period of seven days), 즉 ‘주간’(week)을 가리킨다.107)

        바울 일행과 드로아의 그리스도인들이 주간의 첫날에 함께 모인 것은 떡을 떼기 위해서였다. 함께 모여서 떡을 떼는 일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 것이다. 그것은 잡히시던 날 밤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특별한 방식으로 떡을 떼시던 주님을 상기시킨다. 그뿐 아니라 안식 후 첫날 떡을 떼는 것은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나타나셔서 떡을 가지고 축사하신 후에 떼어 주시던 부활의 주님을 기리는 것이다(눅 24:30-31, 35). 주간의 첫 날에 드로아의 그리스도인들은 바울과 그의 일행들과 함께 교제의 식사를 갖고 ‘주의 만찬’을 시행하기 위해서 모였던 것이다.108)

        본문에서 주간의 첫 날에 함께 모인 목적을 떡을 떼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밝힌 것은, 드로아 지역의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주간의 첫 날에 이런 모임을 갖는 것이 관습처럼 이루어졌음을 암시한다. 물론 이 본문에는 주간의 첫 날을 공식적인 예배일로 지키라는 명령도 없고 주간의 첫 날의 모임을 모든 교회가 따라야 할 규범으로 제시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이 본문은 드로아 지역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주간의 첫 날’에 함께 모였으며, 그 날을 주의 만찬과 함께 공동식사를 갖기에 적절한 날로 간주하였음을 보여준다. 복음서에 기록된 부활 기사들은 ‘안식 후 첫 날’, 즉 ‘주간의 첫 날’에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반복해서 언급한다(마 28:1; 막 16:2, 9; 눅 24:1; 요 20:1). 드로아의 그리스도인들도 예수께서 부활하신 주간의 첫 날에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거행하면서 주의 부활을 기념하고 즐거워했던 것이다. 바울과 그의 일행이 드로아에서 이레 동안 머물면서 ‘주간의 첫날’까지 기다린 것을 보면, 그 날이 그리스도인들이 떡을 떼기 위해, 즉 주님을 기리면서 식사하기 위해 함께 모이는 날이었음을 알 수 있다.109)


고린도전서 16:2

        복음서들과 사도행전을 제외하고 ‘주간의 첫 날’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본문은 고린도전서 16:2이다. 이 본문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매 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고 권고한다.  ‘매 주일 첫 날’이라고 번역한 헬라어 표현(kata. mi,an sabba,tou)은 사도행전 20:7의 표현과 크게 다르지 않다. 두 본문의 표현 모두 ‘주간의 첫 날’, 즉 일요일을 의미한다. 

        고린도전서 16:2에서 사도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주간의 첫날’에 공적인 모임을 가지라고 말하지 않는다. 단지 교인들에게 가난한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해 기금을 저축 해두라고 말할 뿐이다. 그러나 바울 사도가 다른 날과 구별하여 ‘주간의 첫 날’을 구제 연보를 저축하기에 적절한 날로 언급한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고린도 교회가 주간의 첫 날에 정기적으로 예배를 위해 모였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본문에는 이 날을 예배일로 볼 수 있는 분명한 증거가 없다. 그러나 ‘주간의 첫 날’이라는 표현이 고린도전서 16:2와 사도행전 20:7을 제외하고는 복음서의 부활 기사에서만 나타나는 것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마 28:1; 막 16:2; 눅 24:1; 요 20:1, 19). 이것은 고린도 교인들에게도 드로아의 그리스도인들과 마찬가지로 ‘주간의 첫 날’이 주님의 부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날임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날에 그들이 함께 모여서 주님의 부활을 기억하고 그를 예배했으리라고 추정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들은 예배를 위해 함께 모이는 주간의 첫날에 일주일의 수입에서 일정한 양을 떼어 개인적으로 교회의 공동 금고에 맡겨둘 수 있었을 것이다. 사도가 구제 기금을 주간의 첫날에 저축하라고 권고한 것은 그 날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특별한 날이 되어있었음을 시사한다.110)


요한계시록 1:10

        신약성경에서 ‘주의 날’이라는 표현이 나타나는 유일한 본문은 요한계시록 1:10이다. ‘주의 날’(kuriakh. h`me,ra)이라는 표현에서 ‘주의’라고 번역한 ‘퀴리아케’(kuriakh,)는 헬라어 형용사 ‘퀴리아코스’(kuriako,j)의 여성형이다. 이것은 신약성경에서 요한계시록 1:10 이외에는 고린도전서 11:20의 ‘주의 만찬’(kuriako.n dei/pnon)이라는 표현에만 나타나는 형용사이다. 이 단어의 의미는 ‘주님께 속한, 즉 부활하신 주님인 예수께 속한’이다.111) 따라서 ‘주의 날’은 문자적으로 부활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날을 뜻한다.

        그러면 ‘주의 날’이란 어떤 날인가? 본문 자체의 증거가 불충분하더라도 우리는 이 날을 소아시아의 성도들이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리던 주간의 첫날, 즉 일요일로 보아야 한다. 이것은 2세기 초의 기독교 문헌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A.D. 100년경에 기록된 것으로 알려진『디다케』(Didache)에는 “주님의 주일에 여러분은 함께 모여 떡을 떼고 감사드리십시오 그러나 여러분의 제물이 깨끗하게 되도록 여러분의 죄를 먼저 고백하십시오”라는 글귀가 나온다(4.1). 이 본문에 등장하는 ‘주님의 주일에’(kata. kuriakh.n kuri,ou)라는 표현에는 요한계시록 1:10의 특별한 형용사 ‘퀴리아케’가 포함되어있다. 여기서는 ‘날’을 뜻하는 명사 ‘헤메라’(h`me,ra)가 없이 ‘퀴리아케’만으로 ‘주의 날’을 가리킨다. 『디다케』에서 ‘주님의 주일’은 당시 성도들이 함께 모여서 떡을 떼고 감사하며 죄를 고백하며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던 일요일을 가리킨다.

        안디옥의 감독 이그나티우스(Ignatius)가 A.D. 100-118년 사이에 기록한 『마그네시아 사람들에게 보낸 서신』에서도 ‘날’을 뜻하는 명사 ‘헤메라’ 없이 형용사 ‘퀴리아케’만으로 ‘주의 날’을 표현한다. 고린도의 감독 디오니시우스(Dionysius)가 로마의 감독 소테르(Soter)에게 보낸 서신과 『바울 행전』과 같은 2세기 후반의 문헌들에서는 더욱 분명하게 ‘퀴리아케 헤메라’나 ‘퀴리아케’를 일요일을 가리키는데 사용한다. 『베드로 행전』에서는 안식일 다음 날, 즉 일요일을 ‘주의 날’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증거들은 요한계시록 1:10의 ‘주의 날’이 성도들이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리던 주간의 첫날, 즉 일요일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여러 기독교 문헌들에서 ‘주의 날’을 여성 형용사 ‘퀴리아케’만으로 나타낸 것은 당시에 ‘퀴리아케 헤메라’라는 표현이 일요일을 가리키는 전문 용어(technical term)로 널리 사용되었음을 전제한다. ‘날’을 뜻하는 명사 ‘헤메라’ 없이 형용사 ‘퀴리아케’라는 단어만 사용해도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사도 요한은 왜 주간의 첫날을 ‘주의 날’이라고 불렀는가? 비록 그가 신학적인 이유를 제시하지 않더라도 ‘주의 날’이라는 표현 자체는 주간의 첫날과 그리스도의 주되심(lordship) 사이에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려준다. 주간의 첫 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심으로 자신의 주되심을 온 우주에 선포한 날이다. 따라서 1세기 말의 성도들은 이 날을 주의 날, 즉 주께 속한 날이라고 부를 수 있었던 것이다.

        본문에서 사도 요한은 ‘주의 날’에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이 무슨 일을 했는지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 앞서 살펴본 『디다케』는 주의 날에 성도들이 함께 모여 떡을 떼고 감사드리며 죄를 고백하는 일을 했음을 증언한다. 또 A.D. 155년경에 순교자 저스틴은 『변증론』 제1권에서 일요일에 성도들이 한 장소에 모여서 하나님의 창조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찬미했음을 시사한다. 이런 증거를 고려할 때 사도 요한 당시에도 소아시아 지역의 성도들이 매주간의 첫날에 함께 모여서 떡을 떼는 일과 예배의식을 거행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1세기 말이나 2세기 초의 교회들이 주의 날에 모여서 예배의식을 가진 것은 그런 관습이 사도시대에 이미 교회 안에 정립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또 주간의 첫날을 ‘주의 날’이라고 부르던 사도시대의 관습도 자연스럽게 2세기의 교회들로 이어졌음에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