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신학자료

[스크랩] 십일조에 관한 질의에 대한 이광호목사의 답변

baromi 2005. 7. 21. 13:01
 

(이 글은 부산의 멀리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배산초등학교 '얼큰이' 선생님께서 질의하신 내용에 대한 이광호 목사님의 답신입니다)

얼큰이 선생님, 안녕하세요?

처음 선생님의 별명이 '얼큰이' 라는 말을 듣고 저는 목사답지 못하게(?) 술꾼(?)을 생각했습니다. 술을 마시는 사람들이 얼큰하게 마신다는 말을 하잖아요? 그러나 선생님이 미혼의 젊은 여자 선생님인 것을 알고 나서는 그 별명의 의미를 더욱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미혼의 예쁜 여선생님이 '얼큰이'라면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요즘은 여성들도 자유롭게 술을 마신다 하지만, 자신이 진짜 술꾼(?)이어서 설령 다른 선생님들이 '얼큰이'라고 별명 붙였다 해도 스스로 남에게 공개하지는 않을 것 아닌가요? 더구나 저같은 목사에게 관심을 가지고 신앙적인 질문을 할 정도라면 더욱 그렇지요? 나중 '얼큰이'의 의미가 '얼굴이 큰 이'라는 준말임을 알고는 혼자서 한참 웃었습니다. 물론 내가 우리 말을 너무 모른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얼큰이 선생님, 십일조에 관한 질문을 하셨더군요. 선생님은 십일조는 기본이며 최소한 그 이상을 해야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을 보니 매우 순전한 신앙을 가진 분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사실 우리 시대에 있어서 십일조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게 답할 성질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왕 선생님께서 저에게 질문을 하셨으니 간단하게 나마 저의 깨달음을 말씀 드릴까 생각합니다.

이미 잘 알고 있듯이 십일조에 대한 기록과 가르침은 구약성경에 많이 나타납니다. 창세기 14장에는 아브람이 멜기세덱에게 전리품(戰利品) 중 십분의 일을 드린 기록이 있습니다. 이것은 물론 깊은 신학적 해석을 요하는 내용으로서, 히브리서 7장에 보면 이에 대한 중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멜기세덱이 제사장으로서 아브람으로 부터 십분의 일을 받았다는 사실을 주지시키면서 다시 레위족속과 연결지어 이야기 합니다. 이스라엘 족속 중 레위족속은 다른 족속들과 달리 특별히 땅을 분깃으로 받지 않고 성전을 돌보는 일에 전무하는 족속으로 세움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땅위에서 농사를 짓거나 목축을 하는 등의 일을 하지 않고 성전을 돌보는 일을 했으므로 생존에 필요한 양식을 스스로 얻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지파들이 십일조를 거두어 레위 족속의 생활을 책임짐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맡은바 성전에 관련된 일을 신실하게 수행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대한 역할분담과 함께 온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의 일에 참여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십일조는 하나님의 율법이었습니다. 이 말은 선택적인 사항이 아니라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으로서 강제적 세금의 성격을 띠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십일조를 철저하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구약의 가르침은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그 의미를 한층 높여 해석을 하시게 됩니다. 간단하게 말씀드린다면 십분의 일 뿐 아니라 삶 전체가 주님의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은 십일조를 바치게 되면 그것으로 할 바를 다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주님께서는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것이니라"(23:23). 이 말씀은 주님께서 신앙을 잘못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들은 소득의 십일조만 바치면 나머지 생활은 자기 마음대로 해도 될 줄로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우선 가시적인 십일조만 바치고 눈으로 볼 수 없는 실질적 삶의 전체적인 것은 하나님께 바치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십일조가 전체적인 삶의 한 표현이라는 점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십일조의 의미는 이제 완성이 되었다', 혹은 '그 율법이 폐기되었다'는 등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듣게 됩니다. 저는 이러한 말이 충분히 의미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십일조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일까요? 아니면 그것이 율법주의화 되어 있으므로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일까요?

저는 성경말씀을 이해할 때 전체적인 의미를 잘 새겨보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앞에서 말씀 드린 것 처럼 멜기세덱에게 바쳐진 십일조나 그 후 모세시대에 제정된 율법, 그리고 주님 오실 때 까지 성전 제물과 함께 있어왔던 십일조 등에는 오늘 우리의 시대에도 지속되어야 할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은 단순히 '십분의 일'이라는 의미가 나머지 '십분의 구'와 구별이 되어서 특정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즉 십일조를 바치는 일은 구별된 순종이며 십분의 구는 이 세상에서 마음대로 사용해도 되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시대의 성도들이 십일조 생활을 잘 하기를 바랍니다. 이는 '율법적 의미' 때문이라기 보다는 우리의 '나약함' 때문입니다. 우리는 말씀의 가르침을 통해 인간이 한없이 약하고 이기적이라는 사실을 잘 압니다. 우리는, 자신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말은 하면서도 실제적으로는 모두가 자기의 것으로 여기고 살게 될 우려가 있습니다. 성경에 '고르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제물을 의미하는데, 어떤 것을 '하나님께 바쳐진 것이다'라고 다른 사람들에게 선전해 놓고는 사실 자기의 것으로 점찍어 두어서 자기 욕심에 따라 사용하는 것을 주님께서는 경계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한 위험이 있습니다. 우리는 자주, '내가 가진 모든 것은 주님의 것이다' 라고 말을 하지만, 실상은 자기가 그 모두의 주인으로 자기 마음대로 사용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십일조를 드리면서, 자신의 나약함을 고백하게 되고 그 십일조 뿐 아니라 전체적인 삶이 주님의 것임을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우리시대의 십일조는 '율법에 따른 의무조항'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고백적 성격'을 띠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일조를 하는 것이 의무완성이 될 수 없으며 그것을 자랑삼을 일도 아닙니다. 오히려 십일조를 함으로써 나머지 십분의 구도 주님의 것임으로 고백하는 것이며, 자기 마음대로 살지 않겠다는 고백이 거기에서 우러나는 것입니다.

얼큰이 선생님, 오늘은 이 정도로 하겠습니다. 지금껏 처럼 앞으로도 십일조 생활에 충실하기를 바랍니다. 이는 단순히 교회에 십일조를 드렸다는 의미가 아니라 교회의 교회다움에 대한 끊임없는 확인과 함께 이어져 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올바르지 못한 교회에 속해 있으면서 거기에 열심히 십일조를 하는 것은, 성도의 참다운 십일조를 통한 신앙적 삶과 아무런 연관이 없음도 덧붙여 말씀드립니다. 또 연락 주시기를 바라며 이만 줄입니다. 안녕히 계세요.

2001. 2. 14

이광호 목사

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익명회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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