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신학자료

[스크랩] 청교도신학의 모든 것: 예비적 은혜교리 핵심 정리

baromi 2017. 7. 1. 23:45

청교도신학의 모든 : 예비적 은혜교리 핵심 정리

윤영상·

 

1. 예비적 은혜 교리: 성령의 일반사역을 강조함

p512 "어떻게 회심을 준비할 있느냐 문제다" 라고 말하면서 p513에서 성령의 일반사역(회개를 일으키기 , 선구자 죄를 자각하게 하는 성령의 일반 사역) 대해서아래 같이 설명합니다.

"웨스트민스터 표준 문서들은 성령이 죄인들이 구원하는 믿음과 생명을 얻게 하는 회개의 중요한 '선구자' 율법을 통해 죄를 자각하게 하시는 것을 그분의 일반사역으로 말했다"

여기서 말하는 예비가 성령의 일반사역이라고 하는 이유는 p530 아래의 문장을 보면,

청교도가 가르치는 준비는 성령의 일반사역을 강조하는 것이다. 청교도는 거듭날 때까지 하나님의 영을 수동적인 존재로 간주하지 않고 성령이 사람들이 죄를 자각하도록 말씀 선포를 통해 강력히 역사하신다는 깨달았다. 에임스는 도르트 총회에 영국 대표로 참석한 신학자들이 이렇게 말한 것을 인용했다. ‘아직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한 자들의 마음 속에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자극을 받아 회심이나 거듭남으로 나아가는 어떤 내적 효력들이 있다후커는 통회를 죄와 사탄이 말씀에 저항하는요새들을 무너트리는 그리스도의 영의 행위 묘사했다.

의문) 문장에서 거듭날 때까지.. 여기서 "거듭남" 영국청교도의 거듭남 개념으로 봐서 "구원의 조명을 통한 죄각성도 포함하는 회심"으로서의 거듭남으로 해석해야 같은데,

(1) 성령의 일반사역으로서 죄각성은 구원의 조명을 통한 죄각성 이전까지를 말함인지.. 아니면..

(2) 회심 이전까지의 회심의 예비과정들을 성령의 일반사역으로 보다가, 회심후 예비과정들이 성령의 특별사역으로 뒤바뀌는 것으로 말하는 것인지..

가지 어떤 것인지.. 혼동이 되네요.

2. 영국 청교도는거듭남회심 결합(거듭남=회심)

조엘비키는거듭남인 회심이 {죄의 자각} {말씀에 대한 주의 깊은 경청 과정} 포함함을 칼빈과 청교도는 일반적으로 가르쳤다고아래 같이 밝힙니다(p513).

칼빈과 청교도는 '인간이 죄로 죽었고, 하나님이 오직 은혜로 거듭나게 하시며, 회심은 통상적으로 죄의 자각과 말씀에 대한 주의 깊은 경청 과정을 포함 한다.' 가르쳤다.

또한 p520에도 동일한 문장이 있습니다.

플라벨은 사람의 죄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경험적 지식을 참된 회심의 본질적 요소로 간주하고 그것을 종종 구원에 대해 희미한 소망만을 갖고 있는 사람들 속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봤다. 플라벨은 이런 두려움을... 하나님의 내적 가르침의 부분으로 간주했다. 신적 가르침에 대해 플라벨은 이렇게 말했다. '믿음의 길에 있는 자라면 어떤 사람도 아버지의 특별한 교훈과 가르침 아래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놓칠 없고 잘못된 길을 없다'.

 

따라서 그리스도안에 있는 확실한 신자는 마음을 찢는 죄의 자각과 구주에 대한 갈망이 있었던 날을 돌아보고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때는 그것을 확실히 알지 못했지만 그때 이미 아버지의 구원의 부르심 삶에 임했던 것이다" 우리는 회심은 일련의 과정 이라는 청교도의 신념에 비춰 준비에 대한 질문들을 살펴야 한다.

 

처음에 준비로 보였던 것이 나중에는 구원을 받은 것으로 판명될 있다.

참고)위의 조엘비키의 정의는 아래의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 해설서(p746~7) 우르시누스의 정리와 차이점이 있어보입니다.

" 후회가 회심보다 앞서지만, 회심 자체는 아니다. 회심의 일부도 아니며, 다만 회심에로 이어지는 하나의 준비 단계일 뿐이며", 그것도 택한 자의 경우에만 그렇다.

청교도는 {회심의 준비 과정을 회심에 포함}시키나, 우르시누스의 경우는 이러한 {준비과정을 회심의 일부로 포함을 시키지 않는} 차이점이 있는 같습니다.

 

그런데, ↑↑ 인용 문장에서 오직 은혜로 거듭나게 하시며, 회심은 이란 말이, (1) 거듭남이 회심이라는 말인지( 거듭남 = 회심)이란 의미인지, (2) 거듭난 , 회심에 이르게 된다는 것인지, 혼동이 되는데... 만약 거듭남 = 회심이란 의미로 사용한다면, 청교도들이 말하는 중생은넓은 의미의 중생 뜻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회심 전에 일어나는 의미로 사용한다면, 경우 거듭남은좁은 의미의 중생 뜻하는 것이 것입니다.

p531 아래의 문장을 보면, 잉글랜드 청교도들은거듭남 의식적 연합 회심 결합을 시키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 것으로 보아, 거듭남 = 회심으로 말하는 같습니다.

잉글랜드 청교도는 거듭남을 영혼의 그리스도와의 최초의 의식적 연합과 결합시키는 경향이 있지만, 네덜란드 2 종교개혁 신학자들은 거듭남을 초기의 죄에 대한 자각 양심과 가깝게 결합시키는 경향이 있었다. 그것이 네덜란드 2 종교개혁 후기 신학자 가운데 하나인 알렉산더 꼼리가 믿음에 대한 준비는 있지만 그것이 거듭나기 전의 준비는 아니라고 가르친 이유다. 여기서 어떤 사람이 거듭남을 영혼의 경험 속에서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크게 좌우된다. 거듭남에 대해 아브라함껄은 지혜롭게 이렇게 지적했다. “만일 그가 최초에 진지한 죄의 자각과 함께 시작했다면 아마 그는 아직 믿음을 가진 것이 아닐 것이다. 만일 그가 처음에 의식적으로 믿음을 경험하고 매우 진심으로 자신이 너무 늦었다고 평가하는 순간과 함께 시작했다면 그는 아마 이미 믿음을 가졌을 것이다.”

또한 p529 보면 거듭남을 회심으로 보기에, 거듭남(회심) 이전, 복음의 요청인 과정들( 회심의 예비과정)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때, 우르시누스가 회심의 예비과정과 회심 사건을 구분해서 설명한 것과 일맥상통하게 됩니다.

거듭남은 하나님이 죄인에게 믿음을 주시고, 믿음을 가진 자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을 주는 단순하고 순간적인 행위이다. 따라서 복음의 요청은 매우 단순하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1:15). 그러나 거듭남에 앞서 일어나는 죄인의 경험은 통상적으로 많은 생각, 느낌, 행동이 관련된 과정이다. 따라서 단순한 복음의 요청에는 다음과 같은 다수의 복종적 의무가 동반된다. “ 말에 귀를 기울이라”(2:14). “너희는 귀를 기울이라”(55:3),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1:18),..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4:9), ... 생략.. 준비 의무는 단지 믿음에 예속된 종에 불과하다.

정리하자면, 회심에 대해서 (1) 잉글랜드 청교도: 회심의 준비과정을 회심에 포함. (2) 종교개혁 3세대 신학자(우르시누스): 회심의 준비과정을 회심에 포함시키지 않음.

거듭남이 일어나는 싯점에 대해서.(아래 그림 참고) (1) 잉글랜드 청교도: 거듭남을 그리스도와의 최초의 의식적 연합(회심) 결합 (2) 화란 2종교개혁 신학자들: 거듭남을 초기 죄의 자각 양심에 결함



화란 개혁주의와 영국청교도의 거듭남의 싯점에 대한 차이

결국 화란개혁주의가 말하는 거듭남(좁은 의미의 중생) 싯점은, 영국 청교도들에게는예비적 은혜" 죄각성과 죄책감이 일어나는 싯점으로 보고 있다고 말할 있겠습니다. 이는 p521아래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안에 있는 확실한 신자는 마음을 찢는 죄의 자각과 구주에 대한 갈망이 있었던 날을 돌아보고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때는 그것을 확실히 알지 못했지만 그때 이미 아버지의 구원의 부르심 삶에 임했던 것이다" 우리는 회심은 일련의 이라는 청교도의 신념에 비춰 준비에 대한 질문들을 살펴야 한다.처음에 준비로 보였던 것이 나중에는 구원을 받은 것으로 판명될 있다.

죄의 자각구주에 대한 갈망이 있었던 ’ → 예비단계그때 이미 아버지의 구원의 부르심 삶에 임했던 ’ → 효과적 부르심 예비단계에서 효과적부르심을 받은 것이 나중에 판명된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어떤 사람이 예비과정에서 성령의 사역으로 죄를 각성할 , 그리고 죄의 각성이 그를 회심으로 인도 했을 , 처음에 예비로 보였던 성령의 일반사역이 구원을 위한 특별사역의 부르심이었다는 것으로 판명되는 것입니다.

 

3. 플라벨의 준비교리: 가지 조명에 대해서

죄인이 자신의 죄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죄가 죄임을 깨닫게 해주는조명”() 필요합니다. 조엘비키는 플라벨이 {죄를 자각}시키는 조명을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p517 에서아래 같이 말합니다.

플라벨은 '그리스도의 빛은 죄인들에게 다양하게 임할 있다' 말했다.

첫째, 수단들 속에서 빛나는 있다. 설교를 통해 주어진 지식이 그것이다.

둘째, 영혼 속에서 빛나는 있다.

     하지만 빛은 '죄의 자각을 가져오는 것으로 일반적이고, 단지 지성적이다'셋째, 영혼 속에서 빛나는 '특별하고 효과적인 ' 있다.      빛은 '참된 회심을 통해 영혼을 그리스도께 이끈다"
모든 빛이 하나님을 계시한다. 예비적인 죄의 자각 구원하는 조명 간의 차이는 자연적 양심의 하나님의 두려운 위엄에 대한 자각 그리스도의 공로에 대한 새로운 영적 통찰력 간의 차이다. 여기서 후자(구원하는 조명) 조나단 에드워즈가 가르친 "새로운 영적 의식" 가져온다.

또한 p519에서도

플라벨은 죄를 자각시키는 조명과 구원하는 조명을 가지 면에서 구별했다.

첫째, 플라벨은 죄의 자각은 지성과 양심에 영향 미치지만, 구원은 오직 의지를 변화시킨다고 말했다.

둘째, 플라벨은 사람이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고, 하나님의 달콤함을 맛보는 마음의 새로운 의식을 가르쳤다. 죄의 자각은 죄인에게 하나님의 두려운 공의와 능력에 대한 강력한 깨달음을 제공 하지만, 오직 구원하는 조명은 죄인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사로잡는 사랑에 대한 영적 의식을 제공한다. 거듭남을 새로운 영적 의식을 부여받는 것으로 보는 견해는 다른 청교도도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특히 에드워즈를 통해 불후의 진리가 되었다.

정리하면, (1) 단순한 죄의 자각을 일으키는 조명: 성령의 일반사역으로 인해 지성의 작용으로 인해 일어나는 것으로, 지성과 양심에 영향을 주며, 하나님의 두려운 공의와 능력에 대해 깨닫게 해줌 (2) 구원하는 조명: 성령의 특별하고 효과적인 빛으로 인해 일어나는 것으로, 의지에 영향을 주며, 하나님의 마음을 사로잡는 사랑에 대한 영적 의식을 제공 받음

 

4. 구원하는 조명으로 인한 죄각성을 통한 죄책감의 싯점: 좁은 의미의 중생이 일어나는 때로 자연스레 추측 가능

또한 p518아래 같이 구원하는 조명을 말합니다.

플라벨은 죄를 자각시키는 예비적인 조명과 달리 구원하는 조명은 하나님의 영이 사람들의 마음을 비추는 신령하고 거룩한 빛으로예수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그들에게 제공하기 위해역사된다고 말했다(고후4:6). 플라벨은 에드워드 레이놀즈를 인용해서 구원하는 조명은 마음속에영적 진리의 적절한 맛과 풍미 제공한다고 말했다. 하나님의 달콤함을 새롭게 맛본 마음이 구원하는 조명에 대한 플라벨의 개념의 핵심 요소다.

 

플라벨은 이렇게 말했다. '어떤 지식도 마음이 머리에 전달하는 것만큼 그렇게 명확하고 그렇게 분명하고, 그렇게 달콤하지 않다.' 그것은 성경을 완전히 새로운 속에 두는 새로운 "영적 의식과 경험"이다. 확실히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마음" 기록하는 것이다(참고 31:33).... 그리스도는 "강력한 죄의 자각과 가책으로 이성과 양심을 제어할실 뿐만 아니라 "마음의 " "의지" 열어 "달콤하고 은밀한 효력을 통해" 의지를 정복하고 의지를 원하는 상태로 만드신다.

위에 플라벨은 구원하는 조명에 대해서 확실히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마음에 기록하는 이라 하고는 근거 구절을 예레미야 3133절을 제시했는데, 구절은 아래처럼 바빙크의 개혁교의학에서도 성령의 특별한 신적 능력으로 중생과 회개 사역을 하시는 내용에 대한 근거 구절로도 사용되었습니다.

[435] 중에서...

특별한 신적 능력을 통해 중생과 회개의 사역올 행한다는 구체적으로 좁은 의미에서도 그러하다.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훌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9:16. 소명은 선택의 실현이다롬8:28, 11:29. 하나님은 마음을 새롭게 하고 거기에 자신 법을 기록하고51:1; 31:33: 36:26,

여기까지만 정리하겠습니다.

 

출처 : 강남성도 교회
글쓴이 : 노승수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