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델베르그

[스크랩]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88-90문 - 사람의 회심

baromi 2016. 7. 4. 08:39

사람의 회심

 

88: 참된 회심, 혹은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일은 몇 가지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까?

 

: 두 가지인데, 옛 사람을 죽이는 것과 새 사람을 살리는 일입니다.

 

89: 옛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 우리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진노케 하였다는 것을 깊이 슬퍼하며, 그 죄들을 더욱 미워하고 그것을 피하는 것입니다.

 

90: 새 사람을 살린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마음 깊이 기뻐하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모든 선을 행하며 살기를 사모하며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해 설]

 

이제 사람의 회심에 관한 교리를 살펴볼 차례가 되었는데이에 대해서 우리가 논의해야 할 사항들은 다음과 같다:

 

1. 회심은 필수적인가?

2. 회심이란 무엇인가?

3. 회심에는 몇 가지 부분이 있는가?

4. 회심의 원인은 무엇인가?

5. 회심의 효과는 무엇인가?

6. 회심은 금생에서 완전한가?

7. 경건한 자의 회심은 악인의 회개와 어떤 점에서 다른가?

1. 사람이 하나님께 회심하는 것이 과연 필수적인가?

 

사람이 금생에서 회심하는 일은그것이 없이는 내생에서 영생을 얻을 수 없을 만

큼 필수적이다: “사람이 불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3:5),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13:3),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6:9), “이렇게 입음은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고후 5:3). 등에 기름을 채우지 못하여 혼인 잔치에 들어가지 못한 어리석은 처녀의 실례(25:1-10)가 여기에 적합하다. 또한 그리스도의 다음과 같은 선언들을 인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서 있으라"(12:35),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오리라"(12:40),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신실하지 아니한 자의 받는 벌에 처하리니" (12:46).

 

여기서 또한 데메트리우스(Dememus)를 향한 키프리아누스의 유명한 발언을 인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금생을 떠난 후에는 더 이상 회개나 보상의 행위를 위한 여지가 없다. 생명을 잃어버리든지 얻든지 둘 중의 하나뿐이다. 이 땅에서 하나님을 예배함과 믿음의 열매로 말미암아 우리의 영원한 구원을 확보하는 것이다. 죄로나 외부의 반대로나 누구든지 구원을 얻으러 나아오는 데에 방해를 받지 말지니라. 세상에 아직 남아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도 회개가 너무 늦은 법은 없다" 구원 받아야할 자들에게 과연 회심이 얼마나 필수적인가 하는 것이 이로써 드러난다. 그러므로 회개하라는 우리의 모든 권면은의롭다하심을 받아야하는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께로 회심하는 일이 절대적으로 필수적이라는 사실에 근거하는 것이다.

 

2. 하나님을 향한 회심이란 무엇인가?

 

히브리어로는 회심의 관념을 태슈바로 표현하며헬라어로는 메타노이아메타멜레이아로 표현한다. 어떤 이들은 두 헬라어 단어들이 의미가 서로 다르다고 주

장하기도 한다. 메타노이아는 경건한 자들의 회개에 대해서만 사용되고메타멜레이아는 불경한 자들의 회개에 대해서도 사용된다는 것이다. 유다에 대해서는 스스로 뉘우쳐" (27:3)라고 말씀하는데 거기서는 메타멜레떼스가 사용되고 있다. 에서에 대해서는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12:17)라고 말씀하는데여기서는 메타노이아스가 사용된다. 하나님에 대해서도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11:29)라고 말씀하는데 여기서는 아메타멜혜타가 사용된다. 그것들은 하나님 스스로 후회하실 수 없는 그런 종류라는 것이다. 헬라어 칠십인역 성경은 하나님에 대해 말씀하면서 두 단어를 아무런 구별 없이 함께 사용하고 있다.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메타멜로마)"(삼상 15:11), "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우메타노에세이)" (삼상15:29), 그러므로두 단어 사이의 차이는 아주 미세하거나 전혀 없다할 수 있다. 굳이 차이가 있다면메타노이아는 생각의 변화를 나타내며메타멜레이아는 의지나 목적의 변화를 표현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회심에 있어서는 생각과 의지가 함께 변화하는 것이다.

 

라틴어로는 동일한 것을 여러 단어로 표현한다. 그것을 가리켜 “regeneratio”, “renovatio”, , “resipiscentia”, “conversio”, “poenitentia" 등으로 부른다. 이 중에서 “respiscentia”가 헬라어 메타노이아와 적절히 일치하는 것 같다. “resipiscentia”“resipisco”에서 파생된 것으로 어떤 일을 행한 후에 지혜롭게 되는 것을 뜻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메타노이아메타노에오에서 온 것으로뭔가 잘못을 행하고 난 후에 지혜롭게 되는 것생각을 바꾸는 것목적을 바꾸는 것 등을 뜻한다. 또한 “'poenitentia""poenitet”나 혹은 “poena"에서 파생되었다고들 이야기하는데,

회개와 결부되는 비애(悲哀: 혹은슬픔)나 회한이말하자면 하나의 형벌이기 때

문이다. 아니면에라스무스(Erasmus)의 제안처럼그것이 “ponecenendo"에서 파

생된 것일 수도 있다. 이렇게 보면 나중에 목적을 바꾸는 것으로혹은 어떤 일을 행한 후에 그 일을 이해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poenitentia" 혹은 회개(repentance)의 어원이 무엇이든 간에회심(conversion)이라는 단어보다는 더 희미하다. 회개는 이 주제의 범위 전체를 다 포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회개는 우리가 어디서부터 어디로 변화되는지는 표현하지 않고다만 어떤 죄를 범한 후에 느끼는 회한 혹은 비애를 나타내는 것뿐이다. 반면에 회심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새 생명의 시작까지 포함하여 전체를 다 포괄하는 것이다.

 

더욱이 회개라는 용어는 회심보다 의미가 넓다. 회심은 경건한 자에 대해서만 사용된다. 경건한자만이 하나님께 회심한 상태에 있는 것이다. “메타노이아“resipiscentia"도 마찬가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들도 오로지 경건한 자들의 경우를 지칭한다. 이 세 용어들로써 경건한자의 새 생명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러나 “poenitentia"는 불경한 자들에게도 사용된다. 유다의 경우 자신의 악행에 대해 후회하였으나 회심하지는 않았다. 불경한 자들은 회한을 갖더라도 회심하거나 변개되지는 않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 주제와 관련되는 용어들에 대해 논의하였다. 이제는 회심 그 자체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회심의 여러 부분들에 관한 정의는 본 요리문답 88문답에서 찾을 수 있는데거기서는 회심을 옛 사람을 죽이는 것과 새 사람을 살리는 것이라 정의한다. 이를 좀 더 충실히 정의 하자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을 향한 사람의 회심은 부패한 마음과 의지가 율법과 복음의 선포를 통하여 성령으로 말미암아 생겨나는바 선한 마음과 의지로 바뀌는 것인데그 다음에 회개의 열매들을 맺고 하나님의 모든 계명에 삶을 일치시키고자하는 진정한 바람이 이어진다."

 

이러한 정의는 다음의 성경 본문들에서 확중된다: “네가 돌아오려거든 내게로 돌아오라"(4:1),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1:16),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하심을 받았느니라"(고전 6:11),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라"(43:14). 회심의 정의는 또한 사도행전 26:1820에 표현되어 있다: “그들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라.”

 

3. 회심에는 몇 가지 부분이 있는가?

 

회심에는 두 부분이 있으니옛 사람을 죽이는 것(mortification)과 새 사람을 살리는 것(quickening)이 그것이다. 어떤 이들은 회심이 후회(contrition)와 믿음으로 되어 있다고 보나바울의 언어를 사용하여 이렇게 말히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그들은 후회를 죽이는 것으로 이해하고 믿음을 의와 새로운 순종을 향한 바람에 이어지는 기쁨으로 이해하나 그런 기쁨은 믿음의 결과이지 믿음 그 자체는 아닌 것이다. 후회 역시 회심보다 앞서지만회심 그 자체는 아니요회심의 일부도 아니며다만 회심에로 이어지는 하나의 준비 단계 일뿐이며그것도 택한 자의 경우에만 그렇다. 죽임을 당하는 옛 사람은 죄인 혹은 사람의 부패한 본성이다. 살림을 당하는 새사람은 죄로부터 이탈하기 시작하는 자혹은 중생한 사람의 본성이다. 옛 사람 혹은 육체를 죽이는 것은 우리 본성의 부패성을 제쳐두는 것과 억제하는 것에 있는데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포함된다:

1. 죄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지식.

2. 죄에 대한 비에또한 하나님을 거스른 일에 대한 후회.

3. 죄에 대한 미움과 또한 죄를 피하고자하는 진정한 바람.

 

성경은 죄를 죽이는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너희가...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8:13)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2:13),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6:1). 이로 보건대죄에 대한 미움이나 죄를 멀리하는 것도죄에 대한 비애도옛 사람을 죽이는 것에 속한 모든 것이 전혀 없는 악인들에게 죽이는 것 혹은 회심이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은 매우 부적절하다는 것이 드러난다. 죄를 아는 지식이 비애보다 앞선다. 왜냐하면 마음의 감정이 지식에 뒤따라 일어나는 법이기 때문이다. 불경한자들의 편에서는 죄에 대한 지식에 이어서 비에가 뒤따른다. 현재의 악이나 미래의 악에 대한 두려움과 세상적인 징별과 영원한 형벌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비애는 회심의 일부도 회심의 예비 단계라 볼 수도 없고가인이나 사울유다 등의 경우에서 보듯이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이요 그에게서 돌아서는 것이요 절망 속으로 돌진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이것을 가리켜 비애라 부르나 구원에 이르는 비애는 아니다. 다만 사망을 이루는 이 세상의 비애요경건을 따르는 비에는 아닌 것이다. 그러나 경건한 자들의 경우는이러한 비애가 하나님의 불쾌하심에 대한 느낌에서 생겨난다. 그들은 그것을 진정으로 깨닫고 슬퍼하며거기에 모든 과거의 죄들에 대한 미움과 혐오가 이어지며또한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를 삼가며 거기서부터 돌아서는 것이 이어진다. 죄를 아는 지식죄에 대한 비에죄를 피하는 것은 각기 그 주체가 다르다. 혹은 우리의 존재 속에 그것들이 자리 잡는 부분이 각기 다르다. 죄를 아는 지식은 생각에 있고죄에 대한 비애는 마음에 있으며죄를 피하는 것은 의지에 있는 것이다. 돌아서는 일이 회심에 포함되는데그것은 마음과 의지에 있으며그것은 또한 어떤 것에게서 다른 어떤 것에게로 돌아서는 것이다.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라.. (34:14)라는 시편기자의 말씀처럼악에게서 선에게로 돌아서는 것이다.

 

이것을 성경은 죽이는 것.. (mortification)이라 부르는데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죽은 자가 산 사람의 행위들을 할 수 없는 것처럼우리의 본성도 그 부패성이 일단 제거되면 부패한 상태에서 현저하게 행하던 행위들을 더 이상 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원죄(頂罪)가 일단 적절히 억제되면 자범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하심을 얻었음이라.. (6:7).

2. 이 죽이는 것에 갈등과 고통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나니.. (5:17). 그렇기 때문에 이 죽이는 것을 가리켜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5:24).

3. 죽이는 것은 죄를 중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것을 그냥 죽이는 것이라하지 않고 옛 사람을 죽이는 것이라 부르는데이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사람의 본질이 아니라 사람 속의 죄가 파괴되기 때문이다. “옛 사람이라는 표현을 덧붙인 것은 또한 경건한 자들과 불경한자들의 회개를 서로 구별하기 위함이 기도하다. 경건한 자에게서는 그 사람이 아니라 옛사람이 파괴되나불경한 자들의 경우는 옛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 자체가 파괴되기 때문이다.

 

새사람을 살리는 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누리는 참된 기쁨과 즐거움이요하나님의 뜻에 따라 삶을 살며 모든 선행을 행하고자 하는 진실하고도 진지한 갈망이다. 이것에는 죽이는 것에 포함되는 것과는 다른 세 가지가 포함된다:

 

1.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적용되는 것을 아는 지식.

2.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우리와 화목 되셨다는 것과우리 속에 순종이 시작되었고 또한 완전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에서 생겨나는 기쁨과 즐거움.

3. 새로운 순종을 행하며더 이상 죄를 범하지 않으며우리의 생애 전체를 통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그의 사랑을 유지하고자 하는 간절한 갈망.

 

다음의 성경의 선언들에 따르면이런 갈망은 그 자체가 새로운 순종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5:1)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14:17),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함이라"(57:15)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6:11),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 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2:20).

 

회심의 이 부분을 가리켜 살리는 것이라 부르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1. 산사람이 살아 있는 자의 행위들을 행하듯이살리는 것에는 깨달음에 새로운 빛을 비추는 것과 의지와 마음에 새로운 특질들과 활동들을 생기게 하여 새로운 삶과 새로운 행위가 이어지게 하는 것이 포함되기 때문이다.

2. 살리는 것에는 회심하는 자들의 편에서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며 즐거워하며 그리하여 큰 위로와 위안을 갖게 하는 것이 포함되기 때문이다. 여기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가 덧붙여지는데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화목 되시지 않고서는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와 화목 되시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는 것이다.

 

회심의 이 두 부분은 믿음에서 생겨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죄를 미워하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회심의 이 두 부분에서 믿음에 대한 분명한 언급은 나타나지 않으나그것은 믿음이 회심에서 제외되기 때문이 아니라어떤 특정한 결과가 있을 때에는 거기에 반드시 그에 합당한 원인이 전제되어 있는 것처럼 회심과 감사의 교리 전체가 믿음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반론. 그러나 믿음은 기쁨을 생겨나게 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후회와 죽이는 것을 생기게 하지 않는다.

 

답변. 동일한 원인이 다른 종류의 작용과 또한 다른 면들로 인하여 다른 결과들을 생겨나게 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모순이 아니다. 믿음 그 자체가 후회를 생기게 하지는 않으나부수적인 요건즉 자비하시고 은혜로우신 아버지를 거스른 죄 때문에 후회가 생겨나는 것이다. 믿음 그 자체는 기쁨을 생겨나게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를 향하여 아버지의 뜻을 가지신다는 것을 믿음이 확신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재반론. 율법을 선포하는 것이 믿음에 선행한다. 회개의 선포가 율법과 더불어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율법의 선포는 비애와 진노를 이룬다. 그러므로 믿음에 앞서서 특정한 비애가 있는 법이다.

 

답변. 믿음 이전에 특정한 비애가 있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그 비애가 회심의 일부인 것은 아니다. 불경한 자의 경우 믿음 이전에또한 믿음이 없이 비애가 있는데그것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는 것이요이는 회심과는 전혀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택한 자가 경험하는 후회와 비애는 이미 논한바와 같이 회심의 예비 단계요 회심에로 이어지는 것이다.

 

4. 회심의 원인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성령께서혹은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회심의 가장 주된 동력인(動力因: efficient cause)이시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회심시키시기를 위해 기도하며또한 성경이 회개를 하나님의 선물로 자주 말씀하는 것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이시니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아오겠나이다” (31:18),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5:21),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5:31),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11:18),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제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하실까 하며" (딤후 2:25).

 

회심의 도구 혹은 수단적 원인은 율법과 복음이요다시말하면먼저 율법의 교리요 그 다음에 복음의 교리다. 율법을 선포하는 것이 먼저 있어서 우리를 준비시키고 또한 복음에 대한 지식에로 우리를 인도하기 때문이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3:20). 그러므로 율법이 없이는 죄에 대한 비애나 슬픔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죄인이 먼저 죄에 대한 지식을 갖도록 인도 받은 다음에 복음의 선포가 뒤따라 이어져서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대한 확신을 주어 후회하는 마음을 격려하는 것이다. 이런 선포가 없이는 믿음도 없고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도 없고따라서 그 사람에게 회심도 없는 것이다. 복음의 선포 다음에다시 율법의 선포가 뒤따라서율법이 우리의 감사와 우리의 삶의 규범이 되도록 한다. 그러므로 율법이 회심보다 선행하고 또한 회심의 뒤를 따르기도 한다. 죄에 대한 지식과 비에를 갖게 되도록 회심보다 앞서서 주어지며회심한 자에게 삶의 규범이 되도록 하기 위해 회심 이후에 주어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지자들은 불경한자들에게 먼저 죄를 책망하고형벌을 경고하며회개를 권면하며그 다음에 용서와 사면을 약속하여 위로를 주며또한 마지막으로 다시 경건의 의무들을 권면하는 것이다. 세례 요한의 설교의 성격 역시 그와 같았다. 이렇게 함으로써 회개의 선포가 율법과 복음을 다 포괄한다. 그러나 회심을 이루는 데에는 율법과 복음이 각기 자신의 독특한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다.

 

회심의 또 하나의 수단적 원인혹은 내적인 원인은 믿음이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도 없고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죄를 사하시리라는 것을 - 알지 못하면절대로 회심이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고옛 사람을 죽이는 것도새 사람을 살리는 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깨끗해지기 때문이다(15:9).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참된 기쁨도 즐거움도 없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도 없다. 믿음에서 나지 않은 것은 무엇이든 죄다(14:23). 모든 선행은 믿음이라는 근원에서 나오는 것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았으니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5:1).

 

우리의 회심에 기여하는 원인들에는 십자가와우리 자신과 다른 이들에게 가해지는 징계들과또한 다른 이들의 은덕징벌모범 등이 있다. “주께서 나를 징벌

하시매 멍에에 익숙하지 못한 송아지 같은 내가 징벌을 받았나이다"(31:18),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119:71), “너희 빛이 사람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하라"(5:16). 회심이 근거를 두는 주체는 변화가 발생하는 사람의 이성, 의지, 마음감정이다.

 

회심의 형식은 돌아서는 것 그 자체이며또한 회심과 관련되는 다음의 모든 정황들이 거기에 결부된다:

1. 생각과 이성에 관해서는 하나님의 뜻과 역사하심과 더불어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판단

2. 의지에 관해서는하나님을 거스르는 것들을 피하고자하는 간절한 바람과 하나님의 모든 명령들에 순종하고자하는 꾸준한 목적.

3. 마음에 관해서는하나님의 율법에 따르는 새롭고 거룩한 바람과 정서들.

4. 외적인 행위와 삶에 관해서는 하나님의 율법에 따르는 정의와 순종의 시작.

 

회심의 대상은

1. 죄 또는 불순종. 우리는 이것으로부터 회심하는 것이다.

2. 의와 새로운 순종. 우리는 이것을 향하여 회심하는 것이다. 회심의 최고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며하나님의 영광에 종속되는 그 다음 목적은 우리의 선인데이는 우리의 복락과 영생을 누리는 것에 있다. 또한 이것들 외에 부수적인 또 다른 목적이 있는데그것은 바로 다른 사람들의 회심이다.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하라"(22:32)이같이 너희 빛이 사랑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하라.. (5:16).

 

펠라기우스주의와 관련되는 다음과 같은 의문들을 여기서 다루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성령의 은혜가 없이 과연 사람이 스스로 회심할 수 있는가? 사람이 과연 그의 자유로운 선택의 능력을 발휘하여 신적인 은혜를 받도록 스스로 준비할 수 있는가?펠라기우스(Pelagius)는 첫 번째 의문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답변을 가르쳤는데이는 성경이 지극히 명확하게 선언하는바와 반대되는 것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이시니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아오겠나이다.”(31:18),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2:13),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7:18). 오늘날 스콜라 신학자들과 교황주의자들은 펠라기우스주의에 관한 두 번째 의문에 대하여 긍정적인 논지를 변호하는데이는 방금 인용한 하나님의 말씀의 명확한 선언에 반대되는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께서 친히 하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6:44)라는 말씀과도 모순되는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특정한 준비를 사람의 자유의지에 돌린다. 그러나 그는 이런 준비가 마치 회심의 은혜에 기여하는 것처럼하나님의 은혜로운 도우심이 우리를 내적으로 감동하시는 것으로 말한다.

 

5. 회심의 효과는 무엇인가?

 

회심의 효과는 다음과 같다:

1.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참되고도 열정적인 사랑.

2. 하나님의 모든 계명에 따라 예외 없이 하나님께 순종하고자하는 진정한 갈망.

3. 모든 선행 혹은 새로운 순종 그 자체.

4. 다른 사람들을 회심시켜 구원의 길로 인도하고자 하는 열심. 한마디로참된 회개의 열매들은 하나님을 향한 경건의 의무들과 또한 이웃들을 향한 사랑의 의무들이다.

 

6. 회심은 금생에서 완전한가?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우리의 회심은 금생에서는 완전하지 못하나내생에서 제시되는바 완전한 상태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발전해간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고전 13:9). 성도들의 모든 탄식과 간구들이 이 진리를 확증해 준다.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19:12),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7:24). 회심한 자들 속에서 갈등이 계속된다는 것도 동일한 진리를 증언해준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5:17).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권면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회심한 자들에게 더욱 충실하게 하나님께로 돌아설 것을 권면한다: “의로운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22:11). 또한 동일한 사실을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제시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육체를 죽이는 것도영을 살리는 것도 금생에서는 성도들에게 절대적일수도 완전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이 두 부분으로 이루어지는 회심도 완전하지 못하다. 옛 사람을 죽이는 일에 관해서는 분명하며금생에서 그것이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에 대해 의심을 제기할 여지가 없다. 성도들이 육체의 정욕과 계속해서 싸울 뿐 아니라 이 싸움에서 패하고 무너지는 때가 많고자주 죄를 범하고 하나님을 거스르고그러면서도 죄를 변호하지 않고 죄를 혐오하고 탄식하며 죄를 피하려고 애를 쓰기 때문이다. 새사람을 살리는 것이 불완전하다는 사실에 대해서도위에서 언급한 그런 갈등이 충족한 증거가 된다. 우리의 지식이 부분적임은 물론의지와 마음의 개혁 역시 불완전하다. 의지가 우리가 지닌 지식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회심한 자들의 경우에 금생에서 의지가 불완전하게 선을 지향하는 분명한 이유는 두 가지다:

1. 우리의 본성의 개혁이 금생에서는 절대로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으며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나 그에게 순종하고 자하는 마음의 성향도 역시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이 자신에 대해 인정하여 행하는 단 하나의 탄식이 이러한 사실의 충족한 증거가 된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 도다" (7:18, 19).

 

2. 회심한 자들이 언제나 성령의 지배를 받지 않고 때때로 한동안 하나님께 버려져 있기 때문이다. 성도들은 시험이나 징계 혹은 그들을 낮추기 위한 목적으로 한동안 버려져 있기도 하나다시 회개에 이르게 되고그리하여 멸망하지 않는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9:24).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분명 그렇게 하실 수 있는데어째서 금생에서는 그의 백성들의 회심을 완전하게 하시지 않는가? 그 이유들은 다음과 같다:

1. 성도들이 낮아지고믿음과 인내와 기도에서 훈련을 받고또한 육체를 거슬려 싸우게 하며그리하여 그들이 스스로 자기들의 완전함을 자랑하지 못하게 하고생각할 분량 이상의 생각을 품지 않게 하고날마다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하지 마소서" (143:2),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6:12)라고 기도하게 하기 위함이다.

 

2. 점점 더 완전에 이르도록 꾸준히 전진하도록 하며그 완전함을 더욱 간절히 사모하게하기 위함이다. 발로 세상을 밟고그리스도인의 경주를 더욱 민첩하게 경주하도록 하며하늘에 가서야 비로소 약속된 기업을 충만히 누리게 될 것임을 알고서 하늘에 쌓여 있는 그 복락들을 사모하게 하기 위함이다.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3:2, 3),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3:5),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요일3:2).

 

이러한 불완전함에 대해서 칼빈(Calvin)은 다음과 같이 인상 깊은 언어로 진술하고 있다: “사실 이러한 회복은 한순간에나 하루에혹은 일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계속적인-그리고 때로는 아주 더디기도한-과정을 통해서 그의 택한 자들 안에서 육체의 부패성을 제거하시고그 죄책을 깨끗하게 하시며그들을 성전으로 거룩히 구별하시며참된 순결에게 이끌리는 모든 성향을 회복시켜 가시므로 하나님의 택한 자들은 평생토록 회개를 실천하고또한 이러한 싸움이 죽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종결될 것임을 아는 것이다"(기독교강요.... 339). 또한 [기독교강요]의 방금 인용한 부분에서부터 15절에 이르기까지 경건한 자들의 지상적인 삶에 계속 붙어 있는 죄의 잔재에 대한 카타리파(Cathari)와 재세례파(Anabaptists)의 논지들을 반박하는 내용이 이어지는데이 부분을 읽는 것도 매우 유익할 것이다.

 

7. 경건한 자의 회심은 악인의 회개와 어떤 점에서 다른가?

 

회개라는 용어는 경건한 자들에게는 물론 불경한 자들에게도 사용되는데이는 죄에 대한 지식과 죄로 인한 비애에서나 두 경우가 서로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것들에 대해서는 서로 완전히 다르다.

 

1. 회개를 일으키는 원인이나 혹은 그 느끼는 비애가 서로 다르다. 악인들이 비애를 느끼는 것은 하나님을 거슬렀기 때문이 아니라그저 스스로 형벌을 자초했고 그로 인하여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법을 어겼기 때문이다. 그것이 아니라면그들은 절대로 죄에 대해 비애를 가질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 그리하여 가인은 그저 하나님께서 자신의 죄에 대해 형벌을 가하신다는 것 때문에 탄식했던 것이다 내 죄짐을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주께서 오늘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1:13, 14). 그러나 경건한 자도 죄의 형벌을 끔찍하게 여기지만그들은 좀더 구체적으로 죄 그 자체 때문에또한 하나님을 상대로 저지른 과실 때문에 고통을 느끼고 탄식하는 것이다. 다윗의 경우가 그랬다: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51:3, 4). 배드로의 경우도 그리스도를 거역한 것 때문에 슬피 울었다. 그러나 유다의 슬픔은 자신이 악한 죄를 범했기 때문이 아니라그저 그의 범죄에 따르는 형벌 떼문에 생긴 것이다. 호라티우스(Horace)는이러한 구별을 다음과 같은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 (lib. 1. epist. 16,)

 

선한 사람들은 덕에 대한 사랑으로 죄 짓기를 꺼려한다.

하지만 너는 형별에 대한 공포로 인해 죄를 짓지 않는다.“

 

2. 경건한 자의 회개는 불경한 자의 회개와 그 동력인(動力因)이 다르다. 불경한 자의 회개는 불신과 절망에서 나오므로 그 절망과 불안과 하나님을 향한 미움이 가중된다. 그러나 경건한 자의 회개는 믿음 혹은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또한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과의 은혜로운 화목에 대해 그들이 갖고 있는 신뢰에서 나오는 것이다.

 

3. 그 형태가 다르다. 경건한 자의 회개는 마귀와 죄와 그들의 옛 본성으로부터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것이다. 그들은 슬퍼할 뿐 아니라 중보자에 대한 신뢰를 발휘함으로 그들 자신을 격려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신뢰하며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고그를 신뢰하며다윗과 더불어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51:7)라고 말한다. 그러나 불경한 자의 회개는 하나님으로부터 마귀에게로미움과 하나님을 원망하는 데에로그리고 절망에로 돌아서는 것이다.

 

4. 그 효과가 다르다. 경건한 자의 회개 다음에는 새로운 순종이 이어지며그들의 회개의 깊이만큼 옛사람이 그들 속에서 죽고 의를 향한 갈망이 증가한다. 그러나 불경한자의 회개 뒤에는 새로운 순종이 따르지 않으며그들은 계속해서 죄를 지으며아합처럼 잠시 동안 회개하는 것처럼 보이나 결국 자기들이 토해낸 것에 게로 다시 돌아간다. 그들이 죽고 파괴되나그들의 본성의 부패함은 진압되지 않는다. 그러니 회개가 큰만큼 하나님을 향한 미움과 불신과 반감도 그만큼 커지며그리하여 그들은 사탄의 권세와 통치아래 더욱 더 빠져 들어가는 것이다.


출처 : 예수안에 하나교회
글쓴이 : 다니엘(정성우)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