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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무엇이 회심에까지 이르게 하는가? (월리엄 아메스의 예비에 대한 신학논증 중)

baromi 2016. 3. 4. 17:56

월리엄 아메스의 예비에 대한 신학논증 중.. 논제 5 ~ 12 참고

http://blog.daum.net/londonhorace/15859661 


생략... 


논제12. 반박하기 어려움이 있는 것처럼 여겨져서 반대를 하게 하는 견해가 이것입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 안에서 율법을 듣게 되면서 일어나게 되는 공포심은 너무 심하여서 하나님께로 인도하지 않고 오히려 뒤돌아서게 하는 한 원인이기도 하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1. 거의 모든 해석자들이 로마서8장15절의 ‘무서워하는 종의 영’이란 구절을 해석하는 것처럼, 어떤 강력한 두려움은 성령의 선물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바로 앞의 논제에서 보여졌던 것처럼) 이제 인정되었습니다. 더욱이나 사도행전2장과 16장에서 나타나는 두려움은 거듭남의 첫 부분이면서 또한 성령의 역사의 효과로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물이 아니라면, 특별히 거듭남의 부분이 아닌 것이라면, 그런 것은, 그 자체로서 전혀 사람을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2. 어떤 면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이, 고난 자체가 악에 이르게 하는 경향도 있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오히려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는 것처럼, 오히려 상황에 의해서 하나님께로 사람들을 인도하게 합니다. 


3. 강력한 두려움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은 두 가지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두려움의 감정 그 자체를 말합니다. 그 감정 자체로 인해서 어떤 사람들은 죄의 복수자로서의 하나님을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대상으로 알고 나아오게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그 정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덧붙이는, 노예적 기형을 말합니다. 전자는, 그 자체로서 선한 것입니다. 거듭난 자 속에 그런 정서가 머무릅니다. 그러므로, 강력한 두려움에는, 하나의 재료적인 기질(material substrate)가 있어서 그 재료적 성향(material disposition)이 아버지에게 느끼는 두려움과 회심에까지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덧붙이게 되는 기형적 두려움은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경향이 있지만, 순전한 두려움으로서의 강력한 두려움은 오히려 하나님께 나아가게 합니다. 그래서 칼빈의 사도행전20장과 21장에 대한 언급과 기독교강요3권3장에서 말하고 있는 바, ‘율법적 통한은 회개의 시작이며, 믿음에 이르게 되는 하나의 예비이다. 나는 그것을 우리의 불쾌감의 시작이라고 부르겠는데, 그 불쾌감은 하나님의 분노의 두려움에 의하여 주어지는 것으로서 우리가 강력하게 영향을 입게 되면 그것이 우리를 몰아서 그 해결책을 찾고자 힘쓰게 한다’는 말이 정당합니다. 또한 까미에르(Daniel Chamier, 1564–1621, 프랑스위그노파목사)의 말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율법은 복음을 섬기는 경향이 있다. 행위상으로 보면 가장 확실하게 저주에 이른 것이 분명한 것이 오히려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은혜를 추구하게 한다’(Panstratiae Catholicae, 3권15부4장). 그는 이렇게도 말했습니다: ‘우리는 강력한 두려움이 선하다는 것을 당연히 인정한다. 곧, 그것은 이성과 유용성에 일치되는 선한 것으로까지 드러날 정도이다’(22부9장). 이것은 어거스틴이 시편127편을 주석하면서 ‘그 두려움은 선한 것이며 또한 유용한 것이다’고 한 것과 꼭 같습니다. 

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로빈슨크로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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