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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회심준비를 거론할 때, 스스로 준비하는 것과 준비되는 것의 차이점을 명심해야 한다.

baromi 2016. 3. 4. 17:55

칼빈과 칼빈주의자들, 폴 헬름 저 / 서종대 역 , 생명의 말씀사.


제4장 그리스도인을 위한 회심(2)  중에서... 



.... 인간은 죄의 상태로 타락함으로써 구원에 수반되는 영적 선을 행하고자 하는 모든 의지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따라서 자연인은 영적 선을 아주 싫어하고 죄로 죽어 있기 때문에 자력으로는 자신을 회개시키거나 회개에 이르도록 준비시킬 수 없다. [Westminster Confession Ⅸ:3. 켄달은 고백서가 예비주의를 가르치고 있는지의 여부에 대하여 다소 분명치 못한 태도를 보인다. 한곳에서는(p. 198) 가르치지 않고 있다는 말을 하고 있으나 그 뒤에서(p.204)는 실제적으로 가르치고 있다고 말한다(또한 p.208eh 참고하라).]


전체 단락의 전후 관계를 고려해 볼 때 마지막 네 단어-회개에 이르도록 준비시킬수 없다(to prepare himself thereunto)-는 타락한 인간은 영적으로 죽어 있다는 고백서의 견해를 강조하고 있다.(Westminster Confession X. 1.)

영적 죽음이란 영적으로 죽어 있는 사람이 자신을 회개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러한 인간은 자신을 회개에 이르도록 준비시킬 수 없으며 더 나아가 자신이 살아나도록 준비할 수 없는 것이다. 이와같은 준비가 있다는 것은 생명이 있음을 의미하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분명히 말하건대, 회개에 이르도록 준비시킬 수 없다는 말의 의미는 만일 어떤 사람이 영적인 생명을 받게 된다면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만 온다는 것이다.



그러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전체적인 청교도의 전승(이 전승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의해 옹호되고 있다)이 예비라는 단어를 사용함에 있어서 의미하지 않은 두가지의 사실이 있다. 첫째는 고백서가 어떤 인간이 회심을 위해 준비될 수 없음을 말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회심은 회개와 믿음의 의식적인 행위, 그리고 신뢰와 감정을 포함한다. 인간으로 하여금 준비하게 하시고 의식적인 회개와 믿음의 자리로 그를 인도하시는인간의 영혼에 대한 예비적이고 영적인 하나님의 행위가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이같은 예비적 행위는 잠재의식중에서 일어날 수도 있다. 고백서에는 회심의 의식적인 경험에서 선행하는 시간과 그것을 준비하는 기간이 정상적으로 존재함을 암시하는 표현이 있다. 이 기간 중에 한 개인은 그리스도의 영의 확신시키는 능력의 대상이 된다.


생명에 이르는 회개는 복음에서 오는 은혜이다. . . 죄인은, 회개로 말미암아 자신의 죄가 위험할 뿐 아니라 더럽고 추악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과 그분의 의로운 법에 반대되는 것임을 눈으로 보고 깨달음으로 해서, 또한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자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긍휼을 베푸신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자신의 죄를 슬퍼하고 미워하게 되며 결국은 모든 죄에서 방향을 돌려 하나님께로 향하게 된다. . . .(Westminster Confession XⅤ. 1.)


이 설명에 따르면,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향하는 때에 죄가 악하다는 사실과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회개하는 자에게 자비로우시다는 사실을 인식하며 죄 때문에 슬퍼하는 것이 일시적으로 선행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현상들은 하나님께로 회심하는데 있어서 따르는 요소이며 하나님의 은혜의 효과이다. 고백서가 가르치는 것은 한 인간이 스스로 회심을 준비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고백서가 부인하고 있는 것은 이와 같은 준비가 아니라 스스로의 준비인 것이다.


그러나 고백서는 스스로의 준비를 부인함에 있어서 한 인간이 성령의 직접적이고 중생시키는 영향력이 없이는 전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말하지는 않는다오히려 그 반대의 사실을 말하고 있다. 중생되지 못하고 영적으로 죽어있는 한 인간도 성령의 직접적인 도움이 없이 많은 행위를 할 수 있다. 이 행위들은 회심을 위해 정상적인 사건의 과정에 있어서 필요한 것이다. 예를들어, 어떤 사람이 성경을 읽을 수 있고 설교를 들으며 충고를 받아들일 수도 있는 것이다. 다른 모든 행위의 경우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이와 같은 행위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섭리에서 나오는 고무적인 성령의 영향력은 아니다. 고백서는 그 어느곳에서도 한 인간이 성령에 의하여 직접적으로 고무되거나 능력을 받지 않으면 교회에 갈 수 없다는 내용을 암시하고 있지 않다.

이와같은 차이점, 특히 "스스로 준비하는 것"과 "준비되는 것"과의 차이점을 명심 할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수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예비주의”를 가르치고 있는가? 우리는 지금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이 그 용어가 의미하는 바에 정확하게 의존하고 있음을 알게되는 위치에 서 있다. 기타의 모든 학문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신학에 있어서도 사용되는 단어의 의미는 중요하다. 만일, “예비주의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를 예비하는 자연적인 능력을 의미한다면 고백서는 그와 같은 사실을 가르치고 있지 않다오히려 그 사실을 강력히 부인한다.


칼빈의 경우는 어떠한가? 이에 대한 답변은 그의 견해 역시 근본적으로 고백서와 일치한다는 것이다. 고백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칼빈 역시 거부하는 “예비”의 의미가 있다.


우리는 날 때부터 모두 죄인들이다. 따라서 우리는 죄의 멍에 아래 놓여있다. 그러나 전인(全人)이 죄의 권능하에 놓여 있다면 죄의 주요 좌소인 의지는 가장 단단한 결박으로 묶여 있으리라는 것은 필연적인 결론이다. 만일 어떤 의지가 성령의 은혜에 선행한다면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부은 하나님이시니”(빌2:13)라는 바울의 말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많은 사람들이 쓸데없이 사용하고 있는 “예비”라는 말을 집어치우라! 왜냐하면 종종 다윗이 여러 구절들을 통해서 그랬듯이, 신자들조차도 자신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도록 간구하고 ㅣ시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이 같은 기도의 욕망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Inst. Ⅱ. ii. 27.)


그러나 칼빈은 그리스도에 대한 구원하는 믿음의 의식적인 적용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준비하실 수 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마음이 성령의 능력에 의해 강화되거나 고무됨이 없이 심성이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조명된다면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 . . 따라서 양면에 있어서, 즉 인간의 심성이 하나님의 진리를 맛볼 수 있을 정도로 정화되면 마음이 그 진리속에 자리잡는 다는 점에 있어서 믿음은 하나님의 유일한 선물이다.(Inst. Ⅲ. ii. 33.)


위에 제시된 인용문은 주의주의(主意主義,각주참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칼빈과 청교도들 사이의 유추된 차이점이 과장에 근거하고 있으며 공감적인 차이점이 결여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모든 어거스틴 추종자들과 더불어 칼빈과 청교도들은, 인간의 의지가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는 독립적이고 자발적인 능력을 소유하리라는 점을 강력하게 부인했다. 그렇지만양측은 모두 하나님께서 종종 그 자녀들이 거의 깨닫지 못하는 상태에서 은혜로운 역사로 영혼의 회심을 위해 준비하고 계심은 인정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논의는 논쟁 중에 있는 요지에 정확하게 답변하지는 못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청교도들은 넓은 의미에서 예비주의자들이었기 때문이다그들은 회심에 앞서서 예비적인 율법의 행위가 있어야 한다는 사상을 발전시켰다. 이 같은 사상은, 비록 그것이 가능한 것으로 주장될 수 있다 하더라도 칼빈의 사상으로부터 완전히 이탈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 킬빈과 청교도들 사이의 가정적인 마지막 차이점을 살펴보아야 하겠다.

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로빈슨크로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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