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정통신학의 삼위일체의 상호내재를 인정합니다.
위트니스 리도 인정한다고 합니다. 최삼경목사도 인정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핵심문제는, 어떤 방식으로 상호내재하시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분리불가니, 분리가능이니 하는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제가 이 분리불가, 혹은 분리가능의 문제가 핵심이라고 여겼던 것은,
아래에 어떤 분(폴님? 하나로님?)이 이 문제를 정리하기를 이런 비유를 들어서 사용한 것으로 기억났기 때문입니다.
정확한 지는 모르겠지만,
1. 완벽한 원 세 개가 있는 데, 그것을 겹쳐서 보면 완전히 하나로만 보이게 되는 원이 있다
2. 그런데, 이 원 세개 중의 하나가 한 점에 있다가 다른 점으로 옮기게 될 때, 나머지 원 두개도 먼젓 번의 원이 가는 곳으로 함께 이동하는 것이 위트니스 리의 상호내재개념이고,
3. 완전히 하나로만 보이던 그 세 원들 중 하나가 다른 곳으로 옮기게 되면, 다른 두 원은 그 자리에 있을 수도 있다고 보는 것이
최삼경목사의 상호내재개념이다
는 식으로 정리를 한 것입니다. 기억 나십니까?
그래서, 성경의 계시된 표현들을 살펴보는 중에, 저 생각에는 위트니스 리보다는 최삼경목사의 상호내재개념이
더욱 성경의 계시에 충실한 설명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영원전부터 상호내재하셨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그렇게 상호내재하시던 중에
성자께서 <엘리엘리 라마사닥다니> 하셨습니다. 어느 한 지점으로 옮기셨습니다. 다른 두 개의 원이 함께 옮겼습니까?
그래서 삼위가 <분리>되지 않은 것입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절규할 수 있는 것일까요?
<분리되지도 않았는데> 왜 나를 분리시켰느냐고 투정을 부리고 있는 것입니까?
분리되지도 않은 채로 있는(이게 사실이라면!) 성부를 향해서 성자는 왜 이 절규를 하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 * * *
저의 <분리>개념은, 폴님이나 하나로님의 비유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정통교부들의 <구별이 되나 분리가 되지 않는> 상호내재개념은 바로 상호내재개념을 인정하지 않는
삼신론자들에게 하는 비판을 담고 있습니다. 상호내재개념을 분명하게 강조하면서, 위와 같은 비유를 빌려서 <분리>를 강조하는 저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비판입니다.
기존의 용어와 왜 다르냐구요? <과정을 거쳐서 완결된 삼일하나님>이란 용어가 기존의 용어와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를
숙고하신다면 저에게 그런 말을 하실 수 없을 것입니다. 적반하장이란 이런 경우에 쓰는 말입니다.
정통교부들을 빌려서 비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위트니스 리의 상호내재개념입니다.
상호내재하되 불리불가하기 때문에 <과정을 거쳐서 완결되는 삼일하나님>을 강조하는 위트니스 리의 상호내재개념 말입니다.
상호내재가 균형의 추를 지나쳐서 너무 가버린 셈이지요.
교부들의 <분리되지 않는>이란 표현이나 개념을 정녕 옳다고 보면서도, 그 옳다 보는 것은 그 표현들이 사용되는 맥락과 상황을 고려하기 때문이지, 그 단어자체에 매여있지 않습니다. 성경의 계시된 표현들을 고려하면, 그리고 폴님이나 하나로님이 제시한 그 비유를 고려하는 맥락이라면, 오히려 <분리가능한>이란 표현이 정통교부들의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정통교부들은 성경의 계시를 떠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위트리스 리는 성경의 계시를 떠났기 때문입니다.
'(지방)교회와 논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Re:십자가에서 성부는 어디 계셨는가?-폴님의 답변 (0) | 2012.01.21 |
---|---|
[스크랩] 삼위일체를 이해할 때 주의 점 (0) | 2012.01.21 |
[스크랩] 정통교부의 상호내재개념과 위트니스 리의 상호내재개념의 본질적인 차이 (0) | 2012.01.21 |
[스크랩] Re:과정을 거쳐 완결된 삼일 하나님?-그 비평(4) (0) | 2012.01.18 |
[스크랩] Re:과정을 거쳐 완결된 삼일 하나님?-그 비평(3) (0) | 2012.01.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