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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셀 운동의 문제점에 관한 보고

baromi 2011. 1. 14. 09:52

셀 운동의 문제점에 관한 보고

 

--   이 글은 작금에 불 일듯 일어나고 있는 "셀 운동" 즉 셀 교회 운동의 이단성에 대해서 대한예수교 장로회(합신) 총회 산하 이단 대책 위원회에서 연구 보고한 내용입니다.

 

      주의 할 것은 오늘날 아래 와 같은 위험한 사상(사도적 교회를 부정하는 셀 운동 사상)에 뿌리를 두고 교회를 대체하는 "대안사회" 라는 것을 주창하며 독서운동을 일으키고 있는 그룹이 있는 것인데 이는 심히 위험한 것임을 밝힙니다. 자녀들에게 독서교육을 잘 시키자는 것은 좋은 일이나 독서운동의 궁극적인 목표가 사도적 교회를 대체하는 '대안사회' 라는 것이라면 이는 분명 대단히 위험한 발상입니다.


1989년에 랄프 네이버가 셀 교회의 이론1)을 제시한 후 셀 운동은 한국을 비롯하여, 동남아, 남미, 중미, 아프리카 등으로 퍼져나갔는데, 여러 모습을 띄고 있어 하나로 볼 수 없으므로 각각의 경우마다 장점과 단점을 유념해야 한다. 교회 조직으로 체계화된 셀 운동은 성경공부를 체계적으로 실시하여 성도들 중에서 리더를 훈련하고, 그를 통해서 영혼구원과 그리스도인의 삶을 나눈다는 의미에서 긍정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 팀웍크를 강조하고, 동료의식을 길러주면서, 성도간의 관계성을 증진시키는 기능을 하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셀 운동이 성경에 근거한 당회와 제직회의 무력화를 초래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며, 훈련받은 평신도 리더 중심의 성경공부 모임을 넘어서서 전개되는 각종 목회적 프로그램들로 전통적인 교회제도의 근간을 허는 것이므로 경계해야 한다. 특히 세계 각국에서 셀 운동은 마치 교회성장을 위한 유일한 전략인 것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각광을 받고 있는데, 셀 운동을 면밀하게 살펴보면 수긍할만한 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성경이 제시하는 교회상을 위협하는 매우 위험한 요소들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 소고는 요점적으로 간략하게 셀 운동의 정체를 고찰하고 그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1. 셀 운동의 출발점


  먼저 간단하게 셀 운동이란 무엇인지 살펴본다. 한 마디로 말해서 셀 운동은 소그룹을 중심으로 불신자에게 전도하기 위하여 평신도를 활용하는 성령체험 운동이다. 결국 셀 운동은 성령 체험을 바탕으로 평신도가 활동하는 소그룹이 불신자에게 전도하는 운동이다2). 이것을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성령 체험 -> 평신도 -> 소그룹 -> 전도. 이런 구조를 지닌 셀 운동은 전통교회를 비판하면서 신약성경의 교회로 돌아가자는 것에서 시작되었다3).


1) 전통교회를 비판함4)

(1) 셀 운동은 전통교회의 문제점을 건물 속에 갇혀서 프로그램 중심으로 운용되는 개(個)교회주의에 사로잡혀있다는 데서 찾는다.

(2) 셀 운동은 전통교회에서는 목회자가 불신자에 대하여는 무관심하고 교회에서 왕처럼 군림하며, 평신도는 교제에 결핍되고 사명감이 없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3) 셀 운동은 전통적인 교회에서는 성령의 은사를 체험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성령의 직접적인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없다고 말한다.

(4) 셀 운동은 전통교회의 문제점이 교인들은 자기들끼리 모이는 모임에는 열심이지만 불신자들에게 현실적으로 관심을 끄는 전도를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2) 신약교회를 지향한다고 함5)

(1) 셀 운동은 신약교회는 하나님의 집으로서 벽돌로 만든 건물이 아니라 성도들의 삶이 어우러진 건물이기 때문에 긴밀한 유대관계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2) 셀 운동은 신약교회가 사람의 신체와 같으므로 신자들은 자기의 기능을 담당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3) 셀 운동은 신약교회를 인간의 가치가 형성되고 불신자가 접근하기 용이한 가정교회로 이해한다6).


2. 셀 운동의 문제점


  이제 요점적으로 셀 운동의 문제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셀 운동의 문제점은 신약성경적으로, 교회사와 교회론적인 측면에서 다음과 같이 제시할 수 있다.


1) 신약성경에 비추어 본 셀 운동의 문제점


(1) 신약성경에 비추어 볼 때 셀 운동이 교회를 묘사하기 위하여 셀 (세포)이란 용어를 선택한 것은 잘못이다7). 신약성경은 교회를 설명하기 위하여 한번도 셀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신약성경은 교회를 셀처럼 미세한 조직으로 설명하지 않고 분명한 형체를 가지는 것으로 제시한다8). 셀 그 자체는 인격이 아니라는 점에서 교회를 인격적인 개념으로 설명하는 신약성경의 교회관에 셀 운동은 적합하지 못하다. 셀은 신자가 불신자를 받아들여 번식하는 것과 같이 이질적인 요소를 받아들여 번식하지는 않기 때문에 셀을 전도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은 옳지 않다9).

(2) 신약성경의 교회는 질서를 존중하며 조직을 형성하는 교회였다10).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을 세우시고 (마 10:24) 그들로 하여금 교회의 터가 되게 하시고 (엡 2:20)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치리하는 권세를 부여하셨다 (마 16:13-20). 사도들은 복음을 전하며 지역교회들을 세우고 교회를 목회할 감독 혹은 장로를 세웠다 (행 4:23; 딤전 3:1-16). 예루살렘 교회는 성장함에 따라 가르치는 직분자들 (목사)과 봉사하는 직분자들 (집사)을 택하여 세웠다 (행 6:1-6; 엡 4:11). 사도행전에 따르면 봉사자로 세움을 받은 자들도 역시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종사한다 (행 7:2이하; 8:26이하).

(3) 사도 바울은 가르치며 복음을 전하는 사도와 설교자를 비롯한 모든 직분자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섬기며 세우는 자라고 생각한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섬기며 세우는 자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에 따라 (고전 12:4-6) 다양함을 말하며11) 각양 은사는 교회를 세우는 일에 유익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고전 12:7). 사도 바울은 각양 은사를 받은 이들 가운데는 말씀을 가르침으로써 교회를 다스리고 이끌어 가는 설교자의 직분이 있고, 치리에 참여하거나 가난한 자를 돌보는 일에 참여하는 봉사자의 직분이 있다고 말한다 (딤전 5:17). 지역교회에서 말씀을 가르치며 다스리는 직분자가 장로인데 사도 바울은 그들을 감독이라고 불렀다 (딤전 3:1; 딛 1:5). 장로는 지도자라는 뜻의 전통적인 명칭인데 사도 바울은 그 직능을 강조하여 감독이라고 부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2) 교회사적 및 교회론적으로 본 셀 운동의 문제점


  교회 공동체를 셀이라는 개념의 독립적인 목회 공동체로 세분하는 것은 신약성경 뿐 아니라 교회의 역사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생소한 개념이다12).


(1) 2세기에 이르러 감독은 장로 위에 부상하는 직분으로 구분된다. 그러면서 교회의 치리제도는 감독제로 발전한다. 그리고 감독제도의 교회는 교계주의의 교황교회로 발전한다. 교황주의 교회는 교황 한 사람이 종신토록 절대적인 치리권을 가지며, 교회의 구조는 교직자와 평신도로 이루어진 이층 구조를 가진다.

(2) 16세기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교계주의 (Hierarchy)와 교황주의 교회를 반대하는 가운데 다양한 구조를 가진 교회가 출현하였다. 첫째로 감독이 상당한 치리권을 가지고 감독구 내의 교구들을 통괄하는 감독교회, 둘째로 한 사람이 치리권을 독점적으로 가지는 감독제를 지양하고 목사들의 회 혹은 장도들도 참여하는 노회가 감독을 대신하게 하는 장로교회, 셋째로 지역교회 혹은 개교회에 역점을 두는 회중교회, 주로 신령주의 신학을 배경으로 하는 그룹들이 제도적인 교회의 목사직분을 인정하지 않고 평신도가 교회를 이끌어가게 하는 반제도적인 교회이다.

(3) 교회를 셀로 세분화하여 셀에 속한 교인 가운데 한 사람을 목회자로 세우는 셀 운동은 반제도적인 교회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셀 운동이 성장하지 않는 셀을 폐쇄하는 것13)은 교회공동체나 교인이 인격체임을 고려하지 않고 성장을 위한 조직으로만 생각하는 위험한 발상이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성장을 위하여 교인들을 조직에 예속된 존재로 간주하는 것은 옳지 않다. 교회 공동체의 지체들은 교회성장을 위한 세포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전으로 함께 지어져 가도록 부르심을 받아 함께 성화를 이루어가는 성도들이다.

(4) 교회사적으로 볼 때 말씀을 가르치는 목회자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불러 훈련하여 세운 직분자이기 때문에 전문적으로 신학수업을 받지 않은 사람들에게 독자적으로 목회를 하게 하는 일과 성례를 집행하게 하는 것은 옳지 않다.

(5) 셀 운동은 평신도에게 사역의 권한을 신장하기 위하여 만인제사장설과 성령은사의 보편성을 근거로 제시한다14). 그러나 루터나 칼빈은 만인제사장설을 주장하면서 결코 교회의 질서를 무시하거나 일반성도들과 사역자들 사이의 구분을 없애지 않았다. 만인제사장설의 초점은 그리스도의 공로로 우리가 직접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지 직분의 구별이 없어졌다는 것이 아니다. 만인제사장설은 교회론적인 차원에서보다 구원론적인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6) 은사와 직분은 병행하는 것이다15). 목사에게는 단지 직책만이 아니라 그것에 합당한 은사도 주어진 것이다. 목사로서 은사를 받은 사람만이 목사의 직분을 감당할 수 있다. 일반성도의 역할은 목사의 역할까지 맡아서 하는 것이 아니다. 일반성도들도 은사를 따라 주어진 직분을 감당하는 것이다. 또한 일반성도의 은사와 직분이 무시되거나 경시되어서는 안된다.

(7) 셀 운동은 왜곡된 교회관을 보여준다. 교회는 우리 주님이 친히 세우셨고 (마 16:18),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셨고 (행 20:28),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택하시고 예정하신 그의 백성들로 이루어졌고 (엡 1:4; 5:27), 하나님께서 어두운데서 불러낸 백성들로 이루어졌다 (벧전 2:9). 즉 교회는 단순히 인간이 세우고 인간이 사람들을 불러모으고 인간의 방법으로 움직여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로 말미암아 세워졌고 성령의 역사로 움직여지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자라가야 한다 (엡 4:15). 이것은 그의 몸인 지체들의 연락과 상합이 전제된다 (엡 4:16). 즉 성도들의 성화와 자람과 양육과 교제 등이 전제된다는 것이다. 이 일을 위해 주님께서 각 사람에게 각양 은사를 주고 교회에 직분자들을 두신 것이다. 이렇게 교회가 자라가야 한다는 것은 교회에 각양 다른 모델과 파라다임이 도입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비록 교회가 충만한데 이르기까지 자라가야 한다고 해서 그 자람을 위해 아무 모델이나 파라다임을 도입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교회의 기초는 주님 자신과 그의 사역인 것이다. 그리고 사도들과 선지자 위에, 즉 말씀 위에 세워진 것이다 (엡 2:20). 그러므로 어떤 모델이나 파라다임을 도입할 때는 반드시 주님의 구속 사역과 말씀에 부합되어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택하시고 예정하신 그의 백성들로 구성된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아니된다. 교회 안에 알곡과 가라지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 지상 교회는 완전할 수 없다는 것, 교회는 계속 성결되어야 한다는 것도 하나님의 주권에 달린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셀 운동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이루신 일보다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에 초점을 두고 있다. 교회의 근본적인 정체성을 간과한 채 외형적이고 방법론적이고 인위적인 현상과 형태에만 초점을 두고 있다. 이러한 셀 운동의 교회상은 하나님의 예정적이고 주권적인 역사와 그리스도의 구속사적 의미를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셀 운동의 교회 모델은 극히 알미니안적이고 인간적인 모델인 것이다. 혹 셀 운동이 주장하는 방법론은 어떤 인간적인 효과가 있고 인간적인 동정을 받을 수 있을 지 몰라도 그 교회관은 성경적이지 못하다. 사실 교회의 성장이나 자람에 있어서도 그리스도의 구원의 완성위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 교회의 전도, 교육, 교제, 예배, 성례, 말씀 선포 등이 결코 인위적으로 되어질 것이 아니다. 그 뒤에 성령님을 통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가 있어야 하는 것이고 그 밑에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의 완성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셀 운동은 이런 근본적이고 기초적인 교회의 정체성을 무시한 채 어떤 인위적이고 외형적인 형태에만 관심을 두고 있다. 그들의 인위적이고 외형적인 관점을 갖고서는 혹 기존 교회들의 문제는 파악하고 지적할 수는 있어도 교회의 구속사적인 정체성은 파악할 수 없는 것이다. 문제가 많았던 고린도 교회도 하나님의 교회임을 잊어서는 아니되는 것이다. 인간적인 문제가 교회의 정체성까지 바꾸지는 못하는 것이다. 교회의 정체성은 이미 그리스도로 완성하신 구원 역사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상 교회의 인간적인 문제들로 인해 기존 교회의 정체성도 바꿔야 한다는 셀 운동의 주장은 성경적이지 못한 것이다.


3) 실제적인 면에서 본 셀 운동의 문제점


(1) 불신자 전도와 관련하여

  불신자를 향한 하나님의 역사는 주권적이다. 하나님은 어느 형태에 매이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굳이 셀 교회 형태라야만 전도가 바로 된다고 믿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제한시키는 것이다.

① 불신자 전도에서 나타나는 셀 운동의 문제점은 무엇보다도 전통교회의 프로그램 중심 목회를 비판하면서도 셀 운동도 그 이상으로 전도 프로그램을 운용한다는 것이다16).

② 셀 운동은 불신자들이 신자의 실생활을 보고 신앙에 들어오게 된다고 믿기 때문에17) 내세에 대한 신앙을 말하는 것을 주저한다18). 따라서 셀 운동에서는 불신자에게 정확하고 균형 있게 또는 강도 있게 성경적인 복음을 제시하는 것이 결핍되어 있다.


(2) 소그룹과 관련하여

  셀 운동의 조직은 가정 (오이코스)을 모범으로 삼는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군대나 첩보대의 조직과 비슷한 인상을 준다. 셀 운동의 소그룹에서 나타나는 가장 큰 문제점은 그들의 성경교육과 관련하여 나타난다19). 셀 운동은 교회가 지적인 배움 중심의 모임이 되어서는 안되며, 그 대신에 은사들이 한 몸된 지체들 사이에 흘러가야 한다고 주장한다20). 그러나 소그룹 운동은 교회가 지향해야 할 모델이기는 하지만 말씀의 권위가 훼손되거나 혼잡케 되어서는 안된다.

  셀 운동은 소그룹의 개별화와 독립화를 방지하기 위하여 축제예배를 만든다. 그러나 축제예배에서 셀 운동의 결정적인 큰 문제점이 발견되는데 그것은 셀 운동에는 예배 개념이 무척 약화되어 있다는 것이다21). 또한 축제예배가 대형화되면 분리시키지 않을 수 없으므로 셀 운동이 그렇게 강조하는 전체 교제는 자연히 사라지고 만다22).


(3) 사역자와 평신도와 관련하여

① 셀 운동에는 프로그램과 전문목사가 없다고 주장하지만23) 사실은 단지 전통교회의 것과 성격에 있어서 차이가 있을 뿐 프로그램과 전문목사가 있다24). 셀 운동은 교회성장 이론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대형교회가 되면 다단계적인 조직 (피라미드 구조)으로 교회를 운영하게 된다. 이렇게 볼 때 셀 운동은 중소형교회보다는 대형교회의 체제를 돕는 것이다.

② 셀 운동은 소그룹의 평신도 지도자에게 성찬을 집례하는 권한을 수여함으로써25) 교회의 직분질서에 혼란을 일으킨다.


(4) 성령론과 관련하여 

① 셀 운동의 가장 큰 문제점 가운데 하나는 성령의 은사에 대하여 지나치게 강조하는 나머지 직접계시를 주장하는 매우 위험한 인상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26). 셀 운동은 은사에 강조점을 두고 있기에 기독교인의 균형 잡힌 신앙을 위하여 잃고 있는 부분들이 너무나 많다는 단점이 있다. 남미의 콜롬비아 보고타에 위치한 "국제 은사선교교회" (International Charismatic Mission)는 1983년 8명에서 출발하여 2000년에는 50만 명의 교회로 성장하였다고 증언한다27). 하나님이 모든 성도들에게 주신 은사의 활용에 있어서, 기적과 놀라운 하나님의 권능을 일치시키는 것은 매우 조심해야 할 부분이다. 특별계시의 종결을 믿는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성령의 조명과 같은 성령의 연속적인 사역에 의존하면서도, 사도적 계시, 사도적 예언, 사도적 병고침의 은사들은 종결되었다고 믿는다. 따라서, 성령의 역사하심에 있어서 믿음을 주시고 구원의 감격을 주시는 구속사적 사역을 근간으로 하지 않고, 개인의 기적적인 권능 체험에 의존하여 교회를 부흥시키려는 것은 매우 경계해야할 부분이다.

② 더 나아가서 심지어 셀 운동은 “견고한 성경적 신학은 파산한 성령을 경험하게 한다”28)고 주장함으로써 성령과 성경의 병행 및 성령과 신학의 병행을 깨뜨리는 이원론적인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기 때문에 자의로 말씀하시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로부터 듣는 것을 말씀하신다 (요 16:13). 셀 운동이 성령 또는 성령의 은사를 편중되이 강조하는 것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성경적으로 볼 때 성령 또는 성령의 활동은 삼위일체론의 범주 내에서 이해하는 것이 올바르기 때문이다 (고전 12:4-6).




결론


  위에서 간략하게 살펴본 바와 같이 셀 운동에는 인정할 수 있는 여러 가지 합리적인 내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위험한 요소가 더욱 많고 크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따라서 우리는 셀 운동에 대하여 호기심보다는 경계심을 가져야 한다.

  현재 한국 교회에서는 셀 운동이 가지고 있는 신학적인 위험성은 생각지 못하고 그들의 방법론을 무모하게 도입하는 경향이 있다. 방법론이 도입될 때는 신학까지 도입될 수가 있는 것이다. 셀 운동은 기존의 교회들로 하여금 어떤 문제 해결이나 부흥을 위해 자신들의 방법론을 채택하도록 하면서 교회관까지 도입하도록 하기 때문에 기존 교회들은 셀 운동의 전반적인 가르침을 멀리함이 바람직하다. 혹 그들의 방법론 중에 장점이 있다고 하면 생각없이 답습하기 보다는 왜 우리 교회는 그런 장점을 갖추지 못했는가를 반성하며 자신의 성경적 교회관 안에서 개선하며 새로운 방법을 도입해야 할 것이다. 단지 부흥이 안된다고 해서 무모하게 셀 운동의 방법론은 도입하는 것은 자신이 견지하던 교회관이 성경적이지 못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셀 운동은 "성공하는 기업의 여덟 가지 습관" (C. Collins & Jerry I. Porras, Built to Last: Successful Habits of Visionary Companies)이라는 경영논리와 매우 흡사한 추진력을 내적인 원리로 가지고 있는데, 교회내의 모든 다른 의견이나 비판이나 부정적인 생각을 회피하게 하고, 완전한 복종으로 이끌어 간다는 점이다.

  셀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된 목회방법론은 교인들의 수적인 증가와 외형적인 양적 성장론에만 치우치고 있으므로 경계해야할 개념들이 많다. 셀 운동은 “현실의 제도 교회는 교회의 성공을 가늠하는 ‘인원수’에 기준이 있다”29)고 비판하였다. 그러나 셀 운동도 근본적으로 Fuller 신학교의 선교학 교수인 P.Wagner 식의 교회성장이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30). 그래서 셀 운동은 외면적으로는 원활한 인격적 교회를 구가한다면서 소그룹 운동을 강조하지만 실제로는 셀 운동의 성공을 증명하기 위하여 언제나 인원수를 제시한다31).

  말씀과 기도에 의한 교회 본질적인 회복이라는 측면은 매우 약화되고, 신앙인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질적 성장의 측면 역시 소홀히 취급되고 있다. 셀 운동은 교회의 근간을 바꾸는 조직의 변화를 시도하는데, 그 이유는 교인의 수적인 증가 즉 결과에만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국 셀 운동도 그 자신이 비판한 현실의 제도 교회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만 셈이다. 물론, 초대교회부터 오늘까지 하나님의 나라는 계속해서 확장되어 왔다. 시기적으로 볼 때에, 한국 교회가 외적인 성장이 답보상태에 빠져있고, 불신자의 전도가 어려운 이때에, 셀 그룹 모델은 양적인 성장 모델로서 일순간에 유행하다가 그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금할 수 없다. 지금은 한국교회가 내적으로는 교역자들의 경건을 증진하고 성도들의 영적인 성장을 도모하면서 동시에 외적으로는 복음전도에 박차를 가해야 할 시점이다. 그러므로 정말로 바른 교회를 세우려면 성경에 묘사된 교회를 신학적으로 잘 정리하여 따라가야 할 것이다.


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이지명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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