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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Re:이야기식 설교(Narrative Preaching)--> 사랑나누기님 올린 글 다시 편집해 올립니다.

baromi 2010. 11. 6. 10:01

Ⅰ. 서 론

설교가 고정된 틀 속에 들어앉아 교훈적 명령으로 일관하는 방식을 깨뜨리지 못한 채, 인류는 또 천년을 보내고 있다. 그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인간이 자의적 틀을 만들어 전달하는 행위는 심각한 위험 수위에 도달하였다. 다행히 그때마다 설교에 대한 각성들이 힘차게 일어나 새롭고 능률적인 형태를 지속적으로 강단에 도입해왔지만 본질적 변화를 도모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이야기식 설교(narrative preaching)는 강단이 얻은 획기적인 수확이라 할 수 있다. 설교자가 명령하는 대신 성경의 내용을 그대로 가져와 이야기로 엮어줌으로써, 회중들과 함께 사건 속으로 들어가 상황을 이끌어 내고 통찰하는 방식을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갖는 즐겁고 역동적인 분위기와 함께 정선된 문학적 언어로 진지함을 더한 이 설교방법에 대해 세계의 교회들은 즉시 활발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본 글에서는 이야기식 설교의 올바른 이해를 위한 연구를 시도하고자 한다. 이야기식 설교의 등장 배경에서부터 이야기식 설교의 기능, 특성, 구성, 전달, 주요 개념, 장․단점과 실제까지 살펴보고자 한다.

 

Ⅱ. 내러티브(narrative)란 무엇인가?

우리는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이야기(narrative)에 젖어 살고 있다. 아기는 태어나면서부터 엄마나 식구들로부터 매일 매순간 이야기를 듣고 자란다. 성장하면서 매일 삶이 이야기나 동화를 듣고, 이야기 바다에서 헤엄을 치며 자란다. 이야기가 있기에 인생은 풍성해지고, 이야기가 있기에 인생은 재미가 있다. 만약 이야기가 없고 사람들 사이에서 매일 사무적인 대화나 딱딱한 진리나 명제만을 주고받는다면, 이 세상은 삭막할 것이다. 우리의 삶은 플롯(plot)이 있는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다.

 

1. 은유(metaphor)

이야기의 가장 간단한 형태는 은유(metaphor)이다. 속담도 같은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속담이나 은유는 아주 간단한 이야기로써 굉장한 내용을 전해준다. 또한 이것들은 해석을 할 필요가 없다. 은유는 은유 자체가 해석을 해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은유를 듣는 사람은 아무 설명 없이도 그게 무슨 말인지를 분명하게 알아듣는다.

 

2. 시간과 공간으로 빚어내는 예술

사실 이야기란, 학문적인 용어로 이름 짓는다면 내러티브(narrative)이다. 이 용어를 우리말로 옮기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그냥 내러티브라고 부르기로 한다.

내러티브란 무엇인가? 내러티브는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들(stories)이다. 우리가 어떤 사건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려고 할 때 시간과 공간이 주어져야 사람들은 편안함을 느낀다. 그리고 그 말을 자기 이야기로 듣게 된다. 시간과 공간이 빠진 말을 할 때, 듣는 사람들은 “밑도 끝도 없이 무슨 말이야?” 하고 되묻곤 한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 그리고 물질, 이렇게 삼차원 안에 사는 존재이다. 이런 시간과 공간 안에 어떤 이야기가 들려질 때, 듣는 사람은 상상의 날개를 펴고 이야기 속을 날기 시작한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인간이 이런 존재이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이 주어지지 않는 이야기를 들을 때는 뭔가 답답함을 느낀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시간과 공간이 주어져야만 편안함을 느끼고 자기가 들은 그대로 살고 싶은 마음이 일어난다.

러시아의 영화 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예술과 학문이란 인간이 세계를 자기 것으로 소화하는 형식인 것이며, 소위 ‘절대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에 있는 인간의 인식 형태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봉인된 시간』(왜관: 분도 출판사, 1991), p. 46. 이런 관점에서 보면 내러티브식 전달 방법도 절대 진리를 자기 것으로 소화하도록 돕는 인식 형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내러티브는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이야기이다. 즉 내러티브는 우리의 삶 자체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한한 상상이 가능하고, 많은 해석이 가능하게 된다. 그리고 자기의 상황과 비교해서 듣게 되기 때문에 이 이야기는 곧 우리의 삶이 되는 것이다.

 

3. 스토리와 내러티브

일반적으로 우리는 스토리(story)와 내러티브(narrative)를 ‘이야기’라는 똑같은 용어로 번역한다. 우리나라 말로는 다르게 번역할 표현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격히 말하면 스토리와 내러티브는 상당히 다른 뉘앙스를 지니는 용어들이다. 지금도 학자들간에는 이 두 용어를 구분 없이 사용하는 분들이 많다. 그러나 두 용어를 구별하여 사용하려고 한다.

 

(1) 스토리(story)로서의 이야기

 ‘이야기(story)'라는 단어 자체를 살펴보면, 이 말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생각한(thought)'는 것보다 훨씬 더 풍부한 의미를 가진 단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야기라는 단어는 역사(history)라는 단어와 같은 어원에서 나왔고, 과거 한때는 정확하게 동일한 의미로도 사용되기도 했다. Wayne B. Robbinson, 이연길 역, 『이야기 설교를 향한 여행』(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1998), p. 13. 웹스터 사전에 나오는 스토리에 대한 정의를 보면, “행사들이나 사건들에 관한 기술-문제의 상황과 관련이 있는 사실에 관련된 진술”이라고 쓰여 있다. ‘거짓이나 허구’와 같이 부정적 의미를 내포한 것은 일곱 번째에나 나오는 정의다. 게다가 마지막 정의는 단순히 ‘뉴스 원고나 방송 프로’이다.

이야기 설교학 분야에서는 처음엔 이야기를 가르키는 용어로써 스토리가 사용되다가 점차 내러티브로 옮겨졌다. 스토리로서의 이야기란 “아주 제한적으로 사용되는 용어로써, 수많은 문학적 양식들-신화, 비유, 무용담 등에서 나온 tale을 말하기도 한다.

 

반면 내러티브란 강연(discourse)이 될 수 있는 특별한 형태를 의미한다.” 이연길, 『이야기 설교학』(서울: 쿰란출판사, 2003), p. 26. 설교학적 의미에서 말한다면, 스토리로서의 이야기는 그 성경의 사건을 단순한 이야기체로 만들어서 성경의 내용만을 간결하게 전달하는 것을 말한다.

 

(2) 내러티브로서의 이야기

그러면 내러티브는 무엇인가? 참고로 웹스터 사전에 나타난 내러티브에 대한 정의를 찾아보자. 이 용어는 라틴어에서 온 말로써 ‘narrate'란 말은 “무엇을 알게 하기 위하여 이야기로 설명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①일어난 사건을 말로 설명하는 것, 또는 인용하는 것(to tell or recite the happenings of a story),

②스토리 텔러로서 행동하거나 역할을 하는 것(to act or function as a storyteller),

③명사로 사용될 때는 “사건의 연속으로서 이야기되어진 무엇(something that is narrated as the account of a series of events)"이라고 되어 있고, 또 다른 측면으로는 이야기하는 예술을 말하기도 한다.

 

우리나라 영한사전에는 “이야기, 사건의 전말, 경험담 등을 흥미 있게 정리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말한다”고 되어 있다.

또 내레이션(narration)이란 “위의 것들을 이야기하는 동작을 주로 가리키며 특히 그 정리 방법이나 이야기하는 방법에 중점이 있는 말이다”라고 되어 있다. Dong-a's Prime English-Korean Dictionary, 3rd Edition. Doosan Dong-a co. Ltd., p. 1520. 스토리 설교에 비하여 내러티브 설교는 본문을 마치 기자가 사건을 취재하여 사건을 재구성하는 듯 구성하여 전달하는 것을 말한다.

 

유진 로우리(Eugene L. Lowry)는 내러티브를 이렇게 설명한다. “내가 의미하는 이야기식 설교는 특정한 시간에 일어나는 사건이다. 그 사건은 불안정 상태(또는 충돌)에서 계속적인 갈등(혼란)이 지나고 극적 반전으로, 그리고 대단원의 끝으로 이어가는 이동이다.” Wayne B. Robbinson, 이연길 역, 『이야기 설교를 향한 여행』(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1998), p. 13. 이렇게 보면 로우리 교수가 말하는 내러티브로서의 이야기는 사건 자체의 이야기에다 해석자의 의견이 곁들여진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이야기(story)와 내러티브를 구별하기 위하여 ‘medicine'이란 영어 단어를 사용한다. ‘medicine'이란 단어는 단순하게 말하면 이미 제조된 병 안에 들어 있는 약 자체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다른 면에서는 의사의 처방과 제조까지를 포함하는 의미로서의 약을 의미하기도 한다.

 

약 자체를 스토리라고 한다면, 처방과 제조까지 포함하는 것을 내러티브라고 설명한다. Eugene L. Lowry, Sermon(Abingdon, 1997), p. 24. 그러므로 이야기로 설교한다고 해서 다 내러티브 설교라고 할 수도 없고 이야기가 없다고 해서 내러티브 설교가 아니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시적 표현으로 내러티브 설교를 해나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내러티브로서의 이야기는 이야기 자체에 자기의 해석과 경험을 함께 곁들여 엮는 것이라고 정의 할 수 있다.

 

4. 내러티브로서의 설교

인간의 삶은 이야기다. 삶이 이야기-여기서 이야기란 내러티브를 의미한다-라면 신앙이란 이야기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 성경이 이야기로 들려질 때 성경은 우리 가슴속으로, 그리고 우리 삶의 현장으로 들어와서 우리를 그곳으로 인도해 간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야기로 진리를 들려주셨고, 이야기로 진리를 보여 주셨다.

 

틸리 교수는 이야기 신학이 현대 신학사상에서 제기되는 세 가지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했다고 말한다.

 

첫째, 크리스천은 다른 사람들과 어떤 차이점이 크리스천을 만드는 것인지를 알아야 하는데, 크리스천의 삶의 모습들을 담고 있는 이야기들과 우리 문화 안에 나타난 다른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비교하고 대조함으로써 그 차이를 보여줄 수 있게 되었다.

 

둘째, 크리스천들은 나사렛 예수에게서 진실하게 되는 길을 찾는다. 이야기 신학은 그의 생애나 그의 의미 있는 가르침을 파괴하지도 않고(어떤 자유주의 학자들이 하는 것처럼), 또한 선택된 몇 사람의 전유물로 그를 우상화하지도 않고(어떤 보수주의자들처럼), 예수님에 대한 교리보다는 본래적인 예수의 이야기를 구성함으로써 이 두 가지 바람직하지 않은 길들을 피하게 했다.

 

셋째, 크리스천들은 과거 크리스천들의 삶을 구성하는 이야기들뿐만 아니라. 현재의 크리스천들의 삶을 재구성하는 기회를 제공하는 이야기까지도 평가할 필요가 있는데, 이야기 신학은 삶의 이야기들에 참여하고, 또 이야기를 통하여 진리의 근본을 생각하게 함으로써 진리에 이르는 길과 자유케 되는 길을 알려준다.

Terrence W. Tilley, Story Theology(Wilmington, Delaware: Michael Glazier, 1985), p. 19.

 

틸리 교수가 지적한 대로,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님을 교리화하지 않고, 단순하게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만약 교리화하고, 자기들의 해석을 들려주었다면 해석은 또 다른 해석을 필요로 하고, 그래서 논쟁은 논쟁을 낳게 되었을 것이다. 이야기로 들려준 내용은 논쟁의 여지가 없이 감동으로 받아들이게 되어진다.

 

 

Ⅲ. 내러티브의 기능

 

1. 이야기의 중요성 이야기는 인간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심적인 부분을 차지해 왔고, 의사소통을 위해 가장 널리 사용되어온 매체가 되어왔다. 이야기는 의사소통을 도와주며, 그 효과를 높여준다. 이러한 점은 일반적인 의사소통에도 적용되지만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야기는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하나님께도 중요한 요소이다.

 

하나님은 인간들의 이야기를 듣기를 원하실 뿐만 아니라, 당신의 "이야기"(The Story)를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신다. 이러한 점에서 엘리 위젤(Elie Wiesel)은 "하나님은 이야기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그러한 하나님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이제 나아가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이야기를 말하는 이야기꾼들(storytellers)이 되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이야기를 말하는 자들이다. 성경에는 이야기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구약의 대부분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다스리시며, 이스라엘이 어떻게 그 다스림 가운데서 살아가는가에 대한 이야기로 되어있다. 복음서 역시 그 대부분이 사람들과 사건들에 대한 단순한 이야기들로 되어 있으며, 이야기 형태를 통해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그래디 데이비스는 복음서의 1/10이 교리에 대한 것이라면 9/10는 이야기로 되어져 있다고 주장하며, 중심 개념을 주로 이야기로 전하고 있음을 밝힌다. 예수님은 그의 설교의 대부분을 이야기로 전하셨다. 예수님의 이야기 공동체에서 성숙한 복음서 기자들 역시, 예수님의 탄생과 사역, 그리고 죽음과 부활에 대한 이야기꾼들이 되었으며, 그들은 복음의 사건을 다시 듣고 다시 말할 수 있기 위하여 복음서를 기록했고, 교회는 복음의 가장 선봉적인 이야기 공동체가 되었다. 교회는 함께 모여 성만찬을 행하며 주님의 행하심과 그의 주신 말씀들을 다시 되뇌이는 이야기 공동체였다.

 

이렇듯이 성경에서 사용되고 있는 언어는 이야기 형태를 가졌으며, 교회는 이야기 공동체였다. 이야기 형태를 통해, 즉 복음을 이야기하는 것을 통해서 오늘도 그리스도는 현존하신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이야기는 하나님의 진리의 세계를 드러내고,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에 있어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는 중요한 자원일 뿐만 아니라 설교를 가능하게 해주는 요소이다.

 

2. 이야기가 갖는 힘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간단한 이야기 형태를 은유(metaphor)라고 한다.

은유란 말은 ‘메타포’라는 헬라어의 번역인데, 메타포는 ‘메타(meta, 건너편에, 건너와서)’와 ‘페레인(perein, 운반하다)’의 합성어이다. 즉 은유란 ‘건너편으로 운반하다’는 뜻으로써, 서로 무관한 두 사물을 말을 통해 운반하여 결합시켜 전혀 새로운 어떤 것을 창조하는 기능을 말한다. 틸리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메타포는 의미를 전달하는 기관차이다.

그것은 통찰력을 이 장소에서 저 장소로 운송해 준다. 또 아이디어들을 안정된 도시로 모이게 하고, 새로운 도착을 알리기 위해 경적을 울리고, 시민들을 놀라게 하려고 불빛을 비추기도 한다.......가장 파워풀한 메타포는 영원히 살아 움직인다. 그것은 결코 죽지 않는다.” Terrence W. Tilley, Story Theology(Wilmington, Delaware: Michael Glazier, 1985),

p. 1. 이처럼 이야기의 성격은 디트리히 리츨(Dietrich Ritschl)이 주장한 대로, “이야기는 목적을 향하여 움직임을 가진다. 이야기는 어떤 특정한 단어나 문장들에 매이지 않는 하나의 내적 계속성을 가진다.” George W. Stroup, 『The Promise of Narrative』(John Knox Press, 1981), p. 90. 이처럼 이야기가 지니는 움직임은 과거에 존재했던 무엇으로부터 앞으로 전개되어야 할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강력한 힘을 주게 된다.

 

이야기란 말의 어감은 따뜻하고 푸근한 느낌을 갖게 한다. 이 용어는 가슴 언어이기 때문에 우리의 가슴을 울릴 뿐 아니라, 또 흥미를 끈다. 아마도 우리는 태어나서부터, 아니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이야기를 듣고 자랐기 때문이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야기를 통하여 언어를 배우며 자라왔기 때문일 것이다. 여하튼 이야기는 우리에게 친밀감을 주는 용어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힘은 이야기는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을 하나로 만들어 준다는 점이다. 조지 스트럽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를 다른 사람들과 동일시하기 위해서, 또 우리가 어떤 사람이고, 왜 우리가 그런 사람으로 존재하는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역사를 해석하거나 열거하는 이야기로 말해야 한다.” George W. Stroup, 『The Promise of Narrative』(John Knox Press, 1981), p. 91. 다시 말해서 우리가 이야기로 내 이야기 또는 성경의 이야기를 전할 때, 듣는 사람은 자기의 이야기로 듣게 된다는 말이다.

 

Ⅳ. 이야기 설교의 등장 이야기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면서,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 설교는 70년대이래 현대 설교학에서는 논리적이고 명제 중심적인 전통적인 설교가 가지고 있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등장한다. 전통적인 설교는 교리를 중심으로 엮어지며, 명제를 중심으로 한 대지로 구분하여, 논리적이고 논증적인 설교의 형태를 가진다.

 

설교는 논리를 통해 성경의 교훈과 교리를 가르치고, 성경의 내용을 전수해주는 형태를 취하게 된다. 이러한 흐름속에서 설교에서는 이야기의 특성은 사라지고, 논리적인 사고가 설교의 기본적인 구조를 형성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이야기는 어떤 명제를 설명하고 예증하기 위한 예화의 차원에 머무르게 된다. 이처럼 이야기의 중요성이 새롭게 대두되고, 옛 설교 방법론과 틀들이 더 이상 효과적이지 못할 때, 설교학적인 형태와 방법론에 대한 새로운 추구는 설교를 새롭게 하고(renewal), 재구성하는데 있어(re-forming) 필수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추구들은 70년대 이후 북미 설교학계를 중심으로 "새로운 설교학 운동"(the New Homiletics)으로 나타난다.

 

현대설교학의 이러한 흐름은 전통적인 설교와는 전혀 다른 설교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추구하게 되는데, 새로운 설교의 형식(form)에 대한 추구, 청중에 대한 재이해, 설교의 전개에 있어서 귀납법적인 방법의 도입, 그리고 이야기의 재발견, 설교의 구성에 있어서 움직임의 추구, 새로운 설교의 언어활용 등과 같은 내용을 골자로 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새로운 패러다임의 추구의 중심에는 설교에 있어서 이야기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자리잡고 있었다.

 

특별히 1970년대 초 프레드 크래독(Fred B. Craddock)의 기념비적인 책 [권위없는 자처럼](As One without Authority)의 발간과 함께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된 설교의 새로운 패러다임 추구가 초창기에는 주로 거시적인 패러다임의 변환에 관심을 기울였다면 80년대에 들어서면서는 미시적인 부분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여기에서 거시적이라 함은 패러다임의 전반적인 틀에 대해서만 언급하였을뿐 어떻게 설교를 준비하고 구성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론에 대해서는 언급되지 않았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80년 초에 들어와 유진 라우리(Eugene L. Lowry)가 그의 이야기식 설교(narrative preaching) 방법론을 제시함으로써 새로운 설교 패러다임에서의 방법론적인 제시들이 선을 보이게 된다. 또한 80년대 후반에 이르러 데이빗 버트릭(David Buttrick)이 현상학적 전개식 설교 방법론(phenomenological move method)을 제시함으로써 또 다른 설교의 형태에 대한 제시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Ⅴ. 이야기식 설교의 이해

 

1. 이야기 나눔으로서의 설교의 형태

 

1) 이야기 설교 (storytelling sermon) 이야기설교는 리차드 젠센(Richard Jensen), 에드문드 스타이믈(Edmund Steimle), 챨스 라이스(Charles Rice) 등의 설교이론에서 발견되는 내용이다. 즉 어떤 관원이 누가 우리의 이웃인가를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간단한 이야기 설교를 행하신다.

 

다윗에게 행한 나단의 설교나 하나님의 행하신 역사들을 다시 이야기하면서 복음의 메시지를 전한 사도행전의 스데반의 설교 역시 이러한 설교의 범주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설교는 전개 형태에 있어서는 귀납적인 형태를 가지지만 귀납적 설교와 다른 것은 이 설교는 등장인물(character), 배경(setting), 장면(state), 줄거리(plot) 등의 요소를 통해 구성된다. 이러한 설교는 전혀 다른 형태이기는 하지만 그 골격에 있어서는 데이빗 버트릭(David Buttrick)이 제시한 전개식 설교(phenomenological move sermon)와 루시 로오즈(Lucy Rose)에 의해서 이야기로 구성되는 대화설교(conversational episodial preaching) 형태로 발전된다.

 

2) 이야기식 설교 (설화체 설교, narrative preaching) 이야기식 설교는 일반적으로 플랏(plot)을 통한 설교 구성으로 특징지어진다. 모순 혹은 불일치로부터 시작하여 그것이 심화되어지고, 극적인 전환을 통해 문제의 해결로 이어지는 극적 구성을 가진다. 이러한 설교 형태를 제시한 대표적인 학자로는 유진 라우리(Eugene L. Lowry)를 들 수 있을 것이다.

 

3) 두 방법론이 가지는 특징 두 설교 방법론을 어떤 확실한 방법론적인 특징을 통해서 구분 짓기는 쉽지 않지만, 광의적인 측면에서 볼 때, 후자(이야기식 설교 또는 설화체 설교)가 전자(이야기 설교)의 범주에 속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루시 로오즈는 이 두 방법론을 구분하기를 "이야기 설교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을 통해 행해지는 설교라면, 설화체 설교(narrative preaching)는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요소들을 통해 플롯의 구성을 가진 설교의 형태라고 구분한다.

 

전자는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사건 혹은 장면 중심으로 전개해 나가는 방식이라면, 후자는 보다 기계적인 구조-문제점 도출로부터 심화의 단계를 거쳐 문제 해결의-로 나아가는 형태를 통해 설교가 구성되는 특징을 가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토마스 롱(Thomas G. Long)은 후자의 형태를 "문제해결식 설교 방법"으로 명명한다. 전자는 설교의 구성에 있어서 설교자에게 설교 디자인에 대한 유연성 혹은 자유스러움을 부여하고 있다면, 후자의 경우에는 보다 엄격한 틀과 치밀한 구성을 고집한다.

 

이 두 방법론이 가지는 공통적인 특징은

첫째로, 이야기가 가지는 특성들을 중심으로 설교가 구성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야기는 듣는 청중들로 하여금 말씀의 체험(혹은 경험)이 가능하게 해주는 요소이다. 이것을 크라이테스는 "경험을 불러일으키는 이야기의 특성"이라고 지칭한다. 설교는 이러한 이야기의 특성을 바탕으로 하여 구성되며, 청중들이 말씀을 경험하게 하는 데에 그 초점을 둔다.

 

둘째는 설교는 움직임(movement)을 통해 진행되어 가는데, 설교의 결론적인 내용은 전략적으로 연기되면서 설교는 연결되는 줄거리를 통해 계속적으로 진행되어 가다가 마지막 부분에서 "아하!"의 탄성이 터져 나올 수 있도록 만드는 설교 구성을 꾀한다는 점이다. 셋째로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 설교의 진행은 결국 두 세계를 오가며 이루어지는데, 성경의 이야기(The Story)와 공유하는 개인적인 경험을 중심으로 한 우리의 이야기(stories)에 대한 해석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이야기 설교는 단순하게 성경의 사건만을 진술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을 통해서 오늘의 삶의 상황을 조명하며, 청중들의 삶의 상황과 경험을 통하여 성경을 보게된다. 그러므로 설교에서의 말씀의 적용은 성경과 삶의 상황 사이를 오고가는 것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게 된다.

 

2. 이야기식 설교의 여러 가지 형태 이야기식 설교에서 정해진 형태는 없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소설이나 수필에서 그것들을 규정하는 큰 틀이 있지만 작가에 따라서 그 형태가 다 달라지는 것과 같다. 어떤 면에서 이야기식 설교는 정해진 형태를 탈피하여 자기가 좋아하는 형태로 말해야 한다고 권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야기식 설교를 처음 시도해 보려는 사람이나 목회자들을 위해서 유진 로우리 교수가 말하는 네 가지 기법을 소개하려고 한다.

 

1) 본문 이야기를 그대로 따르기(Running the Story) 이것은 이야기식 설교(Storytelling)라는 최초 방식에서 한 단계 발전한 방식이라 할 수 있는데 이야기가 들어 있는 본문을 택해 기록된 사건을 있는 그대로 전개해 나가는 것이 처음 방식이었다면 이 방식은 화자가 해석 진단 평가를 겸해 가면서 이야기를 진행시킨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 방식으로 설교하려면 먼저 이야기가 있는 본문을 택해야 하며 그 이야기로부터 핵심 메시지가 무엇인가를 추출해 내야 한다.

 

그런 다음 본문에 나와 있는 이야기를 차례대로 진행시키되 상상력을 통해 행간을 읽어냄으로 그 사건을 마치 그림을 그리듯 회중에게 그대로 전달함으로 사건을 함께 경험하도록 한다. 하지만 단지 성경이 전하는 본문의 사건을 진행시키는 것만이 아니라 오늘의 유비되는 상황을 대입시켜 전개해 나간다. 이 과정에서 본문이 갖고 있는 사건의 갈등 구조를 극대화시키고 해석된 핵심 메시지로 해답을 주는 것이 설교의 근간을 이루도록 하여야 한다. 이 형태는 성경 사건의 진행 그대로를 설교로 옮겨내는 방식을 말한다. 주로 어린이 설교에 좋은 방법이지만, 때로는 어른 설교에도 가능하다. 왜냐하면 현대 교인들이 성경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성경 내용을 그리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목회자들이 해석해 준 내용에 너무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설교자가 성경 이야기를 망설이는 또 하나의 이유는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를 지루하게 어떻게 또 이야기하느냐’는 문제이다.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유진 로우리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이 성경본문을 읽고 나면 그 성경의 이야기가 꽤 복잡하고 길며 온전히 매듭이 지어졌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래서 설교자는 상황을 설명하는 자료나 현대에 맞는 실례를 들기 위하여 크게 본문 이야기로부터 떠날 필요가 없다. 거의 모든 것들이 그대로 성경이야기 자체에 포함되어 있다. 본질적으로, 성경이야기는 설교이기 때문에 설교자가 성경이야기를 시작한 후 해설이나 다른 자료를 위해 그 이야기를 잠시 떠났다가 다시 이야기의 흐름으로 되돌아가는 방식과 비교할 때, 이 방식의 설교의 전달은 쉽다.” Eugene L. Lowry, How to Preach a Parable, (Abingdon, 1989), p. 42.

 

2) 본문 이야기를 지연시키기(Delaying the Story) 이것은 이야기가 있는 본문을 선택하지만 설교의 도입부를 본문으로 시작하지 않고 오늘을 사는 현대인의 상황으로부터 시작하여 본문으로 옮아가는 방식을 취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처음 상황으로부터 시작할 때 문제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부각시켜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 다음 본문의 이야기를 전체적으로 한번 다루어 주면서(스토리텔링) 도입부에서 제기한 문제를 본문으로부터 다시 한 번 추출해 내도록 한다.

 

그런 다음 이 문제를 숙성시키는 과정이 필요하다. 즉 갈등과 문제를 심화시키는 과정인데 이것은 주로 본문에 대한 이야기를 상세하게 가져가는 방법을 통해 혹은 또 다른 본문이나 오늘의 상황을 통해 가능하다. 그런 다음 설교의 핵심 메시지를 던져 주고 이것을 다른 본문 혹은 예화를 통해 두세 번에 걸쳐 재 강조해 준 다음 다시 간략한 정언적 정리로 끝맺도록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메시지는 결코 길게 가져가서는 안되며 한 단락 정도(6-7문장)에 머물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그런 다음 다른 성경이나 예화 등 자료의 변화를 시도해 이 메시지를 다른 각도에서 제삼 제사 취급해 줌으로 설교의 지리함을 극복하도록 하여야 한다. 시간적으로 메시지가 나오는 것은 설교의 70% 정도가 지나간 시점이기 때문에 자칫 회중의 집중력이 이완될 수 있다. 따라서 어느 한 소재로 지루하게 끌고 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물론 일차적으로 설교는 그 메시지가 얼마만큼 구태의연함을 벗어나는가가 설교의 성패를 좌우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그 운용을 어떻게 가져가는가 하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한데, 특히 이 시점의 운용여부가 하나의 관건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3) 본문 이야기를 중단시키기(Suspending the Story) 이것은 이야기가 있는 본문을 택해 설교의 도입을 본문에 대한 이야기로(스토리텔링) 시작하여 오늘의 회중의 상황으로 연결시킨 뒤 다시 핵심적인 메시지를 본문으로부터 추출해 내는 방식이다. 엄밀히 말하면 스토리 보류 방식의 역순이라 할 수 있는데 처음 도입부에서 성경 본문을 상세히 다루되, 관찰식, 진단식 진행을 통해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부각시키는 데 주력하도록 한다. 그런 다음 오늘의 회중이 살아가는 상황을 취급하면서 본문에서 도출한 문제점과 동일한 것들을 회중의 상황 속에서 추출해 내도록 한다. 이어서 도출된 문제점을 확장시키고 갈등을 성숙시키는 과정을 갖게 되는데 다른 본문이나 예화 등을 사용하면서 문제점을 심화시켜야 한다.

 

메시지의 제시는 갈등의 심화 다음에 나오게 되는데 이 때 메시지를 직접 이야기하기보다는 예화를 통해 먼저 인상 지우고 그 다음 메시지를 제시한다. 이 경우에도 메시지는 한 단락 정도로 간략하게 제시하는 것이 좋으며 다른 본문이나 예화를 통해 이 메시지를 심화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

 

4) 본문 이야기를 교체시키기(Alternating the Story) 이 방식의 특징은 앞의 세 경우와 달리 설교 본문이 이야기가 들어 있지 않은 것이라 해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가령 서신서나 예언서 등과 같이 사건이나 구체적인 이야기가 들어 있지 않은 본문을 이야기식으로 만드는 데 매우 유리한 방식이다. 스토리 전환은 하나의 주제를 중심으로 각기 다른 다양한 예화를 수시로 동원하여 설교를 진행하는데 여기에 사용되는 자료들은 성경 혹은 기타 예화를 망라한다. 예화를 수시로 동원하면서 설교를 진행시키기 때문에 설교가 아닌 예화의 진열장 식으로 비쳐질 위험이 없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런 위험을 불식시키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이 예화들을 하나로 묶어내는 주제의 명확함이다. 이 주제의 끈이 정확할 경우에만 이런 위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스토리 전환 역시 처음 도입부에서 한 단락 정도의 짧은 예화 3-6개를 동원하여 설교자가 제기하려는 문제를 집중 부각시킨다. 이 경우에도 사용되는 예화들이 점층적으로 처리되어 강도를 더해 가는 것이 좋은데 예를 들어 어려움이라는 것을 부각시키려는 경우 일상 생활의 어려움, 신체의 불편에서 오는 어려움, 가치관의 혼동에서 오는 어려움 등으로 심화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 마지막 부분에는 본문으로부터 나오는 문제를 다루도록 하며 그것을 풀어가기 위해 즉 메시지를 도출하기 위해 먼저 예화를 들어 인상을 지우고 그 다음 본문으로부터 메시지를 제시하도록 한다.

 

앞의 두 경우와 마찬가지로 메시지의 제시는 짧게 처리하되, 예화와 다른 성경을 통해 보완하도록 한다. 예화를 많이 쓰게 되면 설교의 깊이 있는 논리가 상대적으로 약해질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하여 설교자는 주제의 일관성을 유지하는데 최선을 다하여야 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네 가지 방식은 모두 공통적인 특징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설교의 도입부에서 문제 및 갈등 구조를 제시하고 설교의 후반부에서 메시지를 제시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것을 그림으로 표시하면 문제의 제기 및 메시지의 제시라는 두 개의 산봉우리를 가진 설교라 할 수 있다. 첫 번째 봉우리와 두 번째 사이에는 문제와 갈등의 심화라는 산골짜기와 산등성이가 자리잡게 되는데 얼마나 골이 깊은가 산등성이가 가파른가에 따라 설교의 메시지가 - 이것은 결국 반전을 포함할 수밖에 없다 - 그 효과를 나타낼 수 있다.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회중으로 하여금 당연한 설교가 아닌 생각하게 하는 설교가 가능하며 따라서 설교의 진행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 이야기식 설교의 장점이다.

 

3. 이야기식 설교의 특징

여기서는 젠센이 '이야기로 말하기'(Telling the story)에서 말하고 있는 것을 중심으로 해서 이야기식 설교의 그 특징적인 내용들을 다루고자 한다.

 

1) 성서의 본문이 하나의 특별한 문학형식과, 그 본문을 오늘날 재구성하는 것에 대해 중요한 암시를 지니는 내용으로 취급된다. 이 때에 성서의 문학 형식은 메시지가 전달되는 방법이고 내용은 그 메시지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 된다. 와일더는 "계시의 내용은 신비롭게도 그것이 전달되는 형식과 떨어질 수 없다"는 말을 인용하면서 본문의 형식과 내용은 서로에 대해서 쉽게 분리될 수 없음을 지적했다. 그러나 성서 연구의 역사는 주로 형식과 내용을 떨어뜨려 놓는 역사이다.

 

대부분의 성서적인 설교자들 역시 본문의 형식에서 내용을 끄집어내려고 애쓰는데에는 전문가가 되어 있다. 즉 이야기에서 대지를 얻어내고 그것을 중심으로 설교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와일더는 그러한 것이 때때로 정당한 설교학적인 실천이긴 할지라도 우리가 성서의 이야기에서 대지나 의미를 끄집어 낼 때 그 본문의 전체적인 외형을 이루고 있는 문학 형식과 내용이 한 몸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하는데 형식과 내용에 대한 와일더의 이론은 수많은 성서신학자들에게 지지를 받고 있다.

 

본문이 이야기 형식으로 요지를 말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 본문의 내용과 형식에 충실한 설교를 구상하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성서의 기자들은 매우 종종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와 의사 소통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술한 바 있다. 젠센은 그렇다면 우리는 왜 우리의 설교에서 이러한 이야기들을 탈 이야기화 해 버리고 단지 이야기의 요점만을 회중에게 건네주고 말아야 하는지, 왜 우리가 지니고 있는 정상적인 설교 과정으로서의 형식에서 내용을 찢어 내버리고 말아야 하는지 묻는다. 이야기가 전혀 중요하지 않다면 왜 성서의 기자는 단도직입적으로 먼저 우리에게 요점만 말하지 않았는가? 창세기 2-3장의 기자는 왜 죄가 무엇이라고 말로 하지 않고 이야기로 했는가? 이러한 질문은 우리에게 설교에 대한 주석방법이 근본적으로 새로워질 것을 요구한다. 이제까지의 주석은 주로 내용에 대한 질문에 기울었다. 그러나 경건한 주석이란 형식과 내용 모두에 주의를 기울여야만 한다. 그래서 성서의 이미지들이 설교에서 상상적인 재구성의 과정으로 살아 있게 하는 방법은 이야기식 설교를 사용하는 것이다.

 

2) 이야기는 설교 그 자체이다. 연극이나 소설 그리고 영화나 그림 따위는 그 후기에 어떤 요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이야기도 연극이나 소설처럼 그 자체가 어떤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 완벽한 설교가 된다. 가장 발전된 형태로 되어 있는 이야기 설교는 그 자체가 설교인 것이다. 그러나 젠센이 여기서 말하는 이야기는 대지나 요점을 예증하기 위해 사용하는 이야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를 위해서 은유를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두 가지 서로 다른 사고를 나란히 취급하는 은유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커뮤니케이션에 있어서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언어사용의 일부로 은유를 유지하려는 사람들에게는 예화 은유(metaphors of illustration)와 참여 은유(metaphors of participation)가 서로 구분된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그 두 가지에 대한 이해이다. 예화 은유는 말하는 사람이 설명하고자 하는 요점을 듣는 사람이 일단 파악했을 때는 불필요한 것이다. 즉 설교자가 요점을 말했을 때 회중이 그 의미를 파악했다면 그 이후에 사용되는 예화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설교자는 설교에서 대지를 말하고 그에 대한 예증으로 예화를 사용하는 경우가 거의 전부이다. 그러나 참여은유는 이와는 아주 다른 성질을 지니고 있다. 다음의 인용은 참여은유에 대한 이해를 쉽게 해 줄 것이다. 은유는 우리들의 의식에 아주 낯설고도 아주 새로운 대상을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에 이 대상은 단지 은유 그 자체 안에서만 파악할 수 있다....은유가 완전히 새로운 세계의 모습을 지니고 있을 때 회중은 그 은유 안으로 들어가서 그 내부로부터 그것을 경험하지 않는 이상 그 은유가 주는 어떠한 정보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크로센은 이 말을 하면서 예수가 사용한 은유는 기본적으로 참여 은유였음을 확신한다. 젠센 역시 이야기라는 것은 은유의 확장이고, 따라서 이야기란 일단 요점이 전달되고 나면 쓸모 없는 상황에서 사용하는 보충 설명으로서의 이야기 즉 예화 은유가 아닌 참여 은유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크래독 역시 좋은 설교는 이와 같은 것이라고 하면서 예수의 비유설교를 예로 들어 말한다. 곧 예수는 용서와 의인의 관계를 논하고 나서 사랑이 많은 아버지와 탕자의 비유를 들어서 설명한 것이 아니라 그 비유자체가 곧 설교였고, 그것이 바로 의인과 용서에 대한 선언이었다는 것이다.

 

3) 이 설교의 목적은 회중을 복음의 이야기에 참여시키고 성취하게 하는 것이다. 이야기식 설교에 대한 전형적인 예는 나단이 다윗에게 행한 유명한 비유이다. 젠센은 이 이야기를 특히 회중으로 하여금 참여를 도출해 내는 능력의 견지에서 조명한다. 나단이 다윗 왕의 삶의 상황을 그의 짤막한 이야기 안에 던져 놓았을 때 다윗 왕은 자기 자신을 깨닫지 못하고, 그 이야기 속에 뛰어 들어가고 만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한다. "이 일을 행한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다윗왕은 그 이야기에 흠뻑 심취하여 이야기의 결말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야기는 그가 끝맺은 것이다. 즉 이야기의 완성에 참여한 것이다. 그는 그 자신에 대한 판결을 선언하고 있다. 참여는 이야기식 설교에서 가장 중요한 목적 중의 하나이다. 회중은 자기 자신의 삶에 그 이야기를 적용시키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한 회중의 반응은 설교가 반쯤 하다 말고 끝난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회중 자신이 그 이야기에 결말을 내리게 될 때 이 때 참여은유가 발생하는 것이다. 크래독에 따르면 복음을 '남의 이야기처럼 듣는' 두 가지 중요한 요소는 '거리감'(distance)과 '참여'(participation)인데 거리감은 일종의 안도감으로서 우리는 그 안도감을 가져다주는 심적인 거리를 두고 종종 우리 자신에 대한 것과 판단과 위기들에 대하여 들으면서 그 이야기에 깊이 참여하게 된다. 그래서 이야기식 설교의 목적은 경험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설교자가 시작했던 이야기를 회중 스스로 끝맺음으로써 그것을 개인적으로 자신들의 삶에 적용시킬 때 하나님의 판결과 은총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4) 이야기는 간접적인 커뮤니케이션 형태로 작용한다. 이야기식 설교는 커뮤니케이션의 방법으로 본다면 직접적인 대화형태가 아닌 간접적인 대화형태를 취한다. 크래독은 키엘케고르에게서 복음 전도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직접 대화가 아닌 간접 대화를 배웠다고 하면서 이 두 가지에 대한 키엘케고르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키엘케고르는 직접성을 정보를 전달하는 방법으로 간주하는데, 이것은 역사나 과학, 또는 관련 분야의 학문에 대해서는 아주 적절한 방법이다. 그러나 간접성은 회중의 내부에서 가능성과 행동을 도출시키는 형태로서, 이것은 그들에게 어떤 정보를 준다고 해서 생겨나는 어떤 거래 같은 것이 아니다.

 

키엘케고르가 직접 대화를 그의 주요 커뮤니케이션 방법으로 사용지 않는 몇가지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그러한 방법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에 적절하지 않다. 즉 하나님은 나사렛 예수 안에 당신을 숨기심으로써(즉 간접적으로)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하셨다.

 

둘째, 부족한 것은 정보가 아니다. 교회의 대다수 사람들은 이미 기독교 신앙에 대해 충분한 정보를 갖고 있다. 그러나 이 정보는 내적으로 전유되어 있어야 한다. 즉 이 모든 '외적인 정보'가 의미하는 것에 대한 내적인 깨달음이 요구된다. 이 깨달음과 전유는 단지 간접적으로만 도출해 낼 수 있는 것이다.

 

셋째, 회중이나 독자가 복음을 내적으로 전유하기 위해서는 '직접 내리치는'(direct thundering) 커뮤니케이션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런 방식은 매우 비생산적이다. 크래독의 '남의 이야기처럼 듣는'(overhearing) 커뮤니케이션 방법은 이러한 간접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전반적인 이론과 이해를 형성했던 키엘케고르의 방법에서 유출해 낸 것이었다.

 

이야기는 가장 간접적으로 '남의 이야기처럼 듣는 것'을 만들어 내는 커뮤니케이션 형태이다. 본문의 말이 들려질 때 회중은 그 말을 자신의 상황에서 '남의 이야기처럼 듣게' 되고 그것이 자신으로 하여금 자신의 내적인 삶에 빠져들게 할만큼 충분히 힘이 넘친다면 회중은 자신에게 강조되는 말로 이 말을 듣게 될 것이다. 이야기가 절정에 이를 때 회중은 그 이야기에 함께 있게 되는 것이다.

 

나단은 다윗 왕에게 "이 극악무도한 자여! 당신은 죄인이요, 지옥불의 심판을 당하게 될 것이오"라고 말하지 않았다. 다윗왕 자신이 무엇이 자기 자신을 향한 말인지, 완고한 선지자가 자기 자신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야기 속의 악한 왕이 바로 다윗 왕 자신을 말하는 것인지 깨닫기 전에 나단은 그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리고 이야기에 몰두하게 했다. 이것이 간접 대화의 효과인 것이다.

 

5) 이야기식 설교는 설교자가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회중이 설교에 참여하고 도취되는 것이 근본적인 목표라면 이야기식 설교가 결론을 가지지 않는 것은 불가피하다. 여기에는 단순히 결론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 결론을 내리는 사람은 회중 각자라는 것이다. 이렇게 끝이 나는 설교는 회중이 각자의 삶의 상황에 맞는 방법으로 각자가 설교를 끝맺도록 여운을 남기게 된다.

 

그러나 심하다 싶을 정도로 아무런 설명도 없이 결론도 내리지 않고 설교를 끝내거나 만약 회중이 요점을 얻지도 못하고 심지어 요점을 잘못 파악한다면 어떻게 하는가? 이에 대한 대답으로 젠센은 다음과 같은 반문을 한다. "당신은 이야기식 설교가 아닌 보통의 설교에 대해서는 회중이 요점을 파악한다고 확신하는가?" 젠센은 다른 종류의 설교에 대해서 모든 사람들이 요점을 파악한다고 생각한다면 스스로를 우롱하는 것이라고 본다.

 

이것은 비록 설교자가 설교의 요지를 분명하고 효과적으로 강조했다고 하더라도 막상 설교가 끝난 후 회중에게 설교의 요지가 무엇이냐고 물어 보면 대다수가 확실하게 대답하지 못하는 데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사람들이 자기가 들으려 하는 것만 듣고 특히 복음적인 어떤 것들에 대해서는 쉽게 듣지도 않는다는 이유를 들어 이 점을 강조한다. 이야기는 설교 그 자체이다. 따라서 설명이 있을 수 없다. 심지어 지나칠 정도로 결론이 개방된 설교는 핵심에 대해서 그것을 "파악하거나 말거나"라는 우스운 농담 한 마디처럼 여겨질 여지도 있다. 그러나 젠센은 신학적으로 성령을 이야기식 설교의 열려진 결론에 대한 유비로 본다. 즉 성령의 역사에 대한 개방성으로서 설교의 결론 없는 개방성에 대해 생각하자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젠센은 이야기식 설교의 결론 없는 개방성은 설교자가 설교하는 내용에 대한 최후의 지배를 포기한다는 의미에서 매우 위험을 무릎쓰는 것이라고 본다. 그래서 그것은 신앙적인 모험이 된다. 따라서 설교자는 그가 그 결론의 지배를 포기한 그 곳에서조차도 성령께서 움직여 나가실 것이라는 사실을 감히 믿어야 하는 것이다.

 

6) 신앙은 인식에서 인정으로 전환하는 경험에서 생긴다. 설교와 신앙은 서로 모든 면에서 관련이 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

 

설교자가 신앙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그의 설교의 스타일이나 형태가 달라질 것이다. 한편 그리스도에 대한 설교는 회중에게 생겨나는 신앙의 종류와 많은 관련이 있다. 이야기식 설교는 이 신앙이 힘이 있고 생명을 주시며 그리고 약속을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태어나는 방법에 있어서 다른 종류의 설교와 다르다. 이야기에는 전화위복이 생겨난다.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엇을 알아야만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깨닫는다. 인식이 아닌 인정이 이야기의 방법이다. 복음의 이야기는 예수 안에서 인류의 커다란 전화위복을 보여주며 그렇게 하심으로써 우리를 그 안으로 감싸 안는다. 그 이야기 속에 우리 자신이 있고 그 속에서 우리의 변화된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야기는 깨달음과 인정을 생기게 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전환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그 일어난 일이 내게도 일어났다는 굳은 믿음을 불러 일으켜 준다.

 

 

Ⅵ. 이야기식 설교의 주요 개념

 

1. 이야기식 설교의 기본 구조 이야기식 설교를 이루는 기본 구조는 내용(contents), 이동성(moving), 방향(direction), 플롯(plot)이다. 이 네 가지 요소는 이야기 설교의 생명적 요소이다.

 

1) 내용(contents) 이야기식 설교일수록 깊은 내용을 구비해야 한다. 소설가들은 선명한 주제, 구성의 완벽성, 문장의 정확도가 생명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좋은 소설을 쓰기 위해 수많은 자료를 모은다고 한다. 소설 「빙벽」을 쓰기 위하여 메모한 카드가 약 3천 장 정도였고 지금도 계속 취재, 메모중이라고 한다. 전상국, 『당신도 소설을 쓸 수 있다』(문학사상사, 1994), p. 116. 자료가 충분히 모아졌을 때, 안정된 마음으로 설교를 써 나갈 수가 있다. 설교를 신명나게 써나갈 수 있는 비결도 바로 내용을 위한 자료 준비에 있다. 이야기식 설교의 내용 중심은 성경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근본 되는 자료도 성경이다. 보화가 무한하게 담겨 있는 갯벌처럼 성경 속에는 끝도 없는 설교 자료들이 무한정 펼쳐져 있다. 그 안에 뒤지지 않고 어디서 설교 자료를 찾는다는 말인가? 성경을 파고들면 그 안에 어떤 설교를 해야 할 것인가를 보여주는 자료들은 무궁무진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경 자체를 바르고 구체적으로 전달만 해도 훌륭한 설교이다. 설교자들이 설교 내용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것은 바로 설교의 보화를 제쳐두고 다른 곳에서 설교 자료를 찾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 4:12)를 암송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전하기보다는 인간의 해석이나 생각을 더 많이 전하는 습관이 있는데, 이것은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성경 이외의 이야기(non-biblical stories)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들은 그 이야기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언제나 텍스트를 도와주는 한에서 사용할 수 있다. 많은 분들이 이야기 설교에 대하여 생각할 때, 아무 이야기들이나 연결시켜 재미있게 꾸민 설교인 것처럼 착각하는데 이것은 심히 유감스런 일이다. 많은 설교자들이 이야기식 설교를 시도하는 것을 보면, 내용이 빈약하고 깊이가 없는 이야기들을 나열하는 데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성경 본문을 깊이 읽고 연구하면 본문 자체 안에 무엇을 말할 것인가도 다 들어 있고, 어떻게 전달해야 할지 전달 수단까지도 제시해 준다. 그러나 성경만으로는 효과 있게 전달하는데 부족을 느낄 것이다. 교회에는 다양한 환경과 경험을 가진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기 때문에 성경 말씀을 전달하는 데도 많은 툴(tool)이 필요하다.

 

2) 이동성(moving) 그 동안의 설교는 어떤 명제적 진리를 설명하거나 가르치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동성이 거의 없이 정체된 감을 느끼게 했다. 3대지 설교를 보면 ‘한 구절 한 구절로써는 훌륭한데, 전체적인 맥락에서는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잘 모르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결국 이동성에서 문제가 있었다는 말이다. 소설이나 수필의 생명은 이동성이다. 깊이 있고 자세하게 사건을 묘사해 나가면서도 시원하게 전개되는 스토리에 독자는 매혹된다. 사건을 묘사하는 미사여구는 훌륭한데, 이야기의 전개가 너무 느리면 웬만한 인내심을 가진 독자는 책장을 앞으로 넘겨 버리고 말 것이다. 이동성이 중요한 것은 시간과 공간 개념이다. 명제적 진리를 말할 때 지루하게 느껴지는 것은 시간과 공간 개념을 그 안에 들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 개념을 집어 넣으면 글은 움직이게 되어 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나 신약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항상 시간과 공간이 있으므로 강한 움직임이 들어 있다.

 

3) 방향(direction) 설교의 목표를 분명히 하라. 중요한 것은 설교의 방향이다. 이야기 설교의 특성이 이동성이라면 “어디로 옮겨가야 하는가?”하는 점은 대단히 중요하다. 목적이 분명하지 못하면 설교가 바르게 옮겨가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설교에 있어서 목표는 몇 개나 되어야 하는가? 설교에서 목표는 하나여야 한다. 그 목표를 향하여 가는 동안 많은 교훈을 이야기할 수는 있다. 그렇지만 그런 것들은 목표를 향해 가는 동안 부수적으로 얻어지는 것이지, 그것이 목적이 될 수는 없다. 여기서 부수적이란 말을 썼지만, 진리에 있어서 부수적인 것이 있고 본질적인 것이 있는 건 아니듯이 부수적으로 얻어지는 진리도 완전한 진리인 것만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설교를 이끌어 가는 목표는 하나여야 한다는 점이다. 릭 워렌은 설교의 결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낚시하러 가서, 낚시대를 들어올리지도 않고 그물을 걷어들이지도 않는다.” 릭 워렌, 김현희/박경범 역, 『새들백교회 이야기』(도서출판 디모데, 1996), p. 337. 물론 이 말은 결론에서 결단하도록 요구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말이지만, 결론의 명료성에 대해서도 말하는 대목이다.

 

설교의 방향에 명심해야 할 5가지 원칙이 있다.

(1) 설교의 중심을 분명히 잡아 내용이 산만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2) 설교를 한 방향으로 박진감 있게 진행하여야 한다.

(3) 처음과 끝이 달라지지 않도록 일관성 있게 내용을 전개해야 한다.

(4) 지루한 내용이 되지 않도록 꼭 필요한 이야기만을 넣도록 해야 한다.

(5) 설교를 들은 교인들로 하여금 반드시 행동으로 옮기도록 해야 한다.

 

목표가 여럿이라면 설교는 방향을 잃고 혼미 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이야기 설교는 말을 많이 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야기 설교일수록 함축적인 용어를 써서 긴장감을 주어야 한다. 설교에 긴장감을 주면서 목표를 향하여 시원스럽게 전개해 나가기 위해서도 목표는 분명해야 한다. 보통 목표를 정할 때, 한 문장으로 쓸 수 있어야 한다. 그만큼 목표가 분명해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4) 플롯(plot) 소설 구성의 핵은 갈등에 있다. 전상국, 『당신도 소설을 쓸 수 있다』(문학사상사, 1994), p. 126. 본문 구성에 있어서 갈등까지를 포함하는 개념을 여기서 플롯이란 용어로 표현하려고 한다. 구성에 있어서 갈등 구조는 이동성이 없이는 구성될 수 없는 성격을 가진다. 내용에 극적인 전환을 만들어 주고, 절정을 향해 집중적으로 치닫게 해주는 것이 플롯이라면, 여기의 생명은 이동성이다. 설교에서 플롯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설교 내용을 작성할 때, 단순한 구성을 넘어서 문장을 극적으로 반전시켜 주거나 문장 자체에 흥미를 넣어주어, 청중들이 긴장감을 가지고 따라오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2. 이야기식 설교와 플롯 이야기식 설교에서 플롯은 매우 중요한 개념이어서 계속해서 좀더 구체적으로 다루려고 한다.

 

1) 이야기는 플롯을 가진다. 피터 블룩스는 플롯의 의미를 “한 연출가가 연극이 끝났을 때 남겨지는 기억”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 사건은 하나의 개요, 취향, 흔적, 냄새가 있는 한편의 그림으로 기억 속에 각인되어 졌다.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은 그 연극의 중심 이미지, 곧 실루엣이다. 만일 연극의 의미가 될 것이고, 말해야 하는 핵심 요소가 될 것이다. 수년이 지난 후, 한 가지 뚜렷한 연극적 경험을 회고해 볼 때, 나는 나의 기억 속에 한 가지 핵심이 되는 것이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한다. 나무 아래에 서있던 두 명의 방랑자와 짐수레를 끌고 가던 한 늙은 여인, 춤추고 있던 하사관 한 사람, 지옥의 소파에 앉아 있던 세 사람-혹은 때때로 형상보다 더 깊은 흔적이다. 나는 그 의미를 정확히 기억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갖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요점으로부터 일련의 의미들을 재구성할 수는 있다” Peter Brooks, The Empty Space(New York: Avon, 1968), p. 124.

 

또한 영국의 문학 비평가이자 소설가인 포스터는 단순한 이야기와 플롯이 있는 이야기의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우리는 이야기(narrative)를 시간의 순서에 따라서 배열된 사건들의 이야기(story)로 정의해 왔다. 구성(plot) 또한 사건들의 이야기지만, 그 강조점은 인과 관계에 있다는 점이 다르다. ‘그 왕이 죽었고, 이어서 그 여왕도 슬픔을 이기지 못해 죽었다.’는 진술은 플롯이다. 이야기는 그 다음에 일어난 사건에 대해서 대답한다. 반면에 플롯은 그 사건의 이유를 말해준다.” E.M. Forster, Aspects of the Novel(1927: reprint, Harmondsworth, Eng.: Penguin Books, 1962), pp. 93-95. 유진 로우리의 말대로, 청중은 본질적인 부분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오히려 관심을 갖는 것은 “문제에서 그 모순을 해결점으로 옮겨가는 전이 과정”이다. 마찬가지로 설교에 있어서도 문제점에서 해결로, 가려움에서 긁어줌으로 옮겨지는 연결고리가 설교의 형태를 만들어 가는 것이지, 결코 성서적 내용이나 역사적, 교훈적, 혹은 윤리적인 내용이 이야기를 끌어가는 것이 아니다. Eugene L. Lowry, 이연길 역, 『이야기식 설교구성』(한국장로교출판사, 1996), p. 35.

이처럼 플롯은 곧 이야기의 생명이다. 소설을 읽을 때나 영화를 볼 때 플롯이 없으면 재미를 잃을 뿐만 아니라, 영화에서 주려고 하는 교훈을 오래 기억할 수 없다. 그렇다면 소설을 읽거나 영화를 보는 이유는 바로 그 플롯이 주는 재미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하물며 설교에서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2) 성경 이야기에도 플롯이 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플롯으로 말씀하신다. 말씀하시는 것은 모두가 플롯을 지닌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들의 생각이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유대인을 도운 것도 유대 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는 왜 자기네를 짐승 취급하는 유대인을 도우려고 했을까? 이것은 이 본문이 가장 중요한 플롯이다. 나사로가 병들었다고 하는데도 주님은 그가 죽을 때까지 기다린 것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것이 플롯이다.

 

이것을 보면 주님의 행동 모두가 우리 보기에는 플롯의 성격을 지닌다. 누가복음 17장에서 “믿음을 더하소서”하고 주님께 청한 제자들의 말에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부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고 한 주님의 대답도 플롯의 성격을 지닌다. 이처럼 플롯은 대체적으로 문장이 갑자기 비약하거나 논리적 모순을 일으키는 곳, 또는 일상성의 모순 등에서 나타난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세히 들어다보면 그 문장의 플롯이 있는 곳에 바로 하나님(예수님)이 전하시려고 하는 진리가 있다. 따라서 플롯을 놓쳐 버리고 성경을 이해한다면 그 말씀 속에 감춰져 있는 진리를 놓치게 된다. 이만큼 성경 안에 플롯은 중요하다.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 성서연구 분야의 책임자로 있었던 시몬 바르 에프라트 교수는 성경의 플롯을 이처럼 설명한다. “많은 경우에 성경 이야기(biblical narratives)의 플롯은 아이러니컬한 상황을 만들어내는 방법으로 이뤄진다. 이것을 극적 아이러니(dramatic irony)라고 하는데, 이는 독자는 알고 있는데 등장인물은 잘 모르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일어난다. 또 등장인물이 최고의 관심사가 아닌 것들을 무의식적으로 하는 경우나 사건의 진행이 등장인물이 열망과는 반대되는 결과로 진행되는 것으로부터 일어난다. 아이러니는 때로는 사건 안에서 나타나기도 하고, 때로는 등장인물의 말로써 표현되기도 한다. 하지만 말로 나타내어졌다고 할지라도 여기서는 말이 아이러니(verbal irony)는 취급하지 않으려고 한다. 극적인 아이러니는 여러 가지 기능을 가지는데, 말하자면 비판을 하거나 충격적인 사건을 강조하거나 비극적인 상황을 강조하는 것들이다. 또한 극적 아이러니는 때로는 정의가 세상을 다스리고, 모든 사람들은 상응하는 대가를 받는다는 견해를 전달하는 수단으로도 쓰여지는데, 이런 것은 등장인물이 가진 편견과는 대조되는 것이다.“ Shimon Bar-Efrat, Narrative Art in the Bible(Sheffield Academic Press, 1984), p. 125.

 

성경 자체가 플롯을 지니고 있어서 재미있게 읽도록 되어 있는데, 설교자들은 성경 속의 흥미 있는 요소들 다 제거하고 재미없게 전달하기에 전념해 왔다. 그리고 그것을 바른 설교라고 자랑해 왔다. 이제는 성경을 성경 되게 해야 한다. 그것은 성경 자체가 지니고 있는, 듣는 사람에게 감화를 주고, 즐겁게 듣고 또 변화하게 하는 능력 있는 말씀을 능력 있게 전달해야 한다. 찰스 스윈돌 목사는 새들백교회 목사인 릭 워렉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고 한다. “헬라어나 히브리어 단어 연구를 설교에서 너무 많이 사용하는 것은 영어 성경에 대한 신뢰를 떨어지게 만든다.” 릭 워렌, 김현희/박경범 역, 『새들백교회 이야기』(도서출판 디모데, 1996), p. 263.

 

비록 번역본이지만 영어 성경의 권위를 세워가며, 말씀을 말씀되게 전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믿는다. 플롯이 무엇인가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1) 플롯은 설교의 형태나 내용의 구성을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2) 플롯은 전개하려고 하는 설교의 머리와 꼬리를 결정짓는 요소이다.

(3) 플롯을 중심으로 하여 이야기가 전개된다. 다시 말하면 플롯은 이야기의 핵심이다.

(4) 이야기를 가장 재미있고 스릴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 플롯이다.

(5) 성경 저자가 핵심적인 복음을 제시하고자 하는 중심에 플롯이 있다.

 

3) 이야기식 설교의 구성 구성(plot)은 이야기의 움직임을 보여주는 구조로써 결정적인 처리나 분투 또는 결과를 내다볼 수 있는 변화로 표현된다. 로우리는 구성을 "모순(disequilibrium)에서 해결로 나아가는 지속적인 긴장감의 움직임"으로 정의한다. 이야기식 설교는 모순으로 시작해서, 갈등의 상승을 통해 놀라운 반전과 함께 대단원의 결말로 나아가는 움직임으로서의 전개이다. 모든 구성은 이러한 움직임으로서의 전개와 긴장의 해제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로우리에게 있어서는 회중의 편에서 "느껴지는 어떤 필요"가 -그것이 성서의 본문이나 신학적인 교리에서 나온 것이든 혹은 삶의 상황으로부터 나온 것이든지 간에- 설교를 구성하는 과제로서의 역할을 한다. 설교는 반드시 이 문제 다시 말해 딜레마를 서술함으로써 시작되어야 하며 회중이 "혼동을 일으키는 모호함"을 경험하고 그것에 대한 해결책이 무엇인지 찾을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고 그는 믿고 있다. 그리고 그는 설교가 이러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하여 어떻게 형성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특별한 논증을 제시한다.

 

그는 이야기식 설교는 다섯 가지의 기본적임 움직임(momevent) 혹은 단계를 가진다고 본다. 여기서 제시되는 다섯 단계에 대해서 그러한 단계를 기억하는데 도움을 주는 감탄사를 소개한다. 먼저 그 다섯 단계와 감탄사를 연결해서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갈등을 찾아라: Oops(놀랄 때 하는 소리, 아이구 저런!)

(2) 갈등을 분석하라: Ugh(두려워서 놀랄 때 하는 소리, 악!)

(3) 해결의 실마리를 드러내라: Aha(무언가를 알았을 때, 아하!)

(4) 복음을 제시하라: Whee(기쁘거나 흥분할 때, 와아!)

(5) 결과를 기대하라: Yeah(환호를 지르면서, 예에!)

 

이제 이 다섯 단계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보자

(1) 갈등을 찾아라(Upsetting the equilibrium) : 모순되는 문제를 제기함으로 평형을 깨뜨리는 단계 이 서론적인 단계에서는 설교자는 회중이 느낄 수 있는 방법으로 설교의 어떤 모호한 '문제'를 내놓는다. 이것은 이른바 회중이 설교의 주제에 참여할 수 있도록 주의력을 끄는 단계인데, 여기서 설교자의 설교는 회중이 가려워하는(궁금해하는) 부분을 공유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설교에서 구성은커녕 심지어는 서론 부분에 한 문장으로 된 개요를 집어넣도록 배워 왔다. 그 결과로 우리는 드라마가 시작되기도 전에 중앙무대로 나가서 드라마에서 하게 될 모든 중요한 포인트를 발표해 버리는 멍청한 극작가와 같은 설교자가 되는 어리석음에 빠지곤 한다.

(2) 갈등을 분석하라(Analysing the discrepancy) : 모순되는 점과 불일치를 분석하는 단계 이 단계는 로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단계인데 왜냐하면 복음의 궁극적인 선포 형태가 직접적으로 여기에 의존해 있을 뿐 아니라, 대부분의 설교의 약점 가운데 하나는 진단을 제대로 못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단계에서 설교자는 자세하게 문제를 탐구하고, 왜 그것이 인간의 경험 속에 일어나는가 하는 이유를 분명하게 하면서 그 문제를 진단한다.

(3) 해결의 실마리를 드러내라(Disclosing the clue to resolution): 문제 해결을 위해 실마리를 제시하는 단계 이 단계에서 설교자는 문제의 진정한 해답을 제시해 주는 복음으로부터 실마리를 제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호함과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은 '세상의 지혜'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복음으로부터 해결책이 주어지기 때문에 이 단계에서는 그 문제 해결에 대해서 아주 놀라운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여기에서 회중의 기대에 대해 '역전'이 되는 현상이 일어나게 되고, 이 실마리는 의문 사항을 풀어 주는 일종의 '빛을 비추는 수단'으로 다가온다.

(4) 복음을 제시하라(Experiencing the gospel): 복음을 경험하는 단계 해결의 실마리가 드러나면 이제 청중들은 복음을 경험할 준비가 되어진다. 그 이전 단계들은 이 단계를 위해서 존재한다. 모호함을 야기 시키고, 또 그 문제점들을 분석해 주면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복음이 보다 효과적으로 경험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여기에서 복음을 성급하게 제시하지 않고 연기하였다가 선언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라우리는 복음을 경험하도록 하게 하기 위해서 타이밍을 잘 맞추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전 단계에서 모호함이 적절하게 제시되고 또 문제의 실마리가 정확하게 제시된다면 복음은 명료하게 경험될 것이며, 청중들은 이 단계에서 다시 평정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라우리의 방법에서는 이 단계를 준비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2, 3단계를 준비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라우리의 최근의 저서에 의하면 이 단계는 다른 단계와 함께 주어지는 유동적인 단계로 이해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야기체 설교의 가장 핵심은 청중들로 하여금 복음을 듣게 하고, 체험하게 한다는 것이다.

(5) 결과를 예견하기(Anticipating the consequence): 결론을 기대하는 단계 이 마지막 단계에서는 복음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 미래를 향하여 투사된다. 억압에는 해방을, 불신에는 믿음을, 미움에는 사랑을 가져다주는 미래 즉 복음이 창조한 새로운 상황 곧 예전에는 내릴 수 없었던 선택을 하는 새로운 자유에 근거한 결과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대로 로우리가 말하는 이야기식 설교의 구성 단계는 형식의 다양성에 대해서 개방되어 있다. 그러나 그는 이야기식 설교 구성 형식의 목적은 삶의 상황에 관한 것이든, 교리적인 것이든, 주해식이든 설교를 하나의 이야기식 사건으로 만드는 것임을 강조하면서 성서적이든 아니든 어떤 종류의 이야기식 설교라 하더라도 먼저 그 자체가 가진 이야기식 진행과정을 따라가야 한다는 사실을 주지시킨다. 그리고 이 때 여전히 강조되는 것은 모호함과 역전의 원리이며 이것은 어떠한 설교에서도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3. 이야기식 설교의 전달 이야기식 설교는 말의 사건으로서 커뮤니케이션과 청취의 단계에 깊은 관심을 갖는다. 어느 설교보다 회중의 청취스타일에 호흡을 맞추어야 할 필요가 있으며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을 기대하는 형태이다. 다음은 이야기식 설교의 준비와 전달에 필요한 지침이다.

 

1) 이야기에 합당한 감각적인 언어를 사용하라 우리는 텔레비전이 없고 오직 라디오만 있던 시절을 기억하면 이 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라디오의 미스테리 물을 들어보면 음향효과를 맡는 사람은 문이 삐걱거리는 소리, 속이 텅 빈 마룻바닥 위를 걷는 발자국 소리, 나무들 사이에서 나는 바람 소리를 적절한 시기에 만들어 낸다. 음향효과를 극대화시키기 위해서 극작가는 청취자의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방향으로 대화를 만들어 낸다. 그 결과 우리가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야기 전달에서 우리의 감각을 이용하는 것은 단순히 효과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회중을 참여하도록 하는 서주곡이다. 예수는 탕자를 위한 잔치 장면을 너무도 생생하게 묘사해서 큰아들과 우리 모두가 그 음악을 듣고 춤추는 것을 보고 음식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특히 우리말은 어떤 말보다 감각언어가 풍부하다. 시각, 청각, 미각, 후각, 촉각등 모든 감각에 관계되는 표현이 아주 다양하게 발달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특히 한국의 설교자는 이러한 감각언어를 잘 활용해서 회중에게 메시지를 경험시킬 수 있는 호소력을 지녀야 할 것이다.

 

2) 능동태 문장과 구어체를 사용하라 수동태나 가정법의 문장보다는 능동태 문장을 사용하는 것이 효과적이며 추상적인 개념보다는 구체적인 개념을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것은 일반적인 설교 전달에서도 필요한 것이지만 이야기식 설교에서는 더욱 주의가 요구된다. 예수는 "만일 바람이 내 뜻대로 그 속도가 줄어든다면...."이라고 말하지 않고 "잠잠하라, 고요하라"(막4:39)고 말씀하셨다. 구약의 이야기들을 쉽게 설교할 수 있는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능동태와 구어체를 사용하게 되면 당연히 단축형과 반복을 많이 사용하는 간결한 문장이 된다. 이야기를 긴 문장으로 한다고 상상한다면 어떻겠는가? 이러한 간결한 문장은 대화체를 사용하여 이야기의 효과를 높일 수 있다. 이 때 우리는 1인칭과 2인칭을 주로 사용하게 된다. 이야기를 말할 때 우리는 경직되게 "그가 그들에게 말했습니다"라거나 "그들이 그녀에게 말했습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로우리는 이야기에서 사람 사이에 실제로 생겨난 대화를 말하는 시점에 왔을 때는 그 등장인물인 것처럼 일인칭으로 말하라고 충고한다. 그른 다음과 같은 인용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좋은 시인의 기술 중 하나는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기보다는 그의 경험을 상연하듯이 보여주는 것이다. '보여 주라' 그것을 말하지 말라. '생겨나도록 하라' 결코 그것이 생겨나는 것에 대해 말하지 말라. 이러한 간결하고도 쉬운 표현은 듣기에도 아주 좋은 표현으로 회중에게 안도감을 주게 된다.

 

3) 이야기를 완벽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 이야기식 설교자는 원고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무언가를 내려다보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커뮤니케이션을 강조하는 이야기식 설교에서는 특히 바람직한 일이 아닐 것이다. 이야기식 설교자는 이야기를 알며 그것에 관심이 있고 어떤 부분을 일기 위해서 멈추지 않을 정도로 이야기에 사로잡혀 있어야 한다. 물론 어떤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원고를 내려다보는 것은 필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자유는 그 이야기에 친숙해야 생겨날 수 있다. 이야기에 나오는 단어나 문장구조를 정확하게 반복한다는 것이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그 이야기를 알고 그것을 나누는 것만이 중요하다.

 

4) 속도의 조절과 적절한 휴지(pause)를 사용하라 이야기식 설교 전달에서 특히 요구되는 것으로서 '속도조절과 극적인 멈춤의 사용'을 들 수 있다. 부분적으로 속도조절은 휴지를 사용함으로써 생긴다. 어떤 이야기식 설교자라도 침묵에 익숙해져야 하며 회중의 집중을 이끄는 하나의 수단으로 그것을 사용해야 한다. 휴지는 이야기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일 수 있으며 이야기의 중간에 호기심을 높일 수 있고, 이야기의 절정에서는 긴장을 심화시키고, 이야기의 결말에는 성찰을 할 시간을 제공할 수 있다. 물론 휴지가 너무 길 수도 있고 너무 자주 사용될 수도 있으나, 창조적으로 사용되는 휴지는 회중이 이야기 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쉽게 해 준다.

 

베이커와 그린은 타이밍에 관한 몇 가지 제안을 했다.

(1) 어떤 생각의 변화나 중요한 단어 앞에서 멈춰라.

(2) 의미를 지니고 있는 단어를 강조하라.

(3) 상상력을 필요로 하는 구문은 천천히, 행동을 보여주는 부분은 빨리 해야 한다.

(4) 절정에 다다랐을 때는 속도조절을 바꿔라.

(5) 대화는 등장인물이 말하는 것에 적절한 속도로 해야 한다.

(6) 휴지나 뚝 떨어지는 목소리는 소리치는 것보다 더 효과적일 수 있다.

 

5) 시선접촉과 제스처를 사용하라 시선접촉은 대체로 이야기의 분위기와 내용에 따라 결정된다고 본다. 그러므로 오랫동안 설교원고를 내려다보는 것은 좋지 않지만 음조나 이야기의 특별한 진전이 있어서 밑받침이 된다면 때때로 빈 여백을 응시할 수도 있다. 오직 '메시지 자체만이 눈으로 하여금 언제 어디서, 무엇을 바라보아야 할지 올바른 기능을 가르쳐줄 자격을 갖고 있다." 제스처 역시 이야기식 설교에서 중요하다. 트뢰거는 주로 말보다는 주로 사용된 제스처에 의해 설교를 기억했다는 것을 관찰했다. 휴지(pause)처럼 제스처 역시 주의를 끌고, 강조하며, 말하는 분위기를 강화시켜 준다. 제스처는 자연적이어야 하면 자발적이어야 한다.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한 제스처는 도움이 되는 대신 산만할 수도 있다. 바레트는 제스처에 관한 중요한 몇 가지 규칙을 제시했다. "정도를 지나치지 마라. 한 제스처에 국한하지 말라. 거짓된 제스처로 알려지지 않도록 하라."

 

이 단순한 제스처의 원리는 이야기식 설교를 하는데 풍성한 도움을 준다.

 

 

 

 

 

 

Ⅶ. 이야기식 설교의 장․단점

 

1. 이야기식 설교의 장점

우리가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우리 각자의 삶이 하나의 드라마이며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에도 시작과 마지막, 갈등과 문제 해결이 있기에 우리는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이야기식 설교는 귀납법적으로 전개된다. 그러기에 회중들이 설교에 참여하여 설교자와 함께 갈등과 문제, 모순을 분석하고, 해결의 길을 공동으로 탐색하게 된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라우리의 이야기식 설교 방법은 이야기의 플롯을 따라 설교를 구성하는 방법이며, 설교가 진행되어 가는 움직임을 강조한다.

 

플롯된 설교는 전통적인 설교 방법에 비교할 때, 청중들이 기대감과 관심을 가지고 설교자와 함께 설교의 여정을 계속해 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장점을 가진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의 경험으로서의 복음을 강조하는 설교라는 점은 그것이 가지는 또 하나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야기식 설교는 주로 회중의 지성에 어필하는 인식적이며 명제적인 설교에 반대하여, 복음의 체험을 강조함으로 청중의 지성은 물론 감성에도 호소하는 설교이다.

 

유진 라우리는 청중은 복음의 명제나 주제를 알기보다는 복음을 실존적으로 경험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라우리는 설교의 목적은 회중들에게 말씀을 체험하는 사건이 일어나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라우리는 이 설교 방법론에서 반드시 딜레마를 서술함으로써 설교를 시작하여, 그 혼동에 대한 심화의 단계를 거침으로써 청중들로 하여금 모호함을 경험하게 하고, 반전을 통하여 해결책을 찾아 나아가는 방식으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전통적인 설교가 서론 부분에서 긴장감을 전혀 만들어주지 못하기 때문에 설교의 역동성을 잃게 한다면 라우리의 이야기식 설교 방법은 신선함을 제시해 주는 방법임에 틀림이 없다. 청중들은 그들이 듣게 될 설교의 나머지 부분에서 그 모호함이 어떻게 해결되어 가는가를 간절히 보기 원할 것이고, 청중들의 기대감과 참여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방법이라는 장점을 가진다.

 

2. 이야기식 설교의 단점

이야기식 설교에서 문제점으로 제시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먼저 "아하! 나는 놀라운 사실을 새롭게 발견했네!"라고 외치게 될 자리로 청중들을 인도하기 위한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서 설교를 구성하는 모든 구조들은 인간의 창조성은 한계를 가지고 있으며 예상 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을 인식해야만 한다.

 

여기에서 설교를 통해 참으로 놀라운 발견을 한 사람들이 그러한 순간에 이르기까지 가졌던 경험과 단계들을 되돌아볼 수 있으며, 회상해 낼 수 있겠느냐 하는 점이 문제로 대두된다. 그러나 이러한 단계를 밟은 사람이라 할 지라도 똑같이 '유레카!'를 외칠 수 있겠는가는 전혀 분명치 않다. 이것은 라우리가 제시하는 설교형태와 같은 구조에 있어서 특별한 관심거리인데, 설교의 세 번째 단계에서 제시되는 단서를 통해 갑작스런 역전이 생겨지고, 놀라운 한줄기의 빛이 비쳐와 잘 이해되지 않았던 혼동의 어두움이 일시에 거두어지는 현상과 함께 이루어지는 것이다.

 

둘째는 성서가 아닌 다른 자료를 사용하여 이야기식 설교를 행할 때 특히 그것이 순전히 한 개인의 이야기일 때, 일시적인 은혜의 경험을 위하여 역사적이고 교의적인 탐구를 일괄 처리해 버리는 비성서적인 설교자의 자세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점을 주의해야 한다.

 

성서는 '하나님의 이야기'인 반면, 이야기식 설교에서 성서를 자료로 사용하지 않는 경우의 설교에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하나님의 이야기의 구조 안에 짜 엮어 맞추려고 시도하게 된다. 물론, 이러한 의도는 우리가 성서와 삶 사이에 강력한 상호작용을 결과로 갖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바로 그것이 단순히 이야기들의 혼동을 야기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할 뿐만 아니라, 자칫 성서보다 조금 덜 중요한 모든 이야기들에 생명력을 불어넣으려 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사실에 유념해야 한다.

 

롱은 이러한 위험성 에 대해 "하나님의 이야기와 우리의 이야기의 본말이 바뀔 수도 있으며, 별로 안 중요한 우리들의 이야기들이 복음의 이야기를 부식시킬 수도 있고, 혹은 바꾸어 버릴 수도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셋째는 이야기식 설교의 한계를 논할 때 가장 많이 언급되기도 하는 것으로서 결론 없는설교, 더욱 정확히 말한다면 설교자가 결론을 내리지 않는 설교의 위험성이다.

 

이는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설교자가 결론을 내리지 않는 것이 이야기식 설교의 특징 중 하나로서 회중의 참여를 유도한다는 장점은 있지만 설교자가 말하는 주제를 놓칠 위험을 안게 된다. 뿐만 아니라 설교의 기본적인 목적이 "설교를 경청하는 가운데 메시지를 받은 한 심령과 하나님의 감격스러운 만남을 가져오도록 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감안 할 때 이러한 감격과 만남을 회중에게 맡기는 것은 위험의 소지가 있을 것이다.

 

비록 이야기식 설교가 주제를 명확하게 전달하는 것보다 회중의 적극적인 참여를 의도한다는 목적을 지니고 있는 것이 사실이나, 만약 회중이 스스로 결론을 내리는 것을 거부하고 만다면 그것은 정말로 결론 없는 설교가 되는 것이다. 즉 이야기식 설교를 이해하고 어느 정도 그 설교에 참여하기를 즐거워하는 사람들에게는 또 다른 설교의 세계, 하나님을 만나는 기회를 제공해 주게 될 것이지만 특히 바쁜 일상 생활에 쫓겨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파묻혀 살지 못하는 현대 회중들이 스스로 설교에 대하여 결론을 내리는 일에 참여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Ⅷ. 이야기식 설교의 실제 설교

예문 1: 유진 로우리 누가 무엇을 더 원할 수 있는가?

본문 : 마 20:1-16

 

아침 7시 15분경, 포도원 주인은 하루 품꾼을 구하기 위해 장터에 갔다. 품꾼들은 하루 품삯으로 적당한 가격인 한 데나리온씩을 받기로 동의했다. 그래서 모두는 일하러 갔다. 8시 15분쯤 되었을 때, 포도원 주인은 다시 장터로 갔다. 일자리를 찾고 있는 사람들에게 주인은 “적당한 품삯을 주겠소”라고 말했고, 일꾼들은 포도원으로 일하러 갔다.

11시 45분쯤이 되었을 때, 포도원 주인은 또 장터로 갔다. 주인이 필요한 일꾼을 한번에 구하지 않은 것에 대해 궁금해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아마 폭풍이 오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일꾼들은 모두 포도원으로 일하러 갔다. 그리고 주인은 2시 45분경에, 그리고 한 시간 밖에 일할 시간이 남지 않은 4시 45분경에 다시 장터로 왔다. 이제 돈을 지불하는 6시가 되었다. 주인은 마지막에 일하러 온 사람에게 제일 먼저 품삯을 지불하라고 청지기의 귀에 속삭였을 것이다. 그리고 일꾼들은 놀랐음에 틀림이 없다. 마지막에 고용된 일꾼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았지만, 한 데나리온을 다 받았기 때문이다.

 

7시에 온 사람들의 반을 받지 않은 것에 그들은 감격했다. “주인이 한 시간당 한 데나리온을 주겠다고 말했었나? 왜? 그건 우리들에겐 거의 반 달치 월급인데.” 일꾼들은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청지기가 3시에 온 사람들에게 지불하는 것을 보고 알았다. 뭔가 약간의 오해가 있었다. 3시에 온 사람도 5시에 온 사람도 모두 같은 액수를 받았다. 주인이 잘못을 지적하면서, 청지기의 귀에 다시 속삭였을 것이다. 하지만 주인의 청지기는 12시에 온 사람들에게 여전히 한 데나리온의 삯을 지불하고 있었다. 7시에 온 사람들의 얼굴에 웃음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일한 양에 상관없이 주인이 모두에게 같은 액수를 지불한단 말이야?” 믿을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정말로 7시에 온 사람들도 한 데나리온씩을 받았다. 성경은 그들이 “원망(Grumble)"했다고 한다. 완곡한 말로 표현된 당연한 것이었을 것이다(아마 정말로 그들이 한 말은 기록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우리에게 다른 사람과 똑같이 지불하다니 무슨 소리예요? 땀이 날 정도로 일할 시간도 없었던 마지막에 온 사람들과, 정오의 찌는 더위 속에서 온종일 수고한 우리들과 똑같이 대우를 하는 이유가 뭐예요?”

 

“잠간만 기다려 봐요”하고 주인이 대답했다. “왜 당신들은 더 많은 것을 기대하죠? 우리가 아침 6시 45분경에 했던 대화를 기억하지 못하나요? 한 데나리온을 받기로 나와 동의하지 않았었나요?” “맞아요. 물론 그렇기는 하죠. 하지만 당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똑같이 지불한 것을 우리는 보았고, 지금은 상황이 틀려요. 우리는 당연히 더 받을 것을 기대합니다.” “문제가 뭐죠? 내가 관대한 것을 시기합니까? 내가 그들에게도 똑같이 지불하기로 결정했어요. 그것은 내 문제요, 그렇지 않나요? 그것은 내 돈이요. 당신들은 한 데나리온을 받고 여기서 나가시오.” 글쎄...... 일꾼들이 핵심을 잡았다고 여러분들은 생각할 것이다. 그렇지 않나요? 여러분들이 7시에 일하러 왔다고 상상해 봅시다. 지금 기분이 어떨까요? 여기서 무엇이 옳은가는 모든 품꾼들 사이에서의 상대적인 공평성(Relative Justice)과 관계가 있다. 그리고 여러분이 정부의 고용주라면, 여러분은 “당신이 좋을 대로” 돈을 쓸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 당신은 도시의 장학위원회의 일원이고 몇 몇의 새로운 선생님을 채용하게 되었다. 두 명 모두 좋은 대학 성적과 동일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한 명은 남자이고 다른 한 명은 여자이다. 직업의 시세(Job market)가 여자한테 적은 임금을 지불한다고 당신도 그렇게 할 계획인가? 그렇게 하지 않는 편이 낫다. 누군가가 당신을 바짝 추적할 것이고 그래야만 한다. 정원 일을 시키기 위해서 같은 경력을 가진, 백인 한 사람과 흑인 한 사람을 구할 것인가? 그리고 그 정도로 괜찮다는 생각에 흑인에게는 적은 임금을 지불할 생각인가? 그것은 잘못이다. 이 이야기는 단지 형태는 다르지만 비슷한 논점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전국노동관계청(National Labor Relations Board)의 좋은 사례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가? 사실 난 충격을 받았다. 도대체 왜 예수님은 불공평한 주인의 편을 들었을까?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사실 마지막에 온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임금을 준다는 것은 모진 것이고 멍청한 것이다. 주인은 7시에 온 사람들이 불공평이 행해지는 것을 보고 있도록 강요한 것이다. 주인은 7시에 온 일꾼들에게 먼저 임금을 지불하는 것이 더 나았다. 그리고 나서 9시 12시....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게다가 내일 아침 주인에게는 어떤 일이 생길까? 주인은 오전 6시 45분쯤 장터로 갈 것이다. 생각해 보라. 아무도 거기에 없을 것이다. 주인은 오후 4시 45분쯤에 다시 오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 때는 많은 사람들이 일할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이 이야기에는 특이한 점이 있거나 아님 이해를 못하겠다. 글쎄....맞다, 마지막에 온 사람이 먼저 임금을 받는 장면에 실마리가 있다. 하지만 마태복음 19장으로 가지 않고서는 이야기의 요점을 알 수가 없다. 예수님이 우리가 부자 청년이라고 부르는 사람과 대화하는 장면을 기억하는가? 그 부자 청년은 한 가지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자리가 잡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예수님은 그에게 “가서 네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라. 그리고 다시 와라”라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이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귀를 믿을 수가 없었다. 제자들은 교회 성장 세미나에서 막 돌아왔고 예수님이 그런 돌출된 예상을 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놀라는 것을 보시고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라고 하셨다. 여기는 바늘귀를 성문으로 의미하는 이미지로 비신화화(Demythologize) 하려고 하지 말아라. 아니다. 등에 혹과 모든 짐을 진 큰 낙타가 아주 작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고 예수님은 정확하게 말씀하셨다. “글쎄요.....그건 불가능해요”라고 제자들은 말했고, 제자들은 여기서 정곡을 찔렀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라는 복음을 예수님은 그들에게 주셨다. 하지만 제자들은 모든 것을 놓치고 있다. 그리고 베드로는 아주 뻔뻔하게 앞으로 나아가서 “하지만 예수님,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받겠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렇다면 답은? 속임/사기(Cheated)이다. 그것이 여러분이 받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업상의 거래도 아니고 계약도 아니다. 그것은 언약(Covenant)이다. “나의 최종 결산/총결산(Bottom line)은 무엇일까?”라고 질문한다면 답은 간다하다.

속임(Cheated)이다. 이 이야기 바로 뒤에 나오는 이야기가 포도원의 일꾼 이야기이고,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속임을 당하는지를 알게 된다. 그리고 물론 내 자신과 나보다 더 많이 일한 사람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적게 일한 사람과 비교를 한다. 이러한 “손익 계산만을 문제 삼는/현실적인(Bottom-line)" 심리는 교회에 계속적인 문제를 일으킨다. 내가 어렸을 때 Wichita, Kansas에 있는 한 감리교회에서 어른들의 대화를 들은 적이 있다. 대화는 이랬다. ”너도 알겠지만, 이건 불공평해. 우리는 교회에 충실했고, 돈과 시간을 주었고, 항상 정직하고 곧은 길로만 살아왔다가 죽기 직전 회심(Conversion)한 사람과 함께 한다는 거야? 같은 천국? 이건 불공평해.“ 때론 이런 사고방식이 비극적인 모습으로 온다.

여러분이 어느 주일 오후에 광범위한 지도자 훈련에 있다고 생각해 보자. 작은 그룹으로 나뉘어져서 원으로 앉아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러분을 모른다. 그리고 인도자가 “원으로 돌면서 자신을 소개하십시오. 당신이 누구인지만을 이야기하십시오”라고 말한다. 원으로 돌기 시작하고 마지막에 이 나이든 사람이 “나의 이름은.....이고 나는 원래는 배관공이었습니다”라고 말한다. “원래는(Used to be)?" 원래라고 말하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삶은 계약(Contract)이다. 그리고 그의 계약은 만기가 되었다. 그는 예전에 베이컨을 집으로 가져오는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Used to be"가 되었다. 계속 돌다가 매우 수줍어 하는 여인 앞에 섰다. “난 단지 주부일 뿐이에요” 단지(Just)?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녀 역시 집에 베이컨을 가져오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은, 나머지 18시간 동안에 그것을 요리해야 하고, 후에 청소해야 한다. 하지만 계약은 약간 애매하다. “난 단지 주부예요.” 지금, 당신이 3살, 6살, 9살 아이의 부모라고 상상해 보라. 9살짜리 아이가 3살짜리보다 3배나 집안 일을 더 돕기 때문에 그 아이를 3배 더 사랑합니까? 그리고 9살인 당신은 3살일 때보다 부모님을 3배 더 사랑합니까? “왜요? 그건 아주 이상한 일이에요. 우린 가족이에요”라고 말할 것이다. 정확하다. 가족이다.

 

이 이야기도 그렇다. 예수님은 가족의 언약(Covenant)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시몬은 이것을 사업상의 거래로 생각했다. 그리고 이 순간에 포도원 주인은 어디 있는 줄 압니까? 주인은 장터로 돌아와서 아직 초대 받지 못한 사람들, 대답할 기회를 아직 가지지 못한 사람들을 찾고 있다. 여러분이 본 대로 초대가 7시이든 9시 혹은 12시, 3시, 5시, 2분전이든 상관이 없다. 포도원으로 초대되기 위해서는 먼저 집으로 초대되어야 한다. 누가 더 많은 것을 구할 수 있겠는가?

본 설교의 본문은 Eugene Lowry의 How to preach a parable(Abingdon Press, 1989)에서 발췌하여 번역한 것이다.

 

설교 예문 2:

이연길 이 어둠을 비추소서

본문 : 행 16:22-34

우리가 어려움을 당하고 보니까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 생각이 자주 머리에 떠오릅니다. 과부가 과부 심정을 안다는 말이 바로 이런 말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어려움을 당하고 고통 당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이들은 어려울 때 어떻게 이기며 살았는가를 찾아보았습니다. 그러던 중 특별히 두 가지 사건이 생각났습니다. 하나는 이리 폭발 사건으로 피해를 입었던 이리 신광교회의 경우, 또 하나는 감옥에 갇혔던 바울과 실라의 이야기입니다. 먼저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과 실라를 찾아가 봅시다. 이 감옥은 밖으로 문들이 하나도 나 있지 않은 땅속을 깊이 파서 만든 감옥입니다. 예수께서 갇히셨다는 가야바의 집에 가보니 감옥이 지하 1층, 2층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마치 땅굴을 파듯이 땅속을 파고 감옥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빛이라곤 밖에 켜 놓은 호롱불밖에 없었습니다. 지하 2층의 감옥에 갇히셨다면 그나마 그 등불마저 희미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바로 그런 감옥에 갇히셨습니다. 바울이 갇힌 곳도 그런 곳이었습니다. 자, 이제 감옥 속으로 들어가 보십시다. 감옥 안에 갇혀 있는 분들은 얼마나 맞았는지 온 몸이 상처투성이고, 온 몸이 피로 물들어 있습니다. 두 사람 모두 발엔 착고를 채워 놓아서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어두움, 아픔, 절망, 죽음을 연상케 하는 장면입니다. 얼마나 억울한 일입니까? 그런데 이 분들이 그 속에서 무엇을 했습니까? 1977년 11월에 이리 역에서 폭발 사고가 났습니다. 철로의 레일이 불덩이가 되어 수백 미터씩 날아가고, 기차 바퀴가 수백 미터씩 날아서 건물 지붕을 뚫고 내려앉았는가 하면, 도시에 유리창들이 모두 깨져 거리는 유리로 눈 덮이듯 했습니다. 그 때 역에서 가깝게 위치해 있던 신광교회의 아름다운 석조 건물의 지붕이 내려앉고, 벽에 금이 가버린 것입니다. 청천벽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교회 건물은 초창기에 교인들이 어려울 때 몸소 돌을 등에 지고 올라 다니면서 지은 집이어서 그분들의 애착은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그 다음 주일, 온 교인들이 눈물로 예배를 드렸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눈물 속에는 희망이 배어 있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감옥 안에서 그것도 깊은 밤에 기도하고 찬미하였습니다. 주위에 갇혀 있던 죄수들이 그 소리를 다 들었습니다. 기도하고 찬미했다는 단어는 우리나라 말로 번역하기가 참으로 어려운 표현입니다. 먼저 기도를 하고 그리고 다음에 찬송했다고 들리기 쉬운데, 그런 뜻이 아니고 기원과 찬송을 동시에 드린 행위를 말합니다. 기도하면서 찬미하고, 찬미하면서 기도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기도가 찬미인지 기도인지 구분할 수가 없는 그런 기도였습니다. 이렇게 보면 이 기도는 하나님께 탄원하거나 탄식하는 기도가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고 이곳에서 건져주시옵소서.” “우리들이 살아나가서 주의 영광을 선포하게 하소서.” 그런 기도는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도리어 그들은 평소에 하던 대로 평안할 때, 은혜의 때에 하던 대로 그대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는 기도를 했다는 것입니다. 감옥 안에서, 어둠과 고통의 순간에 우리 하나님께 진정으로 찬양과 영광을 돌렸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찬양과 영광을 돌립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이런 기도였습니다. 그러니 주위에 있던 죄수들에게 얼마나 희한하게 들렸겠습니까? 그것도 한밤중에 죄수들이 들었다는 단어도 단순하게 무의식적으로 귀에 들렸다는 말이 아니고, 그들이 의식적으로 들으면서 즐거워했다는 뜻입니다.

 

영어로 표현하면, “The other prisoners were attentively listening, joyfully and delightfully." 일반적으로 그것도 감옥에서 한밤중에 노래를 한다면 아마도 죄수들이 야유를 하고 고함을 쳤을 것입니다. “조용히 해,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노래를 해 이 바보들아!” 그런데 바울과 실라의 경우에는 기뻐하면서 의식적으로 그 기도와 찬양을 들었습니다. 희한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바울과 실라가 그 암흑의 순간에 찬미의 기도를 하나님께 돌릴 수 있었을까요? 사실은 신광교회가 그 당시, 너무 성장해서 그 건물을 다 수용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건축을 하기는 해야 하는데, 새로 본당을 신축할 터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오는 말들은 현재 있는 본당을 헐고 그 곳에 새 본당을 지어야 한다는 의견들이었습니다. 이 말이 나오기가 바쁘게 반대 의견이 거세었습니다. 만약 본당을 헐기만 하면 교회를 떠난다는 말이 심혈을 기울여 그 건물을 지었던 초창기 교인들의 입에서 나왔습니다. 그분들은 대부분 교회의 중진들이었습니다. 교회가 갈라질 위기에 서 있었습니다. 그 때 저는 조용히 안 목사님을 찾아가서 밖에서 도는 이야기들을 전하고 어떤 처방을 내려야 한다고 조언했습니다. 그러나 내 말을 들은 안 목사님은 눈을 감고 한참 무엇인가를 생각하더니, “염려 없습니다. 교회는 절대로 분열되지 않고 세워질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만 아십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어떻게 될 것인지 기다려 보기로 했습니다. 감옥 속에서 찬송과 기도는 슬픔이나 원망 때문이 아니고, 영적인 기쁨(Spiritual joy)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속에서 솟아나는 영적인 기쁨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서 드린 영적인 예배입니다. 어둠과 죽음의 그늘이 드리운 음침한 감옥 안에서....... 성경에 예배란 단어가 일곱 가지가 있습니다. 그 중에 다섯 개는 딱 한번씩 나오고, 다른 하나는 세 번, 그리고 마지막 단어는 59번이나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단어가 바로 프로스퀴네오(proskuneo)란 말입니다. 이 말은 “입맞추기 위해 나오다”는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이 말이 암시하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경배하기 위하여 땅에 납작하게 엎드려 진정으로 하나님께 합당한 경배를 드리는 것이고, 두 번째로는 얼굴을 들고 눈과 눈을 마주 보며, 그분에게 내 모든 것을 다 바치려는 강력한 애정과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말합니다. 천사가 질투할 만큼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 속에서 사랑을 나눈 것이 예배란 말입니다. 두 가지 의미가 합해지면 더 좋겠지요. 겸비한 마음으로 땅에 납작하게 엎드려 경배 드리고, 그리고 얼굴을 들고 하나님의 눈을 마주 대하듯이 뜨거운 사람을 나누는 예배, 이런 예배를 드릴 수 있다면 이보다 좋은 예배가 어디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는 얼굴이 뚫어지듯이 서로 바라봅니다. 그래도 부끄럽지 않습니다. 바울과 신라가 감옥에서 기도하고 찬미한 예배가 바로 프로스퀴네오(참된 예배)였습니다. 하나님은 바울과 실라를 뚫어지게 바라보시고, 그들 또한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며 사랑과 기쁨을 나누었습니다. 이런 영적 기쁨은 세상에 어떤 악한 경우에도 방해받을 수 없이 솟아나는 기쁨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 사랑에서 끊으리오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5-37) 리처드 범브란트 목사님은 14년간이나 공산 루마니아 지하 감옥에서 고생을 하였습니다. 햇빛은 물론 나무나 풀 한 포기 바라 볼 수 없는 지하 30피트의 독방에서 책 한 권 없이 지내야 했습니다. 굶주림, 추위, 매질, 모욕, 수면부족 등으로 시달리던 어느 날 밤, 거의 벗은 몸으로 추위를 견디지 못하여 일어나 떨면서 추위를 이기려고 몸부림치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의 영혼 깊은 곳으로부터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이 솟아올랐습니다. 찬송을 하다가 그는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주시는 영적 기쁨입니다. 죄 안에 머물러서는 이런 기쁨을 맛볼 수 없습니다. 주를 위하여 살려고 몸부림치다가 어려움을 당할 때만이 느낄 수 있는 기쁨입니다. 저는 지금 우리 교회가 이 기쁨 속에 젖어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의롭고 깨끗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화재를 만나고 다시 건물을 이보다 크게 짓는 그런 기쁨이 아닙니다.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무엇인가 모르는 기쁨 속에 저는 젖어 있습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찬미합니다.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이유가 없는 기쁨과 감사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감옥 문이 열릴 때 기뻐서 춤을 춥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감옥 안에서도 찬송합니다. 감옥 문이 열리지 않아도 감사합니다. 슬픔 가운데서 주님을 찬양합니다. 이것이 다릅니다. 바울과 실라의 기쁨은 이런 기쁨이었습니다. 이들에게 주신 그리스도의 응답은 무엇이었습니까?

 

어려운 환경에 쓰라림을 이길 수 있는 그리스도의 능력입니다. 지진이 나서 감옥 터가 흔들리고, 문들이 모두 열리고, 모두 죄수의 수갑이며 착고가 풀려졌습니다. 그 때 바울의 모습을 보십시오. 바울은 해방이 된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왜 그들은 도망하지 않았을까요? 드디어 폭발 사고와 함께 건물이 무너져서 할 수 없이 그 건물을 헐고 새 건물을 그 자리에 세우게 되었습니다. 그 때까지 교회의 분열의 위기를 안고 있으면서도 안 목사님은 기쁨을 잃지 않았습니다. 넉넉한 마음으로 항상 여유를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사셨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해주실 것을 믿으면서...... 그 후 폭발 사고가 나고, 시에서 건물을 철거해 주고, 피해 보상까지 해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돈은 건축비로 쓸 수 없다고 해서 가난한 시민들을 위해 사용하고도, 모든 문제가 해결되어 넉넉하게 건축을 하고도 남았습니다. 저는 바울 사도가 하나님의 기적을 맛본 뒤에 도망가지 않은 이유를 압니다. 자기가 고통을 당해 보니까 다른 사람이 당할 고통이 얼마나 큰가를 알게 된 것입니다. 자기가 도망쳐서 간수들이 고통을 당하게 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고통을 당해본 사람만 알 수 있는 마음입니다. 바울은 도망치고 자신만 안전하게 하려는 데 마음을 쓰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구하는데 더 신경을 썼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는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어떤 깊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감옥, 어두움, 절망, 죽음을 체험해 보면서 이런 불행에 빠져 있는 다른 사람들의 고통이 얼마나 큰가를 뼛속 깊이 경험해 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감옥은 내게 육신의 죽음 밖에는 줄 수 없지만, 영혼의 지옥은 그것과 비교할 수 없으니 그들이 얼마나 불쌍한가! 성령의 사람인 그가 이런 생각을 능히 했으리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영혼을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이 더욱 일어났을 것이고, 그들의 영혼을 위하여 자기 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자기 몸을 돌보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영혼을 위하여 온 힘을 기울인 이유였을 것입니다. 본당과 체육관이 불타고 지나면서 느끼는 게 많았습니다. 교회 건물이 아니란 것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교회 건물이 천막이면 어떻습니까? 사용하기에 불편이 없으면 그만이지, 정말 교회에 중요한 것은 교회다운 교회가 되는 점이란 생각입니다. 영혼들을 구원하고 영혼들을 사랑하고 많은 영혼들을 말씀으로 윤택하게 해주고 기쁨으로 살게 해주는 일입니다. 이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이런 진리를 어려움을 통하여 다시 한번 배우게 된 것을 검사합니다. 또 어려움을 당하면서 깨달은 게 있습니다. 개인으로나 교회적으로 어려움을 당할 때 느끼는 그 아픔이 얼마나 컸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당한 사람만 압니다. 내 건강과 내 평안만 노래하면서 살면 이런 것을 잊어버리게 되고, 내 삶이 형통한 것만을 자랑하며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이제는 그렇게 살지 맙시다. 이웃교회의 아픔을 우리의 아픔으로 알고 이웃 교회의 기쁨을 우리의 기쁨으로 알고 살려고 합시다. 우리 주변의 어려운 이들의 어려움을 함께 나누며 사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사십시다. 정말 주님이 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찾아 사십시다. 이웃 미국교회들에 대해서 우리는 무관심해 왔습니다. 언어가 잘 통하지 않으니까, 그리고 백인들은 우리의 대하여 관심이 없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이들이 진심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하며 도와주는 일에 앞장서는 것을 보면서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우리 한인 교회들이 우리 교회를 위하여 예배 시간에 기도해 주었다는 소식도 들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이제는 우리가 이런 정신으로 도우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범브란트 목사님은 하나의 그림 이야기를 해주고 있습니다. 아주 탐스럽게 핀 아름다운 장미꽃들을 꽃아 놓은 화병이 책상 위에 놓여져 있고, 그 책상 곁에는 텔레비전 수상기가 있는데, 화면은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목을 자르는 끔찍한 장면을 비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의 가족 모두가 몇몇 방문자들과 함께 그 텔레비전 화면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는 그림입니다. 그러면서 말합니다. “마음의 화면에 떠오르는 추한 그림에 시선을 모으지 말기를 바랍니다. 당신의 시선을 아름다운 꽃에 가까이 모으십시오. ‘나는 샤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아 2:1)’라고 솔로몬은 노래하고 있듯이 예수님은 장미 같으신 분입니다. 그를 바라보라. 이것 때문에 우리는 감옥 안에서도 행복했습니다.” 감옥 같은 곳에서도 행복할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주변의 추하고 끔찍한 모습에 시선을 모으지 말고, 장미꽃에 시선을 모으십시다. 어두움에 빛을 비추시고, 어둠을 몰아내시는 주님에게 우리의 시선을 모으십시다. 그리하면 어둠은 곧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감옥 같은 곳에서도 행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멘. 이연길, 『이야기 설교학』(서울: 쿰란출판사, 2003), pp. 267-274.

 

 

Ⅸ. 결 론

크래독과 라우리와 같은 설교학자들은 설교의 형태에 있어서의 창조성과 또한 설교 에 있어서 보다 흥미롭게 하는 요소를 회복하는 일에 깊은 관심을 가져왔다. 그들은 탐구의 과정을 중심으로 디자인된 설교를 제시해 왔기 때문에 정적인 개요 중심의 설교 형태가 가지고 있는 많은 문제들을 극복해 왔으며 설교에 있어서 청중들로 하여금 활동적이고 책임있는 참여자들이 될 수 있도록 만드는 좋은 방편을 제시하였다. 그러한 학자들의 노력에 의해서 우리들은 고정된 설교의 틀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제시받은 것이다. 새로운 설교방법의 틀은 우리들에게 도전으로 다가오고 또 그것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우리들 자신이 부단히 연구하고 노력해야 한다. 이야기식 설교는 효과적으로 준비된다면 이 설교의 형태가 청중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어떤 호기심을 자아내는 문제를 제시함으로써 시작되어 그 문제 해결을 향해 점진적으로 진행해 나가는 설교 형태는 청중들의 관심을 끌 수 있고, 설교자는 청중들이 잘 받아들이는 설교 패턴에 따라서 모든 설교를 형성하려고 할 것이다. 어쩌면 전통적인 설교 방식에 안주하고 있었던 우리들에게, 보다 더 많은 창의력과 상상력이 필요한 이야기식 설교 방법을 어떻게 활용하는가는 우리들의 몫이 되었다.

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바로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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