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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방언이란?

baromi 2009. 5. 16. 12:11

              고전14:6-25, 방언이 무엇인가? 08.8.24, 박홍섭 목사

 

예전에 70년대와 80년대 초의 대학 입시에는 예비고사와 본고사로 시험이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한 해의 입시가 다 끝나고 나면 신문사나 언론에서 예비고사에서 만점을 받았던 학생이나 서울대학교에 수석입학을 한 학생들을 찾아가서 인터뷰를 하곤 했었는데 그때 기자들이 꼭 물어보았던 질문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공부해서 만점을 받았고 수석 합격을 할 수 있었느냐?” 라는 질문이었죠. 그러면 만점 받은 애들과 수석 합격한 학생들이 한결같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기억나십니까? “다른 비결은 없어요. 저는 학교 수업에만 충실했어요... 따로 과외나 학원수업 같은 것은 하지 않았어요..”

 

무슨 의미입니까? 그 시절에 공부 잘하는 학생은 학교수업에 충실한 학생이었습니다. 학교수업이 굉장히 중요했고 학교수업 만으로도 충분히 공부 잘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과외를 한다는 것은 정상적인 학교수업만으로 는 못 따라가는 공부 못하는 아이들이 비싼 돈 주고 하는 특별보충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학교 수업이 학생들의 공부를 이끌어가지 않고 학원과 과외수업이 공부를 이끌어가는 주객이 전도된 이런 현상들은 우리나라가 의지를 가지고 반드시 고쳐나가야 할 부분이 아니겠습니까?

 

왜 제가 모두에 이런 말을 드리는가 하면 은사에 대한 우리의 이해도 그러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부터 언급되는 은사는 일종의 과외와 같은 의미가 있습니다. 정상적인 교육 형태에서 과외는 학교 수업만으로 공부를 따라가지 못하는 학생들을 그냥 그 상태로 내버려두지 못하는 부모의 열심과 사랑이 특별한 간섭으로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그러하듯이 은사도 정상적인 은혜, 곧 말씀과 기도만으로 신앙생활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내버려둘 수 없어서 간섭하시는 특별한 은혜입니다. 은사는 분명히 특별한 하나님의 간섭이고 은혜인데 그 특별이 좋은 의미의 특별이기보다는 좀 부정적인 의미의 특별입니다. 이 특별한 간섭이 왜 허락되는가 하면 그 사람을 낙오시키고 지지부진한 그 상태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없어서 그러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적인 간섭인 은사를 허락하셔서 하나님에 대해서 감격하게 하고 힘을 내어서 신앙이 정상적으로 자라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잘못 이해되면 은사가 나타나는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신앙이 좋은 특별한 사람이어서 그 사람만 따로 허락하는 일종의 특혜라고 정반대로 오해하게 됩니다.(예/신유의 은사, 병원 가는 것보다 기적적으로 낫는 것이 더 신령하다고 생각하면 마치 과외 없이 교육을 못하는 지금의 현상이 문제인 것처럼 신앙도 그런 왜곡된 문제에 봉착할 수 있다.) 고린도교회의 문제가 여기서 발생했습니다. 은사가 나타나면 정상적으로는 가장 먼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하나님이 부족한 나를 그냥 내버려두시지 않고 간섭하셔서 힘을 내게하시고 용기를 내게 하셔서 신앙생활을 잘할 수 있도록 불쌍히 여겨주시는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정상적인 은혜, 즉 말씀과 기도만으로 신앙생활을 잘 하는 자리로 돌아가고 겸손해야 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쭐거리고 교만해지고 자랑하면서 은사를 가지고 누가 더 나은가로 서로 다투고 싸운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런 고린도교회의 은사 문제를 12장부터 다루면서 13장을 거치고 14장에 와서 그 결론을 내리는데 대표적으로 예언과 방언을 언급하면서방언을 굉장히 꾸짖는듯한 어조로 설명합니다. 왜냐하면 당시 고린도교회 안에 방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자신들은 천사의 말을 한다고 자랑하면서 교회를 어지럽게 하고 힘들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바울이 가르치고 있는 방언이라는 은사의 정확한 의미가 무엇일까요? 우선은 2절을 보면 영으로 하나님께 하는 말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 그리고 3절을 보면 방언이 교회의 덕이 아닌 자기 자신의 덕을 위해 허락된 은사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요약하면 방언은 믿음이 약한 개인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이 허락하신 은사로 영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며 찬송하는 것인데 자기도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고 듣는 다른 사람들도 모르는 그런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비밀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방언이라는 헬라어 단어자체가 ‘글롯사’인데 무아경 속에서 하는 말이란 뜻입니다. 무아경은 자신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그런 상태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말을 하기에 자신도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굉장히 신비스러운 경험입니다. 초월적 간섭이죠. 그래서 더욱 오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영적으로 고급한 경험이며 특별한 자에게 허락되는 하나님의 신적 은혜라고 말이죠.

 

그러나 바울은 본문을 통하여 그런 생각들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무아경 속에서 말하는 방언의 은사가 신비스럽게 보이고 특별하게 보이지만 그것은 정상적인 은혜의 방편인 성경말씀과 기도와 성례로 신앙이 잘 자라지 못하고 알아듣지 못하는 자에게 허락된 하나님의 배려요 긍휼의 간섭이지 남들보다 더 신령한 자에게 주는 보너스가 아니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방언은 자기 자신만이 그 유익을 누려야지 다른 사람이나 공동체 속에서 함부로 나타내면 안 되는 은사이기에 반드시 이런 전제가 붙습니다. 어떤 전제입니까? 반드시 통역하게 되어 있습니다.

 

통역이 없으면 이 은사는 자기에게는 신비스럽고 너무나 감격스러운 하나님의 초월적 간섭이지만 다른 사람과 공동체에는 소음에 불과합니다. 6-13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을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이나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혹 저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내지 아니하면 저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만일 나팔이 분명치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쟁을 예비하리요.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서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이같이 많되 뜻없는 소리는 없나니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야만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야만이 되리니 그러면 너희도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 세우기를 위하여 풍성하기를 구하라.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바울은 악기의 예를 들면서 아무리 아름다운 플롯이나 피리(저), 혹은 하아프(거문고) 같은 악기라도 그 음을 분명히 내지 않으면 그것은 소음에 불과한 것처럼 방언이 아무리 신비스럽게 보이고 하늘의 소리처럼 들린다 할지라도 방언을 하는 사람이 자신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고 그것을 듣는 사람도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른다면 그것은 신앙에 아무런 유익이 되지 않고 도리어 야만스러움과 소음에 불과하다고 말하면서 반드시 알아들을 수 있도록 통역하기를 기도하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20-25절에 오면 굉장히 의미심장한 말을 합니다. 같이 보실까요?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 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다른 방언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저희가 오히려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무식한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그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 전파하리라.”

 

20절에 악에는 어린아이가 될지라도 지혜에는 어린아이가 되지 말고 장성한 자가 되라고 하면서 21절에서 방언의 역사적인 의미를 인용합니다. 무슨 의미이죠? 지혜가 장성한 자라면 방언의 은사가 있다고 함부로 소음처럼 사용하지 말고 그 의미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방언에 대해 율법에 기록해놓았으며 그 예언대로 이스라엘의 역사 중에 나타난 적이 있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21절에서 인용한 사28:11절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생소한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 이게 지금 무슨 말인가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있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들도 제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28:7절을 보시면 백성들이 포도주와 독주로 비틀거리고 있고, 제사장과 선지자들도 독주로 인하여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상에는 토한 것, 더러운 것이 가득하고 깨끗한 것이 없는 그런 상태입니다. 그러면서도 9절-10절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합니다. “그들이 이르기를 그가 뉘게 지식을 가르치며 뉘게 도를 전하여 깨닫게 하려는가 젖 떨어져 품을 떠난 자들에게 하려는가 대저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되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는구나 하는도다.” 마치 자기들은 모든 것을 아는 어른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젖먹는 어린아이가 먹어야 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려고 하지 않고 무시하면서 말씀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면서 교만을 떨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1절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하겠다고 하십니까? “그러므로 생소한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 내가 아무리 나의 말씀을 정상적으로 말해주어도 그것을 듣지 않고 그 말씀으로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고 악을 행한다면 하나님이 특별하게 간섭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 간섭이 무엇입니까? 다른 방언으로 말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사야 선지자가 신28장49절을 인용하면서 예언하는 것입니다. 이미 지난 주에 말씀 드린 것처럼 선지자들은 신28장의 언약에 근거한 복과 저주를 백성들에게 가르쳤고 예언했습니다. 신28장이 어떤 내용이었습니까?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해서 살면 이런 복을 받을 것이지만 반대로 말씀을 어기고 순종하지 않으면 이런 저주를 징계로 받을 것이라는 언약적 축복과 저주였습니다. 언약적 복과 저주는 복과 저주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 백성과의 관계가 주된 목적이며 그 목적을 위해 복과 저주를 수단으로 사용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 중에 47-57절을 보면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말씀대로 살지 않을 때 대적을 섬기게 되고 망하게 된다는 것을 예고하면서 다른 민족의 언어, 곧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이 언급됩니다.

 

그렇다면 잘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사도가 인용하는 이사야 28장의 방언에 관한 내용이 신28장49절에 의하면 축복의 맥락에서 나옵니까? 아니면 저주의 맥락에서 등장합니까? 율법에는 이스라엘에 방언이 나타나는 현상을 포로 되는 것, 자기 자녀를 잡아서 그 고기를 먹는 것과 더불어 저주, 벌 받는 내용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고 악을 행하는 다른 길로 갈 때 차마 그것을 그대로 방치하고 계실 수 없는 하나님이 그들의 역사 가운데 개입하시고 간섭하셔서 정상적인 신앙으로 돌이킬 수 있도록 역사하시는 징계와 심판 중의 하나가 다른 언어, 곧 방언을 말하는 민족의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바울은 신28:49절과 그것이 역사적으로 실현되었던 사28:11절의 내용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방언을 평가합니다. 고전14:22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 아니라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라는 것은 불신자에게 보이기 위한 표적이라는 뜻도 있습니다만 일차적으로는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정상적인 상태에서 받지 않고 믿지 않았던 자들, 자기 길을 가며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던 자들, 그래서 이미 신28장에서 하나님이 예고하신대로 저주와 징계라는 특별과외를 사용하지 않으면 돌아올 수 없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믿지 않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준비해놓으신 특별과외 중 하나가 무엇입니까? 방언이었습니다. 그들이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사용하는 이방민족, 곧 앗수르와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서 싫든 좋든 방언을 들어야 하는 그런 상태에서 정신을 차리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생소한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이 백성에게 말씀하겠다는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의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그 이사야의 말을 인용하고 있는 바울의 의도가 무엇입니까? 지금 방언을 신령한 하늘의 언어라고 주장하면서 방언을 하는 그들이 가장 믿음이 좋은 자들이고 하나님의 특별한 복을 받은 자라고 말하는 자들에게 오히려 방언은 정상적인 상태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는 미련하고 고집스럽고 완악한 너희들을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징계, 간섭, 어쩌면 벌이라고 할 수 있는 그런 성격의 은사이니까 그렇게 자랑하거나 우쭐거리지 말고 겸손하며 더욱 낮아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자신의 경험을 예로 들면서 방언에 대해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14-19절입니다.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무식한 처지에 있는 자가 네게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하리요. 너는 감사를 잘 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느니라.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함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무슨 말입니까? 지금 고린도 교회 안에 나타나는 방언은 영으로만 하는 기도와 찬송입니다. 이 말은 영적이고 신비스럽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도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직관적인 기도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방언을 하면 영만 무아지경의 상태에서 직관적으로 기도하기 때문에 마음에는 열매가 맺히지 않습니다. 지정의가 함께 작용하는 마음에는 반드시 깨달음과 지식의 요소가 있어야 정당한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왜 통역을 하라고 합니까? 그래야 마음의 깨달음이 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방언기도 하는 자들에게 영으로만 기도하지 말고 자신처럼 마음으로도 기도하고 마음으로도 찬송할 수 있도록 하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기라도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도록 은혜를 구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방언을 굉장히 부정적인 의미로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느낄 수 있지만 사실은 부정적이지만은 않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이 교만하고 미련하며 어리석은 자리에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을 절대로 그냥 방치 하지 않으시며 특별한 간섭과 은혜를 베풀어서라도 반드시 돌아오게 하고야 말겠다는 고집과 하나님의 열심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방언이 부정적인 의미의 특별간섭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부족하고 모자라고 미련하고 무지한 나를 그냥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한없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이요 은혜인 것입니다. 마땅히 감사할 것이요 감격할 내용입니다.

 

그러나 그 감사와 감격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겠습니까? 겸손과 낮아짐으로 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내가 잘났다는 교만과 자랑과 미련한 우쭐됨으로 나아가면 그것보다 못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공부를 못해서 과외를 받으면 그 과외를 통해 공부 잘하는 자리로 가는 것이 과외시키는 부모의 목적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정작 그 학생은 공부는 하지 않고 나 과외한다. 너는 안하지 못하지..라고 하고 있다면 미련하고 우스운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 중에 혹 방언의 은사를 받은 분이 계십니까? 아니 방언만이 아니라 어떤 은사라도 주께로부터 받은 은사가 있습니까? 감사하십시오. 감격하십시오. 그러나 그 은사가 왜 주어졌는지를 아시고 겸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은사가 제대로 사용되어 우리를 정상적인 은혜, 즉 말씀과 기도만으로 충분히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라가게 하는 그 자리로 나아가게 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혼자 무아지경에 빠져서 자신의 체험을 자랑하면서도 정작 진리와 생명에 대해 아무런 깨달음과 진척이 없는 그런 자기 분열적 신앙이 아니라 영과 마음이 함께 기도하고 찬송하면서 생명과 진리에 대해 깨닫고 깨달은 그것을 나의 삶에 열매로 연결시키는 바른 신앙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허락된 성령의 은사가 그런 은사로 발휘되어 나 자신 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이해가 되고 깨달음을 주고 도전과 생명을 주는 신앙으로 자라가는 한우리 식구들 다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하나님 사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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