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신학자료

[스크랩] Re:Re:말라기 3:1과 이사야 40:3

baromi 2009. 4. 22. 11:42

마가복음 특강 : 제 4 강
이 름 최세창  
날 짜 2006-08-28 19:55:22
조 회 188
최세창:풍성교회, 훼이스신학대학원 객원 교수. 저서:신약 27권 주석 외 다수. 426-3051)

진보와 보수를 망라하여 48권의 마가복음 주석서들을 대조 연구하며 집필한 필자의 '마가복음'(신약 주석 시리즈)을 매주 2회씩(주일저녁 또는 오후예배와 수요저녁예배)을 교인들에게 가르칠 수 있도록 매주 2회 가르칠 분량을 올릴 계획입니다. 여기에 예화나 실화를 첨가해서 사용하시면 더 유익할 것입니다. (아쉬운 점은 여기에 난하주나 헬라어나 문장 부호 등을 제대로 표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제 4 강>>

2. 세례 요한의 선교[1:2-8]
    <비교 : 마 3:1-12, 눅 3:1-20>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를 세례 요한의 활동으로 시작하는 것은 공관복음서에 공통된다(마 3:1-6, 눅 3:3-6).
마가는 세례 요한의 선교에 대해, 구약성경을 인용하여 【2】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예비하리라 【3】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라고 설명하였다.
이 부분은 마가 자신이 본서에 인용한 유일한 구약의 말씀인데,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라고 한 것이 문제가 되고 있다. 사실상 이 부분은 말라기 3:1과 이사야 40:3의 결합이다. 게다가 전자는 본서의 2절에, 그리고 후자는 본서의 3절에 인용되어 있다.

이 난제에 대해서는 (1) 마가의 기억이 잘못된 것이라는 설(Meyer, Weiss), (2) 사본 기자의 실수로 난 외의 것이 들어온 것이라는 설(Holtzmann), (3) 당시에 메시아 예언이라고 생각되었던 구약 성구를 모아 하나의 문서로 철한 것(증언집)에서 마가가 인용했기 때문이라는 설(그러나 그러한 증언집이 있었다는 명확한 증거는 없다), (4) 대표로 이사야만 언급한 것이라는 설 등이 있다.
출애굽기 23:20과 같은 유사한 성격인 말라기 3:1의 예언은, 사실상 이사야의 예언에 포함시켜도 될 내용이라(E. Bickersteth, J. H. Burn)는 점을 보아 (4)설을 취해야 할 것이다.

바클레이(W. Barclay)는 그 예언과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설명을 하고 있다. “마가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오래 전으로 되돌아가서 시작하였다. 그 이야기는 예수님의 탄생으로 시작되지 않았다. 광야의 세례 요한으로 시작되지도 않았다. 그 이야기는 오래 전, 예언자들의 꿈으로 시작되었다. 말하자면, 오래 전, 아주 오래 전에 하나님의 마음에서 시작된 것이다.”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예비하리라는 말라기 3:1(LXX)의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를 인용한 것으로 마태복음 11:10과 문자적으로 거의 공통된다.

인용문의 내용은 “내 앞에서”가 네 앞에로, “내 길”이 네 길로 바뀌었다. 그 까닭은 다음과 같다. 구약성경(말라기)에서는 여호와가 화자이며, 그가 오시는 길은 그의 사자인 엘리야(말 4:5)에 의해 준비된다. 그와 같이 그 예언은 명백한 역사적 의미가 있다. 말라기 시대의 죄악은 예언 전체에서 증거되는 것처럼, 모든 백성, 특히 제사장들에 의한 직무의 남용이었다. 따라서, 예언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남용을 없애기 위해 오신다는 것과 그에 대한 준비를 선포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 심판하러 오시는 분과 그에 대한 준비를 위한 선포이다.

여기서는 그 말씀이 메시아적 용법에 적용되고 있다. 즉, 내가와 내(나의)는 하나님을 지시하고, 네는 주 예수를 지시하는 것으로 이해하여 하나님께서 주 예수에 대해 말씀하신 것으로 인용한 것이다. 오시는 이는 주 예수이시고, 주 예수의 오실 길을 준비하도록 먼저 보냄 받은 자가 바로 세례 요한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세례 요한의 출현은 하나님의 예언의 성취인 것이다.

다음으로,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는, 이사야 40:3(LXX)의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를 인용한 것이다. 이는 네 복음서에 다 나타난다(마 3:3, 눅 3:4, 요 1:23).

본래는 말라기에서의 인용처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오시는 길을 준비하도록 먼저 사자를 보내 외치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강림의 목적은 바벨론의 포로 생활을 하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것이다. 이 예언은 역사적으로 실현되었다(주전 6세기 후반).

초대 교회는 예언의 성취인 그 역사적 의미를 지닌 사건을 통해 죄와 죽음과 영원한 멸망의 포로인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고, 바로 세례 요한이 그분의 길을 준비하도록 먼저 보내진 자라고 믿었던 것이다.

우리가 유의해야 할 점은 2절은 주로 메시아의 심판을 의미하고, 3절은 주로 메시아의 구원을 의미하고 있다는 것이다. 메시아의 강림이란 믿는 자에게는 구원이지만, 믿지 않는 자에게는 그 자체가 이미 심판을 받고 있는 것이다(요 3:18, 19, 36).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의 광야는 바벨론과 팔레스틴 사이에 있는 시리아 사막을 가리킨다(W. Hendriksen).
소리(포네, φωνὴ)는 주님 예수의 선구자로서의 세례 요한의 선포를 뜻하는 것이다. 번(J. H. Burn)은 괴테(Goethe)가 “이 세상에는 메아리들은 많지만 소리가 없다.”라고 말한 것을 인용한 후에, “세례 요한의 힘이 바로 여기에 있다. 즉, 그는 하나의 소리였지, 하나의 메아리가 아니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단순히 메아리들, 즉 모세와 예언자들이 살아 있는 소리(생명의 소리)인 주님의 말씀을 선포한 것과는 너무 거리가 먼 메아리들인 종교 교사들에게, 그리고 아직은 메아리요 비실제적인 최근의 랍비들의 메아리에 오랫동안 익숙해져 있었다.”라고 말하였다.

세례 요한의 소리는 옥토가 아닌 광야와 같은 인간들의 마음속에 오실 메시아를 영접하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에 가혹하나 꼭 필요한 소리이었다.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의 주는 퀴리우(κυρίου)이며, 구약성경에서는 노예에 대한 주인을 뜻하며, 많은 경우에 있어서 명예와 존엄 그리고 하나님을 표현하거나 특수한 이름인 야웨(Yahweh)를 대신하는 칭호이었다. 신약성경에서는 하나님, 특히 예수 그리스도께 적용되어 그분의 신성을 나타내고 있다(고전 12:3, 고후 1:2, 빌 2:11).

이 칭호는 특히 바울 서신들에 자주 나타난다. ‘주 예수 그리스도’ 또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라는 바울의 고백은 [당시의 헬라적 동방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그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는 것처럼, 예배자들이 주님의 ‘노예’라는 생각을 보충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으며, 따라서 주님이란 칭호를 기독교 예배에 적용시키는 일이 광대하게 조장되었다( Deissman).](고후 1:3의 주석).

특히,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는 것은, 첫째로, 예수님을 한 역사적 인물로서, 또는 도덕적 및 종교적 천재로서 시인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둘째로, 예수님만을 구세주이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고백한다는 뜻이다(마 16:16, 요 1:1). 셋째로, 자신과 자신의 전 생애의 주인으로 인정하여 절대 복종하겠다는 고백의 의미를 갖는다. 넷째로, 초대 교회의 기초적인 신앙 고백이었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며 복음의 핵심이다(행 2:36, 고전 8:5, 6, 빌 2:11, 히 10:35, 계 3:5).

마가가 이사야 40:3의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를 주의 길을 예비하라로 표현한 것과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로 표현한 것은 주님 예수를 구약의 하나님과 동일시한 것이다.

3절 끝의 기록된 것과 같이(καθὼς γέγραπται)가 원문에는 2절의 맨 앞에 기록되었다. 이 말은 단순한 구약성경에서의 인용이 아니라, 구약성경의 예언의 정확한 성취를 뜻하는 것이다.
이사야 40:3의 적용의 적합성은 다음과 같다. 첫째,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설교하고 있었다(1:4). 둘째, 그의 과제가 유아기에 지정되었다( 눅 1:76-77). 셋째, 그가 수태하기 전에 주의 전령관, 또는 길 예비자를 낳을 것이라는 계시가 그의 아버지인 사가랴 제사장에게 임했었다(눅 1:17, 말 3:1). 넷째, 실제로 세례 요한의 선교는 메시아의 오심과 임재 그리고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도록 백성들을 몰아대는 것이었다(마 3: 11, 12, 막 1:7, 8, 요 3:28-30). 다섯째, 예수님도 세례 요한을 그와 같이 인정하셨다(마 11:10).

마가는 세례 요한의 활동에 대해, 【4】세례 요한이 이르러 광야에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라고 하였다.
세례 ‘요한’(Ἰωάννης : ‘주께서는 너그러우시다’라는 뜻)은 제사장인 사가랴(눅 1:8)와 아론의 자손이며(눅 1:5)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의 친족인(눅 1:36) 엘리사벳 사이에서 출생하여 유대에서 살았고, 광야에서 놀라운 활약을 하였다. 나중에 헤롯 안티파스에 의해 투옥되어 죽임을 당했다(막 6:17-28).

세례 요한의 인물됨에 대해서는 그에게서 세례를 받으신 적이 있으신(마 3:13-15) 예수님의 평가가 가장 적절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마 11:11).

세례 요한이 주로 활동한 광야는 “요단강의 양쪽에 퍼져 있는 광야를 가리킨다”(黑崎幸吉). “광야는 정말로 황량한 곳이며, 자갈과 깨진 돌과 바위로 덮여 있는 불모의 백악질 흙으로 된 거대한 기복 지역이다. 여기 저기에 덤불 조각과 땅바닥을 기는 뱀이 나타난다.......마지막 분석은 모든 악에 기울어진 인간의 마음이다”(W. Hendriksen).

이런 광야에도 더러 사람이 살았고, 심지어 마을이 형성되기도 했지만, 일반적으로 인적이 아주 드물었다(삼상 25:1, 2). 여호수아 시대에는 이런 광야에도 여섯 개의 성읍이 있었다(수 15:61-62).
“광야는 또한 쿰란 종파의 거처였다. 아마도 세례 요한은 그들과 접촉했을 것이다. 그는 확실히 그들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얼마나 영향을 받았는지는 모른다. 아마도 그의 금욕적 생활과 엄격한 훈련은 그들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 같다. 그렇지만, 그의 세례 의식이나 윤리적 행위와 종말론적 심판에 대한 강조는 그들에게서 비롯된 것 같지 않다”(W. W. Wessel).

[플루머(A. Plummer)는 “요한이 그들과 접촉했다고 믿을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하였다. 또, 그는 금욕 생활과 진부한 유대교보다 더 나은 어떤 것에 대한 열망말고는, 요한의 원리와 그들의 원리 사이에 비슷한 것은 없다고 하였다. 그는 양자 사이의 차이에 대해, 요한은 하나님 나라를 설교했고, 그들은 분리를 설교했다고 하였다. 또, 그는 그들은 사회를 버렸고, 요한은 사회를 개혁하려고 힘썼다고 하였다.](눅 1:80의 주석).

세례 요한이 전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의 죄는 하마르티온(ἁμαρτιών : 복수형)으로서 [“원래 윤리적인 용어가 아니라 활쏘기에서 나온 말로서 화살이 표적을 빗나가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러므로 죄란 우리가 마땅히 되어야 할 존재가 되지 못한 것이다. 죄란 가능성 이하로 떨어지는 것이다.......하나님께서 원하시는바 일꾼으로서의 자기의 최선을 다하지 못하는 것, 최선의 아버지, 최선의 어머니, 최선의 아들, 최선의 딸이 되지 못하는 것,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손과 눈과 마음과 두뇌의 은사를 사용하며 발전시키는 데 최선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다”(W. Barclay). 한 마디로 말해, 죄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표적에서 빗나간 성향과 사상과 말 그리고 행위 등을 뜻하는 것이다.](엡 2:1의 주석).

사함은 아페신(ἀφεσιν)이며 [동사인 아피에미(ἀφίημι : 추방하다)에서 연유한 행위를 가리키는 명사이다(R. C. H. Lenski). 그 뜻은 ‘추방’ 외에도 ‘면죄’, ‘풀어 주는 것’, ‘구원’, ‘구속’, ‘지불을 강요치 않음’, ‘판결을 취소함’ 등이다(Taylor).](엡 1:7의 주석). 이 말에 대한 가장 좋은 주석은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시 103:12)라는 말씀과 “다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미 7:19)라는 말씀이다(참조 : 사 43:25, 44:22).

죄 사함 곧 구속에 대해, [데일(Dale)은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용서하실 때, 우리들의 죄를 사실상 지워 버리시므로 죄에 대한 우리들의 책임은 없어진다. 죄의식도 역시 사라지게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이렇게 해방시켜 주실 수 있다는 사실은, 태양의 열을 일으키시고, 여러 세기를 통하여 수많은 별들의 운행을 통제하시는 것보다 훨씬 더 기이하다.”라고 설명하고 있다.](엡 1:7의 주석).

그와 같은 하나님의 용서의 행위는 하나님의 눈에 인간의 죄가 그다지 문제가 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죄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을 정도로 심각하고도 중대한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의 구속 곧 죄 사함이 그의 피로 말미암아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엡 1:7). 베드로 역시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벧전 1  :18-19. 참조 : 마 20:28, 26:28, 막 10:45, 14:24)라고 같은 의미의 말을 하였다.

따라서, 요한의 세례는 죄를 사하는 방도가 아니라, 단지 죄 사함에 이르게 하는 예비적 안내의 역할에 불과한 것이다.

죄 사함을 목적으로 하는 회개의 세례의 회개는 메타노이아스(μετανοίας)이며 ‘정서뿐만 아니라 마음과 의지의 전환’을 의미한다. 실상 그것은 무엇보다도 종교적, 지적, 도덕적 면에서 완전히 전환하는 것이다. 그것은 근본적인 생의 변화를 초래하는 근본적인 관점의 변화이다(고후 7:9, 딤후 2:25).

특히, 여기서는 하나님을 떠난 지정의를 포함한 인간의 모든 생활에서 메시아를 영접할 준비를 위해 돌아서는 것을 의미한다. 유의해야 할 것은 선포의 직접적인 대상이 바로 선민이라는 자부심을 가진 유대인들이라는 점이다.

세례는 밥티스마(βάπτισμα)인데, [“원래 ‘물 속에 담근다’든가 ‘물 속에 가라앉힌다’든가 하는 의미의 밥티조(βαπτίζω)에서 유래한 것이다”( 山口 昇).
그 의식은 요한이 맨 먼저 행한 것은 아니다. 유대인들은 의식적 씻음에 익숙하였다(레 11-15장. 참조 : 출 29:4, 사 1:16). “상징적인 씻음과 정화는 유대 의식의 실제 구조로 짜여졌다”(W. Barclay).
"이방인이 유대교에 입문할 때에는 세 가지 일이 수반되었다. 즉, 제사와 할례와 세례이다. 이방인은 세례로 유대교에 입교하는데 그 의식은 다음과 같다. 세례받을 사람은 손톱과 머리를 깎고 옷을 완전히 벗는다. 세례수는 적어도 40세아, 즉 두 드럼통 정도의 물이 있어야 한다. 그의 몸 전체가 물에 닿아야 한다. 그가 물 속에 있을 때, 세 명의 세례 집례자 앞에서 신앙 고백을 하면, 이어서 권면과 축복이 그에게 주어진다. 이 세례의 효과는 완전히 중생으로 생각되었다. 그 사람은 새사람이다. 그는 새로 출생하였다. 그는 하루밖에 안 된 갓난아기라고 일컬어졌다. 그의 모든 죄는 다 용서되었다. 그 이유는 그가 낳기 전에 지은 죄를 하나님은 벌하실 수 없기 때문이다. 변화의 완벽은 어떤 랍비들이 세례받기 전에 아이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세례받은 후에 낳은 아이가 그의 첫아기라고 주장했다는 사실에서 찾아볼 수 있다. 비록 실제로 실행되지는 않았으나, 이론상으로는 사람이 완전히 새사람이기 때문에 자기 누이나 어머니와도 결혼할 수 있다고 주장되었다. 그는 변화된 사람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람이며 전혀 다른 사람이다.
그 세례는 형식이 다르기는 하나 의미에 있어서는 이방 세계의 신비 종교에 입문하는 입신식과 비슷한 점이 있다. 입신식은 항상 인간이 영생을 위해 재생하는 새 출생이 뒤따르는 죽음이라고 생각되었다. 입신식을 받은 사람은 신과 일체가 되기 위하여 ‘자발적인 죽음’을 체험했다고 믿었다."(롬 6:4의 주석).
바울에게 있어서 세례의 핵심적인 의미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사는 것이다(롬 6:3, 4, 골 2:12).

그러나, 요한의 세례는 매우 독특하다. 요한의 세례는 요한이 직접 베풀었다. 그 대상은 이방인만이 아니라 유대인까지 포함하는 것이었다. 이 사실은 선민 의식을 가지고 있던 유대인들에게는 매우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의 세례는 메시아의 오심을 위한 준비라는 종말론적인 성격을 갖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세례는 회개를 전제로 한 외적 표현이기는 하지만, 죄 사함의 효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즉, “세례받으면 사함받는다고 하는, 소위 ‘세례로 인한 신생’의 의미는 아니다”(山口 昇).
한 마디로 말해, 그의 세례는 죄를 속해 주러 오실 구세주를 영접하도록 인생의 방향을 돌리는 윤리적 및 종교적 의미를 갖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세례는 세상 끝과 심판의 빛에서 이해되는 것이다”(G. Bornkamm).

전파하니는 케뤼스손(κηρύσσων)으로서 [임금, 군주, 행정 장관, 총독, 군대 장관 등의 공식 통신문을 배달하거나, 공공 소환장이나 공적 요구서를 전달하거나, 기타 여러 가지 의무를 이행하는 것을 뜻하였다. 신약성경에서는 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거나 선포하는 것, 또는 그런 사람을 뜻한다(딤후 1:11, 벧후 2:5). 특히, 이 말은 바울 서신에 자주 나오는데(롬 10:8, 고전 1:23, 고후 4:5, 빌 1:15), “언제나 엄격하고 공적이며 권위 있는 선포의 개념을 지니는 것이다”(F. D. Gealy).](딤전 2:7의 주석).

이 일을 위해 임명된 사람은 자신의 의견이나 다른 사람들의 사상을 말해서는 안 되고, 오직 하나님의 것만을 받아 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에스겔은 이스라엘의 거짓 예언자들에게 “주 여호와의 말씀에 본 것이 없이 자기 심령을 따라 예언하는 우매한 선지자에게 화 있을진저”(겔 13:3)라고 힐책하였다.

세례 요한의 선교 활동의 놀라운 결과에 대해, 마가는 【5】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라고 하였다.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는 과장된 표현이기는 하지만, 광야에서의 요한의 선교 활동이 온 유대인들, 특히 그 중심지인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대단히 큰 영향을 끼친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거의 모든 백성들은 선민 의식에도 불구하고, 공공연히 회개를 촉구하는 요한을 말라기 이후 수백 년 만에 나타난 위대한 선지자로 믿었고(마 11:32), 일부는 기다리던 메시아로 오해하기도 하였다(눅 3:15). 그러나, 백성의 지도자들은 그를 믿지도 않았고 따르지도 않았다(11:27 -33).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이 있다. 헨드릭슨(W. Hend- riksen)에 의하면, 요한은 사해 사본이 발견된 이래 우리가 매우 많이 들어 온 쿰란 공동체에 속한 인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즉, 그는 은둔자, 또는 세상을 등진 자가 아니었다. 그는 군중이 자기에게 몰려와서 듣는 것을 매우 기꺼워하였다. 사실상, 그는 그들을 섬기기를 원했다.

나아가는 미완료 시제인 엑세포류에토(ἐξεπορεύετο)로서 그 동작이 계속되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는, 세례가 단순히 종교 의식이나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죄의 고백을 필수 조건으로 하는 회개를 전제하는 실제적인 것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따라서, 죄의 고백이 없는 회개가 무의미한 것처럼, 회개 없는 세례도 무의미한 것이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은 “회개가 죄 사함을 받는 공로가 되는 것이 아니고, 차라리 죄 사함을 받기 위해 회개가 요구된다”(마경일)는 것이다.

회개에 필요한 죄의 고백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해야 한다고 하는 번(J. H. Burn, pp. 12-13)은 그 점에 대해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1) 하나님께 대한 고백은 다음과 같아야 한다. ① 죄의식과 그 죄로 인한 비탄을 느끼는 마음에서 해야만 한다. ② 사울이나 바로처럼 단순히 형벌의 두려움이 아니라, 고백한 죄들에 대한 증오나 염오에서 해야만 한다. ③ 자비의 소망에서 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유다와 같이 우리 자신을 거역하여 증언할 것이다. ④ 억지가 아니라, 자유롭고 자발적인 고백이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⑤ 일반적인 용어로서가 아니라, 우리가 기억하여 알 수 있는 특별한 죄들을 공개하는 것이어야만 한다.

(2) 사람들에 대한 고백은 항상 필요한 것이 아니라, 다만 경우에 따라 하는 것이다. 즉, ① 우리의 죄가 교회 또는 특정인에게 감정을 상하게 했거나 분개하게 했을 때이다. ② 죄가 우리의 양심을 무겁게 하기 때문에 안정과 위로를 찾지 못할 때이다.
그 외에도 죄로 인해 깨어진 관계 회복과 화해가 필요할 때에 죄를고백해야 한다. 당시의 죄의 고백에 있어서 “구두 진술이 요구되었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F. C. Grant).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에 대해, 그란트(F. C. Grant)는 “‘그의 앞에서’, 또는 ‘그의 지시를 따라’를 의미한다. 아마 초대 교회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유대교의 세례는 자신이 시행하였다. 즉, 그 앞에서 유대인 스스로 물 속에 들어갔다.”라고 하나 자연스럽지가 않다. 일반적으로 요한이 세례를 베푼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참조 : 행 8:38, 16:33).

세례 요한의 복장과 생활에 대해, 마가는 【6】요한은 약대 털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라고 하였다.
세례 요한의 복장은 엘리야 선지자와 같다(왕하 1:8). 원문(ἦν■ἐνδεδυμένος)은 계속적인 행동이나 습관을 나타내는 완곡어법이다. 즉, 요한이 이따금 엘리야와 같은 복장을 한 것이 아니라, 언제나 그와 같은 복장을 하고 산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한 복장을 한 것에 대해, 보른캄(G. Bornkamm)은 요한이 자신이 엘리야의 재래(再來)인 것을 보여 주기 위한 의도라고 하였다. 데라는 마가가 엘리야의 재래라고 생각하여 그렇게 표현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스가랴 13:4에 의하면, 털옷을 입는 것은 선지자의 통상적인 복장이었으므로 꼭 그렇게 볼 수만은 없다. 아무튼, 세례 요한의 옷은 부드럽고 사치스런 것이 아니라, 아주 조악한 것이었다.

세례 요한의 음식물인 메뚜기와 석총의 메뚜기는 레위기 11:22에 먹어도 된다고 했지만, 가난한 사람들 외에는 잘 먹지 않았다. 따라서, 메뚜기를 먹는 사람은 경멸의 대상이 되었다(A. E. Sanner). 지금도 일부 아랍인들은 말린 메뚜기를 먹고(E. Bickersteth, F. C. Grant, 마경일), 그 밖의 종족들도 메뚜기를 튀기거나 볶아서 먹는다. 석총은 야생의 벌꿀이다. 한 마디로 말해, 세례 요한은 자연식을 한 것이었다. "이 두 가지는 가난한 유목민들의 일상의 음식물이었다"(E. Schweizer).

어드만(C. R. Erdman)은 “요한의 외모와 생활 양식은 그의 사업의 진지하고도 엄격한 성격과 일치
한다.”라고 하였다. 또한, 그것은 세례 요한의 꾸밈과 가식이 없는 직선적이며 강직하고 검소한 성격을 반영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세례 요한의 사명에 대해, 마가는 【7】그가 전파하여 가로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라고 하였다.
세례 요한의 사명은, 한 마디로 말해, 예수 그리스도를 지시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가장 중대한 일은 영생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것이다.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의 능력 많으신 이(ὁ ἰσχυρότερός)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시하는 것이다. 세례 요한의 선포는 그 자신과 다른 인간과의 상대적 비교가 아니라, 인간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절대적 비교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 점은 주로 ‘본질적이며 본래적인 힘이 더 많다’를 의미하는 이스퀴로테로스(ἰσχυρότερός : 엡 6:10, 벧전 4:11)가 사용된 것으로도 뒷받침된다.

이 세례 요한의 말은 당시의 민중이 세례 요한을 혹시 그리스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눅 3:15)에 대한 단적인 부인이라는 점에서 뜻깊은 선포라 할 수 있다. 실상, 세례 요한은 유대인들을 대표하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의 질문을 받았을 때에도 분명하게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확언하였다(요 1:19-20). 그는 세상의 인기나 존경이나 추종에 대해 초연한 참 예언자이었고, 세상의 흐름과 반응에 상관없이 묵묵히 자기 길을 걷는 하나님의 일꾼이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내 뒤에 오시나니라고 소개하였다. 내 뒤에(ὀπίσω μου)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으로 오셔서 공생애를 시작하는 것이 시간적으로 세례 요한보다 나중이라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메시아)의 전령관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오시나니는 현재형인 에르케타이(ἔρχεται)이며, ‘벌써 오고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아주 신속한 영접 준비를 촉구하는 것이다.

세례 요한은 자기 뒤에 오시는 메시아에 비교해서, 나는 굽혀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라고 하였다.
신들메를 푸는 것은 노예의 일이었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의 고백은, 그 자신은 오시는 그리스도께 비한다면 그분의 신발을 들거나 신발 끈을 푸는 노예의 자격조차 없다는 뜻이다. 세례 요한이 유대인들의 숭앙을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미루어 볼 때, 그가 얼마나 겸손한 인물이며 자신을 아는 인물인가를 알 수 있다. 그는 예수님은 흥해야 하고, 자신은 쇠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하였다(요 3:30). 이러한 점들을 볼 때, 예수께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마 11:11)라고 칭찬하신 까닭을 알 수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칭찬인가 함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누구의 칭찬인가 함이다.

이어서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의 종이 될 자격도 안 되는 근본적인 이유에 대해, 【8】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라고 사명이란 점에서 설명하였다.
물 세례는 외적 형식이나, 성령 세례는 내적 변화이고 ; 물 세례는 인간적 의식이나, 성령 세례는 신적 의식이며 ; 물 세례는 예비적인 것이나, 성령 세례는 완전한 것이다. 물 세례는 죄를 떠날 것을 호소하는 도덕적 정화를 상징하나, 성령 세례는 구원과 심령 및 생활의 성결의 시작이다. 이는 성령의 내주에 의한 내‧외적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구약 시대에는 성령이 부어지는 것은 메시아 시대의 도래를 보여 주는 것이었다(사 44:3, 겔 36:25-27, 욜 2:28). 구약 위경의 '열 두 족장의 유훈' 중의 레위 18장 11절에는 메시아가 성령을 준다고 하는 언급이 있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다 함은 이와 같은 배경에 기초하고 있고, 메시아 시대의 도래를 고하는 것이었다”(山口 昇).

본래 구약 시대에도 하나님의 신(야웨의 신, 또는 거룩한 성령)은 제사장, 예언자, 사사, 군인, 왕, 심지어 일꾼 등에게 은사로 주어졌다(출 31:3, 삿 3:10, 6:34, 사 11:2, 42:1, 59:21, 61:1, 미 3:8).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특별한 것이며 제한적인 것이었다. 신약 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보편적이며 항구적인 성령 강림의 역사가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그 획기적인 사건이 바로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120명 가량의 성도들에게 발생한 오순절의 성령 강림이다(행 1:15, 2:1-4).

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바로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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