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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토마스 굳윈의 로마서 6:17-18해석 / Maurise Roberts / 한제호 역

baromi 2009. 4. 9. 22:36

토마스 굳윈의 로마서 6:17-18해석

(Thomas Goodwin on Romans6:17-18)

 

Maurise Roberts / 한제호 역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롬6:17,18)

 

훌륭한 저자가 쓴 책의 10면이 삼류(三流) 저자의 책의 100면 보다 더 유익함을 믿는 필자는 얼마 전 토마스 굳윈의 전집 제6권을 서가에서 골라냈다. 전에도 훑어본 일이 있었으나, 이번에는 잠시 동안이라도 이 심오한 저자의 세계와 교제하고 싶은 생각에서. 이 책의 '우리 구원에 있어서의 성령의 역사' 라는 주제를 찾아서 읽기 시작했다. 교중들의 굶주린 영혼을 위해서 뿐 아니라 자신의 주린 영혼을 위해서도 활동적인 목회자는 보다 깊은 구원의 우물을 파기 위해 타인의 도움을 자주 바라기 마련이다.

 

이번엔 그 책을 다 읽을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목차 난을 훑어 내려가다 보니 제2권, 4장의 제목이 '왜 하나님은 피택자가 구원되기 전에 얼마 동안 더 죄인의 자리에 있게 허용하시는가?'였고, 나는 곧 이 장을 읽기로 정했다. 나는 그것을 읽고 내가 얻은 유익을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다.

 

교육의 기술은 좋은 질문을 하는데서 시작된다면, 토마스 굳윈과 기타 모든 유명한 청교도들은 이점에서 뛰어난다고 할 수 있다. 바로 굳윈의 이 질문 속에 풍성한 열매를 얻을 수 있는 신학적 명상의 재료가 있기 때문이다. 왜 하나님은 그의 피택자들을 중생시키시기 이전에 오랫동안 그들을 죄 중에 머물도록 허락하시는가? 피택자들을 성인이 될 때까지 죄 중에 머물게 하는 편이 유익한가 아니면 그들은 소년기에 구원하시든지. 또 아니면 더 일찍이 영아기에 구원하시는 것이 유익한가? 나는 목회자로서 이 주제야말로 어떤 가정집회에서의 토론제목으로 가장 적절하고 아니면 다음 동역자들의 모임 자리에서 내놓을만한 주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굳윈도 이 제목에 대해 적지 않은 흥미를 가졌던 모양이어서 그는 다섯 장(章)에 걸쳐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고 읽어보면 로마서 6:17은 상당히 놀라운 내용이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나도 이 절을 읽을 때마다 결론 부분에 중점을 두고 읽었다.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즉 그의 독자들이 죄의 종이었던 상태를 바울이 하나님께 감사하였다고 생각할 수는 없는 일이다. 굳윈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바울의 이 감사를 '이상한 감사'(a strange thanksgiving)라고 부른다. 그는 이렇게 기록했다. '만일 사도가 여기서 글을 끝맺었다면 당신은 그것을 신성모독이라고 했을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납득이 간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저자의 독창성이 머리를 든다. 굳윈은 바울의 이 감사를 '하나님의 이중 축복'(God's complex blessing)에 대한 감사라고 부르는 것이다. 즉 바울은 그의 독자들이 중생한 일과 그들이 전에 중생이 필요한 상태에 있었던 두 가지 사실 모두를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다고 굳윈은 말한다. 그는 독자들에게 이것을 초상화에서의 그늘(shadow)을 비유로 해서 설명한다. 그늘 자체는 별것이 아니나. 그것은 그림의 주인공을 부각시키고 밝게 나타내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즉 신자의 구원 이전의 죄인의 상태는 그 후에 그가 얻은 은혜의 상태에 빛을 더한다는 것이다. '바울의 감사의 중심은 은혜의 상태이나, 그와 동시에 죄인의 과거의 죄의 상태는 죄의 결과인 그 크고 어둡던 그림자를 통하여서도 하나님은 그의 거룩하심을 들어내는 거울 뒤의 은박(銀箔)의 역할을 하도록 이용하시는데 바울은 하나님의 이 지혜와 재조(才操)를 높이면서 감사한다'고 굳윈은 기록했다. 이것이 로마서 6:17의 상반부에 관한 굳윈의 통찰이다. 이는 참으로 놀랄만한 통찰이다.

 

나는 흥미가 솟아서 토마스 굳윈의 낡은 책을 접어놓고 서재에 들어가서 로마서 주석들을 찾았다. 다른 주석가들 중에 굳윈과 같이 해석한 이들은 누구일까? 살펴본 결과는 아주 교훈적이었고, 또 내가 예상했던 바와 같기도 했다. 우리가 흔히 참고하는 주석가들 중에 굳윈 같이 통찰하고 해석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칼빈은, 주석하기를 '바울은 그들이 죄의 종이던 시기에 대하여 감사한 것이 아니라 그 이후에 그들이 받은 해방, 즉 그전 상태가 끝난 것에 대해 감사하고 있다'고 했다. 할데인(Haldane)은 매우 분명히 주해했다. '어떤 이들의 생각과 같이 죄 자체를 감사한다는 생각은 가장 명백한 오해이며, 이 절의 뜻과는 아주 먼 해석이다.' 이 견해는 옳지만 그러나 굳윈의 통찰을 부인할 수 있을까? 그럴 것 같지 않다.

 

찰스 핫지(C. Hodge)는 해석하기를 '이 절의 상반부의 표현은 비록 뜻은 분명하지만 약간 특이하다'고 보고, '그들이 죄의 종들이었다'는 말에서 과거동사에 강조점을 두면서 '바울은 그들이 이제는 죄의 종들이 아님을 감사하고 있다. 즉 죄의 종의 신분은 지나간 것이다.'라고 해석했다. 존 머레이(J. Murray)도 핫지와 같이 과거동사에 역점에 둔다. '바울의 강조는 과거시상(the past tense)이며, 이 생각을 영어로 표현하려면 우리는 '그러나"(whereas) 또는 '그럴지라도'(although)같은 접속사를 써야 할 것이다.'

 

로이드 존스 박사는 이 절의 난해성에 대해 상반부를 다음과 같이 풀이하여 해결한다. '여러분이 이 절을 처음 읽을 때는 사도께서 그의 독자들이 전에 죄의 종이었던 사실에 대해 감사하는 듯이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물론 사도는 인간의 비극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굳윈도 그의 로마서 6:17 해석에서 위에 인용한 주석가들 의한 말들을 거의 모두 찬성한다. 굳윈과 다른 주석가들은 근본적으로 상치하는 해석을 하지 않는다. 다만 굳윈의 특이한 해석은 '이중(二重)의 감사'라는 개념이다. 그리고 이 위대한 청교도 저술가의 통찰력을 우리의 주석가들이 한사람도 따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우리의 주의를 끌만한 일이다. 더 나가서. 만일 바울이 굳윈의 착안한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왜 그는 상반절 처음에 '그럴지라도'(although)라는 접속사를 의도적으로 아니 붙였는가? 고 물을 만하다. 결국 바울은 하나님께 이중(二重)의 감사를 드린 셈이 아닐까?

 

이 질문에 대한 분명한 대답은 아마도 우리가 현세에서는 들을 수 없을 것이다. 바울이 로마서 6:17을 쓰면서 그의 독자들이 죄에서 해방된 사실만을 감사했는지 아니면 굳윈이 첨가한 또 다른 사실도 감사했는지 누가 확언할 수 있을까? 이 점은 성경 해석자들이 심사숙고할 점이이다.

 

그러나 굳윈의 통찰력은 어느 경우에서든지 유익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로마서 6:17에 대해 어떤 해석을 하든지 간에 하나님께서는 실제에 있어서 그의 많은 피택자들을 중생 이전에 오랫동안 죄의 상태에 두신다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 우리의 재고(再考)와 신학적 주목까지도 끌게 한다. 그렇게 하심에 어떤 유익이 없다면 왜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겠는가? 그리고 만일 거기에 어떤 유익이 있다면, 그 유익은 무엇이겠는가? 이 물음에 대한 굳윈의 대답은 확실성이 있다. 이하에서 그의 대답을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에 앞서서 우리가 유념하지 않으면 혼란을 일으킬지 모를 일을 먼저 분명히 해야 하겠다. 즉 사람이 죄의 상태에 있다는 것은 악한 일이며, 무서운 일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먼저 모두 동의하여야 한다. 죄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극히 거슬리는 일이며, 죄의 종된 사람들은 하나님의 정당한 진노와 형벌을 받는다. 다음으로, 성년이 되어서야 개심한 신자들은 그가 일찍 개심하지 못한 것을 항상 슬퍼해야 한다. 우리가 성년이 되어 은혜를 입은 후에는 우리의 과거 생활을 한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어떤 신자라도 자신의 중생 이전의 어둡던 생활을 고통과 혐오감으로 회상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이 혐오감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거역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우리는 우리와 우리의 이웃들의 자녀들이 가능한대로 일찍 개심 하도록 전도에 힘써야만 한다. 부모들은 그들의 자녀들이 어떤 나이가 되어 복음에 대해서 반항적이 된 후에야 그들에게 전도하려고 하지 말고, 부모들은 일찍부터 자녀들에게 하나님에 관한 교육을 힘써야만 한다. 우리 자녀들의 개심 때의 나이가 어리면 어린 만큼 부모들은 기뻐할 일이다. 이상의 몇 가지는 착오가 없게 하기 위해 적은 것들이다.

 

우리가 토마스 굳윈을 따라서 살펴보기로 한 문제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그의 피택자들 중 매우 많은 사람들을 어릴 때에 부르지 아니하시고 성년이 되어서야 부르신 데도 어떤 유익이 있다면, 그 유익은 무엇이겠는가? 하는 점이다. 굳윈은 그 유익들을 아래와 같이 들고 있다(우리의 구원에 있어서의 성령의 사역, 제2권. 4-8장 참고).

 

첫째로, 그 유익은 하나님의 사랑, 자비, 은혜가 드러나고 과시되는 일이다. 왕의 영화의 척도는 그 백성의 많음에 있다. 하나님의 은혜도 그러하다. 굳윈은 하나님의 은혜는 '의를 통한 통치'(로마서5:21)라고 주장하며, 이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는 이 세상에서, 우리의 눈 앞에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나타남은 므낫세와 같이 '그 불의가 하늘에 미치는' 죄인들의 개심을 통하여 더욱 잘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는 만일 피택자들이 모두 영아기와 유년기에 구원된다면 나타날 수가 없다고 굳윈은 생각한다.

 

다음 또 하나의 이유는 이것이다. 즉, 이 사실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얻는 유익이 한 두 가지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첫째 성년 후에 개심한 사람들은 바울과 같이, 자신들에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를 항상 쉬지 않고 감탄하며 감사하게 된다. 그들은 믿기 이전의 그들의 부끄러운 삶을 자신에게와 타인에게 거듭거듭 토로하면서 그들을 그처럼 변화시켜 주신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를 항상 기회 있는 대로 증거 하게 된다. 이런 은혜는 만일 모든 신자가 유년기에 개심 한다면 있을 수 없는 은혜이다.

 

다음으로 이처럼 후년에 개심한 사람들은 그들의 믿지 않는 친척들과 친구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위해 힘쓰게 된다. 굳윈은 '그리스도는 영혼들의 실제적 개심을 그의 형제들에게 위임하시기 위해 승천하셨다'고 잘 표현했다. 이 말은 인간의 구원에서의 하나님의 은혜의 필요성을 간과하고서 한 말이 아니고, 사람의 구원에 사용되는 신자들의 특권을 강조하려는 말이다. 굳윈은' 그리스도는 그 귀한 일을 우리 신자들의 손에서 뺏지 아니하셨다. 그리스도는 아버지가 그의 자녀들을 구원시키는 기쁨이 얼마나 큰지를 아셨고, 아내가 자기의 남편을 구원시키는 기쁨이 얼마나 큰지를 아셨다‥‥‥‥ 그리스도는 신자가 누릴 수 있는 기쁨으로서 그가 하나님 자신을 즐거워하는 기쁨 다음으로는 죄인을 구원하는 기쁨이 가장 큰 것을 아셨기 때문에' 이렇게 하셨다고 말한다. 그리스도는 이 일을 위해서 천사들을 고용하지 아니하시고, 우리들 인간들을 위해 이 일을 남겨 두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 계획에는 마침내 멸망할 사람들에 대한 배려도 들어 있다고 한다. 성년이 된 친구가 놀라운 은혜로 말미암아 개심 하는 것을 목격하는 일은 끝까지 회개치 아니한 악인에게 깊은 죄책감을 일으키게 한다. 그러한 악인들은 심판 날에 그들의 친구들의 회개를 보면서도 개심치 않았던 자기들의 죄악을 분명히 깨닫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의 날이 준비된다고 굳윈은 말한다. 하나님의 이 계획에는 하늘의 천사들과 지옥의 마귀들을 향한 배려도 남겨 있다고 한다. 오랫동안 죄악 중에 살던 죄인이 구원을 받는 광경은 모든 천사들에게 매우 큰 기쁨을 준다는 것이다. 굳윈은 여기서 생동감 있는 예화를 든다. 즉, 하나님은 이렇게 계속되는 구원을 통해서 천사들을 '즐겁게' 해주시는데. 마치 옛날 로마 황제들이 그들의 시민들에게 '구경거리'(spectacula shows)를 마련해 주었던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도 땅에서 계속되는 이 구원을 천사들에게 구경시켜 주시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이다. 얼마나 장엄한 사상인가!

 

한편 하나님께서는 사탄을 곤혹케 하신다. 하나님은 이런 구원을 통해서 마귀를 실망시키고 좌절케 하신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그의 피택자들 중 성년기에 구원을 얻게 되는 사람들을 통하여 옛날 에덴에서 그가 하신 말씀대로 "여인의 후손과 마귀의 후손" 사이에 있어오는 원수를 하나님이 직접 마귀에게 갚으신다는 것이다(창3:15). '피택자라도 개심하기 이전엔 모든 불신자들과 같이 본질상 차이가 없는(엡2:2) 죄인이므로 그는 마귀의 완전한 지배하에 살아왔는데, 하나님께서 마귀의 그런 지배를 물리치시고, 피택자를 구원하시니 10년, 20년 자기 손 안에 잘 있던 죄인들, 자기와 영원히 지옥에서 함께 지날 줄로 믿었던 죄인들을 갑자기 하나님에게 뻬앗겼을 때 사탄이 얼마나 실망하겠는가?'고 굳윈은 묻는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탄은 이런 때야말로 "물 없는 황무지나 광야에 쫓겨나서", 부끄러워 머리를 들지 못하고 우울하게 혼자 배회할 것이라고 굳윈은 상상한다. 토마스 굳윈의 말이 옳다면, 이상의 이유들 때문에 하나님은 그의 피택자들 중 다수를 늦은 성년기에 구원하시토록 정하셨다는 것이다. 모든 피택자들이 그들의 모태에서 구원을 받는다면 이런 좋은 일들이 일어날 수가 없었을 것이며. 그의 자녀들에 관한 하나님의 지혜는 흠잡을 여지가 없다고 굳윈은 결론을 맺는다.

 

필자가 굳윈과 함께 지난 시간은 헛되지 않았고, 이제 그 소득을 독자들과 나누게 되어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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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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