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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칼빈의 사도행전 주석(13:4-41)

baromi 2009. 3. 3. 08:39


칼빈의 사도행전 주석(13:4-41)

 


24절. 회개의 세례……

세례는 율법의 의식과 관습에 반대되는 것이었으며 크나큰 변화의 징조였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오심 이전에 무엇을 변경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을 통해서 자신들의 세례의식을 갖고 있었으며 회개의 단련도 있었다. 그러나 요한은 오랜 동안에 걸쳐서 바라고 대망해 온 회복에 대한 소망을 주는데 있어서 전적으로 새로운 세례를 창시한 사람, 아니 그것의 시행자였다. '회개의 세례'라는 말로 그는 사죄의 여지를 제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시 상황을 고려해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을 뿐인데 왜냐하면 세례는 그리스도의 신앙에 대한 예비 단계였기 때문이다.

27절. 응하게 하였도다.

여기서 우리는 이해력이 없는 피조물 뿐 아니라 마귀와 모든 불경건한 자들까지도 하나님을 섭리 아래 있어서 그가 자신의 마음에 결정하신 점을 이들에게 시행하신다는 점을 알게 된다. 마찬가지로 제 3장 17절이하와 4장 28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원수들이 그의 파멸에 전적으로 미쳐 있었지만 그들은 그들의 소기의 성과를 성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도에 따라 결정해 놓으셨던 일을 그들의 노력으로 성사시켰다는 말이 나온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약속을 성취하실 뿐 아니라 그의 계획을 달성하는 데 진력을 다한다는 점에서 신령한 진리는 더욱 더 칭송을 받아 마땅하다. 하나님의 진리의 철천지 원수들까지도 그것을 성취하도록 강요를 받을 정도이니 어떻게 그것이 굳굳이 서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사단을 하나님과 혼동하지 않으려면 분별력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그들이 성경을 성취했다 해서 용서를 받을 수 없는 것은 그 결과가 아니라 그들의 타락한 의지가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결과로 말하면 사실, 그들이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 아니 기적과 같은 것이었다. 그들의 행동 자체만 놓고 본다면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배치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교묘하게 서로 상충되는 태양과 다른 혹성들의 진로를 조절하듯이 그는 자신의 은밀한 영향력으로 불경건한 자들의 사악한 노력을 그들의 생각과 의도와 정반대 방향의 목적으로 돌려놓아 그들이 당신께서 뜻하신 것 이외의 것을 전혀 실천하지 못하게 하고 만다. 이 사람들 본인들로서는 분명히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는 행동을 하지만 그 결과는 신기하게도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것이다. 이 절차는 이치에 어긋나는 것이므로 육신적인 지혜가 그것을 볼 수 없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따라서 이것은 신앙의 눈으로만 파악할 수밖에 없다. 아니 그것은 마땅히 경외와 흠모의 대상이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가지고 잔소리를 펴대는 개들의 성급함 따위는 아예 무시하도록 하자.

29절. ……다 응하게 한 것이라.

또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 성취되도록 허락하신 일들을 다 응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은 성경의 예언이 하나도 소홀한 취급을 받지 않을 정도로 그들이 그리스도를 취급했다는 말이다. 이렇게 해서 육적인 마음이 십자가의 수치를 보고 상상하는 장애물이 제거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아들은 그의 원수들의 광적인 분노에 내맡겨진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결정에 따라서 죽음을 당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오래 전부터 그에게 어떠한 상황이 예정되었는가 하는 점이 성경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그를 죽인 바로 그 자들이 그리스도를 매장했다는 누가의 말은 복음 이야기와 모순되어 보이지만 누가는 매장이라는 단어를 그저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을 이 동일한 사람들에게 적용한다해도 이것은 대유법적인 의미로 볼 수 있다. 말하자면 그는 빌라도의 허락에 따라 매장되었지만 한편 경비병들이 무덤에 배치된 것은 제사장들의 결정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정작 그리스도를 돌 무덤에 안치한 사람들은 요셉과 니고데모였지만 이 임무를 유대인들의 일로 돌려도 부정확하거나 모순되지 않는 것은 여기서 바울의 의도가 이 친절한 행위를 칭찬하는데 있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원수들이 그를 봉하고 경계를 폈던 바로 그 돌무덤에서 그를 끌어냈다는 점에서 그의 부활을 입증하는데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리스도의 몸이 은밀한 방법이나 도둑질을 통해서 옮겨진 것이 아니라 그의 원수들이 자주 드나들며 경계를 폈지만 그 몸을 찾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이 부활의 확실성을 추론할 수 있다.

32절. 우리도…… 너희에게 전파하노니.

그러나, 율법 시대에 살고있던 자들은 또한 이 약속을 누린 자들이 아닌가하는 질문이 여기서 제기된다. 나는, 우리들이 같은 은혜를 누린다 해서 우리 사이에 큰 차이가 있는 것을 막을 도리는 없다고 대답하겠다. 그러나 여기서 바울의 의미는, 하나님의 모든 약속의 예와 아멘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기 전에는 그들의 신앙은 말하자면, 불안한 상태에 있었다는 뜻이다. 이것은 그가 고린도후서 1장 19, 20절에서 가르치고 있는 그대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제공하는 동일한 하늘 나라의 상속자요, 그 동일한 축복의 참여자요, 하나님께서는 또한 그들에게 오늘날 우리 축복의 본질이 되는 그리스도로 말하면 그들에게는 약속되었을 뿐이지만 우리들에게는 실제로 허용되었으며 그들은 멀리 계시는 그를 대망하는 것으로 그쳤지만 우리에게는 그의 임재가 있다.

33절. 우리 자녀들에게(그들의 자손 곧 우리들에게)……

바울은 틀림없이 거룩한 조상들에게서 태어난 혈육의 자손들을 두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뭐든지 비유적으로 해석하는 광신자들은 이것을 꼭 믿음의 후손들로 보이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허구를 통해서, "나는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창17:7)는 하나님의 성스런 언약을 무의미하게 만들뿐이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는 것은 믿음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나는 정반대로 아브라함의 육신적인 자손들도 그들이 자신들의 불성실로 스스로 끊어져 나가기 전에는 하나님의 영적 자녀로 보아야 한다는 입장을 취한다. 말하자면 가지가 본성상 거룩한 것은 그들이 자신의 과오로 더러워지기까지는 거룩한 뿌리에서 나온 자들이기 때문이다(롬11:16). 그리고 바울의 의도는 확실히 유대인들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데 있었다. 그러나 이런 일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그들은 먼저 특권을 통해서 일반적인 반열에서 구별되고 제거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의 은혜가, 저 미친 사람들이 저주하는대로 육적인 후손에게만 국한된다는 결론이 따르지 않는 것은, 비록 생명의 약속을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상속받았다 해도 자신들의 불신앙 때문에 이것을 상실하고만 사람들이 수없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렇게 많은 사람들 가운데 자손으로 취급되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것은 신앙 때문이다. 사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구별하시는 기준은 신앙이다. 이것이 내가 앞에서 지적한 선택의 이중성이다. 그 하나는 하나님의 첫 번 입양에는 아브라함의 온 가문이 포함된다는 점에서 온 민족 전체에게 공통적으로 미치는 일반적인 선택이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최종적인 믿음으로 확증되어 인간의 확실한 소유가 되는 한정되고 있는 선택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약속하셨던 것이 유대인들을 위해서 성취되었다는 바울의 주장은 아주 타당하다. 왜냐하면, "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신 맹세라. 이것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셨도다"(이 후반부는 한글 개역 성경엔 없음;눅1:73)라고 하는 사가랴의 노래처럼 이 약속은 이미 그들과 맺어졌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민족의 가치성이 그리스도의 은혜가 같은 시간에 온 세상에 퍼지는 것을 가로 막을 수 없는 것은 장자가 제일가는 영광을 누리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다음 자리는 그의 형제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옛날 백성이 상속을 받지 못하고 교회의 소유가 낯선 사람들 몫으로 비어 있게되자 이방인으로부터 교회를 모으는 새로운 기회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이 백성이 설령 이 신앙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 해도 이방인들이 불러모아져 이 영예를 함께 누리게 되었을 것이다.

39절.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이 구절은 '칭의'의 의미를 구원받고 용서받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사죄에 대해서는 다른 곳에서 이미 지적한 바 있는데 바울은 그것이 그리스도의 은혜 이외의 것으로 얻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이미 명백히 지적한 바 있다. 혹 율법에서 무슨 대비책이 있지 않을 까 하는 마음에서 그것을 뒤지는 사람이 없도록 하는 뜻에서 그는 거기에는 전혀 효과적인 것이 없는 것으로 대답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 의미는, 인간이 율법안에서 죄로부터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는 것은 율법적인 의식은 죄책을 제거하는데 있어서 지불해야하는 올바른 속전도 적합한 속전도 아니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이 율법의 의식은 의를 가져오는데 있어서 무력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데 있어서 적합한 보상도 아니다. 이 칭의와 사죄의 관계를 말하자면 바울은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 덕분에 용서받는 다는 점을 확증하는 뜻에서 여기에 반대되는 반론을 모두 제거하고 있는 셈이다. 반면에 그는 율법의 제사나 모든 의식이 우리의 죄로부터 우리를 의롭게 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영원한 죽음의 죄책과 심판으로부터 거저 해방된 사람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칭의를 받는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우리의 죄를 전가하지 않으심으로써 우리를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신앙의 의이다.

로마 가톨릭에서는 우리가 용서와 자비로운 용납에 의해서가 아니라 본성과 주입된 의에 의해서 의롭다는 점을 주장하는데 앞에서 말한 올바른 의미는 이 잘못된 말을 충분히 반박하고 남음이 있다. 따라서 우리는 바울의 본문이 추잡하게 갈기갈기 찢겨지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 본문은 분명히 우리가 '모든 일에…의롭다 하심을 얻는'것으로 말하고 있으며 여기에 따라서 사죄가 우리에게 보장된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점은, 의를 획득하는데 있어서 제일가는 수단으로서, 혹 그리스도 이외에 다른 무엇이 있다고 칠 경우, 율법과 그리스도가 비교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바울은 죄를 속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달랠 수 있는 모든 수단으로서 여러 가지 의식을 논의하고 있다. 하지만 율법의 모든 의식 가운데 그 어느 것도, 마치 새로 쓰여진 계약서마냥, 인간을 죄책으로 옭아 매지 않는 것이 없었다(골2:14).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무슨 말을 할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인간이 오로지 그의 아들의 죽으심에 의해서만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자 하신 것은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기 때문이다(고후5:21). 여기서 인간들이 고안해 내는 모든 속죄 행위(satisfaction)는 그리스도에게서 그의 영광을 탈취할 뿐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율법 안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표현은 히브리 숙어에서 볼 때 "율법에 의해서"와 "그리스도에 의해서"라는 말과 같다.

모든 일에 이 구절은 로마 가톨릭의 불신적인 착상, 곧 세례 이전의 원죄와 실제로 범한 죄만 그리스도에 의해서 대속된다는 소리를 반박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우리의 전 생애에 걸쳐서 우리가 그리스도에 의해서 죄로부터 의롭게 된다는 점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사실 여기서 명심해야 할 점은, 율법의 의식이 유대인들에게 위탁되어 있었으며 그 결과 그것의 호응성과 사용이 교회에서 날마다 살아 있었어야 했었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바꿔 말하자면 계속적인 속죄 양식과 정결 의식이 공연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유대인들에게 깨닫도록 하려는 뜻에서 율법의 의식이 그들에게 위임되었다는 말이다. 이 모든 것의 실제와 본질이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된다면 죄를 파멸하는 제사로서 그의 죽음 이외에 다른 것이 있을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렇지 않을 경우 이 죽음과 옛날 상징과의 사이에는 어떠한 유사점도 있을 수 없게 되고 말 것이다. 로마 가톨릭에서는 우리에게 참회와 교황권(the keys)을 강조하는데 이것은 옛날 율법적인 여러 의식이 사실 참회에 대한 단련이었으며, 하늘 문을 열고 닫는 능력도 이것과 관련이 있었다는 점을 부정하는 셈이다. 그러나 경건한 자들의 신앙은 그러한 보조수단을 통해서 오직 중보자의 은혜만 바라보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허용되고 있는 의는 단 하루나 한 순간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이요, 그 결과 그의 죽음의 제사가 날마다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시키고 있다는 이 원칙을 결정적인 것으로 고수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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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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