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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로이드존스의 아름다운 은퇴와 말년(1968-81)

baromi 2009. 2. 13. 08:31

아름다운 은퇴와 말년(1968-81)

 

목회2000'에 실린 글입니다.

 

1968년에 로이드 존스는 심한 병을 앓았다. 로이드 존스는 이 병이 더 넓은사역지로 나아가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인도라고 믿었다. 웨스트민스트에서의 규칙적인 설교와 목회가 그에게는 점점 벅차게 느껴졌기 때문에 마침내 그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교회를 사임하게 되었다. 로이드 존스는 1968년 은퇴이후 1981년 하나님의 품으로 부름받기까지 참으로 아름다운 인생의 말년을 보냈다. 어떤 면에서 로이드 존스는 자신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잇는 웨스트 민스트 교회의 목회자로서의 30년보다도 은퇴 이후 소천할때까지의 남은 13년간의 기간이 더욱 알차고 보람있었다고 할 수도 있다.

 

로이드 존스는 은퇴이후 크게 3가지 방면에서 자신의 삶을 마무리 했다. 첫째 가족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더욱 많아져서 가족들과의 행복한 시간을 많이 가지게 되었다. 둘째 웨스트민스트 교회에서의 정규적인 사역에서 해방이 되자 로이드 존스는 자유롭게 더 많은 지역과 교회들을 대상으로 순회설교 사역을 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오히려 사역의 집중도 면에서는 자신과 함께 복음주의 교회의 순수성을 위해서 협력하는 목회자들에게 더욱 상담과 편지와 전화를 통해서 그들을 세우고 격려하는 일에 헌신할 수 있었다. 셋째, 그동안 자신이 행했던 설교들을 이제 책으로 발간하는 저술사업에 몰두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모든 일들은 자신의 사역기간과 조금도 변함없이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교제를 최우선 하는 삶 가운데서 진행되었기 때문에 로이드 존스는 자신의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조금의 시간낭비나 허트르짐없이 온전히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다가 갈 수가 있었다. 은퇴이후 로이드 존스의 삶은 참으로 행복하고 만족한 가운데서 자신의 일생을 잘 마무리했던 아름다운 시간들이었다.

 

1. 가족과의 행복한 시간을 보냄

은퇴이후 로이드 존스는 두 딸의 집에서 번갈아 가면서 지냈다. 큰 딸 엘리자베스의 집은 발샴에 있었고, 작은 딸 앤의 집은 런던에 있었다. 따라서 로이드 존스 부부는 런던의 작은 딸 집에서 머물다가 장기간 큰 딸 엘리자베스의 집에서 보내곤 했다. 작은 딸을 통해서 3명의 손주들이 있었고, 큰 딸을 통해서도 3명의 손주들이 있었다. 로이드 존스는 이들 손주들과 함께 토론도 하고, 게임도 하는 것을 아주 즐겼다. 그는 자기의 자녀들만이 아니라 자신의 손자, 손녀들의 삶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나이가 많은 손주들과는 정치가들이나 시등의 주제에 대해서 토론을 하기도 하고, 조금 더 어린 손주들과는 학교문제나 텔레비전 프로그램, 레슬링에 대해서 기꺼이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가족들중에서 누군가가 좋아할 것으로 생각되는 책이 있으면, 그 책의 내용을 이야기 해주거나, 그런 책을 선물로 사주기도 했다.

로이드 존스는 또한 고등법원 판사로 있던 자기의 형제 빈센트와 그의 가족들과도 매우 가깝게 지냈다. 그는 자신의 동생 빈센트와 현재와 과거의 일들에 대해 함께 대화하는 것을 즐겼다. 두 사람 도두 문학과 오페라를 좋아했으며, 익살떠는데 소질이 있었던 것이다. 로이드 존스는 웨일즈에 있는 그의 친척들을 자주 방문했는데, 그의 친척들중 다수는 농사짓는 일을 하고 있었고, 그들은 자신들의 성공한 조카를 무척이나 자랑스럽게 여겼다. 로이드 존스는 자신의 부인 집안이 필립스 집안과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특히 1904년 부흥운동의 기수였던 에반 필립스가 이 가문 사람이었다는 것을 로이드 존스는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하기도 했다.

 

이처럼 로이드 존스에게 있어서 목회일선에서의 은퇴는 가족들과의 친밀한 관계를 돈독히 하며, 행복한 가정생활을 만끽 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였다. 목회일선에서 너무 바쁜 나머지 가족들의 생활을 방치하다시피 하는 우리 한국교회의 일반적인 현실을 감안 할 때, 목회현역에서는 물론이지만 이렇게 은퇴이후에는 더욱 가정에 충실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함을 우리는 로이드 존스의 말년을 통해서 자극받게 된다.

   

2. 목회자의 목회자로서의 사역에 집중함

1970년대의 영국 복음주의는 한마디로 ‘혼란’이었다. 로이드 존스는 이렇게 된 가장 중요한 원인이 점진적으로 교리적 확신이 약해진 결과라고 생각했다. 영국 복음주의에서 교리에 대한 확신이 약해진 것은 주로 두 가지 원인때문이었다. 첫 번째는 국교회 복음주의자들의 태도때문이었다. 1966년의 복음주의 분열이후 영국 국교회내에 있던 복음주의자들은 더욱 더 에큐메니칼 운동에 동조하는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교리보다도 연합을 강조하는 결과 교리 약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또한 1963-4년에 시작된 은사주의 운동은 두 번째로 영국 복음주의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은사주의 운동이 영향을 미치는 곳마다 ‘은사’와 ‘체험’에 대한 강조가 이루어졌다. 은사주의 운동에서는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라고 말하는 대신 ‘성령께서 오늘 하시는 말씀을 들으십시오’라고 한다. 또한 성경의 진리에 대한 믿음대신에 체험을 대체했다. 이러한 경향은 필연적으로 교리적 기독교를 약화시키는데 크게 영향을 미쳤다.

 

로이드 존스의 은퇴이후의 사역은 1970년대의 이러한 복음주의적 배경속에서 이루어졌다. 로이드 존스는 은퇴이후 자신의 사역 방향을 복음주의적 확신을 가진 남은자들에게 집중하는 것으로 정했다. 이것은 1966년 복음주의 분열이후 영국 국교회내의 복음주의자들과의 단절로 인해 국교도내의 복음주의자들에게 영향을 미칠수 있는 통로가 없어졌기도 했지만 더욱 적극적으로는 로이드 존스가 의도적으로 자신의 사역을 자신을 따르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집중했다. 이것은 남은자들을 통한 교리적 기독교의 보존이 이후에 있을 영광스러운 날을 위한 대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로이드 존스는 웨스트민스트 목회자 동우회 모임과 웨스트 민스트 대회가 1966년 복음주의 분열이후 새롭게 재건되자 이 모임에 참석하는 사람들 그리고 자신의 요청을 따라서 교리적으로 혼합된 교단을 나온 목회자들을 격려하고 그들을 돕는 것에 자신의 사역을 집중적으로 투자했다. 따라서 로이드 존스의 순회 설교의 양을 결코 목회일선에 있을 때 보다 줄어들지 않았다. 그러나 로이드 존스의 사역범위는 훨씬 더 자신과 관계하고 있는 목회자들에게 집중할 수 있어서 더욱 효과적이었다. 로이드 존스는 목회자의 목회자로서 이들 수많은 목회자들을 개인상담과 편지와 전화를 통해서 그들의 목회와 개인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도록 도와주었다. 로이드 존스는 특별히 질병으로 부득이한 상황이 아니면 매달 열리는 웨스트민스트 목회 동역자 모임의 의장으로서의 역할과 매년 열리는 웨스트민스트 대회의 의장직을 충실하게 감당했고, 베너오브트루사에 대한 지원과 복음주의 도서관 사역을 집중적으로 지원했다. 그리고 질병으로 도저히 설교할 수 없게 된 임종하기 몇 달 전까지 로이드 존스는 계속적인 순회설교를 하면서 사람들을 도왔다.

 

이러한 목회자의 목회자로서 로이드 존스가 1970년대에 자신을 존경하며 따르던 복음주의 남은자들에게 강조한 것은 ‘개혁과 부흥’의 중요성 이 두 가지 였다고 볼 수 있다. 개혁이란 교리적 기독교를 약화시키는 에큐메니칼 정신과 은사주의 운동에 반대되는 하나님 말씀의 진리에 대한 순종이었다. 로이드 존스는 기독교는 무엇보다 객관적 진리를 바탕으로 하는 것임을 기회가 있을 때 마다 강조했다. 교회는 바른 교리에 의해서 교회답게 될 수 있다. 이것이 로이드 존스가 의미한 개혁이었다. 그러나 로이드 존스는 한편 객관적인 교리만 강조하고 체험이나 열정이 없는 메마른 기독교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로이드 존스는 일생동안 부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부흥이란 하나님의 특별한 주권적인 은혜로서 교회를 교회답게 해주는 가장 강력한 하나님의 방법이기도 했다. 로이드 존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교회가 개혁되어야 하는 개혁의 중요성과 성령의 충만함으로 교회가 생명력있는 삶을 살아야 하는 부흥은 결코 양자 택일의 문제가 아니었다. 개혁과 부흥에 대한 균형잡힌 시각을 보여주었다. 매일 매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 요구되는 개혁은 어떤 면에서 부흥에 대한 가장 필요한 준비이기도 했다. 로이드 존스가 그의 남은 생애동안 계속적으로 영국 복음주의에 강조했던 것은 바로 이 ‘개혁과 부흥’ 이었다.  

 

3. 저술활동에 몰두

웨스트민스트 교회 사역의 은퇴는 로이드 존스에게 새로운 사역의 시작이었다. 은퇴이후 로이드 존스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은 저술활동이었다. 이전에 웨스트민스트에서 설교했던 내용을 책으로 편집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우리가 잘아는 로이드 존스의 로마서 강해와 에베소서 강해와 같은 20세기의 강해설교집의 걸작들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로이드 존스의 이러한 저서들을 통해서 로이드 존스의 설교를 통한 영향력은 영국을 넘어서서 전 세계로 확산되게 되었고, 전 세계의 수많은 목회자와 평신도들의 신앙성장을 돕게 되었다.

 

설교 테이프를 설교집으로 만드는 과정은 테이프를 풀기만 하면 되니까 쉬울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로이드 존스의 설교테이프는 다음과 같은 아주 길고 복잡한 과정을 거쳐서 설교집의 원고로 다시 작성되었다.

1. 비서인 엘리자베스 버니부인이 설교테이프를 풀어놓는다. 버니는 1948년 웨스트민스트 교회에 와서 70년때까지 약 30년간 지속적으로 로이드 존스의 설교 테이프를 녹취해서 원고로 옮겨쓰는 작업을 도왔다. ⇒2. 로이드 존스가 이 풀어놓은 설교원고를 다시 검토해서 편집하고 다듬는다.⇒3. 버니 부인이 이것을 다시 타이핑한다. 4. 휴톤이 다시 필요한 부분을 교정하고 표현의 명확성등에 대한 제안을 한다. 5. 로이드 존스가 최종수정을 한다.

 

웨스트민스트 교회에서 행한 로이드 존스의 설교는 2차대전이후 많은 사람들이 속기로 받아적은 후 나중에 원고를 만들었다. 그러다가 1953년 녹음기를 설치하고 난 이후에는 속기하는 일이 불필요하게 되었고, 대신에 버니 부인이 녹음된 설교테이플 원고로 푸는 일을 계속했기 때문에 1968년 로이드 존스가 은퇴했을때는 이미 막대한 분량의 설교원고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수많은 설교원고들 중에서 어느 내용부터 책으로 만들 것인가는 로이드 존스에게 너무나 분명했다. 로마서 강해설교가 가장 먼저였고, 그 다음이 에베소서 강해설교였다.

 

로마서 강해와 에베소서 강해시리즈

드디어 역사적인 로마서 강해 시리즈의 첫 번째 책이 1970년에 출간되었다. 3:20-4:25절까지의 강해로서 속죄와 칭의라는 제목이었다. 이후 해마다 1975년까지 6년동안 다음과 같은 순서로 출간되었다. 1971년: 구원의 확신(5:1-21), 1972년 새사람(6:1-23), 1973년 율법(7:1-8:4), 1974년 하나님의 아들(8:5-17), 1975년 궁극적 구원의 보장(8:17-39). 이렇게 로마서 시리즈는 로이드 존스의 생애동안 6권이 출간되었고, 로이드 존스의 사후에 지금까지 다음의 6권이 더 출간되어 현재 총 12권의 시리즈로 구성되어 있다. 로이드 존스가 1975년까지 로마서 강해를 출간하다가 잠시 중단한 것은 에베소서 강해를 출간하기 위해서 였다. 1972년 에베소서 강해 시리즈의 첫권이 이반젤리칼 프레스에서 2:1-22절이 하나님의 화해방법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1973년 로이드 존스는 에베소서 전체를 베너오브 트루스사를 토애 발간하기로 결심하고 1974년부터 1980년까지 1974(성령안에서의 삶(5:1-6:9), 1976(그리스도인의 영적 전쟁(6:10-13)1977(영적 군사(6:10-20), 1978(하나님의 궁극적 목적(1:1-23), 1979(영적 화해(2:1-22), 그리스도의 충만하심(3:1-21), 1980(영적 연합(4:1-16)등을 차례로 출간했고, 사후 1982년 어두움과 빛(4:17-5:17)이 출간됨으로써 에베소서 강해 시리즈 전 8권이 완성되었다.

 

설교집의 영향과 평가

이러한 설교집의 발간으로 말미암아 로이드 존스의 은퇴이후의 삶은 로이드 존스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시기가 되었고, 1970년대는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십년이 되었다. 로이드 존스의 로마서 강해집과 에베소서 강해집은 20세기 설교사에 새로운 기원을 열었다. 이것은 청교도적 강해설교 전통의 회복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후에 로이드 존스의 이러한 강해설교집의 형태로 다른 수많은 설교자들의 설교집이 발간되는 새로운 전통의 모체가 되었다. 이안 머레이는 로이드 존스의 출판사역을 이렇게 평가했다.

“1950년대에 웨스트민스트 예배당 강단의 영향력이 크기는 했지만 그 범위는 제한되어 있었다. 그러나 20년후 비록 로이드 존스의 웨스트민스트 사역은 끝났지만 책을 통해 전 세계에 은혜의 교리를 사모하는 수 맣은 사람들에게 빛과 확신을 심어 줌으로써 그 강단은 세계의 강단이 되었다.”

 

나는 로이드 존스의 저서들이 발간되지 않았더라면 오늘날 로이드 존스의 영향력은 이처럼 크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로마서 강해와 에베소서 강해 설교집이 아니더라도 로이드 존스는 분명 20세기 영국의 한 훌륭한 설교자로서 영국 복음주의 역사를 장식하는 인물정도는 되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로이드 존스의 설교 영향력이 오늘날 전 세계 복음주의 설교자들에게 이처럼 심오하게 미치고 있고, 수많은 설교자들이 로이드 존스의 설교에 자극을 받아 설교자로서의 자신의 소명을 새롭게 하는 일들은 드물었을 것이다.

 

은퇴이후 아름다운 말년을 보낸 비결

우리 인생에 은퇴가 어디 있겠는가? 넓은의미에서 인생의 은퇴란 곧 죽음일 것이다. 그러나 좁은 의미로 평생을 목회자로서 부름받아 목회사역에 헌신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목회일선에서 물러난다는 것은 그의 사역으로부터 은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평생의 사역으로부터 은퇴한다는 것은 참으로 그의 일생에 있어서 큰 변화일 것이다. 우리는 로이드 존스의 은퇴이후의 삶을 통해서 우리의 은퇴이후의 삶에 대한 조망이나 우리 한국교회의 은퇴이후의 목회자의 삶을 되돌아볼 수 있는 지혜를 얻게 된다. 우리는 주변에서 교회 지도자들 가운데 아름다운 은퇴와 추한 은퇴를 하는 경우를 보곤 한다. 사역을 시작할 때와 사역에서 물러설 때를 아는 것은 참으로 큰 지혜이며,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를 경험하는 기회이기도 하다. 그런데 하나님의 섭리에 잘 순복하는 경우에는 아름다운 은퇴와 은퇴이후의 삶을 누리기도 하고, 그렇지 못할때는 은퇴와 은퇴이후의 삶 때문에 오히려 현역에 있을 때의 공적을 다 허물어 뜨리는 경우를 보기도 한다. 어떤 분들은 은퇴이후 급격히 자신의 삶이 무너져 내리는 경우가 있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은퇴이후에도 자신이 관여하던 사역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교회 사역에서 은퇴를 하고도 교회의 배후에서 직, 간접적으로 교회에 영향을 미치다가 새로 부임한 담임 목회자와의 갈등으로 교회가 어려움에 빠지는 경우들을 종종 보곤 하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후배 목회자들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준다. 현재 목회현장에서 최선을 다하면서도 때때로 어떻게 목회사역을 아름답게 마감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는 지혜가 필요한 것 같다.

 

왜 목회자가 교회사역을 마감하고도 말년을 아름답게 보내지 못하는가? 아마도 그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목회사역을 하는 기간동안 자신의 최우선 순위가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친밀한 관계이기 보다는 자신의 목회사역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로이드 존스의 삶을 들여다 보면 우리는 그의 삶이 사역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이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로이드 존스에게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사역을 시작하는 것과 마감하는 것도 그리고 사역을 진행하는 것도 사역자체가 목적은 아니었다.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가운데 진행된 것이었다. 로이드 존스의 사역을 통해서 당대의 수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받았지만 로이드 존스 사역의 제 일차적인 관심은 바로 하나님께 있었고, 자신의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었고, 자신의 거룩함에 있었다. 따라서 로이드 존스에게 있어서 사역이란 언제나 하나님과의 관계에 따르는 부수적인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언제나 시작하고, 언제나 내려놓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역을 통해 더욱 로이드 존스는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었다. 그것은 그의 임종의 순간까지 그의 삶을 아름답게 만들어준 가장 중요한 원동력이자 비결이었다. 하나님만을 경배하고,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하나님만을 즐거워하는 것에는 이 세상에서의 삶과 영원한 삶, 그리고 사역의 시작과 사역의 은퇴의 구분이 따로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4.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임종

로이드 존스는 1978년 12월 20일 그의 생애 80번째 생일만 하더라도 그의 스케쥴 수첩에는 여느 때와 같이 다음 1년동안의 스케쥴이 꽉 차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스케쥴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사실상 1979년에 그의 공적 생애가 마감되었다. 로이드 존스는 그의 오랜 친구 필립 휴스(Philip Hughes)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좋지 않은 겨울을 보냈다네. 내 폐가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네. 그래서 이후로 작은 수술을 하기 위해 병원에 가야했다네. 2월 첫째주 이후부터는 실제로 설교를 하지 않았다네. 그러나 지금 점차로 호전되고 있네... 좋은 날씨와 따뜻한 햇볕을 더 많이 쐬일수 있다면 곧 좋아질 것같네.”

 

이러한 희망은 이루져지지 못했고, 대신에 암 재발의 징후가 있었다. 1968년의 큰 수술이후로 1979년이전까지 1976년 가을 전립선 제거수술 한 것을 제외하고는 그는 아주 건강했었다. 이제 1979년에 고통스러운 질병의 징후가 있엇고 1969년이래 처음으로 그는 6월에 있는 발라 목회자 대회에 참석하지 못했다. 1979년 12월 20일 81번째 생일에 그는 사역을 시작한 이래로 처음 다음해의 스케쥴이 공백으로 남겨두었다. 로이드 존스는 자신의 공적 사역이 거의 끝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한번 죽는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자신이 언제 죽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평상시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는 잘 생각하지 않거나 준비를 하지 못한다. 그러나 나이가 어리든지 많든지 구체적으로 심각한 질병에 걸리게 되면 자신의 임박한 죽음을 의식하게 된다. 그리고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고, 준비하게 된다.

 

만일 우리 자신의 생애에 얼마남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까? 또한 어떻게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일까?

 

로이드 존스는 공적인 자신의 설교사역이 사실상 마감되고 난 다음 자신의 남은 생애를 주로 글쓰는 일을 하고 싶어했다. 1980년에는 그의 에베소서 시리즈가 거의 완성단계에 있었고, 이후 계속 로마서 시리즈를 완간하고 싶어 했지만 이제 그의 우선 순위는 자신의 영적 자서전을 쓰는 것이었다. 그는 79-80년 사이의 가을과 겨울에 자신의 영적 자서전 쓰는 것을 계획했으나 최종적으로 자서전을 쓰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 대신에 이안 머레이로 하여금 전기를 쓸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자 했다. 이안 머레이는 오랜 동안 로이드 존스의 전기를 쓸 수 있을 만한 자료들을 보관하고 있었지만 이 때까지 전기쓰는 것을 한번도 진지하게 이야기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 로이드 존스는 때까 되었다고 판단하고 자기가 도와줄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이안 머레이가 전기 쓰는 것을 도와주려고 했다. 그리고 전기를 쓰는 목적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는 당부를 했다.

 

왜 로이드 존스는 자서전을 쓰지 않았을까? 이안 머레이는 로이드 존스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지지는 않았다고 한다. 이안 머레이는 나름대로 그 이유를 이렇게 추측한다.

로이드 존스에게는 그의 신학과 성격에 이것을 반대하는 본능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로이드 존스는 자기에게 남아있는 마지막 시간을 가장 잘 사용하는 길이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했다. 먼저 그는 자신의 특별한 도움과 격려를 필요로 하고 있는 가족들과 자신의 전화나 편지를 필요로 하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시간을 사용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과 더불어 더욱 중요한 것은 죽음을 준비하는 시간이 매우 중요하다는 확신이었다. 즉 로이드 존스에게는 죽음을 준비할 시간이 필요했고, 그리고 남은 시간을 바르게 사용하는 것은 이제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의 가장 중요한 임무라고 생각했다. 이안 머레이는 1980년 3월 3일 로이드 존스를 만났을 때 이러한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고 한다.

 

10:45부터 12:30분까지의 대담에서 로이드 존스를 사로잡고 있었던 가장 중요한 생각은 바로 그의 죽음준비에 대한 것이었다고 한다. 로이드 존스앞에 높여있는 가장 큰 일은 바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삶의 활동으로부터 잠시 멈추어 서서 천국 준비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죽음을 과소평가하지 말게. 죽음은 마지막 원수라네.” 사람은 잘 살다가 잘 죽지 못하는 수도 있는 것이다.

 

“ 우리의 가장 큰 위험은 우리의 활동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것이다. 설교자에 대한 가장 궁극적인 테스트는 그가 설교할 수 없을 때, 어떻게 느끼는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기쁨의 궁극적인 원천이다. 우리의 설교나 다른 사람으로부터의 간증을 의지하는 것은 모든 설교자들에게 실제적인 함정이다. 우리는 그러한 것들을 의지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계속해서 로이드 존스는 죽음에 대해서 어떻게 두려움없이 죽을 수 있는가를 말했다. 두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는 죽음을 사실로서 직면하라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반드시 죽는다. 둘째는 성도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혼자 내버려두지 않으시며, 성도들이 죽을 때 그들과 함께 하는 자 가운데는 천사들도 포함될 것이라는 확신을 주시기 때문이다. 로이드 존스는 눅16:22절 ‘거지가 죽었을 때, 천사에 의해 아브라함의 품으로 이끌림을 받았다. ’는 것을 인용했다. 그리고 ‘나는 그 본문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천사들의 이러한 사역을 믿고 있네’

 

이안 머레이는 1980년 11월까지 로이드 존스가 기회있는대로 만나 대화를 나누며 전기 쓰는데 필요한 준비를 했다.

 

로이드 존스는 자신의 생애를 돌아보면서 자기 인생에 의미있는 것 중에 단 한가지도 자기 계획대로 된 것이 없다는 것을 고백했다. 1925년 신학교에 가려고 했던일, 그 다음에 웨일즈에서 평생 사역하려고 계획한 일들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신에 자신이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방향으로 자신의 삶이 이끌려갔다. 자신은 영국 전역의 순회설교자가 될 계획도 없었으며, 학생들의 교사가 되거나 책을 출간한 계획도 없었다. 웨일즈의 샌필즈에 갈 때 로이드 존스의 유일한 생각은 지역의 선교관에서 전도자가 되는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을 돌아볼 때, 그의 삶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으로 된 것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된 것이었다.  

 

로이드 존스의 자신의 삶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는 문제의 연속과 이것을 해결해나간 과정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특별히 당대 기독교의 방향과는 정반대입장에 서게 된 것은 사람들이 그의 재능이나 기질이나 혹은 웨일즈사람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쉬우나 사실은 하나님의 섭리였다고 말했다. 

 

1981년 2월이 되자 그의 육체는 급격히 약해져갔다. 로이드 존스는 2월 25일부터는 약을 복용하는 것 까지 거부했다. 죽음이 임박한 것을 알고 기쁘게 맞이하려고 했다. 2월 마지막 주간에는 목소리까지 나오지 않아서 고개를 끄덕이며 의사를 소통했다.

 

2월 26일 저녁에는 부인과 가족들을 위해 메모를 남기기도 했다. “ 낫기를 기도하지 말라. 영광을 막지말라”  

2월 28일 그가 50평생 매일 읽어왔던 맥체인 성경읽기표의 본문은 고전 15장이었다.

 

 

로이드존스연구사이트

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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