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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최후의 상태 /로이드존스

baromi 2009. 2. 2. 10:01

최후의 상태
D.M.로이드존스

사람들이 최후의 심판에 관한 진리를 깨닫기만 하면 세례요한과 우리 주님과 모든 사도들이 권면한 대로 “임박한 진노를 피할 수”(마3:7)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눈 아래,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여지게 된 것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그 시대 전체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 최후심판 교리에 주의하는 데 실패하는 이유
1. 심판 개념을 싫어함.
어떤 사람들은 심판이라는 개념 전체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소위 신학에 대해 ‘자유로운’견해를 지닌 사람들이 바로 심판 개념을 싫어합니다. 저들은 심판은 ‘과거에 문제가 되어 왔던 것’이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이 심판관으로 묘사되어 왔으나 심판은 사랑의 하나님에 대한 어떤 개념과도 어울리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2. 만인구원설을 믿음.
대다수의 사람들이 심판을 믿는 것조차 하지 않는데, 이것은 오늘날 유행하는 개념인 만인구원설(보편구원설이라고도 함, universalism)이라고 불리는 것으로서, 결국 모든 사람들이 용서를 받고 구원을 얻을 것이며 한 사람도 궁극적인 의미에서 징벌을 받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은 그분의 사랑을 통해 만인을 구원하시리라는 견해입니다. 그러한 주장을 믿는 다면 최후의 심판 교리에 관심을 가질 수 없을 것입니다.

3. 심판은 이 세상에서만 있다고 생각함.
우리가 직면하는 심판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경험하는 심판뿐이며 그것은 교정을 위한 목적으로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모든 징벌이 교정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세속적인 영역에서 들어온 개념으로 죄수들에 대한 현대 교정 치료의 근거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비성경적인 개념입니다. 성경에는 그 개념을 암시하는 단서조차 나타나지 않으며 실은 그 반대 개념을 가르칩니다.
우리는 징벌로서 사람들을 개선시킬 수 없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은혜로 사람들이 변화됩니다. 징벌은 징벌일 뿐입니다. 그러나 대중적인 사고는 징벌이 교정을 위한 것이라고 이해하는데 이러한 개념이 그리스도인의 사고에까지 침투하였습니다.

▶ 최후심판의 정의
성경이 최후 심판을 통해 의미하는 내용을 분명히 정의하는 일이 최선의 해결방법일 것입니다. 중요한 점은 최후 심판이 우리의 장래를 결정하는 것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장래가 선포되는 중요한 기회, 즉 결정이 공포되는 때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결정에 이르게 되는 기회가 아닙니다.
최후의 심판은 영원한 재판관에 의해 구원 얻는 자와 지옥에 들어갈 자의 영원한 자리가 선포될 기회입니다. 그러나 그 때 그러한 상태에 이를 것이 아니고 단지 선언할 뿐입니다.
최후의 심판에 관해 알아야 할 점은 그것이 하나의 중요한 공적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그 심판의 공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최후의 심판은 사람이 죽을 때마다 일어난다는 사고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사고는 완전히 틀린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 다음 세상으로 들어가는 것은 중요한 사건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때에 우리 장래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때가 최후의 심판은 아닙니다.
죽은 자가 일어나고 우리의 몸이 부활할 때는 종말, 즉 주의 재림 때가 적절할 것입니다. 온 세상이 함께 소집되고 모든 개인의 영원한 장래가 선포 될 때는 하나의 중요한 공적 기회일 것입니다. 장래에 대한 공식 선포이자 최후의 심판입니다.
시편96:13절 “저가임하시되 땅을 판단하려 임하실 것임이라”
행17:30-31절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히9:27절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 최후심판의 목적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아 온 자들이 보는 앞에서 나타내어지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최후의 주장입니다. 죄의 본질은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사단이 하나님을 대적하여 일어설 때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려고 시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은 최상의 것이므로 모든 것 위에 있습니다. 구속과 구원은 하나님의 영광이 최종적으로 완전하게 확립될 때까지 완성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주님께 속한 자들의 구원을 통해서만 아니라 계속 주님을 부인해 온 자들에 대한 징벌을 통해서도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최후 심판의 목적은 “하나님이 만유 안에 계시려 함”(고전15:28)이며, 그분의 영광과 위엄은 이와같이 놀랍고 주목할 만한 방식으로 주장될 수 있습니다.

▶ 심판관 - 주 예수 그리스도
그 심판(최후의 심판)을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재하시리라는 점에 대해서는 거의 의심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판단하실 것이나 하나님은 실제 판결을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위임하셨습니다. 성부 하나님은 심판은 그 아들에게 위탁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하나님이 인간을 심판하시기 때문에 그들은 공정한 기회를 갖지 못하고 있다고 불평하는 인간의 어떤 가능성도 미리 배제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신 “인자”(人子)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심판하실 이가 그 아들이라고 마태복음 25:31-32절에서 가르쳐지고 있습니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요5:21-23절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
요5:26-27절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빌2:9-11절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딤후4:1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 심판의 대상
심판의 대상은 선한자와 악한자 모두가 받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선한자와 악한 자는 동시에 부활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요한계시록 20장에 보면 책들이 열려 있다는 말씀이 나타납니다.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계20:12). 물론 이것이 성경적이지만 그 상징은 무엇인가를 나타냅니다. 그 상징은 두 부류의 사람들에 대한 심판을 가리킵니다.

최후심판을 단지 판결을 공포하는 기회일 뿐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인다면 말씀을 이해하는데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그 모든 말씀을 종합해 보면 그 위대한 날에 있는 자나 먼저 있는 자가 함께 설 것이며, 그들에게는 기록에 의해 판결이 선포되리라는 것이 명확해집니다. 그 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마25:21)라는 말씀을 들을 것입니다.

구속받은 자들과 구속받지 못한 자들, 즉 불경건한 자들은 그 판결 내용을 듣기 위해 하나님의 법정에 출두할 것이나 거기서 영원히 분리될 것입니다.
타락한 천사들도 그 심판의 날에 판결을 받을 것이라고 성경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2:4절은 이 타락한 천사들이 "심판 때까지 지키게 되어 있다"고 말씀합니다. 타락하지 않은 천사들이 그런 의미에서 그 심판 날에 출두하리라고 암시하는 내용은 성경에 전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타락한 천사들과 사단에게 속하여 그의 말을 듣고 따랐던 자들에게는 판결이 선포되리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고후5:10절에서 우리는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는 말씀을 읽을 수 있습니다. 분명히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오직 그리스도인인 신자들만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말은 신자들 중에 차별이 존재한다는 것을 반드시 의미합니다. 이것은 구원의 관점에서 할 말이 아니라 바울은 고전 3:15절에서 그 사실을 매우 분명히 확증하고 있습니다.

최후의 상태

사람의 공력이 모두 불타 없어진다 해도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을것입니다. 그는 어떻게 구원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는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 예수 그리스도라는 터 위에 있습니다. 바로 그 터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입니다. 우리으 행위와 공로로는 자신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습니다(엡2:8).
우리를 구속하여 구원하는 것은 주님과 그분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완전한 사역에 대한 우리의 믿음입니다. 우리의 선행은 차이를 가져오게 되고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우리는 모두 구원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동일하거나 동일한 지위에 머물지 않을 것입니다.
고전15:41절에서 바울은 그 사실을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바울이 설교자로서의 자신의 청지기직을 변호하는 데 그처럼 열정적이며 충실했던 이유는 자신이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서야 할 것을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두가지 개념은 개별적으로 마음에 간직합시다. 보상을 위한 이 심판이 그 큰 심판의 날과 관계되어 일어날 지 그 후에 일어날지는 성경이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 아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행한 일의 결과에 따라 그와 같은 차이와 구별이 존재하리라는 것이 전부입니다.

믿음으로만 의로워진다는 강조 속에서 행위에 근거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신실함에 근거한 차이를 잊어버리는 실수를 범한 위험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공격을 받는 이신칭의라는 중요한 교리를 위해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그 교리를 주장하는 중에 의로우신 재판관이신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행위를 지켜보고 계신다는 사실과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행한 행실이 다가오는 세상에서 영광 중에 거할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가르쳐 주는 다른 모든 가르침의 가치를 열어드리는 일은 매우 슬픈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가 드리는 말씀을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늘에는 슬픔과 탄식, 불행, 비참함, 눈물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완전한 기쁨, 충만한 행복, 기쁨을 누릴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러한 차이들이 존재할 것입니다. 추측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차이가 다음과 같은 것들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닌지 가끔 추측해 봅니다.
매우 신실히 살아온 사람들은 아마도 조금 더 주님께 가까이 거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을 볼 것이나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주님께 가까이 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 내용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차이는 분명히 존재한다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대한 주요한 목표들 중의 하나는 우리로 하여금 믿는 자들, 즉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의 최후 상태를 볼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믿는 자들의 최후 상태는 모든 영광 중에 있습니다. 우리는 부활해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몸은 부활하여 평화롭게 되어 있을 것입니다. 전인이 구속되어 죄에서 완전히 구원되어 있을 것입니다.

루터교는 언제나 하늘과 땅의 새 창조를 가르쳐 왔던 반면, 프로테스탄트 개혁자들은 현존하는 이 하늘과 땅이 죄와 악에서 완전히 구원되어 도덕적으로 완전히 새로워지게 될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가르쳐 옸습니다. 어느 견해이든 문제될 것이 없으며 우리는그 견해들의 타당성을 최종적으로 결정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인식해야 할 중요한 점은 요한계시록 21장에 묘사된 종류의 상태 - 슬픔, 탄식이 없는 완전한 상황 - 에 거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미래의 삶에 관한 막연한 추측을 피해야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으로 여겨지는 점은 하나님이 사람들과 함께 거하실 하나님의 장막을 지어 놓으신 그 완전한 세상에 우리의 하늘이 여전히 존재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항상 주님과 함께 있을 것"(살전4:17)과 하나님의 영광 안에서 행복을 입는 것,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는 것, 하나님의 영광 안에서 성장하는 것을 아는 일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영원한 상태이자 최후의 상태인 동시에 우리의 끝이고 영원한 상태가 될 것입니다.

오! 복된 날이여! 하나님께서는 그와 같이 확실하여서, 언제나 빛 안에서 살게 될 우리들로 하여금 그것들을 볼 수 있게 하셔서, 파멸되기로 정해진 이 지나가는 세상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걱정 근심 없이 살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저희로 하여금 빛의 자녀로서, 낮의 자녀로서 머지않아 주님을 만나 함께 살며 주님의 영광을 함께 나누게 될 자로서 살 수 있게 하옵소서. 아멘.

 

로이드존스연구사이트

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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