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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속죄 제도의 성취와 그 연속성 / 송영찬목사님

baromi 2009. 1. 23. 07:41

속죄 제도의 성취와 그 연속성
송영찬 목사, 서울개혁신학원 구약신학

 

첨부파일 romch03.hwp

 

아무리 선한 양심의 기준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또는 율법과 같이 드높은 하나님 나라의 법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이미 죄로 말미암아 부패한 인격의 결함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정상적인 기능을 발휘할 수 없다. 이에 바울은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롬 2:12)고 선언함으로써 죄에 대한 심판에서 아무도 자유로울 수 없다고 말한다.
율법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기 위해서는 율법을 듣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행함으로써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지만 죄로 인해 영적 기능이 마비된 인간으로서는 율법을 행할 길이 없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역사가 증명하듯이 모세의 돌비에 새겨진 언약은 파기되었고, 이후 하나님께서 성령님에 의해 심령에 새겨진 새 언약을 주셨으며, 오직 성령께서 날마다 새롭게 하시는 능력으로 새롭게 변화됨으로써 진정한 의를 입을 수 있다는 점에서 바울은 새로운 소망을 제시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로마서 3장을 중심으로 이신칭의(以信稱義)의 근거가 되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성취된 속죄 제도와 그 연속성에 대해 살펴봄으로써 우리의 구원에 담긴 하나님의 의로우신 은혜에 대한 이해를 재조명하고자 한다. 

 

1. 새 언약의 역사성과 하나님의 신실하심

 

로마서 3장에서 바울은 새롭게 하시는 성령님의 세계와 관련해 복음의 역사성을 다시 점검하고 있다. 이것은 성령님의 사역이 복음의 역사성(롬 1:2)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먼저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그들에게 거룩한 언약에 참여한 증표로 할례를 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해 말씀을 보존하시기 위함이라고 지적한다(롬 3:2).

 

1)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의 우월성
이 '말씀'은 이스라엘의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진 말씀으로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보전되었다. 하나님은 이 영감된 말씀을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이스라엘에게 보존할 수 있는 청지기 권을 주셨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것이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주신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더 확고한 하나님의 '말씀'(롬 1:19)으로 온 세상에 주어졌다. 따라서 이제 이스라엘의 후손으로서 유대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더 넓은 세상에 알려야 하는 새로운 직무를 수행해야 한다(갈 2:7).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삼으셨다는 점에서 이미 확인되었다(출 19:4-6).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위탁받았다는 사실은 먼저 하나님의 계시가 이스라엘을 대상으로 선포되었음에서 확인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말씀을 계시하셨고 그 말씀의 약속과 예언이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말한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역사는 복음의 역사이며 구원의 역사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끊임없이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계시되었고 그 말씀이 역사 속에서 실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스라엘의 역사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여기에서 바울은 이스라엘의 역사가 비록 역사적으로 실패하였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여전히 역사 속에서 성취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뇨"(롬 3:3)라는 바울의 반문은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불신앙을 행한 일로 멸망을 당한 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구원하신 일들과 베푸신 은혜가 부정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이 말은 상대적으로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실제로 구원에 참여하거나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2) 이스라엘의 언약과 새 언약의 연속성
바울의 주장은 비록 이스라엘의 역사가 실패로 끝났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주의 백성으로 삼고 세계 만민이 참여하는 위대한 구원을 이루시겠다는 약속은 결코 변함 없이 성취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롬 3:4).
바울이 이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로마서 2장에서 율법의 체계, 즉 옛 언약의 체계 속에서는 구원을 이루는 능력이 없으며 외견상으로 볼 때 이스라엘의 역사가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대한 신임을 포기하고 옛 언약을 폐지하셨다는 오해의 소지를 방지할 필요가 있었다.
오히려 바울은 이스라엘의 역사가 실패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것으로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시는 것이 아님을 역설하고 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이스라엘의 불신앙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과거 이스라엘의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언약에 충실하셨던 것처럼 현재뿐 아니라 미래에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결코 변함 없이 유지된다.

이것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는 바울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변함 없는 신실하심으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게 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에 근거하여 바울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과 하나님의 복음 사이에 연속성을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복음은 처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목적의 성취로 주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렘 31:31)는 새 언약에 대한 약속은 옛 언약의 성취로써 보다 분명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이로써 모세의 돌비에 새겨진 언약이 파기되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여전히 변함 없을 뿐만 아니라 새 언약을 통해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더 분명하게 제시된다.

그러므로 과거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율법과 그 역할 역시 변함이 없으며 여전히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처럼 새 언약 역시 하나님의 의와 신실하심을 나타내고 있다. 아울러 바울은 자신이 제시한 새 언약의 복음 역시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고 있으며 이 복음을 거역하는 것은 과거 이스라엘이 옛 언약을 거역한 것과 같은 정죄를 받게 될 것을 말하고 있다(롬 3:6-8).
여기에서 바울은 모든 사람이 죄 아래 있다는 사실을 다시 강조하고 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율법의 원리 아래에서는 모두가 죄인이며 무력할 뿐이다. 이것은 오로지 새롭게 주어진 복음, 즉 새롭게 하시는 성령님의 은혜 아래에서만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2. 보편적인 구원 원칙으로 제시된 '하나님의 의'

 

1) 죄의 세력과 율법의 의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롬 3:9)는 바울의 논조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율법 앞에서 누구나 죄인임을 단정하고 있다. 여기에서 바울은 지금까지 전개되었던 유대인과 헬라인에 대한 구분에서 벗어나 모든 인류를 하나의 상대로 논증의 범위를 확장하고 있다. '다 죄 아래 있다'(                        )는 것은 이 세상의 인류가 사망으로 귀결되는 강력한 힘의 세력인 죄의 지배 아래 있음을 의미한다.
바울은 지금까지 논증해 오고 있는 율법에 대한 상호 작용의 반대 개념으로 '죄'의 개념을 정의하고 있다. 이것은 모든 인류가 '죄'로 말미암아 율법의 의를 이룰 수 없음을 강조한다. 인류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죄 아래 있다. 따라서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나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일에 있어서 전적으로 불가능하다.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인류를 어둠 속에 붙잡고 있는 세력을 바울은 '죄'로 규정하고 있다.
바울은 이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구약의 시편들을 인용하고 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 3:10)는 바울의 의도는 분명하다.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전 7:20)는 전도서의 메시지를 인용하고 있는 바울은 전 인류를 상대로 불의하다고 선언하고 있다. 이것은 율법을 가진 자라 할지라도 율법을 준수하기 때문에 의롭다고 주장할 수 없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보여주고 있다(롬 3:19).
 
2) 복음의 종말론적 성격
율법이 없는 이방인도 더 이상 의를 주장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 마음에 새겨 넣으신 하나님의 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명문화 된 율법이거나 명문화되지 않은 양심의 법이거나 그 내용에 있어서는 동질의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율법의 의미를 넓힌다면 모든 사람이 율법 안에 있는 것과 같다.
이 사실은 로마서 2장에서 하나님의 심판의 공정성과 관련해 이미 충분하게 강조된 바 있다. 율법은 사람에게 무엇이 옳은가를 분명히 밝혀주지만 결과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드러내 줄뿐이다(롬 3:20). 사람은 율법의 의를 자기 자신의 능력으로도 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바울은 새로운 '의'를 제시한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롬 3:21)는 바울의 말은 새롭게 계시된 '하나님의 의' 만이 율법의 의를 이루는 길이라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의는 구약에서 이미 증거한 것이며 구약의 율법 자체가 하나님의 의를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구약의 율법 안에서도 구원받은 성도들이 있다는 사실을 통해 입증된다.

'이제...나타났으니'란 말은 종말론적인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인류를 위한 마지막 행위로서 자신의 의를 보이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종말론적 구원 행위는 메시아의 오심과 관련된다(사 11:5; 42:6; 61:3). 이것은 새로운 상황이 전개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미 율법과 선지자들에 의해 계시된 이 종말론적 사건이야말로 율법의 완성이며 성취의 의미를 가진다.
바울은 의의 성격을 분명하게 제시한다. 하나님의 의는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2)는 말속에서 분명하게 규명된다. '믿음으로'(           )란 말은 믿음의 형식을 통해 받아들인다는 의미이다. 즉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임으로써 그 의를 나의 것으로 삼는다는 것을 가리킨다. 믿음은 하나님께 자신을 의지하고 신뢰하며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는 인격적인 자세이다. 이런 점에서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에 가장 기본적인 자세가 믿음이라 할 수 있다.

반면에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스스로 당당하게 내세우는 것은 타락의 전형적인 모습이며 이것을 '자기 의'로 삼는다는 것은 믿음과 정 반대의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사람들이 율법을 행한다고 할 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로 하지 않고, 즉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보이지 않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 바로 '자기의 의'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 바리새인들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하지 않고 율법의 자기 수준으로 끌어내린 후 자신의 의를 이루려 했다.
그러나 바울이 제시한 의는 전혀 그 성격이 다르다. 곧 믿음으로 받아 누리는 하나님의 의가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졌으며 이 은혜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 보편적인 은혜이다. 때문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3-24)고 바울은 주장하고 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믿음을 종말론적 사건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것은 율법의 행위들을 대신하는 것으로 율법에 의존하지 않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 의지한다. 이것은 앞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는 바울의 선언에 대한 결론적인 의미를 가진다(롬 3:24).
결국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신실하심(롬 1:18-3:20)에 근거를 두고 있다. 따라서 믿음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반응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성취된 종말론적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대한 최종적인 결단이라 할 수 있다.

 

3. 그리스도의 죽으심, 속죄 제도의 성취와 그 연속성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 행위는 당연히 출애굽 사건을 들 수 있다. 당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해 속죄 제물로써 유월절 양을 준비하게 하셨다. 따라서 유월절 양의 피뿌림은 이스라엘이 죽음으로부터 구원받는 전형적인 모형이 되었다. 또한 유월절 사건은 이스라엘과 세상 나라를 구별하는 최초의 사건이었다.

 

1)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제사 제도의 성취
과거 이스라엘의 역사가 증명하듯이 유월절과 출애굽 사건에서 보여준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대한 이스라엘의 반응은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시내산 언약을 파기한 것으로 간주된다. 이제 하나님은 새로운 출애굽 사건과 유월절 사건과 같은 의미를 가지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이 땅에 내 보이셨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롬 3:26-27)는 바울의 말은 다분히 출애굽 사건과 유월절 사건을 그 모티프로 하고 있다.

유월절 양의 죽음과 피뿌림의 대속 원리는 언약궤 덮개 위에 뿌려지는 피뿌림으로 제도화되면서 속죄의 신학으로 정착되었다(레 16:12-19). 하나님은 대속죄일에 드려지는 속죄 제물과 피뿌림을 통해 주의 백성들의 죄를 용서하셨다. 이것은 제물의 피가 가지고 있는 가치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죄인의 죄를 용서하신다는 은혜에 대한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다. 또한 제사 제도는 희생 제사를 통해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한 예표적인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화목 제사로 규정하고 있는 것은 모세 율법이 예표하고 있는 제사 제도의 완성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바울은 구약의 제사 제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주장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신앙과 그리스도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의' 사이에 연속성이 있음을 강조한다. 이스라엘에게 제의를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며 믿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결정적인 속죄 제물로 그리스도를 보내신 분도 하나님이시다.

제사 제도와는 달리 하나님께서 지극히 사랑하시는 아드님을 사람으로 이 세상에 보내어 십자가의 화목 제물로 삼으셨다는 것은 지금까지 수없이 드려진 제사 제도로서는 하나님의 의가 충족되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시기 위함이라고 밝히고 있다.
동시에 하나님의 의에는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는 바울의 말처럼 하나님의 사랑이 포함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지극한 사랑의 완성이라는 의미를 가지게 된다. 즉 모든 인류의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행위는 동시에 하나님의 의로우심으로 나타내는 것이며 이 두 가지의 요소를 모두 포함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로우심을 십자가 사건으로 보이신 목적은 이전에 있었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엄격한 가를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과거 행한 죄 때문에 하나님의 공의가 손상 받지 않도록 마련하신 하나님의 조처이다. 하지만 이 원리를 전 인류의 역사로 소급해서 확장한다면 죄사함의 실제적인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이런 점에서 율법의 제사 제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2) 그리스도의 화목 제물과 제사 제도의 연속성
그리스도의 죽음을 속죄 제물이라고 하는 것은 구약 제사 제도의 희생 제물의 역할에서 구체적으로 계시된다. 즉 희생 제물이 죄를 대신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죽음이 인간의 죄를 대신함으로써 죄가 파괴되었음을 의미한다(롬 8:3). 이 원리는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는 바울의 속죄 신학의 근거이며 죄인으로서 인간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으로써 더 이상 죄의 세력 아래 있지 않게 되었다는 신학적 근거이다(고후 5:14).
그 결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더 이상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므로 그리스도의 죽음을 공유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부활 역시 공유하게 되는 소망을 가지게 되었다(롬 6:3-11).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의 백성들에게 베푸신 은혜이며 온 세상에 밝히 드러내신 '하나님의 의'이다(롬 3:26).

하나님의 의는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행위이며 동시에 이스라엘과 약속하신 언약의 성취로서 구원하시는 행위이다. 구약의 역사는 하나님의 의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며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유지하시는 언약의 성취를 증거하고 있다. 특히 희생 제사는 이스라엘의 실패에 대한 하나님의 의를 증거한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의 희생이 되심으로써 구약의 희생 제도가 이스라엘을 위했던 것처럼 이제 최종적인 효력을 가지고 온 세상에 하나님의 의를 보이셨다.
하나님의 의는 이스라엘을 임의로 선택하고 버리는 것이 아니라 항구한 결속력을 가지는 것처럼 하나님의 구원 행위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 의무에 따라 이제 모든 사람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목적의 확장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율법의 원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포함되어 있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의 완성이었다.

이러한 속죄와 구속의 사상은 유대인들의 율법주의와 세속적 욕망에 근거한 일반적인 종교의 구원관과 차별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롬 3:22)로서 차별이 없으며 누구에게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참여하도록 개방되었다(롬 3:24).

 

마치는 말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롬 3:27)는 바울의 선언은 지금까지 전개된 하나님의 의 앞에서 성도의 의에 대한 논증을 마치는 결론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대속과 화목 제물이 유효하다는 신뢰와 예수님의 인격에 근거한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신뢰 그리고 율법이 그러했듯이 하나님의 의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믿음을 통해서만이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된 하나님의 의가 입혀지게 되었다(롬 3:27).
바울의 논조는 명확하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8). 바울은 우리의 어떤 행위나 율법을 행함과는 상관없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하는 것은 오로지 그리스도의 은혜로서만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못박고 있다. 나아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에게나 모든 믿는 자에게 약속된 하나님의 의(롬 3:30)는 율법과 선지자의 충만한 약속의 연속이자 성취의 의미를 가진다(롬 3:31).

 

교회와 성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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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양무리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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