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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성령으로 기름부음 - 성경해석학적 이해 /조병수 교수(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

baromi 2008. 8. 12. 08:05

성령으로 기름부음
 

성령으로 기름부음 - 성경해석학적 이해





도입
우리는 많은 경우에 성경적인 근거 없이 현상을 파악하는 오류를 저지른다. 이것은 모래 위에 세운 집과 같은 것이다. 특히 성령과 관련하여 이런 경향은 매우 짙게 나타난다. 그 가운데서 신자가 성령으로 기름부음 받는 것에 관한 이해가 대표적인 예이다. 성령으로 기름부음 받는 것을 말할 때 성경에 기초하지 않기 때문에 뜬 구름 잡는 것 같은 일들이 벌어진다. 우리는 이런 실수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성령으로 기름부음 받는 것에 관한 성경의 진술을 상세하게 고찰해야 한다.
  신약성경은 구약성경에 뿌리를 두고 있다. 여러 가지 사상들, 예를 들면 언약, 하나님의 나라, 교회에 관한 사상들을 신약성경은 구약성경으로부터 이어받는다. 기름부음에 관한 사상도 마찬가지이다. 신약의 기름부음 사상도 구약의 기름부음 사상에 바탕을 둔다. 그리스도라는 명칭은 이 사실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준다. 그리스도라는 명칭은 구약의 삼중직(왕, 제사장, 선지자)을 종합하는 개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도 중요하다.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도 역시 기름부음 받음의 의미를 담고 있다는 사실이다. 신약성경은 여러 차례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행 11:26; 26;28; 벧전 4:16). 이때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라는 의미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기름부음 받은 사람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렇게 신약성경은 신자의 기름부음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이런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기름부음에 관한 진술이 신약성경에 많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름부음에 관한 신약성경의 증거는 매우 희소하다. 특히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성령으로 기름부음 받는다"는 표현이 한 번 밖에는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행 10:38).
  이제 우리는 신약성경에 언급된 "기름부음 받는다"는 표현과 "성령으로 기름부음 받는다"는 표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이것은 예수의 기름부음과 신자의 기름부음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1. 예수의 기름부음

  가장 먼저 예수의 기름부음에 관하여 살펴보자. 예수의 기름부음은 네 구절에 언급된다 (눅 4:18 [사 61:1 인용]; 행 4:27; 행 10:38; 히 1:9 [시 45:8 인용]).
  (눅 4:18) "주의 영이 내 위에 계시니, 왜냐하면 그가 내게 기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고, 그가 나를 보내어 사로잡힌 이들에게 자유를, 눈 먼 이들에게 다시 보는 것을 전파하고, 억눌린 이들을 자유롭게 보내고, 주의 은혜로운 해를 전파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私譯).
  (행 4:27) "당신의 거룩한 종, 당신이 기름 부으신 예수를 반대하여 참으로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이 성에 모였나이다" (사역).
  (행 10:36-38) "그가 만물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화평을 전하심으로써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보내신 도리(로고스)를, 곧 요한이 전파한 세례 후에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유다 전체에 이루어진 말씀(레마)을 너희가 아나니, 곧 나사렛 예수라. 하나님이 그에게 성령과 능력으로 기름 부으셨을 때 그는 두루 다니며 좋은 일을 하였고 마귀에 의하여 억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이다" (사역).
  (히 1:9) "네가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였다. 이 때문에 하나님, 너의 하나님이 네 동료들보다 네게 기쁨의 기름을 부으셨다" (사역).

1) 기름부음 구절의 공통점과 차이점
  이 네 구절을 자세히 조사해보면 다음과 같은 공통점과 차이점을 발견하게 된다.

(1) 공통점
  이 네 구절은 중요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기름을 붓는 주체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이 가장 눈에 두드러지게 보인다. 기름을 붓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의지에 달려있는 일이다. 기름부음은 하나님의 행위이다. 이것은 인간이 어떤 방식으로든지 주권을 행사할 수 없는 일이다.

(2) 차이점
  그런데 이 네 구절은 약간씩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먼저 행 4:27과 히 1:9를 살펴보자. 이 두 구절은 단순한 기름부음을 말한다. 그런데 이 두 구절은 역시 조금 다른 면들을 보여준다. 행 4:27은 "당신이 기름부으셨다"는 간단한 형식으로 되어있다. 이에 비하여 히 1:9에는 "기쁨의 기름"이 기름부음의 재료로 언급된다. 물론 "기쁨의 기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이제 눅 4:18과 행 10:38을 살펴보자. 이 두 구절에서는 기름부음이 성령과 관련되어 있다. 눅 4:18은 성령의 임재와 하나님의 기름부음 사이에 어떤 인과관계가 있다는 것을 지시한다. 이와 달리 행 10:38은 기름부음과 성령의 관계를 분명하게 밝혀준다. 이 구절은 성령을 기름부음의 재료 (또는 도구와 수단)로 진술한다: "하나님이 성령으로 기름 부으셨다".

2) 기름부음 구절의 해석과 의미
  그러면 이 네 구절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고찰해보자.

(1) 행 4:27
  이 구절은 예수의 기름부음을 가장 단순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이 구절은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려준다. 첫째로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예수는 하나님의 거룩한 종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기름부음과 함께 하나님의 거룩한 종으로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기름부음은 예수의 사역의 시작점이다 (행 3:26 참조). 둘째로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예수가 헤롯과 빌라도와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에 의하여 대적을 받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기름부음을 받은 예수는 이 대적자들을 물리치기 위하여 아무런 신기한 능력을 발휘하지 않았다.

(2) 히 1:9
  이 구절은 시 45:8을 인용하고 있다. 시 45편은 왕의 즉위를 노래하는 시이다. 이 시는 사람이 하나님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음으로써 왕으로서의 새로운 신분을 시작하게 되는 것을 노래한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기름부음이 가지는 의미를 분명하게 알려준다. 기름을 붓는 것은 기쁨의 표시이다. 기름부음을 받는 이는 기쁨의 대상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기름을 붓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기름부음을 받는 이가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기 때문이다. 기름부음의 전제는 진리이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기름부음은 비교적인 차원을 가지고 있다. 기름부음을 받는 이는 다른 신분과 다른 위치에 놓인다. 기름부음을 받는 이는 새로운 신분과 위치를 얻는다. 기름부음과 함께 새로운 신분과 위치가 시작된다. 따라서 기름부음은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신분의 문제이다.

(3) 눅 4:18
  이 구절은 사 61:1을 인용하고 있다. 여기에 이사야 선지자의 자기 의식이 보인다. 이사야는 이사야서를 거의 마무리하는  부분에서 "주의 양이 내 위에 계시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이사야 선지자가 글을 맺는 시간에 비로소 성령이 그에게 임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령의 임하심은 이사야가 선지자로 세움을 받던 때에 이루어진 것이 분명하다. 이사야는 성령의 임하심과 자신의 기름 받는 일 사이에 어떤 인과관계가 있음을 명백하게 진술한다. 이사야는 예언을 마치는 지금 소명시에 있었던 성령의 임하심을 기억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사야는 자신의 사명을 소급적으로 확인한다. 이사야는 선지자로서 신분이 변화되고 사역을 시작하는 것이 처음부터 성령이 임함으로 된 것임을 고백하고 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사역을 시작하는 벽두에서 바로 이사야의 이 글을 인용하셨다. 예수께서는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여 구원사역의 시작을 표시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예수의 자기 의식이 있다. 예수께서는 사역의 처음에서 "성령의 임하심"을 인지하고 있다. 이것은 세례자 요한에 의하여 세례를 받을 때에 일어난 일이다 (눅 3:22). 후에 사도 베드로는 고넬료에게 예수의 사역의 각 단계를 정리하여 주었다. 이때 베드로는 예수의 사역의 처음을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다" (행 10:38)고 증거 하였다. 예수께서는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고는 이 예언이 드디어 예수와 함께 실현되었음을 말씀하셨다. "오늘 이 글이 너희 귀에 이루어졌다" (눅 4:21). 예수께서는 성령을 받은 자로서, 기름부음 받은 메시야로서 이사야가 예언한 은혜가 실현되고 있음을 알려주신다. 인간의 악한 상황에 변화가 주어질 수 있는 가능성이 드디어 실현되고 있다. 무질서할 뿐 아니라 무질서한 줄도 모르며, 파괴되어 있을 뿐 아니라 파괴되어 있는 줄로 모르고, 사로잡혀 있을 뿐 만 아니라 사로잡혀 있는 줄도 모르는 인간들에게 예수께서는 새로운 변화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예수는 성령의 임함을 받은 자로서 새로운 생명의 길을 주실 수 있다. 이사야에게 있었던 "성령의 임하심"에 대한 의식이 예수에게서 더욱 강하게 표현되고 있다.
  그런데 예수의 이 같은 가르침에 대하여 사람들은 놀람으로 반응한다. 나사렛 회당에서 예수의 말씀을 듣는 유대인들은 놀람으로 반응한다 (22). 예수께서는 은혜의 말씀을 전하시고 (22), 사람들은 의아함으로 반응하면서 예수를 거절하고 거역한다. 그러나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예수께서는 반대자들에게 어떤 능력도 보여주지 않았다. 말하자면 성령의 기름부음은 예수의 사역의 시작을 나타내는 것이지, 예수의 사역의 능력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주의 영이 임하였을 때 이사야가 보내심을 받았듯이 예수께서도 보내심을 받으셨다. 이제 성령의 임함을 받고, 주님의 보냄을 받은 자가 행해야 할 일들이 열거된다. 그것은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고, 상심한 자를 고치고, 포로된 자와 갇힌 자에게 자유를 선포하고, 희년을 선포하는 것이다 (눅 4:18). 성령을 받은 자가 행할 일들이 다방면으로 서술된다. 그의 활동은 인간의 근본적인 왜곡에 변화를 가져다준다. 그는 영적인 일과 사회적인 일에 변화를 일으킨다. 이것이 기름부음 받은 자의 능력이다.

(4) 행 10:38
  이 구절은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름부음 받은 것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구절이다. 행 10:36-38은 한 문장으로서 조금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너희가 안다"(행 10:37)는 세 가지 목적격을 동격 (apposition)으로 취한다. 도리(로고스, 행 10:36), 말씀(레마, 행 10:37), 예수(행 10:38). 이 세 단어는 병용될 수 있게 동일한 성격을 가지는데 단지 관계점에 따라 다른 단어가 사용된 것이다. 도리(로고스)는 대상과 관련된다. 도리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보내신 것이다. 이로써 이스라엘 자손은 새로운 시작을 얻게 되었다. 말씀(레마)는 지역과 관련된다. 말씀은 갈릴리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로써 이스라엘 땅은 새로운 시작을 얻게 되었다. 나사렛 예수는 주체와 관련된다. 예수는 성령으로 기름부음 받은 분이다. 이로써 이스라엘의 주께서 새로운 사역을 시작하셨다. 이렇게 볼 때 예수에게 성령으로 기름부음은 예수의 시작을 가리키는 것이다. 성령으로 기름부음은 예수 사역의 첫째 국면을 알려준다. 이것은 아마도 세례를 의미할 수 있다.
  행 10:38은 하나님께서 예수께 "성령과 능력으로 기름 부으셨다"고 말한다. 성령과 능력이 나란히 언급된다. 이것은 두 가지 말로 기름부음의 두 양상을 말하는 것인지, 두 가지 말로 기름부음의 한 양상(Hendiadyoin)을 표현하는 것인지(성령의 능력이나 능력의 성령)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예수의 기름부음에 성령과 능력이 함께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구절은 예수께서 성령과 능력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을 때 무엇을 행하였는지 알려준다. "그는 두루 다니며 좋은 일을 하였고 마귀에 의하여 억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다". 여기에 좋은 일을 한 것과 마귀에 억눌린 사람을 고친 것이 분리되어 설명된다. 따라서 좋은 일을 행한 것은 마귀에 억눌린 사람을 고친 것과는 다른 것임에 틀림없다. 이것은 아마도 성령의 능력으로 가르치신 것을 가리킬 수 있다 (눅 4:14-15). 실제로 예수께서 가장 먼저 하신 일은 이적이 아니라 교훈이었다. 예수께 있어서 이적은 교훈을 위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교훈 없는 이적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2. 신자의 기름부음

  이제 신자의 기름부음에 관하여 살펴보자. 신자의 기름부음은 네 번 나온다 (고후 1:21, 요일 2:20,27[두 번]).
  (고후 1:21)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를 위하여 견고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또한 그가 우리를 인치셨고 성령의 보증을 우리 마음에 주시느니라" (私譯).
  (요일 2:20) "너희는 거룩하신 이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으며 모든 것을 아느니라" (사역).
  (요일 2:27) "너희가 그에게서 받은 기름부음이 너희 안에 머무느니라.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느니라. 그러나 그의 기름부음이 너희에게 모든 것에 관하여 가르치는 대로 그것은 참되며 거짓이 아니니라. 그리고 그것이 너희를 가르친 대로 너희는 그 안에 머무느니라" (사역).

1) 기름부음 구절의 공통점과 차이점
  이 구절들을 자세히 조사해보면 다음과 같은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 공통점
  이 네 번의 용례는 모두 기름부음의 주체자를 언급하고 있다. 그 가운데 두 번은 주체자가 분명하게 제시된다: 하나님(고후 1:21), 거룩하신 이(요일 2:20). 물론 요일 2:27도 기름부음의 주체자가 하나님이심을 말하고 있는 것을 의심할 바가 없다. 신자에게 있어서도 기름부음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에게 달려 있는 일이다.

(2) 차이점
  네 번의 용례는 과거형과 현재형에서 큰 차이를 이루고 있다. 신자의 기름부음이 과거적으로 이해되기도 하고(요일 2:20), 현재적으로 이해되기도 한다(고후 1:21; 요일 2:27). 이것은 신자의 기름부음이 과거적이기도 하며 현재적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2) 기름부음 구절의 해석과 의미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신자의 기름부음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는 것이다. 이것을 파악하기 위하여 각 구절을 면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1) 고후 1:21
  이 구절에는 네 개의 동사가 나란히 사용된다: "견고하게 하다", "기름을 붓다", "인치다", "주다". 그런데 이 네 가지 동사는 모두 하나님을 꾸미는 수식어이다(그리스어의 분사형). 그런데 이 동사들은 신자를 위한 하나님의 한 가지 동작을 다양한 방식으로 묘사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 동작은 과거에 시작하여 현재까지 계속되는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이 구절은 과거형과 현재형을 섞어 사용한다. 여기에서 첫째로 중요한 것은 신자를 위한 하나님의 동작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치다"라는 동사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따라서 이와 함께 사용된 "기름 붓다"라는 동사도 하나님의 동작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성령의 기름부음은 모든 신자에게 시초적으로 주어지는 성령의 체험이다. 모든 신자는 구원을 위한 첫째 체험으로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는다. 따라서 성령의 기름부음은 중생이나 칭의를 성령론적으로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에서 둘째로 중요한 것은 신자를 위한 하나님의 동작이 성령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령을 보증으로 준다"라는 말에서 분명하게 발견된다. 따라서 이와 함께 사용된 "기름붓다"라는 동사는 성령을 주신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볼 때 신자를 위한 하나님의 기름부음은 성령을 보증으로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있어서 기름부음은 성령의 보증이다. 성령의 보증은 부활에 관한 확신을 이룬다 (고후 5:1-7, 특히 5절!). 이런 의미에서 신자를 위한 성령의 기름부음은 능력시행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부활확신과 관련되는 것이라고 결론짓게 된다.

(2) 요일 2:20,27
  이 구절들에서는 기름부음이 오직 명사로만 사용된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서 기름부음이 성령과 관련되는 것으로 확실하게 말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성령과 관련된다는 어떤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는 있다. 왜냐하면 기름부음이 인격으로 이해되고 있기 때문이다 ("기름부음이 너희에게 모든 것에 관하여 가르친다", 요일 2:27). 만일에 이 구절들이 기름부음을 성령과 관련시키고 있다면 그것의 기능은 무엇인가? 그것은 지식이다. 기름부음을 받은 자는 모든 것을 알며 (요일 2:20), 아무에게서도 배울 필요가 없다 (요일 2:27). 왜냐하면 기름부음이 신자에게 모든 것에 관하여 가르치기 때문이다 (요일 2:27). 아마도 이것은 진리의 성령이 신자들을 가르친다는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는 표현인 것 같다 (요 14:26; 15:26; 16:13f.). 그러므로 이 구절들이 말하는 기름부음이 성령과 관련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지시하는 것은 능력이 아니라 지식이라는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결론
  이상과 같은 성경해석학적인 고찰을 통하여 우리는 "기름부음" 또는 "성령으로 기름부음"의 의미를 정리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것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 하에 수여되는 것이다. "기름부음" 또는 "성령으로 기름부음"은 하나님의 일이므로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든지 이것을 강요할 수 없다. 둘째로 이것은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이것은 구약의 선지자에게도, 예수 그리스도에게도, 신자들에게도 동일하게 해당되는 사항이다. 특히 "기름부음" 또는 "성령으로 기름부음"은 모든 신자들에게 주어지는 시초적인 성령체험이다. 신자들은 이것을 통하여 새로운 신분을 시작하게 되는데, 이 새로운 신분의 효과는 지속적이다. 셋째로 이것은 반드시 능력을 결과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수에게는 "기름부음" 또는 "성령으로 기름부음"의 결과로 영적이며(복음전파) 사회적이며(자유선포) 이적적인(치병) 능력이 나타났다. 그러나 앞의 두 가지 능력이 뒤의 한 가지 능력보다 훨씬 강조된다는 것을 놓쳐서는 안된다. 게다가 예수에게 나타났던 능력이 항상 신자에게도 나타나는 것으로 말할 수 있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오히려 신자에게는 "기름부음" 또는 "성령으로 기름부음"의 결과로 부활확신과 진리지식이 주어지는 것이 강조되고 있다. 사실상 부활확신과 진리지식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성령으로 기름부음 받은 신자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능력이다.

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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