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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바울을 인용하면서 율법폐지를 주장하는 것이 정당한가?

baromi 2009. 1. 20. 09:50
 

바울을 인용하면서 율법폐지를 주장하는 것이 정당한가?


주일폐지와 십일조 폐지를 주장하는 분들이 그 주장의 이론적 근거로 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약의 율법은 자신의 할 일을 다 마쳤고 더 이상 신약성도에게 아무런 효력이나 영향을 발휘할 수 없다는 이런바 율법폐지론이다. 그리고 이들이 율법의 폐지를 주장하면서 전가의 보도처럼 내세우는 성경구절들 중 상당부분은 바울이 율법에 대해 부정적 설명을 하는 구절들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런 구절들이 율법폐지의 정당한 근거가 될 수 있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우선 바울을 인용하면서 율법이 폐지되었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동일한 인물인 바울이 다른 한편으로 율법에 대해 능동적이고도 적극적으로 옹호와 지지를 표하는 구절들은 언급하거나 설명하지 않고 있다. 바울이 율법에 대한 이중적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어느 한쪽은 포기하고 한쪽만 들어서 자신의 주장을 내세운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편의대로만 사용하는 비성경적인 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왜 바울이 똑같은 ‘율법’이란 단어를 사용하면서 한편으로는 부정적으로 설명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 긍정적인 뜻으로 사용하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실제로 바울은 그의 서신서에서 어떤 때에는 율법이란 단어를 긍정적 의미로 사용하다가, 또 어떤 때에는 심히 부정적 의미로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의 경우에만 해도 갈라디아서에서 32번, 로마서에서 72번의 율법(노모스)란 단어를 사용하지만 바울은 긍정적으로 율법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도 하고 (롬7:10,12,14, 롬2:20, 롬3:31, 롬8:4, 롬13:8,10, 갈3:12, 갈5:14, 갈6:2) 또 부정적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롬3:28, 롬5:1,20, 롬7:4-6, 갈2:19, 갈3:11,15,21,25)


그러면 이와 같은 율법에 대한 일관적이지 못한 바울의 태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1. 전통적 견해

지난 수세기 동안 신약학자들은 많은 다양한 방식으로 그 난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했다. 먼저 소위 종교개혁 이후 전통적(?)학자들(마틴루터 이후 레드,모올,크랜필드,부톤..등등)의 견해는 바울 당대의 유대교의 율법을 공로주의적 율법주의로(Legalism) 보았다. 바울이 율법에 대해 그의 서신서에서 부정적으로 표현했을 때는 바로 그러한 유대주의적 공로사상이 율법이라는 이름으로 교회에 들어와 행위와 공로주의 구원관을 주장하면서 교회를 어지럽게 할 때 그것을 반대하기 위해 율법에 대해 부정적 설명들을 했었고 그렇지 않을 때는 율법에 대한 긍정적 해석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통적 견해에서는 절대로 율법의 폐지를 주장하지 않는다.


단지 마틴 루터와 루터파에서는 바울서신의 율법이해를 이러한 1세기의 시대적 이해 없이 루터 자신의 시대상황인 16세기 천주교의 행위구원론에 바로 서신서의 율법에 대한 부정적인 표현을 적용해서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철저하게 구분하면서 대립적으로 이해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래서 루터 같은 경우 행위를 강조하는 야보고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까지 했던 것이다.


칼빈은 이런 루터의 약점을 보충해 율법의 제3용례를 확립하여 루터의 단점을 보완하고 있으며 나중에 루터의 후예들도 그들의 교리서에 율법의 3용례를 첨가하여 루터의 복음과의 대립적인 율법이해를 보완한 것을 볼 수 있다. 여하튼 바울이 서신서에서 율법에 대한 상반된 반응을 보이는 이유를 전통적인 개혁주의 견해에서는 율법주의와 율법으로 나누어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으며 일반적으로 이 견해가 개혁교회 가운데 받아들여지고 있다. 다시 말하면 개혁주의 신앙에서는 한번도 바울이 율법에 대해 부정적 표현을 사용한 것을 근거로 해서 율법이 폐지되었다고 주장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2. 새로운 견해

바울 당시의 유대주의와 그들의 율법관을 공로주의적 율법주의라고 보았던 전통적 견해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관점이 나타났는데 스탠달의 뒤를 이어 샌더스가 주장한 ‘언약적 신율주의’가 바로 그것이다. 샌더스는 1977년 발표된 그의 책(Paul and Palestinian Judaism: A Comparison of Patterns of Religion)에서 당시 유대교의 율법관은 공로주의적 율법주의가 아니라 언약에 머물러 있기 위한 방편으로의 율법, 즉 언약적 신율주의였다고 주장했다. 한마디로 하면 당시의 유대교가 은혜를 강조하는 종교이며 유대교의 율법이해도 은혜에 머물러 있기 위한 수단으로서 이해했다는 것이다. 샌더스는 바울이 반대한 것은 바로 이 ‘언약적 신율주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샌더스의 주장처럼 당시 유대교의 율법이 언약적 신율주의라면 왜 굳이 바울이 유대교의 율법관과 첨예하게 맞서야 했단 말인가?라는 질문에 샌더스는 그 답을 주지 못한다.


이러한 샌더서의 관점에 기본적으로 동조하면서 샌더스의 약점을 보완하여 발전시킨 학자가 제임스 던과 라이트이다. 던과 라이트에 의하면 바울이 반대한 것은 언약적 신율주의로서의 유대교의 율법전체가 아니라 유대교의 언약적 율법관이 지니고 있었던 사회적인 기능과 민족주의적 기능, 예를 들면 할례, 음식법, 절기법등을 통해 유대민족의 우월성과 선민으로서의 자긍심을 갖게 하는 그런 우월주의를 반대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총신신대원의 이한수 교수가 여기에 동조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근자에 이와 관련된 논문으로 세계신약학회에 우수논문으로 인정받은 우리나라의 홍인규 교수는 기본적으로 1세기 당시의 유대주의가 공로주의적 율법주의가 아니라 언약적 신율주의라는 샌더스의 관점에 동조하면서도 기존의 양 견해와는 또 다른 자신의 주장을 피력한다. 바울은 율법이라는 단어를 율법주의와 구약의 율법이라는 두 가지의 의미로 사용하지 않았고 일관적으로 구약이 말하는 율법의 의미로만 사용하였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면서 홍교수는 바울이 율법에 대해 부정적인 표현을 하는 것은 당시 언약적 신율주의인 유대교의 이해처럼 율법의 준수로는 결코 언약 안에 머물수 없으며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언약 안에 머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하면 바울이 율법에 대해 부정적 표현과 긍정적 표현을 번갈아 가면서 하는 것은 율법에 대한 전망의 차이에서 기인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샌더스의 새로운 관점이 지금 던을 비롯해서 신약학계의 많은 학자들의 동조를 얻고 있기는 하지만 그 어떤 학자들도 바울이 율법을 폐지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샌더스 계열의 학자들도 율법이 성령 안에서 신약 성도들에게 더 강화된 언약백성의 삶을 요청하고 있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바울이 율법에 대해 두 가지 상반된 태도를 보이는 이유에 대해 전통적 견해이든 샌더스의 새로운 관점이던 그 누구도 율법의 완전한 폐지를 주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서신서에서 율법에 대해 부정적인 표현을 하는 그것만 들어서 바울이 율법폐지를 주장했다고 말하는 것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과 문맥적 이해 없이 문자적으로 성경을 해석하여 한쪽만을 취해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하는 극단적 주장임을 알 수 있다. 바울의 율법관을 가지고 율법폐지를 주장하는 자들은 똑같은 서신서에서 왜 어떤 경우에는 율법을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변호하고 있는지를 충분히 설명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율법관을 근거로 해서 주일폐지와 십일조 폐지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은 성급한 결론이며 정당하나 성경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부가적으로 필자는 바울이 자신의 서신서에서 율법에 대해 상반된 태도를 보이는 이유에 대해 전통적 견해를 지지함을 밝힌다. 왜냐하면 샌더스계열의 주장처럼 만약 당시의 유대교가 공로주의적 율법주의가 아니라 구약의 가르침과 일치한 언약적 성격 위에 확고하게 서 있었던 언약적 신율주의였다면 무엇 때문에 예수님이 그토록 신랄하게 유대교를 공격하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책망했는가?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꾸짖고 있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보면 그들은 율법을 지키기에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분명해 보인다.


또한 던과 라이트가 주장하는 것처럼 당시의 유대주의의 율법관이 구약의 언약으로서의 율법과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고 단지 사회학적 우월기능과 민족주의적 우월기능, 그리고 율법을 이해하는 전망의 차이정도 뿐이라면 왜 그토록 바울이 결사적으로 그들의 율법을 공격하고 나섰단 말인가? 특별히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율법의 행위로는 결코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다고 강조한 것은 분명히 당시 유대주의자들이 교회 가운데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다고 교인들을 미혹했기 때문인 것을 보여준다. 만약 거짓교사들이 공로주의적 율법관이 아니라 언약적 신율주의자들이었다면 무엇 때문에 바울이 그토록 강경하게 율법의 행위를 반대했겠는가? 이와 같은 물음에 샌더스계열의 새 관점 학파들을 충분한 답을 주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샌더스 자신도 인정하듯이 당시의 정황을 볼 수 있는 제4에스라 문서에는 당시의 유대교가 강한 공로주의적 율법주의 경향을 보이고 있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생각해야 하는 것은 언제부터 율법주의가 형성되고 그것이 예수님과 바울 당시의 공로주의적 율법관이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다음에 살펴보기로 하자.



출처 : 한우리성경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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