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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국교회여 율법주의의 망령과 율법폐기론의 무지에서 벗어나라

baromi 2009. 1. 20. 09:49
 

한국교회여 율법주의의 망령과 율법폐기론의 무지에서 벗어나라


들어가면서


근자에 교회개혁을 열망하는 분들이 늘어가고 있는 것은 바람직하고도 반가운 일이다. 그런데 이렇게 개혁을 논하는 현장에서 두드러지게 발견되는 현상이 하나 있는데 바로 십일조폐지와 주일폐지가 교회개혁의 시발이 된다는 생각들이다. 이런 생각들은 예외 없이 교회개혁의 사이트마다 십일조폐지와 주일폐지에 관한 토론들을 주도하면서 그 주제들을 뜨겁게 달구어 가고 있다.


문제는 이런 발상의 근저에 율법에 대한 바르지 못한 이해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지적처럼 한국교회의 율법주의적 십일조관과 주일성수관은 공격당해 마땅하며 시급한 개혁의 대상이다. 문제는 그 공격의 화살이 바르지 못하다는 것이다. 율법주의를 공격할 때는 바른 율법의 이해를 가지고 화살을 쏘아야 한다. 그래야 율법주의의 망령에 빠져 있는 한국교회를 바르게 개혁할 수 있다. 그런데 작금의 율법주의 공격은 대부분 율법폐기론의 화살을 이용하고 있다. 이것은 과녁을 잘못 쏘는 것일 뿐 아니라 도리어 교회개혁의 방향마저도 엉뚱하게 돌릴 수 있는 심각한 과오이며 무지이다. 그런 의미에서 답답한 마음을 풀어 미련한 글재주이지만 율법과 율법주의, 십일조와 주일에 관한 나의 생각을 차례대로 말해보고자 한다.


1. 율법이 무엇인가?

1-1. 복음과 대치되며 은혜와 상반되는 것으로 오해되고 있는 율법

우선 율법이 무엇인가? 성경이 말하는 율법은 복음과 상반될 수 없고 은혜와 대치될 수 없는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율법과 은혜를 대치적 개념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상의 가장 핵심적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시중의 많은 책들과 목회자들, 신학자들의 설교 속에 쉽게 발견된다. 그들은 바울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이신칭의의 도를 설명하기 위해 말하는 율법과 율법의 행위라는 단어의 의미를 오해한다. 그래서 그런 구절들을 인용하면서 율법은 복음으로 폐기되며 율법을 말하면 마치 복음을 거절하고 은혜를 막는 것처럼 이야기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이해는 율법에 대한 오해와 철저한 무지에서 나오는 결과이다. 성경이 말하는 율법은 복음과 은혜이다. 율법 안에 복음이 있고 은혜가 있으며 복음 안에 율법의 요소가 있다. 이 둘은 결코 상반되거나 모순되거나 대치되지 않는다. 상호보완적이며 약속과 성취의 관계이다. 율법의 약속이 그리스도로 성취되었다고 그 정신과 내용과 의미마저 폐기될 수없는, 오히려 그리스도의 은혜의 옷을 입고 더욱 율법의 원래 정신과 의미로 달려가야 하는 그런 필수불가결의 관계가 율법과 복음의 관계이다.


1-2. 율법이 주어진 배경과 동기

율법이 복음과 대치될 수 없으며 복음과 함께 가야만 하는 은혜라는 것은 율법이 언제 어떤 이유와 어떤 동기에서 주어졌으며 그 율법이 어떤 기능을 하고 있는가를 살펴보면 금방 확인된다. 율법이 주어진 때가 언제인가? 출19장을 보면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내 산에 불러 모으시고 그들을 정결하게 하고 나서(언약식의 마땅한 준비인 성결과정이다) 20장에서 23장까지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을 수여하신 후 24장에서는 율법을 주신 하나님과 율법을 받는 이스라엘 사이에 언약식을 체결하신다. 그리고 25장부터 출애굽기의 마지막인 40장까지는 성막에 관한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뒤이어 나오는 레위기에 가면 성막 안에서 드리는 제사에 관한 규정들이 등장한다. 이 모든 과정과 내용들을 보면 율법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어떤 의미와 어떤 목적과 기능을 위해 주어진 것인가를 분명히 알 수 있다.


1-3. 율법의 의미와 율법을 주신 이유

우선 가장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율법이 구원을 위한 방편으로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율법은 그 법을 지키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커트라인과 가능성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을 주시기 전에 분명히 이 사실부터 밝히신다. 출20:1-2절을 보라.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 나는 너를 애굽 땅, 종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하나님은 율법의 모든 말씀을 주시기 전에 그 율법을 주신 분이 누구이며 율법을 받는 대상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하신다. 율법을 받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 땅에서 해방된 사람들이며 그들에게 율법을 주시는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은혜를 베풀어 애굽의 종에서 인도하여 낸 구원자이시다.


무슨 말인가? 율법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 백성들이 이제 그 구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얼마나 특별한 존재가 되었는가를 확인해주며 그런 특별한 존재로서의 마땅한 삶의 원리를 가르쳐주는 것이 율법이라는 것이다. 지금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고 있는 이스라엘이 어느 정도로 하나님 앞에 특별한 존재인가? 이어서 나오는 출20:5절을 보면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라고 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질투까지 하시는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질투가 보통 관계에서 일어나는 것인가? 특별한 사랑의 관계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질투이다. 이스라엘이 누구인가? 하나님 앞에 그런 특별한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백성들인가? 그렇지 않다. 질투는 커녕 죄와 허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이스라엘을 유월절의 은혜로 심판과 진노가 아니라 질투까지 하는 사랑의 대상이며 그런 특별한 존재로 대하고 계신다. 이것은 그의 영원한 구원의 작정과 계획에 의해 아브라함을 부를 때부터 진행되어온 하나님의 구원사이다.


이것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 율법이다. 그러므로 율법을 통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한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라”. 율법이 복음과 대치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율법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런 특별한 사랑을 받고 사는 백성으로서 마땅히 그 살아야 할 특별한(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에 비해) 삶의 내용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맺은 백성으로서 마땅히 살아야 하는 삶의 내용이 무엇인가? 요약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해야 한다. (신6:5, 10:12)


율법은 이와 같이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특별한 사랑의 언약이다. 이것은 마치 남편과 아내가 서로에게 특별한 대상으로서 특별한 사랑으로 마음을 다해 부부의 언약을 지키며 살아야 하는 것과 동일하다. 그래서 하나님은 언약에 따른 복과 저주를 두어 이스라엘에게 이 언약의 중요성을 천명하신다.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19:5-6). “그런즉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오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ㅎ사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그를 미워하는 자에게는 당장에 보응하여 멸하시나니..”(신7:9-10)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저주와 복까지 등장시킨 율법이 은혜요 사랑이라는 것이다. 그것도 질투하는 특별한 사랑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사랑 안에서 율법이 된다. 질투하기까지 사랑하는 하나님 앞에 사랑의 반응으로서 당연히 흘러나와야 할 것이 율법이다. 복 받기 위해 지키고 저주가 무서워 지키지 않으면 안되는 속박이 아니라 사랑이다. 사랑이 무엇인가? 상대방이 기뻐하고 좋아하는 것을 나도 기뻐하고 좋아하는 것이다. 상대방이 싫어하는 것을 나도 싫어하는 것이다. 그래서 율법은 복 받기 위해 지키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지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율법의 ‘하라’와 ‘하지말라’는 이렇게 이해해야 한다. ‘하라’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며 ‘하지 말라’는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것들이다.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된 마땅한 삶의 내용인 동시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존재로서 그의 기뻐하심에 기꺼이 동참하는 것이며 그가 싫어하는 것을 나도 싫어한다는 고백이다.


이것은 구약에서만 나타나는 원리가 아니다. 신약에서 예수님이 직접 확인해주는 원리이다. 요한복음 14:15절을 보라.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요14:21절과 14:23절은 더욱 분명하게 설명된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요15:10절은 무엇이라고 하는가?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예수님의 계명이 무엇인가? 구약의 율법과 다르지 않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 서로 사랑하며 예수님이 성부하나님을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 예수님의 계명이다. 이른바 새 계명이다. 무엇을 확인할 수 있는가? 부대는 달라도 그 부대 안에 들어 있는 내용은 옛 계명이든 새 계명이든 동일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옛 계명이며 새 계명이다.



2. 율법의 기능


2-1. 죄를 깨닫게 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하는 기능

그런데 이런 선한 율법이 정작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떤 역할을 하는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얼마나 선한 계명인가? 그러나 율법이 선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보다 자기를 사랑하는 죄성이 뼈에 사무친 존재이다. 구원받은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러하다. 그래서 하나님을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이 사랑의 요구에 다 반응하지 못하는 존재이다. 이스라엘은 율법 앞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려고 할 때마다 이 표준에 부응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래서 무엇을 확인하는가? 자신이 구원 얻은 백성이지만 이 구원이 자기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자기는 철저한 죄인이며 죄로 말미암아 심판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확인한다.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다시 확인케 한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19-24) 즉 율법이 구원 얻은 주의 백성들에게 자신의 죄를 깨닫게 하며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게 하는 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2-2.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몽학선생의 기능

율법 앞에서 자신의 철저한 죄성을 깨닫게 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도 결코 자신의 힘으로 이루지 못할 내용임을 절감하게 된다. 율법의 내용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려고 해보면 해 볼수록 오히려 자신을 사랑하는 철저한 이기적인 자신에 대해 절망하게 되고 그로인해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그리스도를 찾게 된다. 이것이 율법 안에 포함되어 있는 제사제도를 통해 확인된다. 앞서 말한 것처럼 율법은 복과 저주를 동반해서 주어졌다. 그래서 율법을 범하게 되면 저주가 선언된다. 율법 앞에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고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는 자신이 드러날 때마다 저주와 심판을 받아야 하는데 하나님은 그것을 언약의 대상에게 붓지 아니하고 제사제도를 통하여 대속의 은혜를 베푸시고 다시 하나님과 사랑의 교제를 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다. 은혜 중의 은혜이다.


제사제도가 무엇인가? 율법의 저주로 심판받아 죽을 수밖에 없는 자신이 짐승의 피를 힘입어 용서를 받고 다시 하나님 앞에 사랑의 대상으로 설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언약백성들은 그 언약 앞에 자신의 신실하지 못함을 깨닫고 성막의 번제단에 가서 자기 대신 죽어가는 짐승과 그 피를 보면서 자신의 연약함과 철저한 죄성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자기가 죽어야 하는데 대신 짐승이 피를 흘리고 각이 떠져 죽어가는 것이다. 그 대속의 은혜를 힘입어 성소로 들어가 하나님의 사랑의 교제 앞에 다시 초대받는 것이다. 언약백성은 제사를 통해 자기대신 죽어가는 짐승을 보면서 무엇을 내다보는가? 어린 양 예수그리스도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그리스도에게 그의 백성을 이끄는 몽학선생의 기능을 한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갈3:24)


여기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말은 언약의 백성이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나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로 회복되는 것이 자기의 힘이 아니라 오직 자기 대신 피 흘리고 죽어가는 대속의 죽음을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믿는 믿음을 통해 얻는 다는 의미이다. 의롭다 함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의미한다. 칭의적인 의만이 아니라 성화적인 의가 포함되어 있다. 성경은 결코 칭의적 의와 성화적 의를 구분하지 않는다. 그러나 율법 폐기론에서는 우리를 성화의 의로 인도하는 그리스도를 붙들게 하는 율법마저 폐기한다. 그러면 자기가 그토록 앞세우는 그리스도도 폐기하는 어리석은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모르는 무지이다. 그리스도 없이 우리가 무엇으로 성화될 것인가? 기억하라. 제사와 율법은 이미 구원을 얻은 언약 백성들에게 주어진 은혜라는 것을 말이다. 그러므로 율법을 통해 그리스도를 소망하고 붙드는 몽학선생의 기능은 언약 백성으로 하여금 늘 믿음으로 살게 하는 역할을 한다. 여기서 구약의 율법도 사실은 믿음으로 수행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누가 율법과 믿음을 대치된다 했는가?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3:31)



2-3. 그리스도를 붙들고 다시 율법의 정신으로 돌아가게 하는 기능

이것은 소위 율법의 제 3용례라고 말하는 기능이다. 하나님의 율법은 언약백성들의 죄성을 발견케 하여 하나님 앞에 철저하게 낮아지게 하고 그의 은혜를 붙들게 하며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믿음으로 살게 한다. 그러나 율법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밤낮 나는 죄인이요. 죄인이요만을 외치면서 그 자리에서 앉아있게만 하지 않는다. 이근호의 신학이 결정적인 오류를 범하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그는 복음을 십자가 앞에서 나는 죄인이라고 고백하고 앉아 있는 것만 바른 십자가의 복음이라고 주장한다. 그 외에는 다 인간의 종교적 욕망이 만들어낸 욕망의 열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결코 언약백성을 향하여 나는 죄인입니다만 엎조리면서 앉아있으라고 말씀하지 않는다.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십자가까지 동원해서 변함없이 질투하기까지 사랑하시는 그 사랑에 반응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요구한다. 사랑은 상대방에게 마음을 다하는 사랑을 요구하는 것이 참된 사랑이다. 생각해보라. 남편이 아내가 결혼언약을 저버리고 배반한 아내를 남편의 끝없는 사랑으로 용서하고 다시 정상적인 부부의 관계를 허락했다고 하자. 그러면 그 남편이 아내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이제는 불결하고 음란한 생각 버리고 남편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주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자기 부인에게 “나는 창녀요, 나는 창녀요”만 고백하고 있으라는 남편이 정상적인 남편인가? 이근호의 신학은 하나님을 그런 비정상적인 남편 만드는 왜곡된 복음이며 다른 복음이다. 이런 그의 주장에도 율법폐기론이 깊은 뿌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논의가 조금 엇나갔지만 다시 돌아와 보자. 율법 중 성막의 제사를 통해 대속의 은혜를 경험한 언약 백성들은 그 은혜로 다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의 현장인 성막 밖으로 돌아간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이 성막 중심인 것이 이 이유이다. 그래서 구약의 율법도 철저하게 은혜와 믿음으로 반응하는 복음이다. 믿음이 무엇인가?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만 의지해서 사는 삶의 체계이다. 율법을 통해 언약 백성은 더 이상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한없이 낮아져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동시에 그 은혜와 사랑을 깨닫고 붙잡혀 다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율법 안에 복음이 있고 믿음이 있다는 말이 바로 이것이다.


구약은 그때그때 제사를 드려야 했지만 신약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약의 제사가 완성되었다. 그럼으로 신약의 성도들은 더 이상 제사를 통해 은혜를 경험하지 않는다.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십자가를 통해 그를 의지함으로, 부활하신 주님이 주신 성령을 통해 그를 예배함으로 우리는 다시 그의 은혜에 붙들려 우리 육신의 힘으로 이루어내지 못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율법의 삶과 언약백성의 삶을 살아내게 된다. 롬7:7-14, 8:3-4절에서 바울은 이것을 이렇게 감격적으로 고백한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의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좆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라.”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율법이 거룩하고 선한 계명인 것을 알면서도 육신의 연약함으로 그 율법의 의미와 정신을 따라가지 못하는 자신의 고민과 갈등을 롬7장에서 뱉어내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그가 주신 성령의 은혜로 그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내는 하나님의 능력을 깨닫고 감격으로 터트리는 그의 고백을 보라. “이제는 성령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 어디 율법폐기론자의 바울의 모습이 있는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인용하면서 율법이 폐기되었다고 주장하는 율법폐기론자들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 전체의 내용을 숙지해야 할 것이다. 바울이 어떤 의미로 율법이라는 단어와 행위와 믿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지를 말이다.


그러므로 언약 백성들은 그 삶을 살면서도 결코 그것이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고백하며 산다. 나의 나 된 것은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라고 말이다. 시119편은 이런바 율법찬가이다. 구약과 신약은 똑같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시인이 영감 중에 고백한 그토록 찬란한 율법의 찬가가 똑같은 영감에 의해 기록된 신약에 와서 폐기되다니....그런 논리가 성립되는가? 그러므로 율법폐기론에 근거한 교회개혁의 논의는 교회공동체 전체를 허무는 사탄의 장난에 걸려들 수 있는 위험을 안고 가는 것이다. 교회개혁을 논할 때 개혁에 동의한다고 다 같이 갈 수는 없다. 이런 근본적인 차이점을 서로 직시하고 같이 가지 않는다면 필시 나중에는 더 큰 갈라짐과 분열이 개혁세력 안에 있게 될 것이다.


한국교회여, 율법폐기론의 무지와 율법주의의 망령에서 벗어나자!


3. 율법주의가 무엇인가?


율법주의와 십일조, 안식일과 주일에 관한 것은 다음에 또 시간이 나면 쓰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또 다른 일이 기다리고 있어서......그리고 두서없이 그냥 제 머리에 있는 것을 옮기다 보니 정돈되지 못한 부분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양해해주시기를..

출처 : 한우리성경강해
글쓴이 : 한우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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