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역사자료

[스크랩] Re: 이번 기회에 임진왜란을 통한 천주교의 조선선교 시도에 대한 역사를 공부해 보지요..

baromi 2008. 12. 5. 00:20

1592년~1598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우리나라는 처음으로 기독교(천주교)와 관련을 맺게 된다.

그것은 두 가지 형태로 이루어졌는데, 첫째는 전쟁중에 서양인 성직자가 최초로 이 땅에 발을 내딛게 된 것이고

둘째는 전쟁 중에 포로로 잡혀 간 많은 한국인 포로 중에 상당수의 천주교 개종자가 나왔으며 그들 가운데는

순교의 영광에 이른 사람도 있다.

 

조선 침략의 선봉장의 한 사람인 고니시 유키나가는 유명한 기리시단 다이묘 중의 하나였다.

(그의 세례명은 아우구스티노 라 불렸다.)

 

고니시 가문은 일찍 기리시단으로 개종하였고 토요토미의 주요 지지세력 중의 하나였다.

(기리시단이란 가톨릭 선교사들이 처음 일본에 왔을때에 그들을 불교의 한 유파 정도로 생각하여

카톨릭을 일본에서 남만종, 천축종으로 불리다가 그들의 종교가 불교가 아님이 알려지자 대신

기리시단이란 독창적인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는데, 이는 포르투칼 말로 그리스도인을 뜻하는 단어에서

유래된 명칭이다)

 

불과 20여일만에 서울을 함락시켰고 평양까지 진출했던 고니시 부대는 조선 의병들의 저항을 받아 후퇴,

경상도 남단의 웅천을 거점으로 삼아 교두보를 확보하고 있었다. 전쟁을 오래 끌자 고니시는 본국에 있는

예수회 신부들에게 종군 사제를 한 사람 보내달라는 서한을 띄웠다. 휘하 장병들의 사기 진작을 위한 것이었다.

 

이에 예수회 일본 부관구장 고메스 신부는 스페인 출신의 예수회 신부 세스페데스와 일본인 수사 후칸 에이온을

조선에 파송했다. 이렇게 되어 1594년 초 기독교 성직자로서 최초로 세스페데스가 우리나라 땅에 발을 내디뎠다.

그는 고니시가 자리잡고 있던 웅천을 중심으로 일본군 진지를 순방하며 성사를 집행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세스페데스의 내한과 활약이 다른 침략 선봉장 가토오에게는 고니시를 음해하는 구실이 되었다.

이미 1587년 토요토미에 의해 선교사 추방령이 내려져 있었음을 안 카토오는 세스페데스의 내한 활동을 눈치채고

이를 본국 토요토미에게 알려 경쟁자 고니시에게 타격을 가할 수 있는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에 고니시는정치적 위험을 직감하고 세스페데스 일행의 일본귀환을 서둘러 1595년 4워경 조선을 떠나게 했다.

결국 세스페데스의 내한활동은 1년 조금 넘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세스페데스의 내한이나 선교활동은 우리나라 기독교 역사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그는 침략군의 종군사제였고 그의 선교 활동도 침략군인 일본군에 제한되었던 것이다.

그가 조선인을 만나 선교하려는 시도를 했다는 기록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따라서 세스페데스의 내한 활동은

일본 천주교 역사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되어야지 한국 기독교사와의 직접적인 연결은 찾아 볼 수 없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중에 잡혀 간 조선인 포로들 중에 상당수의 개종자들이 나왔고 그들 가운데 복자위에까지 오른 순교자들이

있었던 사실은, 비록 그 일이 일본에서 이루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한국 기독교사에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임진왜란 중에 일본에 끌려간 조선인 포로는 적게 잡아도 5만 이상이 추산된다.(한국천주교출판사1975년판)

그 중에 전후 양국 정부의 협상에 따라 조선에 귀환한 포로 수는7천에 이르고 있어 대부분의 포로들은 남방에 노예로 팔려가거나

일본에 남아 포로 생활을 해야했다. 일들 일본에 잔류한 포로들 가운데 천주교로 개종하는 경우가 생겨났다.

 

일본 나가사키에서 활약했던 프로에스신부가 보낸 1595년 보고서에서 그 사실이 확인된다.

 

"여기 나가사키에 사는 조선인 노예들은 남자 여자 도합 300명이넘는데 그 중 많은 이에게

금년에 교리를 가르쳤습니다. 그들 대부분이 2년 전에 영세하였고, 거의 전부가 금년에 고백성사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경험에 의하여 조선 백성은 .... 이드은 매우 친절하며 기쁜 마음으로... 자기들이 천주교인이된 것을 기뻐합니다."

 

일본에 잡혀 갔던 포로들 중에 천주교인이 된 조선인 수는 대략 7천명에 이르며 그 중에는 예수회 회원이 되어

신학훈련까지 받고 조선 선교를 시도했던 권 빈센트 같은 인물도 있었다.(그는 전쟁중 고아가 되어 고니시 유키나가의 딸

마리아에게 보살핌을 받았고 빠체코 신부에 의해 신학 훈련을 받았다) 일본에 있던 예수회 신부들은 조선인 포로들의 개종을

기회로 삼아 그들을 통해 조선 선교를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같은 시도는 한-일 양국간의 적대 관계, 일본내의 천주교 박해 상황 등의 이유 때문에 성공하지는 못했다.

특히 1614년 도쿠가와가 선교사 추방령을 내리고 천주교인 박해를 대대적으로 추진하는 바람에 조선 선교의도는

실현되지 못했다. 대신 많은 포로 추린 천주교인들이 박해 중에 일본인 교인들속에 섞여 순교함으로

"한국 천주교회의 첫 수확"이 일본에서 거두어지게 되었다.

 

 

 

임진왜란을 겪은 지 30년이 못디어 우리나라는 외족의 침략을 받았다. 북방 여진족의 침략으로 1627년에 일어난

정묘호란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청은 조선에 대해 막대한 전쟁물자를 요구했고 이와 함께 볼모로

왕세자인 소현세자와 왕자 봉림대군을 데리고 갔다.

 

이 때 볼모로 잡혀 갔던 소현세자 일행도 심양에서 북경으로 옮겨졌다. 소현세자로서는 볼모로 잡혀 온지 7년째 되는 해였다.

그가 북경에 머무는 동안 예수회 신부 아담 샬과 사귀게 되었다.(아담 샬은 독일인으로 1628년 중국에 와서 명조 말기와 청조

초기에 활약한 과학자이자 신부였다. 그는 중국에서 벼슬을 받기도 했는데.. 정1품에까지 이를 정도로 중국 정부의 인정을

받았다)

 

소현세자가 묵고 있던 동화문 안의 문연각은 아담 샬이 묵고 있던 동문안동 천주당과 그리 멀지 않았다.

신부들은 볼모로 잡혀 와 있던 조선의 왕세자에게 관심이 깊었고 세자 역시 서양 신부들의 서구 과학 지식에

깊은 관심을 두었다.

 

아담샬로서는 조선의 왕세자와 교류함으로 조선 선교를 추구하려는 계획도 세웠던 것 같다. 그러나 소현세자의 북경 체류가

짧았기 때문에 선교사들의 계획은 구체적으로 추진되지 못했다. 귀국을 앞두고 소현세자는 아담 샬에게 선물을 보냈고

이에 답례로 아담 샬도 천문과 역산에 관한 서책과 천구의 등 서구 과학기물들을 보냈으며, 이와 함께 <성교정도>등 천주교

서적 몇 권과 구세주상을 한장 보냈다.

 

이러한 선물을 받은 소현세자는 과학에 관한 서책과 기물을 제외한 천주교관계 서적과 구세주상은 정중한 사양의 서한과 함께

돌려 보냈다.

 

소현세자는 그 대신에 북경에서처럼 조선의 수도에서도 선교사가 주재하면서 정부를 위해 봉사할 수 있도록

선교사 한 명을 귀국할 때 동행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당시 상황으로 조선에 선교사를 보낼 여유가 없었다.

선교사들은 그대신에 귀국하는 소현세자 일행 속에 교인을 배행시키는 방법을 썼다.

소현세자 일행은 1644년 11월 말에 북경을 출발하여 이듬해 2월 서울에 도착했다. 그런데 소현세자는 귀국한 지 70여일만에

돌연 득병하여 죽고 말았다. 소현세자의 죽음을 두고 북경에서 가져온 물품이 이 원인이 되었다는 등 밋니적인 소문이 퍼졌다.

오래지 않아 소현세자가 갖고온 물품과 서책이 불살라졌고, 같이 왔던 일행도 모두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이로써 소현세자를 통해 조선 선교를 개척하려고 했던 선교사들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여기까지.... 한국기독교의 역사 1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기독교문사) 중에서...  

 

 

 

 

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바로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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