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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로이드 존스의 부흥 제7장 영적 무력증

baromi 2008. 10. 22. 16:28

제7장 영적 무력증(죽은 정통의 또 다른 표증들)


창세기 26:17,18 “이삭이 그 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치고 거기 거류하며/ 그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으니 이는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블레셋 사람이 그 우물들을 메웠음이라 이삭이 그 우물들의 이름을 그의 아버지가 부르던 이름으로 불렀더라.”


1. 진리를 적용치 않는 것


  “진리를 믿는 것과 그것을 적용하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진리를 듣고 적용하는 것을 주도적으로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 거듭해서 우리는 그러한 진리로 인하여 각성하게 되고 죄의식을 느끼며, 우리 앞에 옳은 것을 느끼며, 우리 자신 속에 부당한 것이 무엇인가를 잘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것에 대하여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느낌이 왔다가는 가버립니다. 선지자 호세아는 그것을 이렇게 나타냅니다.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호6:4).’ 나타났다가는 없어집니다. 제가 볼 때 오늘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와 관련하여 가장 무서운 위험 중 하나가 그것입니다. ··· 우리는 예배를 드리는 동안 무엇인가를 느낍니다. ··· 그러나 예배를 마치고 나가면서 사람들에게 이야기합니다. 이야기하되 다른 일에 대해서 말합니다. 집회에서 느꼈던 것은 사라져 버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2. 묵상의 결여


  “하나님의 백성들과 하나님의 일이 영국에서 강력한 영향을 행사하던 그 좋은 시절의 교회사 이야기를 읽어보거나 ··· 그리스도인들 중 어떤 개인적인 전기를 읽어본다면 ··· 묵상이 그들의 삶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색하거나 묵상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 말씀을 곰곰이 생각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이 사라졌습니다. ··· 그래서 피상적이거나 메마르게 될 수밖에 없고 결국은 아무런 쓸모도 없게 됩니다. 아니 묵상은 절대적인 진수가 됩니다. ···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여기저기로 바쁘게 뛰어다니고 활동을 많이 하느라 정신을 차리지 못합니다. ··· 그리스도인의 삶을 시험하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깊이와 참된 이해를 알아보는 일입니다. 그 깊이와 참된 이해를 얻는 길은 오직 묵상과 생각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 참된 부흥이 일어나는 시기에 한결같이 그러한 일이 나타났다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3. 자기 성찰의 부족


  “묵상은 언제나 자기 성찰을 불러옵니다. 그러나 오늘날 자기 성찰은 인기가 없습니다. 자기 성찰은 잘못된 것이라고 가르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 언제나 주님만 바라보아야 한다.’ 그들은 그릇된 방식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의 전체 삶은 궁극적으로 주님을 바라보는 삶입니다. 그러나 자기 성찰을 희생하면서까지 주님을 바라보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더러 자신을 시험해보고 우리 자신을 입증해 보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 부흥과 관련하여 특이하게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던 사람이 누구든지 그 사람의 삶의 이야기를 읽어보십시오. 그러면 그 사람은 자기를 시험했고 자신에게 경성한 사람인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바라보게 했고 또 하나님께 기도하게 했습니다. ··· 우리는 경건의 시간을 가지는 것을 인정합니다. 또 성경을 짧게 읽고 바쁘게 서둘러 기도하는 것도 인정합니다. 그리고 나서 모든 일을 합니다. 그러므로 자기 성찰을 할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육체를 죽이는 것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말을 합니까? ··· 사도는 권면합니다.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골3:5).’ ··· 그래서 우리의 삶은 전적으로 피상적인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4. 그릇된 자기 성찰


  “이러한 일도 동등하게 나쁩니다. 잘못된 자기 성찰 때문에 죽은 정통에 빠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 그들은 시간을 들여 자기 성찰에 관심을 가집니다. 그러나 그들은 전적으로 마비되어 있습니다. ··· 그들은 자신을 성찰하는 데에만 온 시간을 다 써버리고 맙니다. ··· 자기 자신이 무가치하다는 것에만 생각을 기울이고, 자기의 죄와 쓸모없음에만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에 어떠한 일도 하지 못합니다. ··· 실로 그들은 자신을 성찰하는 데 너무 바쁘고, 그렇게 함으로써 너무 침체되어 있어서 결국은 부흥을 위한 기도나 어떤 다른 것을 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습니다. ··· 이것은 진정 자신을 성찰하지 아니하는 피상적인 유의 삶만큼 나쁜 것입니다. ··· 그리스도인이 이런 식으로 침체당하는 것은 전혀 옳지 않습니다. ··· 그들이 성경에 비추어서 자신들을 시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 그렇게 여러분 자신의 참된 조건을 발견하였으면 성경으로 하여금 주 예수 그리스도께 여러분을 인도하도록 허락해야 합니다. 또 그의 피로 씻김을 받는 데까지 인도하도록 허락해야 합니다. 다른 말로 해서 침체되어 있고 병들어 있고 내성적인 어떤 그리스도인도 사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서만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교리를 적용하는 데 실패하고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의 죄에 머물러 있거나,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릅쓰고 있는 데에서만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성경적인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서 나아가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진리를 여러분 자신에게 다시 적용시켜야 합니다. 여러분이 감사와 찬양의 조건에 결국 들어서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5. 그리스도인의 삶의 영광스러운 가능성을 인식하지 못함


  “저는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의 삶의 여러 가능성들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바울 사도가 에베소서 3장 마지막 부분에서 말한 유의 것입니다. ··· 그들은 훌륭한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을 위해서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3:16-19).’ ··· 바울이 빌립보서 3장에서 말하고 있는 것도 역시 그러합니다.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빌 3:9-11).’

  그리스도인의 삶의 높이와 깊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이 현재의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에게 열려진 여러 가능성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그것을 발견합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다시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는데 성도들의 전기를 읽어보면 부흥의 시대의 사람들에게 나타났던 이야기를 읽게 될 것입니다. ··· 그들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찾아오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고, 그들의 임재에 사로잡히는 것이 무엇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옛 청교도 한 사람은 산기슭을 걷고 있을 때 한 체험을 했습니다. 그 길은 메마른 길이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가지고 온 식사로서 자기 호주머니에 들어있던 빵과 약간의 물을 마시기 위해 우물가에 앉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자신의 표증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말했습니다. 자기는 그 간단한 체험을 통해서 오십여 년 동안 연구하고 책을 읽고 묵상한 데서 배운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배웠다고 말입니다. 그것이 언제나 한 가능성입니다.

  여러분은 다시 부흥의 역사에 대해서 읽어보면 그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러한 교통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을 듣게 될 것이고,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만났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을 것입니다. ···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까이 계시다는 의식으로 압도당했으며, 하나님의 영광과 그 사랑의 의식으로 충만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요나단 에드워즈와 같은 사람들의 삶 속에서 그러한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 여러분은 휘트필드와 웨슬리를 통해서 그 말을 듣습니다. 또 찰스 피니나 무디나 다른 많은 성도들의 삶 속에서 그러한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이러한 것들을 체험하고 있습니까? 이러한 가능성들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십니까? 여러분도 더욱더 알게 되겠지만 부흥은 하나님께서 이러한 살아있는 방식으로 자신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흥을 떠나서 이러한 것이 가능합니다. 이것은 개인에게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어째서 우리는 이렇나 것들을 모르고 있습니까? 어째서 우리는 갈증을 느끼지 않고 있습니까? ··· 그것은 오늘날 교회에 있는 사람들이 라오디게아 교회에 있던 사람들과 너무 흡사하기 때문입니다. (계3:17) 여러분도 알다시피 오늘날의 교회의 상태가 그러합니다. 복음적인 많은 사람들, 복음적인 교회들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난하고 헐벗고 곤고해 있으며 비참하고 눈멀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 그리스도인을 시험하는 시금석은 그 사람이 바쁘고 일의 활동을 많이 한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얼마나 알고 있느냐에 따른 것입니다. 바쁘게 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임재를 진실로 느끼도록 노력할 때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이 이 일을 위해서 시간을 내야 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6. 그리스도보다 자기 자신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가짐


  “몇 년 동안 매우 인기 있었던 교훈이 있었는데, 그것은 ‘행복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비결’이라는 유명한 책에서 완전히 표현되어 있습니다. ··· 오, 그러나 그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삶의 비결’,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르는 그리스도인의 비결이어야 합니다. ···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빌3:10)’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12절).’ 바울이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는 만족스럽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의 기준은 그의 행복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아는 여러 가지 가능성, 주님의 부활의 권능, 주님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을 아는 여러 가능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너무 주관적이고 자기중심적이고 우리 자신에 대해서만 생각을 하며, 우리 자신의 작은 문제들을 해결하고 싶어합니다. ··· 제가 여러분에게 묻고 싶은 것은 여러분이 어느 정도까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느냐 하는 것입니다. ···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것이 여러분의 가장 큰 소원입니까? ··· 그러한 기준으로 여러분을 언제 한번 시험해 보셨습니까?”


7. 체험을 배제시킴


  “우리는 체험을 전혀 배제시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슬로건은 ‘믿음으로 그것을 생각하라.’ 물론 여러분의 회심에 있어서 그것은 진수입니다. ··· 또 어떤 사람에게 그러한 시점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은 옳습니다. ··· 그러나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계속 그 사람에게 ‘자 그것이 이 순간에 당신이 해야 할 전부다. 그러나 만일 그렇게 한다면 체험, 확신을 얻을 것이고 확실하게 알 것이다.’ 그러나 너무나 자주 두 번째 단계가 오늘날 배제당하고 있습니다. ··· 저는 바로 이 시점에서 오류를 범한 것 때문에 죽은 정통에 빠지게 되는 큰 일이 벌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부흥에 있어서 중대한 장애 요소입니다. ··· 사람들이 단순히 체험을 추구해야 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니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하나님을 추구하고,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충만해지고, 하나님의 모든 충만으로 충만해지기를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체험 자체가 아닙니다. 그를 체험하고 그를 아는 문제입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사람들은 그를 알았습니다. 그들은 그에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임재를 인식했습니다. ··· 우리는 어떤 지나침을 너무 두려워한 나머지 성령을 소멸하는 잘못을 범하기까지 합니다. ··· 우리 모두의 문제거리는 너무 건전하다는 데 있습니다. 오늘날 겸손은 너무 자주 무시당하고 있습니다. 허풍을 떨며 피상적으로 자신감을 가지는 사람들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온유와 겸손과 자기 죄를 애통하고 자기가 무가치하고 불완전한 것을 의식하는 것은 별 인기가 없습니다. ··· 우리는 사도 바울과 얼마나 같지 않습니까? 여러분도 알다시피 사도 바울은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라고 말합니다. ··· 그는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인상을 제게 준 그리스도인은 불과 몇 사람 되지 않습니다. 즉 뒤로 젖히고 앉아서 자족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보통 보는 일입니다. 기를 쓰면서 더 많은 것을 갈망하고 더 소원하고 더 추구하고 더 많은 일을 하고 더 많이 기도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을 보지 못합니다. ··· 오히려 제가 볼 때 그 푯대를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 그저 하나의 원을 뱅뱅 돌고 있을 뿐입니다. ··· 그것은 잘못입니다. 우리는 은혜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안에서 자라나야 합니다. ···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서 문제거리는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에게 집중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 하나님, 주 예수 그리스도, 성령의 임재가 우리의 삶 속에 나타나는 것, 그것이 참된 기독교입니다. 부흥시에 언제나 하나님께 사용되었던 사람들이 바로 그것을 추구했습니다. ··· 언제나 부흥의 예비단계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크게 사용되었던 사람들은 자기들이 라오디게아 사람들과 같다고 느꼈습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얼마나 벌거벗었는가’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그에게 나아가고 그를 찾습니다.”


8.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참된 관심이 부족함.


  “우리가 이 경건치 않은 세대에서 하나님의 영광에 참된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 신성모독적인 죄와 또는 다른 사악한 죄와 불법 무도함과 부패함과 거리에서 보는 일과 신문에서 보는 일을 보고 ··· 괴로워하고 자극을 받고 격분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만 격분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리새인들도 그런 식으로 격분했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을 아는 시금석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마음속에 슬픔과 비통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못하는 방식을 보고 말입니다. ··· 하나님 중심, 하나님을 위한 슬픔, 하나님의 영광이 다시 나타나기 위한 간절한 바람이 우리 마음을 주장합니까? 부흥의 시대에 언제나 그러한 일이 나타납니다. 교회가 이익을 보지 못할 수도 있고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첫 번째 단계는 하나님과 그 영광을 알게 되는 단계입니다. 그것이 부흥 이전에 사람들이 갖는 예비적인 일차적 관심입니다. ··· 제가 묻는 것은 마음속에 근심을 가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곧 여러분의 마음속에 불신자의 상태 때문에 근심하고 있습니까? 우리 선조들이 영혼을 누르는 짐으로 불러왔던 것에 대해 많은 것을 압니까? 그 일이 우리를 억누릅니까? ··· 만일 그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으며, 지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믿고 있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짐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짐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너무 바쁘기 때문에, 멈추어 서서 그 문제를 곰곰이 생각해 보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분석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과 그 영광에 대한 합당한 개념이 없기 때문에, 이러한 사람들의 진정한 상태에 대한 합당치 못한 개념 때문입니다. ··· 만일 그들이 영혼에 대한 진정한 관심과 부담을 가지고 있다면 정규적으로 극히 작은 기도모임이라도 참석할 것입니다. 그것이 시금석입니다. 진정으로 부담을 느끼는 사람은 그것의 무게를 느끼는 사람이요,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면전에 나가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강박관념을 느끼는 사람입니다.”


  “부흥에 이르는 불가피하고 부단한 예비적인 단계는 하나님에 대한 갈증, 살아계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갈구하는 생생한 갈증입니다. 그리고 역사하시며 스스로 자신을 나타내시며 자신의 능력을 나타내시고 일어서서 당신의 원수들을 훼파하시는 하나님을 알고 싶어 하는 불타는 간절한 바람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언제나 부흥의 필연적인 예비 단계였습니다. ··· 우리는 어느 정도까지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까? 우리가 정직하게 말할 때 어느 정도까지 되어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나아가며, 우리의 최상적인 소원은 그를 알고 그의 부활의 권능을 알며, 그의 고난에 참예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으려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 하나님에 대한 갈증,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갈망하는 것이 부흥에 이르는 본질적인 예비 단계들입니다.” ***

출처 : 복의 근원 교회
글쓴이 : 백경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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