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의 사모하는 마음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시 27:4)
서론
사람들의 욕망은 정말 놀라울 정도로 다양합니다. 그럼에도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곧 여기 세상을 즐긴다는 것입니다. 각 사람마다 자기 나름대로 목적과 수단을 가질 것입니다. 하지만 썩어질 현재의 삶만 추구할 뿐이지 그밖에 자신의 선과 행복을 추구하지 않는, 이 허망함이 모든 곳을 지배합니다. 인간이 매우 어리석다는 증거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정반대의 한 가지 목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목적이란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의 천국을 갈망하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현재의 삶이 ‘여정’ 또는 길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누구든 진실로 하나님의 영원한 기업을 빼앗기고 싶지 않은 자라면, 세상에서 그를 붙들어 두려는 모든 어리석은 욕망과 변덕들을 잘라내 버리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의 가장 큰 열망이 하나님께로 가는 것이어야 하며, 적어도 다른 무엇이 그 목적을 방해해서는 안됩니다. 내가 ‘적어도’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할 뿐인 지상의 모든 애착들이 우리 마음에서 완전히 뿌리뽑혀서, 우리가 가야만 하는 이 여행에서 빨리 달려갈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그런 순전함이 있기는커녕 어림도 없기 때문에, 우리를 지체케 하는 모든 장애물들을 제거하고 우리의 대열(train)을, 그것이 어떤 것이건, 좇는 일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연약함 가운데서도 세상에 속한 모든 것보다 하늘의 삶을 더 좋아할 정도로 말입니다.
1. 천국을 사모하는 대열에 동참하는 법
(1) 다윗이 사모한 성전의 뜻 - 건물이 아니라 회중
이제 우리가 어떤 방법으로 그곳에 들어갈 수 있는지를 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방법을 만들지 못하고 다만 하나님이 명하신 방법들을 취해야 할 뿐인데, 다윗이 그 주된 것들을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말씀으로 가르침 받는 것을 그분 교회의 질서와 정체(政體)2로 세우셨으며, 이는 우리 모두가 한 마음으로 그를 경배하고 그를 부르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이 일을 돕기 위해 성례들을 사용하게 하신 것입니다. 바로 이런 것들을 통해 우리는 믿음과 하나님 경외, 성결, 이 세상에 대한 경멸, 그리고 하늘의 삶에 대한 소망이 우리 안에서 점점 확고해지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목적에서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의 전에 거하기를 너무도 갈망하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이 전(殿)이라는 말로 그는 신자들과 더불어 순수하게 하나님을 경배하고, 신앙을 고백하며, 기도하며, 성례에 참석할 수 있는 자유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 당시에는 하나님께서 어느 한 장소를 선택하사, 그곳에서 사람들이 그를 한 분 하나님으로 여기며, 그의 율법으로 교육받고, 그의 임재의 증거들을 갖는다고 고백하면서, 그에게 제사와 경배 드리기를 원하셨습니다. 실로 다윗은 그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기 위함이라고 덧붙일 때, 성전에 거하기를 갈망하면서 그것이 어떤 목적을 가졌는지를 충분히 설명합니다. 만일 다윗이 물리적인 건물을 즐거워했다고 우리가 생각한다면, 그를 대단히 잘못 보는 것이며 그를 모욕하는 것입니다. 이는 그를 미신을 섬기는 사람으로 여기고, 그에게 합당한 덕(vertu)으로 돌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윗이 교회의 외면적 질서에 대해 어떻게 권면하고 있는지를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2) 성전을 사모하는 다윗에게 배우라
요컨대, 하나님의 교회에 있으면서, 이 선한 아버지께서 그의 자녀들로 하여금 자신에게 가까이 나아오도록 허락하신 수단들에 참여하는 것이야말로 측량할 수 없는 축복이요 특권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자가 누구입니까? 그는 보잘것없고 형편없이 어리석은 자가 아닙니다. 도리어 전례 없이 탁월하고 성령에 감동된 선지자입니다. 그는 일반 민중에게 유용하고 선한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회중 가운데서, 자신을 결부시킨 신앙고백을 합니다. 그곳에서 선포되는 구원의 교리와 성례를 통해 날마다 더 성화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앞의 시편 26편 8절도 그렇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의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거하는 곳을 사랑하오니.” 또한 시편 42편도 마찬가집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이렇게 말한 것으로 충분했지만, 그의 갈망은 더욱 높이 고양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성전에 올 수 없었던 시절에 눈물을 뿌렸다고 덧붙여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또한 자신이 성전에 다니며 신자들의 무리 가운데서 하나님을 찬양하던 시절을 회상할 때 마음이 상했다고 말합니다. 그는 신음하고 한탄하며 비탄을 발한 뒤, 하나님께서 자신이 잃은 복을 돌려주시리라는 소망보다 더 좋은 위로가 없음을 발견합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이후로 여호와의 얼굴을 바라라.” 그는 시편 43편에서도 같은 주제를 반복합니다. 시편 84편에서, 그는 자신이 얼마나 이 문제에 매달려 있는지 밝힙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라고 외친 뒤, 그는 자신의 마음과 몸이 여호와의 궁정에 들어가려는 불타는 열망에 사로잡혀 있음을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집에 거하는 자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기 때문에 복이라고 합니다. 다윗이 누구보다도 더 성결하며, 심지어 세상에 사는 하늘의 천사와도 같은 인물이었을진대, 그런 다윗이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주신 수단을 통해 도움을 받고 고무되어야 할 필요를 절실하게 느꼈다면, 그보다 형편없고 세속적이며, 보잘것없는 믿음과 약하고 냉랭한 헌신을 가진 우리야 오죽하겠습니까?
2. 교회로 모이기를 거부하는 자들을 경계함
(1) 은둔주의자들에게 - 바울이 말하는 교회의 필요성
비록 다윗은 그에게 있던 완전함 때문에 이런 열등한 도움3이 없이도 (위기를) 잘 넘겼다고 하지만, 우리에게 있는 연약함을 비추어 볼 때, 그런 도움이 우리에겐 너무도 필요합니다. 다윗은 천사와 같은 능력을 부여받지 않았던가요? 그 능력으로 인해 그는 율법의 설교와 성례, 그리고 유사한 다른 훈련에 의해 자신이 더욱 열심을 가진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반대로 오늘날 그런 것들이 주는 유익을 생각해보지 않는 이 교만한 천민들은, 그 사실만 보더라도, 단 한 방울도 기독교의 맛을 보지 못했음을 입증합니다. 나는 교황제도 하에 있는 우리 골방(cabinets)의 철학자들에 대해 말합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그러니까 제네바로 가서 귀에 박히도록 설교를 듣고 그곳에서 준수하는 의식을 행하지 않으면 기독교인이 아니란 말이지! 별도로 글을 읽고 하나님께 기도할 수는 없는가? 각자가 자기 집에 성경을 갖고 있을진대, 가르침 받기 위해 성전에 들어가야 하는가?” 이런 말에 대해, 나는 우리가 누구에게도 그가 있는 곳에서 움직이라는 법을 강요하지 않는다고 답합니다. 심지어 누구든 비록 그가 교황의 독재정치 가운데 있으나 순전하게 살며 하나님을 섬긴다면, 나는 자유와 안식 속에 있는 우리보다 그를 백 배 더 존경합니다. 하지만 다음 두 가지가 문제입니다. 즉 그들의 연약함을 느끼면서, 다윗이 자기 시대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다진 그런 견고함을 그리스도인의 교회로 찾으러 오는 자들이 잘하는 것이 아닙니까. 또한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심지어 억지로 붙들려 있는 자들도, 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해 있는 일반적인 수단이 그들에게 없는 것을 보면서 탄식해야 옳지 않습니까? 지각과 이성이 없는 짐승들은 먹이가 그리워 웁니다. 그런데,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하는 자들은 그들의 신앙을 부양하고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에 대해 염려하고 있습니까? 게다가 그들은 그토록 귀중한 하나님의 은혜를 거만스럽게 발로 짓밟는 것으로 만족치 않고, 그 은혜를 찾아 누리기 위해 외국으로 달려가는 자들을 조롱하기까지 합니다. 설교와 공적 기도, 그리고 성례가 그들에게 남아도는 것으로 여기는 그들의 자만심에 대해 말하자면, 그들을 하나님의 교회에서 출교하고 추방하기 위해 다른 증거가 필요 없습니다. 아무튼 성 바울은 우리 주님이 교회에 세우신 질서가 다만 초보자들(rudes)과 단순한 자들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아무 예외 없이 공통된 것으로 삼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각자가 성경을 읽도록 성경을 남겨두었다고 말하지 않고, 오히려 가르칠 사람들이 있도록 하나의 정체(政體)를 세웠다고 말하고 있음에 주목합시다. 이 정체(政體) 하에 그는 의존적인 것과 같은 다른 모든 것을 포함시킵니다. 따라서 설사 각자가 개인적으로 읽는다 해도, 그것 때문에 공적으로 들을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누구에게 이 말을 하고 있습니까? 큰 자나 작은 자나 구분 없이 말하고 있습니다. 하루만 그렇게 하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오히려 그 반대로 죽을 때까지 이 행보를 따르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고 난 뒤에야 온전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시대가 다르다고 말하는 궤변자들에게 -교회의 목적(유익); 말씀 선포, 성례 시행, 공적 기도와 신앙 고백을 통한 실천
그러므로 신앙과 모든 덕목에 있어서 교회의 공통된 질서를 통해 유익을 얻는 이 대열에 감히 속해 있지 않는 자들은 자신이 하나님 자녀들의 회중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을 잘 모릅니다. 그들은 변명해도 소용없습니다. 왜냐하면 성 바울의 판결문이 너무도 명백해서, 이 일반 규칙(엡 4:4)에 복종치 않는 한, 누구도 그리스도의 몸에 속하지 않으며 그렇게 여겨져서도 안됩니다. 따라서 내 형제들이여, 겸비합시다. 그리고 날개 없이 날 수 있다고 믿으면서 하나님을 시험하지 맙시다. 하지만 누군가 말할 것입니다. “다윗이 상징의 시대에 그렇게 말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때는 그의 백성을 어린 자녀를 다루듯이 다스리셨기 때문이다. 바울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는가. 그가 성전에 대해 한 탄식은 오늘날 우리에게는 적합치 않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린 시절을 벗어나서 성인이 된 자들에 비유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말에 대해, 나는 대답합니다. 첫째로, 설교를 통해 가르침을 받고, 둘째로 성례로 견고히 되며, 셋째로 공공 기도와 신앙 고백으로 실천하는 것이 고대 교부들과 더불어 우리에게도 공통된 것이라고 답합니다.4 성경에서 하나님은 그의 교회가 무수한 자녀들을 가질 것이며, 자녀를 잉태하여 낳은 후, 교회가 그들을 양육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와 우리 시대에 해당됨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명백히 그의 자녀들을 교회의 품으로 보내십니다. 그가 자기 사람들을 양떼처럼 모으기 위해 세우신 이 질서 때문이 아니면 무슨 이유이겠습니까? 이것은 같은 선지자가 사용하는 아름다운 비유를 통해 매우 잘 표현됩니다. 그는 이사야 60장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비둘기 집에 떼로 은닉하는 비둘기들과 같다고 말합니다. 이 비둘기 집이란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성례가 시행되며, 하나님의 이름이 불려지는 각 처소입니다. 사실 너무도 건장해서 이 외면적 안내를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믿는 자들은 그들의 상태를 잘못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성례를 세우신 것은 육신을 입은 우리가 보이는 표징에 의한 도움 없이 영적인 것을 이해하기에 너무 힘들기 때문입니다. 천사들은 성례의 진리를 갖고 있으며,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우둔함 때문에 우리에게까지 보다 낮게 내려오셔야 합니다. 이 상상적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육신을 벗어버리고 하늘의 천사가 되어야 할 것인데, 그 때 그들은 그들이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이 보잘것없는 도움들에게서 면제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인간으로 인식하는 모든 자들은 이것을 통과하여 하나님이 모든 자기 사람들에게 명하시는 통상적인 정체(政體)에 복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능력이 성례나 모든 외면적인 것들에 붙어 있지도 않고 갇혀있지도 않은 게 사실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실 때, 아무런 수단 없이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그가 교회에 세우신 영원한 질서를 취급하는 것이지 예외적으로 기적처럼 행하시는 것을 다루지 않습니다. 성례의 사용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유를 빼앗기고도 그것을 탄식할 만큼 그들의 악과 비참함을 느끼지 못하는 자들은 야수보다도 더 어리석습니다. 다윗이 그 시대에 “주님, 주의 성전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집에 거하는 자들이 복되도다.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전에 들어가기를 열망하는도다”라고 말했다면, 오늘날 우리는 두 배 이상으로 그런 감정에 불타올라야 할 것입니다. 다윗이 성전에서 멀어졌을 때 그의 삶이 지루해질 정도로 탄식한 그 성전의 복은 무엇입니까? 사실 그것은 본질상 우리가 오늘날 갖고 있는 복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어두운 그림자였음을 압니다. 당시는 하나님께서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그런 은혜를 다 펼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교회의 질서 안에서 우리에게 너무도 친밀하게(privement) 말씀하시기 때문에 하늘이 우리에게 (말하자면) 열려 있습니다. 성례들은 율법시대처럼 그렇게 멀리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지 않고, 우리 눈앞에 제시합니다. 따라서 만일 우리가 다윗이 시온 성전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모든 것보다 이 복을 더 좋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배은망덕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우리는 다윗이 말하는 것과 같은 궁정에 더 이상 있지 않습니다. 지성소에서 우리를 떼어 놓는 드리워진 휘장이 더 이상 없습니다. 요컨대, 만일 우리의 갈망이 최소한 다윗의 것과 동일하지 않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무한히 크신 축복을 잘못 경배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단순한 교리 형식으로 말합니다. 왜냐하면 권면이 적절한 장소에 뒤따르기 때문입니다.
3. 다윗의 사모하는 마음
(1) 다윗의 한 가지 소원 -어떤 환경에서도 성전을 사모함
우리의 규칙으로 우리를 견고히 하기 위한 이 갈망이 어떤 것인지 좀더 자세히 살펴봅시다. 그는 여호와께 한 가지 것을 구했다고 말합니다. 단 한 가지 것을 말하면서, 그는 그것에 너무도 골몰한 나머지 마치 다른 것들은 잊어버리기나 한 듯이 뒷전에 두었습니다. 그는 그에게 없는 이것만이 남아 있을 정도로 그의 모든 소원을 누렸나요? 반대로, 그는 그가 태어난 땅에서 도피하였고, 그의 부친의 집에서도, 그리고 친척들과 친구들의 모임에서도 추방되었습니다. 그는 모든 재산을 빼앗겼고, 상당했던 그의 신분과 영예를 상실했습니다. 그의 부인도 약탈당했습니다. 간단히 말해, 모든 점에서 황폐해진 인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 가지 것만을 그리워했습니다. 곧 성전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반대의 경우, 곧 하나님이 그에게 베푸신 모든 복에 감사하며, 마실 것, 먹을 것, 안식, 그리고 육신의 안락함에 대해 말한 뒤, 결론으로 하나님의 전에 거할 것이라고 할 때에도(시 23:6) 그러했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편안함과 모든 기쁨 가운데 있으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선으로 인도 받기 위해, 그에게는 신자들의 무리 속에 있는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역경중에나 번영중에나, 언제나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자녀에게 주신 이 자유를 누릴 동일한 용기를 가졌음을 주목합시다. 이것은 결코 작지 않은 힘(vertu)입니다. 어떤 이들은 악과 번뇌가 억누를 때는 하나님을 기억하다가도, 그것에서 벗어나 편안하게 되는 즉시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 거리가 없어집니다. 더 나쁜 것은 그들이 너무도 피둥피둥하게 살찐 말들처럼 하나님께 반항한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역경에 처할 때 하나님께 불만을 토하다 못해 분개하기 때문에, 그들에게서 하나님에 대한 말을 듣지 못합니다. 다윗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피조물로 보일 만큼 그렇게 가난에 꺾였습니까? 슬픔이 그를 짓눌러서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불만과 모욕에 물들게 하기는커녕 다음과 같은 생각에서 위로를 받습니다. 즉 비록 하나님을 생각할 때마다, 그가 성전에서 쫓겨나 성례의 사용과 신앙의 다른 훈련들을 상실한 것을 슬퍼할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이런 악을 유감스럽게 여기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가 자신의 모든 일들을 초월했습니까? 그가 자신의 적들을 물리치고 나라에서 평온히 있으며 모두가 그를 두려워합니까? 그에게 모든 즐거움에 빠질 방법이 있습니까? 그래도 그는 확고부동합니다. 자신의 참된 행복이란 성전에 나아가 교회의 질서에 참여하는 것뿐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그가 한 가지 것을 구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결코 헛말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한 가지 것이 그에게는 너무나 귀중한 나머지, 다른 것들은 언제라도 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 중에 누가 다윗만큼 신중한 사람인지 알아봅시다. 자신들의 수중에 있는 행복으로 만족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가정적 안식보다, 하나님의 이름을 순전하게 부를 수 있으며, 말씀 선포를 듣고 성례를 사용하는 자유를 더 높이 평가합니까? 그렇게 하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오히려 기름(진 음식)이 그들을 쉽사리 잠에 빠지게 하기 때문에, 그들은 맛좋은 음식을 먹는 것 외에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간단히 말해, 세상은 하나님의 성전보다 고기를 많이 넣은 여물통을 더 높이 평가하는 그런 식입니다. 누군가가 앞으로 올 수 있는 환난을 말한다고 합시다. 각 사람은 전쟁 때문에 징발될 것과, 그로 인해 당할 손실, 고통, 지루함 등을 두려워하겠지만, 구원 교리의 선포, 성례의 순전한 사용, 기타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한 도움들을 상실하는 것은 전혀 언급하지도 않습니다. 만약 그들의 수입이 연말까지 그들의 야망처럼 들어오지 않는다면, 그들의 이익과 거래가 감소된다면, 그리고 그들의 신용이 떨어진다면, 그들은 끝없이 괴로워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의 일상적인 양식은 (이것에 그들이 굶주려있음에 틀림없는 바) 그들에게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그가 발하시는 위협을 통해서 우리에게 더 큰 악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 8:11).
(2) 언제나 동일한 소원
그러므로 내 형제들이여, 사탄과 세상이 우리를 바보로 만들어, 우리가 다른 모든 것보다도, 하나님이 자기 사람들 가운데 세우신 외면적 질서와 안내에 따라 그의 양떼 가운데서 부양되도록 천거된 이 행복을 행여 갖지 못할까 주의합시다. 이러한 점은 다윗이 ‘그가 구했던 것을 청할 것’이라고 덧붙인 말을 통해 더욱 잘 표현됩니다. 이것은 한때는 식었으나 이제 갑작스런 헌신을 갖게 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행복을 추구함에 있어서 전에도 변함이 없었고 앞으로도 또 없으리라는 것입니다. 잠깐 동안에는 매우 열정적이나 그 다음날 틀림없이 모든 것을 버리게 되는 이들이 종종 있습니다. 하지만 다윗이 말하는 이 꿋꿋함은 매우 드문 일입니다. 심지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심어 준 선한 열심을 자극하기 위해 불을 지피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확실하게 꺼버립니다. 다윗의 경우, 내가 이미 언급한 시편에 유사한 증거가 있습니다. 누군가가 그에 대해 주장하기를 유대 나라에서 추방된 그가 여기 저기 은신할 수 있었다고 말하기 때문에, 그는 이렇게 씁니다. “만군의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요 나의 왕이시여, 당신의 제단은 [어디 있나요]!” 이는 그가 비록 세상의 모든 궁궐을 소유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지 못한 상태라면, 흡족한 장소를 발견하지 못한 것이라고 말한 셈입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그에게 방도 부엌도 없기 때문입니까? 그는 이런 것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제단에서 물러 나옴으로 인해 어디에서도 그에게 좋고 적절한 거처를 찾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교리를 우리 마음에 간직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영생의 길로 나아가도록 우리 가운데 세우신 수단들을 행사함에 있어서, 우리는 방해꾼이 되거나, 반대로 과잉 사용자들이 되지 않을 게 분명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야심이 어떤 이들을 위엄과 높은 신분으로 묶어 두며, 다른 이들로 하여금 그것들을 추구하게 합니다. 탐욕(avarice)은 또 다른 이들을 열광케 하고 흥분하게 합니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쾌락과 헛된 방탕이 있을 뿐, 그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두 그들의 탐욕(cupiditez)으로 애가 타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도 주님, 나의 하나님, 나의 왕이시여, 당신의 제단이 어디있나요라고 외치지 않습니다. 사실 세상의 헛된 것이 얼마나 그들을 지배하고 있는지, 사람들이 그것에 굴복하는 것을 하나님이 허용하실 정도입니다. 이처럼 다윗이 자신이 말하는 것을 하나님께 구했다고 말할 때, 이 말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 앞에서 옳은 체하기란 너무 쉬워서, 그것이 우리의 열심인 것으로 믿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비록 증인으로는 하나님밖에 없는 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열정을 가지고 진정 양떼 가운데 있기를 갈망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이러한 재판관 앞에 나아올 때, 모든 위선은 그치고 진실과 솔직함만이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다윗의 모범을 따르기를 원합니까? [그렇다면] 각자 자신의 양심 안으로 물러나야 하며,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께 아뢰면서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주님, 주님은 내가 이 세상의 모든 행복보다 당신의 교회에 있는 것을 더 소중히 여김을 아십니다.’ 나아가서 우리는 이곳에서 우리의 불만을 참지 못해 신음하며 슬퍼하기보다 우리의 악을 치료할 수 있는 이에게 직접 우리의 탄식을 발해야 한다고 경고를 받습니다. 사실 우리가 알아야만 할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예배가 부패되고, 하나님의 말씀이 날조되며, 성례들이 타락되었음을 볼 때, 오늘날 세상에 일어나고 있는 끔찍한 흩어짐은 우리 죄에 대한 정당한 보복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순전한 교리와 성례,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우리 신앙을 고백하는 자유를 누리기 위해, 이 행복을 우리에게서 빼앗으시며 우리를 벌하시는 이가 아니면 누구에게 호소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엄한 책벌이 우리가 그에게로 나아가는 것을 돌이키게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상처를 주신 이의 손에서 치료약을 찾지 못할 정도로 자극제에 반항해서는 안됩니다. 다윗은 확실히 그가 유대 나라에서 추방당한 것이 하나님의 섭리 없이 되지 않았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하나님께 나아와 하소연하기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외양상 하나님에게서 쫓겨나는 자신을 본다는 것은 그에게 심각하고 힘든 시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자신에게 행해진 약속 안에서 갖는 신앙은 그를 위로 들어올려, 하나님께 잠시 자신에게서 빼앗은 것을 영원히 돌려달라고 탄원하게 합니다.
4. 시온 성전(즉 제네바)만 성전이냐고 비방하는 자들에게 - 성전은 더 이상 특정 장소를 의미하지 않음
나는 이 교리를 우리에게 그리고 지금 이 시대에 충분히 (내가 보기에) 적용시켰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에게 있는 이 문제들을 잘게 썰어주지 않으면 삼킬 수 없을 정도로 무지몽매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무지나 교리의 애매함이 그들을 결코 방해하지 않는데도 말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그들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핑계거리를 찾아 그 자체로 그토록 명백한 것을 모호하게 하면서 횡설수설합니다. 어쨌든 이러한 반항은 우리가 위에서 제시한 교리가 어떻게 우리 시대에 해당되는가를 보다 잘 조사하게 해줍니다. 나는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기 위해 순례의 길을 떠날 성전이 더 이상 없음과, 오늘날 우리가 영적 성전들이라는 것, 그리고 어느 장소에서든지 깨끗한 손을 하늘로 들어 올려야 한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신도의 회(會)중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라는 명령은 영원히 지속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구약의 상징들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께서 세상 끝까지 주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비록 우리가 이 시온 성전과 희생 제사에 있어서 다윗과 다르다 하더라도, 공동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기 위해 모여야 한다는 점에서는 유사합니다. 물론 우리가 더 이상 모세의 율법의 보호 아래 있는 어린아이들과 같지 않음은 사실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성인이며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에서 끌어올릴 때까지 성인일 것입니다. 이처럼 비록 다윗의 시대에 있던 그림자들과 상징들이 더 이상 우리에게 적합하지 않다 하더라도, 우리는 복음 설교와 성례로 인도 받아야 마땅합니다. 우리의 진정한 관심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어떤 열등한 수단 없이 인도하는지 아닌지를 아는 데 있지 않고, 그들을 어떻게 인도하기를 원하시는지를 아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확실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어리석음을 보시고, 우리를 붙드시기 위해 보조대나 막대기와 같은 것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에게 다리가 없다고 할 때 보조대가 아무 소용이 없다는 듯이 그것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어리석은지요. 그러므로 다윗이 여기서 말하는 교리가 모두에게 공통된다는 것 외에, 우리와 유대인들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압시다. 그것은 우리가 더 이상 어느 한 장소에 묶여 있지 않다는 점에서 다만 성전이라는 말을 바꾸기만 하면 됩니다.
하지만 다윗이 가졌던 시각은 우리에게도 갖춰져야 합니다. 교만하고 자만한 사람들은 설교를 듣기 위해, 공공 기도를 하기 위해, 성례를 행하기 위해 모이는 것을 존중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들의 양심을 조사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법규밖에 없을 때, 그런 작은 것에서 우리의 신앙을 부양하는 것을 그가 기뻐하신다는 것으로 만족합시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말한 대로, 우리에게 되돌아올 유익을 느낍니다. 하여튼, 성 바울이 선포한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목사들을 주면서 세우신 그대로의 교회 질서에 붙어 있는 것이 완전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에(엡 4:11), 마치 설교와 성례 사용이 외면적인 것이 며 크게 요구되지 않는 것처럼 그것들을 경멸하면서 허공을 날아 그들의 사색으로 하늘에 올라간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자만은 저주받을 것입니다. 내 형제들이여, 내가 어떤 인물들에 대해 말하는지 잘 주목하십시오. 나는 하나님께서 자기 사람들을 적그리스도의 포로 됨에서도 지켜주심을 고백합니다. 비록 그들에게는 여기서 우리가 자유롭게 갖는 도움들이 없지만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결코 설교되지 못하며, 그들의 신앙고백이 허용되는 장소란 어디에도 없고, 성례도 빼앗겼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적그리스도의 가증함에서 분리되어 그들에게 유용한 것을 갖지 못함을 안타까워하고 괴로워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 안에서 영의 능력으로 행하시고 그들에게 없는 것을 공급하십니다. 그러나 그러한 황폐함 가운데 있으면서도 그 상태에 만족하며, 굶주려 있으면서도 아무런 식욕을 갖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안다고 말하기 위해 세 페이지 반을 읽은 것으로 만족하면 철학자인 체하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그들이 보기에) 설교를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성찬에 대해서도 그들이 그것에 전혀 나아오지 않을 경우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모든 외면적 질서에 관해 말해도 그들은 그것이 자기들에게 너무 수준이 낮은 것처럼, 어린아이들에게나 보냅니다. 자, 이런 사람들이 소경보다 더한 사람들임에 틀림없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여전히 그들은 우리가 주님이 자신의 진리를, 곧 하나님이 우리의 신앙의 성장과 보존과 견인을 위해 세우시는 수단들을 사용하는 것을, 선포하신 자에게 권고한다고 비난할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자기 악을 느끼도록 깨우쳐 주는 것이 불쾌하기 때문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나는 그들이 결코 교황주의자들과 더불어 우상숭배를 하지 않는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고백하지 못하는 것이 저주받을 노예 상태임을 부인하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성령은 바벨론 포로들인 신도들의 마음을 몹시 아프게 하며, 그들의 입에 이런 말씀을 두셨습니다.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떻게 주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할까?”(시 137:4). 나는 오늘날 하나님의 나라가 도처에 있음과, 유대와 다른 나라들 사이에 구분이 더 이상 없음을 고백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하나님의 예배가 폐지되고 그의 종교가 사라진 나라는 이방나라요 속된 나라로 여겨 마땅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신앙을 감히 고백하지 못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지 못하는 것을 전혀 안타깝게 여기지 않는 자들은 완전히 얼빠져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훈계를 통해 결코 스스로 지각을 잃지 않도록 항상 경계해야 합니다.
제네바를 거쳐야만 낙원에 갈 수 있다는 식으로 우리를 조롱하고 재잘대는 자들에게 나는 그곳이 어디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여 어떤 교회의 형태를 세움으로 그들의 집에서건 이웃집에서건, 우리가 성전에서 행하는 것을 그들의 장소에서 행하는 용기를 갖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한다고 답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시는 수단을 사용하지도 않으면서 구원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마치 그들이 완전히 반대로 가면서 항구에 도달할 수 있는지, 그리고 하나님을 시험하면서 그의 은혜를 누릴 수 있는지를 묻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들이 스스로 원하는 만큼 크고 건장하게 되는 것은 파산하기 위함이기에, 모든 신도들은 그들과 함께 일어서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순수하게 경배되는 기독교회에 있을 방도가 없는 자는 누구나 최소한 밤낮으로 이렇게 신음해야 합니다. ‘주님, 주의 제단[이 어디 있나요, 내 하나님, 내 왕이시여, 내가 원하는 것은 당신의 제단뿐입니다!’ 모든 선한 마음들 속에 언제나 이러한 불이 타오르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앞으로 다가올 위축된 상황에 대해 안타깝게 여길 수 있을 것이며,5 그런 상황이 오래 지속되더라도 그 열정이 식지 않을 것이며, 언제나 양떼 가운데서 인도함 받기를 바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각자는 우리 주님께서 그런 수단들을 주시는 즉시 재빨리 휘장으로 은신할 수 있도록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집에서 살겠다는 이 요청이 거짓이 아니었음을 입증하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5. 성전을 사모하는 궁극적인 목적을 이루려면
(1) 하나님을 더 알아가기 위해 - 성전에서 주의 깊게 듣고 행해야
이제 마지막으로 다윗이 첨가하는 말을 잘 살펴봅시다. 곧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보며 그 전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점점 더 잘 알아가는 이 목적을 지향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교회의 외면적 질서 안에서 신자들과 더불어 행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여기에 두 가지 요구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부지런히 설교를 듣고 공공 기도에 참석하는 것이며, 둘째는 우리가 그 이유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전에 어리석은 헌신을 가지고 와서 그곳에서 열심히 스스로를 뽐내는 일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이여, 우리 스스로 조심합시다. 왜냐하면 대부분 서로를 책망하지 않는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설교를 기피하거나 듣지 않고 편안히 있는 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나는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의 경멸자로 드러내는 자들을 내버려 둡니다. 다만 나는 주일이 아니면 설교에 올 생각도 안하는 많은 사람들의 경시와 미지근함에 대해 말합니다. 더욱이 이것은 마치 하나님에게 강제 노역을 하듯이 형식적인 것뿐입니다. 종은 매일 울리지만 그들에게는 일주일의 마지막에 나타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주일에 우리는 그들을 네 번 부르지만 그들이 단 한 번 그곳에 참석해도 환영입니다. 왜냐하면 격주로만 오는 사람들도 많기 때문입니다. 간단히 말해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수도원은 가깝고 하나님은 멀다’는 옛 속담을 실천합니다.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그들의 나라를 버리고 여기까지 온 사람들 가운데서도 정말 느슨하게 행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내시기 때문에 그의 아름다움을 응시합시다. 그 아름다움을 잘 응시하는 방법을 뒤로 제쳐놓아서는 안됩니다. 그 방법이란 우리가 이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으로 황홀하게 되어 성 바울이 말하듯이(고후 3:18) 그 형상으로 변형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그의 성전에서 우리에게 제안하시는 것을 주의 깊게 고려해야 합니다. 이는 우리가 그것에 주의하지 못하며 또 그런 것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설교와 성례의 열매들을 거의 얻지 못하는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설교와 성례를 통해 무엇이 선포되고 어떤 일이 이루어지는가 연구하는 일에 전혀 전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깊이 상고할 때에만 일깨워진 귀와 온전히 감동된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전체의 설교에서 어쩌다 한 마디, 또는 반 마디만을 듣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따라서 다윗이 주님의 전을 주의 깊게 방문하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은 이유가 없질 않습니다. 실제로 그곳에서 우리에게 제시되는 하나님의 지혜의 큰 보화들은 누구든지 그것들을 바라보기 위해 조심스럽게 멈춰야 할 만큼 가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그것들을 바라보고 헛되이 돌아서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기에 합당할 만큼 개혁될 때, 교리가 우리에게 유익을 주었음을 압시다. 이것이 우리가 앞서 언급한 시편 84편에서 다윗이 이해하고 있는 바입니다. “하나님의 집에 거하는 자들이 그를 찬양하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무슨 의도로 모여야 합니까? 복음이 우리에게 선포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세례와 성찬을 갖는 이유가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서 존귀하게 되는 목적 이외에 무엇입니까?
(2) 교회를 거룩하게 유지하기 위해 - 부정한 생각들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지켜야
그런데 이 찬양은 혀끝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삶을 통해 펼쳐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곳에 이렇게 기록되었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순전함으로 내 손을 씻고 당신의 제단에 들어가리니”(시 26:6). 이제 우리는 교회의 모든 질서의 참된 사용이 무엇인지를 봅니다. 그것은 우리가 정결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율법 시대에 성전에 경배하러 오는 자들과 그곳에 직무를 수행하러 들어가는 제사장들은 손을 씻었습니다. 이 의식은 지나간 것이지만, 우리는 그것에서 진리를 끌어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를 하나님을 섬기는 데로 이끌기 위한 수단들이 있기 때문에, 다른 이들보다 더 큰 순전함 가운데서 진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도움을 베푸시는 만큼, 만일 우리가 그 도움을 가치 있게 하지 않는다면,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가 어려움에 부딪힐 경우, 그것은 길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길을 잃는 경우가 생긴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소간의 빛을 비추시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의무 이행을 망각한다면, 그것은 부추겨지는 일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구원을 촉진시키기 위해 어떤 수단도 빼놓으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하신 이 책망을 두려워합시다. “내가 이 패역한 백성을 향해 종일 내 손을 펼쳤나니”(사 65:2). 교황제도의 사막에서 유리하는 자들도 그들이 올바른 길로 행치 않을 때 가차없이 취급될진대, 하물며 우리 하늘 아버지께서 보시는 가운데 집에서처럼 양육되는 우리야 어떠하겠습니까? [여러분 중에] 어떤 이들은 여기 그리스도의 교회로 오기 위해 자신이 태어난 나라를 버렸습니다. 다른 이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보금자리로 찾아오시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이제 만일 이곳에서 태어난 이들이 이렇게 그들에게 다가온 복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온전히 자신을 드리지 않는다면, 그들의 배은망덕함이 처벌되지 않고 어찌 그대로 있겠습니까? 오히려 그들은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주님, 주께서 우리 가운데 당신의 성전을 짓고 당신의 제단을 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정결케 하는 은총을 베푸사, 우리로 당신의 은사의 거룩함을 오물로 더럽히지 않도록 하시며 당신의 은택의 영광을 치욕으로 바꾸지 않게 하소서.” 멀리서 온 사람들의 경우, 그들은 하나님의 집에서처럼 거룩하게 다스림을 받을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들은 다른 곳에서 방탕하게 살 수도 있었고, 또 방탕한 길로 가기 위해 교황제도권에서 움직일 필요도 없었습니다.
사실 그토록 악을 자행하기 위해 이 교회에 발을 디디기보다는 스스로 파산하는 편이 좋았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익살꾼들과 합류하여 그들의 악 가운데서 자신들을 강퍅케하고 먹고 마시는 것을 탐합니다. 또 그들은 고집쟁이들이며 싸움꾼들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개와 고양이 같은 가정들이 있습니다. 또 그들의 영지(領地)를 세워 괜히 영주들을 흉내내며, 세속적 사치와 풍요에 빠져 있습니다. 또한 그들은 너무도 까다로운 인물들이 되어 일하는 것 외에는 더 이상 알지 못하며, 양식으로 전혀 만족이 없습니다. 또한 낙원의 천사들에게 트집잡을 만한 것을 찾았다고 하는 비방가들과 중상가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악으로 죽을 지경이기 때문에, 그들의 모든 성결함으로 이웃을 비판합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에게는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제네바에 여행케 한 데 책임이 있는 듯이 보입니다. 마치 그런 말썽을 피우러 하나님의 교회에 온 것이 그들의 쓰레기통에서 머무른 것보다 더 가치가 있는 듯 말입니다. 그런데 앞서의 악이 있는 경우, 각자는 그것에서 물러날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결코 고쳐질 수 없는 자들이 있을 경우, 하나님의 자녀들은 저들의 나쁜 삶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다음의 교리를 갖추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가 이렇게 더럽혀지는 것을 볼 때 아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쭉정이 가운데 있는 알곡과 같아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악인들의 회중에서 우리를 분리시키실 때까지 인내합시다. 이 교회가 많은 사람들을 시험해 보는 시금석과도 같음에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어찌됐건,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의 가족에 받아들이셨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오염을 거부하면서 모든 깨끗함에 전념하도록 노력합시다. 이는 주 예수께서 그 큰 날에 우리를 인정하사 거짓없이 그의 이름을 부를 자들의 수에 포함하시기 위함입니다.
◆ 이 설교는 1552년 9월 20일(출판연도)에 나온 설교이며, 출처는 「칼비니 오페라」 (CO=Calvini Opera, ed., G. Baum, E. Cunitz, E. Reuss, Braunschweig, 1863-1900) vol. VIII, 377~392)이다.
◆ 이 설교문에 붙여진 소제목은 원문에 없는 것이지만 독자들의 편의를 위해 첨가하여 편집했다.
주(註)
1. 니고데모파에 관한 설교중 세 번째. 두 번째 설교는 히브리서를 본문으로 삼고 있는 관계로 이번 시편강해 연재에서 제외했다.
2. ‘police’로서 이 땅에서 필요한 질서 유지 체제를 포괄적으로 일컫는 말.
3. 이 말은 곧 교회라는 정체를 가리키는 것인데, 외면적이고 눈에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에 비해 열등하다는 의미에서 한 말. 즉 훌륭한 다윗은 내적인 열정으로 성전 없이도 이겨낼 수 있었으나, 연약한 우리는 외적인 정체인 교회의 도움이 없이는 이 어려운 때(당시 상황)를 견뎌내기 힘들다는 말.
4. 공공기도란 이미 만들어져 있는 기도문으로 다 함께 기도하는 것을 뜻한다. 가톨릭과 같이, 제네바 교회도 공공기도문을 각종 순서나 예식, 절기 등에 맞게 시행했다. 칼뱅이 다른 곳에서는 덧붙여서 찬송을 강조하기도 한다. 이 설교가 1549년에 행한 것이고 1552년에 출판된 것이라면, 벌써 「기독교강요」를 통해 교회의 표지가 설교와 성례라는 것이 다 드러난 상태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두 표지에다가 공공기도와 신앙고백을 첨가한 것은 교회의 실제 생활을 강조한 것이다. 이러한 차이(혹은 첨가)는 종종 나타나는 현상으로(예레미야 설교에서도 그랬다) 교리와 실제 설교시의 내용이 어떻게 달라지는가를 잘 보여준다. (이러한 차이를 다루는 것을 가리켜 소위 설교신학이라 한다.)
5. 앞으로 다윗이 겪었던 것과 같은 상황, 즉 불가항력적으로 성도의 모임 가운데서 예배하는 자유를 빼앗기는 상황을 가정하는 것 같다.
로이드존스연구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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