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인물자료

[스크랩]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갈3:13-14) / 존 칼빈

baromi 2008. 6. 24. 19:29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갈3:13-14)

 

존 칼빈

 

 

우리가 보았던 것처럼 구원의 소망이 우리가 책임을 완수한다는 조건에 달려 있다면 우리는 모두 정죄함을 받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여러 가지 면에서 부족한 점이 많고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운데서 가장 경건한 사람도 자신이 원숙한 단계에 이르렀으며 다시는 실족하지 않으며 모든 결점에서 자유롭다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심판대로 부르시며 우리는 모두 타락했으니 정죄함을 받아야 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이것이 인간의 참모습인데도 사람들은 자신을 높이 평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우리가 처해 있는 저주받은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매일매일 우리의 귀를 하나님 말씀으로 공격한들 우리에게 어떤 이익이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는 것은 우리를 영원한 죽음으로 더 가까이 밀어 넣을 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가 구원을 얻는 데 유익이 되고 도움이 되게 하기 위해서 인류에게 선고된 판결문을 피할 방도를 찾아보아야 합니다.

 

바울은 여기서 우리에게 피할 길을 일러줍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무에 달리신 것이 헛되지 않았음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나무에 달리시어 당신이 구원하려고 하셨던 모든 사람들의 저주를 감당하는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모두 저주를 받고 있습니다. 그 말은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의 무거운 죄를 몸소 지실 필요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신21:23)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죽은 사람의 시체를 보이지 않게 옮겨 놓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사람의 육체가 그렇게 더럽혀진 것을 보는 것은 상스럽지 못하기 때문에 주님은 그것을 치우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무에 매달린 자 모두에게 이러한 저주를 내리셨을 때에 당신의 독생자에게는 어떠한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너무나도 잘 아셨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러한 죽음을 당하신 것은 우연한 일도 아니고 사람의 변덕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주님이 믿지 않는 자들에 의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결정되었습니다(사2:23; 4:28).

 

성경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매우 사랑하셨기 때문에 당신의 독생자를 아끼지도 않으시고 우리를 위해서 그 분을 죽음에게 내어 주셨습니다. 만약 그 분의 죽음이 부정하고 강제적인 방법으로 유다 한 사람에 의해서 결정되었다면 그 분의 죽음은 전혀 우리를 구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베드로가 사도행전2:23에서 매우 깊이 있게 설명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그것이 그렇게 되도록 명하셨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거기에서 우리 주님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악한 손은 하나님이 이미 당신의 뜻으로 결정하셨던 것 이상의 것을 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다는 것을 읽을 때에 주님이 그렇게 되신 것은 모두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방법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해시키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를 받은 자라’ 고 말씀하셨을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모르셨던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조정되고 미리 결정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음 두 가지 사실이 잘 결합되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은 나무에 달린 자는 모두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는 사실과 당신의 아들로 하여금 그러한 고난을 당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아드님은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의 짐을 자신이 직접 지셔서 자신을 이를테면 죄인의 괴수로 만드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시기 위해서 죄인이 되셨습니다. 모든 절대적인 권한을 다 갖고 계시며 하늘의 모든 천사들이 그 앞에서 벌벌 떨며 꿇어 엎드리는 영광의 주님(the Lord of G1ory)이 저주를 받아야 한다는 것은 얼핏 보아서는 무모하고 이상한 것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울이 복음의 도가 자신이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인간에게는 어리석음이 될 것이라(고전1:18,23)고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이 한 말을 상기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방법으로 우리를 낮추십니다. 우리가 관심을 갖기만 하면 하늘과 우리가 살고 있는 땅에는 지혜롭고 선한 가르침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눈이 멀어서 자연 속에 드러나는 하나님의 지혜를 보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사시기 위해서 새로운 방법 즉 우리가 어리석다고 생각하는 것을 통한 방법을 시작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아드님이 받아야 되는 저주와 관련해서 우리가 읽은 것을 우리 인간의 이성으로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그 대신에 우리는 그와 같은 하나님의 오묘하신 뜻에서 기쁨을 얻고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매우 사랑하시어 측량할 수 없는 비싼 대가를 치르고 우리를 구속하여 주신데 대하여 찬양을 드려야 할 것입니다. 이 가르침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하심을 평가절하 하거나 성경 말씀이 주님께 돌리는 영광을 가리기는 커녕 그 분을 영화롭게 하는 계기를 훨씬 더 많이 마련 해줍니다.

 

여기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바울이 표현한 대로)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빌2:6). 예수님은 기꺼이  자신을 비우셨으며 인간의 속성을 입으시고 사람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가장 부끄러운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자신이 그렇게도 혹독한 고난을 당하는 것을 감수하셨으니 우리가 우리 주님에게는 매우 귀중한 존재였음에 틀들림이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여기에 담겨 있는 뜻을 이해할 수만 있다면 우리 인간의 능력으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크신 은혜를 영원토록 찬양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비록 우리가 그 뜻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어서 그것의 100분의 1만을 헤아릴 수 있어도 거기에 담겨 있는 뜻을 아주 조금만이라도 파악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우리에게는 기쁨이 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사람 안에 있는 악의와 괴팍함을 어떻게 폭로하는지 보십시오! 바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죄인이 되었다고 선언했을 때에 우리는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고약하게 행동할 기회로 여기고 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속하신 방법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서 복음을 완전히 단념하는 매우 타락한 자들도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합니다. “놀랄 일이로군요. 모든 선함의 원천이시며 우리를 성결케 해주시는 하나님의 아드님이 저주를 받았다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 그들의 생각이 맞다면 하나님은 이치에 맞지 않으며 질서를 파괴하는 조치를 취하신 것이 됩니다.

 

그러나 (내가 말했던 것처럼) 하나님은 이러한 어리석은 짓에 굽혀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방법이 지극히 분명한데도 하나님의 지혜로운 방법에 응답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은 우리의 무지를 폭로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신비로우심에 놀랄 뿐입니다. 그것들이 주는 의의는 우리에게 모호할지도 모르고 이상하게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한 이적 앞에서 우리의 지성은 실수를 하고 우리의 판단력은 혼란스럽게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위해서 죄인이 되었다는 사실은 우리의 사악한 상태에 대한 보다 세밀한 검토를 하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미움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죄와 부정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서 깨끗하게 될 때까지 말입니다. 하늘나라의 모든 천사들로 하여금 우리에 대해서 책임을 지게 할지라도 그들이 지불하는 돈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배상할 수 있는 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 한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우리를 영원한 죽음에서 살리신 하나님의 신통력에 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오셨습니까? 연약함으로 오셨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연약하셨을 뿐 아니라 저주도 받았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가 지고 있는 짐 때문에 모든 것이 혼돈 속에서 멸망했을 것입니다.

 

흠이 없는 어린양이시며 모든 의로움의 거울과 원천이 되시는 하나님의 아드님이신 이 분이 우리를 대신해서 저주를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될 때에 우리는 우리가 지은 모든 죄에 대한 생각을 하고 놀라서 하나님이 우리를 은혜와 무한하신 긍휼로 구출해 주실 때까지 절망에 빠져서 허우적거려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신 것은 우리를 완전히 겸허하게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는 먼저 자신감을 벗어버리고 우리 몸 속에 들어 있는 것을 보고 부끄러워하지 않고서는 결코 겸손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분노가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서는 거기에 대한 대책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시행될 때까지 우리는 겁에 질려서 정신을 잃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모든 생활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밉살스럽게 되어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중재가 없이는 하나님과 화해할 방도가 없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덮고 있는 죄를 벗겨 주시고 그 죄를 자신이 직접 맡으십니다.

 

이제 우리가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일어서서 하나님의 심판석으로 나아가서 만약 우리가 지금의 우리대로 계속 남아 있으면 우리를 삼켜버리려고 기다리고 있는 함정이 있다는 것을 알아두십시오. 우리의 타락한 상태를 통감하고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워 합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드님이 우리에게 사주신 은혜를 찬양하고 비록 예수님이 저주를 받으셨지만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예수님의 귀하심을 평가절하하지 맙시다. 그렇게 하기보다는 이것이 우리를 자극해서 우리로 하여금 그 분이 받아 마땅하신 모든 찬양을 드리게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이 당신에게 매우 귀중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의 구원 약속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품고 계시는 사랑의 표시를 바르게 평가하고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 가납된다는 것을 의심하지 맙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베드로가 베드로전서에서 보여 준 것과 같이 우리를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구속하지 않으시고 (벧전1:18) 우리의 대속물이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로 그 비싼 대가를 치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긍휼을 요청할 때마다 그것이 우리에게 흡족하게 내려진다는 것을 굳게 믿어야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조그마한 장점이 있다고 믿게된들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이 아드님을 얼마나 사랑하셨으며 아드님의 죽음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얼마나 귀중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아무 것도 아까워하지 않으셔서 우리의 죄를 지기까지 하셨다고 한 바울의 말을 우리의 좌우명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에게 은총을 베풀어주시며 우리를 다정하게 대해 주실 것이라 고 확실히 믿을 수 있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고 한 바울의 말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그는 아브라함에 대해서 언급함으로써 그 약속은 먼저 그의 후손들에게 적용된다는 것을 나타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신 구원에 동참할 수 있도록 모든 사람들에게 문호를 개방하고 하나님의 복음을 널리 확산하실 때까지 구원의 선물은 이스라엘 백성들만의 것이었습니다. 비록 이 약속은 본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속했으며 그들의 고유물이었으나 지금은 온 세상 사람들에게 적용됩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해졌습니까? 왜냐하면 그 약속은 성령에서 비롯되었으며 의식을 지키는 것과는 관계가 없었습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성령이라는 말을 인용함으로써 율법과 복음을 함께 혼합하려고 애썼던 유흑자들에 의해서 가르쳐졌던 그릇된 가르침을 모두 말소해 버렸습니다. 그는 이제 이런 것들 말하자면 희생, 할례 등은 모두 피상적인 것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율법에 담겨 있는 내용을 읽음으로써 아무런 유익도 얻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고 그것을 이행하는 행위는 폐지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날 그 약속은 우리에게는 영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에게 지난날의 형상이나 그림자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우리의 하나님과 교제하도록 부름을 받았으며 초청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기 때문에 확신을 갖고 하나님을 부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이 허용하는 유일한 기반이 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필요한 모든 것을 예수님 안에서 구할 수 있습니다. 사실은 이것이 이 말씀을 통해서 바울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려고 했던 내용입니다.

 

그는 이 말씀을 다시 강조하기 위해서 복음은 구원 방법에 대한 완전한 계시라는 것과 우리에게는 거저 주시는 우리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고 규정된다는 간단한 원리 이외에 다른 가르침이 필요 없다는 것을 입증하는 또 다른 내용을 추가했습니다. 그는 거저 주시는 구원의 약속이 있은 지 430년 후에 율법이 주어졌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사람들 사이에서 맺어진 약속은 만약 그것이 진짜라면 어떠한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 효력이 지속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주어진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에게 약속하신 내용을 취소하기 위한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처음에는 두 번째 약속은 첫 번째 약속을 폐기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바울의 주장을 의심했습니다. 사람들이 합의에 이르자마자 다시 생각해 보고 생각을 바꾸어서 처음 약속의 효력을 상실시키기 쉽습니다. 법과 규례도 그와 같습니다. 첫 번째  법률이 두 번째 것에 의해 쉽게 파괴되고 효력을 잃게 됩니다. |

 

그러나 바울은 생각될 필요가 있는 무엇인가를 예상했습니다. 즉 만약 한 사람이 약속을 하고 자신에게 무엇인가를 할 의무를 엄숙하게 부과한다면 그는 그의 행보를 바꿀 수 없습니다. 즉 합의 사항은 굳게 지켜져야 합니다. 그러나 만약 양쪽이 상호 승인 하에 앞에서 합의했던 사항을 변경하기로 동의했다면 그 경우는 다릅니다.    

 

만약 우리가 사람들은 퍼뜩 떠오르는 가장 작은 생각에도 그들의 마음을 가볍게 바꾼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면 그러한 예는 여기서는 적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문제의 그 분(person)은 영원히 지속되고 후에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논란이 되거나 위반 당하지 않을 약속을 하셨습니다. 만약 한 쪽에서 그 약속을 파괴했다면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참을 수 없다고 판정할 무서운 배반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합의 사항이 엄숙하고 정식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그것은 존중되어야 하며 아무런 반대도 없이 유지되어야 합니다. 비교해 보면 하나님이 허영에 불과한 사람보다 지조가 없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그러므로 나는 언약이 율법이 공포되기 전에 맺어졌기 때문에 복음의 약속은 효력이 변치않는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만약 이것을 모두 더 자세하게 설명해 주지 않으면 우리를 얼떨떨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앞에서 바울이 율법과 복음을 대조한 것을 다루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약속은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책임을 완수하여 하나님을 섬긴다는 조건에서 맺어졌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조건을 지키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율법에 의해서 구원을 받는다는 희망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그렇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맡으셨던 역할에 충실하시지 않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요구사항을 충족시키지 못한 것은 우리들입니다! 그것은 ‘나는 당신에게 돈이 있다는 조건이 성립될 때에 물건을 팔겠습니다’ 라는 말과 같습니다. 따라서 돈이 없는 사람은 누구도 물건을 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맨 처음에 정해 놓은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비슷하게 하나님께서는 만약 우리들이 하나님을 섬기면 율법으로 구원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을 완수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약속은 우리에게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정말로 우리는 부정으로 가득 갔으며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오염이 많이 되었으며 심하게 감염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증오하시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율법 아래에서는 우리는 모두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사면해 주시겠다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너그럽고 은혜롭게 맞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 은혜를 받아들이고 우리 자신에 의지하지 말고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온전히 의지하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여기서 바울은 “구원의 약속과 율법 중에서 어떤 것이 더 오래 되었습니까? ”라고 묻습니다. 우리는 차이점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율법이 더 오래 되었다면 그것의 효력이 변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시며 변할 분도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언약이 먼저 있었으며 율법이 공포되기 전에 맺어졌다면 우리는 하나님은 마음을 바꾸지 않으셨으며 본래의 언약을 취소하지도 않으셨다고 결론을 내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언약이 폐기되는 것을 원치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전에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사람들을 공로 이외의 다른 이유로 구원해 주기로 맹세하셨는데 그후에 마음을 바꾸어서 우리가 우리의 선행으로 하나님을 높여 주기를 바라신다면 그것은 불합리할 것입니다.

 

바울이 말한 바와 같이 언약이 율법보다 먼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언약에 대해서 어떤 것도 변경시키지 못하는 것이 순리입니다. 즉 언약의 본질과 효력은 손상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게 됩니다. 그 언약이 우리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주어졌을 때에 주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아직 태어나지 않은 것이 사실이지만 예수님은 이미 우리의 중재자로 선택되셨으며 그 분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화해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우리가 율법이 필요치 않았거나 하나님의 마음이 변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를 대비해서 이 문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혼란을 일으켜서는 안 됩니다. 비록 모든 것을 1시간 또는 하루에 다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겠다는 약속은 율법이 나오기 전에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졌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이해하는 데에는 잠깐이면 충분합니다. 정말이지 이 약속은 우리의 장점이나 개인적인 가치를 참고로 해서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선하심과 긍휼하심으로 인해서 이 약속을 하셨으며 우리는 엄청난 죄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서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약속의 기초는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까이 가는 것을 허락해 주시는 중재자의 역할을 이미 맡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이런 말을 들어보니 이 약속은 세상의 끝날까지 지속될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이 말을 해야 되는 중요한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유업을 자랑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에게는 율법이 없었지만 만족했으며 그는 물론 희생과 그와 같은 것들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의 마음이 깨끗하게 되기는 했지만 그가 연약을 받았을 당시에는 성문률이 아직 없었으며 할례도 없었습니다.

 

비록 아브라함이 그 언약을 받았을 때에 할례를 받지 않았지만 할례와는 상관없이 믿음만으로 의롭다고 여김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교회의 대속장이었던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은 오늘날 사람들이 의롭다고 규정되어지는 방법과 똑같은 방법으로 의롭다고 규정되었기 때문에 그들 자신이 나머지 인종과는 다른 부류에 속한다고 여기는 것과 그들의 희망을 율법에 있는 형상과 그림자에 둔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을 자세하게 보여 줍니다.

 

바꾸어 말하면 그는 불쌍한 죄인이며 아담 안에서 타락하고 정죄받았다는 것과 그가 소망할 수 있는 유일한 축복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맺은 언약에 포함되는 것이라고 인정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긍휼하심만으로 의롭다고 규정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명심해야 할 내용입니다.

 

다음에 우리는 아브라함에게 직접 전해진 언약에 대해서 자세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 언약은 아브라함에게 이 땅의 모든 나라는 그의 자손을 통해서 복을 얻게 된다는 것을 알려

주었습니다(창l2:3). 여기서는 두 가지 점을 강조했습니다. 하나는 축복은 아브라함의 후손들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 모두에게 약속되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이방인 혈통의 후예인 우리(즉 부정하고 원래 천국에서 추방당한 자들의 후손)도 이 언약에 동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애초에 선택하셨던 그 혈통에 속하지는 못하지만 지금은 구원이 우리에게까지 확대되었습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왜냐하면 지구상에 있는 모든 나라가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약속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정이 이런 대도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자신이 인류의 구세주이며 아버지라는 것을 밝히시겠다고 하셨는데 마치 하나님이 당신의 관대한 손을 빼시고 아브라함의 후손들만을 찾고 계시는 것처럼 감히 말할 수 있습니까?

 

여기서 가장 중요한 요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비록 이것이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이지만 이 약속은 아브라함의 육신의 후손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됩니다. 하지만 때가 성숙되지 않았기 때문에 처음에는 그것이 분명치 않았습니다.

 

두 번째 강조점은 아브라함의 후손에게는 축복이 약속되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한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후손들’(Seeds)이라고 복수형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한 후손이라는 말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시사하고 계시다는 결론을 내려야 합니다. 우리는 아마 바울이 거의 관련이 없는 것을 과장하고 있다고 생각할 지도 모릅니다. ‘후손’(seed)이라는 말은 어떤 특정한 사람이나 10명이나 40명을 뜻하지 않고 단지 후손들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확실히 아브라함의 후손은 그에게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그것은 그 인종 전체를 뜻합니다. 거기에는 굉장히 많은 사람들을 포함하고 있어서 12 지파와 같은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창 17:6). 우리는 한 민족의 수를 약 10만 명으로 여기는데 유다 지파 하나만도 그보다 많았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후손’(seed)이라는 이 말이 단지 한 사람을 의미한다고 한 것은 하나님이 그 말을 통해서 나타내려고 하셨던 의미를 올바르게 파악하지 못했던 것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정확하고 흔들림이 없다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 그것을 자세히 조사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의 주장이 전혀 오류가 없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아들이 하나만 있지 않았습니다. 이스마엘과 이삭이 있었습니다. 첫 아들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는 집밖으로 쫓겨났습니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 가정의 장자가 되는 특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창21:30)라는 성경 말씀과 같이 남처럼 쫓겨났습니다.

 

이런 일이 있은 후에 그에게는 다른 아이들이 태어났습니다(창25:1). 그는 그들 각자에게 분깃을 주고 멀리 떠나 보냈습니다. 이삭만이 아브라함과 함께 있었습니다. 때가 되자 이삭은 쌍둥이로 태어난 두 아이를 두게 되었습니다(창25:22-23). 먼저 장자인 에서가 당연히 장자의 명분을 가지고 있어야 했지만 거절을 당했으며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그는 약속된 축복에 동참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되자 야곱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부지중에 그를 축복해주는 실수를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가 한 축복을 취소할 수도 없으며 또 그는 성령의 도구이기 때문에 그가 한 말을 바꿀 수도 없다고 선언했습니다(창27:37).  

 

만약 우리가 ‘후손’(seed)이라는 말을 아브라함의 혈통을 이어받은 자들에게 적용시킨다면 확실히 이 말에는 이스마엘의 자손들과 하갈의 자손들도 포함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종이었던 이두미아의 자손들도 아브라함 가문의 일원으로 취급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에게서 상속권을 빼앗았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후손(the seed of Abraham) 이라는 말은 다소 다른 뜻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잠시동안 그 문제에 대해서 이모저모로 생각해 봅시다. 믿음말고 무엇이 교회를 단합시킬 것입니까? 거기에는 아브라함의  영적인 후손을 식별하는 확실한 방법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그들을 다른 사람들과 구별하겠습니까? 유일한 방법은  우두머리가 되시는 분 (Head) 즉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가는 것입니다. 교회의 단합은 그 머리 (It's Head), 즉 예수 그리스도(Redeemer)에 달려 있습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바울은 그 언약이 자손들 즉 복수에 적용되지 않고 한 사람에게 적용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영적인 백성을 발견하려면 그리스도에게로 가야 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려고 한다면 하나님의 뜻으로 둘러싸인 주 예수 그리스도와 먼저 상의해야 합니다.

 

그 분의 몸 된 교회에 속하고 믿음으로 그 분에게 의지하는 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의 종입니다. 이들이야말로 아브라함의 참된 자녀들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인이 아니요”라는 로마서 9:6 말씀에 자세히 나타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실은 약속된 아이는 이삭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가야 합니다. 왜냐 하면 예수님 안에서는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예’(yes and amen)가 되어 절대적으로 확고하고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모두 길을 잃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임무는 하늘과 땅에 흐트러져 있는 자들 모두를 한 곳에 모으는 것이라고 골로새서l:20 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계시지 않으면 우리는 모두 혼돈에 빠질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바울의 주장을 훨씬 더 확실하게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율법이 이 세상에 주어지기 전에 즉 율법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에 순종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는 것이 우리에게 알려 지기도 전에 하나님께서는 이미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을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타락하고 죄를 짓는 것을 보시고 당신의 택함을 받은 자에게 긍휼을 베푸시기 위해서 그들을 자신에게로 데려오고 싶어하셨습니다. 그것은 한 인종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성경에서 강조한 것처럼 ‘모든 국민들'(a1l nations) 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긍휼의 원천은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실은 아브라함이 생존하고 있을 때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이미 중재자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을 통해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진정시키려고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 분의 이름으로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요구하게 되면 그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여서 우리의 기대를 어긋나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되는 것이 이미 확정되었으며 다행하게도 바뀐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고 의지하면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우리를 받아주신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체결된 언약은 변치 않을 것입니다. - 즉 그것은 영원할 것이며 그 효력이 영원히 계속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양자 삼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가서 그 분을 우리의 아버지라고 불러도 됩니다. 그리고 우리를 양자 삼으신 것은 우리 안에 가상할 만한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인해서 우리가 믿음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구원의 확신을 갖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귀하다는 생각을 모두 버릴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본문 말씀에서 믿음과 관련해서 선포된 내용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을 통해서만 그러한 축복을 누 릴 수 있습니다.

 

믿음은(우리가 설명한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기꺼이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자신의 열등의식으로 자극을 받기 전에는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대신하여 죄인이 되심으로 우리의 저주를 받은 상태를 사진으로 우리에게 보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회개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속에서 유죄로 선고받고 우리 자신을 개탄하도록 인도되지 않고서는 하나님께로 가서 구원을 요구하고 우리의 비참한 상태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부탁할 수 없습니다.

 

죄 속에서 뒹굴고 죄에 취함으로 하나님을 우롱하는 위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예수님의 자녀로 받아들이실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자들은 예수님께 접근조차 할 수 없습니다. 사실은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마11:28)와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자와 그들이 범한 많은 죄를 지고 비틀거리는 자들에게 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방법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접근해야 하며 우리 자신의 공로를 가지고 나가서는 안 됩니다.

 

모든 의식과 우리가 바칠 수 있는 모든 제물이 우리의 구원에 아무런 공헌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보다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시기 전에 우리는 우리의 비참한 상태를 충분히 깨닫고 겸손해져야 합니다. 우리가 측량할 수 없는 대가를 치르고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기뻐하기 전에 우리가 당하고 있는 저주를 인식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낮아져야 합니다. 이것 이 지금까지 우리의 주제였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령의 약속을 받아 주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된 것은 믿음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영적인 자손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비록 우리가 육적으로는 그의 자손이 아니지만 우리가 믿음으로 그와 연합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정말로 베드로가 성경 말씀을 통해서 말한 것처럼 우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닙니다(벧전 1:23). 우리가 변화되었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독생자의 지체로 받아들이십니다. 비록 우리가 이방인의 후손이지만 하나님의 교회와 결합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필요한 것은 믿음뿐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인간의 모든 자만심과 장점들은 끝나야 하며 사람들이 하나님을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방법대로 찾지 않는다면 그들은 매우 당황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말을 다 들었으니 마음이 변하기 쉬운 사람들처럼 이리 저리로 날려 다니지 않는 방법을 배웁시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에 만족하지 않고 거기에 항상 그들의 생각을 첨가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사 악한 혼합물을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이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달려 있으므로 예수님이 우리의 능력이 되 게 하십시오.

 

만약 우리가 그 분에게 투자하게 되면 우리에게는 부족한 것이 아무 것도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이 서신에서 자주 반복하는 요점입니다. 더욱이 그는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를 굳게 신봉하고 또 하나님의 진리는 어떠한 첨가물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만약 우리가 거기에 무엇인가를 부가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구원이 달려 있는 언약을 더럽히고 어기고 위조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꺼이 받아들였으니 우리는 그 분 안에 끝까지 남아 있을 것이 기대됩니다. 왜냐하면 이 분에게는 우리 모두에게 나누어 줄 충분한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담대하게 부를 수 있으며 비록 우리가 아담의 저주받은 종족의 자손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축복을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받아들이시고 거리낌없이 우리를 양자 삼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소식이 전세계에 두루 퍼지기를 소망하십니다. 이제 문이 활짝 열렸으며 우리는 하나님께 마음대로 가까이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