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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실락원의 회복 (창3:22-24) /로이드존스

baromi 2008. 7. 3. 10:10


“여호와 하나님의 가라사대 보다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와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창:3:22)

우리는 지금 조국의 많은 사람들이 오늘밤 우리가 여기서 모여서 하는 것이 고풍스럽고 케케묵은 짓일 뿐 아니라 아주 우스운 것이라고 여기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교회를 떠났고 더 이상 예배를 드리지 않으며 성경으로부터 그리고 기독교 신앙으로부터 그들의 등을 돌렸습니다. 왜냐하면 이 현대시대에 고통을 주는 산더미 같은 엄청난 문제에 대해서 종교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여기 참석하여 창세기 3장에 근거해서 설교하는 것을 발견한다면 아마 정신나간 것으로 간주할 것입니다. 성경으로부터 말하는 것만 해도 신통찮은데 이와 같은 발달된 시대에 창세기 3장에서부터 설교하는 것은 아주 우스운 짓이고, 말도 되지 않는 짓이라고 여길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오늘밤 여러분들에게 우리가 하는 일이 타당할 뿐 아니라 가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창세기 3장을 통해서 보여드리겠습니다. 나아가서 이 3상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않고는 현대세계와 그 문제를 이해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해 보이기를 윈합니다. 뿐만 아니라3장의 메시지를 이해하지 않고는 현대의 세계와 그 비극적인 상황을 이해하기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바입니다.
더욱이 우리가 성경이라고 부르는 이 책 전체에서 발견되는 메시지를 떠나서는 우리 문제를 해결할 소망이 전혀 없다는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실을 직면하라

이제 그것을 하나씩 살펴봅시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복음을 설교하는 목적과 기독교 신앙의 목적은 인생으로 하여금 사실을 직면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그것을 믿지 않습니다. 세상은 우리를 감상주의자이고 감정주의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만나서 찬송이나 부르고, 감정적인 분위기를 고조시킨다고 생각합니다. 삶에서부터 벗어나서 생각하기를 멈추고 가혹하고 난치한 생의 어려운 문제들을 직면하기를 기피하는 자들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야말로 이 세상을 직면하고, 이 세상을 이해할 수 있으며, 우리가 도달한 비참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메시지를 가질 유일한 사람이라고 봅니다. 그러면 제가 이것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상태를 한 번 봅시다.

제가 별도로 설명을 하지 않아도 지금 현재 우리들이 직면한 고통스런 문제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생각해 본 사람이라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이 세상 삶의 가장 큰 특징은 무엇입니까? 그 중 가장 큰 특징의 하나는 쉼이 없으며, 고요함이 결여되어 있고, 평온함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의사들이 이 사실을 입증해 줄 것입니다. 신문을 보면 자주 진정제라고 불리우는 약을 구입하기 위해서 수많은 돈을 쏟아넣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잠들게 하고 있는지 읽으셨을 것입니다. 이 시대는 쉼이 있는 시대입니다. 불확실한 시대이고 불안전한 시대입니다. 오늘날만큼 사람들이 불안전을 느낀 시대는 지금껏 없었다고 말해도 사실일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이 아니라도 권위 있는 석학들은 우리 시대를 일컬어서 '불안의 시대 '라고 묘사합니다. 그 말에는 의심할 바 없이 진리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오늘날보다 더 많이 염려하고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시대는 없습니다. 기독교인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위대한 특정 과학자들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 세대에서 가장 많이 염려하고 고통을 당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왜 그런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무서운 환경오염의 문제를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땅과 바다와 강들을 오염시키고 있습니다. 그들은 생태학적인 문제를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연의 균형을 깨뜨리며 어떤 류의 짐승들을 죽이는 결과로써 모든 자연 균형이 깨어지고 가공할 만한 결과가 초래되는 것을 그들은 염려합니다. 그들은윈자폭탄의 낙진의 결과가 초래할 수 있는 무서운 일들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윈자폭탄의 낙진이 땅에 떨어지고, 그것을 젖소가 풀을 뜯어 먹음으로써 그 우유를 아기들이 마시게 될 때에 그 뼈의 발달에 나쁜 영향을 끼치게 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어떤 미래가 도래하게 될 것인지를 두려워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세계적인 기근에 대해서 예고하기도 합니다. 동시에 인구폭발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세계 인구는 금세기 말이 되기 전에 두 배로 늘어날 것이라고 측정합니다. 오염과 식량의 부족으로 인한 기근이 있을 것을 두려워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입니다. 마음이 편치 못한 시대입니다. 사람들은 이 모든 것에 대한 부분적인 책임을 어쨌든 느끼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시대는 투쟁의 시대입니다. 이보다 더 각박한 투쟁이 있었던 시대는 없습니다. 공단을 살펴보십시오. 계속적인 투쟁이 있습니다. 노사간의 투쟁뿐만 아니라 내부에도 투쟁이 있습니다. 사회 전반에 이러한 싸움이 있습니다. 시기와 질투와 욕심과 증오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내가 지어낸 것이 아니라 신문이나 텔레비전을 보시면 알 수 있는 일들입니다. 과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상태를 문자적으로 그대로 기술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무엇이 일어날 것인지 궁금해하고 있습니다. 하는 일에 의미를 물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신뢰할 수 있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 시대의 특징입니다. 이 시대는 불안정의 시대이고, 투쟁의 시대이고, 불안과 경쟁의 시대이며, 궁극적인 무의미감이 지배하는 시대입니다.

이 문제를 가지고 여러분을 더 붙들고 싶지 않습니다. 이 시대의 시인 가운데 한사람이 - 그는 전혀 기독교인이 아닙니다만 - 이렇게 현대인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내가 만들지 않은 세상 속에서 나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나그네이다.

T.S. 엘리어트는 현대 사회와 현대인을 이와 같이 묘사합니다.

무의미한 세상에서 외로운 인생이여!

여기에 현 세상의 역설이 있습니다. 우리는 북적대는 사람들 속에서 살면서 과거 어떤 때보다도 외로워하고 있습니다. 이전에 누렸던 촌락 삶이 주던 우정은 사라져 버렸습니다. “무의미한 세상에서 외로운 인생이여!” 이것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입니다. 누구든지 이 사실에 동의할 것입니다. 정치가도 철학자도 과학자들도 이 현 시대에 세상의 상태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습니다.

근본적 질문

여기에 질문이 있습니다. 왜 이와 같은 세상이 되었습니까? 우리 세기의 여러 가지 발전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교육과 지식과 문화와 눈부신 기술의 진보 등등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근본적인 의문이 있습니다. 왜 지금 세상은 이와 같이 되었습니까?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은 하나밖에 없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대답은 우리가 읽은 창세기 3장이 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3장을 이해하지 않고는 성경을 이해 할 수 없습니다. 창세기 3장은 모든 성경의 나머지 부분에 대한 열쇠 입니다. 동시에 나는 현대 세계를 이해하는 유일한 열쇠 라고 주장하는 바입니다.

무엇을 설명해줍니까? 창세기 3장의 가르침에 따르면 세상은 결코 이와 같이 되도록 의도되지 않았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세상이 이와 같이 않았던 때도 있었습니다. 다음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하나님이 이 세상을 만드셨습니다. 우연이 아닙니다. 우연에 의해서 존재한 것이 아닙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하나님이 하신 일은 모두가 다 완벽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완벽한 세상을 만드셨습니다. 창조의 절정이요. 극치로써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사람을 자기 형상을 따라서 만드셨습니다. 달리 말해서 사람은 완전하게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완전한 사람을 완전한 환경 속에 두셨습니다. 낙원이라고 불리우는 곳입니다. 낙원에서의 삶을 살펴보십시오. 얼마나 놀라운 삶이었겠습니까? 조화와 평화와 일치와 기쁨이 낙원에서의 삶의 특징이었습니다. 땀 흘리고 노력하고 애쓰지 않고 식물을 손에 넣었습니다. 나무의 열매를 따먹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거기에는 악한 것도 없었고, 죄악된 것도 없었고, 불행을 초래하는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완벽한 상태요, 무흠한 상태요, 완전한 축복의 상태였습니다. 인간에게 최고의 기쁨을 주는 순간은 하나님께서 내려오신 순간이요, 더불어 교제하는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자신과 더불어 교제 하도록 창조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전능하신 하나님과 더불어 사귀며 교통할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부여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 자신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서 사람을 만드신 이유입니다. 거기에는 자연적인 상호교류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일컬어서 낙원이라고 부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상상조자 하기 어러운 것이지만 그것은 바로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진리 입니다. 모든 면에 있어서 완벽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와 같은 질문을 갖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세상이 오늘밤 우리가 알고 있는 것 같은 세상이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이 문제에 직면하지 아니하면 여러분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하나밖에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어리석은 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생각하지 않는 자라는 것입니다.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고 하면 이와 같은 질문에 직면해야 합니다. 왜 세상은 이와같은가? 왜 이같이 변했는가? 창세기 3장에는 여기에 대한 완벽한 대답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있는 진리를 여러분에게 분명히 해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대답은, 인생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자기의 최고의 특권을 실현하기를 중단했다는 사실입니다. 무한하신 분과 더불어서 조율하는 삶을 포기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것에 반응하기를 중단한 것입니다. 그는 그 사실을 믿는 것을 멈추었습니다. 태초에 이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설명함으로써 오늘날 왜 계속해서 세상이 이와 같은지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그것이 첫 단계입니다.

급히 두 번째 단계로 넘어가 봅시다. 이것은 오늘날 중대한 문제입니다. 인간은 한계적 존재로서 자기의 유한성을 실현하기를 멈추었습니다. 인생은 하나님께 의존하는 일을 실현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간교한 사단은 인간을 유혹하는 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마귀가 와서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느냐 ? 하나님이 그렇게 말한 것은 너로 낮은 단계에 머물러 두기 위해서 말하신 줄 알지 못하느냐? 너는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어." 인생은 그의 유한성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이전에는 하나님께 의존해야 하는 것과 자신이 유한적인 존재라는 것과 창조주가 아니요 피조물이 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인생은 그것을 싫어하기 시작했고, 하나님과 같아지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신의유한성과 하나님에 대한 절대 의존성에 대한 지식을 포기했습니다. 달리 말해서 이것은 자만심의 문제입니다. 야망이 끼어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같아지고 싶었습니다. 그들에게 제시한 말의 요점은 이와 같습니다.
"너는 하나님과 같아질 것이다."이것이야말로 그들이 추구했던 바로 그 목표입니다. 나는 지금 오늘날 현대세계에 대해서 여러분에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오늘날도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이 없다고 믿습니다. 인간은 사람들을 달 위에까지 보냈습니다. 인간은 그보다 더한 것도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수명을 결정하고, 성을 결정할 수 있다고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창조주처럼 행동할 수 있습니다. 수년 전 캠브리지대학의 한 위대한 교수가 이같이 말했습니다. "인간은 지금 창조주의 위치를 취할 수 있다.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인간은 더 이상 유한자가 아닙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같습니다. 그는 창조자입니다. 그 교만과 야망 속에서 인간은 자기 자신을 자랑하고 자신을 예배합니다.

또 하나의 요인은 이와 같습니다. 사람들은 진리의 자리에 쾌락과 즐거움을 두기 시작했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달달리 말해서 여자는 더 이상 원리나 진리에 의해서 인도를 받지 않습니다.

이제 모양에 따라서 인도되고 있습니다. 그럴듯한 나무였습니다. 아주 멋진 열매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여자에게 매력적으로 보였습니다. 욕망이 첫 번째 자리에 왔습니다. 지금껏 인생은 남녀를 막론하고 진리에 의해서, 원리에 의해서 지배되는 대신 욕망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습니다. "멋있구나! 나는 그것을 원해. 나는 그것을 좋아해. 나는 그것을 반드시 가져야만 해." 진리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원리는 더 이상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인간이 실패한 경위 입니다. 이 것이 낙원이 오늘날 우리가 아는 이와 같은 세상의 상태가 된 경위입니다.

소원과 욕망과 열정이 삶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날 가장 특징적인 삶의 모습입니다. 사람은 더 이상 진리나 원리에 의해서 지배되지 않습니다. "내가 그것을 원한다. 내 아내와 아이들이 고생하든 말든 그건 문제가 아니야. 나는 그것을 좋아해." 매력과 소원과 욕망이 들어오고 나머지는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무서운 고통 속에 있는 세상이 된 이유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과 더불어 하나님이 우리를 대항하고 있다는 느낌을 마귀가 심어 주었습니다. 이것이 마귀가 던진 질문의 요점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느냐?"고 질문을 던진 이유입니다. 말하자면 그는 다음과 같은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하나임은 폭군이야. 그분은 너를 항상 낮은 데에 머물러 두려고 해. 너는 너 안에 하나님 이 될 만한 것이 심겨져 있어.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질투하고 있어. 하나님은 네가 그와 같아질 것을 알고 계셔. 그래서 그분은 그렇게 못되도록 너에게 하고 있어. 너를 낮은 자리에 머물러 두려고 해. " 이것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믿고 있는 바입니다. 그들이 생각할 때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괴물이고, 우리를 비천한 데 묶어두시고, 우리를 처참하게 만드시는 인류의 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중교는 인류의 진보와 발전에 어떤 것보다도 큰 장애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종교는 사람들을 낮은 자리에 묶어두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유하는 것은 기독교 같은 종교를 떨쳐버리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대항하고 있다는 이 느낌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7). 자연인은 하나님을 미워합니다.

여러분들은 다음과 같이 말할지 모릅니다. "나는 예배 자리에 가길 않아도 하나님을 믿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알고 있다." 그럴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의 하나님을 정의하도록 하면 그 하나님은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는 자기 자신이 만든 상상의 하나님 입니다. 성경에서 계시한 하나님을 그들에게 직면시키면 그들은 그 하나님을 싫어합니다. 이것이 이전에 일어난 일인 동시에 아직도 세상 사람들을 주관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또 하나 비극적이고도 애처러운 일이 있습니다. 인생들은 어리석게도 하나님으로부터 도피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 나 불순종하고 반역하는 순간에 그들에게 죄의식이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이전에 결코 알지 못했습니다.
이 때까지 죄의식이란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기 죄책감과 두려움이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동산에서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에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그들은 거기 숨어서 하나님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거기 있는 줄 모르고 지나쳐 가실 것이라고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하나님은 불러내셨습니다. "네가 어디에 있느냐?"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불려나와 서야만 했습니다.

아직도 동일합니다. "나는 상관하지 않아. 너는 너의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려면 말해. 나는 일없어. 나는 그렇게 살아갈거야"라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들은 곧 그들이 죽게 뇔 것을 알지 못합니다. 또한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지 목하고 있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이 순간, 세상이 이 모양인 것은 사람들이 심판이 다가 온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우리가 죽으면 그것은 동물이 죽거나 꽃이 떨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끝이 아닙니다. 우리는 책임적 존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직면해야 할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처음에 이것을 인 식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인식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거기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죄책과 두려움 속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을 따돌릴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그들의 반역과 그들의 범죄 행위에 해당하는 심판이 따른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반드시 응분의 처벌이 따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아직도 세상은 이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심판은 선고되었고, 여자의 씨와 뱀의 후손 사이의 싸움은 지속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 이후의 인류의 역사입니다. 여러분의 역사책을 읽어 보십시오. 무엇이 기록되어 있습니까? 그것은 고통과 고뇌와 투쟁과 다툼의 역사입니다. 모든 역사가 그래왔습니다. 불행과 죄의식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땅조차도 저주를 받아 가시와 엉겅퀴가 돋아났습니다. 전에는 없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가시와 엉겅퀴 때문에 고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처벌의 한 부분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모두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정원을 가지고 계십니까? 일년만 소홀히 해보십시오. 곧 황폐해 질 것입니다. 잡초와 가시와 엉겅퀴가 가득할 것 입니다. 세상에 아픔과 질병이 들어오고 전염병과 혼란이 가중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에 시작된 것입니다. 이것은 타락의 일부입니다. 아담은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아직도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자연과 질병과 감염 등 계속적인 투쟁이 있습니다. 그 모든 것 위에 또한 죽음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밤 본문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낙원으로부터 쫓겨났고 얼굴에 땀이 흘러야 먹고 살 수 있게 되었습니나. 그 때 이후로 지금까지 고통과 투쟁과 싸움은 계속되어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너무나 진실한 이 모든 것은 역사의 시점으로부터 시작된 것이고, 그 이후로 인류 역사에 계속되어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와 같이 헛된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 자신을 보게 됩니다. 무슨 설명이 가능합니까? 유일한 설명은 실락원을 상실했다는 것입니다. 실락원이라는 말밖에는 달리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오늘 현대 세상에 대한 유일한 설명 입니다. 우리는 낙원을 상실했습니다. 우리는 낙원에서부터 쫓겨났습니다. 우리는 낙원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우리 가사는 세상은 이와 같습니다.

인간의 헛된 노력

그러나 조금 더 기다려 보십시오. 우리가 직면해야 할 또 하나의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맞닥드려야 하는 가장 긴급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지도적인 과학자들 가운데서는 이 세기가 끝나기 전에 세기의 종말이 도래할 것이라고 실제로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아닙니다. 나는 그들의 말을 옮길 뿐입니다. 보잘것없는 설교자가 강단에서 흥분해서 그 말을 한 것은 아닙니다. 이 사람들은 과학자들입니다. 그들 중의 한사람은 이와 같은 말을 지난 주간에 말했습니다 그들은 그런 말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것을 가능성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생각하기 시작해야만 하는 시간이 아닙니까? 왜 세상이 이 렇습니까?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되었습니까? 타락 이후에 인류의 역사는 불변합니다. 낙원을 상실한 이후로 우리는 이와 같이 되었습니다.

또 하나의 흥미 있는 문제가 있습니다. 타락 이후로 인간의 역사는 낙원으로 복귀 하고자 하는 헛된 노력의 기록입니다. 우리가 문명 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은 놀라운 역사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모든 문명의 역사는 낙원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투쟁과 노력의 역사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제가 여러분 앞에 말하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믿지 않습니다.

그들은 창세기 3장의 이야기를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류는 세상이 이같이 만들어 졌을 리는 없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상스러운 향수를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 한때는 이와 달랐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 그들이 본래 있었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문명이라고 부르는 위대한 노력을 하도록 하는 충동이 되어왔습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들에게 그것은 모두 헛된 노력이라는 것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인간은 결코 낙원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대단한 이야기였습니다. 나는 이것을 가지고 여러분을 붙들어 둘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텔레비전에서 볼 수 있고, 책을 통해서 읽을 수 있습니다.

인간이 낙원으로 돌아가려는 역사가 무엇입니까? 부분적으로 철학이라고 부르는 역사 속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3,4세기 전에 살았던 헬라의 위대한 사람들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들은 위대한 두뇌와 지성을 가진 사람들이었고 생각하기 시작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말했습니다.

"우리는 여기 고통스러운 세상 속에 있다." 어떤 의미에서 인간은 아직도 동일한 분석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내가 만들지 않은 세상 속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나그네이다." "왜 그렇습니까?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바로 잡을 수 있습니까 ?" 그들은 생각하기 시작했고 원리적으로 풀어나갔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존경을 돌려보냅시다. 그들은 위대한 지성인 이었고, 그들은 문제에 직면했습니다. "바로잡을 수 있다.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생각하고 추리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본능이나 욕망에 지배되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두뇌를 가지고 있고, 이해하고 생각할 수 있고,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다"라고 그들은 말했고 그렇게 실제로 했습니다. 그들은 유토피아(완벽한 도시국가)라고 부른 계획를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구체적인 방안을 세워서 인류를 몇 가지 계층으로 나누고, 상이한 직무들을 그들의 능력에 따라서 맡기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만 하면 사람은 낙원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헸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거기에 반대하는 학파들도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시기 이전에 철학자들의 자살률은 다른 어떤 부류의 사람들의 자살률보다 높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위대한 역사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잊어버리지 맙시다.

이 철학에는 여러 가지 학파와 아류들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순수 사고가 전부이며,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아니지, 그보다 조금 더 시도할 필요가 있어. 정부가 필요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정부를 수립했고, 정치라는 개념을 도입했습니다. 이 정치라는 말은 그들이 만들어 낸 말입니다. 정치 즉 어떻게 다스리고, 어떻게 통제하고, 어떻게 사람들로 하여금 법을 존중하게 하는가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조직화되고 통제되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정치적인 활동을 통해서 낙원으로 우리를 돌이키려는 노력 이 역사를 통해서 있어 왔습니다. 과두정치도 있었고 군주정치도 있었고 귀족정치도 있었고 금권정치도 있었으며, 마침내 우리는 민주정치에 도달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이구나! 민주정치, 사람에 의한 정치가 우리를 낙원으로 인도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아니야,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삶에 대해서 시적견해를 가지는 것이야. '그래서 워즈워드나 다른 사람들은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며 자연과 더불어 조화해야만 하는 보다 원시적인 상태로 되어야만 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루소의 생각이었고, 그 외 많은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이성을 너무 많이 강조해 와서 이제 자연으로 돌아가서 자연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고 그들은 주장합니다. D.H. 로렌스같은 사람들을 들 수 있고, 현대에도 동일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런 주장을 시를 통해서 주장해왔고, 다른 사람들은 그런 의미에서 예술이나 문화를 강조해 왔습니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인류의 역사 가운데 여러 가지 방법으로 낙원으로 돌이킬 수 있다는 특별한 확신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만큼 대단한 것은 없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실제로 믿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신앙을 거기에다가 쏟았습니다. "낙원이 곧 이루어질 것이다. 예배에 참석하고 종교를 가지고 하나님을 믿을 필요가 어디에 있는가?"라고 그들은 말했습니다.

내가 말하는 바를 예를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9년 전에 아주 유명한 톰 페인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톰 페인은 「이성의 시대」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는 영국 사람입니다. 그는 문제의 근원이 종교, 하나님을 믿는 신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문제의 원인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모든 환상적인 것을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해야 하는 모든 것은 이성을 적용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이성의 시대」라는 책을 쓰고 「인간의 권리」라는 잭을 지었습니다. 지금부터 202년 전에, 1776년에 그가 무어라고 실제로 썼는지 여러분은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사람들이 항상 가지고 있는 낙원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낙관주의 입니다. 여기에 바로 톰 페인의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완전히 새롭게 할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낙원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새 세상의 탄생일이 가까워졌다." 1776년에 톰 페인이 한 말입니다.

다음 세기로 가봅시다. 칼 막스라고 불리는 위대한 사상사가 출현했습니다.

칼 막스의 가르침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버렸습니까! 그는 또 한번 낙원으로 돌이키려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말한 것을 여러분은 알고 게십니까? 이것이 바로 그가 말한 것입니다. "지금껏 철학자들은 세상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밖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우리에게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남아 있다." "이 모든 철학자들은, 그들은 모두 위대한 사람들이었지만 처방전만 주었을 뿐이다. 그들은 단순히 세상을 설명하기만 했다. 그것은 충분하지 많다. 여러분과 내가 해야 하는 것은 세상을 변화시켜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을 변화시켜야만 한다. 이것을 하면 여러분은 세상을 변화시킬 것이다ꡓ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는 확신했습니다. 그는 커다란 확신을 가지고 글을 썼고, 사람들은 그를 믿었습니다. 나는 인간 안에 낙원으로 돌이킬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비범한 확신을 가진 사람들을 예로 들고 있을 뿐입니다. “세상은 이렇게 되어먹지 않았어. 이래서는 안돼. 우리는 보다 더 나은 삶을 살도록 의도된 사람들이야. 우리는 더 낫게 할 수 있고, 돌이킬 수 있어.” 그리고 그들은 노력해왔습니다.

이제 현대로 가봅시다. 나는 1918년 12월을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이것은 나이가 든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유익이지만). 1918년에 4시간 동안이나 비와 진눈깨비가 뿌리고 있는 가운데서 미국 대통령인 윌슨이라고 불리는 사람을 보기 위해 서 있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는 우리나라에 와서 우리나라 수상과 함께 파리의 베르사이유 궁정의 평화조약을 체결하려고 하는 길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를 낙원으로 돌아가게 인도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끔찍한 전쟁을 치루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일어날 수 없다고 하는 말들을 했습니다. 이처럼 철학과 과학 등으로 교육받고 개화된 시대에 독일 친구들이 전쟁을 일으킬 리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일어났습니다. 그때에 로이드 조지 같은 사람은 이같이 설명했습니다.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몰랐습니다. 나는 평화주의자였고, 전쟁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전쟁을 피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전쟁은 도래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어쩔 수 없습니다. 절망하지 맙시다. 이것은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입니다.” 모두들 환호했습니다.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이라니! 그것이 세계 1차 대전입니다. 그리고 나서 윌슨 대통령이 와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했습니까? 이것이 그가 한 말입니다. “우리 인간은 지금 당장 황금시대 그 자체를 볼 수 없지만 해가 거듭될수록 더 밝아지는 시대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오랜 동안 마음속에서부터 갈망해 오던 것을 볼 수 있는 고지로 우리를 인도해 줄 것입니다.” “놀라운 일이군! 그가 그것을 해내고 있어, 그는 국제연맹을 만들고 있어, 그는 겸손하게 황금시대라고는 말하지 않지만 거의 산 정상에 가까이 이른 것이야, 우리가 산 정상에 도달할 때 우리는 약속된 땅을 바라볼 수 있을 거야, 거기에 도달하는 것은 시간문제야, 복락원이 이루어질거야”라고 우리는 믿었습니다. 우리는 국제연맹이 그것을 해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더 이상 낙관주의는 없다

여러분이 보다시피 인류는 끈질기게 이 낙관주의에 매달려 왔습니다. 잃어버린 낙원에 스스로 돌아갈 수 있다고 믿어왔습니다. 이제야말로 질문을 해야 할 때가 아닙니까? 낙원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과 저는 희망이 사라진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60년 전처럼 더 이상 낙관적이지 않습니다. 이 시대가 도래하기 전에도 위대한 사상가들은 이 치명적인 낙관주의를 의심해왔습니다. 스피노자는 300년 전에 이와같이 기록했습니다. '대중이 순수한 이성의 명령에 따라서 살 수 있다고 추론하는 사람들은 시적인 황금시대를 꿈꾸든지 한낱 연기를 할 뿐이다."

여기 탁월한 유대인 철학자는 어떤 사람이든지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들의 이성에 따라서 살도록 설득되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시적인 황금시대를 꿈꾸든지 아니면 무대 위에서 속임수를 쓰고 있을 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저는 여러분에게 다음 사실을 상기시키고 싶습니다. 위대한 세계 종교들을 열거해 보십시오. 불교, 유교, 힌두교, 모하메드교와 그 밖의 종교들이 있습니다. 최후의 절망 속에서 이러한 종교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위대한 판사였던 크리스마스험프리 씨는 불교도가 되었습니다. 명쾌한 두뇌와 뛰어난 사고력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결국 절망 가운데서 이 세상의 유일한 소망은 이성이 아니라 신비주의요, 불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다른 세계적인 종교들과 마찬가지로 불교 역시 전적으로 소망이 없습니다. 그 어떤 종교도 소망이라곤 없습니다. 이 세상을 위한 소망은 아무데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 종교들이 내어 놓는 희망이란 무엇입니까? 이와 같을 것입니다. 수차례의 윤회를 통해서 이 세상에 여러번 환생하여 점차적으로 조금씩 조금씩 나아져서 마침내 열반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그 절대 속에서 내가 존재하기를 그치게 될 것이라고. 그것이 유일한 소망입니다. 이 세상을 위한 소망은 거기에 없습니다. 이 세상의 위대한 종교들 중의 그 어느 것도 전혀 소망이 없으며, 전적으로 부정적이며, 또 그것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누구보다 사람들이 종교로부터 돌아서게 하는 데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은 바로 버틀란드 러셀입니다. 그는 오래 살았고, 우리는 이 위대한 석학이자 철학자인 그를 텔레비전에서 자주 보았습니다. "이게 바로 우리가 원하는 거야. 우리는 설교자의 이야기나 성가대의 노래가 아니라 이성과 이해가 필요해. 논리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 필요해"라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논리, 분석, 사고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무엇을 말합니까? 그가 우리에게 무엇을 제의합니까? 버틀란드 러셀의 말을 읽어드리지요. "인간의 모든 노력과 명석함의 전성기도 광활한 태양계의 죽음 속으로 소멸될 것이고 인간이 이룩한 모든 성전도 필연적으로 우주의 폐허라는 파편들 아래 묻혀 버리고 말 것이다. " 이게 버틀란드 러셀이 한 말입니다. 그는 아주 논리적이어서 사람이 결코 낙원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내다 보았습니다. 인간은 결코 자신과 그가 살고 있는 세상이나 인간성을 고양시켜서 낙원으로 돌아가게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이제 현대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을 만나봅시다. 몇주 전에 그를 텔레비전에서 보았을 것입니다. 그는 ‘소유냐 존재냐’ 라는 책을 얼마 전에 썼습니다. 그가 무어라고 말했는지 아십니까? “우리는 생존의 시간을 거스리고 살고 있습니다. 세계적인핵폭발이나 심리적, 생태적 붕괴 등과같은 위험 속에서 살아남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합니다. 우리는 제 정신을 가진 세계를 건설하든지 아니면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사람도 물론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는 거의 반(反)그리스도인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살아남을 기회가 희박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면에서 완전한 붕괴와 멸망으로 치닫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세계 역사 속에 사람이 자기 힘으로 세상을 멸망시킬 수 있었던 시대는 이전에 없었다고 지적합니다. 인간은 항상 엄청난 재해를 끼칠 수 있었고 또 끼쳐 왔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혼란스럽고 불행했고 비참 했었습니다. 그러나 금세기에 와서 사람은 원자력을 갖게 되고 세계를 멸망시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만약 우리가 정신을 차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끝장 날 것이라고 그는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가 제안한 유일한 정신차리는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여성 해방입니다!

여러분, 이제 여기에 우리가 도달했습니다. 여러분에게 하나 더 인용하겠습니다. 그것은 복음의 선포입니다. 이것은감상이 아닙니다. 감상에 빠져서 밤새 텔레비전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이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많은 것을 생각한 적은 없었을 것임을 보장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나는 여기에 여러분에게 어떤 동화를 들려주거나 감정을 부추기거나 혹은 내 자신이나 그 밖의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여러분이 아직 생각할 기회가 남아있을 때 생각하도록 하기 위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현대의 선두적인 한 유전공학자요 과학자인 메다와 부인(Lady Medawar)의 말을 인용하겠습니다. 지난 7월에 그녀가 쓴 기사를 읽어보았습니다. ”마침내 우리는 최악을 인식하기 시작하고 있다." 여러분은 최악의 것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최악의 것이 무엇이지요? 그것은 이런 것입니다. “어떤 과학이나 기술적인 기교만으로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없다." 물론 여러분은 사람들을 달 위에 착륙하게 할 수 있지만 그것이 삶의 질을 향상시킵니까?

여러분은 광범위하게 독서를 하고 텔레비전이나 라디오를 통해서 박학한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일요신문과 그 속에 있는 쓸데없는 기사들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입니까? 그녀가 말하듯이 여러분은 최악의 것을 인식해 보셨습니까? 이러한 어떤 방책도 삶의 질을 개선시키지 못합니다. 사람들은수세기를 통해서 우리들을 낙원으로 돌려보내고자 하는 엄청난 노력을 해왔지만 우리는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 사람은 그것을 해낼 수 없습니다. 낙원은 회복되어질 수 없습니다. 왜 안되지요? 유일한대답이 창세기 3장 마지막에 있습니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몰아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 라“(24절)

하나님 없이 낙원은 없다

왜 사람은 그 영리하고 똑똑한 두뇌를 가지고도 낙원에 돌아갈 수 없습니까? 그 단순한 대답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만드셨다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그렇게 하도록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여기에 대답이 있습니다. 물론사람은 낙원으로 돌아가기를 원합니다. 아무도 비참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불행해지기를 원치 않으며 땀 흘리며 일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누구나 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음식을 얻기 원합니다. “많이 받고 적게 일하자." 이것이 낙원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소망입니다. 누구나 낙원으로 돌아가고 싶어 합니다. 제가 말했듯이 세기에 걸쳐서 인류는 낙원으로 돌아가고자 노력을 다해 왔습니다. 왜 그는 돌아갈 수 없습니까? 이유는간단합니다. 사람은 하나님 없이 낙원을 바랍니다. 사람은 자기 식으로 낙원을 바랍니다. 그러나 그것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없이는 낙원이 없습니다. 말할 수 없는 어리석음 가운데 있는 인생이나 탁월한 철학자를 막론하고 어리석게도 하나님 없이 낙원을 회복하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인간이 낙원을 회복하기에 실패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인간은 죄인으로 머물러있는 한 결코 낙원을 회복할 수 없습니다. 왜냐구요? 이와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낙원이 무엇입니까? 제가 여러분에게 정의해 드렸던 대로 다시 정의합니다. 낙원은 극락의 장소요, 화합의 장소요, 행복의 장소이며, 상호이해의 장소이고, 상호 용납의 장소입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인간은 죄인으로 머물러 있는 한 그는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이고, 자기이익을 추구하고, 자기 관심적입니다. 인간은 다른 사람이 고통을 당하는지에 대해서는 개의치 않고 자기 권리와 자기 이익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수천만명이 일자리를 잃어도 개의치 않습니다. 내 이익만 추구하면 됩니다. 노동자들뿐 아니라 사용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모든 인생에 해당되는 진리입니다. 고위층에서부터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동일한 진리입니다. 부자든 가난하든, 배웠든 못 배웠든 사람들은 모두 죄인입니다. 그리고 모든 죄인들은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이고, 욕심이 많아 탐욕스럽습니다. 우리는 무엇이든지 우리 자신을 위해서 원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모두가 그와 같은 한 낙원은 전혀 불가능 합니다. 그것은 낙원의 정반대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그가 무엇을 하든지 완전히 변화되고, 그러한 이기심과 자기중심적으로 인도하는 죄의 오염에서부터 벗어나기까지는 결코 낙원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창세기 3장은 우리에게 또 하나의 이유를 제시합니다. 인간은 마귀의 권세 아래 있는 한 결코 낙원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인간이 유혹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을 무시하고 반역했을 때 일어난 일입니다. 인간은 자신을 자유하게 만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그렇게 함으로 성공한 것은 자신을 마귀의 종으로 만드는 데 있습니다. 그 이후로 인간은 마귀에 의해서 통제당해 왔습니다. 바울은 마귀를 이 세상의 신이라고 말합니다. 마귀는 '공중의 권세잡은 자며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역사하는 영'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정사와 능력과 이 어두움의 권세와 악한 영들에 대한 것입니다.

왜 세상이 이와 같습니까? 세상은 마귀에 의해서 지배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마귀를 떠나서 이 세상을 설명할 수 있습니까? 왜 우리는 세상이 아는 한 가장 뛰어난 교육을 받은 이같은 세기에 두번씩이나 세계대전을 치뤘습니까? 왜 이와 같은 무서운 무기들을 저장하고 있습니까? 왜 우리는 이러한 어리석고 무서운 일들을 위해서 예산을 편성합니까? 의미가 무엇입니까?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사랑하는 친구 여러분, 오직 하나의 대답만이 있습니다. 이 악한 세력이 사람들을 지배하고, 서로간의 미움을 창출하며, 불화와 악위와 분열과 의심과 미움을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다른 설명이 없습니다. 사람이 마귀의 종으로 남아 있는 한 그는 결코 낙원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

지금까지 말한 것 말고 더 탁월한 설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룹입니다. 그룹이 무엇입니까? 성경에 나오는 그룹은 항상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임재의 상징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거룩을 지키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결코 낙원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거기에 돌아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임재에 이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너무 정결하셔서 죄를 바라볼 수조차 없으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그분 안에는 어둠이 없으십니다. 빛과 어두움 사이에는 교제가 없습니다. 그룹 앞에 인간은설 수 없습니다. 계시록을 보면 악한사람들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조금 넘보기만 해도 산과 바위를 향해서 소리칩니다. “우리 위에 떨어져 우리를 가리우라."

그룹만이 아닙니다.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셔서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십니다. 화염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율법, 하나님의 공의, 하나님의 의를 의미합니다. 이 세상은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에 의해서 통치되는 우주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만든 것이 아니라 우리는 세상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했을 뿐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이 만드셨고, 그가 율법을 주셨고, 그가 규칙을 부여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우리 각 사람의 가슴 속에 있는 잘잘못의 의식 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율법을 십계명 속에 분명히 나타내 주셨습니다. 그 도덕법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거기서 하나님은 이와 같이 말합니다. “너희들이 낙원의 삶을 살고 싶으냐? 행복하고 싶으냐? 만족과 평안과 우호와 즐거운 삶을 살기 원하느냐? 그 길은 이와 같다. 너는 나 외에 다른 신을 숭배하지 말라. 너는 새긴 우상 앞에 절하지 말라. 너는 내 날을 지켜라."

그리고 나서 우리의 실제적인 삶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간음하지도 말라, 부모를 공경하라, 이웃에 대해서 거짓 증거를 하지 말라, 이웃의 소나 나귀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을 탐내지 말라. 그와 같이 살아라. 그러면 낙원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그렇게 살기 전에는 너는 낙원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죄에 대한 응분의 처벌을 요구하십니다. 그분은 거룩하고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아무런 불평을 할 수 없습니다. 그분은 인생들에게 불순종하면 처벌을 받고, 추방당하고, 죽음의 고통을 받고,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될 것을 말했습니다. 화염검은 하나님의 공의와 의로움과 거룩함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죄를 정죄하며, 죄를 짓는 모든 사람을 죽이며, 어떤 죄인이라도 하나님의 거룩하신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거룩을 준수하는 것을 조건으로 하지 않는 한 낙원에 돌아가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그룹과 화염검을 생각하십시오.
이것이 오늘날 세상이 이와 같은 이유입니다. 이것이 왜 문명이 완전하게 실패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것이야말로 버틀란드 러셀이 미래에 대해 그와 같이 염세적인지를 밝혀주는 이유입니다. 이것이 에리히 프롬이 동일하게 염세적인 이유이기도 합니다. 나는 아무런 희망을 볼 수 없었던 많은 다른 사람들의 이름들을 댈 수 있습니다.그들은 이 진리를 믿지 않았지만 이것만이 유일한 설명입니다. 그들은 당혹해합니다. 그들은 이성과 교육과 문화와 지식이 해낼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해낼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이성에 따라서 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인간은 욕망과 욕심에 지배됩니다. 그러나 여기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의 거룩과 그룹과 화염검이 있습니다.

전혀 소망은 없는가

여러분이 제게 모든 소망이 없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우리 동네에 왔냐고 물으시겠습니까? 실락원을 설교하고, 완벽한 소망상실의 상태에 우리들을 처박아 두고 떠나려 왔냐고 물으시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낙원을 회복하는 길이 있습니다. 낙원을 회복하는 길은 기독교 메시지에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룹과 화염검에 어쨌든 대답을 하기 전에는 낙원에 돌아갈 수 없습니다. 낙원에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고, 절대적인 거룩 속에 설 수 있는 사람입니다.

영원한 빛! 영원한 빛!
어찌나 그 영혼이 순수한지
하나님의 감찰하시는 눈빛아래서도 움츠려들지 않고
조용한 즐거움을 가지고 살아가며
주님을 바라보네

어떻게 그것이 이루어질 수 있죠? 그것을 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 계십니다. 이 세상에서 그것을 할 수 있는 오직 한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얼굴을 바라볼 수 있고, 움츠려들지 않습니다. 그분이 누구십니까? 그분은 천사 가브리엘이 네게서 태어날 거룩한 자'라고 처녀마리아에게 말씀해주신 분입니다. 역사를 통틀어 유일하신 거룩한 분이십니다. 그분이 누구십니까? 나사렛예수,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분은 하나님으로부터 오셨습니다. 그분은 영원부터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셨습니다. “태초에 말씀이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하나님이시라." 거기에 그분은 영원토록 하나님의 거룩하신 얼굴을 바라보셨습니다. 그분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만이 그룹의 요구에 대답하실 수 있습니다. 화염검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기에 동일하신 분이 계십니다.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게하시고." 어떻게 그가 이것을 하셨습니까? 그분은 자신을 드려 율법에 완전히 순종하셨습니다. 그분은 율법아래 오셨습니다. 율법의 일점일획까지 지키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율법에 완벽한 순종을 하셨습니다. 그분은 이를 행하신 유일한 분이십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에 대한 진리는 이렇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모든 세상은 하나님 앞에 범죄자로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낙원에 돌아갈 수 없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율법을 존중하고 지키신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누구에게든지 자기가 무슨 악을 행했는지를 발견해 보라고도전하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요구를 완벽히 만족시켰습니다.

복락원

우리의 죄에 대해서 응당히 받을 처벌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합니까?
오, 복되신 하나님의 이름이여! 그분은 우리의 죄를 자기 자신 위에 담당하시려고 오셨습니다. 우리를 치고 죽여야 했던 칼은 그분을 죽였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자 사람의아들이셨기 때문에 모든 처벌을 감당 하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에게서 채찍을 맞으셨습니다. 낙원에 이르는 입구에서 하나님은 그분을 칼로 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고, 지금도 감당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낙원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분은 자신을 위해서 그것을 하려고 오신 분이 아니고 우리를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분은 잃은 자를 찾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낙원으로 되돌이키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그것을 완수하셨습니다. 그분은 그룹과 화염검을 만족시켰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그분을 믿고, 우리 자신을 그분에게 의탁하며, 그와 연합하고, 그 안에서 낙원으로 다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의메시지입니다. 여러분과 나는 지금이 순간에도 영적 낙원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이 메시지를 참으로 믿으면 이 순간에 낙원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무슨 뜻이냐고 물으시겠습니까? 내가 의미하는 바는 이와 같습니다. 낙원이 무엇입니까? 낙원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의미는 하나님과의 교제와 친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하심이라." 어떤 사람이라도 그것을 믿으면 낙원에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화해했으며,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립니다. 그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는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기 이전에 자유롭게 누렸던 하나님과의 교제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는 영적 낙원 안에 있습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그분은 우리의 아버지 이십니다. 우리의 모든 근심과 걱정을 그분께 가져갑니다. 그분은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 가운데서 즐거워합니다. 여러분은 새로운 성품을 받고, 새 성품은 빛을 사랑하고 어두움을 미워합니다. 우리는 새로운 사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에 동참하는 자가되었습니다. 우리는 다시금 하나님의 존재에 반응하는 무엇을 갖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빛과 어두움이 아니라 빛과 빛으로서 반응을 보입니다. 우리는 낙원 안에 돌아왔으며 그 축복을 누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폭탄과 전쟁과 질병이 난무하는 죄악된 세상에 있습니다. 그리고 늙어가며 언젠가는 죽을 것입니다. 우리는 아직도 이 옛 세상에 살고 있으며,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이 사건의 결과로 비틀걸음을 걷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생을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들 뿐 아니라, 영광스럽고 기쁨 가운데 왕과 같이 순례자의 걸음을 걸어가도록 만듭니다. 신자들만이 즉각적으로 영적인 낙원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한날이 다가오고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날에는 온 우주가 낙원에서근본적인 상태로 회복될 것입니다. 무엇을 말하고 있느냐고요? 제가 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의 이천년 전에 이 세상에 계셨을 때에 우리의 모든 대적들을 정복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죄와 사단의 사슬에서부터 구원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제가 말씀드린 행복과 평안과 기쁨을 회복 시키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지극히 크고 보배로운 약속을 주십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단번에 누립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야기의 전부가 아닙니다. 그분은 사단을 패퇴시키셨습니다. 그분은 죽음과 무덤을 물리치셨습니다. 그분은 무덤을 넘어서 승리하셨습니다. 그분은 마지막 원수를 정복하시고 하늘에 올라가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보좌우편에 앉으셔서 그의 원수들을 발등상 삼으실 때까지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는 놀라운 것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계시록 21장에서 이것을 들어보십시오.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우리들이 새로운 사람이 될 뿐 아니라 새로운 우주 속에서 새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다시금 낙원이! -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시니라." 낙원! 전 우주가 낙원이 될 것입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며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 이러라." 복낙원! 모든 악은 제거되고 사라지고 파멸되었습니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을 들어보십시오.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죄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우리는 우리가 잃었던 낙원으로 돌아갑니다. 생명나무와 생명수의 강과 풍성한 결실과 행복이 있는 곳입니다.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국제연맹은 결코 그것을 할 수 없습니다! 국제연합도 그것을 해낼 수 없습니다! 실무자들이 아무리 여행을 하고 다녀도 그것을 해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낙원이 회복되었습니다!
이것이 나의 메시지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믿으십니까? 여러분은 결국 죽고 맙니다. 그리고 나면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온 세상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입니까? 여기에 유일한 대답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 즉각적으로 해방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죽음이 더 이상 두렵지 않습니다. 바울과 그리스도인은 말할 수 있습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주님께서 죽음을 정복하셨습니다. 그분께서 온 우주를 회복시킬 것입니다. 그분은 다시 오실 것입니다. 오셔서 모든 세상을 의로써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를 믿지 않고 죽은 모든 자들은 영원한 비참 속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그들이 지금살고 있는 싫이요, 더욱 비참한 삶으로 빠져들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께 속한 모든 사람들은 그분을 있는 그대로 볼 것이요, 그분의 모습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그들의 육신까지도 영화롭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과 함께 살 것입니다. 영원히 그분과 함께 다스릴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전망으로 인해 즐거워하고 있습니까? 이 일이 당신에게 일어날 것을 믿으십니까? 이것은실제적입니다. 여러분은 지난 세기에 이런 찬송을 지은 사람과 동의할 준비가 되어있습니까? 나는 요즈음 그러한 것들을 즐기고 있습니다.

빛난 옷을 입은
천천만 성도들
구속받은 군대들이
가파른 빛의 언덕으로 모여들구나
죄와 죽음과의 싸움이
끝났구나. 완전히 끝났구나
황금대문 활짝 열고
승리자들로 들어오게 하소서

당신의 크신 구원을 이루소서
죄인 위해 죽임 당하신 어린 양이시여
당신의 택하신 자의 명단을 완성하시고
당신의 권능으로 다스리소서
나타나소서. 열국의 소망이시여
본향을 그리는 당신의 망명자들에게
보이소서, 약속하신 표적을 하늘에서
오소서, 왕이시여 구주시여!

주님이 무슨 대답을 하십니까? 들어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그분께 무엇이라고 말씀 하실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나와 함께 말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아멘, 주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오셔서 다스려 주십시오. 당신의 것을 받으시고 우리를 당신에게로 영접해 주십시오. 영원히 당신의 영광중에 다스려 주십시오." 이것이 이 현 세상을 향한 성경의 메시지입니다. 우리의 상태에 대한 유일한 대답입니다. 낙원을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은 이미 영적으로 낙원에 들어가셨습니까? 여러분은 주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실 일이 없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그분 안에서 여러분은 이미 하늘에 앉아 있습니다. 여러분은 낙원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날이 다가오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날 여러분은 주님과 함께 이 의가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것입니다. 여러분은 온 세상을 심판할 것이고 천사들을 판단할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영원히 영광을 공유할 것입니다. 이 어둡고 악한 때에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이 복된 희망이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도 그들 가운데 들어 있는지 분명히 확인하십시오.


*편집자주
이 설교는 카디스의 히스 복음주의 교회에서 1978년 3월에 설교한 것이다. 이 설교의 특징은 그 논리전개에 있어서 매우 치밀한 구성이 되어 있다는 점이다. 먼저 인간의 실낙원 회복노력이 실패로 끝난 것을 차례로 논증한 다음 유일한 낙원에 이르는 통로인 예수 그리스도를 제시하면서, 그 안에서 우리가 누리게 될 영광스러운 약속 역시 차례로 열거한다. 달리 말해 점층적 논리 전개방식과 그 내용상 영광스런 소망을 힘있게 전달하는 대표적 설교의 하나이다. 이 설교는 다음호까지 연재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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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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