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 성경번역의 전제[2] 2008.4.23
어중이 떠중이 마구잡이로 성경을 원문에서 번역한다고 뛰어든다. 성경번역이 이렇게도 동네북처럼 여겨지던 때가 있었을까? 참으로 괴이한 일이다! 그래서 오늘은 성경원문을 어떻게 보는 사람이라야 우리말로 옮길 수 있는지 생각하려고 한다. 먼저, 계시관과 성경관에 대한 신앙고백이 올바르고, 교회의 지체로서 그 고백이 검증된 사람이라야 한다. 나아가, 성경을 선포하기 위하여 원문으로 바른 해석을 전제로 그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라야 성경을 번역한다. 이 부분은 다음에 좀 더 자세하게 다루어 보겠다. 이렇게 성경관과 교회관을 놓고, 교사로서 은사와 능력을 간직하는 사람이라야 한다. 세상 책을 번역하는 일도 아니고, 상아탑인 신학교에서 학문의 표현으로 원고지에 옮기는 일도 아니다. 더우기 세상 말이 변한다는 논리를 앞세워 장삿속으로 뚱속을 챙기려고 성경번역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은 교단이나 신학 부분을 언급하지 않고, 번역자 개인의 원문에 대한 자세를 살펴보려고 한다. 이 방면만 해도 방대하나 간단하게 적어보려고 한다.
무엇보다 성경은 한 권이며 그 책이라는 것을 깨닫고 확신하는 사람이라야 한다. 예사로 구약신학을 연구했다는 사람에게는 구약만 번역하라고 한다. 겉보기에는 그럴 듯하지만 큰 모순과 어두움이 깃들인다. 그렇다면 신약신학이나 교의신학까지 정통했는가를 따져야만 한다. 신학의 모든 과목을 자기 전공분야 만큼 공부하지 않은 자라면, 구약신학만 가지고 구약을 번역하다는 것은 소경이 코끼리 다리 만지는 꼴이 된다. 다른 과목은 고사하고라도 구약을 기록한 말인 히브리어를 제대로 배웠다면, 헬라어도 마찬가지로 다룬다. 헬라어만 했다고 하면서 번역하겠다고 나서는 것도 나중에 하나님 앞에서 어떤 심판을 받으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완전하게 준비된 사람이 있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그러나 기본으로 갖추어야 하는 내용을 상식으로 말하는 것이다. 구약을 공부했건 신약을 공부했건, 모두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성경을 마스타 해야 한다. 성경을 기록한 원어를 모두 꿰뚫어야만 비로소 성경을 번역하는 자격이 있다. 이런 사람이 과연 지금 우리 나라에 몇이나 있다고 생각하는가?
거저 문법이나 공부하고, 귀동냥에다 눈도장을 찍는 정도라면 삼척동자도 하는 것이다. 적어도 구약과 신약을 원어성경으로 읽되, 한글성경을 읽고 이해하는 수준에 버금가야만 한다. 겨우 사전 찾아가면서 부분을 해석하고 파-싱 정도나 한다면 자격이 없다. 성경 히브리어와 성경 헬라어의 쎈스를 알아야 한다. 말로만 성령님이 영감하셨다고 시늉하지 말고 인격신이신 그분의 가르침과 이끄심 가운데 기본 과정을 거쳐서 원문성경을 대하는 능력과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앞서 잠깐 말했지만 비평신학자들이 원어 관련 도구들을 모두 만들면서 독초들을 군데 군데 수 없이 많이 감추어 두었다! 바른 성경원문 자체로 이런 책자들을 골라가면서 참고하지 않으면 거의 대부분 빗나간다. 성경원어에서 낱말은 모두 만 5천 개가 넘지 않지만, 하나님의 계시를 담은 글짜이기에 각별한 면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글짜에 신통력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섭리 가운데 사용하신 것이기에 주제 넘게 다가서지 말라는 것이다. 구약과 신약을 일관하여 꿰뚫은 것을 전제로, 개혁교리와 그 신학을 바탕으로 다가서야 한다.
구약 안에서도 앞선 때 말과 나중에 표현된 말을 살펴봐야 하지만, 크게 보면 구약 히브리어를 전제로 신약에서 이방인 헬라어일지라도 도구로 가다듬어 기록했다. 서로 다른 때에 다른 겨레가 쓴 말이지만 헬라어 안에 담긴 히브리어 말투나 쎈스는 엄청나다. 굳이 칠십인역본이라는 것을 떠올릴 필요가 없다! 이 역본에 쪼금 참고할 부분이 혹시 있는지는 몰라도, 그저 역본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역본보다 계시종결 뒤에 시리아 역본부터 해서 번역된 것 가운데 바른 역본을 참고하는 것이 백배 나으리라. 신약을 기록한 사람들의 됨됨이와 구약관과 히브리어에 담긴 이해를 어떻게 신약성경에 깔고 있는지 찾아보면 대단하다. 보기를 들어, 바울이 쓰는 말투만 해도 상당수가 구약 히브리어에 터를 두고 있음을 잊지 마시라. 그 방대한, 그 장엄한, 그 엄청난 구약을 히브리어성경으로 한글 대하듯 읽으며 숙고하지 못한다면 제 말뜻을 알 길이 없으리라! 신약을 헬라어로 본디고 해도 제대로 이해하려면 구약을 원문으로 줄줄 해야 한다. 적어도 겉으로 보아서 이런 능력을, 이런 자세와 품격을 지닌 자가 번역한다.
간혹 햇병아리가 볼 때, 누군가 히브리어와 헬라어에 능통하게 보인다 해도 정녕 원문성경을 구약과 신약 모두 정독과 통독으로 1회 이상 읽은 이가, 그것도 한글 수준의 50% 넘는 이해력으로 읽은 이가 얼마나 될까? 자유주의자들 가운데는 더러 보일지 모르나 이들은 출발 자체가 우리와 다르고, 더우기 신학이 다르니 성경을 성경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자칭 몇 번씩 보았다는 자들도 있는 듯한데 조심할 일이다. 그렇다 해도 바른 성경관이나 교회관, 나아가 성경번역사에 담긴 피흘린 역사와 종교개혁에 대한 핵심을 잡아야 하며, 일반 언어와 문화에 대한 소양으로 신국에 대한 바른 고백 가운데 종말관을 견지해야 한다. 더러 성경원어를 가르친다는 단체를 보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원어를 공부한다고 하고 원어를 배웠다고 한다면, 가끔 사전을 찾아본다고 하더라도 근본은 한글 성경을 보듯 해야만 한다. 이를테면 아브라함 사건을 본다고 하면서, 기껏 낱말 하나를 붙들고 분석이나 한다고 하면 그건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다. 초보에 머무는 정도로 부분을 조금 들춘 정도로는 바르게 번역하지 못한다.
영어성경만 해도 제네바성경이나 AV를 보면, 우리한글성경에서 맛볼 수 없는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하물며 성경을 원문으로 구약과 신약을 본다면 뉘앙스며 정경, 깊은 도리에 대한 착상과 연구할 내용이 아직도 수두룩하다. 성경신학이건 조직신학이건 성경을 원문으로 한글성경 보듯하지 않으면 번역하지 못한다. 이런 능력을 구비하지 않았으면 번역할 말인 한글에 대한 소양을 물어보나 마나이다. 무지할 수 밖에 없다! 아무리 원문에 능통한다 해도 그 본인이 대상어인 우리 말글을 정통하지 않으면 어림도 없다! 완전한 번역이 가능하기에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다. 각계 전문가와 협의한다고 하더라도, 우리 말글에 대한 자세와 능력을 갖추어야만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어디선가 말했지만 신학의 열매는 성경번역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바른 선포로 이어진다. 교회의 보편성과 유기적이며 역사적 사명을 바로 성경번역에서 구현하는 것이다. 성경번역에 마음쓰지 않는 개교회주의란, 신학교와 교단이란 말도 되지 않는다. 이걸 게을리 하니 사이비들이 원어와 번역분야에서 날뛰는 것이다.
성경에서 성경으로 이루어지는 신학이라야 번역에 힘쓴다. 겉으로만 성경을 강조하고, 문법이니 원강이니 하면서 요식행위로 땜질하는 정도로는 개혁신학과 바른 번역은 기약하기 어렵다. 성경에서 개혁의 능력과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데, 그 원천인 원문을 다룰 능력이 없으니 무슨 신학교인가? 그러다보니 세상학교로 전락하게 된다. 종교학이나 철학, 윤리와 경영쪽으로 변질한다. 신학연구의 출발인 원어를 한글성경 보듯 준비해야, 교리사에 나오는 문서와 선진의 글을 제대로 이해한다. 개혁교회는 대대로 바른 성경번역의 전통과 역사를 지닌다. 이들이 본 사본으로 번역해야 한다. 이들이 번역한 역본을 참고해야 한다. 종교개혁의 완성은 바른 성경번역에 있다. 이것을 놓고 공동의 교리와 개혁교리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렇게 원문과 교리를 연마하는 과정에서 우리 믿음은 더욱 다듬어지고 하나님의 신으로 가득해진다. 마침내 교회로써 증거한다. 원어를 잘 안다고 하면서 교회관이나 말씀선포가 엉망이라면 원어를 모르는 것이다. 원어를 잘 한다는 사람이 그것 밖에 안 되나 하면서 해보나마나 라고 말하는이도 많은데 그것 몰라서 하는 소리이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한다. 우리 나라는 성경번역 문제 앞에 순환논리 같은 말장난으로 초보 수준에서 맴돈다. 신학선생 이름을 죽 늘어놓으면서 다른 데서 만드는 것보다 더 정확하고 바르게 한다고 야단이다. 앞에 말한 자격을 지닌 신학자가 몇이나 있는가? 제가 알기에도 다섯 손가락도 안되고 이들은 그런 번역에 끼려고도 하지 않는다. 번역은 처음 영감과는 분명히 다른데 그렇더라도 성령님이 하시는 일에서는 똑같다. 그만큼 거룩하고 두려운일이다. 기본 자격을 갖추고 진실과 헌신으로 십자가를 짊어지는 순수와 바른 목적을 지니지 않는다면 그런 번역은 저주로 마치리라. 기껏 영어나 독어 따위에서 번역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기는 이들도 있으니 답답하다. 교회가 무질서하고 저마다 왕노릇하는 때이기에, 큰 속임과 대적이 설치는 때이기에, 무자격자가 성경번역이라는 것을 빌미로 달려든다. 성경을 얕보는 무리가, 성경을 여러 가지로 이용해 먹는 무리가 널려있는 때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먼저 기도드리면서 이런 자격자를 보내주시기를, 그런 일에 참여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라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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