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예정론이 기독교 강요 총 4권(번역물) 중에 3권 그것도 하단부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즉 예정론은 신론과 기독론과 교회론 등이 모두 거론된 뒤에 언급되어야하는 것이지
모든 신학의 시작점에 거론되면 안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만약 질문자가 신학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상태에서 예정론부터 배우고자 한다면 잘못된 신학이 형성되어질 것입니다.
아래의 글은 인터넷에 떠도는 칼빈의 기독교강요 텍스트를 복사한 것입니다.
저작권 문제가 있을 수 있어 예정론 부분만 복사해서 올립니다.
각주를 보시고 싶다면 기독교강요를 구입해 보시기 바랍니다.
최소한 장로교의 예정론과 신학을 알고 싶으시다면 먼저 기독교 강요를 1독을 한 후에
질문을 해주시길 바랍니다. 기독교강요는 각 목록들마다 따로 구분되어 있지 않고
기독교 강요 전체의 한권이 끊이지 않고 쉴새 없이 연결된 하나의 장문입니다.
마치 길거리의 복음전도자가 복음을 전할 때 하나님의 존재와 창조와 타락과 죄의 상태와 죄값과 심판과 구원의 방법등을
20-30분가량 사람들에게 설명하듯이 기독교 강요도 역시 그러한 방식입니다. 그러므로 아래의 칼빈의 기독교 강요 중의
예정론 부분을 온전히 이해하시길 원하신다면 가장 기초적인 방법인 기독교강요 전권을 1독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나서도 궁금하다면 그때에 다시 질문해 주시길 바랍니다. 기독교 강요는 칼빈의 신학의 모든 것이 함축요약되어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너무 요약적이어서... 기본 배경이 어느정도 있어야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칼빈은 예정론을 매우 강조하지만, 예정론에 대한 정식 논의는 신론에서 하지 않고 구원론에서 하며, 구원론에서도 구원론의 중요 골자가 밝혀지기까지 미루어졌다. 칼빈은 성경을 근거로 논증하며 어거스틴을 많이 참조한다. 그가 어거스틴을 더 많이 인용하게 된 것과, 예정론이 확대된 것에 대해서는 Smits I, 45f., 61f., 104f., 109를 보라. 사실상 그의 입장은 대체로 중세 어거스틴파의 글에서, 특히 Thomas Bradwardine과 Gregory of Rimini 같은 14세기 사람들에게 예견되었다. Introduction, sec X, 주 54-59를 보라. 많은 연구 문헌 중에서 유익한 안내서가 될 만한 것은 다음과 같다. J. B. Mozley, 『A treatise on the Augustinian Doctrine of Predestination』; K. Ermisch, 『Predestination, on Historical Sketch』; P. Vigneau, 『Justification et Predestination an xive siele : Duns Scot, Pierre d’Auriole, Guillaume d’Occam, Gregoire de Rimini』, ch. iv.; H. A. Oberman,『Archbishop Thomas Braduardine. a Fourteenth-Century Augustinian』; G. Leff, 『Bradwardine and the Pelagians』. 초기 개혁파 신학자들의 중요한 논의서는 Jerome(Girolamo) Zanchi, 『De Praedestinatione』(1562); J. Piscator, 『Disputatio theologica de praedestinatione』 (Herborn in Nassau, 1592)이다. Zanchi의 논문을 이용하고 주로 번역한 것이 A. Toplady, 『The Doctrine of Absolute Predestination』 (London, 1769)이다. 이것은 웨슬리에게 대답한 글이다. 웨슬리는 (『Dialogue Between a Predestination and His Friends』와 기타 관련 문서에서) 18세기의 알미니안 사상을 발표한다. 현대 칼빈주의의 저술로는 B. B. Warfield, 『The Plan of Salvation』; L. Boettner, 『The Reformed Doctrine of Predestination』; K. Barth, 『Gottes Gnadenwahl』(Theologische Existenz Heute, No. 47) 등이 있다. Wondel은 『Calvin』, pp. 199-216에서 칼빈의 예정론에 대한 해박하고 유익한 논의를 하였다. 다른 참고 문헌에 대해서는 그의 책 p. 200에 있는 주 100을 보라.>
3. 둘째 위험 : 선택 교리에 대한 염려스러운 침묵
이런 폐해를 없애려는 생각으로 어떤 사람들은 예정론에 대해서 일체 말하지 않는다. 암초를 피하듯이, 그들은 이 문제를 피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친다.9 그들은 이 신비한 문제를 논할 때에는 매우 침착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므로, 그들의 이 온건한 태도는 칭찬할 만하다. 그러나 그들은 너무도 낮은 수준으로 내려가므로, 쉽사리 제한을 인정하지 않는 인간의 지성에 아무런 유익도 줄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점에서도 올바른 한도를 지키기 위해서 우리는 주의 말씀으로부터 지성에 관한 확실한 법칙을 찾아야 한다. 성경은 필요하고 유익한 지식은 하나도 빠뜨리지 않는 동시에 유익한 지식이 아니면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는 성령의 학교이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예정론에 대해서 밝힌 것을 신자들에게 숨기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그들에게서 빼앗은 악한 자로 간주될 수 있으며, 알려져서는 안될 일을 선포했다고 성령을 비난하고 냉소하는 자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말씀에 대해서 그리스도인의 마음과 귀를 열고 듣는 것을 허락해야 한다. 다만, 제한 조건은 주께서 입을 여시지 않을 때에는 신자도 즉시 모든 탐구의 길을 닫으라는 것이다. 우리가 지켜야 할 침착한 태도의 한도를 배울 때에 하나님의 인도를 따를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가르치시기를 그치실 때에는 우리도 더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위험은 우리가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지 말아야 할 정도로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잠 25:2)라고 하는 솔로몬의 말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경건 생활과 상식으로 판단컨데 이 말은 모든 일에 무차별하게 적용할 것이 아니므로, 우리는 구별하는 길을 찾아서 겸손과 냉철의 자세를 보이며 짐승과 같은 무지로 만족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모세는 이 점을 간단한 말로 분명하게 표현하였다.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신 29:29).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선포하는 것을 기뻐하셨으므로, 모세는 이 하늘 명령을 근거로 삼아서만 율법의 교훈을 연구하라고 사람들에게 권고한다. 또 그는 이 이유 때문에 그 사람들에게 이 범위 안에 머물라고 했다. 즉, 죽을 인생이 하나님의 비밀에 침입해 들어가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4. 이 교리가 위험하다고 단정하는 것을 부인함
불경한 사람들은 예정론에 관해서 갑자기 어떤 점을 붙잡고 비난하며 욕하고 떠들어대며 조롱한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러나 그들의 파렴치한 비난 때문에 우리가 제한을 당한다면, 그와 같은 무리가 모독하지 않는 신앙 문제는 거의 없으므로, 우리는 믿음의 가장 중요한 교리들도 숨겨야 할 것이다. 완악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부터 그가 어떻게 될 것을 미리 아셨다는 사실을 들을 때, 하나님의 본질 안에는 세 개의 위(位)가 있다고 들었을 때와 못지 않게 교만한 생각을 하게 된다. 그들은 우주 창조 이후로 7천년이 약간 지났다고 하는 말을 들으면 폭소를 금하질 못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오랫 동안 잠자는 상태에 있었느냐고 묻는다.10 요컨대, 그들은 무슨 말을 들어도 반드시 조소하며 공박한다. 이런 모독적인 언사를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성자와 성령의 신성을 말하지 않을 것인가? 우주 창조에 대해서 침묵을 지킬 것인가? 그럴 수 없다. 이 점에서나 다른 점에서나 하나님의 진리는 심히 강력하므로, 악인들의 험담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어거스틴은 그의 소논문 『견인의 은혜에 대하여』(The Gift of Preserverance)에서 이 점을 강경하게 주장했다. 거짓 사도들이 바울의 진실한 교리를 중상하고 비난했지만 바울은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 논의가 경건한 사람들에게 위험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충고를 방해하며, 믿음을 흔들고, 속마음을 어지럽게 하며 공포심을 불어넣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무의미한 말이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어거스틴도 예정에 대한 설교를 너무 많이 한다는 비난을 자주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그런 비난을 여지없이 반박했다.11 게다가 이 점에 대해 여러 가지 어리석은 사상들이 공격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들을 각각 적당한 곳에서 다루기로 했다.12 다만 내가 그들에게 일반적으로 인정하기를 바라는 점은 이것이다. 즉, 우리는 주께서 비밀로 그대로 두신 것을 밝히려고 해서는 안되는 한편, 공개하신 것은 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한편으로 과도한 호기심을 가졌다는 비난을 피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너무 은혜를 모른다는 비난도 피할 수 있다. 어거스틴도 이런 생각을 잘 표현하였다. 곧 어머니가 어린아이를 굽어보면서 천천히 걷듯이, 성경도 약한 우리가 뒤떨어지지 않도록 천천히 전진하므로, 우리는 안심하고 성경을 따라갈 수 있다고 하였다.13 그러나 약한 영혼들을 혼란스럽게 할 것을 주의하거나 두려워하기 때문에 예정론을 아주 묻어버리고자 하는 사람들은14 간접적으로 하나님을 어리석고 지각 없다고 비난하는 그 교만을 어떤 애매한 구실로 덮을 것인가? 그들의 태도는 마치 자기들이 현명하게 처리했다고 느끼는 그 위험을 하나님께서 예견하지 못하셨다고 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예정의 교리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마치 하나님께서 교회에 해가 되는 일을 지각 없이 누설하셨다는 듯이 노골적으로 하나님을 비난한다.
이스라엘 백성과 각 개인에 관련해서 예정을 정의하며 설명함
5. 하나님의 예정과 예지 : 이스라엘의 선택
경건한 사람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자는 아무도 예정, 즉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은 생명의 소망을 가질 수 있도록 선택하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영원한 사망을 선고하시는 그 예정을 감히 부정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의 반대자들, 특히 예지(豫知)를 예정의 원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잡다한 반대 의견으로 예정론을 덮어버린다.15 물론 우리는 예정과 예지를 다 하나님 안에 두지만, 예정을 예지에 종속시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지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모든 일이 하나님의 눈앞에서 항상 있었고, 영원히 있을 것이며, 따라서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미래나 과거가 아니라 현재로 나타난다는 뜻이다. 그리고 모든 것이 현재라고 하는 것은 우리 마음이 기억하고 있는 것이 현재 우리 앞에 있는 것같이,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기억하고 계실 뿐 아니라, 참으로 그 모든 것이 그의 앞에 놓여 있는 것같이 보시며 식별하신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 예지는 우주 전체를 통해 모든 피조물에 미친다. 우리는 예정을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이라고 부른다.16 이것에 의해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이 어떻게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에 대해 자신과 계약하셨다. 이는 모든 사람이 동등한 상태로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어떤 사람을 위해서 영생이 예정되며 어떤 사람을 위해서는 영원한 저주가 예정되기 때문이다. 각 사람은 이 중의 어느 한 쪽 결말에 이르도록 창조되므로, 우리는 생명 아니면 사망에 예정되었다고 본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개개인에게서 증명하셨을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 전체를 한 예로서 우리에게 보여 주심으로써 각 민족의 장래도 그의 선택에 달렸다는 것을 밝히셨다. "지극히 높으신 자가 열국의 기업을 주실 때 인종을 분정(分定)하실 때에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대로 민족들의 경계를 정하셨도다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 택하신 기업이로다"(신 32:8-9). 그 선별(選別)하신 것은 모든 사람이 밝힐 수 있다. 다른 백성들이 제외되고 마른 나무와 같은 아브라함이나 개인에게서 한 민족이 특별히 선택(選擇)되었다. 그러나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모세는 후세 사람들이 자랑하지 못하도록 그들이 나은 것은 다만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사랑 때문이라고 가르칠 따름이다. 그들이 구원을 얻은 원인에 대해서 모세는 하나님께서 열조를 사랑하셨고, "그 후손 너를 택하셨기" 때문이라고 한다(신 4:37).
다른 장에서는 더욱 명백하게 말한다.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신 7:7-8). 모세는 자주 같은 말을 반복한다. "하늘과…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로되 여호와께서 오직 네 열조를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 후손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날과 같으니라"(신 10:14-15). 마찬가지로 다른 곳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으로 선택되었으므로(신 7:6) 성별되어야 한다는 명령을 받았다. 또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호하시는 것은 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라고 언급하고 있다(신 23:5). 신자들도 이구 동성으로 "우리를 위하여 기업을 택하시나니 곧 사랑하신 야곱의 영화로다"(시 47:4)라고 선언한다. 하나님의 선물들을 누리게 된 사람들은 모두가 그 선물이 하나님께서 값없이 베푸시는 사랑이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들은 자기들이 선물을 받을 가치가 없었다는 것을 알 뿐만 아니라, 저 거룩한 조상조차도 자기와 자기 자손을 위해서 그런 큰 영예를 얻을 만한 높은 덕이 없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모든 교만을 더욱 효과적으로 분쇄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완고하고 목이 곧은 그들에게 이런 은혜를 받을 가치가 없다고 책망하신다(출 32:9; 신 9:6 참조). 선지자들도 유대 백성들이 부끄럽게도 은혜를 배반하고 떠났기 때문에 그들을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그들 앞에 하나님의 이 선택을 자주 언급하여 책망했다(암 3:2).
여하튼 이제 하나님의 선택을 사람의 가치나 행위의 공로에 결부시키려는 사람들에 대해 생각해 보자. 하나님께서 다른 민족보다 한 민족을 총애하시고 하나님께서 일부 사람들, 심지어 악하고 완고한 사람들까지도 사랑하신 것은 어떤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는 말을 들을 때, 하나님께서 그의 자비를 이런 방법으로 증명하시기로 정하셨다고 해서 그들은 하나님께 항의할 것인가? 아무리 떠들어도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지 못할 것이며, 하늘을 향해 모욕의 돌을 던져서 하나님의 의를 건드리거나 상하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도리어 돌은 그들의 머리 위에 떨어질 것이다. 또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때나, 미래에 대한 소망을 품어야 할 때에는 이 거저 주신 언약의 원칙을 상기했다.17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시 100:3). "우리 자신"을 배제하기 위하여 첨부된 부정어(否定語)는 불필요한 것이 아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그들이 풍성하게 가진 모든 좋은 것의 근원이실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는 그렇게 큰 영예를 받을 만한 가치가 전혀 없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에게서 원인을 찾았다는 것을 그들로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
선지자는 또한 그들에게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만을 만족하게 생각하라고 하면서, "그 종 아브라함의 후손 곧 택하신 야곱의 자손 너희"라고 한다(시 105:6). 하나님의 끊임없는 은혜가 선택의 결과임을 말한 후에, 결론적으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너그럽게 행하신 것은 "그의 언약을 기억하셨기" 때문이라고 한다(시 105:42 참조). 온 교회의 찬송도 이 교훈과 일치한다. "저희가 자기 칼로 땅을 얻어 차지함이 아니요 저희 팔이 저희를 구원함도 아니라 오직 주의 오른손과 팔과 얼굴의 빛으로 하셨으니"(시 44:3). 그런데 여기서 "땅"이란 말은 양자로의 입양(入養)을 포함한 비밀한 선별(選別)을 의미한다는 사실에 우리는 유의해야 한다. 다윗은 다른 곳에서 이와 같은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백성에게 권한다. "여호와로 자기 하나님을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빼신 바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시 33:12). 사무엘은 "여호와께서는 너희로 자기 백성을 삼으실 것을 기뻐하신 고로 그 크신 이름을 인하여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요"(삼상 12:22)라고 말해 백성의 소망을 고양시켰다. 이와 같이 다윗도 자기의 신앙이 위협을 당할 때에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시 65:4)라고 고백하여 무장한다. 그뿐 아니라, 선택은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어서 제일 해방과 제이 해방, 그리고 그 중간 시기의 여러 가지 은혜들로 확인되었으므로, "선택한다"는 말은 이사야서에서 다음과 같은 뜻으로 사용된다. "여호와께서 야곱을 긍휼히 여기시며 이스라엘을 다시 택하여"(사 14:1). 선지자는 도래할 시대를 묘사하여 말하면서, 하나님께서 버리신 것같이 여겨졌던 백성의 남은 자들을 모으실 것인데, 그것은 무효로 된 것처럼 보이던 하나님의 선택이 확고 부동하다는 표징이 되리라고 한다. 그는 또 다른 곳에서,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 버리지 아니하였다"고 말함으로써(사 41:9), 하나님의 아버지로서의 인자하심이 놀랍도록 너그러우시며 끊임없이 계속됨을 역설한다. 스가랴서에 있는 천사는 이 점을 더욱 분명히 표현하여, "여호와께서…다시 예루살렘을 택하시리니"라고 한다(슥 2:12). 마치 하나님께서 혹심한 징벌을 내려 이 도성을 버리셨거나 민족의 포로 생활로 인하여 선택이 끊어진 것 같다는 말이다. 그러나 선택의 표징이 항상 나타나는 것이 아닐지라도, 선택은 여전히 침해될 수 없다.
6. 둘째 단계 : 이스라엘 백성 개인에 대한 선택과 유기
우리는 이제 선택의 둘째 단계, 곧 보다 더 제한된 단계를 부언해야 한다.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더욱 특별한 은혜가 분명히 나타난다. 즉,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 가운데서 어떤 사람은 버리시고, 어떤 사람은 교회 안에 보호하셔서 그의 자녀들 사이에 두셨다. 이스마엘은 영적 언약의 표징인 할례를 받았기 때문에 처음에는 그 동생 이삭과 동등한 지위를 누렸지만 나중에 그는 제외되었다. 그 다음에 에서가 제외되었고, 그 후에 무수한 사람들, 거의 온 이스라엘이 제외되었다. 이삭 안에서 그의 후손이 부르심을 받았다. 같은 부르심이 야곱에게 계속되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신 것도 유사한 일례이다. 이런 사실은 시편에서 "요셉의 장막을 싫어 버리시며 에브라임 지파를 택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유다 지파와 그 사랑하시는 시온 산을 택하시고"(시 78:67-68, 칠십인역과 불가타역, 그리고 주석 참조)라고 훌륭하게 선포되었다. 이런 일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여러 번 반복되어, 이런 변경(變更)를 통해 하나님 은혜의 놀라운 비밀을 밝히고 드러낸다. 이스마엘과 에서의 무리가 양자의 지위에서 제외된 것은 그들 자신의 결함과 죄 때문이었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충실히 지켜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언약을 위반하고 충실하지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른 민족보다 사랑하신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였다. 시편에도 보면 "아무 나라에게도 이같이 행치 아니하셨나니 저희는 그 규례를 알지 못하였도다"(시 147:20, 칠십인역 참조)라고 언급되어 있다.
두 단계를 주목해야 한다고 내가 말하는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하나님께서 온 민족을 선택하심에 있어서 그는 오직 그의 관용을 베푸실 때에 어떤 법에 의해서 구속을 받으시지 않고 자유로우시기 때문에 은혜의 평등한 분배를 그에게 요구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하나님의 은혜가 평등하지 않다는 사실은 이미 은혜가 값없이 주어지는 것임을 증명한다. 그러므로 말라기는 이스라엘이 은혜를 저버렸음을 역설한다. 그들은 전인류 가운데서 선택되었을 뿐만 아니라, 거룩한 가문에서 선별되어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인데, 불신실하고 불경건하여 은혜를 주시는 아버지 하나님을 경멸하였기 때문이다.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고 하나님께서는 물으신다.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말 1:2-3; 롬 9:13)라고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두 사람이 다 한 거룩한 아버지로부터 난 언약의 상속자(相續者), 즉 거룩한 뿌리의 가지들이었으므로, 그리고 야곱의 자손은 그 존엄한 지위를 가지도록 용납되었으므로, 둘 다 당연히 특별한 의무를 지니고 있었다고 생각하셨다. 그러나 맏아들인 에서가 제외되고, 출생으로 보면 그보다 아래인 그들의 조상 야곱이 후계자로 결정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이중으로 은혜를 저버리는 자들이라고 책망하시며, 그들이 이중의 의무를 지키지 않는다고 한탄하셨다.
7. 실제적 선택으로서의 개인의 선택
하나님께서 그 은밀한 계획에 의하여 원하시는 사람을 거저 선택하시고 다른 사람들을 제외하신다는 것이 이제 충분히 밝혀졌다. 그 문제에서 개개인에게 구원을 제공하실 뿐만 아니라 결과의 확실성이 보류되거나 의심스럽지 않도록 배정하시는 것을 알지 않으면,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선택은 아직 절반밖에 해명되지 않은 것이다. 이런 개인들이 바울이 말하는 특별한 후손으로 간주된다(참조, 롬 9:7-8; 갈 3:16 이하). 양자됨은 아브라함의 수중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그 후손 가운데서 많은 사람들이 썩은 지체로 간주되어 제외당했다. 그러므로, 선택이 효과적이며 참으로 영속적이기 위해서 우리는 머리 되신 분에게로 올라가야 한다. 하늘 아버지께서는 그 머리 안에서 그의 선민을 모두 모으시며 끊을 수 없는 띠로 그들을 자기에게 결합시키셨다. 다른 민족들을 배제하시고 아브라함의 후손을 선택하신 데에는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가 나타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지체들은 머리에 접붙임을 받아 결코 구원에서 제외되는 일이 없으므로, 그들에게서 은혜의 더욱 위대한 힘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바울은 내가 방금 인용한 말라기의 말씀에서 출발하여, 하나님께서 영생의 계약을 맺으시고 어떤 민족을 자신에게 부르실 때에는, 그 중의 일부를 위해서 특별한 선택의 방법을 사용하시고, 무차별적인 은혜로 모든 사람을 일률적으로 선택하시는 것은 아니라고(롬 9:13) 훌륭한 논법을 전개한다.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말 1:2)라고 하신 말씀은 이 조상의 모든 후손들에게 적용되는데, 선지자는 이 사람들과 에서의 후손들을 대조시킨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한 사람 안에서 목적을 이루지 못하신 채로 지나치시는 일이 없는 선택의 실례를 우리 앞에 보여주신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바울은 그들을 "남은 자"라고 부르는 것에 관심을 갖는데(롬 9:27; 히1:5; 사 10:22-23 참조), 그 까닭은 무수한 사람들 중에서 많은 사람이 탈선하여 제외되고 극히 적은 일부만이 남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한 민족에 대한 전체적인 선택이 때로는 확고하며 때로는 유효하지 못한 이유는 쉽게 설명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는 사람들에게 끝까지 참고 견디어 언약을 지킬 수 있게 하는 중생(重生)의 영을 즉시 주시는 것은 아니다. 이 내면적인 은혜만이 그들을 보존할 수 있는데, 그것이 없는 외면적인 변화는 인류가 버림을 당하는 것과 극소수의 경건한 자들이 선택되는 것 사이의 중간 상태이다.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하나님의 기업"(企業)이라고 했지만(신 32:9; 왕상 8:51; 시 28:9; 33:12, 기타), 그 중에는 이방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의 아버지와 구속자가 되시겠다고 하신 것은 무의미한 약속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를 버리는 많은 배반자들보다 자기가 거저 주신 은혜에 주의하신다. 배반하는 자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폐지되지 않는다. 이는 자기를 위하여 남은 몇 사람을 보존하심으로써 그의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는 것"이 나타났기 때문이다(롬 11:29). 하나님께서 불경건한 민족들보다 아브라함의 자손 사이에서 계속적으로 교회를 모으셨다는 사실은 그의 언약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대부분이 언약을 어겼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언약이 완전히 없어지지 않도록, 그것을 소수에 국한시키셨다. 요약하면,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전체적으로 택하신 것은 많은 사람들 중에서 일부에게 더 큰 은혜를 나타내 보일 수 있게 하는 일종의 상징이었다. 바울이 아브라함의 혈통에 의한 자손들과 이삭과 같이 부르심을 받은 영적 후손들을 조심스럽게 구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갈 4:28). 단순히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하는 것이 헛되고 무익한 일이라는 뜻은 아니다. 이러한 말은 틀림없이 언약을 모욕하는 말이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들을 자기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 변할 수 없는 계획은 본질적으로 이 영적 후손들에게만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독자들은 어느 쪽으로나 편견을 가지지 말고, 성경의 구절들에 비추어 취해야 할 견해가 분명히 나타나기까지 기다리기를 권고하는 바이다.
선택 교리의 개관
그러므로 성경이 분명히 보여주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원하고도 변할 수 없는 계획에 따라 구원으로 받아들이실 사람들과 멸망에 내어 주실 사람들은 오래 전에 정하셨다고 한다. 선택된 사람들에 관해서 이 계획은 하나님의 값없이 베푸시는 자비를 근거로 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공정 무오(公正 無誤)하면서도 불가해한 판단으로, 저주에 넘겨 주신 사람들에게 생명의 문을 닫으셨다. 그런데 선택받은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선택의 증거라고 인정한다. 그리고 선택받은 자들이 선택의 완성인 영광으로 들어갈 때까지 칭의도 선택을 나타내는 한 표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주께서 소명과 칭의에 의해서 선택된 자들을 인치시는 것과 같이, 버리신 자들에 대해서는 그의 이름에 대한 지식이나 성령에 의한 성결의 길을 끊으심으로써, 이를테면 이런 표로써 어떤 심판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가를 계시하신다. 여기서 나는 예정론을 뒤엎기 위하여 어리석은 사람들이 조작한 여러 가지 공상을 무시하겠다. 그런 공상은 말로 표현되면 즉시 자체의 허위성을 충분히 증명하게 되므로 반박할 필요도 없다. 나는 다만 유식한 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단순한 이들을 곤란하게 만드는 문제 및 불겅건한 자들이 하나님의 의를 공격하기 위해서 그럴 듯하게 제의하는 것들을 잠깐 살펴보겠다.
제 22 장
성경의 증거에 의한 이 교리의 확증
선택은 공로에 대한 예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계획에 속한다
1. 선택과 공로에 대한 예지
우리가 지금까지 서술한 입장, 특히 신자들이 값없이 선택된다는 주장을 부정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이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이 반대자들은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공로를 미리 아시고, 그것에 따라서 사람들을 구별하신다고 생각한다.1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은혜를 받을 가치가 있다고 예지하시는 사람들을 자녀로 선택하시고, 악한 의도와 불경건한 생활로 기울어질 성향을 가지리라고 보시는 사람들을 죽음의 저주를 받도록 결정하신다고 한다. 이렇게 예정을 보자기로 덮음으로써 그들은 예정을 모호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예정의 근원이 다른 데 있는 것같이 주장한다. 이런 생각은 일반 사람들에게 국한되지 않고, 각 시대의 중요한 학자들도 가진 것이었다.2 내가 이 사실을 솔직히 말해 두는 것은 학자들의 이름이 나오더라도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입장이 큰 타격을 받는 것같이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진리는 너무도 확실하고 명백하여 사람의 권위로 그것을 움직이거나 압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잘 모르고 권위도 없으면서 이 건전한 교리를 사악하게 비난하므로 나는 그 불손한 태도를 그대로 버려둘 수 없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결정에 따라 어떤 사람은 택하시고 어떤 사람은 버리신다고 하여 하나님을 비난한다.3 그러나 이것은 잘 알려진 사실인데, 그들이 하나님과 싸운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나님은 항상 그분이 원하시는 사람에게 은혜를 값없이 베푸신다는 말은, 경험의 지지가 없는 말이 아니다.4 어떤 점에서 아브라함의 후손이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했느냐는 문제도, 그 평가 원인을 하나님 안에서는 찾는 것이 아니라면, 나는 그것을 탐구하지 않을 것이다. 반대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소나 나귀가 아니라 사람이 된 이유를 말하게 해보라.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개로 만드실 권능도 있었지만 자신의 형상대로 만드셨다. 그들은 짐승이 자기들의 처지에 대해서 마치 부당한 차별 대우를 받는 듯이 하나님과 논쟁을 벌이는 것을 허락하려는가? 반대론자들도 아무 공로 없이 특권을 얻는 사실은 확실히 하나님께서 자신의 판단의 표준에 따라 다양하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보다 더 공평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만일 그들이 논쟁을 개인의 문제로 돌려, 그들이 거기서 불평등을 발견하고, 따라서 이 교리를 반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들은 적어도 그리스도의 예를 생각하고 두려워하며 이 숭고한 신비에 대해서 무책임한 지껄임을 그쳐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다윗의 후손으로 죽을 인간으로 잉태되셨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태중에서 천사들의 머리, 하나님의 독생자, 아버지의 형상과 영광, 그리고 세상의 빛과 의와 구원이어야 마땅했던 것(히 1:2 이하, 참조)은 어떤 덕행의 공로 때문이라고 그들은 말하려는가?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지혜롭게 언급하였다. "우리에게는 교회의 머리 되신 분이 친히 하나님의 거저 베풀어주신 선택의 가장 분명한 거울이 되어 주신다. 따라서 지체인 우리는 이 일에 대해서 염려할 필요가 없도록 하셨다. 또 그리스도께서는 의로운 생활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로 임명되신 것이 아니라, 값없이 그 영광을 받으셔서, 후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 선물을 나눠주시게 되었다."5 만일 여기서 누군가가, 왜 다른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같지 않았는가, 왜 우리는 모두 그와 거리가 이렇게 먼가, 왜 우리는 모두 부패했는데 그만 순결 그 자체이신가라고 묻는다면, 그는 자신의 비정상적인 정신 뿐만 아니라 파렴치한 태도까지 폭로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선택과 버림의 고유한 권한을 박탈하고자 한다면, 동시에 그리스도께 주어진 것도 박탈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모든 사람에 대해 성경이 선포하는 것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바울이 "창세 전에"(엡 1:4)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심을 받았다고 가르칠 때, 그는 우리편에 있는 가치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그가 한 말을 바꿔 말하면, 하늘 아버지께서는 아담의 모든 후손들 중에서 그의 선택을 받을 가치가 있는 자를 하나도 찾으실 수 없기 때문에 그의 기름 부으심을 받은 자에게 눈을 돌려, 생명의 교제에 받아들이고자 하시는 사람들을 그의 몸에서 지체로 선택하셨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우리가 자신의 힘으로는 영원한 기업을 받을 수 없었으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런 고귀한 기업을 받도록 택함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바울은 다른 구절에서도 골로새 교인들에게, 그들을 성도의 기업을 얻기에 합당한 자로 삼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권고할 때(골 1:12) 이것을 언급하였다. 만일 우리를 장차 올 생명의 영광을 받기에 합당한 자로 만드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이 은혜보다 선택이 선행(先行)한다고 하면, 지금 우리를 선택하시도록 그를 움직일 만한 무엇을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발견하실 수 있을 것인가? 바울의 다음 말이 내가 말하려는 것을 더 분명하게 표현한다. "곧 창세 전에" "우리로…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선택하셨다고 그는 말했다(엡1:4-5).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의 기쁘심"과 우리의 공로를 대조시킨다.
2. 공로에 대한 예지와 상관없는 창세 전의 선택
더 완벽한 증명이 되기 위하여 이 구절(엡 1:4-5)을 세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각 부분을 종합하면 의심할 여지가 없게 될 것이다. 바울은 그들을 "선택된"자들이라고 부르고 있으므로 신자들을 상대로 말하는 것이 틀림없고 또 곧 그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선택된"이란 말을 복음이 선포된 시대에 국한되는 것으로 그릇 해석하는 사람들은 비열한 거짓말로 이 말의 가치를 손상시키는 것이다.6 바울은 "창세 전에" 선택되었다고(엡 1:4) 말함으로써 가치에 대한 고려를 전적으로 배제한다. 아직 존재하지 않은 사람들과 또 후에 아담 안에서 동등한 인간이 될 사람들을 서로 구별하는 조건은 무엇인가? 그런데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된다면, 각 사람이 그 자신 때문에 선택되는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그 중에서 분리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는 우리가 모든 사람이 다 그리스도의 지체인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더우기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 1:4 하반절) 그들을 선택하셨다는 사실은 분명히 선택의 원인을 예지라고 생각하는 오류를 반박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모든 덕이 선택의 결과라고 바울은 언급했기 때문이다. 더 고차원적인 원인을 묻는다면, 바울은 하나님이 그렇게 예정하셨으며 그 일은 "그 기쁘신 뜻대로"되는 것이라고 대답한다(엡 1:5 상반절). 이런 말을 함으로써 그는 사람들이 자기 속에 선택받을 어떤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오류를 일체 배제한다. 영적 생활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은혜는, 다만 바울이 가르치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그 원하시는 사람들을 택하셨고 그들에게 주고자 하신 은혜를 그들이 나기 전에 그들을 위해서 각각 간직해 두신 것이라는 이 한 가지 근원에서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3. 거룩하기 때문이 아니라 거룩하게 만드시기 위해 선택하심
이런 하나님의 예정이 지배하는 곳에는 행위에 대한 고려가 있을 수 없다. 물론 바울이 여기서는 이 대조법을 전제하지는 않으나, 그가 다른 데서 설명하는 것과 같이, 여기서도 그렇게 해석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9). 그리고 "우리로…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라는 말에 의해서(엡 1:4), 우리의 모든 의혹이 풀린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밝혔다.7 만일 "우리가 거룩하리란 것을 예견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선택하셨다"고 말한다면, 바울이 말한 순서를 뒤집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거룩하게 되도록 우리를 택하신 것이라면, 우리가 그렇게 될 것을 예견하셨기 때문에 택하신 것이 아니라고 안심하고 추론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신자들이 선택받음으로 해서 거룩케 된다는 생각과 행위 때문에 선택을 받게 되었다고 하는 생각은 양립할 수 없다. 그들은 자주 궤변을 사용하여, 주께서 선택의 은혜를 주시는 것은 이미 있는 공로의 보상이 아니라, 앞으로 있을 공로의 보상이라고 하지만,8 이런 말은 정당치 못하다. 신자들이 거룩하게 되기 위해 선택받았다고 할 때에는, 동시에 그들에게 있을 거룩은 선택에서 유래했다는 뜻이 암시된다. 선택에서 유래한 것이 선택 원인이 되었다고 하는 말을 어떻게 논리적으로 모순이 없다고 하겠는가?
바울은 자기가 말한 것을 확증하는 듯이, 나중에 "그 기쁘신 뜻대로"(엡 1:5), "그 기쁘심을 따라"(엡 1:9)라고 말한다. "그 기쁘심을 따라"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결정을 내리실 때에 자신 이외에는 아무것에도 관심 두지 않고 고려하시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바울은 곧 부언하여, 우리를 선택하신 목적은 오직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이 찬양받게 하시려는 것이라고 한다(엡 1:6 참조). 우리가 선택된 것에 대해 하나님의 은혜만이 선포돼야 한다는 말은, 확실히 그 은혜를 값없이 주신 경우에 한해서만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택하실 때 각 사람의 행위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고려하신다면, 그 선택은 거저 주시는 은혜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요 15:16)라고 하신 말씀은 모든 신자들에게 전적으로 타당한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이 말씀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과거의 공로를 배제하실 뿐 아니라, 만일 그가 먼저 제자들에게 자비를 베푸시지 않았다면 제자들에게는 선택될 아무 이유도 없었으리라는 것을 지적하신다. 또 바울이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라고 한 말을(롬 11:35)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인자하신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앞지르시기 때문에, 그들에게서 그의 은혜를 받을 만한 것을 과거에나 미래에서 아무것도 찾지 못하신다는 것이 바울이 밝히려고 한 것이다.
4. 로마서 9-11장과 유사 구절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 논법을 더 심오하게 반복해 자세히 전개한다. 그는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라고 한다(롬 9:6). 비록 모든 사람이 상속권에 의해서 복을 받았지만 그 상속은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이 논의는 유대 사람들이 교만하며 거짓된 자랑을 하는 데서 출발되었다. 그들이 자기들을 "교회"라고 주장했을 때, 그들은 복음에 대한 믿음을 자기들의 결정에 의존시키려고 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현재 교황주의자들은 이 거짓된 구실로 자기들이 하나님을 대신하려고 한다. 바울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언약 때문에 거룩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 중에는 언약 밖에 있는 사람이 많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이 적자(嫡子)의 지위에서 서자(庶子)로 전략했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이 모든 사람 위에 뛰어나 있고 그들을 지배하며, 그들의 양자됨을 독자적으로 확증하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사람들은 그의 경건 때문에 구원의 소망이 확보되고, 어떤 사람들은 그의 배반 때문에 상속권이 소멸된다면, 바울이 그의 독자들에게 이 비밀스런 선택이 있었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불합리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그 원인은 하나님 자신의 밖에 있는 것이 아닐 뿐더러 하나님의 밖에서 구할 것도 아니다)은 어떤 사람들을 다른 사람들과 구분하시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자손 모두가 진정한 이스라엘 사람인 것이 아니라면, 모든 사람의 상태가 그 자신에게서 기인하는 것같이 생각하는 것은 무익한 일이다.
바울은 야곱과 에서의 예를 들어 논의를 더 전개해 나간다. 두 사람이 다 아브라함의 후손이었고, 어머니의 태중에 함께 있었지만, 맏아들의 권리는 에서에게서 야곱에게로 옮겨졌다. 이 옮겨감은 하나의 전조와 같은 것으로, 야곱의 선택과 에서의 유기를 증거하는 것이라고 바울은 주장한다. 이 일의 근원과 원인을 묻는다면, 예지를 가르치는 사람들은 그것이 두 사람의 덕성과 죄악에 있었다고 할 것이다. 그들의 피상적인 논법의 요점은, 야곱이란 사람에게서 하나님은 그의 은혜를 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들을 선택하신다는 것을 보이셨고, 에서에게서는 하나님은 무가치하다고 예견하시는 사람들을 버리신다는 것을 보이셨다고 하는 것이다.9 참으로 그들은 이렇게 대담한 주장을 한다. 그러나 바울은 무엇이라고 하는가?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롬 9:11-13; 창 25:23 참조). 만일 두 형제 사이에 차이를 둠에 있어서 예지가 그것과 관련이 있다면, 여기서 때를 말한 것은 확실히 부적절했을 것이다.
야곱에게 장차 생겨날 덕에서 오는 가치가 있었기 때문에 그가 선택되었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가정한다면, 바울은 왜 그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다는 말을 하는가? 그가 아직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않았다고 한 것은 경솔한 말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하나님께는 숨길 수 없고 따라서 야곱의 경건도 하나님 앞에 나타나 있었다고 곧 대답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행위가 은혜를 얻게 한다면,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은 야곱이 나기 전에 그의 성장과 같이 이미 마땅히 확장되었어야 한다. 그러나 사도는 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야곱의 선택이 행위에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서 온 것이라고 가르친다. 사도는 행위를 말함으로써 미래나 과거를 문제삼는 것이 아니고, 행위와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연히 대립시킨다. 그 한 편을 확립함으로써 다른 편을 교묘하게 부정하고자 한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고려할 것은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셨는가 하는 것이고 사람들 자신이 무엇을 가져왔는가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끝으로, "선택"과 "목적"이란 말들을 보면(롬 9:11), 사람들이 보통 하나님의 비밀한 계획과는 별도로 생각해 내는 원인들이 모두 그 원인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 확실하다.
5. 야곱과 에서의 경우는 행위를 근거로 삼는 주장을 반박한다
선택에는 행위도 관여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점들을 모호하게 만들기 위해 어떤 구실을 사용할 것인가? 이는 그들의 입장이 사도의 주장을 직접 회피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두 형제 사이의 구별은 그들이 나기 전에 확정된 것이므로, 그것이 행위에 의존된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부르심에만 의존된 것이라는 것이 사도의 주장이다. 그들의 궤변에 조금이라도 참된 것이 있었다면 사도는 그것을 반드시 언급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자신께서 선택의 은혜를 통하여 주시기를 이미 결정하신 것 이외의 선한 것을 사람에게서 조금도 발견하실 수 없었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에, 선행을 그 원인 앞에 두는 어리석은 짓으로 순서를 어지럽히지 않는다. 신자들의 구원은 하나님의 선택의 결정만을 기초로 한 것이며, 이 은혜는 행위에 의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값없는 부르심에 의한 것이라는 것이 사도의 말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그것에 대한 실례10를 눈앞에 보고 있다. 에서와 야곱은 같은 부모의 자식으로서 아직 같은 태중에 있으며 세상 빛을 보지 못하였다. 그들은 모든 점에서 서로 꼭 같다. 그러나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은 다르다. 하나님께서는 한 쪽은 받으시고, 다른 쪽은 버리신다. 한 편이 나은 것은 다만 장자 상속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조차 무시하시고 장자의 것을 빼앗아 아우에게 주셨다. 다른 경우에도 하나님은 항상 계획적으로 장자의 권리를 멸시하시며, 육신의 자랑거리를 일체 박탈하시는 것같이 보인다. 이스마엘을 제외시키고 이삭을 사랑하신다(창 21:12). 므낫세를 제쳐 놓으시고 에브라임에게 더 큰 영예를 주신다(창 48:20).
6. 야곱이 선택된 목적은 땅에 속한 복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만일 누가 나의 말을 가로막아, 우리는 내세의 삶 전체에 관하여 이런 천하고 사소한 유익들을 근거로 결론내릴 것이 아니며, 장자의 영예를 받은 사람이 곧 하늘의 기업을 받기로 선택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고 가정하자. 이는 심지어 바울까지도 위에서 인용된 증거들을 사용할 때, 성경을 왜곡하여 생소한 의미로 해석한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11 그러나 나는 사도가 경솔하게 잘못 말했거나 고의로 성경의 증언들을 오용(誤用)하지 않았다고 대답한다.12 그는 우리가 반대자들이 감히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근접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심판대 안에 감춰져 있었던 야곱의 영적 선택을 지상적인 표징으로 표현하려고 하셨다는 것이다. 야곱에게 부여된 장자권을 내세와 관련시키지 않는다면, 그것은 허무하고 어리석은 복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그것으로 인해 얻은 것은 각종 곤란과 고통, 쓸쓸한 타향 생활과 많은 슬픈 일 및 비통한 근심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종을 위해서 그의 나라에 준비하신 영원한 영적인 복을 외적인 복으로 증거하셨다고 확실히 깨달았을 때에, 바울은 서슴치 않고 그 외적인 복에서 영적인 복을 증명하는 증거를 찾은 것이다(엡 1:3 이하 참조). 우리는 또한 가나안 땅도 하늘나라 처소의 징표라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그러므로 야곱이 천사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임을 받아 그리스도와 같은 생명을 나누기로 되었다는 것을 의심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 선택된 야곱은 에서에 비해서 공로에서는 다르지 않았으나, 버림을 받은 에서와 구별되었다. 그 이유를 묻는다면, 사도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고 말씀하셨다고 대답한다(롬 9:15). 이것은 무슨 뜻인가? 주께서는 사람들에게 복을 주실 이유를 그들 자신에게서 찾지 않으시고 자신의 긍휼에서만 찾으신다고 하는 것(롬 9:16)이 주의 분명한 선언이다. 그러므로 주의 백성의 구원은 오직 주님 자신이 하시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자신 안에만 두시는데, 우리는 무엇 때문에 우리 자신에게로 내려가는가? 주께서는 그 분의 긍휼만을 우리에게 주지시켜 주시는데, 우리는 무엇 때문에 우리 자신을 공로를 의지하는가? 주께서는 우리의 생각을 그의 긍휼에 국한시키는데, 우리는 무엇 때문에 우리 관심의 일부를 우리 자신의 공로로 향하게 하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이 다른 곳에서(롬 11:2) 하나님이 미리 아셨다고 하는 소수의 사람들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들을 미리 아셨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반대자들이 상상하는 대로 하나님께서 한가한 망대 위에서 자신이 직접 뛰어들어 하시지 않는 일을 다만 예지하실 뿐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바울 사도가 여기서 말하는 의미는 이 말이 자주 사용되는 그러한 뜻이다. 누가가 전하는 베드로의 말에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 준 바 되었거늘"이란 말이 있다(행 2:23). 베드로가 말하는 하나님은 확실히 구경꾼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는 분이시다. 베드로는 신자들에게 편지할 때에, 그들을 하나님의 미리 아심을 따라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부른다(벧전 1:2). 여기서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자녀로 삼고자 하시는 사람들을 정하시는 그 은밀한 예정을 적절하게 표현한다(벧전 1:2). "뜻"이란 말을 동의어로서 첨가할 때에, 이 말은 보통 확고한 결심을 의미하므로, 베드로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 역사를 주관하실 때에 자신의 외부로 나가시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같은 장에서 그리스도를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된 어린양이라고 말한다(벧전 1:19-20). 하나님께서 어디에서 인류의 구원이 올 것인지를 보시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다보신다고 하는 것처럼 어리석고 무의미한 생각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마리 아신 바된 사람들은 바울이 보기에 군중 가운데 섞인 소수에 불과하므로, 군중이 하나님의 이름을 자기들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릇된 생각이다. 다른 곳에서 바울은 스스로 가장 경건하다고 주장하는 위선자들의 교만을 꺾기 위해서,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라고 말한다 (딤후 2:19). 요약하면, 바울은 이런 말로써 사람은 그 종류로 나누어진다는 것을 지적한다. 하나는 아브라함의 후손 전체요, 또 하나는 그들에게서 분리되어 나온 사람들로서 사람은 볼 수 없으나 하나님이 보시는 곳에 숨겨져 있는 자들이다. 바울의 이 말이 모세의 말에서 왔다는 것은 틀림없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긍휼(矜恤)히 여기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신다고 언급한다(출 33:19). 이 말씀은 외적인 상태가 같은 선민에 관한 것이었으나 마치 그가 일반적인 선택 안에 일부 사람들에 대한 특별한 은혜가 포함되어 있어서 하나님 앞에서 그들이 더욱 거룩한 보화같이 여겨진다고 한 것과 또한 공통된 언약이 있다고 해서 소수 사람들이 일반 대중의 대열에서 분리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 일에서 자신이 값없이 은혜를 나눠주시며 판단하신다는 것을 알리시기 위해서 다만 자신이 원하시는 대로 또 원하시는 사람에게만 자비를 베푸신다고 단언하신다. 자비를 구하는 사람에게는 비록 거절을 당하는 일이 없이 자비가 내려질 것이지만, 이런 경우에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하거나 부분적으로 얻은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이 은혜를 인해서 자기를 찬양할 것을 요구하신다.
제 23 장
이 교리는 언제나 부당하게 받아왔던 거짓 비난에 대한 논박
유기는 선택과 공존하며 하나님의 뜻에 의한 행위이다
1. 선택 ― 그러나 유기는 없는가?
그런데 인간의 오성(悟性)은 이런 말들을 들을 때에, 그 교만을 억제할 수 없어 마치 전쟁 경보나 들은 듯이 함부로 날뛰며 소동을 일으킨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에게 책망을 받지 않으려는 듯이 선택을 용납하면서도 누군가 정죄받는 자가 있다는 것을 부정한다. 그러나 이것은 대단히 무지하고 유치한 일이다. 버림과 대조되지 않으면 선택은 성립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구원하시기로 정하신 사람들을 따로 구별하신다고 말하면서, 소수의 사람들이 선택에 의해 얻는 것을 다른 사람들은 우연히 또는 자기의 노력으로 얻는다고 말하는 것은 심히 어리석은 말일 것이다.1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선택하시지 않는 사람들을 정죄하신다. 그리고 이렇게 하시는 데는 자신의 자녀들을 위해 예정하신 기업에서 그들을 제외하시고자 하시는 것 이외에 다른 이유가 없다. 천사들까지도 찬양하는 하나님의 불가해한 계획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칠 때에, 그 말씀을 듣고도 제재를 받지 않으려고 하는 인간의 교만은 용서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자비가 하나님의 손과 뜻 안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강퍅하게 만드는 것도 그의 손과 뜻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2(롬 9:14 이하). 또 바울은 내가 말한 사람들과는 달리 하나님을 변호하기 위해서 거짓 구실을 만들려고 애쓰지 않고, 진흙이 토기장이와 논쟁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경고할 뿐이다(롬 9:20). 그런데 하나님께 정죄를 받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마 15:13)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이 말씀의 뜻은 분명히, 천부께서 그의 농장에 거룩한 나무로서 심지 않은 사람들은 멸망을 받기로 작정되었다는 것이다. 만일 그들이 이 말씀을 버림의 증거가 아니라고 본다면, 아무리 분명한 일이라도 그들에게 증명할 방도가 없을 것이다.
만일 그들이 논란을 그치지 않는다면, 건전한 믿음을 가진 자는 바울의 충고로 만족해야 한다. 즉, 그는 하나님께서 한편으로는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 한편으로는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롬 9:22-23), 하나님과 싸울 까닭이 없다고 한다. 독자들은 바울이 모든 수근거리는 중상의 기회를 끊어버리기 위해서, 하나님의 진노와 권능에 대한 궁극적인 주권을 인정하는 것에 주목하는 것이 좋겠다. 이는 우리의 모든 지력을 삼켜버리는 깊은 판단을 우리의 결정에 예속시키려 하는 것은 사악한 짓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반대자들은, 하나님께서 그 관대하게 용납하시는 사람들을 전적으로 배척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혹회개할까 해서 그들에 대한 심판을 보류하시는 것이라고 무가치한 대답을 한다. 이것은 "멸하기로 준비된"(롬 9:22) 사람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회심하기를 기다리면서 참으신다고 바울이 생각했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어거스틴은 권능과 인내가 결합될 때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의 권능으로 주관하신다고 이 구절을 바르게 설명한다.3 그들은 또 다음과 같이 첨언한다. 진노의 그릇들에 대해서는 "멸하기로 준비되었다"고 하며, "하나님은 긍휼의 그릇들을 예비하셨다"고 말하는 데는(롬 9:23) 충분한 이유가 있다. 바울은 이렇게 함으로써 구원의 공로를 하나님께 돌리는 동시에, 멸망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의지로 멸망을 초래하는 것이라고 하여 책임을 그들에게 돌린다. 그러나 바울이 다른 표현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앞에 있는 문구의 가혹한 점을 완화한다는 것은 나도 인정하지만, 멸하기로 준비된 일을 하나님의 비밀한 계획 이외의 어떤 것에 돌린다는 것은 전혀 불합리한 일이다. 이 점은 바로 앞에 있는 문맥에서도 언급했다.
하나님께서 바로를 세우셨다고 말한 다음에(롬 9:17)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하게 하신다"고 하였다(롬 9:18). 여기서 하나님의 은밀한 계획이 강퍅하게 만드는 원인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적어도 나는 어거스틴이 가르친 것을 지지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즉, 하나님께서 이리를 양으로 만드실 때에, 그들의 강퍅한 마음을 극복할 만한 더 강력한 은혜로 그들을 개조하신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완고한 자들을 회심시키시지 않는 것은 더욱 강력한 은혜를 나타내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은혜를 주시기를 기뻐하신다면, 그것이 하나님께 부족한 것이 아니다.4
첫째 반론 : 선택 교리는 하나님을 폭군으로 만든다
2. 하나님의 뜻이 의의 표준이다
경건하고 온건한 사람들과 자기가 인간인 것을 염두에 두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발언들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악독한 개들이 하나님을 향해서 내뿜는 독은 한두 가지가 아니므로, 우리는 필요한 대로 그 하나 하나에 대답하려 한다.
미련한 자들은 마치 하나님께서 그들의 비난을 들으셔야 하는 듯이 여러 가지로 반박한다. 우선 그들은, "하나님의 피조물들이 아직 아무 죄도 짓지 않고 그를 노엽게 한 일도 없는데, 무슨 권리로 그들에 대해 노하시는가? 원하는 대로 사람을 멸망에 내어 주신다는 것은 재판장의 합법적인 선고라기보다 폭군의 변덕과도 같다"고 의문을 제기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기의 공로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결정만으로 영원한 죽음에 예정된다면, 사람이 하나님과 쟁론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그들은 생각한다. 만일 이런 생각이 경건한 사람의 마음에 떠오른다면, 한 가지 점만 고려해도 이런 생각을 충분히 깨뜨릴 수 있을 것이다.
즉, 호기심만으로 하나님 뜻의 원인을 추구하는 것은 심히 악하다는 점을 고려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모든 존재의 원인이며, 또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 만일 하나님의 뜻에 어떤 원인이 있다면, 하나님의 뜻보다 먼저 무엇이 있어야 하며 하나님의 뜻은 그 먼저 있는 것에 좌우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생각은 합당치 않다. 하나님의 뜻은 의의 최고 표준이기 때문에, 그가 원하시는 일은 그가 원하신다는 사실 때문에 무엇이든 의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러므로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느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원하셨기 때문이라고 대답해야 한다.5 한 걸음 더 나아가, 왜 그것을 원하셨느냐고 묻는다면, 이 질문은 하나님의 뜻보다 더 위대하고 더 높은 어떤 것을 찾으려는 것이지만, 그런 것은 결코 찾을 수 없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기의 경솔한 생각을 억제해야 하며, 없는 것을 구하지 않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있는 것까지 발견하지 못하게 될 우려가 있다. 이 점을 염두에 둔다면, 경외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비밀을 곰곰히 생각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이것이 효과적인 제지책이 될 것이다. 하나님을 노골적으로 저주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악한 자의 대담한 태도에 대해, 주님 자신이 우리의 도움없이 그의 의로 충분히 자기 변호를 하실 것이다. 즉 그들의 양심에서 모든 궤변과 구실을 빼앗고 유죄를 선언하시고 정죄하실 것이다.
또 우리는 '절대적 권력'이라는 허구를 주장하지 않는다. 이것은 세속적인 개념이므로 당연히 우리에게는 가증한 것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이 법인 무법한 신을 상상하지 않는다. 플라톤의 말과 같이, 정욕에 흔들리는 사람에게는 법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뜻은 아무 허물도 없을 뿐만 아니라, 완전성의 최고 표준이며 모든 법의 법이다.6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답변하실 의무가 있다는 생각과 또 우리에게 우리의 생각에 따라 이 문제에 대해서 판단할 만한 자격이 있다는 생각에 반대한다. 따라서 우리는 허용된 범위를 넘으려고 할 때에는 시편에 있는 말씀, 곧 죽을 인생이 하나님을 판단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항상 승리자가 되시리라는 경고의 말씀에서 두려움을 느껴야 한다(시 51:4).
3. 하나님께서는 버림 받은 자들에 대해 공정하시다
하나님께서는 침묵을 지키심으로써 원수들을 제어하실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태연하게 조롱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도록 성경 말씀을 우리에게 무기로 주신다. 만일 "아직 존재하지도 않았고, 따라서 사망의 심판을 받을 일을 할 수 없었는데, 하나님은 왜 처음부터 어떤 사람들을 사망에 예정하셨느냐"7고 우리에게 묻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대답 대신에, 하나님께서 그 분의 본성에 따라서 사람을 심판하시려고 한다면, 당신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어떤 빚을 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반문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가 죄로 더렵혀졌으므로 하나님께는 극히 가증할 뿐이다. 이것은 폭군적인 잔인성 때문이 아니라, 공의의 입장에서 가장 공평하게 평가한 결과일 것이다. 주께서 사망으로 예정하시는 사람들이 모두 그들 본성의 상태에 의해서 그 심판을 받아야 할 것이라면, 그들은 자기들에게 어떤 불공평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아담의 후손들을 모두 불러와서, 그들이 나기도 전에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가 그들을 묶어 영원한 재앙에 넘겼다는 이유로 그들로 하여금 창조주 하나님과 쟁론하게 해보라. 그러나 하나님께서 도리어 그들의 책임을 추궁하신다면, 하나님의 이 변호 방법에 대해서 그들은 어떤 항변을 할 수 있겠는가? 그들 전부가 썩은 덩어리에서 생겨났다면, 당연히 정죄를 받아야 한다. 자기들의 본성이 자연히 자기들을 사망으로 인도한다는 것을 그들은 싫든 좋든간에 느끼고 있으므로, 하나님의 영원한 판단에 의해 사망에 예정된다고 해서 하나님이 불공정하시다고 비난하지 못할 것이다! 항의하는 그들의 심사가 얼마나 패악한가는 그들이 정죄의 원인을 고의로 은폐한다는 사실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그들은 스스로 정죄의 원인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면서도 하나님을 비난함으로써 자기들을 정당화 해보려고 한다. 하나님은 정죄를 선언하는 당사자라고 내가 백 번 말할지라도―이것은 옳은 말이며―그들은 자기들의 양심에 새겨져 자주 눈에 띄는 죄를 신속하게 씻어버리지 않는다.
하나님의 공의는 우리의 힐문(詰問) 대상이 될 수 없다
4. 하나님의 결정은 그의 공의(公義)에도 감추어져 있다
그들은 다시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즉, 지금 그들의 정죄의 원인이라고 하는 그 부패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이미 그렇게 되도록 예정된 것이 아니었던가? 그러므로 그들이 부패 속에서 멸망할 때, 그들은 아담이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 타락하며 불행에 빠지고 그 후손들까지 끌어넣은 그 불행의 벌을 치르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면 자신이 피조물을 이렇게까지 잔인하게 속이는 이는 공정하지 않을 것이 아니냐고 한다.8 인류가 지금 빠져 있는 이 비참한 상태에 아담의 모든 후손이 빠진 것은 하나님의 뜻으로 된 일이라는 것을 나도 물론 인정한다. 또 우리는 결국 항상 하나님의 뜻의 단독 결정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과 그 결정의 이유는 하나님 안에 숨겨져 있다는 것을 처음부터 말했다.9 그러나 하나님이 이런 비난을 받으셔야 한다는 결론은 여기에 직접 나오지 않는다. 우리는 바울과 함께 다음과 같이 대답할 것이다.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롬 9:20-21).
그들은 그런 대답으로는 하나님의 의가 참으로 변호되지 않으며 우리가 정당한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 흔히 사용하는 궤변을 사용하고 있다고 말할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언급하려는 것은 하나님은 원하시는 대로 하실 수 있으며 그것을 막을 수 없다고 하는데 불과한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과 전혀 다르다.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생각하라고 할 때보다 더 강력한 이유를 말할 수 있는가?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어떻게 불의를 용납하실 수 있겠는가?(창 18:25 참조). 심판하시는 것이 당연히 하나님의 본성에 속한 일이라면, 하나님은 본성에 따라 의를 사랑하시며 불의를 미워하신다. 따라서 사도는 자기의 주장이 곤란을 당한 것같이 도피하는 구실을 찾지 않고, 하나님의 의는 사람의 표준으로 측량하거나 사람의 약한 지혜로 이해할 수 없는 높은 것임을 밝힌다. 사도는 하나님의 판단에는 심히 깊은 기초가 있어서(롬 11:33), 사람의 마음이 그 깊이를 알려고 하면 완전히 삼켜버려지고 말 것이라는 것까지도 인정한다. 그러나 또한 그는 우리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어떤 원칙에 의해 판단하려 하며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없을 때는 그 일을 비난한다는 것이 얼마나 불순한 일인가를 가르친다. 비록 올바르게 이해하는 사람은 드물지만, 다음 솔로몬의 말은 잘 알려져 있다. "만물의 위대한 창조주는 미련한 자들과 범법하는 자들에게 각각 그 삯을 주시느니라"(잠 26:10, 제네바 성경 참조). 솔로몬은 여기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선포하고 있는데, 하나님은 미련한 자들과 죄인들에게 그의 영을 주시지 않을 뿐 아니라 그의 결정에는 그들에 대한 벌이 포함되었다고 한다. 자기에게 있는 이성이라는 극히 약한 척도로 무한자를 측량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무서운 정신착란에 빠진 자들이다! 바울은 고결한 지조를 지키는 천사들을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이라고 부른다(딤전 5:21). 만일 그들의 변함없는 충성이 하나님의 기뻐하신 뜻에 근거한 것이라면, 다른 천사들의 반역은 그들이 버림을 당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 사실에 대한 원인은 그들이 버림 받았다는 것 이외에서는 찾아볼 수 없으며, 버림은 하나님의 은밀한 계획 안에 숨겨져 있다.
5. 하나님의 숨은 결정은 찾아내려고 할 것이 아니라, 순종적인 마음으로 경탄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여기에 마니나 콜레스티우스10의 제자, 즉 하나님의 섭리를 비방하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하자. 나는 바울과 함께, 하나님의 섭리는 지극히 위대하여 우리의 이해력을 훨씬 초월하므로(롬 9:19-23 참조) 섭리에 대한 이유를 알려고 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아니면 어리석은 일인가! 이 사람은 하나님의 권능이 제한되어, 그가 생각할 수 없는 일은 하나님도 하실 수 없기를 원하는가? 나는 어거스틴과 함께 말한다. 주께서는 멸망으로 갈 줄을 미리 아신 사람들을 창조하셨다. 주께서 그렇게 하시고자 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그러나 왜 이렇게 하고자 하셨는가 하는 것은 우리의 이성이 물을 바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11 그리고 우리는 바울을 본받아 악한 자들의 입을 막으며, 그들이 감히 떠들 때마다,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아야 한다.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롬 9:20). 하나님께서 그의 위대한 사업을 그들의 무지에 맞추어 조절하시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을 비난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 일들이 육에 대해서는 감추어졌다고 해서 악하다는 말인가? 그들은 명백한 증거에 의해 하나님의 판단은 측량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나님의 판단은 "큰 바다"라는 것을 그대는 안다(시 36:6). 그러면 하나님이 스스로 결정하신 일을 그들의 좁은 생각으로 이해할 수 있겠는지를 생각해 보라. 그들의 정신 착란적인 탐구욕으로 그 "바다"에 뛰어든들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그렇게 하면 그들 자신의 멸망만 있을 뿐이라는 것을 그들의 이성은 말한다. 욥기와 예언서들은 하나님의 알 수 없는 지혜와 무서운 권능을 선포하는데, 그들이 두려운 마음으로 자기를 억제하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만일 그들의 마음이 괴로워하면 그들도 다음 어거스틴의 층고를 듣게 하라. "사람인 그대는 내게서 대답을 들으려 한다. 나 역시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대와 나는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라고 하시는 이의 말씀(롬 9:20)을 듣자. 믿는 무지는 경솔한 지식보다 낫다. 공로를 구하라. 그대는 형벌만을 경험할 것이다. '깊도다!' 그대는 이유를 찾는가? 나는 깊음 앞에서 떤다. 그대는 변론하지만, 나는 찬탄한다. 그대는 논의하지만, 나는 믿는다. 나는 깊음을 본다. 그러나 밑바닥에는 미치지 못한다. 바울은 놀라운 일을 발견했기 때문에 안식했다. 그는 하나님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라고 하는데, 그대는 측량하려 하는가? 그는 하나님의 길을 찾을 수 없다고 하는데(롬 11:33), 그대는 찾아내려고 하는가?"12 더 이상 계속하더라도 우리에게 아무 유익이 없을 것이다. 성급한 그들도 만족할 수 없을 것이며, 하나님께서도 이미 성령을 통해서 바울의 입으로 하신 변호 이외에 다른 변호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말하기를 중단할 때 우리는 우리 말을 잊어버린다.
6. 둘째 반론 : 선택 교리는 사람에게서 죄책과 책임감을 빼앗아간다
그들은 불경하게도 또 다른 반론을 제기한다. 이 반론은 직접 하나님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지만 죄인을 용납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정죄하신 죄인을 정당하다고 하는 것은 반드시 심판자를 모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경한 자들은 지껄인다. 즉, 하나님께서 자신의 예정에 의해서 불가피하게 만들어 놓은 일들을 사람들에게 죄로서 전가하는 이유는 무엇이냐고. 그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결정에 반대해서 싸울 것인가? 그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므로 해보아도 무익한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원인이 하나님의 예정에 있기 때문에 그들이 벌을 받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한다. 나는 여기서 교회의 저술가들이 보통 사용하는 변증 방법을 피하려 한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예견하신 악은 사람의 것이고 하나님의 것이 아니므로, 하나님의 예지는 사람이 죄인으로 인정되는 것을 금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런 변호를 하면 궤변은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더욱 계속되어 다음과 같이 주장할 것이다. 즉, 하나님은 그 예견하신 악을 막고자 하셨다면 막을 수 있었을텐데 그렇게 하시지 않았으므로, 그의 예정된 계획에 의해서 사람들이 땅에서 그렇게 하도록 그들을 창조하셨다. 그러나 만일 사람들이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현재하고 있는 일을 모두 하도록 창조하였다면, 그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피할 수 없이 하는 일 때문에 비난을 받아서는 안될 것이라고 할 것이다.13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이 어려움을 바로 해결할 것인가를 살펴보아야겠다.
우선, 모든 사람은 솔로몬이 한 말에 동의해야 한다.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잠 16:4). 보라, 만사의 처리가 하나님의 수중에 있으며 구원과 사망의 결정도 그의 권한내에 있으므로, 그는 그의 계획과 뜻에 의해서 어떤 사람들은 반드시 죽기로 결정되어 출생하여서, 그 멸망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을 영광되게 하도록 정하셨다. 만일 누가 대답하기를,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그들에게 필연성을 부과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악행이 있을 것을 미리 예견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창조하신 것이라고 한다면, 이런 사람은 일부를 말하는 것이요 전부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옛날 학자들도 간혹 이런 해결책을 사용했으나, 망설임이 없지 않았다.14 스콜라 철학자들은 이것을 의지하고서, 이에 대해서는 어떤 반대도 있을 수 없다는 듯이 말한다.15 실로 나도 예지만이 피조물들에게 필연성을 부과하는 것이 아님을 선뜻 인정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이에 찬성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들은 예지도 사물의 원인이기를 원한다. 그러나 나는 왈라(Valla)가 거룩한 일들을 잘 아는 사람이 아니지만, 이 주장에 대해서 더욱 명쾌하고 현명한 견해를 가졌다고 생각한다. 그는 이런 주장은 유익하다고 했다. 그리고 생사(生死)는 하나님의 예지보다 하나님의 의지가 결정하는 것이라고 했다16. 만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일어나는 상황을 예견하시기만 하고, 그의 결정에 의해서 배치하시거나 제한하시지는 않는다면, 그의 의견과 인간의 상황의 필연성과의 사이에 무슨 관련이 있느냐고 묻는 것도 일리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미래의 사건들을 예견하시는 것은 그런 사건들이 생기도록 자신이 결정하셨기 때문이므로, 그들이 예지에 대해서 논쟁을 일으키는 것은 무익한 일이다. 만사는 하나님의 결정과 명령으로 발생하는 것이 분명하다.
7. 하나님께서는 죄에 빠지는 것도 예정하셨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아담이 반역으로 인해 멸망하도록 결정하셨다는 말씀은 없다고 말한다. 이것은 성경이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신다"고(시 115:3) 선포하는 그 하나님께서 그의 피조물 중의 가장 고귀한 존재를 목적이 불확실하게 창조하셨다고 하는 것과 같은 말이다. 그들은, 사람에게는 자기의 운명을 선택할 자유가 있었으며,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그 공과(功過)에 따라서 처리하시겠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정하신 것이 없었다고 말한다. 만일 이런 무익한 조작이 용인된다면, 아무것도 의지하시지 않고 자신의 비밀한 계획에 따라 만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전능은 어디 있을 것인가? 그들이 싫든 좋든 간에 예정은 아담의 후손들에게 나타난다. 한 조상의 죄 때문에 모든 후손이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된 것은 저절로 생긴 일이 아니었다. 그들이 인류 전체에 관해서 마지 못해 인정하는 것을 왜 한 사람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못하는가? 왜 그들은 이런 핑계로 그들의 노력을 낭비하는가? 성경은 모든 사람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사망에 예속되었다고 선언한다(롬 5:12 이하 참조). 이 일은 자연에 돌릴 수 없으므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에서 온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의 의를 변호하려는 이 훌륭한 사람들이 어리둥절하여 지푸라기 하나에 매달려 높은 지붕을 뛰어 넘으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나는 다시, 만일 하나님께서 그것을 기뻐하셨기 때문이 아니라면, 아담의 타락이 무수한 후손을 어린아이들까지 불가피하게 영원한 사망으로 끌어넣게 된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다. 이것이 무서운 결정이란 것을 나도 물론 인정한다.17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기 전에 사람의 결말이 어떻게 되리란 것을 예견하셨으며, 따라서 스스로 이렇게 결정하고 명령하신 것이므로 미리 아셨다는 것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다. 여기서 하나님의 예지를 비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경솔하고 부주의하여 죄를 짓는 것이 된다. 장차 있을 일을 모르시지 않았다고 해서 하늘 심판자를 비난할 이유는 무엇인가? 만일 정당한 또는 명백한 불평이 있다면, 그것은 예정에 적용된다. 내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어리석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첫 사람의 타락과 그로 말미암아 후손이 멸망할 것을 예견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결정에 따라서 그렇게 되도록 하셨다. 이는 장차 있을 일을 모두 예견하시는 것이 그의 지혜의 일부분인 것과 같이, 그의 손으로 모든 것을 지배하며 주관하는 것은 그의 권능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은 다른 문제들과 같이 이 문제도 훌륭하게 처리한다. "우리가 바르게 믿으며 그 믿음을 고백하는 것은 지극히 건전한 일이다. 즉, 만물의 주이신 하나님, 만물을 지극히 선하게 만드신 하나님(창 1:31 참조), 또 선에서 악이 생기리라는 것을 미리 아셨으나, 악한 일이 생기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보다 악에서 선을 만들어내는 것도 자신의 전능한 선하심의 일부임을 아신 하나님께서는 천사들과 사람들의 생활을 정하실 때에, 그들의 생활에서 우선 자유 의지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보이시며, 다음에 자신의 은혜의 복과 자신의 공의로운 결정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보이도록 하셨다."18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타락과 버림받은 자들의 거절을 허락하셨을 뿐만 아니라 결정하셨으나 공정하게 하셨다
8.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허락은 차이가 없다
여기서 그들은 뜻과 허락은 서로 다르다는 주장에 의지하여, 악한 자들이 멸망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기 때문이지, 그것을 뜻하시기 때문은 아니라고 주장한다.19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렇게 되는 것을 뜻하시지 않았다면, "허락"을 말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기만 하고 아무것도 뜻하시지 않았는데 사람이 자기 힘으로 멸망을 초래했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그런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피조물의 영장이 어떤 상태에 있으리라는 것을 원하고 확정하지 않으셨다고 하는 생각이다. 그러므로 나는 어거스틴과 함께 "하나님의 뜻은 사물의 필연성이며,"20 하나님께서 뜻하시는 것은 필연적으로 발생하는데 이는 그가 예견하신 일들이 참으로 발생하는 것과 같다고 서슴없이 솔직하게 고백한다. 그런데 펠라기우스파나 마니교도, 재세례파나 에피큐로스파(우리의 상대는 이 네 파이다)는 자기들과 악인들을 변호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예정 때문에 강제 당한다고 하여 필연성에 이의를 제기하지만21 그들은 이 문제에 적용될 만한 논법을 제시하지 못한다. 예정이 하나님의 비밀스러우나 흠 없는 공의를 집행하는 것에 불과하다면, 그들이 이 상태에 예정될 만하다는 것은 확실하므로, 그들이 예정에 의해서 받는 멸망이 정당하다는 것도 그에 못지 않게 확실하다. 그뿐 아니라, 그들의 멸망은 하나님의 예정에 의존하되, 그 원인과 기회는 그들 자신 안에 있다. 첫 사람이 타락한 것은 주께서 그것이 유익하다고 판단하셨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판단하셨는지 우리에게는 감추어진 일이다. 그러나 그 일로 인해서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이 충분히 나타나리라고 보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판단하셨다는 것은 확실하다.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그 공의를 생각해야 한다. 찬양할 만한 것은 모두 반드시 정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은 하나님의 섭리가 정한 대로 넘어지지만, 자기의 허물 때문에 넘어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선언하셨다(창 1:31). 그러면 사람이 하나님을 배반한다고 하는 그 악은 어디서 왔는가? 창조에서 나왔다고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는 자신에게서 나온 것에 대해서는 이미 표시를 해놓으셨다. 그러므로 사람이 그 자신의 악한 의도에 의해서 주님께로부터 받은 순결한 천성을 더럽혔다. 그리고 그의 타락에 의해서 모든 후손을 자기와 함께 멸망으로 끌어넣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에게 더 가까운 인류의 부패한 본성에서 정죄에 대한 명백한 원인을 보아야 하며, 감추어져 전혀 알 수 없는 원인을 하나님의 예정에서 찾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또 우리는 이해력을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에 복종시키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며, 그 지혜의 수많은 비밀 앞에 굴복해야 한다. 아는 것이 가능하지도 않고 합당하지도 않은 일들에 대해서는 무식한 것이 유식한 것이며,22 변태적인 지식욕은 일종의 정신 이상이다.
9. 둘째 반론에 대한 보복을 요약함
내가 아직 이 사악한 구실을 침묵시킬 만한 증거를 제시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람이 혹 있을 것이다. 나는 불경건한 사람들의 불만을 완전히 막을 만한 증거를 내놓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내가 이미 말한 것은 모든 반론의 이유와 구실을 배격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악한 자들은 죄를 지으면서도 용서를 받을 만하다는 인정을 받고 싶어한다. 자기들은 필연적으로 죄를 짓지 않을 수 없으며, 특히 이 필연성은 하나님의 결정으로 자기들에게 부과된 것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당연히 용서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부정한다. 왜냐하면, 그들을 멸망하도록 예정했다고 그들 자신이 불평하는 그 하나님의 결정에는 그 자체의 공정성이 있어서, 우리는 알 수 없으나 아주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이 받는 모든 재난은 하나님의 지극히 공정한 심판이 내리는 벌이라고 결론내린다. 따라서 그들이 자기들이 정죄받은 원인을 찾기 위해서 감추어진 성역(聖域)인 하나님의 계획으로 시선을 돌리고, 정죄의 진정한 원천인 자기들의 부패한 본성은 못본 체하는 것은 패악한 행동이라고 우리는 주장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에 대한 비난을 막으시기 위해서 자신의 피조물에 대하여 증거하신다. 사람은 현재 당하고 있는 재난을 당하도록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에 의해서 창조되었지만, 재난이 생기는 원인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있다. 왜냐하면 사람이 하나님께서 순결하게 창조하신 상태에서 부패하고 불순하고 패악한 상태로 타락했다는 것이 그가 멸망하는 유일한 이유이기 때문이다.
10. 셋째 반론 : 선택 교리는 하나님이 편파적이라는 견해로 귀결된다
하나님의 예정을 반대하는 자들은 어리석은 셋째 반론으로 예정을 중상한다. 하나님께서 그 나라의 상속자로서 받아주시는 사람들이 보편적인 멸망에서 면제되는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뜻에 의해 결정된 일이라고 우리가 주장하기 때문에, 반대론자들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편파적으로 대하시는 것인데 성경은 각처에서 그 사실을 부인하고 있지 않느냐고 반박한다. 그들은 또 성경에 모순이 있든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선택에는 공로에 대한 고려가 있든지, 둘 중의 하나라고 결론내린다. 먼저, 성경에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편파적으로 대하는 분"이 아니라고 하는 말은 그들이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 "사람"(person)이란 사람(man)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있는 것 중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 보통 호감, 품의, 권위 등의 인상을 주거나, 또는 미움, 경멸, 치욕 등의 감정을 일으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것은 예컨대 재산, 권력, 가문, 지위, 조국, 육체적 미(美) 등등이며(신 10:17 참조), 또 빈곤, 곤궁, 비열, 사악, 치욕 등이다. 그래서 베드로와 바울은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신다고 가르친다(행 10:34; 롬 2:11; 갈 2:6 참조).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을 구별하시지 않으며(갈 3:28), 민족이 다르다는 이유로 한편은 받아들이고 다른 편은 물리치시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23 야고보도 하나님의 판단에는 재산에 대한 고려가 없다는 것을 선언할 때에(약 2:5) 같은 말을 사용한다. 바울은 다른 곳에서 하나님께서 판단하심에 있어서 자유인이나 종을 차별하지 않으신다고 한다(골 3:25; 엡 6:9).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공로를 전혀 고려하지 않으시고, 다만 자신이 기뻐하시는 뜻대로만 어떤 사람들은 자녀로 택하시고 어떤 사람들은 버리시며 정죄하신다고 우리가 말할 때에, 아무도 이에 대해서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더 만족하게 설명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 공로가 다르지 않은 두 사람 중 한 사람을 선택하시고 다른 사람을 버리시는 것은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선택받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도록 하는 무엇이 있느냐"고 반문한다. 아무것도 없다고 그들이 대답한다면(또 그렇게 대답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은 그 사람을 고려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를 선대하시는 이유를 자신의 선하심에서 찾으신다고 추정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한 사람은 물리치시고 다른 사람은 선택하신다는 사실은 한 사람만을 고려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의 자비로부터 오는 것이며, 하나님의 자비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장소와 시간에 따라 값없이 나타나는 것이다.24 다른 구절에서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고전 1:26)라고 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육의 교만을 꺾으시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는 전혀 사람의 외모에 구속되지 않는다.
11. 예정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비와 의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예정하시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의 공의가 편파적이라고 하는 것은 거짓되고 사악한 비난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죄가 있다고 보시면 모든 사람을 꼭같이 벌하실 것이며, 결백하다고 보시면 그 엄격한 심판을 모든 사람에게서 철회하셔야 한다고 그들은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태도는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시지 말든지, 그렇지 않으면 긍휼을 베푸시고자 할 때 그의 심판을 일체 포기하셔야 한다는 것과 같다. 그들은 무엇을 요구하는가? 모른 사람에게 죄가 있다면 모든 사람이 함께 같은 벌을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도 죄책(罪責)이 공통적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몇 사람을 구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벌을 주실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공평한 심판자가 되시는 것이 옳다고 대답한다. 그들이 이것을 용납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에게서 긍휼을 베푸시는 능력을 빼앗으려는 것이거나 긍휼 베푸시는 것을 용납하더라도, 적어도 심판을 전적으로 포기하셔야 한다는 조건을 붙이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어거스틴의 말이 여기에 매우 적절하다. "첫 사람으로 인하여 인류 전체가 정죄를 받았으므로…그중에서 귀하게 쓰이도록 만들어진 그릇은 그 자신의 의의 그릇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의 그릇이다. 그러나 다른 그릇이 천하게 쓰이도록 만들어졌다는 것(롬 9:21 참조)은 이유를 추구할 문제가 아니고 심판에 돌릴 문제이다."25 하나님은 정죄하시는 사람들에게 당연한 벌을 주시지만 부르시는 사람들에게는 받을 이유가 없는 은혜를 분배하시므로, 하나님은 아무 비난도 받으실 이유가 없다. 마치 돈을 빌려주는 사람이 어떤 사람에게는 빚을 탕감해 주고 어떤 사람에게서는 빚을 받아낼 권리가 있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자비하시므로 원하시는 사람에게 은혜를 주실 수 있으며, 공정한 심판자이시므로 모든 사람에게 은혜를 주지는 않으신다. 받을 가치가 없는 자들에게 주심으로써 그의 거저 주시는 은혜를 나타내실 수 있다…모든 사람에게 주시지 않음으로써 모든 사람이 받아야 할 것이 무엇임을 나타내실 수 있다.26 바울이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롬 11:32; 갈 3:22)라고 기록할 때에, 그는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빚진 분이 아니시라는 말을 덧붙여,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라고 하였다(롬 11:35).
예정을 가르치는 것은 유해하지 않고 오히려 유익하다
12. 넷째 반론 : 선택 교리는 올바르게 살려는 열의를 전적으로 말살한다
우리의 반대론자들은 예정론을 뒤엎기 위하여 만일 그것이 옳다면 선행에 대한 관심과 열의는 전적으로 소멸되고 말 것이라고 한다. 자기의 생사는 하나님의 영원 불변한 명령으로 이미 결정되어 있다고 들을 때에, 하나님의 예정은 자기의 노력으로 막을 수도 없고 진전시킬 수도 없으므로, 자기가 어떤 행동을 하든지 관계가 없을 것이라고 즉시 생각하지 않을 사람이 누구이겠는가? 그래서 모든 사람은 자포 자기에 빠지며 정욕에 끌리는 대로 무모한 생활을 할 것이라고 한다.27 분명히 그들은 전혀 거짓말만 하는 것은 아니다. 추악한 모독적인 언사로 예정설을 더럽히는 돼지들이 많으며, 이런 구실로 모든 충고나 책망을 회피한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우리에게 대해서 일단 결정한 처리 방법을 알고 계신다. 구원으로 결정하셨다면 적당한 때에 우리를 그곳으로 인도하실 것이요, 사망으로 예정하셨다면 우리가 반대해서 싸운들 아무 유익이 없을 것이라고 그들은 말한다.28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이 위대한 신비를 더욱 경외하는 마음으로 귀중하게 생각하기를 요구하는 동시에, 신자들에게는 훨씬 다른 태도를 가르치며, 이런 사람들의 범죄적인 미친 태도를 잘 반박한다. 성경이 예정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우리가 불경건하고 경솔하게 하나님의 알 수 없는 비밀을 찾아 덮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성경의 목적은 이와 반대로 우리가 교만을 꺾고 항복하며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떠는 동시에, 그의 자비를 존중할 줄 알게 하려는 것이다. 신자들이 목표를 삼는 것도 이것이다. 그러나 이 돼지들의 비방에 대해서는 바울이 적절하게 침묵토록 만든다. 그들은 아무 걱정 없이 죄악 생활을 계속하겠노라고 말한다. 그들도 선택된 사람들 사이에 들어 있다면, 죄가 그들의 궁극적 구원을 방해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바울은 우리가 선택된 목적에 대해서 그것은 우리가 거룩하고 흠 없는 생활을 하도록 하려는 것이라고 가르친다(엡 1:4). 만일 선택의 목표가 거룩한 생활에 있다면, 선택은 아무 선행도 하지 않는 구실을 우리에게 준다기보다, 도리어 우리의 마음을 거룩한 생활에 집중하겠다는 열의를 일으키며 자극할 것이다. 구원을 얻기에는 선택으로만 충분하다고 해서 선행을 중지하는 것과 선택을 해주신 목적인 선의 추구에 몸을 바치는 것, 이 두 가지가 얼마나 서로 다른가를 비교해 보라! 그리고 이런 신성모독적 언행을 일소하라. 그것은 선택의 질서 전체를 뒤엎는 악한 행위이다.29
그러나 그들은 모독 행위를 증가시키기 위해서, 하나님께 정죄받은 자가 결백하고 정직한 생활을 하여서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려고 노력한다 하더라도(딤후 2:15) 그것은 헛수고가 될 것이라고 한다. 이런 주장은 완전히 파렴치한 거짓말이다. 이런 노력이 선택 이외에 어디서 올 것인가? 버림 받은 자들은 천하게 쓰도록 만든 그릇이므로(롬 9:21 참조). 아무리 심판에 대해서 무익한 저항을 계속하더라도, 그 끊임없는 범죄로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킬 뿐이며, 분명한 표지로 하나님의 심판은 이미 그들 위에 선언되었다는 것을 확인하여 줄 뿐이다.
13. 다섯째 반론 : 선택 교리는 모든 권고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또 다른 사람들은 예정론(豫定論)이 마치 경건한 생활에 대한 모든 충고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같이 생각하고 악의에 차 파렴치하게 비방한다.30 이 문제 때문에 혹자가 어거스틴을 크게 비방한 적이 있었다. 어거스틴은 『책망과 은총에 관하여 발렌티누스에게 보냄』(Rebuke and Grace, to Valentinusi)이란 글을 써 보내 그 혐의를 씻었다.31 경건하고 배우려고 하는 모든 사람들은 이 책을 읽으면 만족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정직하고 양순한 사람들을 만족시킬 만한 몇 가지 점을 간단히 말하겠다. 바울이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선택을 분명한 말로 공공연하게 선포한 것을 우리는 앞에서 보았다.32 그렇다고 해서 바울이 경고와 훈계를 하는 데 소극적이었는가? 선량한 열성가들로 하여금 그들과 바울의 열의를 비교해 보게 하라. 바울의 강렬한 열의에 비하면 그들은 얼마나 냉담한가를 깨달을 것이다. 사도는 모든 의심을 제거하는 원칙을 말하였다.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살전 4:7),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 아내 취할 줄을 알고"(살전 4:4),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해서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요컨대, 바울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긴 설명이 없더라도 그들이 서로 모순된다고 생각하는 일들을 바울 사도가 잘 조화시켰다는 것을 이해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믿으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신다. 그러나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고 하신 말씀(요 6:65)은 거짓도 아니며, 그의 명령에 상반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도를 계속하여 사람들을 믿음으로 인도하며, 그들을 믿음 안에서 보존하여 끊임없는 유익을 얻게 해야 한다. 그러나 예정에 대한 인식을 막지 말라. 그래야만 복종하는 자들도 자기의 힘으로 되는 일같이 자랑하지 않고 주(主)를 자랑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마 13:9)고 하신 말씀에는 이유가 있다. 그러므로 들을 귀를 가진 사람들에게 우리가 권고하며 전도할 때에 그들은 기꺼이 순종하지만, 들을 귀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라는 말씀이 응하는 것이다(사 6:9). 어거스틴은 말한다. "그러나 왜 이 사람들은 귀가 있고 저 사람들은 없는가?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롬 11:34). 감추어진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명백한 것을 부정할 것인가?"
나는 어거스틴의 말을 충실히 옮겼다. 그러나 내가 하는 말보다 그의 말에 더 강력한 권위가 있을 것이므로, 그의 글을 인용하기로 하자. "만일 이 말을 듣고 무감각하고 태만하게 되어, 종래의 노력을 버리고 마음대로 정욕에 빠지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예지(豫知)에 관해서 한 말을 거짓이라고 여겨야 하는가? 하나님께서 그들이 선해질 것을 예지하셨다면, 그들이 지금은 아무리 악한 점이 보일지라도 선하게 될 것이 아닌가?" 하나님께서 그들이 악하리라고 예지하셨다면, 그들이 지금은 아무리 선한 점이 보일지라도 악하게 될 것이 아닌가?" 이런 이유가 있다고 해서, "그러면 예컨대, 하나님의 예지에 대해서 말하지 않으면 다른 오류들을 범하게 되는 때에, 하나님의 예지에 대한 말을 부인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보류해야 하는가?" "진실을 말하지 않는 이유와 진실을 말할 필요성은 문제가 서로 다르다. 진실을 말하지 않을 이유를 모두 찾아내는 것은 지루한 일이다. 그러나 그 중의 하나는, 이해하는 사람들의 인식을 증가시켜 주기 위해 우리가 말하면,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더욱 악하게 될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렇게 말해도 이와 같은 사람들의 지식이 증가되는 것도 아니며 더욱 악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어떤 진리를 우리가 말할 때에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이 더욱 악해지고, 우리가 침묵할 때에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더욱 악해진다면, 그런 진리를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진리를 얻도록 하기 위해 말해야 할 것이 아닌가? 말을 하지 않는다면 아무 쪽도 진리를 얻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해력이 있는 사람에게는 손해가 될 것이다. 그가 듣고 받아들인다면, 그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배우게 될 수 있다…또 우리는 성경의 증거로 말할 수 있는 것을 말하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가 진리를 말함으로써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을 넘어지게 할까 두려워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말하지 않음으로써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허위에 빠지지 않을까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끝으로 그는 이 생각을 압축해서 더 명쾌하게 주장한다. "그러므로 사도들과 그 뒤를 이은 교회의 교사들이 두 가지를 다 했다면, 즉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다루며, 동시에 신자들을 경건한 생활 훈련 하에 붙들어 놓았다면, 왜 오늘날의 현대인들은 대적할 수 없는 힘을 가진 진리의 구속력을 느끼면서도 '예정에 대한 말은 옳다고 하더라도 일반 사람들에게 선포해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것을 옳게 생각하는가? 확실히 이 말씀은 선포해서 '들을 귀 있는 자는 듣게' 해야 한다(막 4:9; 마 11:15; 눅 8:8). 그러나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분에게서 받지 않으면 누가 그에게 주겠다고 약속할 것인가? 받지 않는 사람은 거부할는지 모르나, 받는 사람은 받아서 마시고, 마시면 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바르게 경배하도록 경건을 선포해야 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들을 귀를 가진 사람이 자신을 자랑하지 않고 하나님을 자랑할 수 있도록 이 예정론을 선포해야 한다."33
14.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예정을 올바르게 선포하는 데에 있어서 모범을 보였다
그러나 저 거룩한 사람은 덕을 세우려는 데 비상한 관심을 갖고 진리를 가르치는 방법을 조절함으로써 가능한 한 실족하게 하는 일을 현명하게 피하였다. 그는 진리를 말하더라도, 동시에 적당한 표현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만일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 "당신들이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당신들이 이미 하나님의 뜻으로 멸망하도록 예정되었기 때문이요"라고 말한다면. 그는 태만한 마음을 조장할 뿐만 아니라 악한 의도에 기회를 주는 것이다. 만일 미래에 대해서도 그들이 이미 정죄되었으므로 믿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가르치는 말이라기보다 저주하는 말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은, 이런 사람들을 미련한 선생이거나 악하고 불길한 예언자로 간주하고 교회에서 물러나라고 정당하게 요구한다.34
그는 다른 곳에서, 책망을 하지 않고서도 그가 원하는 사람에게 유익을 주시는 분께서 긍휼을 베푸시며 도움을 주실 때, 사람은 책망에서 유익을 얻는다는 견해를 주장한다. 그러나 왜 사람에 따라 방법이 다른가? 결정권이 토기장이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진흙에 있다는 말을 하지 말라. 후에 그는 이렇게 기록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책망을 들음으로써 의로운 길에 들어오거나 돌아올 때에, 그들의 마음속에 구원을 실현하시는 분은, 누가 심고 누가 물을 주든 간에, 오직 자라게 하시는 그 분(고전 3:6-8)이 아닌가? 한 번 어떤 사람을 구원하기로 정하시면 사람의 자유 의지가 그 결정에 저항할 수 없는 그 분이 아닌가? 그러므로 하나님, 곧 '무릇 기뻐하시는 일을 천지와 바다와 모든 깊은 데서 다 행하시는 이'(시 135:6)시며 장차 있을 것들도 만드실 이(사 45:71)의 뜻에 사람의 뜻이 저항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사람이 방해할 수는 없다는 것을 의심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의지를 이용해서 그 원하시는 일을 이루시기 때문이다." 또,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자신에게로 인도하실 때에, "그들을 신체적으로 구속하시는가? 하나님께서는 내적으로 역사하신다. 즉, 내적으로 그들의 마음을 붙잡으시며 움직이시고 그들에게 내적으로 역사하셔서 그들 자신의 뜻으로 그들을 이끄신다." 그러나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을 빠뜨릴 수 없다. "우리는 누가 예정된 수효에 포함되며 누가 포함되지 않을지를 모르므로, 모든 사람들의 구원을 원하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마다 우리의 평화에 참여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평화는 평화의 자녀들 위에만 머물 것이다(눅 10:6; 마 10:13 참조). 따라서 우리의 입장으로서는…건전하고 엄격한 처방약처럼 모든 사람에게 적용해서 그들 자신이 멸망하지 않도록 또는 그들이 다른 사람을 멸망시키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지하시고 예정하신 사람들에게 책임이 유익하도록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다.35
제 24 장
선택은 하나님의 소명으로 확증되지만 악인은 그들에게 예정된 공정한 멸망을 자초한다
선택된 자들은 실제로 부르심을 받아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편입된다
이후는 책 구입을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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