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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론
1. 로고스의 개념
로고스는 일반적으로 ‘말, 선언, 연설, 이야기, 계산’ 등의 의미를 가진 말이다. 이러한 로고스는 B.C 500년경에 그리스의 철학자들이 이 말을 채용해 물질적 우주의 형성과 생명을 부연한 것으로 이 단어를 중요하게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등장한 로고스는 헬라 철학에서도 그 중요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 철학자들은 만물의기원과 생성에 대해서 많은 의견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중 로고스에 대해서 주목할 만한 생각을 했던 자는 헤라클리투스이다.
그는 그 이전의 철학자들과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세상이 계속되는 긴장과 갈등 속에 존재한다고 보았고, 이런 속에서 존재하는 세상을 지탱하는 공통의 원리를 로고스라고 생각한 것이다.
헬라지역에서 발전한 유대교 역시 로고스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대표자인 필로는 로고스가 신 존재처럼 보이고 그는 로고스를 “하나님의 처음 난 아들” 이라고 말한다.
필로는 이 로고스를 초월하신 하나님과 창조된 질서 사이의 중재자로 생각했다고 거스리는 결론하고 있는데 즉 로고스는 “초월적인 하나님과 세계 사이를 연결시켜주는 중보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필로는 로고스를 피조물로 생각했으며 신의 지혜와 이성으로 생각했다.
이상으로 로고스의 태동에 대해서 간단히 살펴보았는데 이러한 로고스의 개념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발전하게 되었는지 알아보아야한다.
Ⅱ. 본론
1. 로고스 기독론의 태동
로고스는 옛 교부들이 그리스도론에 이 로고스 교리를 채용하면서 희랍의 철학 세계에 그리스도교를 변증하는 효과를 가지고 왔는데, 교부들은 이 로고스를 요한복음의 저자의 생각대로 만물의 원리며 창조력이 되는 그 로고스가 육신을 입어서 세상에 오신 분이 곧 예수 그리스도라는 교리를 말했으나, 이러한 진리는 이방의 철학으로는 잘 이해될 수 없었으며 수용될 수 없었으나, 이는 분명 말씀이 몸을 입어 세상에 오신 성육신의 교리로 독특한 진리이다.
그러나, 이러한 진리를 오리게네스는 말씀으로 혹은 이성으로 이해하여 이 세상과 인간이 그 말씀으로 지은 바 되었으므로 우리는 합리적으로 혹은 이성적 존재로 지음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오리게네스는 로마서 10장 6절의 말씀을 들어서 누구나 다 말씀이신 그리스도에게 동참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그를 찾고자 하는 자만이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오리게네스는 이렇듯 말씀 즉 로고스를 그리스도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는 이 로고스 즉 말씀에 완전히 참여하지 못하였으므로 죄를 짓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리스도가 육신을 입은 로고스로 오셔서 사람들이 말씀을 떠나 범죄한 사실이 폭로된 것이라고 한다. 또한 그는 그리스도의 소식을 듣지 못한 자라도 물론 죄에서 해방을 받을 것이고,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은 물론 심판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제 오리게네스는 이성으로 로고스를 말한다. 사람 안에 들어 있다고 말하는 이 이성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공유하고 있는 이 이성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것은 유년기를 지난 모든 정상적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의 집성을 의미하거나 혹은 완전한 사람에게서만 찾아 볼 수 있는 최고의 품격을 말한다고 한다. 그런데 “내가 와서 말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이라는 말씀은 첫째 의미의 이성에 대한 말씀이고 그리고 두 번째 의미의 이성에 대한 말씀으로는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는 말씀을 인용하여 결국 완전한 사람도 없었고 따라서 완전한 이성자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말하기를 “말씀을 완전히 받아들이기 전에는 인간의 모든 기능은 불완전하고 부적당한 것이기에 비방 받을 수밖에 없었고 또 우리의 불합리한 요소들은 이 기능들을 완전히 복종시킬 수 없었다.” 고 한다. 이 불합리한 요소들은 오리게네스는 비유적으로 양들이라고 했다. 그리고 오리게네스는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말씀은 첫째 의미의 이성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이고 그리고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은 이성의 둘째 의미에 대한 말씀으로 생각한다.
이제 오리게네스는 성육신한 로고스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한다. 말씀은 또한 아들이 될 수 있으니 그것은 아버지의 숨은 뜻을 선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람의 말은 그 사람의 마음이 아들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우리의 말이 우리 마음이 보는 것을 전달하는 전달지인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인 로고스는 하나님의 아버지를 알아서 그가 아난 그 아버지를 계시하는 것인데 그 까닭은 피조물의 어떠한 것도 그 말씀의 안내를 받지 않고는 그 아버지에게 가까이 갈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오리게네스가 이러한 말을 할 수 있었던 근본은 어디에 있는가?
오리게네스의 이러한 말의 근본은 그의 스승 클라멘트를 살펴봄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클레멘트는 오리게네스의 스승으로 하나님의 교리에 찰학적 접근 방법을 사용하였는데 그는 기독교 영지주의를 배경으로 한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영지주의 전승을 나타내는데 본인 스스로가 영지주의에 대하여 긍정적은 진술을 하고 있다.
그는 성부하나님께서는 단일체로서 단지 하나 (One)이지도 않고 부분들을 지닌 다수(Many)도 아니며 전부로서의 하나 (All One) 이시다. 따라서 그는 전부(All) 이시다. 그는 그를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통일되는 모든 권능들의 원 (Circle)이시다. 하나님께서는 하나시며 하나를 뛰어넘으시며 단자 (the Monad)자체를 초월하신다고 하였다.
클레멘트는 아들에 대해서 우리에게 선한 삶의 교사라고 표현하면서 아들의 본성은 유일하신 전능자와 가장 밀접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지극히 뛰어나사 아버지의 뜻에 따라 만물을 다스리시고 쇠함도 다함도 없는 권능으로 만사를 주관하시며 나타난 행위를 통해 감추인 생각을 직시하사 만사를 올바로 인도하신다. 그는 나뉘지도 않고 갈라지지도 않으며 또 이 곳 저 곳을 옮겨 다니지도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아버지와 아들은 그 관계에 있어서 아버지께서는 아들 없이 계시지 않으며 아버지는 곳 한 아들의 아버지를 상정하기에 사람이 아들을 믿을 수 있으려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속에서 아버지를 알아야 한다고 말하면서 그 지식은 요한복음 14:6절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클레멘트의 영향을 받은 오리게네스는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지성과 존재를 초월하시는 모든 실재의 원천과 목표이신데 그는 단자로서 그만 엄격히 하나님( 자존하신 하나님) 홀로 출생하지 않으셨다고 마여 아들은 그냥 하나님이시지 그 하나님이 아니라고 진술한다.
요한은 하나님이 빛이시라고 하며 바울은 성자를 영원한 빛의 광채라고 한다. 그러므로 빛에 광채가 없을 수 없듯 성자가 존재하지 않았을 때가 있다고 어찌 말하겠는가? 그것은 진리가 존재하지 않은 때가 지혜가 존재하지 않은 때가 생명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계시지 않았던 때가 없었다. 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에 사과해야 한다. 이런 단어들은 일시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단어들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게 사용되면 모든 시간을 초월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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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게네스는 요한이 말씀에 관사를 붙인다고 한다. 그런데 하나님이라는 성호에는 어느 때는 관사를 붙이고 어느 때는 생략한다고 한다. 즉 하나님이란 성호를 절대 존재 곧 만물의 창조자에게 적용할 때 관사를 붙이고 말씀을 하나님으로 명명할 때에는 생략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바탕으로 “성자는 하나님과 함께 계심으로 하나님으로 남는다. 그러나, 하나님과 함께 계씨지 않았다면 이러한 지위를 얻지 못하였을 것이며 또 아버지의 존재의 깊이를 끈임 없이 보지 않았다면 하나님으로 남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리하여 오리게네스는 아들을 하나님으로 호칭하긴 하지만 결과적으로 아들이 그의 신성인 측면에서 ‘아버지와 비슷하다.’고 함으로써 사실상 동일실체를 부인한다.
또한 오리게네스는 성자가 하나님의 선의 형상이지만 그 선 자체는 아니라고 보는 것이 옳다고 하였으며 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므로 그 증표에 의해 하나님이시지만 그리스도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아는 것” 은 아니라고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는 오리게네스가 성자는 완전하지 못하며 하나님에 의해 완전하여 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을 살펴볼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나오게 된 오리게네스의 성자사상이 몇 가지가 있는데 성자의 종속에 대한 사상과 로고스와 예수의 연합 그리고 “하나님 - 사람”에 관한 것이 있다.
2. 성자 종속에 관하여
오리게네스의 기독론은 종속론으로 유명하다. 물론 성부와 성자가 본질 상 차이가 있다는 것은 아니나 아들은 아버지에게 종속한다는 것인데 오리게네스의 이론 가운데 이 기독론이 이해라기 곤란한 것이 되고 있으나 그것은 동방교회의 삼위일체론의 경향을 만든 것이다.
“영원한 로고스는 신적본질에서 영원히 발생하시는 분이고 창조된 분이 아니다. 그리하여 그는 유한하지 않다. 그러므로 그는 성부와 동일한 본질을 가진다.” 이리하여 오리게네스에게서 비로서 “성부와 동일 본질” 이란 말이 생기게 되었다. 그는 영원한 로고스이지만 성부에 비하면 낮은 분이시니 그 까닭은 성부만이 기원이 없으시기 때문이다. 즉 성부는 나신 적도 없으시나 성자는 독생자로 나신 때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분이고 하나님은 지존자시지만 성자는 성부에게서 나온 하나님이다. 성자는 하나님의 본성과 본질의 사진이지만 하나님 자신은 아니라고 오리게네스는 생각한다.
이제 그는 성자가 또 다른 모양으로 성부에게 종속하고 복종하는 것을 말한다.
즉 만물이 회복할 때 성자가 그 회복한 만물과 함께 성부에게 종속하게 된다는 것이다. 지음을 받은 만물은 여러 가지 인간의 상호협조와 지도를 받아서 살지만 결국 같이 피조물이기 때문에 구원을 받을 길이 없다. 그리하여 피조물이 구원을 받는데 창조주가 친히 나타나야 한다. 그가 나타나면 피조물을 도와서 순종의 훈련을 회복시키시며 또 지배하는 훈련을 회복시켜 주신다. 왜냐하면 이 복종의 훈련이 무너지고 무시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훈련을 회복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이며 지혜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비록 하나님의 영광 중에 계셨지만 세상에 몸을 입어 스스로 순종하는 종의 형상을 취하여 죽기까지 복종하여 복종을 통하지 않고는 구원을 얻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 복종을 가르치게 된 것이라고 한다. 또 지배하는 세력들도 참으로 지배하는 훈련을 잊어버리고 있던 것을 다시 회복시켜 주신다. 그리하여 그 말씀이 문물을 성취시키는 날에 만물을 성부에게 복종시키며 종속케 하는 동시에 성자 자신도 성부에게 종속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3. 로고스와 말씀의 연합
오리게네스의 기독론에서 이해하기 곤란한 것이 로고스와 예수와의 연합 문제이다. 하늘에서 말씀하신 성자가 땅에서 예수라는 분과 어떻게 만났느냐의 문제이다. 오리게네스는 말씀이 육신이 된 후 하나님의 아들과 예수 사이에는 분리가 없었으며 예수의 영혼과 몸은 특별한 의미로 로고스 즉 말씀과 하나가 되었다고 한다. 이것을 그가 설명하면서 성서를 인용하여 독특한 모양으로 해석하기를 세례 요한이 불식간에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날 것이라고 예언할 때 그를 특수한 몸과 영혼을 가진 분으로 말하지 않고 오직 어디든지 계실 수 있는 분으로 말했는데 즉 “내 뒤에 오실 분이 너희들 가운데 섰으되 너희가 그를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요한이 만일에 하나님의 아들이 오직 볼 수 있는 예수의 몸으로 그 곳에 계셨을 때만 그곳에 나타나셨다고 생각하였더라면 “너희 가운데 섰으되 너희가 그를 알지 못하느냐?”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또 오리게네스는 예수의 말씀을 인용하여 “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하신 것을 보면 하나님의 아들과 예수가 분리된 것으로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신 말씀은 반드시 예수의 몸 안에만 제한되어 있는 것도 아니며 또한 그렇다고 해서 그 말씀이신 성자가 예수와 분리되어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말씀, 즉 성자가 육신이 되신 후에 특별한 모양으로 예수의 영혼과 몸은 그 말씀과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오리게네스는 이 연합을 성서를 인용하여 증명하기를 주와 합하는 한 영이라고 했다.
이러한 그의 기독론은 신학적의미로 보면 양자론과 비슷한 인상을 준다. 즉 하나님의 로고스 곧 그의 독생자인 말씀이 지상에 있던 예수라는 사람을 택하여 그의 영혼과 몸과 연합하였다는 것이다.
4. “하나님 - 사람” 에 관하여
이 말을 처음 쓴 사람은 오리게네스이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성 즉 하나님이면서 사람이라는 표현을 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서방의 라틴 신학자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이성의 교리를 생각해 내지는 않는다. 그는 이 용어와 사상을 가지고 그의 독특한 철학의 설명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삼는다. 하나님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존재의 독특한 가치는 그가 하나님의 완전한 현현을 구체적으로 계시하였다는 것만 아니고 더 나아가서 그는 인간의 영도 점점 전적으로 신적인 것으로 되어 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다. 로고스가 육신을 입었을 때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본래의 통일의 회복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오리게네스는 이 성육신의 사실을 통하여 전 영계가 다시 신적으로 되어질 가능성을 보고 동시에 그것을 갈망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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