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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Re:창세전 선택과 하나님의 형상에 관한 소고 /이광호목사님

baromi 2008. 4. 3. 07:54

창세전 선택과 하나님의 형상에 관한 소고


이광호(Ph.D)


1. 서론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을 믿는가?1) 이에 대해서는 신학적으로 다양한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2) 그런 형편 가운데서 대다수 한국 장로교인들은 칼빈주의의 창세전 선택 교리를 고백하는 동시에 알미니안 주의를 현실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실정이다.3) 이는 하나님께서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백성을 선택하신 직접적인 기록(엡1:4)에 의존하는 한국교회의 보수적 성향과 일반 교인들의 이웃에 대한 종교적 관용성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신학자들은 창세전 선택과 예정교리를 무시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그 이유는 성경이 그에 대해 모호하게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이다.4) 종교다원주의 사상이 기승을 부리고 있는 시대에 하나님의 교회는 그에 대한 신중한 신학적 확인을 해야할 필요가 있다. 그에 대한 성경적 명백한 근거가 제시되고 있다면 우리는 그 말씀을 의존해야만 한다.   

  이런 신학적 논의를 할 때 우리는 먼저 어느 시대 어떤 형편에 살고 있는가 하는 자신의 외적인 상황을 배제할 필요가 있다. 즉 한국의 다종교 사회에서 불신자들과 뒤섞여 생활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적 배경 가운데서 형편에 따른 신학적 접근을 하려해서는 안된다. 만일 그렇게 되면 21세기의 정황과 다양한 철학사상의 유입으로 인한 신학적 굴절을 피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의 구원과 관련된 다양한 견해들이 제시되고 있는가? 모두가 성경의 가르침을 따른다고 하는데도 다양한 주장이 나올 수밖에 없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 가장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는 신학자들의 성경에 대한 해석상의 자세이다. 즉 하나님 중심의 성경해석인가 아니면 인간 중심의 해석인가 하는 문제에 달려 있다. 성경해석은 항상 진리의 관점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인간 중심의 윤리적 해석을 해서는 안된다. 시대에 따라 변하는 인간의 윤리는 결국 인간의 타락한 사고 속에서 진리를 잠식해 가게 된다.5) 성도는 인간의 형편을 고려하여 성경을 해석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순수하게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은 구원과 직접 연관되는 문제이다. 하나님은 과연 누구를 무슨 이유로 구원하시려는 것일까?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창1:26)으로 인한 하나님의 자기 백성에 대한 영원한 뜻과 관련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거룩한 뜻과 작정에 따라 창조를 구상하셨으며 그로 인한 영광의 세계를 염두에 두셨음이 분명하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자기형상을 닮은 인간을 창조하셨다. 그러므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예정과 창조, 자기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을 통한 영원한 세계를 구상하셨으며, 타락을 조장한 사탄의 개입에도 불구하고 메시아를 통한 심판 및 영원한 영광의 회복을 예지 가운데 구상하셨던 것이다. 

  필자는 이 글에서 창세전에 선택받은 하나님의 자녀와 그렇지 않은 자를 구분하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그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영역이며 인간들이 규정지을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성경의 교훈을 배경으로 하여 주제와 관련된 원론적인 의미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섭리적 계획과 하나님의 백성의 배타적 특권을 이해하게 되기를 바란다.  


2. 창세전 선택과 다양한 이론들

   우리는 기본적으로 성경의 교훈을 따라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을 믿는다.6)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선택하신 자기 백성과 더불어 영원토록 함께 거하실 것을 작정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목적은 죄로 말미암아 멸망에 빠진 ‘자기백성’(마1:21)을 구원하시기 위함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이미 인간역사 가운데 존재할 자기 백성을 구원키로 작정하셨으며, 처음부터 유기할 인간들을 택자들로부터 선을 그어 분리시킨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유기의 원인자가 되므로 하나님을 죄의 조성자로 만들게 되는 어리석음에 빠질 우려가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1:28)고 하신 창세기의 기록은 타락하기 전의 아담과 하나님의 택자인 ‘자기백성’에게 주신 말씀이다. 즉 범죄한 모든 인간들에게 허락하신 말씀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의 원래의 뜻은 택한 자기 백성들이 피조세계를 다스리며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통치권을 행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타락함으로써 사탄의 권세 아래 놓이게 된 인간들(엡2:2)은 모든 것을 상실당하여 원래의 상황이 뒤엉키게 된 것이다.

  선택할 자들과 유기할 자들 사이를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미리 선을 그어 양분하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7) 만일 인간이 범죄하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으로 창세전에 선택한 자기 백성을 피조 세계인 지구상에 존재케 하려 했을까 하는 문제는 창조주 하나님만 아시는 비밀이다. 그러나 아담이 하나님을 배신하고 떠남으로 인해 모든 인간들은 여인의 분만을 통해 태어나게 된다. 여기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여인을 통한 인간분만은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라는 사실이다. 즉 인간이 이 세상에 출생하는 것 자체가 심판이 아니라 여인의 자궁을 통해 태어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라는 것이다.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창3:16) 라는 창세기의 기록은 그에 대한 분명한 증언이다. 이 말씀은 인간이 범죄하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 다른 방법으로 자기 백성을 허락하셨을 것임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설령 인간이 범죄하지 않았어도 하나님께서는 선택한 자기 백성을 피조 세계에 보냈을 것이며, 그 때는 여인의 자궁을 통한 분만이 아닌 다른 방법이 있었을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인해 인간은 육체적 생식력을 갖추게 된다. 즉 인간의 육체적 생식력은 죄로 말미암은 것이다.8) 우리는 여기서 매우 민감한 문제에 접근하게 된다. 모든 인간이 여성을 통해 출산하게 되지만 그들 모두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9) 그들 중에는 하나님의 선택받은 자녀들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선택과 무관한 자들도 있는 것이다.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죄로 말미암아 멸망에 빠진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의 선택 여부와 무관하게 일단은 사탄의 수하에 놓이게 된다는 사실이다.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이건 아니건 간에 모든 인간들은 죄 가운데서 출생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분명히 유념해야 할 점은 모든 인간이 멸망에 처하게 된 원인이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사탄의 궤계에 의한 것이라는 점이다. 의로우신 하나님은 결코 죄의 조성자가 될 수 없으며 사악한 사탄이 죄의 조성자인 것이다. 거룩한 하나님께서는 그 속성상 결코 죄의 조성자가 될 수 없다.10)

  창세전 선택설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는, 하나님께서 임의로 택자와 불택자를 구분하셨다는 생각이다. 이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선택을 배경으로 한다. 즉 하나님께서 선택할 자와 유기할 자를 창세전에 절대적인 자기 주권에 따라 임의로 구분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인간이 범죄하기는 커녕 생기기도 전에 그런 임의적 분류를 한 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성품에 비추어 볼 때 공평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해 볼 수 있다.11) 범죄 이전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 이론을 따르게 되면, 하나님에 의해 유기된 자들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분류에 따라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죄의 조성자가 될 수 있으므로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이론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후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 일부 백성을 선택하셨다는 주장이 있다.12)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 중앙에 선악과를 두시면서 인간의 타락 가능성을 보았으며 그로 인해 미래에 존재하게 될 인간들 중 일부를 선택하시고 일부는 유기하셨다는 것이다. 이 역시 개별인간이 출생하지 않았을 뿐 더러 타락하기도 전에 선택과 유기를 했다는 점은 공의로운 하나님의 속성에 조화되지 않는다. 

  그리고 아담이 범죄한 후 하나님께서 택할 자와 유기할 자를 정하셨다는 주장이 있다. 인간이 범죄하지 않아 아직 죄가 존재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누구는 선택하고 누구는 유기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에 비추어 볼 때 논리상 인정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아담이 타락한 후라 할지라도 여전히 태어나지도 않은 개별 인간들에 대해 일부를 선택해 자기 백성으로 삼고 다른 일부는 유기했다는 점에 문제가 있기는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선택설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신학자들은 행위구원을 주장하며 구원은 하나님의 선택이 아니라 인간의 삶과 행동에 달려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이 가장 공평하다는 것이다. 선하게 산 사람들은 구원을 받을 것이며 악하게 산 사람들은 버림을 받는다는 것이다. 오늘날 다수 신학자들은 차라리 이것이 선택설 보다는 공평한 입장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성경의 가르침보다 인간의 이성을 중시하는 인본적인 사고일 따름이다. 

  나아가 인본주의 신학자들은, 창조주 하나님이 결국 모든 인간들을 궁극적으로 구원할 것이라 주장한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라는 논리이다.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한다는 성경의 기록들을 근거로 한 주장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성경에 대한 기본적인 오해 때문에 나타나는 양상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을 구원하시고자 원하는 것이 아니라 창세전에 선택하신 ‘자기백성’을 하나도 빠짐없이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한편 영혼멸절설을 주장하는 신학자들도 더러 있다. 하나님은 멸망받을 자들을 영원토록 고통에 빠트리는 잔인한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의 견해에 따르면 구원받은 자들은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복락에 들어가지만 그렇지 못한 인간들의 영혼은 멸절되어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들의 견해는 어떤 의미에서 창세전 하나님의 자기 백성만의 존재 및 선택과 연관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즉 하나님의 백성 아닌 자들에 대한 불필요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이론은 성경적이지 않으며 우리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이론이다.  

    

3.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과 생명책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과 ‘범죄한 아담의 형상’에 관한 이해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1:26,27).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아담을 창조하셨다. 여기서 아담은 개인의 고유명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복수적 개념을 가지고 있다.13) 이는 다수의 아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 아담 안에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선택하신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나아가 아담이 범죄함으로 인해 불택자들도 그 가운데 포함되게 된다. 그것은 전적으로 죄로 말미암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형상이란 과연 무엇인가? 과연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는가? 아니면 아담이 타락한 후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상실했는가? 인간의 자유의지가 하나님의 형상인가? 다른 동물이 가지지 못한 인간의 인격이 곧 하나님의 형상인가? 다수의 신학자들은 모든 인간은 타락한 상태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형상을 어느 정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칼빈은 지식, 의, 거룩 등이 하나님의 형상이므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말한다.14)

  그렇지만 완벽한 하나님의 형상은 범죄한 인간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드러난다. 성경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고후4:4; 히1:3)이라고 말한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 편지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창세전부터 하나님의 형상이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골1:15) 라고 함으로써 그리스도는 창세 전부터 존재하신 완벽한 하나님의 형상이었음을 말한다. 이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무관한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 점에 관해서 주의깊게 살펴보아야 할 본문은 야고보서의 기록이다. 야고보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을 저주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있다: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약3:8-10). 이는 어떤 인간도 저주해서는 안된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해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 속의 신앙인들이 얼마나 강한 저주의 말들을 쏟아내었는지 잘 알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유대인들에게 ‘독사의 자식’(마12:34), ‘마귀의 자식’(요8:44), ‘개, 돼지 같이 부정한 인간들’(마7:6) 등 극단적인 용어들을 사용하시며 저주를 쏟아 부으셨다. 이에 대해서는 구약의 선지자들이나 신약의 사도들도 동일한 자세를 견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고보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에 대한 저주를 금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이다.  

  한편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도록 예정하셨음을 말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선택하신 자들로 하여금 완벽한 하나님의 형상인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예정하셨음(롬8:29)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또한 바울은 아담이 그리스도의 모형(롬5:14)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서 아담은 타락하기 전의 아담을 말한 것이며 타락후의 아담을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아담에게는 타락후에도 하나님의 형상이 관계적으로 잠재되어 있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직접 창조하신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음을 증거하고 있다(창5:1). 그런데 우리가 주의 깊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아담과 하와를 통해 출생한 모든 인간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느냐 하는 점이다. 범죄한 아담의 자손 가운데는 하나님의 형상과 타락한 아담의 형상을 동시에 지닌 자들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형상없이 범죄한 아담의 형상만 닮은 자들이 있다. 하나님의 형상 곧 그리스도의 형상과 아담의 형상을 동시에 지닌 자들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택하신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함을 받지 않은 사람들은 범죄한 아담의 형상만 닮았을 뿐 선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닮지는 않았다. 즉 불신자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전혀 존재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15) 이는 하나님의 형상이 그리스도와 연관이 있는 자들에게만 있는 것과 대비되는 개념이다.

  창세기 9:6에는,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Whoso sheddeth man's blood, by man shall his blood be shed: for in the image of God made he man:KJV)고 기록되어 있다. 이 말씀은 모든 인간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다고 말하는 것인가? 그러나 이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 사람 아담을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대로 지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씀에서 유추되는 것은 아담의 몸에서 태어난 모든 인간들은 아담의 형상을 닮은 인간들을 죽여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16) 창세기 9장 앞부분에서 짐승의 고기를 피채 먹지 못하도록 금하고 있는 것은(창9:4) 하나님께서 모든 생명의 근원이 됨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선택하신 자녀들은 모두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피조물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지 않고 영원토록 멸망 받아야만 할 자들을 택자들로부터 미리 따로 구분함으로써 유기된 인간들을 두기로 작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담이 타락한 후 하나님의 택함받은 모든 백성들은 오직 그리스도로 인해 참 생명을 허락받았다. 창세기3:15의 ‘여자의 후손’만이 마귀가 조성한 죄의 굴레로부터 하나님의 백성을 구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시대에 있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가진 자들만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완벽한 신인 동시에 죄없는 완벽한 인간인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으면서 동시에 범죄한 아담의 형상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타락으로 인해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 인간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그 형상을 부여하신 것은 아니다. 즉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이 무(無)인 상태에서 창조적 유(有)를 제공한 것이 아니라 택자들에게는 타락한 상태에서도 하나님의 형상이 관계적으로 잠재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즉 소명과 칭의, 중생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상태에서도 택자들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관계적으로 잠재해 있다. 이는 인간의 완전타락 이론을 전혀 손상시키지 않는다. 즉 하나님의 형상을 잠재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택한 백성이라 할지라도 완전히 타락하여 전적 무능한 상태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타락으로 인해 전적 무능해진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의 부르심의 과정을 통해 완벽한 하나님의 형상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된다.17) 즉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들에게는 아담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관계적으로 존재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끊어졌으며 그 관계가 그리스도로 인해 온전히 회복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에는, “예수께서 가라사대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 나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요8:42)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형상과 연관되어 설명될 수 있다. 즉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잠재되어 있다면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나를 알아볼 것이다. 그러나 너희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아예 없으므로 나를 알수 도 없고 사랑할 수 없다’는 의미인 것이다.18)  

  인간은 하나님의 선택 가운데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며 동시에 그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속해야 한다.19) 그것이 원래 하나님께서 이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며 인간의 존재의의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인간은 창세전 하나님의 선택을 통해 구속받은 자기 백성에게 제한된다. 이는 칼빈이 말하는 제한구원과 직접 연관되는 개념이다.

  아담의 타락후, 선택받은 자들에게 조차 하나님의 형상이 뿌리 채 완전히 파괴되고 제거되어 더 이상 어떤 흔적도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견해에 필자는 동의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에게는 전적으로 타락한 후에도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사라져 없어진 것이 아니라 여전히 그 속에 관계적으로 잠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택한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상실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가운데 그것이 잠재해 있으며, 참된 하나님의 형상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택자들은 아담의 범죄로 인해 타락의 상태 가운데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기다리는 가운데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을 잠재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이 없는 상태에서 타락한 아담의 형상만을 이어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자연인이다. 즉 하나님께서 예정하지 않은 불택자들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 타락한 아담의 형상만 존재한다. 이는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녀들이 하나님의 형상과 타락한 아담의 형상을 동시에 보유하고 있는 것과 대비된다. 따라서 불신자들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어진 존재가 아니므로 처음부터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다. 이는 인간 스스로 그에 대한 확실한 증언들을 하고 있다. 즉 하나님의 자녀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음을 잘 알고 있지만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자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처음 사람인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이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선택하신 그의 백성 역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들이었다. 그러므로 타락하기 전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지니고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원활히 교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범죄한 아담의 형상만을 닮은 인간들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 타락한 아담의 형상만을 닮은 자들인 것이다. 즉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녔지만, 하나님의 백성 아닌 자들은 타락한 아담의 형상을 닮은 인간들이다.

  우리가 유의해야할 점은 창세전에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도 아담이 범죄한 이후에는 죄 가운데 태어나게 된다는 사실이다. 아담의 후손인 모든 인간은 아담의 범죄로 인해 죄의 굴레에 빠지게 된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인간들도 전혀 예외가 될 수 없다. 선택받은 자들 역시 아담의 범죄로 인해 전적으로 타락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의 선택여하를 막론하고 아담의 형상을 지닌 인간으로서 동질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첫 번째 아담과 두 번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첫 번째 아담이 범죄함으로써 아담 이후의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의 진노아래 놓이게 되지만, 창세전에 택함을 받아 하나님의 형상을 관계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자들은 전적으로 타락한 아담의 자손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작정된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 예비된 구속의 은총 가운데 살아가게 된다. 그것은 창세전에 확증된 하나님의 영원하신 경륜에 의한 것이며 인간의 자발적인 선행이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다.      

  한편 두 번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는 완벽한 하나님인 동시에 완벽한 인간이다. 그는 완벽한 하나님의 형상을 지녔을 뿐 아니라 하나님 자신으로서, 타락한 아담의 자손이면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자기 백성’(마1:21)을 구원하시기 위해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 ‘자기 백성’은 이미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택하신 자기 백성이자 하나님의 형상을 잠재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백성인 것이다.

  우리는 이제 아담이 타락한 후 출생한 모든 인간들은 ‘마귀의 자식’이었는가 하는 점을 주의 깊게 고려해 보아야 한다. 여기서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담이 타락한 후에 출생한 모든 인간들이 마귀의 자식이었다고 할 수 없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들은 한번도 마귀의 자식이었던 적이 없다. 단지 마귀의 손아귀에서 진리 안에서의 자유를 완전히 박탈당한 채 신음하며 살아가던 기간이 있었을 따름이다.

  본질상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는 하나님의 편에서 구분된다. 이는 인간들이 외견상 구별하여 쉽게 말할 수 있는 영역은 아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잠재적으로 보유한 채 아담의 형상을 지니고 있는 인간들이나 타락한 아담의 형상만을 지닌 인간들은 공히 인격적 성질상 사탄의 지배를 받는 동일한 인간들이다. 문제는 선택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담의 범죄로 인해 마귀의 통치 아래 놓여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사탄의 통치 영역 아래 놓여 있다는 관점에서 보아 모든 인간들은 동일한 위치에 있다. 그러므로 부패한 상태에서는 더 이상 하나님의 기쁨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죄에 대한 심판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하나님의 자녀의 자리로 복귀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잠재적으로 지닌 동시에 타락한 아담의 형상을 이어받은 자들은 십자가 위에서 죄와 타락의 문제를 해결하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령으로 인해 그의 형상을 회복하게 된다.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그 때부터 마귀의 형상으로 돌변한 것은 아니다. 단지 마귀의 힘에 억눌려 있을 따름이다. 신학자들 중에는 요한복음 8:4420)를 인용하면서 하나님의 형상이 마귀의 형상으로 바뀐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21)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8장에서 유대인들에게 마귀의 자식이라 말씀하신 것은 그들이 원래부터 마귀의 자녀였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담이 마귀의 유혹으로 인해 타락함으로써 모든 인간들에게는 타락한 아담의 형상이 존재하게 되지만, 하나님의 형상은 단지 창세전에 택함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만 손상된 채 관계 속에 잠재해 있게 된다.

  또한 성경에는 생명책에 관한 언급이 많이 나타난다. 그렇다면 생명책은 어느 시기에 기록된 것인가? 우리는 생명책이 기록된 시기가 곧 하나님의 선택의 시기와 연관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역사 가운데 생명책을 끊임없이 기록하고 계시는가? 혹은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행위를 보고 구원여부를 결정하며 생명책에 이름을 더하시거나 삭제하시면서 활동하고 계시는가? 우리는 그렇게 생각할 수 없다. 생명책은 이미 창세전에 작성된 것이다.22)

  

4. 하나님의 예정과 작정에 대한 이해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 및 아담의 형상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하나님의 선택개념에 접근해야 한다. 그리고 창세전 기록된 생명책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하나님의 예정을 이해해야 한다. 생명책에 기록된 하나님의 자녀의 수는 창세전에 확실하게 확정된 수이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그 수를 더하거나 뺄 수 없다.23)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144,000과 무리(계7:3,4,9;14:1)는 그것을 암시해 보여준다.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아담이 타락하기 전 아담에게 속한 무리이며, 범죄한 후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관계적으로 잠재되어 있어 그렇지 않은 자들과 구별된 무리이다. 그들은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사역을 이룩하신 후 타락한 아담의 형상을 떨쳐버리고 원래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자들인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작정은 하나님의 자기 영광과 직접 연관된다. 비단 우리가 이해하는 바와 정확한 의미일치를 이루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명확하다. 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에서는 ‘인간의 존재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목적 역시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목적은 일차적으로 인간을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기백성인 인간을 구원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은 구원에 관련된 문제이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에 이미 최종적인 종말과 완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하나님의 천지창조와 자기 백성에 관한 계획은 천지가 창조되기 전에 이미 작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즉 하나님의 모든 계획은 이미 그의 예정 속에 포함된 것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아울러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을 닮은 인간과 더불어 완성될 영광의 세계를 섭리중에 구상하고 계셨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27,28).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면서 이미 이 땅에 자기 백성을 두실 것을 작정하고 계셨으며 그 백성은 창세전 생명책에 기록하여 선택하신 자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 인간에게 복을 주시며 땅이 백성으로 충만하게 될 것을 말씀하고 계신다. 이는 인간이 단순히 땅에 가득하여 피조세계를 다스리는 것을 말하는 것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예정된 뜻 가운데서 주어진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영원한 복을 의미한다.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모든 인간은 혈육적으로 아담과 하와의 후손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백성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모든 인간들은 범죄한 아담과 하와의 후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택하신 자기 백성을 그 죄악이 가득한 세상으로부터 구원하시고자 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세전 구원을 예정하실 때와 아담을 창조하실 때 자기 백성을 염두에 두셨으나, 아담의 후손이 번성해 가는 과정에서 하나님과 무관한 백성이 태어나게 된다. 이는 창세기6:2의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에서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다. 생명책에 기록된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이 선택하신 백성이지만, 타락한 아담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특정 인간들을 유기하고자 하신 것이 아니라 타락한 아담과 하와에게 주어진 육체적 생식력을 통해 태어난 인간들에 대해서는 사탄이 영원한 멸망에 빠뜨리고자 하는 것이다.24) 이는 하나님께서 특정인들을 멸망에 빠뜨리기 위해서 유기하신 것이 아니라 사탄이 아담의 자손들을 멸망에 빠뜨리기 위해 공작을 한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가 아닌 아담의 형상만을 닮은 처음 자손 ‘가인’의 이름이 ‘위조’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음에 대해 유의해야 한다.25) 이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위조로서 마귀가 타락한 아담에게 부여한 형상과 통하는 개념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일부 사람들에 대해 의도적으로 유기하신 것이 아니라고 이해해야 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창세전부터 유기한 자들이 따로 있다고 한다면 이는 하나님이 죄의 조성자가 되는 난제에 부딪치게 된다. 현대신학의 포용성은 자칫 잘못하면 하나님을 죄의 조성자로 만들게 되는 오류에 빠지게 된다.26) 우리가 분명히 인식해야 할 점은 하나님이 결코 죄의 조성자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기록된 생명책에 따라 자기 백성을 죄 가운데서 불러모으시며 달리 일부 인간들을 유기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인간은 과연 하나님으로부터 왔는가? 아니면 하나님으로부터 온 인간과 하나님과 무관한 인간 두 종류의 인간이 있는가? 선택과 유기를 말한다해도 결국 지구상에는 두 종류의 인간이 존재함을 이야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선택을 받은 성도들은 창세전부터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결코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 부를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과 관계없고 하나님은 처음부터 그들의 아버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잘 이해해야 할 점은 본질상 두 종류의 인간이 존재한다는 신학적 관점이다. 이는 사실 전혀 새로운 주장이나 신학적 이론이 아니다. 모든 인간들은 타락한 아담의 자손으로서 외형상 동일한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나 실상은 구원받을 자와 구원받지 못할 자로 나누어지며,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로 구분된다. 성경은 인류를 두 부류로 구분한다. 신자와 불신자, 혹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과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이다. 불신자는 종교를 가지고 있든 무신론자이든 아무 생각도 없든, 모두 죄와 사탄에게 종속되어 있다.27) 인간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씨와 마귀의 씨가 구분되어 있는 것이다.28) 우리가 이에 대한 용어를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상 성경에는 그에 대한 다양한 가르침들이 나타난다. 천국과 지옥을 구분하며, 영생과 영멸을 구분하는데서 이미 그에 대한 의미가 확정되어 있다.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담으로 말미암는 인간의 범죄에 대해 미리 알고 계셨다는 사실이다. 더 정확하게는 인간의 연약함과 사탄의 유혹으로 인한 인간의 범죄에 대해 미리 알고 계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에 대한 구원은 결국 하나님 자신으로 말미암는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논할 때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만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게 된다는 점은 잘 이해해야 할 내용이다.

  

5. 창세전 선택의 성경적 근거와 관련 성경본문에 대한 이해

  (1) 구약성경의 교훈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주의 백성들에 관한 창세전 선택과 하나님의 형상없이 타락한 아담의 형상만 소유한 자들에 관련된 성경의 기록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창세기의 앞 부분에는 아담이 범죄한 후 가인과 아벨의 생명을 건 다툼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문제와 연관된 사건으로서 이는 전체 구속사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기록이다.  

  가인은 누구인가? 가인은 아담의 몸에서 출생했지만 처음부터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사탄의 자식이었다. 이는 아벨이 아담의 몸에서 태어났으나 하나님의 자녀였던 점과 대비된다. 그러므로 아담 이후 가인과 아벨은 본질적으로 서로 대치되는 관계에 있는 자들이었다. 아벨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였지만 가인은 원래부터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자였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기쁘게 받으신 것은 그가 하나님의 자녀였기 때문이며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것은 그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벨은 동물제사를 드리고 가인은 곡물제사를 드렸기 때문이라는 해석은 잘못된 주장이다.29)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본질적인 것은 인간이 바치는 제물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택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자기 자녀였던 것이다. 가인은 처음부터 하나님께 속한 자가 아니었으므로 하나님을 방해하는 자였다. 그는 메시아의 오시는 통로를 차단하려는 자로서 사탄에 속한 자였다. 그는 사탄의 사주를 받아 여자의 후손(창3:15)을 보내시기로 약속하신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는 자였던 것이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은 단순한 살인사건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여자의 후손’의 출생을 가로막는 사악한 행위로 보아야 한다.   

  가인은 원천적으로 하나님의 선을 행할 수 없는 자였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창4:6,7)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여기서 가인의 행위적 선의 가능성을 보는 것이 아니라 가인은 진정한 선을 행할 수 없는 자임을 생각해야 한다. 가인은 상대적으로 아벨보다 못한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께 열납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가인이 바치는 어떤 제사도 받지 않는 분으로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가인이 아벨을 살해한 사건은 순간적 판단착오로 인한 것이 아니며 그것은 사탄의 뜻에 따른 것이었다. 아벨의 혈통을 통한 메시아의 길을 차단하는 가인의 살인 행위는 곧 사탄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가인을 죽이지 못하도록 하셨다. 즉 가인의 생명을 보호하고자 하신 것이다(창4:14,15). 그렇다면 가인의 생명이 아벨의 생명보다 소중하다는 말인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끔찍한 살인에 대한 엄격한 징벌을 해야만 다시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는 방책이 될 것 같은데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달리 벌을 내리시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하신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은 무엇일까? 거기에는 가인이 이미 하나님과 무관한 사탄에게 속한 자라는 점과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들을 보호하고자 하시는 큰 뜻이 담겨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가인을 살해하려는 문제를 방치했다면 그 이후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에도 엄청난 혼란이 닥치게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생명을 박탈하지 않은 것은 가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백성 때문임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사실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노아홍수 이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창6:2)고 기록된 구절에서,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의 구분은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이란 ‘약속의 자녀’라는 말과 상통하는 개념이며, ‘사람의 딸들’이란 ‘육신의 자녀’란 의미이다.30)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하나님의 아들들과 하나님의 형상을 전혀 닮지 않고 타락한 아담의 형상만을 지닌 사람의 딸들에 관한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의 혼합은 하나님의 아들들에 대한 정체성을 파괴하고자 하는 것임과 동시에 메시아 오심의 통로를 둔화시키고자 하는 마귀의 술수였다. 그것은 단순한 사회적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죄악에 빠진 것을 보시고 한탄하셨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 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창6:5-7). 여기서 죄의 관영함이란 일반적인 사회적 범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을 방해하려는 세력이며, 하나님께서 땅위에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하신 것은 자연적인 생식을 통한 간접창조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자연 생식을 통해 허용하신 피조세계의 생명체로서 인간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영원한 심판의 대상으로 삼은 인간은 창세전에 자기 자녀로 선택하신 그 자녀까지 포함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또한 성경은 이삭이 ‘아브라함의 독자’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우리가 아는 것 처럼 아브라함에게는 아들이 여러 명 있었다. 하갈을 통해 얻은 이스마엘이 있었으며, 이삭을 낳은 후에도 여러 자녀들을 두었다. 그러나 성경은 이삭만을 아브라함의 유일한 독자(獨子)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아브라함의 다른 육신의 여러 자녀들은 배제하고 오직 이삭만을 유일한 약속의 자녀로 부르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이삭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독자라는 점을 매우 강조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22:2),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히11:17).

  사도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편지하면서 이스마엘을 ‘육체를 따라 난 자’로 이삭을 ‘약속의 자녀 곧 성령을 따라 난 자’로 구분(갈4:23,29)하고 있다. 이는 단순히 영적인 형편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창세전에 이루어진 언약과 연관된 실제적 출생을 의미한다. 나아가 바울은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갈4:28)고 함으로써 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들은 창세전에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삭과 같이 성령을 따라 출생한 약속의 자녀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야곱과 에서를 태중에서 부터 구분하셨다. 그것은 그들의 행위에 따라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에 의한 구분이었다. 태중에 있는 아이들이 일반적인 관점에서 말하는 죄에 대한 인식이 있을 리 만무하고 그들이 범죄행위를 할 수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야곱은 자기 자녀로 인정하시고 에서는 사생자로 이야기하셨을까?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창세전에 택하신 자기 백성인 여부에 따라서 그렇게 하신 것이다. 성경은 선인과 악인이 저들의 행위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시58:3).

  또한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 보아야 할 내용은 성경에 기록된 ‘살인’에 관련된 내용들이다. 성경에는 ‘살인하지 말라’는 명령과 ‘살인하라’는 명령들이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언약의 백성에 대해서 살인을 엄금하셨다. 만일 살인하게 되면 동해보복의 원칙이 적용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 살인을 엄금한 하나님께서 이방인의 가나안 땅 불법 거주에 대해서는 매우 단호하셨다. 그들이 가나안땅에서 순순히 물러가지 않을 경우에는 인정을 베풀지 말고 진멸하고 도륙하도록 명령하셨다(신20:16-18, 참조). 이는 그들을 인간취급 조차 하지 말라는 명령이다. 우리는 살인금지와 살인명령을 동시에 내리고 있는 하나님의 뜻을 신중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인간은 임의적인 판단에 의해 다른 사람을 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통해 자신이 모든 생명의 주인되심을 천명하고 계시는 것이다. 

  

  (2) 신약성경의 교훈

     성경은 전체적으로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를 구분한다. 그것은 약속의 자녀와 육신의 자녀를 구분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약속의 자녀와 육신의 자녀의 구분은 창세전에 이미 결정된 하나님의 뜻에 기초한다. 즉 그것은 창세후에 출생한 인간들의 행위나 다른 조건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창세전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작정에 의한 존재적 설명인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들에 대해 마귀의 자식이라 단언하셨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요8:44). 이 본문은 하나님의 선택과 무관한 아담의 자손인 인간의 출생을 포함하여 말하고 있다.31) 요한은 그의 서신에서도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에 대해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요일3:10). 사도바울 역시 이에 대해 분명하게 언급한다: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롬9:8).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태복음 13장에서 하나님의 아들과 마귀의 자녀들에 대하여 알곡과 가라지 비유로 말씀하신 뒤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그것을 설명해주셨다: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추수때는 세상 끝이요 추숫군은 천사들이니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끝에도 그러하리라”(마13:38-40).

  주님께서는 이 비유의 말씀에서,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악한 씨 곧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며 그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즉 하나님의 원수인 마귀가 세상에 자기 아들들을 심어놓았다는 것이다.32)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할 부분은 이 말씀이 비유가 아니라 비유에 대한 주님의 해석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주님께서 비유를 주시고 그에 대해 해석하시는 의미를 주의 깊게 이해해야만 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에 관련에 많은 언급을 하고 있다. 특히 에베소 교회에 편지를 보내며 교회에 관련된 교훈을 주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이미 창세전에 예정되었음을 되풀이하여 언급하고 있다(엡1:4,5,11; 3:11). 특히 에베소서 4:22-24에서는 그 점을 명확하게 하고 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4:22-24). 여기서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부분은 22절의 “구습을 좇는 옛 사람”과, 24절의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새사람”33)이다. 한글 개역성경의 ‘하나님을 따라’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로 번역되는 것이 옳다. 아담의 범죄로 인해 하나님의 형상이 아담의 형상에 짓눌려 관계적으로 잠재된 상태에 있었으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작정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즉 하나님과 전혀 무관한 상태에서 새로운 관계가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끊어진 관계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회복되는 것이다. 바울은 또한 로마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면서도 하나님께서 창세전부터 미리 알고 계신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모든 것을 작정하고 계셨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29,30). 하나님께서는 인간들 중 미리 알고 있던 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친히 부르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을 의롭다 칭하시며 영화롭게 하신 것이다.

   

6. 결론

   우리는 한국교회의 창세전 선택구원 교리에 관한 이중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칼빈주의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신앙의 원리로 채택하고 있는 한국 장로교회는 더욱 그렇다. 오늘날 상당수 한국 장로교회들은 역사적 개혁주의 신학의 유산인 신앙고백 문서들을 사문화(死文化)시키거나 박제화 하고 말았다. 전통적인 신앙고백을 관념화 한 채 실질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실정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알미니안주의를 이단시하는 칼빈주의를 외견상 표방하지만 실상은 알미니안주의 보다 더욱 심각한 인본주의 사상을 따르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예외없이 모든 것에 제한적인 인간들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하나님의 자녀이면서도 여전히 타락한 아담의 형상을 완전히 벗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죄의 굴레에 빠진 제한적인 인간의 이성이나 경험을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뜻을 다 헤아릴 수는 없다. 인간은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을 통해 그의 경이로운 뜻을 알아갈 따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을 겸손하게 대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경청해 들어야 한다. 역사적 시대와 지역성에 따라 형성된 인간의 이성이나 경험이 배제되는 가운데 기록된 말씀을 통해 성령의 음성을 들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세전 자기 백성의 선택에 관련된 문제는 쉽사리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님을 우리가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성경의 기록을 통해 그의 놀라운 뜻을 겸허한 마음으로 살피는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완벽한 인간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여진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에 참여하게 되는 성도들만이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게 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이 없는 자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전혀 가지지 않은 채 타락한 아담의 형상만 지니고 있을 따름이다.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의 수가 창세전에 확정되었다는 사실이다. 사람이 생겨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생명책에 이미 그들의 이름이 녹명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 생명책은 필요에 따라 첨가되기도 하고 삭제되기도 하는 그런 책이 아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창세전 선택이론의 근간이며 정통 교회의 신앙고백이다. 나아가 성도의 견인문제 역시 창세전 예정 가운데 확증되었음을 깨달을 때 우리의 고백이 더욱 견고해 질 수 있다.34)

  그러나 사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을 미혹하여 죄에 빠뜨림으로써 하나님을 완전히 떠나게 하였다. 지금도 사탄은 그 노력을 지속하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죄 가운데 빠져 헤매도록 끊임없이 미혹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하나님의 백성은 사탄의 미혹에 끝까지 머물지 않는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으로 인해 하나님의 백성의 자리를 회복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인 독자 이삭과 하나님과 무관한 여러 자식들이 출생한 것을 기억한다. 그리고 이삭의 아내 리브가는 한 태중에 하나님의 자녀인 야곱과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에서를 동시에 잉태한 경우를 잘 알고 있다. 나아가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도 혈통적으로 언약의 백성이었으나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자들이 많이 있었음을 기억하고 있다. 그 가운데서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계획을 보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택하신 자기 백성들을 죄로부터 구원하시고자 역사 가운데서 그 경륜을 이루어가고 계신다. 그 경륜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창세전 작정에 따른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천지를 창조하기 전에 이미 선택을 받아 생명책에 녹명된 자들에게 주어진 놀라운 은혜의 선물이다. 하나님의 계획은 창세전에 이룩된 그의 예정과 선택에서 사실상 완료된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앞으로 존재하게 될 모든 인간들을 동일한 선상에 세워두고 어떤 자들은 선택하시기로 작정하시고 다른 어떤 자들은 유기하시기로 작정하여 따로 구분하지는 않았을 것임을 주의깊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아담이 타락한 이후 생식력에 따라 인간들이 번성해 가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경륜이 이루어져 가고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모든 인간은 신, 불신을 막론하고 타락한 아담의 후손으로서 살아가는 동질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창세전에 선택되어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자들과, 타락한 아담의 형상만을 지닌 자들 사이에는 결코 만날 수 없는 궁극적 차이가 존재한다.

  우리 시대는 이전에 없던 극도의 위기에 처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극도의 혼란에 치닫고 있는 것이다. 사악한 인간들이 첨단과학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직접 개입하는 일들이 이미 보편화되고 있는 것이다. 트렌스젠더 및 성전환 수술의 일반화와 최근 세계적인 이슈가 되고 있는 인간배아복제 및 줄기세포와 관련된 문제들은 인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급속하게 요구하고 있다. 

  우리는 결코 쉽지 않은 이러한 신학적 논의를 하면서도 하나님의 크고 무한하심과 인간의 왜소함을 온전히 깨닫는 가운데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리에 굳건히 서 있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22:20). (목회갱신연구원 발표, 2005.6.2)


1) 이에 관한 문제는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사이에 중요한 신학적 이슈가 되어 있다. 칼빈주의 신학에서는 하나님의 전적인 선택을 믿으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는 그에 관해 더욱 분명하게 기술하고 있다; The Westminster Confession, Ⅲ,4.


2) 이승구, “칼빈의 예정론에 대한 고찰”, 조직신학연구, 창간호, 2002 가을ㆍ겨울, 한국복음주의조직신학회, 서울: 살림, 2002, pp.68-83. 참조.


3)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칼빈주의와 알미니안 주의의 차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칼빈주의 5대 교리가 ①인간의 전적 타락과 전적 무능 ②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 ③제한 속죄, 곧 특정적 구속 ④불가항력적인 소명, 또는 은혜 ⑤성도의 견인을 말하고 있는데 반해, 알미니안주의에서는 ①인간은 부분 타락과 자유의지를 통한 자율구원 ②하나님의 조건적 선택 ③모든 인류를 위한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사역 ④성령의 은혜를 저항할 수 있는 인간의 자유의지 ⑤구원을 받았던 자의 구원상실 가능성 등을 주장한다. 현대 한국교회는 전반적으로 알미니안주의에 편승해 있으며, 만일 그렇다면 일부 한국 보수교회들은 정통 칼빈주의자들의 해석에 의해 거짓 고백을 하고 있는 이단교회로 몰릴 수 있다; 최영백, 예정에서 영화까지, 서울: 목회갱신연구원, 2002; “창세전 선택과 인류 전체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보편적 진리의 모순” 정통신학, 제1권, 서울: 해서신학교, 2005, pp.71-98; 문효식, “통일교의 타락론 비판”, 국제신학, 제6권, 서울: 국제신학대학원 대학교, 2004, pp.166-194, 참조.


4) 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G.I.Williamson,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강해, 나용화역, 서울: 개혁주의 신행협회, 1989, p.59.


5) 이광호, “종교적 윤리화로 인한 한국교회의 위기”, 조직신학연구, 제5호, 2004 가을ㆍ겨울호, 한국복음주의조직신학회, 서울:이컴비즈넷, 2004, pp.97-124.


6) 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Ⅲ.5; The Canons of Dort Ⅰ.11; The Belgic Confession, 제16장,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 


7) 유기이론을 받아들이게 되면 은연중 하나님을 죄의 조성자로 만들게 될 우려가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유기한 자들로 하여금 범죄케 했다는 논리가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죄에 대한 하나님 책임론에 빠지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J.Calvin은 1552년 발표한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에 관하여”에서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사상에 의존하여 창세전 선택과 더불어 유기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K.Barth는 J.Calvin의 유기이론에 대해 강한 반기를 들었다. 물론 이런 류의 주장은 이전부터 있어온 것이다. 예정론에 관한 K.Barth의 신학에 심각한 문제가 있지만, 우리의 논의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유기에 관한 그의 주장을 생각해 본다. 그는 1942년 출간된 ‘교회교의학’ Ⅱ.2에서 예정론을 다루면서 유기이론을 부인하고 있다. 아직 인간들이 존재하기도 전에 일부를 지옥에 가두기 위해 의도적으로 유기를 예정한 그런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천명한 것이다. 사랑의 하나님이라면 구원을 위해 모든 사람을 선택했을 것이며 영원한 멸망에 빠뜨리기 위한 목적으로 유기할 자들을 따로 예정할 리 만무하다는 것이다. 그의 신학은 결국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만인구원론을 배경으로 하는 심각한 오류에 빠져 있다. 물론, K.Barth의 유기이론 부인과 필자가 유기이론에 대해 설명하고자 하는 내용은 전혀 다르다. 필자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자들에 대한 창세전 선택이 있었을 뿐,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선택하실 자와 유기할 자를 동일선상에서 따로 구별한 것은 아님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8) Augustine, On Genesis against the Manichees, Ⅰ.ⅺⅹ.30; 라은성, “어거스틴의 신학적 해석학”, 신학적 해석학, 안명준 편, 서울: 이컴비즈넷, 2005, p.78. 참조.


9) 필자는 성도의 혼인을 하나님의 예정에 의한 섭리로 이해한다. 즉 성도의 혼인은 인간의 배우자 선택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다. 만일 혼인에 있어서 배우자 선택 논리가 성립되면 자칫 진화론적 개념에 빠지게 하는 우려가 발생한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혼인과 하나님의 자녀의 출생의 비밀을 창세전 선택과 예정의 의해 이끌어 가고 계시는 것이다. 


10) 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Ⅲ.1.


11) 알미니안주의의 자율구원론이나 만인구원설 등의 이론이 바로 여기서 출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에 대한 잘못된 생각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12) 타락적 선택과 타락후 선택의 신학적 개념은 시간과 역사 속의 사건을 기준으로 한 것이 아니라 창세전에 존재했던 하나님의 예지와 작정 속에 포함된 개념이라 이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사고는 철학적 관념에 머무르는 신학적 사변에 지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13) 유해무, 개혁교의학,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7. p.236, 각주, 275) K.Schilder. 참조.


14) J.Calvin, Commentary of Genesis, 1:26. 그러나 Calvin은 타락후의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녔느냐에 대해 일관성 있는 견해를 보이지 못하고 있다. 그는 경우에 따라 상이한 주장을 한다. Calvin은, 몇 몇 성경주석에서 아담이 범죄하므로 인해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상실했다고 주장하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된 자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됨을 명확히 말하고 있다 (J.Calvin, Commentary, Eph.4:24; ⅡCor.3:18. 참조). 그러나 그는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이 많이 손상된 상태이기는 하지만 모든 인간들에게 남아 있는 것으로 설명한다(J.Calvin, Institutes,Ⅰ.15.4;Ⅱ.2.12;Ⅱ.2.17;Ⅲ.7.6. 참조).


15) Klass Schilder는 Heidelberg Catechism 주석서(Heidelbergsche Cathechismus. vol.Ⅰ, Goes: Oosterbaan & Cointre, 1947, pp.296,297)에서, 하나님께서 Adam을 창조하실 때 자기 형상대로 지었다고 하실 뿐 타락 후에도 하나님의 형상이 사람 안에 그대로 보존되도록 허락시는 것으로 말씀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는 타락한 인류는 더 이상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지 않는 것으로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벌카우어도 그 주장에 동조한다(G.C.Berkouwer, Man: The Image of God, Trans. by Dirk W.Jelema, Grand Rapids: Eerdmans, 1962); Antony A.Hoekema, Created in God's Image, 개혁주의 인간론, 류호준 역, 서울: CLC, 1990, pp.33,34).


16)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경우 사람들을 죽이도록 요구한 경우가 신구약 성경에 많이 기록되어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17) J. Calvin, Commentary of Ephitians4:24; ⅡCorintians3:18. 참조. calvin은 “경건한 사람의 중생이란 고린도후서 3:18에서 언급된 것 처럼 그들 속에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18) Hendriksen, 요한복음8:42 주석; Hendriksen은 이 본문에 대한 최상의 주석은 요한일서5:1(“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이라고 한다. 한편 칼빈은 그의 요한일서5:1 주석에서 ‘사도요한은 참으로 신실하게 믿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에게서 난 자들이라고 정당하게 선포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는 사람은 혈통으로나 육적으로 나지 아니한 사람이라고 사도요한이 복음서(요1:13)에서 밝힌 이유이다... 간단하게 요약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그의 몸에 접붙이셨는데, 이것은 하나님께로 부터 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믿음을 가질 수 없다는 바로 그 이유가 된다.


19) 유해무, 개혁교의학, p.222.


20)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요8:44).


21) 유해무, 개혁교의학, p.255. 참조.


22) 요한계시록13:8,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All inhabitants of the earth will worship the beast-all whose names have not been written in the book of life belonging to the Lamb that was slain <from the creation of the world>); 요한계시록17:8, “네가 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니 땅에 거하는 자들로서 <창세 이후로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한 자들이 이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나올 짐승을 보고 기이히 여기리라”(The beast, which you saw, once was, now is not, and will come up out of the Abyss and go to his destruction. The inhabitants of the earth whose names have not been <written in the book of life from the creation of the world> will be astonished when they see the beast, because he once was, now is not, and yet will come.)


23) 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Ⅲ.4; The Canons of Dort, Ⅰ.11.


24) Augustine, On Genesis against the Manichees, Ⅰ.ⅺⅹ.30; 라은성, “어거스틴의 신학적 해석학”, 신학적 해석학, 안명준 편, 서울: 이컴비즈넷, 2005, p.78. 참조.


25) 최영백, “인류는 타락 이후 두 종류의 인생이었다”, 정통신학, 제1집, 해서신학연구원, 2005. pp.99-125.


26) 한국에서 가장 개혁주의적이며 보수주의적인 신학교를 자처하는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에서는 최근 하나님을 죄의 조성자로 만드는 것에 대한 이단성을 강하게 견제한 적이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교단은 제51회(2001년 9월), 제52회(2002년 9월), 제53회(2003년 9월) 총회에서 연속적으로, 신학부 유사기독교연구위원회에 제출하는 신학대학원 교수회 연구보고서에서 그 점을 분명히 했다.


27) 이정석, “타종교와의 평화와 전도의 사명”, 목회와 신학, 서울: 두란노, 2005년 3월호. 참조.


28) 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Ⅷ.1: “하나님은 그리스도에게 영원전부터 한 백성을 그의 씨로 주사 그의 씨가 되게 하셨고 때가 되매 그로 말미암아 구속받고 칭의되고 성화되고 영화되게하셨다”. 우리가 이 고백문에서 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씨만 자기 백성으로 선택하셨으며 이 세상에는 그리스도의 씨가 아닌 백성이 따로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물론 성경에서 ‘씨’(seed)에 관한 기록을 볼 수 있다(로마서9:9. 참조).  


29) 이광호, “가인과 아벨의 제사”, 교회의 신학적 관심들, 조에성경신학연구원, 2004(2002,초판), pp.47-49. 참조.


30) Keil Delitzsch, 구약주석, 창세기6:2;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이라는 표현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세 가지 상이한 견해들이 있어왔다. 즉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①왕들의 아들들, ②천사들, ③셋 족속이나 경건한 자들이며, 또한 ‘사람의 딸들’이란 ①낮은 서열의 백성의 딸들, ②일반적으로 인류의 딸들, ③가인 족속 또는 경건한 자나 하나님의 자녀와는 대조되는 나머지 인류로 간주된다. 이 세 가지 견해 중에서 Keil Delitzsch는 첫 번째와 두 번째 견해를 비성경적이며, 하나님의 아들들을 천사로 볼 수 없다는 견해를 밝히면서 세 번째 견해를 지지하고 있다.


31) John Calvin은 요한복음8:44 주석에서, “주님은 지금 이미 두 번이나 모호하게 말씀하셨던 바 곧 그들이 ‘마귀의 자녀’라는 것을 더욱 확실히 천명하셨다. 만일 그들의 아비가 하나님의 영구적인 원수가 아니었다면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그렇게 미워 할 수 없었을 것이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William Hendriksen은 요한복음8:44 주석에서, “유대인들이 육체적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은 분명하였다. 하지만 영적으로, 도적적으로 -이것이 문제이거니와- 그들은 ‘마귀의 자녀’였다... 즉 그들은 변함없이 마귀의 소원을 실현하려고 의욕하고 있다(현재 계속법 시제). 그러므로 ‘마귀가 그들의 아비’임이 틀림없는 것이다”고 말한다.


32) Hendriksen, 마태복음13:38,39 주석. 참조.


33) 에베소서 4:24에 대한 한글 개역성경에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번역이 명확하지 않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그러나 한글 공동번역, 표준새번역, NASB등에서는 명확하게 번역되어 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새 사람으로 갈아 입어야 한다. 새 사람은 올바르고 거룩한 진리의 생활을 하는 사람이다”(공동번역).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참 의로움과 참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표준새번역). “put on the new self, which in [the likeness of] God has been created in righteousness and holiness of the truth”(NASB); 이광호, “에베소에 나타난 교회론 고찰”, 성경적인 교회개혁 이론과 실제, 달구벌기독학술연구회ㆍ 영남뉴스앤조이 공동 학술 발표회 자료집, 2005.4.5. 참조. 


34) 칼빈주의 신학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에 따른 성도의 견인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17장 ‘성도의 궁극적 구원’, 제1절에서는, “하나님께서 그 사랑하시는 독생자 안에서 받아들여 그의 성령에 의하여 효과적으로 불러 성화시키신 자들은 은혜의 자리에서 전적으로 아주 타락할 수 없다. 그들은 은혜의 자리에서 끝까지 참아 영원히 구원받는다”고 고백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선택하신 자기 형상을 닮은 백성을 결코 영원한 멸망에 버려 둘 수 없음을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이다.


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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