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목사의 구약성경칼럼(2)
하나님, 보물을 보물되게 하는 보물
보물섬 지도가 이해하기 어려운 암호들로 가득 차 있어 해독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고 하더라도, 어쨌든 지도를 들고 떠나야 겠고, 때로는 펴들고 고개를 갸우뚱거려 보아야 할 일이다.
먼저, ‘하나님’이란 암호를 보자. 현대인들은 이 암호를 풀기 어렵다고 해서 아예 지워버렸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 것도 풀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 없이는 아무 것도 해결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 ‘하나님’이란 암호를 ‘사람의 감정’, 혹은 ‘사람의 신비적 체험’ 등으로 해석해 버린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해석하지 않고, ‘인간’으로 해석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보물을 찾아라
언급한 것처럼, 보물섬 지도는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서 제작되었다. 이 영감이야말로 이 지도를 보물섬 지도가 되게 한다. 영감의 원천이신 하나님은 이제 만나게 될 보물들을 보물되게 하신다. 하나님은 집을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지 않게 하고, 성을 지키는 자의 경성함을 허사가 되지 않게 하신다(시127:1). 보물을 찾느라고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는 것을 헛되지 않게 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이 함께 아니하시면 찾았다 하는 보물도 보물이 아니다. 참보물을 오히려 찾지 못하게 하는 눈가리개요, 속임수요, 그래서 오히려 그것은 저주요, 파일 뿐이다.
그러기에 무엇보다도 우선 ‘하나님’이란 암호를 풀어야 한다. 하지만 이 암호는 가장 난해하다. 인간의 지각과 이해력으로는 풀 수가 없다. 인간 스스로는 하나님에 대하여 아무 것도 알 수 없다는 것이 오히려 진실하다. 이것을 ‘불가지론(불가지론)적 하나님 이해’라 한다.
그러나 더욱 이해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자신을 나타내셔서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들은 하나님을 알 수 없으면서도 알 수 있다. 하나님 당신에 의하여 당신에 관한 것이 알려지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무엇을 알리고, 무엇을 감추시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하나님은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고(사45:15), 감추어진 것은 또한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다(신29:29). 하지만, 숨어계시다가도 자신을 드러 내시기도 하고(출3:1-2), 감추어진 것을 밝혀 주시기도 한다(사48:6-19). 그렇게 그가 당신을 스스로 밝히시는 것은 관념의 세계에서가 아니라, 시공간의 역사 가운데서이고, 그것도 점진적으로 인간의 형편과 때를 고려하신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있게 된다. 이런 견해를 ‘불가해론(불가해론)적 하나님 이해’라고 한다.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
그런 면에서 구약의 하나님은 주권적이다. 그는 스스로 하나님이시고, 그 하나님되심을 다른 어떤 존재에게도 의존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보물섬 지도의 ‘하나님’이라는 암호를 대할 때마다 우선적으로 ‘내 눈을 열어 주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시119:8)하고 간구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보물섬 지도를 제작하신 하나님은, 보물섬은 물론이고, 보물섬으로 가는 길과 여타 모든 것들을 곧 우주 만물을 친히 제작하신 분이시다. 이를 ‘창조’(창조)라고 한다. 오직 하나님의 제작만이 창조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 가운데에는 하나님의 숨결과 손길, 그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분명하게 보인다(롬1:20). 하도 신기한 그것들을 사람들은 ‘자연’(자연)이니, ‘우연’(우연)이라고 한다. 한탄 피조물을 ‘우상’(우상)으로 보게 되는 타락이 여기서 시작된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은 공간만이 아니다. 시간도 창조하셨다. 공간과 시간은 언제나 하나의 연속체이다. 공간과 시간이 어우러져 역사가 시작된다. 하나님은 시간을 넘어 계시는 영원의 하나님이시면서 또한 시공간 속에서 역사(역사)하시는 역사(역사)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역사(역사)는 역사(역사)적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 하나님의 역사는 점진적이다. 인간의 이해를 위해서이다. 그러기에 그 점진적 역사는 목적과 방향이 분명하다. 한편으로는 인간을 위한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 당신을 위한 것이다. 이것은 동전의 양면 같다. 인생의 참된 행복은 자기자신을 위하여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서 그 방향과 목적을 가질 때 맛볼 수 있다. ‘하나님 자신의 이름과 영광을 위하여서 모든 역사를 이루어 가신다’(사43:21)이 바로 이런 이유이다.
하나님의 역사는 인간들 중에서도 특별히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을 중심한다. 그래서 구약의 역사는 이스라엘에 집중된다. 이러한 집중의 목적은 물론 연방과 온 우주의 구원에 있다. 이스라엘은 그 도구와 방편이 되는 것이다. 구약의 하나님은 결코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아니다. 우주만물의 주가 되시는 분이시다.
구약의 하나님이 주로 전쟁과 심판, 진노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시는 것은, 열방을 구원하고 만물을 회복시키는데 있어서, 도구와 방편이 될 이스라엘을 세우고 보존하며 치료하시기 위한 모습이다. 구약의 하나님은 창조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구속의 하나님이시고, 공의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또한 사랑의 하나님이시다(습3:17). 이런 면에서 이 보물섬 지도에 나타나는 ‘하나님’ 암호를 풀어가는데 오해가 없어야 할 것이다.
구약의 하나님은 특별히 “야훼”(여호와)이시다.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의 이름을 밝히실 때 이 이름으로 밝히셨다(출3:13-22). 당신이 친히 당신의 백성들과 맺는 언약을 배경으로 하여 밝히신 이름이다(15절). 그 뜻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다. 만물의 창조와 회복(구속)을 당신의 주권으로 이루어 가시는 것을 함축하고 있는 이름이다. 신비의 이름이다.
이 이름이 신비인 것은, 야훼(여호와)께서 분명 ‘나’이시면서도 ‘우리’(창1:26,사6:8)로 나타니기 때문이다. 그 ‘우리’에는 ‘보내시는 자’와 ‘낳으신 바 된 자’(요1:18), 그리고 ‘나오시는자’(요15:26)가 있다. 그러면서도 야훼(여호와)는 하나이시다. 이것을 ‘삼위일체’라고 한다. 야훼는 분명 하나이시면서도 성부 하나님도 야훼이시고, 낳으신 바 된 독생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도 야훼이시며, 영원토록 나오시는 분이신 성령님도 야훼이시다.
이렇게 나타내신 것을 넘어서서 우리는 이 신비에 더 이상 다가갈 수 없다. 단지 옷깃을 다시 한 번 여미면서 그렇게 나타내신 것을 찬양하고 경배해야 할 뿐이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이해할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실 자에게 긍휼을 베풀어, 이해하지는 못하는 가운데서도 이 신비를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하신다. 그 믿음으로 우리는 배의 돛을 올리는 것이다. 돛폭에 성령의 바람이 불어대기를 소망하면서, 이제 항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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