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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Re:구약성경칼럼(3)나, 가장 위험한 함정

baromi 2008. 3. 3. 08:31
손목사의 구약성경칼럼(3)

자아, 가장 위험한 함정

우리는 지금 보물섬 지도인 신구약성경 중 한 장인 구약성경을 들고 보물섬을 향하여 여행중이다. 앞으로 만나는 어떤 보물이든 하나님이 없으면, 그것은 실상 보물이 아니라 저주요 오히려 함정이라고 하였다. 이번에는 함정 중의 함정, 가장 위험한 함정을 살펴 보아야겠다. 그것은 다름 아닌 바로 ‘나 자신’이라는 함정이다.

후크선장

피터 팬이라는 소설에 후크(Hook)라는 선장이 나온다. 악어에게 손이 잘려서 그 손목끝에 쇠스랑같은 손가락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사사건건 꿈의 인물 피터 팬과 대립한다. 우리들의 여행에도 이 후크선장이 있다. 바로 나 자신이다. 손이 구부러져 있는(hooked) 것이 아니고 내 마음이 구부러져 있는, 나는, 후크선장이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렘17:9).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후크선장이 바로 나이다.

이런 자아 때문에, 모든 보물을 보물되게 하는 참보물을 알아보지 못하고, ‘안다’할지라도 만물 속에 분명히 계시된 하나님의 영원한 신성과 능력과 영광을 한낮 썩어질 것들로 바꾸어 버리는 것(롬1:23)이다. 그러니, 이 자아가 제일 문제이다. 그래서 칼빈은 그의 기독교강요를 시작하면서 그 초두에 이러한 자아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단언하고 있는 것이다(1권1장1절).

보물을 보물되게 하는 진짜 보물을 알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이렇게 변질시켜 버리는 자아는 그러기에 단순히 구부러져 있는 것만이 아니라 오염되어 있고(contaminated) 타락되어 있는(fallen) 것이다.

이것을 알아야 한다. 이 자아는 원래는 타락 이전의 상태에 있었다. 그 때에는 구부러져 있지 않았고, 오염되어 있지 않았었다. 순진부구하였기에 벌거벗었는데도 그것으로 부끄러워 하지 않았었다(창2:25). 자연과 조화를 이룬, 말 그대로 하나였었다. 자아 안에서 지정의가 통합되어 있었고, 분열되어 있는 두 개로 자아로 나뉘어 있지도, 아는 것과 행하는 것 사이에 불일치가 있지도 않았었다.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었다(창1:31). 모든 피조물들과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질서와 구조를 파악하고 있었고, 그것들에 이름(의미)를 부여할 줄 알았다. 그래서 자신에게 평생토록 도움을 줄 존재가 누구인지를 금방 알아볼 수도 있었던 것이다. 요즘처럼 그렇게 재면서 시간을 끌고 고민하지 않았었다.

이런 자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오호 애재(애재)라! 한낱 피조물이 피조물로서 만족하지 않고 자기를 만드신 창조주가 되려고 하다니! 너무도 심히 좋게 만들어져 있는 자신을 보면서 그만 나르시스(Narcissus)처럼 자아에 도취되어 버렸던가?

자아도취-이것이 문제의 근원이었다. 타락의 시작이었다. 사단이 뱀의 모양으로 와서 아무리 ‘하나님 같이 되리라’(창3:5) 유혹하였다 하더라도, 여자건 남자건 자아에 도취되어 있지만 않았더라도, 그 유혹의 간계를 물리칠 수 있었었건만, 그들은 그러하지 못하였다. 아니 우리 모두는 그들 안에서 그렇게 자아에 도취해 있다가 그만 그 유혹의 올가미에 덫씌워지고 말았던 것이다.

자아도취가 무엇인가? 이것은 만물을 만드신 창조주를 외면한 채, 조금이라도 피조되어진 것에 정신이 팔려 있음을 말한다. 하나님을 염두에 두지 않은 채, 피조물의 아름다움과 현란함에 현혹되어 있는 것, 그 모든 것이 자아도취의 일종이다. 예술이 예술 그 자체로서 그 가치를 주장할 때, 철학과 과학이 그 자체로서 그 존재의 의미를 추구할 때, 바로 이 자아도취가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첫 번째 타락은 우리 안에서 지금도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다.

자아도취의 종말

소위 우상이란 것도 바로 이 자아도취의 일종이다. 자아도취가 심화되어 자아에 종속되어 있는 상태가 바로 우상숭배인 것이다. 구약역사란 자아의 첫 번째 자아도취로 인한 타락 이후, 계속되는 자아도취의 심화로 인한 우상숭배의 역사라 할 수 있고, 이런 우상숭배의 역사 가운데서 참된 자아를 회복시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역사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바알과 아세라는 가나안족속의 우상이었다. 가나안족속들은 자연현상 중 비를 아주 소중하게 생각하였다.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비가 가장 중요했기 때문이다. 비가 왜 오는가? 호랑이 장가 가기 때문? 이들은 바로 남신인 바알이 여신인 아세라와 성적 교합(sexual intercourse)을 할 때에 비가 오는 것으로 생각했다. 바알과 아세라가 운우지정(운우지정)을 나눌 때 비가 온다는 것이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자연 가운데 두신 암호를 오독(오독)한 셈이다. 아니다. 단순히 오독한 것이 아니라 자아에 도취되어, 자신들의 성적 호기심이나 욕망을 투사할 방도를 자연현상에다 결부시켜 버렸던 것이다. 곧, 자신들이 성적 교합을 하게 되면 신들이 인간들의 성적 교합을 보게 됨으로 흥분하게 되어 신들의 성적 교합으로 이어지고 그것으로 비가 오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인간의 부정한 성적 교합은 이제 신들 앞에서의 거룩한 제사가 되었던 것이다.

인간 편에서 무엇인가를 행함으로 인해서 신들의 욕망을 부추기거나 분노를 감소시킬 수 있다는 생각, 그것으로 인간의 불행을 감소시키면서 행복을 최대화시킬 수 있다는 자아의 생각! 우상이란 결국 이런 인간들의 잔꾀에 놀아난 허수아비들인 셈이다.

그러므로 보물섬 지도 한 장, 구약의 암호를 풀어나갈 때, 만나게 되는 우상들마다 그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음흉한 자아의 잔꾀를 간파하라! 자아의 음모를 폭로하라! 그모스도 그렇고, 말곰도 그렇다. 몰록 또한 그렇다(왕상11:5-9). 솔로몬이여! 지혜의 왕 솔로몬이여! 어찌하여 모든 지혜와 구변에 능하였으면서도 자신을 보지 못하였던고! 자신이 너무 지혜로와 그만 자신의 지혜에 도취되었이로다! 그 지혜가 어디에서 말미암았음을 그만 잠시 잊었음이로다! 그리하여 아침의 아들 계명성처럼 그만 잠시 자신을 하나님과 견주어 그 자리에 앉으려고 하였음이로다!(사14:12-14)

그러기에 언제나 자아를 생각할 때마다 철칙 하나가 있다: 그 자아를 만드신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것이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저를 엘로힘(하나님?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시8:3-5).


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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