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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진정한 영성(spirituality)이란 무엇인가? (1)(1)존 맥아더

baromi 2008. 1. 8. 20:22

제 11장,

진정한 영성(spirituality)이란 무엇인가? (1)

존 맥아더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바울은 로마서 12“2에서 이렇게 말했다. 많은 은사주의자들은 의식적인 노력을 전혀 하지 않고도 마음을 새롭게 하거나 거룩함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성화(sanctification)란 한번의 체험을 통해 혹은 잠재의식의 조절을 통해 아무런 노력 없이도 일순간에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라고 믿는다.

“잠재의식 속에 심어넣은 영성”(suvliminal spirtality)이라는 개념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몇 년 전 “잠재의식용 넥타이”를 선전하는 광고 전단을 받아보았을 때였다. 그것은 멋진 페이즐리 (옷감의 일종. 추상적인 곡선으로 짜여진 부드러운 모직물 - 역자주) 넥타이였는데, 한번 쓱 훑어 볼 때는 아주 평범해 보였다. 그러나 그 광고는 그 넥타이가 전혀 평범하지 않은 특이한 넥타이라는 것을 선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섬유 속에는 인간의 육안으로는 절대로 알아볼 수 없는 ‘예수 구원’이라는 단어가 숨어 있습니다. 이것은 기름 부음을 받은 옷감으로 만든 넥타이입니다.” 그 넥타이는 은사주의를 표방하는 회사가 판매하는 것이었다. “삼십 달라만 지불하면 이 넥타이를 살 수 있습니다. 게다가 세금 공제가 되기 때문에 당신에게 더 없이 좋은 선물이 될 것입니다. 또 당신은 이백 달러(세금 공제액)만 내면 넥타이를 일곱 개나 살 수 있고, 그것으로 우리 회사의 빈민구호 사업에 동참하실 수 있습니다.”

“몇 년 동안 러시아를 비롯한 공산권의 과학자들이 식역하광고(Suvliminal adcertising, 광고를 보거나 듣는 사람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극히 짧은 시간 동안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되풀이해서 그들의 잠재의식 속에 남도록 하는 광고- 역자주)에 대해 실험을 했습니다. 그것은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소비자들을 향해 그들의 사상이나 선전을 주입시키기 위해서 고안된 것이었습니다.” 그 광고 전단은 계속되었다. “이제……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이 기술을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지 보여주셨습니다.” 아주 크게 확대된 그 넥타이 사진이, 그게 무슨 말인지 정말로 보여주고 있었다. 섬유 전체가 “예수구원 예수구원 예수구원 예수구원 예수구원”이라는 말로 직조되어 있었다. 그 광고 전단은 또 이런 장담도 서슴지 않았다. “이 넥타이를 착용하면, ‘예수 구원’이라는 말이 이것을 보는 모든 사람들의 잠재의식 속에 새겨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에게 전혀 말을 하지 않고도 전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때 그 말은 내 머리 속에 기괴하고 이상한 물건을 떠오르게했다. 돌이켜보건대, 그것은 최근 들어 나타나고 있는 은사주의 운동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예고편이었던 것 같다. 잠재의식 속에 메시지를 주입하는 일은 뉴 에이지나 오컬트(occult, 초자연적인, 밀교r인)적인 뉘앙스에도 불구하고, 은사주의자들 사이에 영적이고 감정적이고 육체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인기 있는 방법으로 급속히 자리잡아 가고 있다.

이 책의 서두에서 나는 라파 랜치(치유 농원)가 암 환자들을 치료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기 위해 배포된 잠재의식에 영향을 주는 “말씀 치료법”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라파 랜치에서는 14달러 95센트에 말씀 치료용 테이프 하나를 준다. 테이프 값이 비싼 편임에도 불구하고, 무슨 대가를 치르고라도 암을 치료하려는 수천 명의 사람들은 기꺼이 돈을 지불하고 있다. 그 테이프가 어떻게 해서 나온 것인지에 관해 린다 펠(Linda Fehl)이 설명하는 말은 이렇다.

1983년에 하나님께서 나의 유방암을 치유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암 환자들이 와서 치료받을 수 있는 장소를 건설하도록 내게 소명을 주셨습니다. 그 부르심에 순종하여 우리 네 식구는 북서부 플로리다의 작은 시골 마을에 자리한 70에이커 규모의 땅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오천 평방 피트의 라파 랜치(Rapha Ranch Lodge 치유농원)의 건축을 시작했습니다.

거의 이년이 되어서야 우리는 첫 번째 암 환자를 받게 되었고, 곧 우리의 사명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후 이년 동안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우기도 했지만, 환자들 대부분이 암으로 죽어가는 것을 계속해서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우리는 계속 하나님의 말씀을 고통스런 상황에 처해 있는 그분의 귀한 백성들에게 어떻게 하면 깨닫게 할 수 있는지 보여달라고 울부 짖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는 우연히 식역하 과정이 많은 사람에게 긍정적인 확신을 갖게 하는데 어떤 식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해서 설명하는 한 텔레비전 프로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때 한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하나님의 순전한 말씀을 전하는 일에 이와 비슷한 방석이 사용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후 두 달 동안의 연구와 기도 끝에 우리는 병자들을 치료하는데 도움이 되는 도구를 생산하는 일에 하나님께서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 일을 EH한 명령하셨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나의 영혼을 신뢰하셨기 때문에 이 놀라운 새 테이프를 만드는 일에 내 목소리를 사용해서 녹음하라고 말씀하셨고, 크리스천 음악가들과 기술자들 그리고 크리스천 스튜디오를 사용하라고 하셨습니다.

1988년 6월 드디어 ‘말씀 치료법 치유 테이프’가 배포되었고, 즉각 치유 사역에 대한 보고가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두 주가 채 못 되어서 한 여인이 암으로부터 치유되었습니다.

그러한 잠재의식적 치료법을 사탄적인 것이라고 생각되어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향해 펠 여사는 이런 글을 썼다.

식역하 테이프를 처음 접할 때 당신이 갖게 되는 경계심은 당연한 것이겠지요. 그러나 이 사실을 확실히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테이프를 두려워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우리 테이프들은 거룩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최면법이나 긴장이완법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또한 뉴 에이지도 속임수를 쓰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다중 트랙 복사라는 현대 과학 기술을 사용해서 녹음했을 뿐입니다. 당신이 직접 테이프를 하나 들어 본다면, 그 기름부음이 당신을 여러 가지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킨다는 것을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열두 사도들이 오늘날 살아 있다면, 그들은 이 말씀 치료법을 1990년대의 두루마리 성서(a scroll of 90's)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몇몇 은사주의 단체들이 이러한 잠재의식 테이프를 사람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갱생회라고 불리우는 한 모임은 다시 앞으로 돌리지 않아도 계속해서 재생되는 테이프를 판매하고 있는데 (개당 19.95달러이다), 이 테이프는 모든 의심, 두려움, 좌절, 죽음에 대한 공포, 죄의식, 우울, 의기소침, 성마름, 자존심, 욕심, 유혹, 음란, 매춘, 용서받지 못한 마음, 거부감, 마약, 알콜, 흡연, 화, 반항, 시기, 공포, 판단, 동성애, 그리고 아동에 대한 학대와 성 희롱으로부터 자유롭게 될 것임을 약속하고 있다. 그 갱생회의 또 다른 테이프는 “재산증식, 살빼기, 평화, 치유, 자존감, 구원, 결혼생활의 조화, 하나님께 대한 순종, 하나님 사랑을 받아들임, 하나님과 더 가까이 동행함”등 이런 것들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장담하고 있다. 갱생회에 따르면 “성경에 기초한 잠재의식 개조의 메시지는 잠재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악한 영들을 쳐서 예수의 이름으로 떠나라고 명령한다. 그러면 그 빈자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지게 된다!”

그런 테이프를 만들어내는 기술적인 방법은 무엇인가? 갱생회는 우리 속에 들어있는 마귀를 공격하는 메시지가 담겨있는 여러 개의 목소리를 각기 다른 트랙에 동시에 입히는 방법을 사용한다.

예를 들어 동성애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고안된 한 테이프에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가 담겨 있다. “나는 너희들에게 말한다. 동성애의 영들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들을 저주하노니 당장 나가라” 이 메시지는 도덕적인 순결에 관한 성경 말씀을 흉내낸 것이다. 여러 회사들이 그런 방법을 조금씩 변형해서 사용하고 있다. 엘 파소에 있는 ‘라이프 소스’(Lifesource)사는 바다의 파도 소리가 들리게 만든 트랙을 사용한다. 그 이면의 잠재의식 속의 들리지 않는 트랙들은 성경 구절을 담고 있다. 오클라호마 툴사(Tulsa)에 위치한 치유 사역 전도 전문인 ‘비키 자미슨 피터슨’(Vicki Jamison Peterson)사는 흠정역(King James Version) 신약 성서 전체를 60분짜리 테이프에 아주 빠른 속도로 녹음했다. 그 회사는 선전 책자에다 이런 약속을 해 놓고 있다. “긍정적인 생각이 시간당 십만 개의 속도로 당신의 신앙 체계 안에 저장되고 있습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모든 것들이 너무도 쉬워질 것이다. 전혀 주의를 집중하지 않고도 성경의 내용을 흡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방법에 의하면 불타는 기도와 경건에 이르기 위한 연습, 열성적인 헌신, 세심한 성경 연구, 그리고 내면 깊은 곳의 묵상과 같은 일들은 모두 불필요한 것들이 되어 버린다. 전에는 감량을 하기 위해 극기와 훈련이 필요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계속해서 돌아가는 테이프가 비만과 식욕의 악귀를 쫓아낼 수 있고 그 이상 더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헌신과 성경 연구의 훈련된 삶에서 우리가 추구했던 것들이 믿음과 영적인 지혜 그리고 의로움이었으나, 이제 잠재의식의 조절을 통한 치료 요법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약속하는 것은 잠자는 동안에도 그러한 거룩함이 당신에게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잠재의식을 이용하는 성향과 은사주의는 서로 완벽하게 맞아 떨어진다. 애초부터 은사주의는 무엇보다 영적 성숙에 도달하는 지름길을 약속했기 때문에 번창할 수 있었다. 이 운동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는 단 한번의 체험으로 서도들에게 즉각적인 능력과 지혜, 그리고 영성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거기서는 정상적인 성장과정의 일부인 시간, 노력 그리고 죄에 대항하여 싸우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거룩함에 이르는 데에 있어서 지름길이 존재하는가? 성도가 잠재의식에 영향을 끼치는 메시지를 받으면, 혹은 영적인 쇼크나 능력의 급상승을 체험하면, 즉각적으로 어린 신앙에서 성숙한 신앙으로 변화할 수가 있는가?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다.

 

성령 체험의 문제

전형적인 은사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영성을 소유하게 되는 첫 관문은 보통 방언의 경험이다. 몇몇 은사주의자들이 이를 두고 실제로 사용하는 단어는 “뜨거운 방언 체험”(zapped)이다. 이 말은 은사주의자들이 성화(sanctification)를 바라보는 방식을 묘사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내가 있는 교회의 성도들이 은사주의자들과 영성(spirituality)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와서 나에게 말하는 바에 의하면 자기는 한번도 영적인 무아지경의 절정 상태를 경험해 본 적이 없다고 하자 그 은사주의자가 “오, 하나님, 이 사람을 뜨겁게 달아오르게 해 주소서”라고 하더라는 것이었다.

은사주의 전도자인 노벨 헤이스(Norvel Hayes)는 그 자신이 뜨거운 방언을 경험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를 이렇게 설명했다. “하나님이 강렬하게 내게 다가오셔서는 나를 아주 넘치게 축복하기 시작하셨다. 나는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고, 울부짖으면서 그 축복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때 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달았고, 또한 그분께서는 나를 어루만져 주셨는데, 그것은 내가 성령에 순종했기 때문이었다.”

불행히도 그러한 은사주의는 기독교인들을 달아오르는 흥분 상태를 경험한 사람들(the zapped)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the unzapped)의 두 부류로 양분시켰다.

흥분 상태를 경험한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보다 자신들이 적어도 조금은 더 영적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좋든 싫든 간에 그 영향은 교회를 양분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흥분 상태를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 중의 어떤 이들은 왜 자기들에게 은사주의자들이 겪는 것과 같은 그런 종류의 체험이 일어나지 않는지 이상하게 여기게 된다. 은사주의자들은 당신의 방언으로 성령 세례를 받지 않으면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방식으로 살아갈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런 사람들의 주장에 의하면 당신은 모자라도 한참 모자란다.

멜빈 하지(Melvin Hodge)의 「영적 은사들(Spiritual Gifts)이라는 책에는 이러한 견해에 관한 좋은 예가 수록되어 있다.

은사나 사명을 완전히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 충만을 기다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오순절 성령 강림과 같은 은사 체험의 절정을 경험할 수 없으며, 영적 사역의 부분적인 방법과 영적 은사나 달란트의 불완전함밖에는 알 수가 없다…… 우리는 신약성경이 성령 세례(여기서 하지는 은사 체험을 의미한다)를 영적인 삶과 사역을 온전히 발달시키는 데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이고도 우선적인 요소로 보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은사주의자들의 말이 사실인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구별이 존재하는가? 영적 흥분 상태를 경험한 자와 경험하지 못한 자의 두 부류가 존재하는가? 은사주의자들이 아닌 그리스도인들은 이류로 전락해야 하는가? 성령 세례를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성경이 자신을 결코 그런 식으로 운명지우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매우 기뻐할 것이다.

 

육에 속한 사람 대 영에 속한 사람

그리스도인들의 영서에 관한 근본적인 가르침이 고린도전서 2:14-15에 나와 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바울은 고린도전서 2장의 대부분을 육신에 속한(거듭나지 못한) 사람과 영에 속한(구원받은) 사람의 차이를 논하는 데 할애했다. 육신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을 모른다. 그는 육신적인 삶 속에 갇혀 구원을 받지 못한다. 또한 그는 영의 일을 알지 못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영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을 알고 영적인 일들을 이해한다.

고린도전서 2장에 따르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영에 속해 있다. 적어도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리의 지위는 그렇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영에 속해 있다. “영적”이라는 것은 단순히 성령을 소유한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로마서 8:6-9이 그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지위상 영적이기는 하지만 실제적으로도 항상 영적인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언제나 영적으로 행동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고린도전서 3:1-3에서 바울이 영적 어린아이에 관해 언급했던 이유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영에 속한 자들로 여기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지만, 그들이 아직도 영에 속한 사람들로서 행동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들은 말씀을 받지 않았으며, 삶에 거룩함이 없었다. 그들은 또한 육체가 원하는 대로 행하며, 바울이 자신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로 취급해 주기를 바랬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만이 유별났던 것은 아니다. 우리 시대의 모든 그리스도인들도 같은 문제에 봉착해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구조로 알고 있고 그 안에 성령이 내주하시기 때문에 “영적”이다. 그런 항상 영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때는 아주 육적이며 본능에 따라 행동한다.

그 좋은 예가 바로 사도 베드로이다. 마태복음 16장에서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다. 예수께서는 즉각 이렇게 답하셨다. “시몬에 네가 복이 있도다. 내가 이제 너희 이름을 베드로(베드로는 ‘반석’을 의미한다)로 바꾸겠다. 너는 이제부터 반석처럼 견고한 새 사람이 될 것이다.”(16:17-18). 그러나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사건이 있은 후에, 갈릴리 바닷가에서 예수께서 베드로를 만나시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시몬이라고 부르신다. 왜일까? 그것은 베드로가 옛 사람처럼 행동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이전의 사람처럼.

베드로가 저지른 일, 그리고 우리들 모두가 때때로 저지르는 일은 그리스도를 가까이 따르는 일을 잠시 멈추게 했다. 오순절 후에도 베드로는 가끔씩 육신을 따르는 행위와의 싸움을 계속 했다. 한번은 바울이 그를 직접 대면하여 책망하기까지 했다(갈 2:11-12).

바울은 누구보다도 그리스도인들이 겪는 육신의 정욕과의 싸움을 잘 이해했다. 그렇기 때문에 로마서 6장과 7장에 걸쳐 매우 감동적인 편지를 쓸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요점은, 영적인 성숙(spirituality)은 당신이 어떤 영적 체험을 통해 흥분 상태에 빠지자마자(zapped) 그 이후로 영원히 지속되는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영적(성숙)이라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살아있는 말씀을 매일 공급받아 당신 안에 풍성히 거하게 하고 매 순간마다 성령 안에서 행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바울도 갈라디아서 5:16에서 똑같이 말했다.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행하다”라는 말은 신약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단어이다. 행함은 매순간의 행동을 일컫는 것이다. 바울은 성령을 따라 행할 것을 교회에 권면하였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갈 5:25). 행하는 것은 한 번에 한 걸음씩 적당한 속도를 유지하는 것을 말한다. 한 번에 한 걸음씩 꾸준히 나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영성(spirituality)이 유지되는 비결이다.

 

진정한 영성의 표지들

진정한 영성의 기본적인 특징은 죄를 깊이 깨닫는 것이다. 성경을 보면 죄를 아주 경멸하는 사람들은 다름아닌 매우 영적인 사람들인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울은 자신이 죄인의 괴수라고 말한 바 있다(딤전 1:15). 또 베드로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8)라고 했고 이사야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사 6:5)라고 말했다. 영적인 사람들은 자신들이 죄와 결사적으로 싸우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리하여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라고 말했던 것이다.

영적 성숙의 궁극적인 목표는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것이다. 바울은 이 진리를 되풀이하여 강조했다(고전 1:11; 갈 2:20; 엡 4:13; 빌 1:21). 바울에게서 궁극적인 영적 성숙이란, 예수를 닮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단 한번의 경험으로, 혹은 잠재 의식을 변화시키는 고도의 기술로 얻을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꾸준하게 노력해야 하는 “추구”이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조아가노라(빌 3:12-14)

그러나 많은 은사주의자들이 성령 세례를 한 번 받기만 하면 영적 성숙은 당신의 것이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런 식으로는 되지 않는다. 일순간의 체험으로 달아올랐던 것이 식고 나면 그들은 또 다른 경험을 찾을 수 밖에 없게 되고, 이런 식으로 자꾸 다른 경험들을 찾아 헤매게 된다. 그들은 두 번째로 받은 은혜로는 뭔가 부족함을 느끼게 되고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계속해서 그러한 체험들을 원하게 된다. 더 만족스런 체험을 찾아 끊임없이 노력하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성경과 진정한 영적 성숙의 길에서 벗어나 체험이라는 잘못된 길로 달려가다가, 죽음으로 끝나는 피할 수 없는 결말에 이르게 된다.

 

은사가 영성을 보장하지 않는다

은사주의자들의 책들과 팜픗렛들 그리고 기사들은, 어떤 특별한 경험에 의해 새로운 영적 차원에 도달했던 과정을 설명하는 간증들로 가득 차 있다. 흔히 그런 간증들은 일반적으로 똑같은 유형을 따른다. “성령 세례를 받았을 때 나는 방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나는 좀더 거룩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나는 전보다 더 큰 능력과 자유, 그리고 기쁨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사랑이 더 많아졌고 그리스도인으로서 더욱 충성했습니다.”

은사주의가 다 같은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은사주의자들은 영적 성숙에 도달하는 방법으로 방언의 은사를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은 그러한 생각을 지지하지 않는다. 그 예로 바울은 고린도전서 1:7에서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다”라고 말함으로써 고린도교회를 칭찬하고 있다. 고린도 교인들은 모두 영적인 은사들을 갖고 있었다. 예언, 지식, 능력 행함, 병 고침, 방언, 방언 통역 이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었다. 그들은 위치적인 면에서는 영에 속했지만 그 행동들은 교회를 욕심의 혼란 속으로 던져 넣었다.

1세기의 고린도 교인들만이 그랬던 것은 아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도 비슷한 문제에 직면해 있다. 우리는 구원을 받았고 성령을 모시고 있다. 또 영적인 은사들도 갖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육신과의 투쟁은 계속되고 있다(롬 7장). 어떤 영적 은사도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단번에 그리고 영원히 그 싸움에서의 승리를 보장해 줄 수는 없다 우리가 승리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길은 끊임없이 성령을 조차 행하고 육체의 욕심을 채우지 아니하는 것이다(갈 5:16).

분별력이 있는 은사주의자라면 우리들만큼이나 그 자신도 육체가 원하는 것에 따라가고 싶어 하기 때문에 고민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 열망, 행복감, 열정, 흥분 그리고 감수성-이 모두를 은사주의자들은 영력의 수준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은 욕심, 자존심, 이기심, 그리고 탐욕을 제거하는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 가장 최근의 체험이 얼마나 강력했느냐에 그 능력이 좌우되는 은사주의자들은 사실상 영적으로 더 연약하고 더 미성숙해지기 쉽다. 은사주의 운동의 역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은사 체험이 육신과의 싸움에 있어서 해결책이 된다고 생각하는 그러한 체험은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그들은 죄의 원인을 자신들의 실패에서 찾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의 성화에 대한 자신들의 신학을 재검토하려고 하기보다는 사탄의 능력에 그 책임을 전가시킨다.

은사주의자들이 새로운 능력과 새로운 영적 수준을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황홀경에 이르게 하는 체험들이, 그들에게 새롭고 영원히 지속되는 영적 상태를 절대적으로 보장해 줄 수는 없다. 어떤 종류의 경험을 하던 간에, 그리고 아무리 자주 방언을 하더라도, 아무리 자주 성령 속에서 자기를 부인하더라도, 그들 역시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마찬가지로 말씀에 순종하면서 성령으로 행하고 날마다 자신의 죄에 대하여 죽어야 할 필요를 느끼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도전에 부딪히게 되는 것이다.

은사주의의 간증과 가르침은 그런 점에 있어서 드물기는 하지만 정직할 때가 종종 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은사주의자들이 가끔 심한 정신적 도피주의자들을 길러내게 되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고민들에 대한 손쉬운 해답과 경건에 이르는, 약삭빠르고 쉬운 지름길을 약속하는 것에 현혹되어 이 운동에 가담하고 있는가?

 

거룩함인가, 천박함인가?

아직도 은사주의 운동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많은 일들이 경건하기보다는 경솔, 천박, 수선스럽기 짝이 없다. 내가 사는 지역의 기독교 텔레비전 방송국은 대화의 다양한 쇼를 생방송으로 보여주는 프로그램을 매일 밤 방송한다. 텔레비전을 켜기만 하면 거의 매일 밤 똑같은 것을 보게 된다. 그 프로가 중점을 두는 것은 거의 전적으로 재미와 경박스러움이다. 깔깔거리는 소리와 쉴 새 없이 쏟아지는 과장된 이야기들로 가득 찬다. 그 시간은 보통 오락과 저속한 농담, 바보짓, 그리고 얕은 입담으로 채워지게 된다. 비싸고 사치스런 옷, 두터운 화장, 그리고 베드로전서 3:3-6과 디모데전서 2:9-10로부터 생각할 수 있는 정숙한 여인들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여자들의 행동과 대화들이있을 뿐이다.

솔직히 말해 나는 수많은 불신자들이 기독교인에 대한 이미지를 그런 사람들로부터 얻어 낸다는 것을 알고는 무척 당황스러웠다. 나는 지금 우리가 잘 모르거나 아주 극단적인 은사주의자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바로 은사 운동의 선두에 서서 지도력을 과시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행복을 느끼는 것에는 아무 잘못된 것이 없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충만한 듯한 느낌을 갖는 것에는 잘못이 없다. 그러나 불행히도 은사주의자들 중의 다수가 감정의 고조, 급작스런 떨림, 흥분되는 사건, 전기에 감전되는 듯한 순간, 그리고 기분을 들뜨게 하는 집회를 찾아다는 데에만 너무 집착하고 다수의 사람들 속에서 경험하는 피상적인 즐거움에 현혹된 나머지, 하나님과의 끊임없는 동행으로부터 오는 풍부한 보상, 대가들을 점점 포기하고 있다.

그러나 쾌락이 경건의 대용물은 아니다. 그리고 진정한 경험이 언제나 감정적 고양을 동반하는 것은 아니다, 성경을 보면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뜨거운 확신과 자기 자신의 죄에 대한 깊은 깨달음으로 의를 좇는다. 성령이 일하시는 곳에는 큰 기쁨이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또한 월터 챈트리(Walter Chantry)가 적절히 묘사한 것처럼 심오한 경지의 슬픔이 존재하기도 한다.

성령이 죄많은 인간에게 다가오실 때는 무엇보다 먼저 슬픔을 안겨주신다. 그러나 [은사주의]안에서는……기쁨과 평안의 상태로 아주 급속히 변화되었다는 자랑만이 있을 뿐이다. 즉각적인 기쁨과 중단없이 계속되는 행복감을 가져다 주는 어떠한 종교적인 체험도 믿을 만한 것이 되지는 못한다. 영적이라는 것에는 영혼의 고조, 정력이 넘치는 삶의 시작, 떨리는 경험을 계속 더해 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러나 많은 인기있는 신오순절주의 협회에서 당신이 그 외의 것들을 찾는다는 것은 헛수고일 뿐이다.

하나님의 성령을 소유한 자로서 이 세상의 슬픔과 깊은 절망을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부도덕의 악취가 코를 찌르는데도 성령 충만한 사람은 매일 매일 기쁘고 즐겁고 행복하고…… 그렇게 살 수는 없다. 만일 성령께서 이 시대에 능력으로 임하신다면 사람들은 기쁨에 겨워 손뼉을 치는 것이 아니라 슬픔에 잠겨 가슴을 치게 될 것이다.

“그는 ‘기쁨에 들뜬 성령(the Jolly Spirit)'이 아니라 ’거룩한 성령(the Holy Spirit)'이시다”라고 챈트리는 덧붙여 말한다.

은사주의자들은 보통 성령이 거룩한 분이라기보다는 즐거움을 주는 분이라는 인상을 갖게 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모든 요란함, 소동, 소리 지르는 일, 현기증 나는 행동들과 어리석음, 경박함 그리고 거짓 약속들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다면, 그는 곧 눈총의 대상이 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 한편, 자기도취와 극단성은 점점 자라나서 커지고 화려해져 저속한 치장을 하게되고 더 괴상해지게 된다. 그런 모습은 온전한 경건의 열매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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