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보면 야곱의 열두 아들 중에 열한째인 요셉은 꿈꾸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신앙이 좋고, 행실이 단정하고, 하나님을 사모하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마음속에 꿈을 꾸는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이 두 번 꿈을 꾸었는데 창37:7에 보면 한번은 형들과 함께 들에 나가서 곡식을 거두는데 자기 곡식 단이 가운데 서고 열한 형의 단들이 자기를 둘러싸더니만 자기 단을 향해서 절을 합니다. 놀라운 꿈을 꾸고 깨어나서 그 꿈을 형들에게 이야기 하니까 형들이 그 말을 듣고 심기가 편치 못했습니다. “임마가 우리들의 왕이 되겠다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냐? 고약한 놈 아니냐!” 심사가 편치 못했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또다시 꿈을 꾸었습니다. 그 두 번째 꿈은 그가 하늘을 쳐다보니까 해와 달과 열한별이 쭉 일직선으로 서더니 자기를 향해서 절을 넙죽합니다. 그래서 그것도 깨어나서 아버지와 형들이 있는 앞에서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니 설상가상으로 형들의 마음이 더욱 완약해졌습니다. “이런 놈이 있나? 두 번째 우리에게 이런 협박성 꿈을 이야기 하는 것인가! 자기가 우리의 왕이 되겠다는 말인가?” 아버지도 형들이 너무 분노하기 때문에 분위기가 좋지 않으므로 요셉을 꾸짖었습니다. “어떻게 네가 감히 그런 말을 하느냐? 해와 달은 아버지와 어머니고 열한별은 형들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과연 네 아버지와 어머니와 형들이 네 앞에 엎드려서 절할 것인가?” 꾸짖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그 말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그 꿈이 보통 꿈이 아닌 것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어떤분들은 요셉이 경솔하게 형제와 아버지에게 꿈을 얘기햇기 때문에 형제들의 질투를 사서 애굽에 팔려가게 되엇다고 해석하는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요셉이 꾼 꿈을 형들에게 얘기할것이라는 것조차도 하나님은 아시고 요셉의 꿈을 꾸게 하셧고 비록 인간의 눈으로는 요셉이 아버지집을 떠나 종으로 팔려가게되는 험난한 고난의 삶을 살게 되엇을지라도 그 고난의 뒤에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하나님과 그 일이 하나님의 예정하심의 성취를 위한 일이엇다는 생각이들엇습니다. 요셉의 고난은 요셉이 애굼의 총리대신이되기 위한 필수적인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요셉의 고난의 길이 결국은 야곱의 가족들이 7년기근이들엇을때 살아남게 하기위한 하나님의 에비하심이었습니다.
요셉이 그 형들에게 가로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자라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앗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 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셧나이다. 이땅에 이년동안 흉년이 들엇으나 아직 오년은 기경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셧나이다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따의 치리자로 삼으셧나이다
우리의 눈에는 잘못되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일들이 하나님의 눈에는 그분의 구원을 이루시는 성취의 과정이라는 점입니다. 또한 모든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모습을 깨닫게 됩니다.
이 묵상중에 아프간에 인질로 잡혀잇는 우리의 형제들이 떠올랏습니다. 많은 믿는 사람들조차 인간적인 눈으로 준비가 부족햇고 방법이 잘못되엇고 하지말라고 한것을 햇으니 댓가를 치루어야한다. 믿지 않는자들은 인간이라면 입에 담을 수 없는 사악한 댓글들을 달으며 개독교하며 입에 침을 튀기며 욕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이 없으셔서 이들을 아프간으로 가는 것을 막지 못하셧을까? 어느선교사 말대로 아프간에 가서 이들이 탈레반에 인질이 된것이 눈에 띄는 파키스탄 관광버스를 타고 오전이 아닌 오후에 길을 떠낫기 때문인가 이들이 탈레반에 인질이 되는 것이 인간적인 그들의 부주의함때문인가? 한앗시리온에 팔리는 참새두마리중 한마리가 땅에 떨어지는것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안 일어난다고 하셧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자녀들이 악인의 손에 떨어지는 것을 그대로 방치 하셨을까? 우리의 머리카락 숫자도 아시고 전지전능하신 아버지께서 그들을 막을 능력이 부족해서엿을까? 이 일에 대해서는 졸고 계셨을까? 아니면 그들이 예수를 제대로 믿지 아니하는 참 그리스도인이 아니기 때문에 벌을 하시는 건가? 여기에는 우리의 눈으로는 이해 할 수 없는 주님의 입장에서 볼때만 가능한 하나님의 섭리가 있는 것이 아닌가?
배형규 목사님은 자신의 이 죽음을 어떻게 바라보고 잇을까? 내가 죽어 주님의 뜻이 이땅에 이루어진다면 내생명 주께 드리는 것이 가장 큰 소원이엇는데 주께서 이 부족한 저를 택하셔서 아프간에 소망을 갖게 하시고 주님 뜻이루는 작은 도구가 된것이 너무나 기쁘다고 생각할 것 같습니다.
이땅은 장막집입니다. 우리가 거할 영원한 처소가 아닙니다. 아마 배 목사님도 바울사도 처럼 고백하리라 생각합니다.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 안에서 신뢰하므로 겁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명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든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이것이 너희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두사이에 끼엿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 좋으나.
지진으로 수만명이 죽게되도 그것이 그리 크게 사회적 이슈가 되거나 이번처럼 기독교가 사회의 관심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23명의 기독교인이 탈레반의 인질이 된것은 온나라를 들썩 거리게 하고 전세계의 이슈가 되었습니다. 기독교인들뿐 아니라 믿지 않는 자들에게도 너무 큰 마음의 짐이 되었습니다. 이일이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님을 주님의 섭리안에 있음을 믿습니다. 주께서 이일을 어떻게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지, 이일로 얼마나 많은 영혼을 구하실지 기대해 봅니다. 내가 죽어 이 땅에 복음이 전파된다면 이보다 더 큰 영광이 믿는자로서 어디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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