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배찬양자료

[스크랩] Re:"온 세상이 지금 주목하고 있습니다"

baromi 2007. 6. 15. 11:11

온 세상이 주목하고 있습니다

 

온 세상이 주목하고 있습니다” – 이 문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는, 바로 맥락과 상황에 달렸습니다. 문자 그대로 이 세상의 한 명도 제외됨이 없이 무언가를 주목하고 있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고, 어떤 상황에 따라서 제한된 사람들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가령 예를 들어서, 올림픽폐회식을 방영하는 텔레비전의 아나운서가 이 말을 하였을 때에, 어느 누구도 이 말을 문자 그대로 온 세상이 주목하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하지 않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지금 일손을 모두 한꺼번에 놓고 그 폐회식경기장에 참석하거나 그 폐회식의 방영되는 텔레비전 화면을 보고 있다고 해석한다면, 그 사람은 멍청이일 것입니다. ‘온 세상을 다 다녀보았다는 말을 온 지구, 혹은 우주의 어느 공간도 한 뼘 제외하지 않은 채 발바닥으로 밟으면서 다녀보았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도 똑같이 어리석은 해석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는 요한복음316의 해석을 이런 식으로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피상적으로 들으면, 그들은 아주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을 여기며 성경중심적인 사고를 하는 것 같습니다. 과연 그들이 그런가 하는 것은 바로 성경 자체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바로 성경의 맥락과 상황을 검토해 보는 것입니다.

 

먼저, 이 요한복음316절이 기록되어 있는 요한복음서 자체에는 대략 여섯 가지 정도의 의미를 갖는 세상’(코스모스)라는 말이 들어 있습니다. 첫째, 176절이나 2125절에 나오는 세상은 질서정연한 우주나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지구를 가리킵니다. 둘째, 그 지구상에 살고 있는 거민들, 사람들을 말하는 구절이 162절 등에 나타나 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환유법입니다(왕을 나타낼 때 왕관을 나타내는 것과도 같이). 그래서, 인류, 인류의 세계, 인종, 인류역사의 무대, 혹은 인간사회의 구조 등을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셋째, 일반대중을 나타내는 74, 1422절 등의 세상입니다. 둘째와 셋째는 아주 비슷하면서도 그 뉘앙스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넷째, 윤리적 의미를 담은 세상이 있습니다. 319절이 대표적입니다. 빛과 대조되는 어둠으로서의 세상, 곧 빛을 싫어하고 거절하는 세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윤리적인 의미를 담고 있으면서도 이 넷째 번의 세상이란 의미와는 차별을 둘 수 있는 용례가 둘 있습니다. 그래서 다섯 번째, 하나님과 그의 백성, 그리스도를 공공연히 반대하고 적대하는 세력으로서의 세상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예를 든다면, 77, 823, 1231,1430, 1518, 그리고 179, 14절 등입니다. 나머지 하나로서 여섯 번째, 129,316,17,442,633,51, 812,95,1152, 12,32,46절 등인데, 넷째, 다섯째와 같이 어떤 윤리적 의미를 갖고 있으면서도 약간 특이한 뉘앙스를 띄고 있는 단어입니다. 이 구절들의 세상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다시 서론에서 예를 든 장면을 연상해 보십시오. 올림픽폐회식을 방영하는 그 상황과 맥락에서, “온 세상이 주목하고 있습니다는 말을 할 때의 그 세상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요? 이 말의 세상은 분명히 윤리적인 의미를 담고 있지는 않지만, 위의 여섯 가지 세상중에서 마지막 것과 관련되어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저의 소견입니다. , 모든 국가들이 그 대표를 파견해서 경기를 하다가 그 폐회식을 하는 상황을 고려한다면, 여기 온 세상이란 말은, 국가들이 관심을 갖고 주목하고 있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국가단위의 모든 사람들이 지금 이 폐회식을 주목하고 있다거나 시청하고 있다는 뜻으로 보는 것은 아나운서의 의미를 곡해하게 되는 것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이 올림픽경기는 올림픽경기라는 상황만이 아니라, 바로 고대그리스국가의 올림픽이 아니라, “현대의 올림픽경기라는 상황임을 고려해야 합니다. , 요한복음316절의 세상이란 의미를 파악하고자 할 때에도, 그 복음서가 기록된 AD 1세기의 상황을 고려해야 하고, 일차독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그 맥락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요한복음서 전체의 특징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과도 같은 말입니다.

 

요한복음서를 보면 어떤 강한 인상을 받게 된다는 것이 일종의 통념입니다. , 요한복음서는 유대인들에 대해서 굉장한 부정적인 인상을 갖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이라는 저자는 반유대인감정을 조장하는 것이 일차적인 목적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그런 반유대인사고방식을 그 저변에 깔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이 중세기독교도들이나 나찌정권의 Anti-semitism의 근거로 활용되기도 했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이러한 요한복음서 읽기가 옳바른 독법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요한복음서의 저자를 곡해하고 있는 독법입니다. 제가 말씀 드리고자 하는 것은, 그런 잘못된 주장이 나올 정도로, 유대인들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담게 할 수도 있는기사들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8장의 네 아비는 마귀다는 식의 예수님의 발언을 담고 있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저의 요지는, 요한복음서 기자는, 비록 반유대인감정을 갖고 대조시키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곳에서 유대인들에 대한 표현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저 단순하게 예수님의 공생애가 유대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나올 수 밖에 없는 표현들이 아닌 표현들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가령, 우리가 관심을 갖고 있는 316절이 나타나는 근접문맥인, 요한복음3장의 1절에 보면, 니고데모를 소개하면서 유대인이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저 단순하게 백성의 관원이라는 식으로 표현해도 될 터인데, “유대인의 관원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니고데모와의 대화가 유대인 니고데모와의 대화인 것을 강조하고 있는 셈입니다. 유대인거듭나야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특권을 인정하지 않는 유대인예수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 11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가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 증거를 받지 아니하는도다고 하십니다. , “우리너희를 대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우리가 과연 누구일까요? 그리고 너희는 누구일까요? 밤중에 혼자서 찾아온 니고데모와 단 둘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중일 터인데, “너희라고 말하고, “우리라고 말합니다. 이런 표현들에 유의하면서 바로 뒤의 16절에 나오는 세상에 대한 예수님의 언급을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이 구절이 예수님의 발언이냐 아니면 기록자 요한의 언급이냐는 것에 대해서는 사본상검토가 필요하겠지만, 여기서는 한글개역성경의 입장을 취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삼위일체개념을 이곳에 들이미는 사람도 있기는 하겠지만, 너무 억지해석같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우리거듭난 자들”, 하난님께로부터 난 자”(1:12)들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가장 옳다고 생각합니다. “영접하는 자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을 이곳 3장에서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을 두고 하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성령으로 난 자들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6)이 그것을 암시합니다.

 

그렇다면, “너희는 누구일까요? 니고데모를 포함한, 아직 거듭나지 못한 자들을 말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유대인 니고데모는 아직 예수님을 믿지 못함으로 인하여 거듭나지 못한 자에 속하여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관원이라고 하더라도, ‘유대인의 최고회의기관인 산헤드린의 의원이라고 하더라도, 거듭나지 않으면, 그는 육에 속한 자이고, <너희>일 뿐인 것입니다.

 

이것을 강조하는 것은, 바로 요한복음316절의 맥락을 이해하기 위한 것입니다. 앞에 제가 소개한 칼빈의 견해에 대한 오해를 다룬 글에서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14)라는 말을, 칼빈은, 모든 세상을 위하여 예수님이 죽으신 것이 아니라, 모든 세상을 향하여 예수님이 증거되어지는 것에 대한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글의 요지는, 칼빈을 결코 무제한속죄론자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요한복음316절의 세상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 것일까요? 바로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함하는 세상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만이 아니라 이방인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만이 아닌 이방인도 포함하는 세상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셨고 또한 죽으셨다면, 그것은,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 한 명 한 명 문자적으로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죽었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석한다면, 마치 올림픽경기를 모든 세상이 지켜보고 있다는 말을, 이 세상에 있는 어떤 사람도 제외됨이 없이, 하던 일 모두 손놓고, 개미새끼 한 마리 제외됨이 없이 주목하고 있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어리석은 짓입니다. 그 문맥이 분명히 유대인을 대조시키고 있는 상황임을 고려한다면, 그 대조되는 이방인을 포함하고 있다는 뜻으로서의 세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해석이 옳다는 것은 성경의 다른 구절들과도 너무나 조화가 된다는 데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바울사도가 골로새서310에서 말하기를, “거기는(곧 새창조안에서는) 헬라인과 유대인이나 할례당과 무할례당이나 야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분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는 말에서, 이것을 문자적으로 이해해서, “유대인헬라인등등이 조건 없이 모두 하나가 된다는 뜻이 아닐 것입니다. 이 구절의 의미는 곧 그리스도 안에서 인종과 계급, 혹은 율법의 유무 등의 어떤 조건들이 철폐된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세상에 차별이 없다는 것과도 같은 말이 되는 것입니다. 제가 말하고 있는 이 문장의 세상에는 곧, “헬라인과 유대인이란 인종적 구분, “할례당무할례당이라는 율법의 유무에 의한 구분, “야인이나 스구디아인으로 표현되는 문화적 정도의 구분, ‘종이나 자유인의 계급적 차별로 구분되는 모든 사람들을 포함하고 있는 셈입니다. 결코 문자적으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십니다. 당연합니다.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사랑의 하나님의 사랑을 왜곡하고 변질시키는 것은, 인간의 사랑이 변질되는 것만큼이나 위험하고 흉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인에게나 악인에게 동일하게 빛을 비추시고 비를 내리시는 분이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백성과 자녀들을 창세전에 정하셔서 때를 따라서 그 자녀들과 백성들이 당신에게 나아오도록 역사하시고, 그들을 향하여 특별한 사랑을 부어주십니다. 그 사랑을 위해서 독생자를 보내시고 죽음을 당하게 하셨던 것입니다(이런 구속의 대상이 제한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구절들은 너무나 많습니다). 이런 지극한 사랑을 오히려 제한된 사랑이나 되는 것처럼 폄하하고 비평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을 알지 못하고, 또한 그 사랑에 대하여 반응하게 되는 믿음의 본질이나, 그 믿음을 행사하는 인간의 전인격적 반응의 성격에 대해서 전혀 문외한이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의 범위를 확장시킨다는 미명 하에, 오히려 그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와 넓이를 왜곡시키고 변질시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의 왜곡과 변질이 얼마나 흉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적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만큼이라도 오늘은 충분하다고 여겨집니다.

 

앞서 드렸던 질문을 다시 드려 봅니다.

 

나는 과연 하나님께서 사랑하신 그 세상속에 속해 있는가? 아니면 제외되어 있는가?

그 "세상" 속에 속해 있다면, 감사하시고, 그 분의 영광을 위해서 사십시오.

그렇지 않다면,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십시오. "믿는 자마다" 영접해 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영접될 수 있는 "믿음"을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주실 자에게 주실 것을 계획하시고 실행하시는 영광의 그 주님을 찬양합니다!

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holyjoy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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