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의심자료

[스크랩] 이근호 목사님의 신학적 오류

baromi 2007. 2. 15. 07:52
이근호 목사님의 신학적인 오류
김영길 

본인은 이근호 목사님을 직접 만난 적은 없습니다. 때문에 이글을 쓰면서 그분의 인격이나 그의 신학사상을 폄훼할 의도는 전혀 없음을 밝히면서 이글을 올리고자합니다. 본인은 언젠가 이효종(제 안식구의 이름)이라는 이름으로 이근호 목사님과 이싸이트에서 토론한적이 있습니다.

당시 제가 저의 안식구의 이름을 빌려 토론한 것은 부득이한 사안이 있었기 때문임을 독자들이 이해를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제는 제가 누구인지 알만한 사람은 다 알기 때문에 본명으로 이 글을 게재합니다. 이러한 저의 심정을 다시 이해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는 지난날 이근호 목사님과의 토론이 진행된 이후에 이근호 목사님의 글들을 다시 접해 보면서, 이근호 목사님은 참으로 성경에 대해서 본인으로서도 따라가지 못할 탁월한 신학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번의 토론을 통하여 제기된 문제 중에서 제가 주장하는 성화적인 삶과, 이근호 목사님께서 주장하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삶과는, 아마 표현에 있어서는 약간 차이가 있을 뿐이지 궁극적으로는 서로 같은 의미를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심정이 들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근호 목사님이나  저는 인간의 행위 구원을 절대 주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구원 받지 못한 인간으로서는 역시 죄 밖에 나올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최근에 손무성 목사님과 이근호 목사님과의 신학적인 토론 문제는 그냥 짚고 넘길 일이 아니기에 몇 자 글을 올려봅니다.

거의 20년 넘게 이근호 목사님과 근거리에서 교제하시던 손무성 목사님께서 이근호 목사님의 잘못된 신학적 오류를 지적하신 것은 분명, 이근호 목사의 신학과 그의 삶의 현주소에 분명한 문제가 도출되었기 때문에 나온 것이지 혹자들처럼 단순한 생각을 가지고, 이제는 손무성 목사님이 세상적인 성공병에 걸려서 이근호 목사와 결별을 선언한 것처럼 속단하며 오해를 하는 것은 저들의 무지의 소치를 들어낸 것으로 밖에는 볼 수 없는 것입니다.

20년지기를 단숨에 박차고 나올 수 있는 용기는 자신의 어떤 명예욕이나 세상적인 부흥을 누리기 위해서일 것이라고 지적하는 사람들의 수준은 참으로 어리석고 한심하기 이를 데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러한 결정으로 인한 이근호 목사님과의 결별은 더 어려워진 손무성 목사님 자신의 입지를 보면 더욱 잘 나타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무성 목사님께서 이근호 목사님의 생각하시는 신학의 오류에 대하여 비판하고 나선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 일 것입니다.

거기에는 이근호 목사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복음을 사랑하는 만큼 이에 못지않게, 손무성 목사님께서도 참된 복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일 것입니다. 손무성 목사님께서 십자가 복음이 싫어서 이근호 목사님과 결별을 한 것이라고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유아수준의 생각일 뿐이겠지요.

각설하고, 이미 지난 이야기지만 손무성 목사님께서 이근호 목사님께 질문하기를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습니까?”라고 묻는 질문은 그리 단순하게 넘길 일은 아니었습니다. 주변에서 많은 사람들이 20년 넘게 이근호 목사님과 함께, 같은 길을 걸어온 손무성 목사님께서 이러한 유치한 질문을 하고 있느냐는 반응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신앙인에게 이러한 질문을 하는 것은, 참으로 너무도 뻔한, 그래서 가당치 않은 질문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20년 동안 그와 교제하면서 손무성 목사님께서 느낀 것은 과연 이근호 목사님께서 정말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있는지?”에 대한 의심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러한 손무성 목사님의 질문에 이근호 목사님께서 “예” “아니오”라고 단순하게 답변할 내용은 아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거기에는 20년 동안 그를 지켜본 손무성목사님의 질문이 원하는 바는 이근호 목사님의 전체 신학을, 아니 그의 전체 사상을 묻는 물음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는 “예”라고 대답을 한다고 해도 거기에는 분명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하고, 그리스도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의만을 자랑해야 한다는 말은, 이근호 목사님과 그를 따르는 분들에게만 주어지는 전매특허는 아닌 것입니다. 때문에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한다는 말만 앞세우고 그러한 삶을 외면하는 자들에게는 오히려 저주 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제가 지난날 이근호 목사님과 토론을 하면서 느낀 것은 이근호 목사님께서는 가짜신자, 가짜교회의 모습들의 단면을 가지고 모든 것을 짜맞출려고하는 추론적 예상에서 나온 자신의 이론을 보면서 참으로 안타깝게 생각했던적이 있었습니다. 사실 현실적으로 한국교회의 어지러운 상황은 이근호 목사님께서 주장하시는 대로 타락할 대로 타락한 자본주의적 성향이 낳은 기복주의의 산물이라고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한다고 하면서도 결국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이 세상에 집착하여, 자신의 힘을 키우고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하나님을 부르짖는 가짜신자들!

그리고 교회의 부흥과 교회당 건물을 세우기 위해서는 별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가짜교회들! 저들은 사람을 모으는 데만 급급해 하고 각종 희한한 명목의 헌금들을 개발하여 어리석은 눈먼 신도들의 호주머니를 털어다가 자선사업을 펼치는 한국교회의 모습들은 진리의 기둥과 터인 교회의 본연의 모습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그래서 결국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가고 있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이 또한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세상을 심판하시겠다고 경고함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자신들의 업적을 들어내고 가시적인 자신의 신분 향상을 꾀하면서 자신들이 세워 놓은 물질적인 부(富)를 자랑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날, 저들은 자신들이 쌓아 놓은 모든 업적들과 더불어 유황불에 사라질 것입니다.    

이러한 작금의 현실 속에서 이근호목사님은 저와 토론하시면서, 이러한 가짜신자 가짜교회의 모습들을 전제로하여 제가 주장하는 성화적인 삶은 결국 이러한 가짜교회를 만들 낼 뿐이라고 주장하시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근호 목사님은 왜 이렇게 주장하는 것일까?

제가 추측컨대 아마도 이근호 목사님은 과거에 사단이 득실거리는 가짜교회에 몸담은 사실이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근호 목사님은 거기에서 경험되어진 모든 사실에 피해 의식을 가지고 모든 교회가 동일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아무리 세상교회가 타락한다고 해도 주님께서 남겨놓은 소수의 진짜교회들을 경험하지 못한 이근호 목사님으로서는 현대교회에 대한 피해의식이 지배적일 것이란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가 합동측 교단으로부터 정죄를 받고 출교 당한 사실을 보아서도 그의 피해의식은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단죄해 버리는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근호 목사님은 자신이 경영하고 이루어 놓은 일명 “개혁노회”에 속하지 아니하는 모든 교회는 이단처럼 취급해 버리고 마는 누를 범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는 극도로 타락한 한국교회가 만든 최고의 피해자가 아마도 이근호 목사님이 아닌가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타락한 현실 속에서 그가 바라 볼 수 있었던 것은 타락한 죄밖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러한 배경을 가진 이근호 목사님의 십자가 신학은 그 어떠한 심정을 가지고 주의 일 한다고 해 봤자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여전히 죄밖에 나올 수 없다라고 설파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때문에 이러한 내용은 죄성을 가진 인간들에게는 참으로 설득력 있게 다가올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근호 목사님의 신학적 배경에는 철학이라는 지식이 폭 넓게 그를 지배하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앞서 이근호 목사님과 토론을 하면서 성화론을 제대로 알려면 칸트나 헤겔의 성화론을 공부하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이근호 목사님은 칸트나 헤겔의 무신론적 사상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입장이시겠지만, 그가 칸트나 헤겔이 주장하는 성화론을 공부나 하라고 저에게 충고한 저의(底意) 속에는, 그가 부인한다고 해도 그들의 철학 사상이 이근호 목사님의 신학사상에 어떻게든지 조력을 했던지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사실 칸트나 헤겔의 중심 사상에는 그들이 주장하는 신(이성과 관념) 앞에서의 모든 인간은 무능력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을 이근호 목사님도 똑 같이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과, 또한 그들의 사상 속에는 기계적인 예정론, 혹은 숙명론적인 예정론을 이야기 하고 있는데 이는 신 앞에서는 모든 인간은 저들의 신이 정해 놓은 이치대로 움직일 뿐이라는 로봇 사상입니다.  

이러한 이론은 죄의 권세 아래 놓인 세상 사람들에게는 최고의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죄를 합리화 시켜주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방식으로 합리와 시켜 주는가 하면, 죄의 권세가 그들에게 침입하게 되면 자신들의 의지로는 도저히 죄를 방어할 수 있는 입장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방어하기 위한 인간의 모든 노력들도 자신의 의를 드러내는 수작으로 여기며, 모든 것을 십자가에 맡기자는 이론입니다.

때문에 저들은 모든 것을 십자가 그늘 아래 있는 무덤으로 자꾸 자신들의 죄성이 담긴 행함을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이러한 이론이 성경적인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이 처럼 기쁜 일이 또 있을까?...... 왜 그들에게는 이러한 일들이 기쁜 일이 되겠습니까?

죄성을 가진 인간은 아무리 주님이 피로 값을 주고 삿을 찌라도 여전히 죄의 권세 아래 있기 때문에 죄를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죄와 싸우고자하는 행함은 자신의 의를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하며, 전투적인 신앙을 아예 포기함에서 오는 자유일 것입니다.

그래서 이근호 목사님을 따르는 분들은 아마도 죄악과 더불어서 싸우고자하는 전투적인 신앙을 포기한지 오래되었을 것이라 사료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들 나름대로 자유를 만끽하며 자기들 성깔대로 살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의 신앙고백 속에는 십자가 앞에서 자기부인이라는 삶이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 하지만, 이러한 이론은 절대 십자가 앞에서 자기 부인이라는 삶이 절대 나오지 않도록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사상은 머리 속에서만 감돌뿐 실제적인 삶속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인간 그대로의 모습만 유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인들이 믿음을 가지고 죄와 싸운다는 것은 말씀의 의미를 성령을 통하여 깨닫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한 하나님으로부터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기도를 해야 되는데, 저들은 기도 자체가 자신들의 욕심에 의한 자신들의 의를 들어내기 위한 수단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에 저들은 절대 자신들의 불쌍한 처지를 놓고 간절하게 그리고 진심에서 우러나는 기도를 전혀 할 수 없는 지경으로 스스로를 몰아넣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어느 누가 확인하지 않더라도 자신들 스스로 자신들의 입장을 잘 파악하고 있으리라 짐작해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특징은 모든 것은 주님이 이루시는 것이지 자신들은 아니라는 생각 때문에 형식적인 기도는 나올지언정 속 깊은 기도가 절대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아마 자신들의 기도 생활을 보면 스스로 잘 알고 있으리라 사료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근호 목사님의 신학사상에 함께 동조하는 사람들은 항상 죄와 더불어서 싸워봤자 100전 100패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왜 저들은 100전 100패 일까, 그것은 저들이 가지고 있는 십자가는 무능력한 십자가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상 전투에서 100전 100패를 하면 사람은 무능해져서 결국은 무방비 사태가 되는 것입니다.

사단은 바로 이러한 점을 노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의 결론은 결국 죄에 대한 무방비로 말미암은 보이지 않는 자신의 타락을 심화시키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말씀에 대하여 무감각하게 되며 모든 행위자체를 포기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들은 죄에 대해서 자신들을 무방비 상태로 방임하며 주님의 명령을 명령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방종하는 삶으로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저들에게 너무 기쁘고 자유로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와 더불어서 싸워야하는 고통이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즐겁고 쉬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입술로만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만을 자랑합니다.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한심한 인간입니다를 지속적으로 반복하면서, 오직 우리는 주님의 의만을 나타내고자 하오니 자비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하오니 우리를 살려주면 다행이고 죽여도 저희들은 어쩔 수 없습니다.

이렇게 고백할 수밖에 없는 저들은 이근호 목사님 신학의 최대 장점이며 최고의 자충수에 빠진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죄와의 싸움을 아예 포기하고 입술로만 그렇게 고백하면 되니깐 말입니다. 이러한 현상을 가리켜 죄에 대한 완전한 자유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지난 번 토론 때에도 밝혔듯이 성화라는 개념을 개혁주의 자들도 조금씩은 다르게 말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저는 모든 주장을 틀렸다고 몰아 부치는 것은 반대합니다. 왜냐하면 저 뿐만이 아니라 개혁주의 자들도 칭의와 성화의 개념을 따로 떼어서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한 사상은 루터나 칼빈도 마찬가지입니다. 루터는 칭의에 대하여 무게를 더 두는 반면, 칼빈은 성도의 성화에 무게를 더 두는 것 뿐이지, 칭의와 성화를 따로 떼어 구원 얻은 사람은 이제 예수님처럼 성화되어가기 위해서 점진적으로 노력하여 변해가야 하며 종국에는 예수님처럼 완전한 성화에 이르러야 한다고 이해하는 것은 그들의 입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처사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칼빈도 인간이 행함으로 도저히 구원 받을 수 없음을 이야기 할 뿐만 아니라 칭의와 성화를 따로 떼어서 보는 것이 아니라 동시적 개념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인터넷 상에 올라와 있는 이근호 목사님의 글을 가끔 읽어보면, 그의 최대의 강점은 구원관에 있어서 인간의 행위를 절대 허용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분은 저로서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성도의 성화적인 삶에 대한 바른 이해 없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갈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면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께서 이루어 나가는 것이지 무슨 인간들이 어찌 이루어 나갈 수 있단 말인가하고 되물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주님의 종들이 말씀 앞에 순종함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임을 알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 다시 독자들과 함께 성화적인 삶의 의미를 생각해 보고, 보다 풍성한 하나님의 지혜를 소망해 보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화”라는 단어가 주는 의미는 우리의 선입감 속에서 잘못 해석되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화”라고하면 처음 보다는 점점 더 성스러워져서 마침내 완벽한 성스러움을 드러내는 것처럼 생각하는 오해입니다. 때문에 이근호 목사님은 “성화”를 이룰려면 모든 율법을 완전히 지켜야 하기 때문에, 죄만 나오는 인간으로서는 절대 완전한 성화를 이룰 수 없다. 그래서 “성화”라는 말 자체가 모순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성화” 곧, 모든 율법을 완전히 성취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를 붙들고 살아갈 뿐이지, “성화”되기 위한 어떠한  노력도 그것은 인간의 의를 나타내기 위한 죄라고 생각하고 “성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무조건 악마라고 몰아 부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화”를 통해서 구원을 이루고자하는 것은 죄악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개혁주의 자들도 성화를 통해서 구원 얻는다고 하는 주장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이근호 목사님께서는 인간의 행위로 말미암는 구원은 절대 있을 수 없다는 그의 단호한 입장 때문에, 구원으로 말미암는 성화적인 삶에 대해서 심한 오해를 하고 있다하겠습니다.

저는 이러한 관점의 오해를 풀기 위해서 “성화”라는 단어가 갖는 늬앙스를 제거하기 위해서 “성화”를 “성화적인 삶”이라고 바꾸어 말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이미 구원 받은 사람 곧 칭의가 이루어진 사람은 동시에 이미 성화 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거듭난 사람은 동시에 성화를 이룬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구원 받기 위해서 어떠한 노력이나 수고가 필요 없는 완전한 구원 성화 말입니다. 이렇게 구원 성화를 이룬 성도는 이미 성화된 사람으로서의 합당한 믿음의 삶을 지켜 나가고자하는 삶을 가리켜 “성화적인 삶”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대부분 개혁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성화”라는 의미는 실제적인 면에서는 “성화적인 삶”이라고 표현해야 옳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근호 목사님은 모든 개혁주의자들이 점전적인 성화를 주장하는 것처럼 오해를 하고 있는데, 그것은 개혁주의자들의 글을 잘못 이해해서 오는 견해라고 생각되어지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루터나 칼빈도 칭의와 성화를 동시적인 것으로 다루고 있지, 그것을 별도로 떼어서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루터는 칭의 쪽에 무게를, 칼빈은 성화쪽에 무게를 더 두고 구원서정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그것을 오해하여 칼빈도 점진적 성화를 이야기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는 것은 글의 전체적인 상황을 이해하는 못하는 결과라고 생각되어지는 것입니다.

칼빈은 '칭의와 성화'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의 두 측면이라고 말했습니다. 칭의와 성화를 별도로 떼어서 이것도 중요하고 저것은 더 중요하다식이 아니라, '칭의와 성화'를 한 은혜로 본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예수 그리스도를 분리해 나눌 수 없듯이 이 두 가지도 떼어놓을 수가 없다는 것은 우리가 그 둘을 함께 받기 때문이다. 곧 그 분 안에서 칭의와 성화를 한꺼번에 받기 때문이다"(<기독교강요>, III.11.6.).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의 성화론이 점진적인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오해로 인하여 생긴 사상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칼빈은 이미 거듭나서 주의 자녀로서 인침을 받고 성화된 자들은 이제 성화된 자로서의 성화에 합당한 “성화적인 삶”이 나와야 된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칼빈의 글을 자신의 입장에서 일방적으로 읽고 매도하고 비방하는 일련의 글은 도무지 자격 없는 처사일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적인 상황에서 점진적인 성화를 가장 많이 주장하는 분은 아마도 남포교회에 시무하시는 박영선 목사님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그의 사상에 매료되어 있지만, 그러나 저는 그의 많은 신학적인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의 성화론은 만큼은 크게 환영하지 않고 있습니다.

본인도 다른 개혁주의자들이나 칼빈의 모든 주장을 100% 옳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에게는 우리가 배울점이 너무 많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설때까지는 그 누구도 자신의 주장이 100% 옳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모든 주장이 항상 옳다고 보는 자들은 필경 이단일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 성화적인 삶과 가장 밀접한 성경의 모든 명령어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의 문제를 이야기 하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에서 나오는 모든 명령어들은 우리가 율법이라는 신학적인 용어로 통일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율법의 기능들을 우리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주님은 분명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온전케하러 오셨다는 사실 속에서 율법은 폐하여 없어진 것이 아니라, 여전히 오늘날도 우리에게 적용되어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때문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마5:18)”고 하신 것입니다.

율법은 두 가지 기능이 있습니다. 한 가지 기능은 아담안에 있는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고발하고, 율법을 통하여 주님의 은혜 앞에 다가갈 수 있는 기능입니다. 다시 말하면 몽학선생으로서의 역할입니다. 이는 모든 인간이 율법을 지킴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존재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면서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인한 은혜만이 우리에게 구원이 된다는 사실을 가르쳐주는 기능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의 율법적 기능은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 얻은 성도들에게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고 그 뜻을 따라 살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율법적 기능이 성도들에게 제대로 작동이 되는지의 여부를 통해서 우리는 그가 실로 주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임을 스스로 자증하는 셈이 되는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은 모든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만물은 그 말씀 앞에 순종함으로서 하나님의 나라는 혼돈으로부터 질서가 드러나기 시작했고, 모든 창조세계는 하나님이 보시게 참으로 심히도 좋은 나라였습니다. 그리고 죄가 들어오기 전, 그러니까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하기 전에도 하나님의 명령은 있었습니다. 명령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명령을 지킬 수도 있고 명령을 거부할 수도 있는 자유의지가 보장되었다는 사실을 포함하고 있다하겠습니다.

만약에 아담과 하와가 명령을 거부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없었다면, 그리고 항상 그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는 존재로 만들어졌다면, 아담과 하와는 죄를 범하지 않았을 것이고,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로봇이나 다름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계적인 로봇과 같은 존재를 만들어 놓고 스위치만 누르면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을 받으시는 것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창조한 세상이 아무런 의미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어떤 기계 같은 존재를 만들어 놓고 스위치만 누르면 노래를 부르는 로봇을 만들었다고 가정할 때, 처음에는 자신이 만들어 놓은 로봇이 자기가 시키는 대로 할 때는, 한 동안은 재미를 느낄 수는 있겠지만, 영광을 받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자유의지를 주시고 하나님의 명령을 스스로 판단하여 하나님의 의도하신 뜻을 깨닫고 그 명령에 순종케 함으로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사단의 유혹을 받고 자신들의 자유의지를 발동하여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결과를 통하여 타락하게 되었고, 하나님 나라의 질서는 무너진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물어 에덴에서 쫓아 버렸고, 결국 그들과 더불어 모든 인류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멀어진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죄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단절 자체가 죄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왜 이러한 창조에 관련된 이야기를 늘어놓는가 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말씀, 곧 명령 앞에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질서 있는 하나님의 나라가 유지된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면, 대한민국 사람은 누구나 대한민국 시민으로서의 법을 지켜야 되는 것입니다. 만약 대한민국에 속한 사람이 대한민국의 법을 지키지 않는다면 대한민국의 질서는 파괴되고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무너지는 것이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모든 시민은 대한민국의 법을 지켜야 대한민국의 시민으로서의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만약 대한민국의 법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대한민국 사람이 아니라 다른 나라 사람일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법, 곧 말씀이 성도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으면 그가 곧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이죠. 이는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명령들을 지켜 나가고자 할 때 그가 곧 하나님의 백성임을 스스로 자증하는 결과라는 것입니다.

이근호 목사님은 죄밖에 나올 수 없는 모든 인간은 절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킬 수 없다 따라서 그러한 명령을 지킬 수 있다는 자체가 모순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명령을 지킬 수 없는 자들에게 무슨 명령을 요구하시겠는가? 때문에 성경에 나와 있는 모든 명령은 인간이 죄인이라는 것을 고발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지 지키라고 주신 것은 아니다라고 보는 견해입니다.  

이는 주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에게 통용되는 말이지, 이미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 얻은 성도들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 얻는 믿음을 소유하기 전에는 하나님의 모든 명령이 우리를 사망으로 끌고 가기 위한 도구로서의 역할을 했지만, 구원을 확인한 성도에게는 하나님의 명령이 그러한 방식으로 역할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은 자신이 하나님 나라의 질서 안에 이미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의 모든 명령에 순종하고자하는 열심을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고 그 질서 안에 있는 사람이 곧 천국 백성이라는 사실을 성도는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근호 목사님의 신학은 세상 사람이나 구원 받은 사람이나 모두를 똑 같은 위치에 놓고 정죄를 하기 때문에 “성화적인 삶”을 이해하지 못하고 비판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행함으로 의로워 질 수 있을까? 그것은 죽었다가 깨어나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가 받아드리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신앙인들에게 적용이 되는 것이지,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로워진 구원 얻은 성도들에게는 또다시 의로워 져야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행함으로서 의로워질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얻은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른 행함이 있어야 자신이 하나님 나라의 질서에 포함된 하나님 나라의 백성임을 스스로 확인하는 자증 역할을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고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파괴하는 자들이 어찌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고 자처할 수 있겠습니까?  

성도는 이 세상에 머물러 있을지라도 우리는 이미 보이지 않은 하나님 나라의 질서 안에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물론 자신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아니면서도, 그저 열심을 내는 것으로 자기기 구원 받았다고 착각하는 경우와는 다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처럼 의로워 질 수 있을까?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바로 이것을 위하여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여러분이 그의 발자취를 따르게 하시려고 여러분에게 본을 남겨 놓으셨습니다. (HSN 벧전 2:21)”

이 말씀은 구원 받은 성도는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에 동참해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그 길에 동참한다는 것은 주님의 명령이 우리에게 전달됨이 없이 이루어지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가 명심해야할 것입니다.

주님의 명령은 영적으로 죽어있는 자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죽어 있는 자는 의식이 없어 아무런 명령을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명령을 듣는 자는 주님과 함께 십자가 안에서 죽고 주님과 함께 살아난 자, 곧 영생의 부활을 맛 본 자만이 주님의 명령에 귀를 기울이고 죄에 대해서 전투적인 신앙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곧 이것이 성도의 “성화적인 삶”이라고 말씀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님의 명령을 지키며 완전한 “성화적인 삶”을 살아 갈 수 있을까? 앞서서 말씀을 드렸지만, 이미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완전히 거듭난, 곧 성화를 이룬 성도들이 완전한 성화를 이루어 가기위한 별도의 프로젝트는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미 성화를 이룬 성도들의 마음 속에는 죄의 권세가 물러가고 주님이 좌정하시고 성령의 통치를 받기 때문에 그 안에서 죄가 나오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이미 밖으로 밀려난 죄의 권세가 기회를 타서 눈에 보이는 세상적인 힘을 가지고 자꾸 안으로 침입하기 위한 공격이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안으로 침입하여 들어오는 사단의 권세와 더불어 전투하여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내안에 계신 성령을 의지하여 기도하게 되고, 죄와 타협할려고 하는 우리의 의지와 자존심을 꺽고 복종시키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이러한 전투 속에서 때로는 우리가 연약하여 여전히 죄의 권세로 말미암아 순간 순가 상처를 입고 더럽힘을 힙게 되지만, 성도는 우리를 끝까지 보호하시는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회개하게 되고 더럽혀진 부분을 주님께서 다시 씻어주시고 닦아 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또 다시 일어서서 죄와 더불어 전투적인 삶을 일평생 지속하고 일어서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의 반복적인 모습이 바로 성도의 “성화적인 삶”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는 세족식에서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다(요13:10)”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이미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완전한 성화를 이루었지만, 일생동안 살면서 죄의 공격으로 말미암아 더럽혀지는 부분에 대해서는 우리가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에 힘입어 회개하고 주님 앞에 나오면 주님이 친히 우리의 더러운 부분을 씻겨주는 모습을 통하여 성도는 날마다 새롭게 전투적인 신앙을 가다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의 “성화적인 삶”인 것입니다. 이미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말미암아 깨끗해 진 사람은 자신이 더럽혀질까봐 노심초사 할 뿐만 아니라 부분적으로 더럽혀질 때 마다 씻게 되는 것이 바른 이치일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더럽혀진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이 복이있다(계22:13)"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자신이 아예 더럽혀진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자신의 더러움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씻는 회개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성도의 “성화적인 삶”은 회개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으며, 날마다 자신을 말씀 앞에 내려놓고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주님의 명령대로 살지 못하는 나약함을 고백하며 주님의 도우심을 소원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12-14을 보겠습니다. 여기에 보면,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는 삶을 살아나가게 될 때에, 그 배후에는 항상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이며 이미 구원 얻은 성도들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십자가 무덤에서 죽기만 했지 살지 못한 영혼은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여전히 죽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들은 예수님의 산상수훈도 죽이는 율법으로만 보고 있지, 성도가 가지고 살아가야할 목표지향점으로는 보고 있질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의 두 가지 기능을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율법은 이미 구원 얻은 자에게는 완벽한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각자의 사명과 관련하여 모든 성도들에게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는 지난번 이근호 목사님과의 토론 내용 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더 이상 거론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성도는 주님이 내안에 계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들 자신이 성전임을 말하고 싶을 뿐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성전은 항상 깨끗해져야하는 속성이 있음을 우리는 구약을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세상의 결탁으로 말미암아 더럽혀질 수도 있는 우리의 연약함을 항상 주님의 보혈의 피로 항상 새롭게 씻어내고 정결한 마음으로 주님 앞에 바로 서는 주님의 명령을 명령답게 인식하는 데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아무쪼록 이글을 읽는 모든 분들 금년 한해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하나님이 뜻을 이루어가는 기쁨이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 해지는 농촌마을 서평택에서,    더불어사는 교회   김영길 올림 -------

* 십자가 마을에서 옮긴글입니다.

출처 : 양무리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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