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규 교수의 “평양대부흥운동의 성격과 의의”에 대한 논평 이은선 교수 (안양대학교 신학대학원) 박용규 교수님은 이 논문을 통하여 민경배 교수의 연구 이후에 한국 교회에 널리 퍼져 있는 한국교회의 비정치화라는 평양부흥운동에 대한 잘못된 평가와 시각을 교정하고 순수한 영적 각성운동이라는 평양대부흥운동의 올바른 성격을 규명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박 교수는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먼저 민경배, 이만열, 유동식, 이 덕주, 서 정민 등을 중심으로 제기된 평양대부흥운동에 대한 평가의 성격이 일맥상통함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평양 대부흥 운동을 부정적으로 평가한 첫 번째 인물은 부흥운동이 일어나던 당시에 평양을 방문하고 난 후에 이 부흥운동을 한국인들의 “비정상적인 심리적 성품”에서 발생했다고 평가했던 예일대 교수인 조지 래드였다. 그러나 그 부흥의 현장에 있었던 찰스 클락은 평양대부흥운동을 이러한 집단 심리현상으로 파악하는 견해를 반박하여 이 나라와 이 민족을 복음화시키시려는 놀라운 성령의 역사였다고 평가하였다. 그런데 1970년대에 민 경배 교수에 의해 평양대부흥운동이 민족의 정치적 위기에서 교회를 비정치화시킨 운동으로 평가되었다. 민경배 교수의 이러한 평가에는 1970년대에 우리나라에 극일운동의 일환으로 크게 대두되어 전개되었던 민족사관의 영향도 없이 않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민족사관은 한국인이 중심으로 전개된 민족적인 가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외부의 영향을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민경배 교수의 민족교회론은 한국인들에 의한 민족교회 형성의 시도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반면에 선교사들의 의해 복음이 전해진 것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시기에 근대 한국사를 연구하다 유신정권에 의해 해직을 당한 후에 교회사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이 만열 교수의 경우에도 민족의식을 중심으로 교회 역사를 평가하려는 경향이 강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만열 교수의 경우에 평양대부흥운동을 “민족적 울분을 종교적 카타르시스시킨 것”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1970년대 보수교회등의 대규모 집회를 유신독재 하에서 민중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종교적으로 카타르시스한 것이라 보는 것과 동일한 관점으로 보인다. 유동식교수도 1960년대부터 한국교회의 토착화론을 주장하여 민족적 가치를 중요하게 평가하였다. 민족교회론을 주장하는 민경배 교수와 토착화론을 주장하는 유동식 교수의 제자들인 이덕주, 서정민 교수들이 그러한 연속선상에 서 있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그들이 평양대부흥운동을 비정치화외 비민족화로 해석하는 것은 자신들의 역사관에 의해 역사적 사실을 해석한 경우라고 볼 수 있을 것같다. 그러므로 민경배 교수와 이 만열 교수 등이 평양대부흥운동을 교회의 비정치화 운동으로 평가한 것은 선교사들이 한국교회를 비정치화하려고 했던 그러한 측면을 지나치게 확대 해석하였을 뿐만 아니라, 교회사의 초월적인 측면은 전혀 외면한 채 지나치게 민족사적인 관점에서만 해석한 것으로 판단된다. 박 용규 교수는 이러한 견해들이 가지고 있는 근거와 논리들이 지나치게 빈약하다는 것을 올바르게 지적하고 있다. 특히 블레어 선교사의 저술을 비정치화 해석의 근거로 사용하나, 박 교수는 이것이 그러한 취지의 글이 아니라, 민족의 위기 앞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었다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박 용규 교수는 이렇게 평양대부흥운동을 한국교회의 비정치화로 해석하는 견해를 반박하고 말씀과 기도와 회개의 성령의 역사를 통한 순수한 영적 각성운동이었다는 것을 밝히기 위하여 세 가지 반대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첫째로 부흥운동이 정치적 소망이 끊어진 상황에서 종교적 소망으로 대치하려고 했다는 그들의 견해는 부흥운동이 인간의 노력과 계획으로 진행될 수 있다는 잘못된 신학적 견해에 입각해 있다. 영적 각성을 수반하는 참된 부흥운동은 오직 성령의 주권적인 역사로만 일어날 수 있다. 둘째로 평양대부흥운동을 한국의 정치사회적인 현상으로만 해석하려는 것은 20세기 초반에 전 세계적으로 일어난 부흥운동과의 연계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평양의 대부흥운동은 이미 1905년부터 일어난 웨일즈의 부흥운동과 인도의 부흥운동과의 연속선상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미 본 논문에서도 지적되고 있는 바와 같이, 프란손, 저다인, 그리고 하워드 존스톤 같은 선교사들을 통하여 웨일즈와 인도의 부흥운동이 한국에 알려졌고 그러한 부흥운동이 한국부흥운동의 큰 자극이 되었다. 그리고 인도의 1904년의 부흥운동의 결과로 작성된 12신조가 한국교회가 대부흥운동의 결과로 1907년에 독노회가 조직되면서 그대로 한국장로교회의 신조로 채택되었다. 이러한 것들은 한국교회의 부흥운동이 인도의 부흥운동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증거라고 보여진다. 셋째로 부흥운동이 비정치화의 결과로 일어난 것이라는 해석은 그 부흥운동이 기도회와 사경회와 연결된 것을 간과하는 해석이다. 박 용규 교수의 평양대부흥운동에 대한 해석은 지금까지의 비정치화의 해석보다는 훨씬 더 폭넓은 관점에 입각하여 풍부한 객관적인 자료들을 제시하고 있다. 지금까지 비정치화의 해석이 지나치게 민족주의적인 관점과 종교사회학적인 관점에서 해석하여 당시 한국의 정치사회적인 요인만을 지나치게 부각시켰다. 그리고 그들은 부흥운동을 해석할 때에 인간들의 차원에서만 진행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박용규 교수는 평양대부흥운동을 한국의 상황뿐만 아니라 전세계교회의 흐름과의 연계성 속에서 해석할 뿐만 아니라, 부흥운동은 인간들의 차원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까지 고려하여 종합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이러한 한국교회사의 해석방법론은 이미 김영재 교수에 의해 제시된 바가 있다. 김영재 교수는 그의 『한국교회사』에서 민경배 교수와 이 만열 교수의 한국교회사 해석방법론을 비판하면서 한국교회와 세계교회사의 만남과 동시에 인간의 수평적 차원과 하나님의 수직적 차원을 종합하여 한국교회사의 세계교회사와의 연계성과 동시에 한국교회사의 특수성을 밝혀야 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리고 평양대부흥운동에 대해서도 이러한 시각을 제시한 바 있다. 그런데 박용규 교수님은 김영재 교수님의 그러한 해석틀을 사용하면서 사료들을 훨씬 더 구체적으로 발굴하여 한국 사료뿐만 아니라 선교사들의 다양한 기록들을 종합하여 평양대부흥운동의 성격을 올바르게 규명하고 있다. 평양대부흥운동은 말씀과 기도와 회개의 성령의 역사를 통한 순수한 영적 각성운동이었다. 원산에서 하디의 회심과 부흥운동이 말씀 공부와 기도 운동 가운데 회개의 역사로 시작되었다. 그 이후 평양대부흥운동도 그러한 성격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대부흥운동은 말씀과 기도를 통한 순수한 회개운동으로서의 영적 각성운동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한국의 영적 각성운동이 웨일즈와 인도 같은 다른 지역에서보다 한국에서 더 지속적이고 많은 결실을 맺은 이유는 선교지 분할운동, 한국인에 의한 전도, 그리고 협력선교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요인들과 함께 한국평양대부흥운동의 가장 중요한 성격이 1890년부터 채택된 네비우스 선교정책을 통한 성경공부를 중심으로 하는 사경회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미 1900년대 초부터 전국 교회에서는 일 년에 일주일 정도씩 사경회를 하였고 주요 도시들에서는 연합사경회가 열렸다. 이러한 사경회는 기도와 성경공부와 전도와 저녁의 전도집회가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선교사들은 처음부터 감정을 고조시키는 부흥회보다 사경회를 선호하였다. 그리고 평양대부흥운동도 결국은 1907년 1월에 열린 남자사경회에서 발생하였다. 이렇게 말씀과 기도에 토대를 둔 평양대부흥운동은 성령의 강력한 역사 가운데서도 혼란이나 무질서가 없이 진행될 수 있었다. 웨일즈대부흥운동이 에반 로버츠의 주도로 이루어졌을 때에 기도와 찬양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그래서 감정중심의 열광주의의 부흥운동이었다는 부정적인 평가가 이루어졌는데, 이에 반해 평양의 대부흥운동은 말씀 중심의 사경회와 연결된 성령의 강력한 역사로 회개를 통한 영적 각성과 성결의 삶이 추구되어 당시 사회의 도덕적 삶의 수준을 한 단계 더 높은 것으로 끌어 올렸다. 그리고 대부흥운동을 통한 교회성장은 1907년에 독노회를 조직하고, 1909년의 100만명 구령으로, 1912년의 총회조직으로 이어졌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1919년 3.1운동의 중추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이러한 한국교회의 놀라운 성장은 말씀과 기도로 무장하고 전도하던 사경회 위에 하나님께서 1907년에 한국교회에 비상한 성령의 부어주심을 통하여 이루어진 순수한 영적 각성의 결과이다. 박교수님의 연구 가운데 주목되는 것이 1907년의 평양대부흥운동과 오순절운동의 연관성 문제이다. 후대의 베어드의 기록이지만 이미 방언이 나타났는데, 칼빈주의 신학을 가지고 있던 선교사들의 억제되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앞으로 평양대부흥운동에서 일어났던 영적 각성과 함께 이러한 오순절 운동의 현상에 대한 좀 더 심도 있는 연구가 이루어져야할 것으로 보인다. 역사 연구가 사실에 기초해서 이루어져야 한다면, 당시의 사료발굴을 통하여 이러한 측면의 성격규명이 앞으로 더 분명하게 이루어져야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평양대부흥운동은 한국이 일본에 의해 병탄되어가는 가장 큰 민족의 위기 가운데 일어난 것이었지만, 평양대부흥운동의 결과로 교회가 영적 각성이 이루어지고 양적으로 성장했을 때 오히려 일제의 강점기의 일제의 모진 핍박을 이겨낼 수 있는 영적 원동력을 형성하였을 뿐만 아니라, 교회가 비정치화 비민족화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민족을 더 사랑하고 나라와 민족의 독립을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는 핵심세력이 되었다. 그러므로 평양대부흥운동은 민족적 위기라는 종교사회적인 배경이 하나의 원인이 되었지만, 성령의 강력한 역사를 통한 순수한 영적인 각성으로 진행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은 오히려 더 투철한 민족의식을 가지고 나라를 사랑하는 건강한 조선국민이 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대부흥운동은 교회를 비정치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다운 의미에서 민족을 사랑하는 정치세력을 형성한 셈이다. |
출처 : 한우리성경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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