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과 부흥;
박용규 교수의 “평양대부흥운동 성격과 의의”에 대한 신학적논평
문병호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평양대부흥 운동 백 주년을 일 년 앞두고 발제된 시의적절한 논고를 통해서 박용규 교수님께서는 이 운동의 성격과 의의를 역사적 관점에서 일목요연하게 개진하고 있다. 주로 선교적 혹은 선교학적 관심에서 논의되어 왔던 이 운동의 역사적 의의를 학문적으로 부여하고 수립하고자 시도했던 학자들은 주로 소위 전환기의 양심을 대변했던 역사학자들이었다. 대체로 그들은 이 운동을 정치적으로 가장 민감한 시기를 살았던 기독교인들의 “비정치화 현상”으로 파악했다. 그럼으로써 당시와 유사함을 보였던 197O년대와 80년대 그리고 그 이후의 기독교인들의 신앙 행태를 간접적으로나마 비판하고자 했다.
비정치화는 독단론이나 신비주의나 허무주의를 배태할 수는 있어도 부흥에 이르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평양대부흥운동은 탈사회적이지 않았으며 비현실적이지 않았다. 그것은 사회 변화를 초래했으며 현실에 대한 자각과 참여를 낳았다. 그것은 사회 변화를 지향했으며 그 열매를 풍성히 맺었다. 음란과 도박을 물리치고 고질적인 음주의 폐해와 축첩의 관습을 폐기하고자 했다. 하나님 나라의 자녀로서 반상(班常)의 차별을 허물고,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로서 직업의 귀천을 타파하고자 했다. 또한 그것은 현실에 대한 깊은 인식 가운데서 국가와 사회의 계몽과 의식변화를 지향했다. 이후 독립 운동의 선구에는 항상 기독교인들이 있었으며 자주, 자강(自彊), 자립을 앞서서 외친 것도 교회였다. 평양대부흥운동은 비정치화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숨어 있던 삭개오가 주님을 만남으로써 자신의 집 문과 곳간 문을 열고 사람들에게 나아가게 된 것과 같이 교회의 문을 세상에 연 운동이었다. 논고에서 주장되듯이 평양대부흥운동은 전세계적인 부흥 운동과 맥을 같이 하는 말씀과 성령 운동이었다. 그것은 시대적 정황을 반영했다. 그러나 시대적 정황의 ‘필연적 산물’은 아니었다. 하나님은 스스로 기뻐하시는 주권적 의지로 섭리하시지 사람들의 인과 관계에 매이지 아니하신다. 역사와 현실을 떠난 부흥은 없다. 그러나 특정한 조건이 무르익었다고 당연히 부흥으로 귀결되지는 않는다. 웨일즈 부흥과 인도 부흥과 미국의 대각성 운동이 시사하듯이 부흥의 조건은 특정한 환경이나 여건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이며, 인간 편에 조건이 있다면 그것은 초대 교회 성도들과 같이 하나님의 부흥의 역사를 기다리며 전혀 모이기에 힘쓰고 기도하는 것이다.
평양대부흥운동의 성령 체험은 혹자가 비판 하듯이 “비상적인 심리적 성품”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이 심령을 조명하여 나타난 능력이었다. 초대 교회 오순절 성도들이 보혜사 성령을 받아서 그리스도의 일을 기억하고 행한 것과 같이, 사경회의 은혜를 받은 성도들은 받은 말씀대로 회개하고, 빚진 것을 갚고, 음란한 것은 물리치고, 소유를 팔아서 이웃을 공궤하고,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사회를 계몽하고자 학교와 병원을 짓는데 헌신했다. 그들은 칼빈이 성도의 삶의 요체라고 역설한 ‘미래를 묵상하며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는 삶’을 살고자 했다.
기독교사는 영적 부흥이 항상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것이며 회개를 수반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오순절 성령 역사는 차치하더라도 블레셋과의 전운이 감도는 가운데 사무엘을 위시한 이스라엘 백성이 행한 미스바에서의 회개와 유수(幽囚)의 생활을 마치고 시온으로 귀환한 에스라를 위시한 이스라엘 백성이 새 나라 건설을 위한 소망을 가지고 행한 회개의 역사에는 모두 말씀과 성령의 특별한 역사가 있었다. 우리는 초대 교회가 부흥하여 로마 정부로부터 공인받고 국교가 되는 시기에 성경의 정경화 작업이 있었음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칼빈의 제네바 종교 개혁을 영적 부흥이라고 부를 수 있을진대 그 배후에는 말씀 교육과 성령의 주권적 역사에 대한 확신이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부흥을 성령의 주권적인 역사이며 하나님의 절대적인의지에 따른 것이라고 했다. 그는 충실한 성경 주석을 기초로 하여 청교도적 적용이 있는 교리적 해설을 통하여서 부흥운동을 이끌었다. 부흥의 모습과 동기와 열매도 다양하지만, 말씀과 성령의 역사가 없는 부흥은 없었다.
성경 자체를 제외하고는 어느 책보다 부흥의 메시지를 더 잘 전한 책으로 평가 받는 [부흥: 그것의 법칙과 지도자들(Revivals: Their Laws and Leaders, 1910)]에서 스코틀란드 장로교회의 목사였던 저자 제임스 번스(James Burns)는 앗시시의 프란시스, 플로렌스의 사보나롤라, 루터, 칼빈, 녹스, 웨슬리의 부흥 운동에 나타난 말씀과 성령의 역사를 깊이 다루면서 부흥 운동의 법칙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1) [복음의] 진보(the law of progress)의 법칙: 하나님은 점진적으로 복음이 땅 끝 까지 전파되게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시옵소서”(합 3:2) 라고 기도해야 한다.
2) 영적 성장의 법칙(the law of spiritual growth): 부흥은 항상 일정하게 일어나지 않는다.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신 29:29). 개인과 회중과 교회의 성장과 부흥에는 마치 밀물과 썰물과 같이 때가 있다.
3) 때의 법칙(the law of periodicity): 부흥의 때는 하나님만이 아신다(행 1:7). 그러므로 영적인 분별력을 얻기 위해서 기도해야 하며 시대의 징조를 볼 수 있어야 한다.
4) 지도력의 법칙(the law of leadership): 하나님은 사무엘, 느헤미야, 베드로, 바울 같은 특정한 일꾼들을 통하여서 일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보이지 아니하시는 섭리의 손은 보이는 손인 인류를 통해서 작용한다.
5) 다양성의 법칙(the law of variety): 하나님은 특정한 때에 특별한은사를 주셔서 시대와 환경에 따른 고유한 부흥을 이루신다. 루터의 종교 개혁 1기 부흥은 진리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했으며 칼빈의 종교 개혁 2기 부흥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서 거룩한 삶을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대한 확신으로 뜨거웠으며, 녹스의 스코틀랜드 부흥 운동은 새로운 나라를 이루는 열정과 담대함과 우직 주님께서 교회의 머리 되심에 대한 선포가 가득했으며, 웨슬리와 에드워드의 부흥 운동은 구원을 확신하는 성도들의 경건한 삶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했다.
6) 후진의 법칙(the law of recoil): 위대한 부흥 후에는 복음의 후퇴가 있다. 그러나 후퇴는 새로운 부흥을 예기한다. 하나님은 남은 자를 통하여서 작정하신 부흥을 끝까지 이루시기 때문이다.
7) 교리의 법칙(the law of doctrine): 성경 말씀의 교회적 고백인 교리에 대한 신실함이 없는 부흥은 없다. 그러므로 교회적 사경은 개인적 기도와 더불어서 부흥의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박용규 교수님께서 지적하신 평양대부흥 운동의 의의와 성격에 비추어서 이상의 법칙들을 파악할 때 새로운 부흥을 위해서 우리가 구하여야 할 것과 힘써야 할 것이 무엇인지 시사(示唆)하는 바가 크다고 할 것이다. 진정한 부흥은 인간으로부터 나가는 것이 아니라, 에드워드가 말했듯이 하나님으로부터 “흘러 들어옴(infusion)”이며 하나님의 “부어주심(outpouring)”이다. 부흥의 실체가 이와 같다면 부흥의 현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다. 부흥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가 성도들과 잠재적인 성도들 가운데서 이루어짐에 다름 아니다. 부흥은 시대 심리가 동시적으로 발출된 것이 아니며, 정치화 혹은 비정치화의 산물도 아니다. 그것은 인간 편에서 추구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이루시는 것이다. 평양대부흥운동에 대한 정치․사회적 분석은 현상에 대한 이해에는 이르게 하겠으나 그 근본을 제시할 수는 없다. 오순절 성령 사건이 그렇듯이 평양대부흥운동의 본질에 대한 접근도 ‘신학적으로만’ 가능하다.
개인적으로 논평자는 부흥의 신학적 의미를 경건(pietas, piety, godliness)이라는 개념에서 찾고자 한다. 경건은 먼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요소가 있어야 한다. 이는 오직 위로부터 아래로(downward) 주시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의존한다. 즉 말씀하시는 분이 말씀하셔서 말씀하시는 분을 드러내셔야 한다. 그리고 경건에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요소가 있어야 한다. 지금도 보좌 우편에서 올라가신 그 모습대로 우리를 위해서 중보하시는 그리스도의 의를 계속적으로 전가 받아야만 한다. 그리고 경건에는 아래로부터 위로 올려 드리는(upward) 예배가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 의를 계속 전가 받아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부요함에 이르고 자신을 영적 산 제물로 삼아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경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경건의 은혜로 성도는 수직적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며 수평적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참 거룩함에 이르게 된다. 평양대부흥운동의 처음과 끝은 이러한 경건의 실체와 능력을 잘 보여준다.
논고에서 강조된 바와 같이 당시 다른 사경회와 마찬가지로 장대현 교회의 사경회도 기도와 말씀와 전도로 이루어 졌다. 당시는 마치 초대 교회 카타코움의 시대와 같아서 성도들은 전도를 위해 힘썼지만 아직 사회의 변화를 주도하거나 이웃을 구제하는 단계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교회는 이제 함께 모여서 말씀보고 기도하고 전도할 뿐만 아니라 구체적으로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할 단계에 와 있다. 이제는 정치화와 비정치화 자체를 양극적으로 파악할 것이 아니라, 이웃을 총체적으로 안고 사랑하며 이웃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 주님이 가지셨던 바와 같은 관심을 갖도록 해야 한다. 사회 변화와 현실 개혁은 평양대부흥운동의 결과였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에게 그것은 하나의 과정이다. 우리는 나 자신이 변화됨으로써 우리가 변화되고 우리가 변화됨으로써 이웃과 사회가 변화됨을 통하여서 부흥에 이르도록 기도하고 노력해야 한다. 평양대부흥운동의 교훈은 우리가 그곳에 머무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 가는데 있다. 교회는 이웃을 안고 기도해야 하며 시대를 안고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이 시대에 주시는 하나님의 또 다른 부흥을 소망해야 한다. 오직 이러한 부흥이 있을 때 우리 교회는 4세기 이후의 교회의 전철을 밟지 않게 될 것이다. 비록 명시적으로 제시되지는 않았지만 본 논고의 궁극적인 교훈은 이와 다름이 없다고 믿는다.
참으로 귀하게 우리를 깨우셔서 부흥을 사모하며 기도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이 일을 위해서 헌신하시는 박용규 교수님께 더하시길 빌며 논평에 가름한다.
박용규 교수의 “평양대부흥운동 성격과 의의”에 대한 신학적논평
문병호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평양대부흥 운동 백 주년을 일 년 앞두고 발제된 시의적절한 논고를 통해서 박용규 교수님께서는 이 운동의 성격과 의의를 역사적 관점에서 일목요연하게 개진하고 있다. 주로 선교적 혹은 선교학적 관심에서 논의되어 왔던 이 운동의 역사적 의의를 학문적으로 부여하고 수립하고자 시도했던 학자들은 주로 소위 전환기의 양심을 대변했던 역사학자들이었다. 대체로 그들은 이 운동을 정치적으로 가장 민감한 시기를 살았던 기독교인들의 “비정치화 현상”으로 파악했다. 그럼으로써 당시와 유사함을 보였던 197O년대와 80년대 그리고 그 이후의 기독교인들의 신앙 행태를 간접적으로나마 비판하고자 했다.
비정치화는 독단론이나 신비주의나 허무주의를 배태할 수는 있어도 부흥에 이르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평양대부흥운동은 탈사회적이지 않았으며 비현실적이지 않았다. 그것은 사회 변화를 초래했으며 현실에 대한 자각과 참여를 낳았다. 그것은 사회 변화를 지향했으며 그 열매를 풍성히 맺었다. 음란과 도박을 물리치고 고질적인 음주의 폐해와 축첩의 관습을 폐기하고자 했다. 하나님 나라의 자녀로서 반상(班常)의 차별을 허물고,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로서 직업의 귀천을 타파하고자 했다. 또한 그것은 현실에 대한 깊은 인식 가운데서 국가와 사회의 계몽과 의식변화를 지향했다. 이후 독립 운동의 선구에는 항상 기독교인들이 있었으며 자주, 자강(自彊), 자립을 앞서서 외친 것도 교회였다. 평양대부흥운동은 비정치화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숨어 있던 삭개오가 주님을 만남으로써 자신의 집 문과 곳간 문을 열고 사람들에게 나아가게 된 것과 같이 교회의 문을 세상에 연 운동이었다. 논고에서 주장되듯이 평양대부흥운동은 전세계적인 부흥 운동과 맥을 같이 하는 말씀과 성령 운동이었다. 그것은 시대적 정황을 반영했다. 그러나 시대적 정황의 ‘필연적 산물’은 아니었다. 하나님은 스스로 기뻐하시는 주권적 의지로 섭리하시지 사람들의 인과 관계에 매이지 아니하신다. 역사와 현실을 떠난 부흥은 없다. 그러나 특정한 조건이 무르익었다고 당연히 부흥으로 귀결되지는 않는다. 웨일즈 부흥과 인도 부흥과 미국의 대각성 운동이 시사하듯이 부흥의 조건은 특정한 환경이나 여건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이며, 인간 편에 조건이 있다면 그것은 초대 교회 성도들과 같이 하나님의 부흥의 역사를 기다리며 전혀 모이기에 힘쓰고 기도하는 것이다.
평양대부흥운동의 성령 체험은 혹자가 비판 하듯이 “비상적인 심리적 성품”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이 심령을 조명하여 나타난 능력이었다. 초대 교회 오순절 성도들이 보혜사 성령을 받아서 그리스도의 일을 기억하고 행한 것과 같이, 사경회의 은혜를 받은 성도들은 받은 말씀대로 회개하고, 빚진 것을 갚고, 음란한 것은 물리치고, 소유를 팔아서 이웃을 공궤하고,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사회를 계몽하고자 학교와 병원을 짓는데 헌신했다. 그들은 칼빈이 성도의 삶의 요체라고 역설한 ‘미래를 묵상하며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는 삶’을 살고자 했다.
기독교사는 영적 부흥이 항상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것이며 회개를 수반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오순절 성령 역사는 차치하더라도 블레셋과의 전운이 감도는 가운데 사무엘을 위시한 이스라엘 백성이 행한 미스바에서의 회개와 유수(幽囚)의 생활을 마치고 시온으로 귀환한 에스라를 위시한 이스라엘 백성이 새 나라 건설을 위한 소망을 가지고 행한 회개의 역사에는 모두 말씀과 성령의 특별한 역사가 있었다. 우리는 초대 교회가 부흥하여 로마 정부로부터 공인받고 국교가 되는 시기에 성경의 정경화 작업이 있었음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칼빈의 제네바 종교 개혁을 영적 부흥이라고 부를 수 있을진대 그 배후에는 말씀 교육과 성령의 주권적 역사에 대한 확신이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부흥을 성령의 주권적인 역사이며 하나님의 절대적인의지에 따른 것이라고 했다. 그는 충실한 성경 주석을 기초로 하여 청교도적 적용이 있는 교리적 해설을 통하여서 부흥운동을 이끌었다. 부흥의 모습과 동기와 열매도 다양하지만, 말씀과 성령의 역사가 없는 부흥은 없었다.
성경 자체를 제외하고는 어느 책보다 부흥의 메시지를 더 잘 전한 책으로 평가 받는 [부흥: 그것의 법칙과 지도자들(Revivals: Their Laws and Leaders, 1910)]에서 스코틀란드 장로교회의 목사였던 저자 제임스 번스(James Burns)는 앗시시의 프란시스, 플로렌스의 사보나롤라, 루터, 칼빈, 녹스, 웨슬리의 부흥 운동에 나타난 말씀과 성령의 역사를 깊이 다루면서 부흥 운동의 법칙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1) [복음의] 진보(the law of progress)의 법칙: 하나님은 점진적으로 복음이 땅 끝 까지 전파되게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시옵소서”(합 3:2) 라고 기도해야 한다.
2) 영적 성장의 법칙(the law of spiritual growth): 부흥은 항상 일정하게 일어나지 않는다.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신 29:29). 개인과 회중과 교회의 성장과 부흥에는 마치 밀물과 썰물과 같이 때가 있다.
3) 때의 법칙(the law of periodicity): 부흥의 때는 하나님만이 아신다(행 1:7). 그러므로 영적인 분별력을 얻기 위해서 기도해야 하며 시대의 징조를 볼 수 있어야 한다.
4) 지도력의 법칙(the law of leadership): 하나님은 사무엘, 느헤미야, 베드로, 바울 같은 특정한 일꾼들을 통하여서 일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보이지 아니하시는 섭리의 손은 보이는 손인 인류를 통해서 작용한다.
5) 다양성의 법칙(the law of variety): 하나님은 특정한 때에 특별한은사를 주셔서 시대와 환경에 따른 고유한 부흥을 이루신다. 루터의 종교 개혁 1기 부흥은 진리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했으며 칼빈의 종교 개혁 2기 부흥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서 거룩한 삶을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대한 확신으로 뜨거웠으며, 녹스의 스코틀랜드 부흥 운동은 새로운 나라를 이루는 열정과 담대함과 우직 주님께서 교회의 머리 되심에 대한 선포가 가득했으며, 웨슬리와 에드워드의 부흥 운동은 구원을 확신하는 성도들의 경건한 삶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했다.
6) 후진의 법칙(the law of recoil): 위대한 부흥 후에는 복음의 후퇴가 있다. 그러나 후퇴는 새로운 부흥을 예기한다. 하나님은 남은 자를 통하여서 작정하신 부흥을 끝까지 이루시기 때문이다.
7) 교리의 법칙(the law of doctrine): 성경 말씀의 교회적 고백인 교리에 대한 신실함이 없는 부흥은 없다. 그러므로 교회적 사경은 개인적 기도와 더불어서 부흥의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박용규 교수님께서 지적하신 평양대부흥 운동의 의의와 성격에 비추어서 이상의 법칙들을 파악할 때 새로운 부흥을 위해서 우리가 구하여야 할 것과 힘써야 할 것이 무엇인지 시사(示唆)하는 바가 크다고 할 것이다. 진정한 부흥은 인간으로부터 나가는 것이 아니라, 에드워드가 말했듯이 하나님으로부터 “흘러 들어옴(infusion)”이며 하나님의 “부어주심(outpouring)”이다. 부흥의 실체가 이와 같다면 부흥의 현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다. 부흥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가 성도들과 잠재적인 성도들 가운데서 이루어짐에 다름 아니다. 부흥은 시대 심리가 동시적으로 발출된 것이 아니며, 정치화 혹은 비정치화의 산물도 아니다. 그것은 인간 편에서 추구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이루시는 것이다. 평양대부흥운동에 대한 정치․사회적 분석은 현상에 대한 이해에는 이르게 하겠으나 그 근본을 제시할 수는 없다. 오순절 성령 사건이 그렇듯이 평양대부흥운동의 본질에 대한 접근도 ‘신학적으로만’ 가능하다.
개인적으로 논평자는 부흥의 신학적 의미를 경건(pietas, piety, godliness)이라는 개념에서 찾고자 한다. 경건은 먼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요소가 있어야 한다. 이는 오직 위로부터 아래로(downward) 주시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의존한다. 즉 말씀하시는 분이 말씀하셔서 말씀하시는 분을 드러내셔야 한다. 그리고 경건에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요소가 있어야 한다. 지금도 보좌 우편에서 올라가신 그 모습대로 우리를 위해서 중보하시는 그리스도의 의를 계속적으로 전가 받아야만 한다. 그리고 경건에는 아래로부터 위로 올려 드리는(upward) 예배가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 의를 계속 전가 받아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부요함에 이르고 자신을 영적 산 제물로 삼아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경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경건의 은혜로 성도는 수직적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며 수평적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참 거룩함에 이르게 된다. 평양대부흥운동의 처음과 끝은 이러한 경건의 실체와 능력을 잘 보여준다.
논고에서 강조된 바와 같이 당시 다른 사경회와 마찬가지로 장대현 교회의 사경회도 기도와 말씀와 전도로 이루어 졌다. 당시는 마치 초대 교회 카타코움의 시대와 같아서 성도들은 전도를 위해 힘썼지만 아직 사회의 변화를 주도하거나 이웃을 구제하는 단계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교회는 이제 함께 모여서 말씀보고 기도하고 전도할 뿐만 아니라 구체적으로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할 단계에 와 있다. 이제는 정치화와 비정치화 자체를 양극적으로 파악할 것이 아니라, 이웃을 총체적으로 안고 사랑하며 이웃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 주님이 가지셨던 바와 같은 관심을 갖도록 해야 한다. 사회 변화와 현실 개혁은 평양대부흥운동의 결과였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에게 그것은 하나의 과정이다. 우리는 나 자신이 변화됨으로써 우리가 변화되고 우리가 변화됨으로써 이웃과 사회가 변화됨을 통하여서 부흥에 이르도록 기도하고 노력해야 한다. 평양대부흥운동의 교훈은 우리가 그곳에 머무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 가는데 있다. 교회는 이웃을 안고 기도해야 하며 시대를 안고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이 시대에 주시는 하나님의 또 다른 부흥을 소망해야 한다. 오직 이러한 부흥이 있을 때 우리 교회는 4세기 이후의 교회의 전철을 밟지 않게 될 것이다. 비록 명시적으로 제시되지는 않았지만 본 논고의 궁극적인 교훈은 이와 다름이 없다고 믿는다.
참으로 귀하게 우리를 깨우셔서 부흥을 사모하며 기도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이 일을 위해서 헌신하시는 박용규 교수님께 더하시길 빌며 논평에 가름한다.
출처 : 한우리성경강해
글쓴이 : 한우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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